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말 못 하는 고양이
진료실 구석의 평범한 3인용 소파는 해인이 앉자 평소보다 커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몸집인데,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발끝을 모아 꼼지락거리며 두 손을 가만두지 않는 모양이 꼭 혼날 준비를 하는 아이 같기도 했다.
“좀 괜찮아졌어?”
“응…….”
“이것 좀 마셔봐.”
그런 해인에게 시율이 방금 탄 코코아를 내밀었고, 아직도 눈가가 붉게 물든 해인은 이래저래 민망한 기분이었다.
“기분이 나아질 거야.”
잠자코 저를 올려다보기만 하는 해인의 손 위에 코코아를 쥐여주며 웃는 시율은, 어느 때보다도 상냥했다.
“……고마워.”
“별말씀을.”
“그리고, 미안해.”
해인은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시율이 정말 알 수 없어서 반문했다.
“뭐가?”
“……남의 직장에 와서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해인은 정말 부끄러웠다. 쥐구멍이 있다면 자신은 고양이지만, 염치 불구하고 숨고 싶을 정도였다.
“직장에 여자 친구가 찾아올 수도 있지 뭐가 문제겠어.”
“하지만 강은, 이런 거 싫어하잖아.”
“이런 거라.”
“……나 너무 민폐였어.”
눈에 띄는 짓이라면 질색인 시율인데, 특히나 공과 사가 서로를 침범하는 건 사전에 있을 수 없는 남자인데.
갑작스레 찾아와서 개가 죽었다며 엉엉 울어댔으니 보통은 황당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까는 감정이 북받쳐서 몰랐지만, 정신이 들고 보니 이건 꽤나 창피한 일이었던 것이다. 병원 사람들도 다 있었는데 품에 안겨 울다니.
애도 아니고……. 하지만 그때는 시율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죽은 것이 가엾고, 저 같아서 어쩔 줄 몰랐다.
다행히 시율은 뭐가 대수냐는 표정으로 해인의 곁에 가까이 앉을 뿐이었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다른 것인 듯했다.
“보통은 그렇지만, 너는 그 범주가 아니잖아.”
피식, 웃으며 아직도 모르냐는 듯 물었으니 말이다.
참 주책스럽게도 해인은 슬픔에 가득 찼던 마음이 순식간에 부끄러운 색으로 물들었다. 매사 간지럽히듯 구는 시율 때문이었다.
그의 하얀 가운 자락이 무릎에 닿자 해인은 냉큼 무릎 사이를 좁혔다.
소파는 충분히 널찍한데도 시율과 반대쪽으로 슬쩍 자리를 옮기며 그의 눈치를 봤다.
저 눈길은…… 딱 키스하기 전과 같았으니까.
설마 병원인데 키스하겠어?
“그런…… 가.”
괜히 민망하니 피신해보려는 의도가 빤히 보여서, 시율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등받이에 팔을 걸고 그 위에 느긋한 얼굴로 턱을 괬다.
한 소파에서 도망가 봐야 거기서 거기였고.
그는 해인을 주시하며 입술을 뗐다. 수려한 그의 입술은 역시 여유롭게 웃는 게 가장 잘 어울렸다.
“그리고 속상해서 우는 걸 탓할 만큼 못되진 않았거든.”
“…….”
어떻게 이 거리에서 손이 닿는 거지. 키가 크니 손도 긴 모양이야.
해인은 어느샌가 제 뺨을 매만지는 그의 손끝을 느끼며, 홀린 듯 시율이 다시 곁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 있었다.
그가 가만히 속삭였다. 긴 속눈썹을 천천히 내리깔며.
“내가 너를 달랠 수 있게만 해주면 돼.”
“지금…… 키스할 거야?”
“그럴 생각인데.”
“……병원, 인데.”
“기운 내라고.”
그거 조금 이상한 위로 방법 같아. 물론 싫진 않지만…….
해인은 그가 가까워지는 만큼 저도 서서히 눈을 감았다. 슬픈 기분들이 그의 온기에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키스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진심으로 제가 기운 내길 바라서였다.
똑똑.
“선생님? 차라도…….”
닫아뒀던 진료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 하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쾅-
곧장 눈을 가리며 도망쳤지만.
그리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그사이 내내, 둘의 입술은 온전히 닿아 있었다. 하기 전도 아니고 후도 아니고, 열렬히 진행 중이었다.
소문이 빠른 동물병원 직원들 사이로 이 이야기가 일파만파 퍼질 건 당연해 보였다.
해인은, 제가 가끔 훔쳐 듣던 소문의 주인공이 되게 생겼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네.”
시율이 그렇게 중얼거린 건, 순식간에 새빨개진 해인의 얼굴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다…… 다 봤겠지?”
“봤겠지. 정면이었는데.”
“……이거 어쩔 거야! 이 변태야!”
“그 변태 소리 오랜만에 듣네.”
욕인데 즐겁다는 듯 웃지 마!
