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고양이의 전생
아슬아슬한 평정을 유지하며, 해인은 사신이 어서 돌아가기만 기다렸다.
속내를 들킬까 봐 걱정도 걱정이지만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저를 놀라게 하는 사신이 좋을 리 없었다.
미워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뾰족한 눈이 되려고 해서 해인은 슬그머니 발아래를 노려봤다. 그나마 지금이 고양이라서 표정 관리가 쉬운 게 다행이었다.
[그래, 질문은 더 없고? 당분간 못 볼 테니 할 말이 있거든 해두는 게 좋을 텐데.]
“없어요! 이제 됐으니까 빨리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줘요.”
[집이라, 이제 거길 그렇게 부르는 건가?]
“……지금 살고 있으니까 집 맞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하여간 엄청난 적응력이군. 솔직히 한두 달 고양이로 살고 나면 더는 못 하겠다고, 여기서 얌전히 시간이나 때우겠다고 항복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뜨끔한 것을 들킬까 봐 숨죽이고 있던 해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 사신! 두 달마다 나타나서 간을 보는 이유가 그거였나?!
해인은 이건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냅다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처음부터 그런 속셈이었군요! 내가 포기하길 기다린 거야! 그렇죠?!”
[뭐, 나로서도 네가 잘 지내는지 걱정되기도 하고. 고양이로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끙…… 그야 길에서 살아야 했다면 벌써 포기했겠지만…….”
[진작 기권할 줄 알았는데 운 좋게 주인을 만났더란 말이지? 이래서 전생에 덕을 쌓고 볼 일인가 봐.]
“어…… 내가, 전생에 좋은 일 좀 했나 보죠?”
언제 화냈냐는 듯, 해인은 두 눈을 반짝이며 사신을 바라봤다. 궁금해할 때의 고양이 얼굴은 세계 최고로 귀여웠다.
사신은 그런 해인을 보며, 생각하는 게 이렇게 얼굴에 훤히 보이기도 힘들 거라고 판단했다.
[명부에 보면 꽤 했더라고.]
“어떤 걸 했는데요? 응? 알려주면 안 돼요?”
[……음, 나중에 기억을 지울 거니까 상관없으려나.]
“알려줘요!”
[너, 어린애 대신 죽었더라고.]
“엑?”
그건 좋은 일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잖아!
[한번은 왕한테 간언을 하다가 죽었고, 그 전에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다 죽었고. 그래서 그다음에는 고양이로 태어나서 물을 엄청 싫어했지. 하여튼 매번 그런 식으로 생을 빨리 마감해서 말이야, 너 이번 생에서는 엄청 장수해.]
……이 전생 스포일러 같으니라고.
해인은 사신이 알려주는 제 전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불만스러운 수준이었다.
“그거 그냥 바보 같은데요……? 착한 게 아니라.”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넌 지금도 그런 성향이 꽤 있지 않나? 어린 애가 물가에 있거나, 누가 다칠 것 같으면 못 참고 저도 모르게 나서는 거지. 영혼이 가진 고질적인 성향은 죽어도 못 고치거든. 몇 번 생이 거듭되어도 그래. 아무튼 넌 드물게 선한 영혼인 거지.]
“……난 모르겠는데.”
[그래서 널 잘못 데려가면 더 큰일 나. 덕을 쌓아서 장수해야 할 영혼인데…….]
“…….”
[……미안.]
해인이 할 말을 잃고 노려보자, 흥에 겨워 조잘거리던 사신이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해인은 점점 볼을 부풀렸다.
“에잇! 미안하면 빨리 돌려줘요! 내 몸! 내 인생!”
[노력하고 있다고. 보면 알 테지만 이렇게 신경 쓰고 있잖아. 오죽하면 선인인 친구의 힘까지 빌리고 있다고. 오늘 계속 이야기했지만 나한테도 너는 중요한 존재야.]
“……끄응.”
[반드시 너를 원래대로 돌려줄 테니까 안심하라고.]
그것참 고오맙네요. 해인은 여전히 삐죽 내민 입술을 집어넣지 못하고 있었다. 반드시 본래대로 돌려준다는 말에 안심이 되기보다는, 답답함이 치밀었다.
이제 돌아갈 날이 반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껍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날이 가까워올수록 슬픈 기분이 되었다.
모두 시율 때문이었다.
‘우린 왜 만났을까.’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헤어짐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나버린 이상에는 거부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얽혀 들어서 따로였던 때를 잊게 했다.
해인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게…….
“나 궁금한 게 있어요! 아까 말한 그 명부라는 거에요.”
[음?]
“인연 같은 것도 나와요? 내 운명의 짝이라거나…….”
[당연히 나오지.]
해인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사신은 묻지도 않았는데 고개부터 내저었다.
