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밤 말은 고양이가 듣고 낮말도 고양이가 듣는다
이하은은 자리에 앉으며 얼떨떨한 듯 말했다.
“사실은 이야기를 들어주시긴커녕…… 절 내쫓으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건 거의, 정답이었다.
오늘 해인이 시율과 함께 출근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병원에 해인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시율이 오늘 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더라면 어림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시율은 저를 게이라고 여겼던 여자한테 그리 친절할 타입은 아니었다.
“이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그, 그러게요.”
“제가 이래 뵈어도 꽤 신사적이거든요. 뭐, 아무한테나 그러진 않지만.”
결국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사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
“오늘……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일전의 무례를 꼭 사과드리고 싶어서…….”
“그거라면 됐다고 했잖습니까.”
“공연 이후로 뵙지 못해서, 다시 얼굴 뵙고 말씀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
“이봐요, 이하은 씨, 그날 일이라면 정말 됐습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하여간 시율은 사람 긴장시키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었다. 예전엔 어땠던 지금은 제게 그러지 않는 다는 게 해인으로선 감사할 정도였다.
당해본 경험이 있는 탓에 이하은이 시율을 어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런데도 굳이 찾아와서 동공지진을 내며 하려는 말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고.
“……죄송해요.”
“그건, 정말, 됐습니다. 이제 그만 얘기하죠.”
강시율의 됐다는 건 전혀 안 괜찮다는 소리로 들려서 말이지. 해인은 책상 위가 번잡스러워지자 시율의 무릎 위로 자리를 옮겨갔다.
본인은 알지 모르겠는데, 무릎 위로 올라오는 검은 고양이를 우아하게 집중해서 쓰다듬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악당 같은 구석이 있었다.
작은 동물을 예뻐하는 모습이라면 보통은 대하기 편한 이미지이기 마련인데 말이다.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용서하세요.”
“이하은 씨, 당신이 태일이 절친한 친구기도 하고, 앞으로 또 볼 테니 웬만해서는 좋게 대하고 싶지만 말입니다.”
“……네?”
“당신 마음 편하자고 사과나 하러 온 거라면, 그만 꺼져달라고 하고 싶네요.”
살벌하긴.
그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겠지만, 해인은 시율이 호의적이기만 하다면 이하은과 태일의 관계도 어떻게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시다시피 호의는 둘째치고 아주 비협조적이긴 하지만.
해인은 시율이 사나워지는가 싶자 일단 그의 무릎 위에 꾹꾹이를 시작했다.
‘이보세요, 남친 님, 여자한테 그러는 거 아니거든요. 화난 심정은 이해하지만 말이야. 뭐, 살다 보면 게이로 오해받을 수도 있…… 지 않겠어?’
썩 자신은 없었지만 일단 시율을 달래보는 해인이었다.
이하은이 오들오들 떨어서인지, 해인의 그런 노력이 가상한 덕인지 시율은 조금 성질을 누그러트렸다.
인상을 팍, 쓴 채 턱을 괴긴 했지만 말이다.
“다 됐고, 겨우 그 얘기를 또 하겠다고 찾아온 건 아닐 테니까 빨리 용건을 말하고 가줬으면 좋겠군요. 나도 일을 해야 하니까.”
“……그.”
“용건이, 뭡니까.”
진료실 안에 두 사람과 태평한 고양이 한 마리 사이로 팽팽한 공기가 흘렀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10분이라는 걸 모르는 이하은은 어렵게도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어려운지 두 손을 꼭 모아 쥔 꼴이 제법 가상했다.
“부디…… 일전의 일은 잊어주세요!”
“당신이 태일이를 게이로 생각한다는 거?”
“……선생님은 아시는 줄 알았어요.”
“그야 커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당연히 그러셨겠지.”
“……모르셨다면 태일이한테는 아는 척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알고 있다는 것도 비밀로 해주세요.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뭐가.”
“태일인 힘들여 숨기고 있는데, 제가 멋대로 커밍아웃 해버린 셈이니…….”
그놈의 게이 소리, 이렇게 답답할 때가 또 있을까.
웬만하면 참견하고 싶지 않은 시율이었지만 이것만은 너무 말도 안 되는 오해여서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를 갈며 낮게 읊조렸다.
“미안하지만 난, 녀석이 게이라고 전혀 생각 안 합니다.”
“네?”
“게이, 아니라고. 그거 당신 착각 아닙니까? 바보 같은 오해.”
나이스, 강시율! 역시 내 남자 친구! 못 하는 말이 없네!
해인은 모처럼 시율의 막말이 마음에 들었다.
