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고양이의 각오
띵동.
“끄악!”
자기가 물어놓고는 바짝 긴장하고 있던 해인은 초인종 소리 하나에 화들짝 놀라서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숨을 몰아쉬며 크고 동그란 눈으로 현관문을 노려보는 모양새가 딱, 죄짓다 걸린 사람 같았다.
혹은 깜짝 놀라 털을 거꾸로 세운 고양이.
“주, 주인인가?!”
누가 됐든 반갑지 않은 방문이었다.
시율은 쓴 숨을 삼키며 마지못해 해인에게서 물러섰다. 인터폰으로 다가가는 그의 얼굴이 매우 부루퉁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기껏 좋은 분위기를 방해받아버렸으니까.
“강! 누구야?”
“글쎄, 올 사람이 없는…….”
해인의 재촉에 떠밀려 인터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시율은, 생각지 못한 방문자의 출연에 잠시간 할 말을 잃어야 했다.
머리로 납득이 잘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오빠!]
초대받은 않은 불청객은, 다름 아닌 그의 여동생이었다.
“강시영?”
“……엥?”
[그래, 나야! 나! 얼른 문 열어줘!]
그녀는 꽤나 소란스러운 성격이었다.
***
해인은 서둘러 고양이로 돌아갔고, 시율은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불쾌한 기색을 팍팍 풍기고 있었다.
“뭐야, 너?”
“뭐가? 동생이 오빠가 사는 집에 구경도 못 와?”
“이렇게 갑자기 오는 게 어디 있어.”
보통은 시율이 저렇게 대놓고 언짢아하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기가 죽기 마련이었는데, 그녀는 과연 친동생답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시율이 구박하거나 말거나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서는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꼭 내 발로 찾아와야 만나준다니까. 하여간 비싼 분이야.”
시영은 어딘가 당당하고 뻔뻔한 구석이 시율과 똑같았다.
그리고 생김새보다는 얼굴의 분위기가 시율과 닮아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발랄한 여대생 같기도 했다.
전에 듣기로 올해 스물아홉인 치과의사였지만 저 아담한 몸집이나 단발머리 때문인지 의사 가운보다는 교복이 어울릴 것 같은 초동안의 소유자였다.
“얌마, 그래도 연락은 하고 와야지.”
“오빠가 휴대폰 확인을 안 하잖아!”
“…….”
“수술 중인가 했더니 아예 퇴근했고! 병원에 가봤더니 집에 갔다고 하는데 통화도 안 되고!”
그렇고 그런 시간을 보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시율이었다.
“오빠 요즘 너무하는 거 아냐? 전에 살던 집에 불이 난 것도 말 안 하고. 이사했다는 이야기도 한참 이따가 하고. 아는 동생이랑 잠깐 살기로 한다더니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고! 왜 걱정하는 사람은 생각을 안 해?”
그러게, 너무했네! 시율이 드물게 할 말을 잃은 모습을 보며, 해인은 그의 천적이 바로 그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는 이, 강씨에는 강씨인 걸까.
‘따따따 맞는 말만 해서 사람 할 말 없게 하는 건 저 집안 내력인가 보군.’
시율도 한 성격 하지만 시영 쪽도 만만치 않게 기가 세 보였다.
“잔소리는 됐거든?”
“오빠는 너무 무심해. 혼자 살더니 그게 더 심해졌어!”
“난 내 시간이 너무 소중한 사람이라서 말이야.”
“그건 나도 그렇지만 가족은 챙긴단 말이야! 이렇게 혼자 있기만 하면 성격 이상해지는 거 알아?”
그건 해인에게 있어서 꽤나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잔소리를 듣는 시율이라니!
세상에 누가 저렇게 시율을 몰아붙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아무리 그라도 핏줄한테는 어쩔 수 없이 약해지는 모양이었다.
해인은 시영이 하는 걸 잘 봐뒀다가 나중에 써먹자고 생각했다. 이참에 한 수 배워…….
“고양이네?”
“……!”
“오빠, 고양이는 또 언제부터 기른 거야?”
집 안을 둘러보던 시영은 어렵지 않게 소파 등받이 위에 앉아 있는 해인을 발견했다.
시율 말고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웬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됐어.”
시율은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시영은 해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뭐든 혼자 해결하는 오빠니, 고양이 기르는 일을 일일이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이상하네. 오빠는 개파 아니었던가?”
