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별 바라기 고양이
“……진심이야?”
“진심이지, 그럼.”
당혹스러워하는 시율의 얼굴을 가슴께로 끌어안으며 말하는 해인의 목소리는, 어딘가 새까맸다.
밝으려 애쓰는 와중에 그 밑에 깔린 그림자처럼.
마치 여린 별처럼.
해인은 새까만 자신의 안에서 미약하게 빛나는 별을 느꼈다.
“강은 항상, 날 보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잖아.”
어느 날에 한순간에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게서 뜯겨져 나와 허무하고 텅 빈 자신의 가슴속을 채워주고 있는 건, 그였다.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휘황한 달이라면, 시율은 그 곁의 별과 같았다.
달을 이기진 못하겠지만, 그보다 빛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무수하게 빛나는 것.
소중하기는 같은 것.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별이 달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랑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라고 해도,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봐도 돌아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항상 듣기만 했던 것 같아.”
해인은 시율을 다독이듯 보듬어 안았다.
돌아서는 그의 이마에 뺨을 기대며 느릿한 숨을 내쉬었다. 기대며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위해 모든 걸 버리진 못해서 미안해, 안아줄게. 그래도 사랑해.’
언젠가 달빛에 완전히 묻혀버릴 사람이어도, 지금만이라도 꼭 끌어안고 싶어. 그 마음으로 온통 심장이 가득해.
괴로움으로 돌아올 욕심이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그래.
해인이 눈으로 속삭이는 것들에 시율은 점점 힘을 잃는 것 같았다. 완고한 무기들을 하나둘 떨어뜨리고 무방비해졌다.
“이런 건…… 훨씬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했어.”
“나도 그랬어.”
그가 선뜻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해인 역시 자신이 이런 마음을 먹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마음이 커지는 만큼 가진 시간이 적게만 느껴졌다. 아주 급속도로.
“우리한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기 전에는, 그랬어.”
“…….”
시율의 표정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그러다가 해인이 다가와 제 가슴팍에 마주 안기는 순간에는 어지럽고, 숨이 막이 막히는 걸 느꼈다.
기쁘기보다는 슬펐다.
대체 얼마큼의 시간이 남았기에 이러는 걸까.
물어봤자 답을 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그는 알았다. 다만 그 시간이 제 예상보다 훨씬 짧으리라는 것만 짐작해야 했다.
자꾸 울었던 건 어쩌면, 그 죽은 짐승 때문이라기보다는 헤어질 날이 너무도 싫어서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이어 몇 가지 두려운 일들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지만.
“강, 정말 좋아해.”
“……나도 그래.”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해.”
그러나 이 순간에는, 이내 그런 생각들은 모조리 잊고 품 안의 여자가 저를 두고 죽으라면 죽자고 다짐했다.
무슨 말을 하든, 이루어줘야 할 것 같았다.
안겨오는 작은 몸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으면서는, 피가 끓어 몸이 뜨겁게 느껴졌다.
자신의 목덜미에 뺨을 묻어오는 해인이 이 순간에 오로지 제 것이라는 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됐다.
갑작스레, 긴 밤이 찾아왔다.
누가 누구의 것이던 상관없는, 결국 하나인, 그런 밤.
***
해인은 가만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고분고분 길든 것처럼 착하게 굴었다.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그녀의 목선은 지극히 가냘팠다.
새하얀 상체의 어깨와 허리는 아기의 피부를 닮은 능선이고, 엉덩이와 무릎, 발꿈치까지 이어지는 선은 흐르듯 빛났다.
그 부드러운 곡선 속에 어떤 아찔한 것이 있었다.
가린 것 없이 그대로 드러내자, 무방비하기보다는 오히려 치명적이었다.
다가오는 시율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해인은 무슨 생각인지 창가로 달려가 꼼꼼히 커튼을 닫았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 위로 돌아와 두 눈을 반짝였다.
“뭐 한 거야?”
“누가 볼까 봐.”
“여기가 몇 층인지는 알지?”
“잘 알지.”
해인은 엄지손가락까지 척 들어 보였고, 시율은 아무려면 어떠랴 싶어 웃음을 터트리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 뒤는…….
살가운 손으로 만지고, 만져졌다.
눈을 감은 채 키스했다. 모든 순간이 선명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쁨이었다.
바로 귓속으로 스미는 가는 음성에 시율은 천천히 눈을 감기도 했고, 뜨기도 했다.
조도가 낮은 방 안에서 느껴지는 건 오로지 해인뿐이었다.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그의 몸 어느 곳이고, 닿으면 뺨을 비비는 보드라운 여자.
자신에게서 솜사탕 냄새가 난다는 걸 알고 있을까?
단걸 좋아하기 때문인지, 샴푸 냄새 때문인지, 이렇게 가까이 안고 있으면 달콤한 냄새가 말할 수 없이 진하게 났다.
정말 잡아먹고 싶어졌다.