애정행각을 들켰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건 해인뿐이었다. 시율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우, 웃음이 나와? 강 너는 창피하지도 않아?”
“애인 사이에 키스할 수도 있지, 뭐. 이건 당연한 거라고. 오히려 갑자기 들어온 쪽이 나쁘달까…….”
“으……!”
“차라리 잘됐어. 내가 연애가 귀찮아서 없는 여자 친구를 있다고 한다는 소문은 없어질 테니까.”
네가 실존인물임이 밝혀졌으니까. 시율이 느긋한 말투로 말을 덧붙였고, 해인은 그 뻔뻔한 얼굴을 한 번 긁어주고 싶어졌다.
“이제 여기 다신 못 와!”
“아, 그건 아깝네.”
그의 말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
이 병원 사람들은 처음 본 시율의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어마어마했다.
시율이 누군가에게 그리 상냥한 남자일 거라고는 여겨본 적 없을 테니까.
그는 여자가 울면 달래주기보다는 그러거나 말거나 버리고 가버릴 것 같은 냉랭한 남자였다.
마치 쿨한 남자의 대명사 같달까.
그런 그가 그렇게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여자를 달래는 모습을 봤으니,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중앙 공원에서 발견하셨다고요.”
“네…….”
“기존에 등록된 실종신고들과 죽은 아이의 특징을 대조해봤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몇 분 계세요. 저희가 계속 연락해보고 찾는 대로 알려드릴게요.”
“결과는 나한테 말해주면 됩니다.”
“아, 그럴까요.”
시율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별다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 눈이 호기심으로 과하게 반짝거리는 건 분명했다.
“저기……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당장이라도 댁의 아인지 보러 오신다는 분이 계셔서, 아마 금방 찾겠지 싶어요.”
해인은 매번 저를 냥이라고 부르며 간식을 흔들던 여자 직원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자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었다.
“만약 주인을 찾지 못하면…… 보통은 어떻게 되나요?”
“살아 있었다면 유기견 센터로 보낼 테지만…… 그게 아니니 소각처리 될 겁니다.”
“그렇군요.”
“일단 저희 동물 병원의 내규는 그렇습니만, 병원에 따라 쓰레기로 분류하는 곳도 있어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주인을 찾지 못한 녀석들의 끝은 대개 좋지 못했다.
유기견 센터로 보내진다고 해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락사 되고 마는 운명이었다.
해인은 부디 이름 모를 녀석이 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슴이 아픈 건, 저 역시 무력하기는 마찬가지라서였다.
***
해인은 집으로 돌아와서는 어쩐지 계속 시율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시율은 말없이 그런 해인의 머리며 이마를 쓰다듬어 줬다.
깨끗하게 씻은 손바닥을 쥐어주고, 종종 깍지 껴 가져가 그 마디마디에 키스해줬다.
커다란 품은 따듯했고 손길은 다정했다.
이것들을 잃어버리는 건 그저 한순간일 테지만.
“……강.”
“음?”
“생일 축하해.”
단지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길 잃은 녀석을 만나서 함께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 슬픈 기분이 너무 치덕치덕하게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듯했다.
“고마워. 이왕이면 좀 웃어줬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시율이 손으로 해인의 입술을 지그시 웃는 모양으로 만들었고, 해인은 그걸 따라 웃다가 그가 키스해와서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잘하게 웃으며 나누는 키스는 대화 같기도 했다. 그냥 너무 좋아한다는, 그런 말들.
우리, 눈을 마주치고.
우리, 서로를 쓰다듬을 뿐인데.
우리, 왜 심장이 두근댈까. 왜 이렇게나 불편할 정도로 쿵쾅댈까.
“이제 기운이 좀 났어?”
“……아까부터 났다, 뭐.”
해인은 그에게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다지 기운 찬 느낌을 아니었다.
시율의 손이 해인의 정수리를 쓰다듬고 뒤로 넘어가 머리카락 속을 부드럽게 그러쥐며 해인을 끌어왔다.
느릿하니 눈길을 한번 섞더니 이어 보란 듯 해인의 이마에 느린 입맞춤했다.
그러고는 눈까풀 위에 스치듯 키스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한없이 가릉거리고 싶을 만큼 나긋했다.
“전혀 그런 얼굴이 아닌데?”
그리고 정곡이었다. 하긴 이 남자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사신의 일부터 구구절절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해인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뿐 아니라 당신도 기억을 잃을 수 있고, 인연이 아니라면 결국 영영 헤어질 거라는 말들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얼굴이 어때서.”
“우울하다고 쓰여 있거든.”
“난 지금 행복한걸.”
정말이었다. 시율의 커다란 손바닥을 가져와 그에 뺨을 기대며 해인은 눈을 감았다.
그의 감촉을 만끽하는 것은 굉장히 행복한 기분이 들게 했다. 짐승들이 좋아하는 상대에게 몸을 비비적거리는 기분을 이젠 잘 알 것 같았다.
함께하는 것만으로 너무 좋은 거야.
