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고양이랑 약속하기
날은 어느새 완연한 겨울이었다. 이미 첫눈이 왔고, 크리스마스가 바로 코앞이었으니까.
바람도 제법 쌀쌀해져서 이젠 외투 없이는 돌아다닐 수 없게 됐다.
“호오오.”
해인은 차가워진 손끝을 입으로 불어 녹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공중전화까지만 얼른 다녀올 생각으로 대충 걸치고 나왔더니, 그새 손끝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저야 상관없지만 시율이 이걸 본다면 한 소리 할 게 분명했다.
‘너 또 대충 입었지. 밖은 추워.’
‘하나도 안 추운걸?’
‘……보는 내가 춥다고. 안 돼.’
‘엥, 괜찮은데.’
이 몸의 장점이라면 추위니 더위니 하는 것에 매우 강하다는 것이었다.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체감하는 기온 차는 크지 않았다.
특히나 요즘처럼 몸에 기운이 넘칠 때는 그야말로 무적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재채기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시율은 해인이 얇게 입고 다닌다며 구박을 했다.
같이 어디라도 갈라치면 얼굴이 다 가릴 만큼 목도리를 둘둘, 둘러주는 건 흔한 일이었다.
“으음, 아직 자고 있겠지?”
또 혼나는 건 싫으니까. 외출했던 걸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해인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복도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오후 8시 32분.
보통이라면 잠들어 있을 시간이 아니었지만 시율은 어제 밤부터 내내, 그리고 이어 출근도 미뤄두고 하루 온종일 해인을 괴롭히더니 결국엔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 남자, 무슨 욕심을 그렇게 부리는지 잠시도 놓아주질 않아서 곤란할 정도였다.
낯부끄러운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긴…… 벌써 일어나면 그게 이상하지.”
무슨 슈퍼파워도 아니고, 사람인 이상은 나가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반면 그와 같이 기진맥진해서 잠들었던 해인은 일찌감치 먼저 눈이 떠지고 말았다. 그건 바로 양기 때문이었다. 남다른 회복력이랄까.
몸 안에 기운이 얼마나 넘치는지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고, 언제 체력이 바닥났었냐는 듯 몸은 지나치게 쌩쌩해져 있었다.
시율은 양기를 빼앗긴 덕인지 평소보다 더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그 곁에서 뒹굴거리며 시율이 눈뜨길 기다리던 해인은 결국 지루해져서 잠시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강 얼굴 보기가 좀 부끄러운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해인은 슬그머니 뺨을 붉게 물들었다.
시율을 떠올리자 저절로 그의 나른하고 널찍한 가슴팍이 떠올랐다.
이건 틀림없이 하루 종일 시달린 탓이었다.
난데없이 귓가가 간지러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좋아해. 아주 많이.’
‘그래, 사랑한다는 말이야.’
‘전부 기억해둬.’
그가 침대 위에서 내내 지독하게 속삭인 것들이 아직도 귓가에 울렸다.
눈에 박히게 봤던 그의 강한 어깨라든가, 팔뚝이라거나…… 야한 눈길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멋대로 머릿속을 떠다녀서 큰일이었다.
그리고 막상 몸에 닿아 보니, 그는 보기보다 근육질이었…….
“흠흠!”
해인은 괜스레 헛기침을 터트리며 서둘러 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집에서 나온 지 15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시율은 아직 잠들어 있으리라.
그는 자신이 나갔다 온 것도 모를 것이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
“강? 어디 가?”
하지만 아니었다.
계단에서 복도로 통하는 비상문을 열자마자, 막 집에서 급하게 나오는 시율과 마주쳤으니 말이다.
한숨 자고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저리 헐레벌떡 굴고 있는 걸까.
시율은 무슨 큰일이라도 난 사람 같았다.
해인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지만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걸 보아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너…….”
“응?”
무슨 일인가 싶어 해인은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리며 시율의 행색을 살폈다.
손에 잡히는 대로 급하게 주워 입은 듯한 패션테러리스트 같은 차림에, 맨발에 운동화를 그냥 신은 채였다.
저러고 어디 나갈 남자가 아닌데.
“무슨 일 있어?”
드물게도 그는 지금 감정의 변화가 얼굴에 전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놀람, 화남, 안심, 다시 화남…….
“그걸 몰라서 물어?!”
멀뚱멀뚱, 태평하기만 한 해인에게 시율이 냅다 소리친 건 그때였다.
그는 자신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버럭, 숨도 쉬지 않고 해인을 향해 성난 말을 쏟아냈다.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 될 것 아니야!”