[에잉, 누가 여자아니랄까 봐 그런 걸 궁금해하는구만. 하지만 난 점쟁이가 아니라고. 네 인연까지 말해줄 필요는…….]
“이미 실컷 말해놓고는!”
[…….]
“정말 미안하면 좀 가르쳐 줘도 되잖아요!”
예상치 못한 격렬한 항의에 사신은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자신이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해인이 물러날 것 같지 않아서인지, 결국에는 작은 한숨을 쉬며 말문을 열었다.
[음, 좋아. 대신 정말 마지막이다.]
“알겠어요!”
해인은 이참에 사신한테 알아낼 수 있는 건 모조리 알아내자고 작정했다.
나중에 지우면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자신이 걸어둔 금동술을 믿어서인지 사신은 제법 입이 가벼웠으니 말이다.
[내가 아는 선에서 말해주자면, 이번 생에서의 네 인연은 과거 네 간언에 분노해 너를 유배 보냈고, 네가 죽은 뒤에야 후회하며 너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던 왕이야.]
“……왕이요?”
[그래. 다음 생에는 너와 부디 다른 연으로 만나길 빌었지.]
그 말은 그러니까…… 이생에 인연이, 전생에 왕이었단 말이지.
그거 엄청 거물이군그래.
해인은 문득 꽤나 도도한 한 남자를 떠올렸다.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데도 그게 잘 어울리는 강씨 성을 가진 한 남자.
[소원대로 그 영혼은 너와 다시 만나. 하지만 만나자마자 네가 죽었지.]
“엇, 설마…….”
[네가 구하고 죽은 그 아이는 왕의 환생이었어. 너도 참 대단한 충심이지 않냐. 두 번이나 목숨을 바치다니 말이야.]
“……에, 질긴 인연이네요.”
[그 영혼의 너에 대한 한이 깊은 것도 무리는 아니지.]
사신의 말이 거짓은 아닐 테니, 이 정도면 꽤나 겹겹한 인연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바로 저번 생에서야 비로소 그는 너의 짝이 되었지. 비록 둘 다 금수였지만 말이야. 너에게 고마움을 갚으려는 건지 그는 네게 아주 헌신했고, 그 결과 이번 생에도 연이 닿아.]
자신을 한 번 죽였고, 자신이 한 번 목숨을 구해줬고, 금수일 때 짝으로 만났던 상대가 이번 생에 인연이라.
잠자코 사신의 말을 곱씹어본 해인은, 이번 생의 인연이 저와 같이 전생에 고양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자 왠지 걷잡을 수 없이 시율이 떠올랐다.
[그 영혼과는, 어쩌면 앞으로 남은 너의 윤회를 모두 함께할지도 모르지. 그 영혼의 너에 대한 집착이랄까, 염원이 아주 남다르거든.]
“……이름 같은 건 몰라요?”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나라고 모든 인간의 명부를 들춰 보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찾으려면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러려면 사유서를 내야 해. 관할이 아니거든.]
쓸데없는 데서 사무실 스타일이네, 그 저승 시스템이라는 건.
“이상해요. 우리 부모님 이름은 알았잖아요? 내가 장수할 것도 알고.”
[네가 몇 명의 아이를 낳는지도 명부엔 나와. 하지만 그 아이들의 이름은 모르지. 왜냐면 아직 ‘완전히’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 사신은 툭하면 무게를 잡고 어려운 말을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꼭 지금처럼.
한낱 인간에게는 어려울 거라는 듯, 깔보는 눈을 하고는 말이다.
해인의 볼은 여전히 빵빵했다.
[운명이란 싹 트지 않은 마른 가지들과 같아. 그중 어느 가지에 잎을 틔우냐는 온전히 네 몫이지. 인간이란 생명력이 대단해서 아예 새로운 가지를 뻗기도 해. 알 수 없기에 대단한 거지. 네 짝 역시 같아. 존재하지만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 어쩌면 이미 만났을 수도 있고.]
“끄응…… 어려워요.”
[인연은 정해져 있지만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야. 너도 봐, 몇 번이나 정해진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잖아. 그래서 우리들이 바쁜 거라고.]
해인이 한껏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사신이 포르르 날아올라 해인의 머리 위로 안착했다.
이제 그만 물어보고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인연인 상대를 못 만날 수도 있어요?”
[물론 있지. 운명이 엇갈린다면.]
다급하게 이어 물었다.
“……그럼, 만나면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나요?”
[글쎄다. 인간들은 자주 상대를 착각해서 파멸에 이르기도 해서 말이야.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인연이라면 한 번 만난 이상에는 몇 번을 헤어져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거야.]
그렇기에 인연이지.
사신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휘몰아쳐 사라졌다.
***
어둠 속에서 해인이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있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달빛이 충만하게 스며드는 따듯한 침실.