분명 딱, 눈이 마주쳤는데 어색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린 고양이가 부랴부랴 손등을 핥는 모습에서 시영은 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율은 동물이라면 다 좋아하긴 했지만 고양이보다는 명백하게 개를 더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주인을 알아보고 섬기는 충직하고 선한 동물이 그의 취향이다, 이 말이었다.
그가 수의사가 된 계기 자체도 집에서 오래 기른 셰퍼드 레오의 죽음이었다.
“이제 다신 레오 말고 짐승은 안 기른다더니? 죽을 때 마음 아파서 안 되겠다며?”
다른 가족들은 방범용으로 생각하고 길렀는데, 혼자 정을 주더니 개가 죽었을 때는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쌀쌀맞았던 시율이 그런 행동을 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뒤에 부모님이 바라는 심장의가 아닌, 수의사가 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으니 그게 시작이기도 한 셈이었다.
“됐고. 집은 어떻게 알았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르쳐준 적 없는 것 같은데.”
“응? 오빠 만나러 병원 갔더니 알려주던걸.”
일부러 말을 돌렸던 시율은 곧장 어이없다는 얼굴이 됐다. 시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 나서 말을 늘어놨지만.
“병원 사람들 내 얼굴 알잖아. 가끔 오빠 만나러 가니까.”
“그래도 그렇지, 개인정보를 막 흘리네. 그 사람들.”
“그뿐이게? 오빠랑 같이 사는 동생이 휴가 갔다는 얘기도 들었지.”
“하?”
“그래서 놀라게 해주려고 아예 여기로 찾아온 거야. 서프라이즈!”
시영은 여전히 신이 나서 말하고 있었지만 시율은 이래저래 언짢은 상태였다. 그는 사생활이 보호받지 못하는 걸 매우 싫어했으니까.
아무리 친여동생인 걸 알지만 주소를 막 알려주다니, 엄청 중요한 용무로 찾아온 게 아닌 이상은 말이다.
“그래, 날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시간 내서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볼일이 뭐야, 그래서?”
“뭐야? 몰라서 물어?”
“뭔데 그래?”
“……오빠답지 않네. 어디 정신 놓고 다니는 거야? 오빠 생일이잖아.”
“냑?!”
해인이 괴상한 소리로 울었고, 시율은 정말 새까맣게 제 생일을 잊고 있던 터라 그제야 시영이 방문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바로 내일모레잖아!”
“요즘 바빠서 완전히 잊고 있었어.”
“으휴! 자, 받아. 선물이야!”
시영이 투덜거리며 가방 속에서 준비해온 선물을 꺼내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상자는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는데, 상자 속 선물은 시율에게 어울릴 것 같은 은장 시계였다.
시율을 찾아온 이유를 말하니, 병원 사람들도 시율의 생일인 줄 몰랐다고 했다.
모처럼 선물을 챙겨주려고 병원에 들렀더니 오늘은 일찍 퇴근했다지, 전화는 안 받지, 또 올 시간은 없어서 난감하던 시영에게 병원 직원들이 시율의 집을 가르쳐준 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뭔가에 화난 것 같던 시율은 그제야 머쓱한 얼굴로 선물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
시영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여간 무정한 오빠 같으니라고.
여동생의 눈에 보이는 시율은, 본인이 너무 잘난 나머지 뭐든지 혼자 하려고 드는 심보가 고약한 남자일 뿐이었다.
***
당장에 집에서 시영을 내쫓으려던 시율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내왔고, 시영은 그러는 동안 부엌이며 거실이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남자 둘이 사는 것치고 꽤 깔끔하네?”
“그렇지, 뭐. 둘 다 성격이 더러운 건 못 참아서.”
“같이 산다던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랬지?”
“카메라맨. 그만 구경하고 와서 차나 마셔.”
잠깐 들이기는 했지만 얼른 내보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한 시율이었다. 시영은 차를 마시면서도 여기저기 힐끔대느라 바빴다.
해인은 시율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그런 시영을 주시했다.
생각해보니, 시율의 여동생이면 저한테는…… 아가씨인 셈이었으니까.
예전에 가출하던 날 병원 앞에서 시율을 채가는 걸 보고 좀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솔직히 많이 재수 없다고 생각했던 게 미안해지는 해인이었다.
‘그땐 여동생인 줄 몰랐는걸.’
그런데 팔짱까지 끼면서 ‘오빠, 오빠’ 하니까 좀 미웠단 말이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도 시율이 싫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질투를 한 걸 보면.