좋아한다는 마음을 말로는 표현 못 하니까, 자꾸만 몸을 기대는 거야.
그리고 행복한데도 욱신거리는 이 기분은, 그래……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한 걸로 하자.
“……너, 그 죽은 녀석한테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음. 그야, 들리니까.”
귀신은 속여도 강시율은 못 속일 것 같았다.
“……다르잖아, 너랑은.”
“같아.”
“어디가.”
“헤어지면 다신 못 만나는 게, 같아.”
어떻게 말할까. 강 너를 사랑할수록 나는 우울해진다고. 네가 내게 빛을 주는 만큼 그림자가 진해진다고.
말할 수 없는 것만 너무도 많은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라도 있어야만 시율을 만질 수 있었다.
이렇게, 만지는 거라도…… 해인은 두 손을 움직여 시율의 뺨을 감쌌다.
그에게 손을 뻗는 순간이 행복했다. 이내 그가 만져질 테니까, 어루만질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야. 내가 언젠가 네게서 떠나야만 한다는 거. 하지만 절대 네가 싫어서는 아니야. 그것만 알아줘.”
시율은 매번 정색했지만, 해인은 이 말이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없는 시율을 보며 해인은 그의 뺨을 좀 더 제게로 당겨왔다. 이마가 겹치고, 속눈썹의 끝이 닿을 만큼 아주 가까이로.
하지만 키스할 수도 있는 그 거리에서 말하는 건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이었다.
“그러니까…… 그때 너무 아프면 안 돼. 아니, 안 아파도 되니까, 날 너무 사랑하지 마. 강, 차라리 그게 좋겠어.”
처음에는 이왕 줄 거라면 듬뿍 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깊어지고 엉켜갈수록…… 생각은 갈대처럼 바뀌었다.
많이 아프지 마. 우리 마음 닿아 있어서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니까. 강, 내가 아픈 것보다, 네가 아플까 봐 그게 걱정이야.
나는 잊겠지만 너는 가지고 있을 테니까.
차라리 그도 잊는다면 마음이 편할까?
“이미 늦었어. 이미 너무 사랑해.”
“……그러지 마.”
시율은 이제 전처럼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해인이 하도 수차례 말해서인지, 차라리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건 받아들인 듯했다.
“꼭 가야 해?”
“응.”
“어쩔 수 없어?”
“……응.”
“너 혼자는, 돌아올 수 없어?”
그는 웃을 듯 우는 해인에게 연거푸 물었다.
왜 엉엉 울던 아까의 눈물보다 소리 없는 이것이 더…… 가슴이 아릴까. 살짝 끄덕이는 고개와 겨우 내는 긍정의 한 음절에 목이 막힐까.
“응.”
여자의 그 작은 끄덕임에 왜 목이 메이다 못해 쓰리고 끊어질 듯 아플까. 네 눈이 그렇게 아픈 빛이기 때문일까.
시율은 담담하니 물었다.
“……찾으러 가도 돼?”
아니, 안 돼.
아니, 제발.
응…… 사랑해.
몇 번이나 목 안으로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면서는 또다시 눈이 젖어들었다. 모든 건 속절없었다.
강, 나는 이리도 나약하고.
너만 보며 하루하루 살고 있어.
겨우 깨닫기로, 너를 너무도 사랑해.
***
시율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 새벽으로 알람을 맞추며 침대 옆으로 앉았다. 내일은 출근이 일렀기 때문이다.
야행성인 해인은 잠들 때가 아니라 일부러 거실에 내버려뒀는데…… 해인이 시율의 방으로 자연스레 걸어 들어왔다.
두 발로 타박타박, 걸어오는 발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처음엔 그림을 그리려고 색연필을 가지러 온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해인의 그림자가 곧장 가까워지나 싶더니, 그것이 시율의 그림자에 겹쳐졌다. 어딘가 평소랑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
침대 위로 올라오는 게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던 시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느새 제 어깨에 매달린 해인이 보였으니까. 꼬리가 있다면 살랑살랑 흔들고 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말이다.
말캉거리는 몸이 등 뒤로 여과 없이 느껴졌다.
“강.”
“……왜?”
시율은 문득, 두려워졌다.
이런 행동이 저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고 이러는 걸까.
아니, 아마도 아닐 테니, 그는 일단 참자고 생각했다.
해인은 시율의 그런 노력을 아무렇지 않게 배신했지만.
“있잖아, 강.”
가냘픈 목소리로 거듭 그를 불렀다.
무엇이든 들어줘야 할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좀 더 가까이 그에게로 몸을 숙이며 시율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말하는 족족 따듯한 숨결이 섞여 그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언젠가 그가 해인에게 했던 짓이니, 그야말로 보고 배운 대로였다.
시율은 이것도 해인의 3대 기습 공격 중 하나로 넣어야 할지 고민했다.
“슬퍼만 하는 건 싫어. 그러니까…….”
그는 해인이 속삭이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정확히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기회가 있을 때, 안아줬으면 좋겠어.”
“…….”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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