64화. 고양이와, 사람들
“……난, 구미호가 아니잖아.”
“비슷한 무언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서는 구미호가 가장 자신과 비슷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해인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곁을 뛰어가는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강은 항상 너무 앞서 나간다니까.”
“그야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으니까.”
“발상은 좋았는데, 안 될 거야.”
그의 아이라면 여자아이가 좋겠다. 분명 예쁜 아이일 테니까.
“……그럼 셋을 낳으면?”
“이보세요, 선생님. 선녀와 나무꾼을 너무 보셨네요.”
어떻게 들으면 프러포즈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더니, 이번엔 진지한 얼굴로 구전동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시율이었다.
그러니 해인이 웃을 수밖에.
“안 되는 건가?”
“……아마 불가능할 거야.”
“아마라는 건, 될 수도 있다는 거 아닌…….”
“아, 정정할게. 절대 안 될 거야. 확실해.”
해인은 검지를 세워 흔들며 강한 부정을 해 보였다. 그에 시율은 대놓고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아이를 셋 정도 낳으면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일에 정말 희망을 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귀엽고, 어찌 보면 가여웠다.
“그렇군…….”
“미안.”
안 되는 이유는, 우선 본능적으로 이 몸이 뭔가를 잉태할 순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더불어 이 몸은 발정기도 없고, 배란도 없고, 당연히 생리도 없었다. 아이가 생길 리 없었다.
만에 하나 가능하다고 해도, 남은 시간이 그만큼 넉넉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고작 다섯 달 정도 남았다는 걸 알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짧을 거라고는 여기지 않을 텐데.
“그냥 혹시나 해서, 그래서 물어본 거야. 전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지금 열심히 제 눈치를 살피는 남자가 해인은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그를 보면 드는 생각은 그뿐이었다.
“음…… 아쉽다. 강의 아이라면 분명히 엄청 귀여울 텐데.”
“……뭐야, 가능하다면 낳아줄 생각은 있고?”
밝게 말했더니, 시율이 어딘가 우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해인이 훨씬 많이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있어.”
“…….”
“여자아이가 좋아.”
살면서 누군가와의 결혼을 상상해본 적이 없는데, 그와 자신의 아이를 상상하는 일에는 서슴없다니.
그 마음에 다른 답이 있을 리 없었다.
“강, 이제 그만 돌아가자.”
그러고 보니 그와 정말 신혼부부 같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온 시율은 저녁 준비로 제법 분주해졌다.
막힘없이 하고는 있었지만 파티식의 요리는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갔고, 구경하던 해인은 고양이 손이라도 보태자 싶어 팔을 걷어붙였다.
물론 정말 고양이 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씻으면 돼?”
“응, 써는 건 내가 할 테니까 그것만 해줘.”
기껏해야 채소를 씻고 계속 저어야 하는 음식에 손을 빌려주는 정도였지만, 시율과 나란히 요리를 하고 있자니 이건 이거대로 즐거웠다.
“주인이 떠나는데 이거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난 그 녀석이 정말 아프리카에 가고 나면 네가 얼마나 울지 걱정이야.”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시율이 진지하게 받아쳐서 해인은 뜨끔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
“계란 프라이 같은 눈을 하고는 엉엉 우는 거 봤거든.”
“울먹이기만 했다, 뭐!”
하여간 기억력도 좋지.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씻고 있던 양배추가 으스러져 버려서 해인은 얼른 제 입에 넣고 씹었다.
증거인멸을…….
“다 봤어.”
“윽…… 주인은, 그냥…… 길러준…… 정이랄까. 그런 거란 말이야.”
“뭐, 아무튼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말이야, 그런데도 질투가 난단 말이지. 그 녀석이 가거나 말거나, 네가 다른 남자 때문에 운다는 자체가 싫어.”
해인은 꼼지락꼼지락, 소심하게 양배추를 씻었다. 시율이 유일하게 해인을 탓하는 게 있다면, 태일에게 너무 친하게 구는 것이었다.
그가 마른 행주에 손을 닦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도 길러주는 여자가 생기면 네가 내 마음을 좀 알려나.”
……그거, 상상해보니 엄청 싫은 기분이기는 했다.
미모의 여주인이 섹시한 옷을 입고, 고양이 버전의 시율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떠오르자 심기가 꽤나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처럼 고양이와 사람의 모습을 왔다 갔다 하는 케이스가 또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끄응…….”
“내가 고양이였으면 인기 좀 있을걸?”
그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분명 미묘일 테니까. 그것도 엄청 도도하고 시크한 타입. 상상이 간다는 점에서 불현듯 무언가가 떠오르는 해인이었다.
“맞다! 강은 전생에 자기가 뭐였을 것 같아?”
“……뜬금없이 무슨 소리래?”
“전생 말이야!”
“전생 같은 건 안 믿어.”
너무 단호한 대답이었다. 하긴 믿는다고 해도 자신의 전생을 아는 사람은 없을 터.