“그보다 오빠, 집에 한번 와. 엄마가 보고 싶어 하셔.”
“그래?”
“그래. 부모님 없을 때만 슬쩍 왔다 가지 말고.”
“내가 그랬나.”
고양이 모습일 때는 대화에 낄 수도 없으니 바쁘게 눈치만 보기 마련이었는데, 최근에 깨닫기로 시율은 가족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왕래하는 것도 여동생인 시영이 유일해 보였다.
“그랬어! 얼마 전에도 창고에서 내 옷 가져갔더라?”
“안 입는 거잖아, 어차피?”
“그렇긴 하지만…… 대체 어디에 쓰려고 가져간 거야? 집에 왔으면 밥이나 먹고 갈 것이지, 남의 옷만 쏙 가져가고 말이야.”
미안합니다. 제가 감사히 잘 입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율의 여동생 행세도 하고, 시영의 옷을 입고, 해인은 제가 시영에게 적잖게 신세 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기견 보호센터 보냈어.”
“응? 그건 또 뭐래?”
“가정부 아줌마도 네가 그 옷들 안 입은 지 몇 년 됐다고 하고, 내버려 두면 버릴 거라기에 내 물건 챙기러 갔다가 가져왔지.”
“에…… 개들이 사람 옷을 어디에 써?”
“겨울에 추워지잖아. 방한용품이 부족해져서 안 입는 헌옷을 보내면 담요처럼 쓰거든.”
내가 개였던가. 해인은 자신이 개냥이니 썩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한 실제로도 유기견 보호 센터에 헌옷을 보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시율의 거짓말은 완벽한 셈이었다.
“그런 게 있어?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건, 아무튼 집에 들렀으면 엄마도 보고 가고 그래.”
“생각해볼게.”
“……엄마 아빠도 이제 화 푸셨어.”
“하하.”
그건 매우 가식적인 웃음소리였다. 웃음 흉내에 불과한, 전혀 즐겁지 않은 웃음소리.
해인은 거기에서 시율이 부모님과의 사이가 생각보다 나쁘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다.
“오빠 또 대충 웃고 넘기려고 그러지!”
“아니, 웃기잖아. 멋대로 화내고 멋대로 용서하고.”
“그거야 오빠가 수의사 같은 거나…….”
“강시영, 적당히 까불어.”
시율을 올려다보고 있어서 알 수 있었다. 시율이 지금 조용히, 아주 소리 없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그리고 시영이 거기엔 눌리고 있다는 것도. 아까까지는 봐준 모양이었다.
“부모님이 화난 이유? 내가 심장전문의가 안 돼서잖아. 집안에 자랑스러운 권위 있는 전문의가 됐어야 하는데, 수의사 나부랭이나 됐다고 생각해서 화나신 거잖아.”
“오빤…… 공부도 제일 잘했고, 부모님이 많이 기대하셨잖아! 우리 형제들 중에 제일…….”
“부담을 줬지. 이상한 집안이야. 태어나면 의사가 안 되면 이상한 집이니까. 그리고 난 결국 거기서 많이 벗어나진 못했으니까 그 굴레가 장난은 아닌 거지.”
시영도 그에는 반문을 하지 못했다. 예전에 지나가듯 들은 적 있는 시율의 가정사였는데, 생각보다 뿌리가 깊은 모양이었다. 해인으로서는 지금 자신이 말을 못 한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울 만큼 무거운 공기였다.
“부모님도, 지금이 우리 사이에 최선이라는 걸 아실 거다.”
“……정말 고집은.”
“이제 와서 잘해보자고 하는 자체가 무리야. 내가 가장 힘들 때는 다들 망해보라는 듯 무시했잖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오빠랑 똑같잖아! 고집이 장난 아닌데 둘이 싸움이 난 걸 나랑 엄마가 어쩌겠어?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아버지도 약해지셨어. 이제 오빠가 결혼할 나인데. 여자 친구는 없는지, 집엔 안 데려오는지, 그런 걱정을 하신단 말이야.”
“대단들 하시네.”
“오빠, 화 좀 풀어. 응? 부모님한테 결혼할 사람 정도는 보여줄 거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걸.”
그건 전혀 비꼬지 않은, 스스로도 정말 모르겠다는 의문이었다. 시율의 손이 가만히 제 머리 위를 쓰다듬어서, 해인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자신이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평범한 사람으로 그의 여동생과 함께하고 있다면 이건 많이 다른 상황이었을까?