“……푹, 잠들었기에…… 잠깐 이 앞에…….”
“걱정했잖아!”
평소라면 겨우 15분이었고, 넌 자고 있지 않았느냐고 박박 대들었을 해인이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유난이라며 투덜대기에는 시율의 얼굴이 너무도 화나 보이고, 또 무서워 보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한테 시율이 무서운 게 아니라, 시율이 무언가를 무서워하고 있어서.
곧장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 해.”
내가 뭘 잘못했나? 그래서 강이 화가 났나?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해인의 온 신경은 그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만 내리 쏠렸다.
귀를 접는 고양이의 심정으로 고개를 푹 하니 숙이고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해인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하자 시율은 그제야 좀 진정하는 듯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핏발 선 눈이었다.
잔뜩 여유를 잃었던 뒤라 그는 어딘가 허망한 얼굴이었다.
“하…….”
힘줄이 불뚝 선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쉬는 긴 한숨은 듣는 사람 속이 다 미어질 정도였다.
“정말이지…… 어딜 가면, 간다고…….”
손을 떨며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고, 해인은 전부 제가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날 찾으러 가려던 거구나.’
몰래 나갔던 건 어딜 가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일 뿐이었는데.
집에 전화하고 온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스리슬쩍 나갔을 뿐인데, 그 공백을 그는 최악의 사태로 받아들였나 보다.
나는 그를 이렇게나 불안하게 만들고 있구나.
“……잘못했어.”
“네가, 없어진 줄 알고……!”
겨우 안도했기 때문일까, 그의 목소리가 얼핏 떨리고 있었다.
시율이 저 때문에 이만큼 평정을 잃었다는 사실에 해인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러려고…… 어제, 안겼던 건가 해서…….”
“강…….”
“……그래서.”
그는 이토록 놀란 자신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해인이 사람이 됐을 때보다도 더 놀랐다.
곁이 허전하다는 사실에 거짓말처럼 눈이 떠졌고, 이어 텅 빈 침대와 집에 소름이 끼쳐 헐레벌떡 굴었다.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이유로 이성이 아득해졌다.
놀라 도리질을 치는 해인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는 이 순간에도 숨을 고르다가 숨이 막혔다.
없어진 줄 알았을 때는 덜컥하고 몸 안의 이것저것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눈앞에 태평하게 다시 나타난 걸 보자니, 세상에서 가장 추한 남자가 되어 제발 어디 가지 말아달라고 매달릴 것만 같았다.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어서 대신 있는 힘껏 해인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직 안 가.”
“…….”
강시율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자신의 두려움을 말할 수 있는 남자가 못 됐다.
하지만 해인이, 저도 두려운 것처럼 작은 손끝에 안간힘을 내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자, 도무지 그것에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아직 아니야. 아직 안 돼. 아직 싫어, 아직…….”
저만 두려운 거라면 어떻게 참아보겠는데, 저만 그런 게 아니라니. 이렇게 기가 막힐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 어떻게 좀 해달라고 간절히 애걸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사무치는 무력함과, 지켜줄 수 없다는 허무함만 가득해서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졌다.
“강…… 울어?”
해인은 문득 자신을 안은 그에게서 떨림을 느꼈다.
꼭 안고 있다가 더 힘주어 안는데 그게 괴로울까 봐 자신이 떨고 마는 그런.
고개를 돌려보려 했지만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안 우는데?”
“하지만…….”
“내가 왜 우냐.”
목소리도 이상해서 겨우 밀어내고 본 시율의 어그러진 표정은, 우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눈물이 안 나도 그가 운다는 느낌이 강해서 해인은 저가 울상을 지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미안, 내가 미안. 그렇게 놀랄 줄 몰랐어.”
그러자 시율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고 보여주질 않았다.
너를 떠나보낼 걱정에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어떻게 말할까.
네가 없는 시간이 벌써 걱정이라고, 이렇게 안고 있는 순간에도 그렇다고.
유령처럼 사라질까 무섭다고, 두려워 죽겠다고. 겁쟁이가 되어가는 수밖에 없는 내가 가엾다고.
그런데 원망도 못 하고 타박도 못 하는 미련한 사람이 되어간다고.
네가 나를, 바보로 만든다고.
기어코 붉어진 눈시울을 가리며 시율은 말은 잇지 못했다.
자책하는 큰 손 밑으로 울지 않으려 애쓰는 입술만 보였다.
다시금 말하는 해인의 눈가도 젖어갔다.
“강…… 울지 마.”
