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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51화 (51/114)

51화. 고양이 목에 리본 달기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일어나는 법이었다.

어느 날 화재로 집을 잃기도 하고, 성 정체성을 의심받기도 하고. 말도 못 하게 황당한 경우가 으레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하는 거에 비하면 정말이지 다들 별거 아니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별거 아니지. 아니야. 시율은 애써 자기 최면을 시도했다. 난 차가운 도시 남자라고!

“……에, 강? 얼굴색이 창백한데…… 괜찮아?”

“괜찮고말고!”

“전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하하하!”

하지만 얼마 못 가 시율은 정신승리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개인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은 그에게 아주 자신 있는 종목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그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순수하게 여자를 좋아하는 시율의 입장에서 이건 정말이지 대참사였다.

“……미친 거 아냐?! 대체 내 어디가!”

그는 결국 묘하게 치미는 울분을 참지 못했다. 처음엔 마냥 충격이더니 이제는 분노의 경지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고 쿨하게 넘겨보려 애썼지만, 한집에 사는 태일과 그렇고 그런 사이로 오해받았다고 생각하니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그 여자 이하은, 태일의 집에 와서 저를 보면 도무지 눈을 못 마주치더라니. 난데없이 뺨을 붉히기도 하더라니…… 속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그게 상상 간다는 점이 가장 고역이었다.

시율은 손등에 핏줄이 설 만큼 운전대를 꽉 붙잡고 있었다.

“히, 힘내.”

해인은 달리 시율에게 건넬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안쓰러운 얼굴로 그의 어깨만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시율이 태일을 싫어한다거나, 게이를 혐오해서 이런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저만 해도 동성과 커플로 오해받는다면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라면, 남자들이 받는 데미지가 더 큰 건 당연해 보였다.

실제로 시율은 아까부터 차에 시동도 못 걸고 있었다.

마치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상실당한 사람 같기도 했다. 이제는 회고의 경지인지 심각한 얼굴로 해인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나 게이 같아?”

“전혀!”

해인은 얼른 어화둥둥, 시율의 장점을 최대한 나열했다.

“게이 안 같아! 강이 얼마나 남자다운데. 키도 크고, 손도 크고, 가끔 치사하지만 똑똑하고! 또 재수 없지만 실력 있는 수의사고…… 그리고 에, 또…… 섹시해! 키스도 잘하고……!”

“…….”

“앗, 마지막 건 취소야, 취소. 못 들은 걸로 해.”

칭찬이란 왠지 어려운 것이었다. 해인은 열심히 말하다 말고 당황해서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시율이 피식 웃을 수 있는 건 그 덕이었다.

“욕 같은 게 조금 섞인 것 같지만. 일단 고맙다.”

“……미안. 내가 칭찬을 잘 못하거든.”

마음에 없는 소리는 못 하겠는 해인이었다.

그리고 시율의 전화기가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응? 이 녀석이 무슨 일이지?”

[신태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발신인은 태일이었다.

이렇게 담백하게 이름으로만 저장해둔 상대와 사랑하는 사이로 오해받았다니 다시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시율은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님! 큰일 났어요!

글쎄, 과연 여기보다 큰일일까? 시율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지만 태일의 목소리가 워낙 다급해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그래.”

-개냥이가 없어졌어요!

“개냥…….”

-또 가출했나 봐요!

녀석이라면 여기 있는데.

시율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해인을 바라봤다. 해인은 전화기 너머 태일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땀이 삐질 나는 얼굴이었다.

-어쩌죠?! 당장 찾으러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그보다 너, 집이냐?”

-그보다라뇨?!

“부산 출장은? 너 오늘 촬영 있어서 안 들어온다며?”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지금 개냥이가 없어졌다니까요, 형님!

난 그게 더 문젠데…… 시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이쪽도 비상이었다. 오늘은 이래저래 정신없는 날이었다. 이하은과 마주쳤을 때부터 예감이 좋진 않았지만 말이다.

대체 언제쯤 제대로 여유 있는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걸까.

“아, 그야 그렇지. 나랑 있거든.”

시율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었다. 태일은 당황해서 눈치 못 채는 기색이었지만 말이다.

-네?

“나랑 데이트하러 나왔거든.”

-데이트……?

“일단 진정하고, 지금 갈 테니까 집에서 보자.”

시율은 얼른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통화 내용을 들은 해인이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뻔뻔한 낯빛으로 시율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 이 자식 벌써 집이라네? 모처럼 데이트하는데 눈치 없게 말이야.”

“……뭐어라고?!”