사이다를 들이켠 기분에 기쁨의 귀 파닥파닥을 하고 있자니, 이하은이 다시 고구마를 먹여줬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워낙 잘 숨기고 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게이가…….”
“대부분의 그쪽 분들이 성향을 숨기고 사시더라고요. 우리나라가 그런 방면에 워낙 폐쇄적이다 보니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더군요. 먼저 말하지 않는다면, 지켜주고 싶어요.”
그녀는 정말이지 꿋꿋하게 믿고 있었다.
답답함에 시율은 고개를 내둘렀고 해인도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하은에게 그런 눈치가 있을 리 없었다.
“전 15년 넘게 태일일 봐왔어요. 제 말이 맞아요.”
“15년이라, 30년 넘게 보고 사는 가족들 간에도 오해는 생기는 법입니다.”
“태일인…… 살면서 한 번도 애인이 없었어요. 그렇게 멀쩡한데도요.”
“그래도 아닌 것 같네요.”
“……좋아한다는 여자는 많은데도, 아무도 사귀지 않았어요.”
“취향이겠지.”
강력한 의견 둘이 맞붙었고, 해인은 이하은은 어쩌자고 저렇게 철떡같이 태일을 게이로 믿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 의문은 곧 풀렸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2학년 때였나? 선배들이 놀리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야동을 보여줬더니 비위 상한다고…… 구역질을 했대요.”
“그…… 건 개인의 취향이니까. 남자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또, 결정적으로…… 직접 물어본 적이 있어요.”
풉, 시율은 답답함에 들이켜고 있던 커피를 조금 뿜어버렸다. 아니, 그런데도 오해를 한단 말이야?
“냐앙?”(괜찮아?)
“괜찮아…… 아니, 그보다 물어봤다고요?”
“네.”
“뭐라고 물어봤습니까? 구체적으로 물어본 건 맞습니까?”
“……물론이죠. 왜 아무도 사귀지 않느냐고. 넌 여자한테, 관심이 없느냐고. 그렇게 대놓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 정도면 제대로 물어봤는데.
시율은 자꾸만 좁혀 드는 미간을 손끝으로 펴 누르며 자신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가 새삼 확인해야 했다.
“하, 뭐라고 답하덥니까.”
“없다고 하더군요.”
“…….”
“쓴웃음을 지으면서요. 전, 그때 그 웃음을 잊을 수가 없어요.”
시율이 이렇게 할 말을 잃는 건, 정말 드문 경우였다.
“아주, 아주 쓸쓸해 보였거든요…… 아직도 가끔 그 얼굴이 생각나요.”
***
진료실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고, 이하은은 자신이 어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쓴웃음이라.”
시율이 겨우 정신을 회복하고 입을 열긴 했지만 그건 헛웃음을 터트리는 수준에 가까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쓴웃음이 그 쓴웃음이 아닌 것 같은데. 단순히 좋아하는 여자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허탈해서 지은 게 아닐까 싶은데.
해석하기 나름일 테지만, 일단 시율이 지금 생각하기에 가장 큰 실수를 한 건 태일이었다.
‘그 타이밍에 쓰게 웃을 게 아니라 고백을 했어야지, 이 못난 자식아!’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 초식남을 누가 말리겠냐마는 말이다.
웬만해서는 태일을 지지하는 해인도 지금은 시율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죄송해요. 저는 그냥 모른 척해주셨으면 할 뿐이에요.”
하은이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힘든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그것참, 쉬운 부탁이었다. 한 가지 오류만 제외한다면. 시율은 차라리 이제 정말 태일이 게이였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럼 모든 문제는 해결될 텐데.
바로 무릎 위에서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든 걸 듣고, 보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냥 그런 걸로 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하하. 그래도, 단정하기엔…… 이르지 않나…….”
하지만 대충 넘어가면 이 불의를 못 참는 고양이가 그게 아니라며 밤새 귓가에 울 게 분명했다.
슬프게도 무소불위 천상천하, 유아독존 같기만 한 이 남자 강시율은, 지금 고양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도, 희망이랄까…… 미련이 남아서…… 남자 대 남자니까, 기도라면 알지 않을까 해서 그 친구를 떠본 적이 있어요. 대학에 다닐 무렵이었죠.”
“아, 김기도! 그 친구라면 나도 알죠. 뭐라고 하던가요.”
“태일이한테 제 친구를 소개해줘볼까 하는데…… 어떠냐고, 물었더니……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하더군요. 태일일 위한다면, 절대 그런 짓 하면 안 된다고…….”
시율은 해인에게 보이도록 앞에 있던 진료 차트에 한 구절 끄적거렸다.
[난 포기.]