사신이 다녀간 흔적 같은 건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해인은 잠이 완전히 깨버려서 시율의 얼굴 근처를 배회하다가 그의 어깨와 베개 사이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으음……?”
잠결에 목을 낮게 울리며 해인을 끌어안아준 시율은, 동그랗고 보드라운 몸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듯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해인은 그런 시율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들지는 못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갈수록 불안감과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만 커졌다.
남은 시간은 고작 반년이었고, 그건 누군가와 함께하기에 그리 긴 시간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사신 덕에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우린 반드시 헤어지게 될 거야. 하지만 반드시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그럼 우린 평생을 헤어지지 않아도 될 거야.’
강, 우린 그럴 거야.
그렇게 할 거라고 약속해줘.
너무 저만의 욕심일까 봐 소리 내지도 못하는 마음을 되새기며, 해인은 시율의 뺨에 더욱 가까이 달라붙었다.
느리게 뺨을 문지르면서는 서글픈 기분이 되었다.
그가 곁에 있는데도 채워지는 것보다는 떨어지는 날에 대한 염려가 컸다.
마음이 커지는 만큼 욕심도 커다래지는 모양이었다.
전에는 제가 그를 전부 잊어도, 그가 저를 잊지 않기만 바랐는데.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의 온기조차 잊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는 날이 버거워졌다. 날이 갈수록.
***
함께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게 된 사람과의 마지막 날을 아는 기분은 전혀 개운하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봄이 오길 바라지 않게 됐다.
이 겨울이 아주 길기를 바라게 됐다.
짧은 봄 뒤에 마침내 다가오는 여름이 시율과 함께할 수 있는 날의 끝일 테니까.
해인은 사신만 다녀가면 무슨 후유증이라도 앓는 것처럼 우울해지고는 했는데, 이번에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신이 매번 해인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망했어…….”
예를 들면, 꼭 이 처참하게 망한 생일 케이크 같은 것들.
해인은 달걀 프라이처럼 납작하고, 진흙처럼 거무칙칙한 자신이 만든 스펀지케이크를 보며 심히 좌절하고 있었다.
이건 생크림을 바르고 과일을 올린다고 어떻게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슬쩍 눌러봤더니 폭신하신커녕 마치 신발 밑창처럼 단단했다.
“……이상하네, 분명 강이 한 거랑 똑같이 한 것 같은데.”
시율이 매번 너무도 능숙하게, 수월하게 하기에 그걸 어깨너머로 본 기억들과 인터넷 레시피면 자신도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심각한 착각으로, 회심의 완성작은…… 생일 케이크라고 볼 수 없는, 태워먹은 팬케이크에 가까웠다.
재료 낭비밖에 되지 않은 결과물이랄까.
하지만, 어쩌면, 맛이 없을 게 분명하지만…….
“머, 먹어줄지도…….”
시율이라면, 제가 만든 정성을 봐서 먹어줄 것도 같았다. 해인은 잠시간 그냥 시침 뚝 떼고 시율 앞에 이걸 내볼까 고심했다.
너무 궁지에 몰린 탓이었다.
얼마 전에 집에 왔던 시영 덕분에 오늘이 시율의 생일이라는 걸 알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선물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돈이 없었으니까.
본래 신분을 찾으면 마련할 수 있겠지만, 소멸된 차와 함께 모든 소지품이 없어진 터라 현금은 물론 카드도 없었다.
신분증도 없었다.
재발급을 받으려고 해도, 우선 그러려면 증명사진이 필요한데 이 요상스러운 몸은 사진에 찍히지가 않았다.
고양이 모드일 때는 찍혔지만, 사람 모습만 하면 괴상쩍게 나오는 것이었다.
해인에게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간도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생일 하면 케이크이고, 돈이 없을 때는 정성이니까,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며 찬장에 있던 재료를 끌어모아 요리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 비주얼은 이래도 맛은 괜찮을지도 몰라!”
혹시 모르니까 일단 조금 먹어보자!
해인은 케이크 틀을 탈탈 털어 부스러기들을 모아 입에 넣어봤다. 그런데 입에 넣자마자 당장 휴지통에 뱉어버렸다.
“풉, 왜 이렇게 써!”
어떻게 하면 케이크가 쓴 거지?!
시율이 쓰던 거랑 같은 재료로 만든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해인은 곧장 물로 입안을 헹궜다.
이건 차마 사람한테 먹일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기에는 불가능한 음식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만들기에는 재료도 없었고 시간도 부족했다.
당장 삼십 분 뒤면 시율의 퇴근 시간이었고,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다.
부들부들.
해인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현관문을 노려봤다.
이렇게 되면 비장의 수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리에 리본을 다는 수밖에.”
목이 바짝 말라오는 건, 방금 먹은 더럽게 맛없는 케이크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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