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고양이 둘
한 침대 안에서 어울리는 일은, 따듯하지만 숨 막히고, 기분 좋지만 때로 부끄럽기도 했다.
그건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자, 서로를 느끼는 데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살가운 온기로 따듯한 밤에 해인은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이런 밤의 의미를 알게 됐다.
사랑이 형체를 가졌다면 그건 바로 이 순간과 가장 흡사하리라.
“강.”
“응?”
“있잖아…….”
해인이 베개를 안고 엎드린 채 반쯤 잠기운에 빠져 중얼거리자, 시율이 해인의 맨어깨 위로 자잘한 키스를 해왔다.
“뭐야, 간지러워.”
“그럼 얼른 말해봐. 뭔데?”
슬쩍 밀어내는 손에도 시율이 키스를 해와서 키득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단단한 피부를 어루만지는 게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전에는 왜 몰랐을까.
그건, 이렇게 누군가에게 자신을 허락해본 적이 없어서이리라.
그를 만나기 이전에 저는 온전히 저만의 것이기에, 나누거나 함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만져진다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고, 그가 저를 따듯하게 바라보는 게 마음에 안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몰랐으니까.
이제 와 생각해보니, 몰랐던 것투성이였다.
“내 삶은 말이야, 그리 길진 않았지만…… 강을 만나기 전이랑 후로 나뉠 거야. 많은 게 달라졌거든.”
“그거 엄청난 사랑 고백이네.”
“그렇게 되나?”
“으흠.”
시율이 목을 울리며 등 뒤에서부터 나른한 동작으로 해인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해인은 얌전히 끌려가 안기는가 싶다가…… 으르렁댔다.
“안 돼! 떨어져, 떨어져.”
그가 자신을 힘껏 끌어안는 데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으니까.
단호하기가, 방금 기분 좋게 가릉거리던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시율은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얼굴이었다.
“어째서?”
“좋은 건 좋은 거지만, 또 하진 않을 거야!”
“왜?”
“그야…… 하, 한 번만 하면 되잖아!”
몰라서 묻나, 이 남자? 해인이 정색을 하며 방어 태세에 들어가자, 시율이 진지한 얼굴 그대로 토라지기 시작했다.
잘생긴 얼굴에 안 어울리게 볼을 부풀리기까지.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부족한데.”
“안 부족해!”
“매우 부족해.”
“나는, 강이 비쩍 마르는 걸 보고 싶진 않단 말이야. 알잖아!”
안 되는 이유를 뻔히 알면서 달려드는 이유가 대체 뭘까. 자기가 불나방도 아니고 말이다.
해인은 벌써부터 태일이 떠난 뒤가 걱정이었다. 지금도 이런 시율인데 둘만 남게 되면 얼마나 더 강해질지 상상도 안 갔다.
“아무튼! 절대 안 돼!”
“……보양식을 먹을게.”
“그건 더 안 돼! 지금도 충분히…….”
“풉.”
물론 해인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이게 이율배반적이라는 건 알았다. 그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그가 보양식을 먹는 건 더 무서웠으니까.
그도 그럴 게 지금도 이렇게 기운이 넘치는데, 그런 걸 먹었다간…… 상상만 해도 목이 바짝 말라왔다.
“크크큭!”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듯 시율이 크게 웃음을 터트려서 해인은 얼굴을 붉게 물들일 수밖에 없었다.
“강은……!”
“으흠?”
“강은 왜 이렇게 밝히는 거야!”
“지금 널 왜 이렇게 좋아하냐고 물어보는 거야?”
기분 좋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더는 화를 낼 수 없게 됐다.
해인이 이 남자에게 당해낼 수 없는 이유 첫 번째는 그가 매사 필요 이상으로 사람을 설레게 하기 때문이었다.
“말이나 못하면……!”
시율은 투덜대면서도 멀리 가진 않는 해인을 붙잡아 제 품에 가뒀고, 해인은 일단 잡혀줬다.
그가 목덜미 뒤편에 느린 입맞춤을 해서 움찔거리긴 했지만, 아직 도망치진 않았다.
시율은 개인적으로 해인의 이 도망갈까 말까 궁리하는 순간을 좋아했다. 보고 있으면 재미있었으니까.
물론 귀여운 것도 있었다.
“그럼, 이렇게 안고만 있을게.”
“……거짓말.”
“정말이야. 참아볼게.”
강시율은 너무 섹시한 남자였고, 유난히도 다정한 순간을 꼽으라면 딱 지금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인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이야…… 정확하게, 몇 살이야?”
참 흔한 질문인데도 해인은 순간 뜨끔, 하며 몸을 굳혔다.
“에…… 나?”
“그럼 나겠어? 아까 그리 오래 살진 않았다고 했잖아. 그래서 궁금해졌거든.”
이건, 해인이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종류의 질문 중 하나였다. 아무리 베갯머리송사라고 해도 말이다.
의뭉을 떠는 수밖에 없었다.
해인은 시율이 자신의 등을 쓰다듬게 둔 채로 베개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못 들은 척 잠들려는 시늉을 했다.