해인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펜을 빼앗아 물고는 멀리 던져버렸지만 말이다.
“제가 너무 어려운 부탁을 드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그러셨듯 앞으로도 태일이와 좋은 관계로 지내주세요. 부디, 색안경 끼고 보진 말아주세요.”
“……그건 약속하죠. 그리고, 난 딱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감사해요! 뭔가요?”
“이하은 당신이 뭐라고 믿든, 난 녀석이 게이가 아니라고 분명 말했습니다. 그것만 기억해줬으면 좋겠군요.”
그럼 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거니까. 양심도 지켰고.
그치? 시율이 해인을 보며 눈썹을 까닥였다. 더 이상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왜, 게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그때였다. 이하은이 심각한 얼굴로 되물은 것은 말이다.
이런 역질문을 당할 줄은 몰랐는데.
‘그야 널 좋아하니까, 이 여자야!’
차마 말할 수는 없는 사실이지만.
“냑냐냐냑!”(널 좋아하니까!)
“……워워.”
“니야악!”(으갸악!)
해인이 답답함에 버둥댔고, 시율은 그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이러다 우리 고양이 또 말문을 트겠네 싶어 슬쩍 입을 막아주기도 했다
그건 가장 명백한 증거이자 유일한 해답이었지만, 아무리 막말이 특기인 시율이라고 해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 말해도 이하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남의 소중한 마음을 멋대로 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당신 요구는 알겠으니, 이 얘긴 그만합시다. 우리가 각자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 인생에 서로에게 전혀 상관없는 일이니까. 난 그만 얘기하고 싶네요.”
“아…… 네.”
모처럼 좀 도와주려던 시율은 결국 발을 빼버렸고, 해인은 제 입을 막은 손을 치우려고 애썼지만 시율의 손은 고양이 발톱에 매우 익숙했다.
해인이 예전처럼 날카롭게 공격하지 못하는 것도 컸고 말이다.
이래저래 하은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것의 진실 여부는 그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었으니까.
내내 그렇게 믿어왔고, 살아오면서 확신만 얻었다.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누군가와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눈 자체가 처음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 드네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날 귀찮게 하면서 애를 쓰는 이유 말입니다.”
“……이유요?”
“당신이 그 녀석을 이성으로 좋아해서는 아닐까 하는.”
“…….”
“틀립니까?”
“……맞아요.”
이하은은 조용히 생각했다. 언젠가 태일이 말했던 대로, 이 강시율이라는 수의사는 속일 수가 없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건 아닐까.
오랫동안 믿어왔던 어떤 일에, 처음으로 흔들림이 일었다.
“그러면서 다른 남자를 사귈 수 있다니 놀랍군요.”
“……그건.”
“심지어 내가 알기로 당신은 이주 뒤면 결혼식을 올리는데, 이러고 돌아다녀도 되는 겁니까? 당신 약혼자가 알면 참, 좋아하겠군요.”
“그 사람은…… 알고 있어요. 제가 누군가한테 미련이 있다는 걸요. 하지만 이뤄질 수 없어서 바라만 본다는 것도.”
비난을 던져주면 얼른 도망갈 줄 알고 한 말인데, 이하은은 다만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뭐랄까, 한없이 죄인 같은 얼굴이었다.
너무 잘못이라는 걸 알아서 그 일을 비난당해도 하나 불쾌해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양에 오히려 당황한 건 시율 쪽이었다.
“미안할 뿐이에요. 이상한 일이긴 한데…… 그 사람은, 항상 저를 좋아해줬어요. 보시다시피 이런 바보 같은 여잔데도요.”
“……알긴 아는 모양이군요.”
“하핫, 네. 그래서…… 그 사람이 제 어디가 좋은 건지, 사실 모르겠어요. 자신이 없거든요.”
태일이 보여줬다던 씁쓸한 웃음이 딱 저런 걸까 싶었다. 시율의 손안에서 버둥대던 해인이 얌전해진 건 그때였다.
“전 공부만 해서…… 야무지진 못해요. 사회생활을 많이 해본 것도 아니고……. 사실, 이유를 모르게 미움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분명 제가 뭔가 잘못했겠죠. 제가 맹하다는 건 잘 알아요.”
“음…….”
“세상물정 모른다는 소리도 많이 듣고요. 스스로 창피할 만큼 멍청하게 굴 때가 있어요.”
이하은은 겉만 봐서는 명문대생에, 예쁘고 집안 좋은 아가씨일 뿐이었다.
전에 태일에게 듣기로 사실 일할 필요도 없을 만큼 넉넉한 집의 외동딸이라고 했다. 전형적인 온실 속 화초 타입이랄까.