“데이트.”

“데이트으으?!”

“문제 있어? 사실이잖아.”

해인이 마치 명화의 한 장면처럼 절규하는 이유를 빤히 알면서도 시율은 능글대기만 했다. 그래, 그래야 시율답긴 했다.

“그래도 주인한테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야, 이 잘생긴 미친놈아!

“괜찮아, 괜찮아.”

“지금! 집에! 주인이 왔다는데! 어디가 괜찮아?!”

“괜찮다니까 그러네. 오빠 믿지?”

이 고양이는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생각하는 게 훤히 다 보였다. 사람 모습일 때는 특히나 그게 적나라해서 놀리는 재미가 있었고.

“개뿔…… 아니, 고양이 머리에 뿔 나는 소리 하고 있네! 아까 칭찬한 거 다 취소야!”

해인은 시율이 또 짓궂게 군다는 사실에 박박 이를 갈았다. 게이 소리 듣고 우울해할 때가 차라리 귀여웠다.

“에이, 그러지 마라.”

“그렇게 말해버리고! 어쩌려고 그래!”

“뭐…… 한 번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지. 다 준비해둔 게 있다고.”

때아닌 위기에 안절부절못하는 해인과는 반대로 시율은 침착하다 못해 느긋하기만 했다.

그리고 무슨 묘책이 있는지 상당히 자신만만한 기색이었다. 해인은 그러고 보니 이 인간이 제법 믿음직하다는 걸 되새겼다.

맞아. 강 시율은 아군일 때 천만대군 같은 남자였지! 그리고 내 남자 친구라고!

“정말? 뭔데? 좋은 방법 있어?”

“있고말고. 내가 누구야.”

“강시율!”

믿습니까? 믿습니다! 비책만 내놓는다면 시율을 얼마든지 찬양해줄 수 있었다.

“이런 것쯤이야 미리미리 대비해놨지.”

“오오오! 믿음직해!”

해인은 손뼉까지 치며 두 눈을 반짝였다. 뭔진 몰라도 벌써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머리 좋은 남자니까 엄청나게 좋은 수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저렇게 콧대를 세우는걸 보니…… 분명…….

“그게 뭐야?”

두 눈을 별처럼 반짝이는 해인의 눈앞으로 시율이 콘솔박스 안에서 꺼내 보인 건, 붉은 줄이었다.

두께 있는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고, 붉은색 리본까지 달린 그건.

“신태일 기습 귀가에 대한 해결책.”

시율이 그럴싸하게 덧붙였지만, 결국은 흔히 목줄이라고 부르는 물건이었다. 교양 좀 보태서 리드 줄.

짐승을 산책시킬 때 주로 쓰는 애완동물용품.

“애견용이지만, 상관없잖아?”

“……시, 싫은데.”

“그럼 뭐,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병원도 쉬는 날 고양이를 데리고 어딜 갔다 왔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기야 했다.

그래도 그렇지, 저런 걸 목에 거는 건 고양이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달까. 사람으로서 가진 인간의 존엄성이 거북해한달까.

어느 쪽이든 해인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없지만…….”

“그럼 차야지. 산책 다녀온 걸로 하자고.”

“……으잉.”

“나도 설마 정말로 이걸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쩔 수 없네.”

태일의 눈을 피해 둘이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는 꽤나 신중을 기해야 했다. 많이 조심해왔는데 정말 오늘처럼 빈집을 태일에게 들킬 줄은 몰랐다.

혹시 해서 챙겨둔 것이었지만 역시 사람 일은 모른다고 정말 쓰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시율은 해인에게 못내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입이 웃고 있었다.

“이걸 찰 시간이 왔네요, 아가씨.”

“위험하게스리……!”

해인은 슬금슬금 창가 쪽으로 도망쳤다. 변태다! 변태가 나타났다!

상변태다! 그리고 내 남자 친구지!

“차 뒤로 가서, 옷부터 벗으시죠.”

“변태야!”

“안 볼게.”

해인은 도리질을 치면서도 목줄을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데이트도 여기서 끝이라는 것도.

“아, 그리고 변신 전에 아쉬우니까, 키스 한 번만 하고 가라.”

차 뒷자리를 가리키던 시율이 방긋 웃으며 해인의 머리카락 끝을 살그머니 잡아당겼다. 그의 얼굴이 불쑥 놀랄 만큼 가까워졌다.

이 남자, 정들게 자꾸만 웃고 있었다.

키스하면서 목줄을 건네다니, 반칙이야.

***

“냐앙아옹.”