딱, 딴청 부리는 고양이의 작태였다.
시율은 그것으로 충분히 해인에게 대답할 의향이 없음을 알아챘지만 오늘은 조금 집요했다.
“태어난 곳은?”
그가 재차 물어왔다. 자신의 키스 자국이 난 어깨를 꽉 그러쥔 채. 돌아누워 보라는 손이었다.
날 좀 보라는.
해인은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고, 시율을 올려다봤다. 무감한 얼굴이었다.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아니면…….”
“대답을 못 하는 거지.”
“……그렇군.”
이런 대답으로 납득을 해준다니 슬픈 일이었다.
가장 슬픈 건 이제는 이런 의뭉을 떠는 데도 익숙해진 자신이었고.
“뭐라도 말해줘.”
“나도 그러고 싶어.”
해인은 조금 웃으며 한 손으로 상체를 일으키고 다른 손으로 시율의 목을 끌어안았다. 시트에서 빠져나오며 그에게 키스했다.
그는 이게 해인 나름의 사과라는 걸 알았다.
“뭐든 말해봐. 그래야 널 찾을 수 있잖아.”
“……응.”
“흔적을 남겨줘.”
“노력할게.”
시율의 표정이 한 대 맞은 고양이인 양 뚱해졌다.
영혼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엄청 진심인데 말이다. 물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긴 하지만.
“……봐, 보라고. 지금 우리가 다른 사람들 걱정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시율이 지금 말하는 남은 하은과 태일이었다. 해인이 자꾸만 신경 쓰는 그 커플.
그가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기 싫어하는 이유 중에는 본인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당장 자신이 힘든 연애를 하고 있는 탓도 있으리라.
이런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심적으로 썩 여유 있는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확실히, 우리도 힘들긴 해.”
“잘 아는군그래.”
“응, 하지만…… 우리보단 가망이 있잖아.”
“…….”
“그런 거야, 강.”
해인이 먼저 그에게 입술을 댈 때는, 대개 아주 슬플 때였다. 꼭 지금 같은.
***
한산한 낮, 집에 있는 건 일찌감치 퇴근한 시율뿐이었다.
해인은 거실을 뒹굴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근래 공들여 그리는 건 주로 시율의 초상화였다. 이렇게 손으로라도 계속 그리다 보면, 나중에 손이 그를 기억하진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몸이 바뀌더라도, 기억이 기억해주진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바람.
기억을 지우더라도, 기억의 밑바탕에는 그가 그림 져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바람.
제가 생각해도 우습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해인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스케치북 가득 시율을 그려 나갔다. 벌써 두 권째 스케치 북이었다.
“또 날 그리고 있어?”
“응.”
“멋진데.”
“그래도 전보단 낫지?”
인물화가 전공이 아니다 보니 처음엔 실패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제법 그가 가진 특유의 느낌을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어딘가 오만하고, 얄밉지만 섹시한 남자. 나른한 시선 속에 여러 생각이 들어서 그리기 힘든 남자.
색으로 비유하자면 블루. 해인이 아는 한 가장 까다로운 색.
“내가 어째 갈수록 벗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으엥?”
시율이 턱을 만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고, 해인은 그제야 아차 싶어서 제가 그린 그림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릴 때는 집중하고 있느라 몰랐는데, 이제 보니 근래로 올수록 그림 속에서 점점 그를 벗기고 있었다.
심지어 근육은 날이 갈수록 섬세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얼굴만 그리다가, 그다음엔 흉상, 지금은 반신. 조만간 전신 누드를 그릴 작정이었을까?
“미, 미안…….”
“그게 마음에 든다니 나야 좋지만.”
“……우씨! 강이 시도 때도 없이 벗으니까 그렇잖아!”
부끄러워서 그를 탓하긴 했지만 사실은 제 잘못이 맞았다.
아무리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그렇지, 무아지경으로 그리고 있는 게 그의 누드라니.
뭐, 이런 변태 같은 여자가 다 있는 걸까. 이젠 제가 시율을 변태라고 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보다 말이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뭔데?”
“나보단 널 그려보는 건 어때?”
“그거…… 해봤는데, 안 되더라고.”
거참, 안 되는 것도 참 많아. 시율이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해인이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자 곧장 말을 돌렸지만.
“뭐…… 심심하면, 같이 마트에 가지 않을래?”
“마트에? 내가?”
“저녁에 있을 태일이 녀석 파티 때문에 장을 봐야 하거든. 너 뭐라도 돕고 싶어 했잖아.”
“어, 그럼 갈래!”
마음 같아서는 요리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제 요리 솜씨가 참담하다는 걸 시율에게 새삼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었다.
해인이 반색하며 얼른 몸을 일으켰고, 시율은 금세 나쁜 일을 까먹는 게 기특한지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착하네, 좋아. 얼른 정리하고 가자고.”
“응!”
***
마트에 오는 건 왜 즐거울까.
그건 뭔가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해인은 카트를 밀며 신 나서 물어봤다.
“그런데 메뉴가 뭐야?”
“음, 아직 생각 중인데. 재료 상태 봐서 정할까 하고.”