모델 일을 하는 것도 아마 태일이랑 가깝게 지내고 싶어서 아닐까, 하는 건 시율의 추측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절 좋아해줘요. 제 부족함으로 제가 힘들어할 때면 다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줘요. 그리고 자길 좋아해주지 않아도 된대요. 그냥, 곁에 있게 해달라고.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게 사랑은 아닐 텐데.”
“……좋아는 해요.”
오랜 짝사랑을 하고 있어서. 자신을 상대로 오랜 짝사랑을 한 남자는 외면 못 하는 마음, 해인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마음도 알았다.
지금이야 시율이 확신을 줘서 안정을 찾았지만, 이전에 해인도 시율의 마음을 믿지 못했으니까.
제가 그렇게 잘난 여자도 아닌데, 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짝사랑을 하는 여자는 자존감이 높을 수가 없었다.
더 나은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고, 의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만 들여다보게 되니까.
“그래서야 아무도 행복하지 못할 텐데?”
“알아요. 하지만 이런 여자인데도, 좋아한다고…… 제가 행복하면 좋겠다고 해주는 그 사람이…… 나 같고…… 그래서……. 이런, 너무 말이 많았네요. 죄송해요. 선생님이라면 뭐든 답을 아실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말을 늘어……. 엇.”
“니양. 니양. 니앙!”(맞아. 맞다고. 맞아!)
“개, 개냥아?”
“니야냐냐! 냐냐냥?”(그래!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자신이 없다고! 나만 그런 거 아니지?)
해인은 어느새 하은의 가슴께에 매달려서는, 얼굴을 파묻고는 엉엉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서로 부등켜안고 연애 상담이라도 하고 싶었다.
고양이의 몸만 아니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물론 도움 받을 일이 훨씬 많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해인의 고민은, 남친이 너무 강력하다는 점이었다. 여러 면에서!
“얘가…… 왜 이러죠?”
“……글쎄요.”
하은은 돌연 달라붙는 해인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던 도도한 고양이가 갑자기 품에 안겨들고 있지 않은가.
고양이들이 제멋대로라는 얘기는 들어봤는데, 그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이 여자, 아무래도 내 여자를 자기편으로 만든 것 같은데……’
어딘가에서 동질감을 느낀 게 분명했다. 시율은 해인이 마음이 너무 약해서 걱정이었다. 좀 더 도도하게 굴면 좋으련만.
똑똑.
“선생님? 다음 손님이…….”
“아, 들여보내세요.”
간호사가 들어왔지만 갑작스러운 고양이의 애정 공세에, 찰싹 달라붙는 걸 떼어내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는 하은이었다.
시율은 작게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해인의 등가죽을 잡아 늘려 하은에게서 떼어냈다.
“이만 가시고, 금요일에 뵙죠.”
“네…….”
***
오후 4시 무렵, 다시 시율과 단둘이 된 해인은 혼이 나고 있었다.
사탕 준다고 아무나 따라간 어린아이 취급이었다.
“대체 왜 그래. 오늘 봤으니 알 테지만 그 녀석들을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다는 거 잘 알잖아.”
“……알기야 알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 문제로도…….”
브브브브.
업무 중에는 거의 전화를 받지 않는 시율이었지만, 딱 이 시간대에 오는 전화는 받는 편이었다.
수술이 없는 한 그나마 진료가 한가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시간에 전화를 한다는 건 그걸 아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발신자를 보니, 과연 태일이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아 드는 시율의 목소리가 매우 언짢은 건 이하은에게 시달려서였다. 그리고 이게 전부 태일의 탓처럼 느껴졌으니까.
오늘따라 태일이 곱지 않게 느껴졌다.
[형님, 접니다.]
“뭔데?”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서요.]
가시가 잔뜩 박혔던 시율의 목소리가 변하는 건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이었다.
“와우, 그래?”
[……와우?]
“말이 헛나갔네. 새로 나온 수술 시뮬레이터가 너무 잘 만들어져서 그만.”
[아, 사무실에 들렀는데 회사 분들이 밤새 마셔야 한다고 집에 들어갈 생각하지 말라고 하셔서……]
“……태일아.”
[네?]
“난 네가 정말 좋더라.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 실컷 놀고 오렴.”
이렇게 속 보일 수가.
해인은 직감적으로 오늘 밤도 푹 자긴 글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율이 전화를 끊고 저를 보는 눈이 어젯밤과 같다는 게 그 증거였다.
“자, 아가씨.”
“……니에?”
“우리의 밤이 찾아왔군요.”
그 밤은 매일매일 오나 보네요. 해인은 시율에게는 보양식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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