시율은 해인의 귀 밑으로 입술을 묻었다.
“음, 간지러워.”
해인의 칭얼거림에, 시율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난 건 결국 유혹당한 게 자신이라서였다.
선수를 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 봐 부를 때는 팩 무시하더니 가만있으면 와서 온몸으로 비비적거렸다.
종잡을 수가 없어서, 흠뻑 빠지는 수밖에 없었다.
시율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는 해인의 손을 들어 저를 붙잡게 했다.
그녀의 쇄골 위로 입술을 묻었다.
갈비뼈가 닿아 딱딱함이 느껴질 정도로 끌어안았다.
자신의 그늘 아래서 해인을 찾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길을 찾아 함께 시선을 얽었다.
“……좋아해?”
“좋아해.”
부끄럽게 웃는 게 보여서, 마주 보고, 입술을 겹쳤다.
시선을 섞으며 천천히 맞붙이는 입술은 아무것도 닿지 않은 듯 감각이 없었다.
너무도 살며시 스멀스멀 닿아 그것이 다른 이의 체온이라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저 스며드는 것처럼.
서로의 혀끝을 더듬었다.
톡톡, 톡. 숨 쉬듯 스쳤다. 그러다 왈칵 밀려들었는데도 놀라지 않았다.
이다지도 친밀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대화는 또 없을 거야.
사랑하고 사랑해. 느리고 깊은 이 순간의 키스는, 분명 그렇게 말하는 데 쓰이고 있다.
“키스는?”
“……키스도 좋아. 기분 좋은걸.”
둘은 떨어질 듯 말 듯 입술 살을 계속 붙인 채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에 시율이 웃음을 터트리며 자잘한 키스를 되돌려왔다.
키스, 흠뻑 받아버렸다.
“나 말이야, 전에는 이러면 후회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널 모르면 그게 더 후회될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해인은 쪽 하니 시율의 뺨에 키스하며 고백했다.
그 감촉은 약간은 촉촉하고 약간은 말랑거리는…… 엄청난 괴롭힘이었다.
시율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울컥울컥 격해지려는 자신을 겨우 다잡았다.
***
삐빅-
삐빅-
계속해서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율은, 그러거나 말거나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서,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해인은 진작 눈이 떠져서 꼼지락거리다가, 어째 요지부동인 시율이 이상해서 옆구리를 쿡, 쿡 찔러보았다.
보통은 그런 걱정 안 하겠지만, 해인은 간밤에 너무 놀란 터라…….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체력을 요하는 일인지 몰랐던 터라, 내심 걱정이 되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꼭 감은 시율의 속눈썹이 어서 떠지기만 기다렸다.
“아니지, 숨은 쉬니까 식물인간이라거나…….”
그 양기라는 거 한도가 어느 정도인 거지?
사신이 웬만해서는 안 죽을 거라고 해서 그것만 믿었는데, 생각해보니 사신이 그리 믿음직스러운 인물은 아니었다.
해인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손톱을 깨물었다.
얼굴에 찬물이라도 부어봐야 하나……?
“끼악!”
궁리에 빠져 있던 해인은 어느 순간 제 맨발바닥을 움켜쥐는 힘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범인은 당연히 시율이었다. 침대 위에는 둘뿐이었으니까.
자는 척한 거냐!
“놀랐잖아! 뭐 하는 거야?!”
“크큭,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내가 뭘?!”
“하도 뚫어져라 보기에 키스라도 해주려나 했네.”
해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시율은 기지개를 켜며 느긋하게 일어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찾아?”
“으음, 내 휴대폰 못 봤어? 조금 전까지 알람이 울리던데.”
“침대 아래 떨어져 있던데.”
분명 어젯밤에는 침대 위에 있었지만, 어느 순간 떨어졌다.
방해물이었으니까.
“여기 없는데?”
어느 쪽에 있는지 본 터라 일어나서 주워주려던 해인은 자신이 지금 시트만 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누에고치 같은 모양에서, 손만 조금 시트 밖으로 꺼내서 휴대폰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아, 고마워.”
그는 눈을 뜨자마자 어디에 전화하려는 걸까?
태일이라면 내일 점심때나 되어야 올 텐데, 연락할 데가 또 있을까? 게다가 지금은 고작 아침 7시였다.
“왜? 어디 전화해?”
“병원.”
“병원?”
“출근 못 한다고. 아픈 척해야지.”
……에, 안 아파 보이시는데요?
방금 죽었나 살았나 걱정한 게 무색할 만큼 건강해 보이는 시율이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하던 해인은,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어디가 안 좋은 걸까 싶어 사색이 됐다.
역시 나 때문에!
누에고치 모드 같은 건 신경 쓸 새도 없이 얼른 무릎으로 기어 시율의 뒤에 바짝 다가갔다.
“아, 아파? 어디가?”
열이 나나? 해인은 더듬더듬 드러난 그의 몸을 만져봤지만 문제없었다.
“응? 많이 아파?”