“오호라!”
“……연어 샐러드랑 케이준 샐러드, 둘 중 뭐가 좋아?”
“난 케이준!”
해인이 두 눈을 반짝이며 한쪽 손을 높이 들어 보였고, 시율은 웃음을 터트리며 가까이 다가와 해인과 함께 카트를 끌었다.
남들이 보면, 그냥 사이좋은 신혼부부 같을지도 모르겠다.
“새우갈릭버터구이랑 갈릭치킨봉 중에서는?”
“새우! 샐러드가 케이준이니까!”
“그럼 그걸로 하지, 뭐. 주메뉴는 홍합그라탕으로 할까 하는데. 어울리는 와인도 있고, 무엇보다 만들기 쉬우니까.”
“스파게티 같은 건?”
“그 녀석 시골에서 홍합을 엄청 가져왔더라고.”
맞아. 잰 고등어 같은 것도 있었지. 해인은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4명이서 먹기에 이미 충분한 메뉴 구성이었으니까.
“그거랑 간단하게 컵케이크 좀 굽고, 양배추가 많으니까 양배추 롤이나 할까 하는데.”
“……침 나온다.”
“흘리진 마시구요, 아가씨.”
곁에선 시율이 입가를 닦아주는 시늉을 해서, 해인은 앙! 하고 손가락을 깨물려는 시늉으로 맞받아쳤다.
그러고 있다 보니, 그냥 즐거워졌다.
이제 보니 그와 단둘이 데이트 비슷한 걸 하고 있어서 이렇게 기분이 들뜨는 것 같았다.
장도 혼자 보면 이렇게 즐겁지 않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강은 그거 다 할 줄 아는 거지?”
“당연하지.”
“짱이다!”
“그럼, 나한테 시집올래?”
……하여간 설레게스리 이 남자, 틈을 놓치질 않는다니까. 해인은 시율을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럴까?”
해인이 한 소리 할 것 같은 얼굴을 했다가 배시시 웃어버려서일까. 시율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그가 으슥한 목소리로 묻는 건, 결국은 제가 시율을 이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키스해도 되나.”
“당연히…… 안 되지.”
공공장소잖아, 이 남자야.
둘은 지하 1층 식품관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였다. 그리고 이미 충분히 남들이 눈꼴 시릴 만큼 붙어 있었다.
***
장을 보다 보니 주변엔 아이를 데리고 장을 보러 온 주부들이 대부분이었다.
남녀가 나란히 장을 보는 케이스는 상당히, 드물어 보였다.
“그나저나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신혼부부 같네.”
시율은 해인이 하려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데 꼭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인의 등 뒤로 바짝 다가와서 해인이 밀고 있는 카트를 굳이 함께 밀고 있었다.
제 손 위를 덮은 시율의 손을 보자니, 주변 보기가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러면 그냥 신혼부부가 아니라…… 업그레이드 닭살 신혼부부 같잖아!
“강…… 너무 가까워.”
“음, 그야 넌 감시가 필요하니까.”
“그래서 붙는 거 아니잖아!”
“그렇지, 그냥 우리가 이렇게 닿는 게 좋을 뿐이지.”
말을 말자, 말을. 이 남자의 애정공세는 너무 달아서 혀가 쓸 정도니까.
해인은 결국 툴툴대면서도 시율을 밀어내는 건 포기했다. 얼추 장을 다 본 것 같았고, 카트도 이젠 혼자 밀기에는 너무 무거워져 있었으니까.
카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시율이 뒤에서 감싸 안은 채로 귓가에 속삭여 물었다.
“지금 든 생각인데, 선녀와 나무꾼 알아?”
“알지?”
“설녀 신화는?”
알기야 알지만, 이런 건 또 왜 물어보는 걸까.
시율은 멀쩡하게 생겨서 걸어만 다녀도 곧잘 여자들의 시선을 샀지만, 사실은 엄청난 비밀이 있었다.
바로! 이 남자의 방에 가면 책장 가득 요괴 관련 책으로 들어차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오컬트라고 불리는 서양의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책들까지 사들여서 읽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나라에는 없는 책들을 찾다 보니 원서도 있었는데, 사전도 없이 잘도 읽었다. 의학서적에 비하면 쉽다나?
그걸 존경해야 하는 건지 질색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왜 또 그런 건.”
“그 이야기들에는 공통 사항이 있거든.”
“음? 예쁜 여자가 나오는 거?”
“아니.”
또 어려운 문제 내려고…… 나는 그거 공부 안 한댔잖아! 불만스러워지는 해인의 눈길이 쏠린 건 시율이 저기 좀 보라는 듯 눈짓하는 방향이었다.
어린아이 둘이 뛰어가고 있었다.
혹은 아빠의 목에 목마를 탄 아이도 있었다.
“아이가 생긴다는 거.”
“……에…….”
“어떤 이야기에서는, 사람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되기도 해.”
해인의 입술이 점점 벌어졌다.
이 남자는 정말……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구나. 저를 떠나지 못하게 할 생각.
“구미호도 사람이랑 아이를 낳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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