“우리 왔다.”

해인은 발걸음도 사뿐사뿐, 귀엽고 깜찍하게 현관 위로 등장했다. 당당한 귀가였다. 태일이 감탄하는 건 목줄을 맨 고양이는 처음 봐서였다.

“고양이도 산책을 하는군요!”

“흔하게 가능한 건 아닌데, 이 녀석이 워낙 똑똑하잖냐. 시험 삼아 데리고 나가봤더니 잘 돌아다니더라고.”

새까만 고양이가 붉은 목걸이를 하고 있으니 제법 고급스러우면서도 여자티가 났다. 평소엔 수컷인지 암컷인지 구분이 안 갔는데 말이다.

“신기하네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전 얼마나 놀랐는지…….”

항상 집에만 있던 고양이가 없어졌으니 영락없이 또 가출했다고만 생각한 태일이었다. 그 외에 다른 경우는, 그의 머리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네가 올 줄 몰라서 이야기를 안 했지 뭐야.”

“그게 갑자기 촬영이 취소되어서요.”

“이런.”

“섭외했던 장소에 문제가 생겨서……. 그보다 그 산책 저도 해볼 수 있는 겁니까?”

“그럼, 도망치지 못하게 줄만 잘 잡는다면야.”

시율이 여유 있게 웃으며 리드 줄을 태일의 손에 넘겨줬다.

해인은 목줄이 거슬려서 뒷발로 목 언저리를 벅벅, 소리 나게 긁긴 했지만 다른 고양이들처럼 심하게 버둥대진 않았다.

“이름표도 질색하더니 용케 리드 줄을 맸네요?”

“그야…… 살살 달랬지.”

“데이트도 그렇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개냥이가 꼭 여자아이 같네요.”

태일은 그냥 한 말인데 해인은 찔려서는 눈을 데룩데룩 굴렸고, 시율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사실 애완고양이를 산책시키는 건 별로 추천하지 않거든. 집 고양이다 보니까 밖에서 병을 옮아 올 수도 있고, 무엇보다 고양이 자체가 자기 구역이 확실한 동물이라 낯선 곳을 꺼리기도 하고. 집 밖으로 나간다는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어서 말이야.”

“개냥인 괜찮던가요?”

“좋아하던걸? 하여간 특이한 녀석이지 뭐야.”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제가 동물은 처음 기르다 보니 무지한 것투성이네요. 전 산책은 개만 시킬 수 있는 건 줄 알았습니다.”

“요즘은 토끼나 페럿도 많이 시키지.”

“좋네요.”

“너도 한번 산책 시켜봐. 사람 많은 데만 아니면 괜찮을 거다. 조용한 뒷산이나, 뭐, 그 정도…….”

“네, 아프리카에 가기 전에 꼭 해봐야겠네요.”

시율은 인심 쓴다는 양 말하다 말고 굳어야 했다. 해인도 깜짝 놀라 태일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어딘가 후련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평소에도 워낙 해탈한 사람처럼 웃고는 했지만, 오늘은 정말 모든 걸 내려놓은 것 같았다.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

이미 말리기엔 늦은 것 같았다. 태일은 망설였던 만큼 지금의 제 결정이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형님도 진심으로 응원해주시고, 사실 개냥이가 많이 걸렸는데…… 이렇게 예뻐해주시니까 안심하고 갈 수 있겠습니다.”

“고민 많이 하더니.”

“말씀하신 대로 생각해보니, 그것들 말고는 걸리는 게 없더라고요. 나를 위한 인생인데 항상 너무 다른 사람들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시율은 태일의 아프리카행을 전처럼 순수하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 모르던 사실을 한 가지 알아버렸으니까.

신태일이 얼마나 불쌍한 남자인지 말이다.

가망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실은 상대에게 가망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 이하은이…….”

“하은인, 눈치채셨으니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잖습니까. 한 번도 제 여자였던 적도 없고.”

“……그러길 바랐던 적은 없는 거냐.”

“있죠. 하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으니 여기까지가 제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 말이지.”

“네. 가질 용기도, 잃어버릴 용기도 내지 못했으니까요.”

이 녀석아아아.

시율은 태일과 연인으로 오해받는 건 싫었지만, 태일이 싫은 건 아니라 안구에 습기가 다 찰 지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고 다니면 이렇게 완전히 게이로 오해받는 걸까. 해인도 답답한지 당장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빠끔거리고 있었다.

이러다 고양이 말문 트이겠네 싶을 지경이었다.

“음, 너…… 다른 여자는 관심 없냐.”