그의 여자 친구로 그의 여동생에게 소개되어서, 언젠간 그의 부모님을 만나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일까?
물론 ‘만약에’일 뿐이지만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해인은 늘 그랬듯, 자신이 고양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하물며 그의 생일이라는데도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우울한 일일 뿐이었다.
***
콩콩콩!
시영이 가고, 시율은 기분이 나빠 보였다. 해인을 대하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지만 아까와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고, 해인도 다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둘 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데, 오늘은 무슨 불청객의 날인지 사신이 나타났다.
콩콩!
[이봐, 아이야!]
“히악!”
고층 아파트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해인은 깜짝 놀라 일어났고,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아니 저승사자를 봤으니 식겁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율은 다행히도 잠귀가 어두워서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잘 지내는 것 같구나.]
“사람 깨겠어요!”
[그렇군. 내 공간으로 갈까?]
거긴 싫지만 시율이 사신을 보게 할 수는 없었다.
해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고 눈 몇 번 깜짝이자 이제는 익숙해진, 그러나 여전히 기분 나쁜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이동해 있었다.
위도 아래도 회색인 무저갱의 공간.
“여긴 언제와도 기분 나빠요.”
[그야 죽은 자의 공간이니까.]
“……사신님은 죽은 자가 아니잖아요?”
[아, 넌 모르겠구나. 저승사자란 자살한 인간들이 벌로써 치러야 하는 형틀이란다.]
해인은 이게 뭔 소린가 싶어 멍하니 입을 벌리고 굳어 있어야 했다. 하여간 이 사신은 매번 해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다. 저번엔 양기였지.
[나도 기본적으로 너와 같은 영혼이라는 거지. 스스로 목숨을 저버린 죄로 다른 인간의 영혼을 가져오는 벌을 받고는 있지만. 몇십 년, 몇백 년을. 그리고 나 정도 오래되면 령에 자연스레 약간의 힘이 생기지.]
“힘……?”
[자연을 조금 부린다든가, 빙의한다든가, 뭔가를 만들어낸다거나. 그쯤은 인간들도 아는 일 아니던가? 오래된 영혼이 힘을 가지게 되는 것.]
“악귀 같은 게 심술부리는 거라면, 들어는 봤는데…….”
거시기 창문 덜컹덜컹 하는 그런 거 말 하는 걸까?
귀신이라면 믿지도 않았던 해인이었다. 공포 영화 자체도 허구라며 콧방귀를 뀌곤 했다. 사실은 무서워서 안 본거지만, 적어도 그때까진 귀신은 없다고 생각 했다.
자신이 이렇게 되니 이야기가 달라졌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라고. 하물며 금수도 도를 닦으면 승천하는 법이야. 인간의 영혼은 훨씬 강력한 힘을 가져서 도를 닦으면 신에 흡사해지기도 하지. 얼마나 오랜 시간 힘을 순수하게 갈고닦느냐와, 염라에게 신뢰를 얻어 특별한 힘을 전수받느냐의 차이가 상급 령을 결정하는 거지.]
“……그거 또 나중에 어차피 내 기억을 지울 거라 막 알려주는 거죠?”
[잘 아는군. 그리고 내가 너를 반드시 제자리로 돌려놔야 하는 이유기도 해. 나는 내 죗값을 씻기 위해 몇백 년을 봉사해왔는데, 너 하나 실수해서 그 전부를 망칠 수는 없지 않겠어?]
“실수 정도로 치부하면 기분 나쁘거든요!”
[미안하지만, 나도 벼랑 끝에 선 기분이야. 소멸당하고 싶지 않아. 나도 제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모든 걸 잊고 순수한 존재로. 전부를 잊는다는 게 꼭 나쁘진 않아. 이 일을 하면서 기억이란 부질없다는 걸 알게 됐지. 좋은 일이라고는 없거든.]
그건 네 생각이겠지! 이 나쁜 새 새끼야!
어차피 새니까 욕은 아니잖아? 해인은 소심하게 덧붙여 생각하다가, 문득 이 사신이 제 머릿속을 읽지는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항상 입 밖으로 내는 소리를 들었다. 말을 안 하면 모르기도 하고…… 동물의 말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해인은 사신이 그리 전지전능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신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넌 매번 그렇구나?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 봐 호기심은 엄청나.]