“……꾀병이지, 당연히.”
“엥?”
“아픈 척, 이라고 했잖아.”
“뭐…… 때문에?”
“뭐야, 끝난 줄 알았어?”
시율이 괘씸하다는 듯 물어왔다.
해인은 바보 같은 표정으로 있다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슬금슬금 무릎으로 후진했다.
시율의 양기가 딸리기 전에, 제 체력이 바닥날 것 같았으니까.
“내일이면 태일이 녀석이 오잖아. 그 전에 분발해야지.”
충분히 하신 것 같은데요. 병가 내실 것까지야…….
“안 그래?”
“안 그래!”
“난 부족한데.”
“난 만땅인데?”
있는 힘껏 도리질 쳤지만 다시 잡히는 건 금방이었다. 시율은 꽤나 욕심쟁이였으니까.
그리고 해인은, 그 욕심이 그리 싫지 않았다.
***
혹시 그 집에 아가씨가 사냐는 얘기를 들을까 봐 해인은 외출할 때면 항상 현관에 아무도 없는지를 살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나와 계단을 이용했다.
한 라인에 두 집이 있는 구조라 신경만 쓴다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딱, 500원이 필요한 해인의 외출은 대개 아주 잠깐이었다.
“엄마! 나야.”
[어어.]
“집엔 별일 없고? 해강인?”
태일의 집에서 몇 분 정도 떨어진 곳에 공중전화 위치를 알아둔 해인은 종종 이렇게 엄마가 있는 집에 전화하고는 했다.
엄마와 남동생의 안부를 짧게 묻는 식이 전부였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은 할 수 있을 만큼 눈치가 생겼다.
같이 사는 두 남자의 생활 반경과 리듬을 알아 제법 여유를 부리게 되었달까.
[우리야 잘 지내지. 넌 어디니?]
“난…… 내일 또 출국해. 물건 두러 잠깐 들어왔어.”
[으이고, 이번엔 외국이니? 하여간 못마땅해라. 너는 그 나이에 무슨 배낭여행을 한다고 그리 싸돌아다녀. 일은 하는 거야?]
“그럼, 이게 다 일이고, 자료조사라니까.”
독립한 뒤로 본래 연락이 뜸했던 터라, 이런저런 핑계가 먹히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해인이 사라진 시기가 마침 여행을 떠났던 시기와 같아서 가족들은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또 그놈의 방랑벽이 도졌구나, 하는 것이다.
[그래, 집엔 언제 오고?]
“어…… 집엔.”
[크리스마스 땐 또 친구들이랑 놀 테고, 신정엔 올 거니? 네 아버지 제산데.]
“가야지, 그럼.”
해인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제가 하는 일을 가장 많이 이해하고, 응원해주던 사람의 죽음은 상실감이 지대한 것이었으니까.
가장 즐거웠던 순간에 상실감을 맞봐서인지, 해인은 유난히 슬럼프가 잦은 작가였다.
작품에 기복이 컸고, 툭하면 방황했다.
일이 안 풀리면 히스테릭해질 때가 많았고, 가족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일찌감치 독립했다.
해인은 힘들 때면 아프다고 말하는 대신 굴을 파고 숨는 습성이 있었고, 친모도 그걸 알아서 잠자코 기다려주고는 했다.
정이 없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해인이 아는 한, 자신의 엄마는 자신과 가장 닮은 사람이었다.
[집에 안 오는 건 괜찮아. 연락이나 좀 자주 하렴.]
“그럴게.”
[누구네 딸인지 말은 잘해요.]
마음 같아서야 훨씬 자주 집에 가고 싶은 해인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제약이 너무도 많이 따랐다. 우선 시율과 태일의 눈을 피해야 했고.
사신의 주술은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했다.
일단 자신의 입으로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상태였다.
만약 누군가 해인에게 이름을 묻는다면 해인은 다름 아닌 그것을 잊어버린 양 바보처럼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다.
나이도, 주민등록번호도, 인간인 저에 대해 말할라치면 소리가 얼어버렸다.
적으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누군가 저를 보고 있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손은 움직이지 않게 됐다.
해인을 감시하는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무의식’이었으니까.
자신을 속일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바빠서 그래.”
[알았다. 그래도 너무 바쁘게 살지 마라, 너만 힘들어.]
“난 괜찮아.”
[으휴, 말도 안 듣지. 남들처럼 평범하게만 살면 다 되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그래,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
이런 불안정한 몸은 싫은걸.
빨리 본래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게 해인이 가진 가장 강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덜컥덜컥하고 무언가 걸려댔다.
시율을 떠올렸지만, 사실은 자신 하나를 추스르는 것도 힘겨운 상태였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지? 너 또 대충 먹고 있니?]
눈을 감아버렸다.
파란 공중전화 수화기에 기대며 해인은 조금 울먹였다.
“……엄마, 보고 싶어.”
여지없는 기로에 서서, 밀려오는 건 아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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