“관심…… 모르겠습니다. 하은이 말고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도 모르겠고. 상상도 안 가고. 좀 한심하죠? 용기도 못 내고 포기도 못 하고. 그래도 이번이 정리를 하고 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기쁩니다.”

“한심하긴 인마. 잃어버리는 건 나도 싫어.”

시율의 눈이 해인을 바라봤지만 해인은 주인 걱정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태일이 후련하면서도 슬픈 눈이었기 때문이다.

침울한 침묵이 이어져서일까.

태일이 웃자는 듯 농담을 꺼냈지만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이런 식이라서 그런지 저를 게이로 아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하하.”

“……하하.”

“접근하는 여자들이 불편해서 소문을 그냥 뒀더니, 정말 믿는 사람이 꽤 있더라니까요?”

본인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눈치였고, 시율은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갈등했다.

이하은이 널 게이로 알아.

그 한마디를 하면 그 뒤에 사태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태일은 하은을 붙잡을까? 하은은 진실을 알게 되면 결혼을 그만둘까? 여러 경우를 상상해봤지만, 지금보다 나을 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시율은 차마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해인이 답답한지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회사엔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계약 기간이 1년 남긴 했는데…… 다녀와서 다시 같이 일하는 조건으로 편의를 봐줬습니다. 사장님과 친한 덕도 있을 테고.”

“……축하 ……한다고 해야 하나.”

“감사합니다. 형님 덕분입니다.”

“내 덕은 무슨.”

“아닙니다. 사실 인간관계로 많이 힘들었을 때 개냥이랑…… 형님을 알게 됐고 힘이 됐습니다. 곁에서 보면서 항상 많이 배웠고요. 냉정하고,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게 분명하고, 매사 태도가 확실한 형님이 얼마나 대단해 보였는지 모르실 겁니다. 저도 조금쯤 닮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면 양심이 심히 찔렸다. 순전히 목적이 있어서 태일에게 접근했던 만큼 말이다. 이 순간 누군가는 시율을 향해 존경의 눈길을 보내는데 누군가는 무언의 압박을 보내고 있었다.

느껴진다, 느껴져. 저주에 찬 고양이의 뜨거운 눈길이…….

시율은 힐끔 해인을 바라봤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커다란 압박이 느껴졌지만 휙 하니 외면해버렸다.

네가 무슨 생각 하는 줄은 알겠는데 말이야, 어른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란다. 어른의 지혜 제 1장은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기’고 말이야. 2장은 ‘알아도 모른 척’이거든.

일단, 일을 크게 벌이지 않는 게 시율이 아는 어른의 미덕이었다.

“형님이랑도 헤어지게 되겠군요. 즐거웠습니다.”

“어, 그래…… 아쉽네.”

“떠나기 전에 정리할 게 너무 많네요. 당분간 바빠질 것 같습니다.”

어제도 봤고 오늘도 보고 있고, 내일도 볼 태일이 영영 헤어지는 사람처럼 악수를 청해왔다. 무뚝뚝하니 마주 잡긴 했지만 시율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

어른의 지혜를 12장까지 전부 읊어봤지만 이 녀석이 너무 불쌍했다.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는 외면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마음이 자꾸만 약해졌다.

“그래서 말인데요, 바빠지기 전에 당분간 본가에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아, 본가에?”

“몇 년이나 해외로 나가는 거니까. 차분히 설명도 드리고, 오랜만에 효도도 좀 하고. 어른들 놀라지 않으시도록 잘 설명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지간해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시율이었지만 태일은 워낙에 이런 녀석이라, 드물게 좋은 녀석이라 그게 쉽지가 않았다.

“언제 가려고?”

“글쎄요. 모레쯤 출발해서, 넉넉잡고 일주일 정도 쉬다 오려고요. 휴가도 겸해서요.”

이거 큰일이었다. 태일이 일주일이나 집을 비우는데 그게 반갑지 않은 날이 올 줄이야.

시율은 등 뒤로 이유 없이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죄책감이 스멀스멀 그를 괴롭혔다. 무언의 핀잔이 그의 피부를 따갑게 했다.

“일주일이라…….”

그때면 이하은 결혼식 열흘 전일 텐데.

시율은 저와 상관없다고 애써 되뇌면서도 저도 모르게 날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제 마지막 일은, 아마도 하은이 결혼식 촬영이겠네요.”

그런 걸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녀석이 과연 우유부단한 걸까? 시율은 뭔가 절벽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등 뒤를 고양이 한 마리가 매의 눈으로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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