“……그, 이 몸일 때 동물들 생각은 읽을 수 있는데 사람 생각은 안 되더라고요! 마음이나 기분은 조금 알겠는데…… 사신님이라면 사람의 생각도 읽을 수 있는 건가요?”
[아니. 인간의 생각을 읽는 건 정말 신급의 영혼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난 기껏 지우는 정도를 할 수 있지. 동물일 때는 녀석들의 지능이 낮고, 겉과 속이 같아 생각하는 바가 단순해서 읽을 수 있지만 인간은 달라. 복잡하게 굽이친 백 갈레 우물 같은 게 인간의 마음이거든.]
아싸! 그럼 내 생각도 못 읽는 거네!
사신 나쁜 새! 전부터 하얀 게 새똥 같다고 생각했어! 이 새! 난 어릴 때 아빠 따라서 참새구이를 먹어봤다고! 무섭지?! 음하하!
해인은 신 나게 모처럼 찾아온 눈앞의 사신에게 쌓아둔 불만을 풀어냈다. 속으로 소심하게 놀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시율의 곁에서 눈치를 배운 탓인지 이제는 스리슬쩍 물어볼 수도 있게 됐다. 사신은 아마 해인이 욕을 하기 위해 생각을 읽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고는 생각지 못할 거다.
[……너 뭔가 신 난 얼굴이다?]
“설마요!”
[얼굴에 나오는데.]
“고양이 생활이 참 즐거워서요! 놀고먹고 아주 좋네요! 전생에 고양이라서 그런지 아주 적성입니다!”
물론, 거짓말에는 여전히 재능이 없었지만 말이다. 사신은 새다 보니 정말 표정이 없었고, 해인은 제가 떠봤다는 사실이 들킬까 봐 일부러 과장되게 웃어 보였다.
[뭐…… 잘 적응해서 지내는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사실은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말이야.]
“병 주고 약 주고, 고맙네요.”
[갈수록 건방져진단 말이야.]
“그럼 빨리 사람으로…….”
아차, 그렇게 되면 시율과 헤어져야 하잖아.
해인은 시율의 얼굴이 떠올라서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람으로 돌아가고는 싶지만, 시율과 헤어지고 싶지는 않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바빠져서 당분간 못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하러 온 거다. 그런데 네가 잘 적응한 걸 보니 마음이 좀 놓이는군그래.]
“……에, 언제까지요?”
[네 달 뒤에나 들를 수 있을 거다.]
그럼 인간으로 돌아가기 두 달 전이었다.
그간은 두 달에 한 번꼴로 나타나던 사신이었다. 하지만 사신이 오든 안 오든 해인은 전혀 상관이 없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사신이 바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발바닥에 소름이 돋고 말았지만…….
추워지면 많이 죽긴 죽는 걸까…… 개나 고양이가 죽어도 이 사신이 담당하는 걸까? 전에는 관심도 없던 동물들의 사후가 궁금한 건 시율의 영향인 것 같았다.
“……그, 사신님! 개나 고양이가 죽어도 저승사자가 데려가나요?”
[모든 영혼은 우리 사신들이 인도해. 다만 동물의 영혼을 담당하는 사신은 이제 막 사신이 된 하급들의 일이지.]
“아하.”
[인간의 혼을 인도하는 건 교육이 확실히 된 다음이다.]
저승사자도 교육을 받는군. 어차피 지울 기억이라고 막 알려준단 말이지, 이 사신. 궁금증이 풀리는 건 좋지만…….
“어, 저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뭐냐.]
“정말 저랑은 상관없는 얘긴데요.”
[흠?]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만약 사신탈의 비밀을 인간에게 들키면, 그 인간은 어떻게 돼요?”
[기억을 지워야지.]
아주 어렴풋이 설마했던 것에 확신은 얻자, 차라리 차분해졌다. 두렵지도, 무섭지도, 겁이 나지도 않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만 들어서, 해인은 평소의 맹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혹시 들킬까 봐, 무서워서 물어봤어요.”
[너야 내가 금동술을 걸어놨으니 어떤 수로도 정체가 알려지는 건 불가능할 거다. 네 자의든 아니든 불가능해.]
“그러네요. 안심이다.”
겨우 고개 몇 번 끄덕이며 평소의 표정을 짓는 일일 뿐인데, 그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였다.
사신이 시율의 기억까지 건드리게 둘 수는 없었다. 무력하고 작은 자신이지만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잊혀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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