해인은 그와 제 접점이 궁금했다. 만약 전생에도 연이 닿아 있다면, 조금은 안심이 될 것 같은데.
다시 어떡하든 만날 거라는 확신이 들 것 같은데, 사신이 언질했던 그 영혼이 시율이 아니면 어쩌지 싶었다.
조마조마한 얼굴을 하고 있자니 시율이 덧붙여 말했다.
“원래는 안 믿었지.”
“……그럼 지금은 믿어?”
“뭐, 이공계인 내 입으로 말하긴 웃긴데…… 널 만나고부터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엣, 내가…… 좀 괴상망측하긴 하지?”
미스터리하고, 비과학적이고, 또…….
“아니. 그런 이야기 아니라 뭐랄까, 오래전부터 널 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거든.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빠질 수 있나 싶을 때가 있어.”
그런 뜻이었구나. 해인은 말하며 뭔가를 썰고 있는 시율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시선을 느꼈는지 시율이 저를 돌아봐서, 기쁜 듯 웃었다.
“나도 그래.”
웃음이 가득 든 소리를 냈더니, 시율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키스하려는 모양이었다.
해인은 천천히 눈을 감고 그가 닿기를 기다렸다.
“……?”
기다리다가, 그가 닿을 기색이 없어서 한쪽 눈만 슬쩍 떠본 건 몇 초쯤 지나서였다. 시율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벌써 키스에 질린 걸까? 이 남자를 아주 그냥…….
“비상.”
“응?”
“태일이 녀석, 지금 집 앞이래.”
그거 확실히 키스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해인은 당장 시율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쌩 소리가 날 만큼 재빠른 동작이었다.
“……이래서 내가 녀석을 예뻐할 수가 없다니까.”
부엌에는, 불만스러운 시율의 중얼거림만 남았다.
***
씻다 만 양배추나, 반쯤 썬 파프리카로 볼 땐 수상한 현장이기는 했다.
“형님, 혼자 하고 계셨던 것 맞죠?”
“으음.”
“어째…… 뭔가, 평소랑 다르게 이것저것 어수선한 느낌인데요.”
조금만 더 멍청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시율은 태일을 보면서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식 좀 싸주려고 넉넉히 6인분 정도 하고 있거든. 그래서 그럴 거다.”
“아하.”
“넌 늦는다더니 벌써 왔네.”
“혼자 준비하고 계실 것 같아서 서둘렀죠. 뭐라도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태일은 비닐장갑을 끼고 해인이 맡고 있던 자리에 그대로 끼어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고양이로 변하는 데 성공한 해인은 소파 위에서 겨우 숨을 돌리고 있었다.
변신은 태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도어락을 누름과 거의 동시였다. 그야말로 십년감수한 해인이었다.
“네 친구들 언제쯤 온댔지?”
“하은이는 6시쯤 도착할 것 같다고 했고, 기도는 6시 30분까지 온다더군요.”
“그 정도면 여유 있게 되겠네.”
“……저기 형님, 며칠 전에 하은이가 형님을 찾아갔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해인은 긴장으로 바짝 선 털을 겨우 가다듬어 놨는데, 태일의 말에 털이 다시 거꾸로 치솟고 말았다. 이건 기겁했을 때의 반응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긴 시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출국하기 전에 인사드릴까 해서 병원에 들렀다가…… 우연찮게, 병원 분들이 대화하는 걸 들었어요. 아니, 그냥 물어보시더라고요. 형님 여자 친구 본 적 있냐고.”
“그런데?”
“못 봤다고 했더니…… 그, 울면서 왔던 아담한 쪽이랑, 모델처럼 잘 빠진 이하은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누가 형님 여자 친군가…… 그런 이야기를…….”
“아담한 쪽이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율은 병원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한 게 불쾌한지 매의 눈을 하고 있었다.
“이하은은, 그냥 나한테 뭘 부탁하러 왔었던 거야.”
“오늘 볼 텐데 왜 굳이 따로 찾아가서…….”
“네가 알 필요는 없어. 비밀로 하기로 했거든.”
“……그렇습니까.”
“애인과의 19금도 이하은이랑 전혀 상관없어.”
해인은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두 사람 곁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아,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은이가 그럴 리도 없고……! 제 말은 그냥…… 하은이한테, 제가 모르는 심각한 고민이 있는 건가 해서…….”
제가 생각해도 질문이 이상했던지 태일은 얼굴을 붉히며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시율과 하은의 접점이라면 자신뿐이라는 걸 알아서 두 사람이 단둘이 만났다는 게 상당히 의아한 모양이었다.
“하은이가 요즘 힘들어 보였거든요. 제 일정이 확정된 뒤로 더 그래 보여서…… 형님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나 싶어서…… 궁금했어요. 그뿐입니다. 죄송해요.”
“알면 됐고.”
“제가, 요즘 제정신이 아니긴 한가 봅니다.”