따라서 울먹거리며 그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내가 잘못했어. 이젠 안 그럴게. 응?”
해인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었다.
지레 겁을 먹은 것도 저였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코 소리친 것도 저였으니까.
그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말하기도 덧없을 만큼 겁이 났다.
옆자리에 비었다는 사실에 소름 끼치게 눈이 떠져서. 집안을 아무리 뒤져도 네가 없어서.
간밤에 꼭 안겨오던 게 이러려고 그런 건가 싶어서. 작별 인사였나 싶어서.
피가 생으로 마르는 느낌에 그만…….
“안 울어!”
시율은 언제 눈물을 비쳤냐는 듯 호기롭게 소리쳤지만, 해인은 이미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가 강한 척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다.
저 하나쯤 없어져도 잘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그 사실을 아프도록 느껴야만 했다.
“강이 울면, 나도…… 나도 울고 싶어진단 말이야.”
“……그럼 사라지지 마.”
기어코 그는 힘겨운 속을 토해내는 목소리였다.
막연한 불안에 힘겨워하는 남자를 보는 것이 이리도 가슴 아프다니.
저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미안하면서도 손을 놓을 수 없는 마음이라니.
미어지고 찢어지다 뭉개져버려 형체가 엉망이 되는데도, 그래도 그걸 주섬주섬 쥐고는 놓지를 못하는 마음이라니.
해인은 아주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시율에게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 포기하면 안 돼.”
“……찾으러 가도 돼?”
전에는 찾을 생각일랑 절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없어지거든 얼른 새 애인을 찾으라고 핀잔했는데.
저를 찾지 말라고. 그냥 잊으라고. 그렇게 수십 번 말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억지라는 걸 알지만 해인은 시율에게 조르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 찾다가, 이제 없나 보다 하면 안 돼. 잘 찾아서, 나 데리러 와야 해.”
작은 몸으로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매번 도망치기 바빴던 해인이 제 손을 붙잡자 시율의 눈이 크게 변했다.
말을 바꿀까 봐 얼른 해인의 손목을 붙들며 되물었다.
“정말 찾으러 간다?”
“……강, 강. 꼭 찾으러 와야 해. 꼭이야.”
“응.”
“안 오면…… 막 울 거야.”
전과 달라진 마음은, 전보다 아프고 쓰라렸다. 전보다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더 소중해졌다.
“약속할게. 계속 찾을게.”
그가 너무도 기쁜 듯 속삭여서, 해인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를 힘들게 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길 조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얼마나 힘든 바람인지 알면서도.
시율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눈물을 묻고 숨을 참는 듯 말했다.
“미안해, 힘들게 해서…….”
“널 찾지 못하게 하면, 그게 더 힘들 거야.”
“……응.”
“네가 날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을 거야.”
눈물이 참아지는 게 아닌 것처럼, 이 마음도 넘치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구나.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어.
그가 너무 좋아서, 당신이 없으면 내 앞은 평생 허전하고, 버림받은 기분일 것 같아서.
결국 잊어버린 뒤에도 기억 못 하면서도 하염없이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오길 기다리게 될 것 같아서.
되지 않은 소원을 비는 수밖에 없어.
이 손이 나를 잃어버리더라도, 다시 잡아주리라 믿고 바보같이 기다릴 거야.
그의 얼굴을 잊어도, 모습을 잊고 체취와 목소리를 전부 잊어도.
나는 계속 기다릴 거야.
바보같이 기다릴 거야.
“……강, 정말 사랑해.”
내 영혼에도 심장이 있어서, 그 주인을 기다릴 거야.
***
그 밤에는.
사랑한다고 입술로 말한 밤에는 모든 게 기꺼웠다. 그가 주는 온기도, 손길도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더 사랑스러운지 깊게 생각해야 했다.
서로 바라보자니 둘 중 하나가 없었던 때를 상상할 수 없어서, 이상한 기분이 됐다.
그와 더없이 살가운 밤에.
해인은 자꾸만 웃음이 나고, 그러면서도 눈물이 나서 웃음을 터트렸다.
울 듯 웃는 젖은 눈가에 그가 입술을 맞춰줄 때면, 지금 이 순간을 잊는 날이 올 거라는 사실에 더럭 겁이 나면서도…….
이런 마음이라면 기억나진 않을까 하는 희망이 들었다.
제가 전부 잊더라도, 그가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것만이 힘이 됐다.
만에 하나 그가 저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 이 손길 말고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그런 맹세를 했다.
어지럽고, 기분 좋은, 간지러운 그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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