“……아주 둘이 서로 걱정하느라 바쁘구만그래.”
시율의 시큰둥한 말에 태일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는 그 말에 어렴풋이, 제 예상대로 저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힌트는 준 시율은 아주아주 못마땅한 목소리를 냈다. 답답해 죽겠다는 투였다.
“이 자식, 너는 그렇게 신경 쓰이면 고백이라도 하든가.”
“……예? 진심이세요?”
“아니! 농담이야!”
반어법을 못 알아들을 만큼 백치는 아니었고, 태일은 제 미련이 저도 웃긴지 씁쓸한 얼굴로 중얼댔다.
“……약혼자가 있는걸요.”
“젠장, 그러거나 말거나 내 여자는 내 여자지.”
험하게 이를 가는 모양새가 시율은 태일의 뒤통수를 한 대 쳐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형님은,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면…… 빼앗아 오실 겁니까?”
“찾았는데 결혼식 중이면 데리고 도망칠 거다.”
“……형님이 그러는 건 상상이 안 가는데요.”
“결혼해서 남편이 있으면 다시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릴 거고. 애가 있으면 애까지 데리고 살 거다. 됐냐.”
그는 진심이었지만, 태일은 저를 위로하려는 농담이라고 여기는지 나지막이 웃고 있었다.
해인은 곁에서 그 모양을 지켜보며 만에 하나 저를 좋아했던 게 태일이라면, 영원히 이뤄질 일은 없었겠다고 생각했다.
새삼…… 사랑하는 사람이 시율이라서 다행이었다.
“사실, 한 번쯤 좋아한다는 말을 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긴 했죠.”
“생각만 하면 이뤄지냐? 마법이게? 했어야지.”
“그러게요.”
“……답답하긴.”
동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해인은 얘기하면서도 잘도 칼질하고 볶는 두 남자를 구경했다. 어째 태일까지 저보다 요리를 잘하는 것 같았다.
“만약, 이하은이 널 좋아한다면 빼앗아 볼 욕심은 있고?”
“절 좋아한다면야. 얼마든지.”
그런 웃긴 농담은 처음 듣는다는 듯, 피식 웃어 버리는 태일이었다. 반면 해인은 정말정말, 입이 간지러워졌다. 말하고 싶어서.
“하지만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깁니다. 무엇보다 그 남자가 저보다 더 훌륭하거든요.”
“약혼자? 무슨 태준이었는데…….”
“한태준, 저랑 하은이의 대학 선배기도 합니다.”
“……뭐야, 아는 사이였어?”
해인은 두 번인가 마주친 적 있는 이하은의 약혼자를 떠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만만한 남자였던 건 분명했다.
“대충요. 하은이가 미스 세원대로 뽑혔을 때, 미스터 세원대로 뽑힌 사람이에요.”
“……세원대 커플이면, 인재는 인재네.”
그걸 제외하더라도, 확실히 선남선녀 커플이었다.
“그 사람, 하은이를 오래 짝사랑했어요. 과에 모두가 알 만큼 하은이한테 노력했고요. 제가 알기로만 대학 다닐 무렵부터 쫓아다녔으니까…… 몇 년이나.”
“하지만 네가 더 오래 좋아했잖아.”
“……그건 의미가 없어요. 하은이가 좋아한 건 그쪽인걸요. 그걸로 끝입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그게 명언은 맞는 모양이었다.
“……거참, 문제가 많네.”
“미양.”(정말 많아.)
“네?”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너 이것도 썰어라. 전부.”
해인이 잠깐 보자는 곁눈질을 했고, 시율은 태일에서 일감을 잔뜩 맡기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고양이의 뒤를 따라서.
***
상을 차린 곳은 태일의 집 거실이었다.
바닥에 둘러앉아서 먹어야 했고, 파티라고 부르기엔 장소가 조금 조촐했지만 적어도 준비된 음식만큼은 호화로웠다.
하은이 먼저 도착했고, 이내 술을 가지고 도착한 기도도 입을 다물질 못했다.
“대박…… 이걸 다 형님이 하셨다고요?”
“음.”
“상다리 부러지겠네. 집에서 파티라기에 뭘 잔뜩 배달시키려나 했더니…… 엄청 본격적인데요? 정말 공짜로 먹어도 되는 겁니까, 이거?”
“어쩌면…… 이렇게. 세상에, 저보다 요리를 잘하시겠어요.”
뜻하지 않게 이하은의 기를 죽인 시율이었고. 해인은 그 마음에 적극 공감했다. 새삼 버려버린 자신의 생일 케이크가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의 계획도.
별건 아니었다. 다만 시율이 들어줄지 말지가 문제일 뿐.
해인은 내내 시율을 노려봤고, 시율은 그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쥐를 잡아 오겠다는 협박이 통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가 심하게 동요하고 있는 건 분명했지만 말이다.
앞으로 계속 해인의 입술에 키스할 예정이라면 들어줄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해인은 쥐 같은 건 잡을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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