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고양이가 당황할 때
‘인어공주’는 해인에게 있어서는 인생 최초의 발레 공연이었지만,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뭔가 엄청 신기하고 눈이 돌아가게 아름다운 사람들은 본 것 같긴 한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그, 글쎄?”
“이게 뭐냐고.”
집중할 수 없기는 시율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당연하겠지만 시율은 꽤 화가 나 있었다.
“왜 우리 데이트가…….”
“쉬이이잇!”
일단, 공연장 안에서 이하은 커플과의 자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하은이 고개만 돌리면 바로 해인과 시율의 자리였다. 그래서 공연 내내 어색한 표정으로 말 한마디 못 하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100여 분의 발레 공연이 끝나고 로비로 빠져나올 쯤에야 겨우 소곤소곤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빠져나오는 인파의 어디에 이하은이 섞여 있을지 몰라 잔뜩 눈치를 봐야 했다.
“우리가 죄지었냐?”
“……하지만 지금 난, 여동생이잖아.”
“망할.”
이런 식으로 밖에서 안면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라고는 시율도 짐작지 못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여자 친구라고 해뒀으면 좋았을까?
하지만 그때는 이런 관계가 아니었으니 지금 와서는 다 부질없는 후회였다.
시율은 불만의 팔짱을 끼며 씨근덕거렸다.
“오늘 날짜 맞추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로맨틱한 데이트를 기대하기는 해인도 마찬가지였지만, 시율이 기대했던 바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이 반나절의 데이트를 위해 시율이 근무표를 조정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는 해인도 잘 알고 있었다.
본업이 애완 고양이인 해인과 둘이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고양이의 주인인 태일이 집에 없는 날에 어떻게든 맞춰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힘들게 맞춘 데이트 일정이다, 이 말이었다.
그 때문인지 데이트를 방해받은 시율의 불만은 최고조였다. 그가 이렇게 투덜대는 건 처음 보는 일이라 해인은 내심 당황해야 했다.
매사 과하게 쿨한 남자였건만, 데이트 방해받은 정도로 이렇게 심술을 낼 줄이야.
“저기, 데이트는 다음에 다시 제대로 하자. 그러면 되잖아?”
“……당연하지.”
덩치 큰 남자가 투덜거리는데 그게 귀엽게 보이니 슬슬 병일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눈에 뭐가 단단히 쓰이는 병.
“그땐 사람 없는 데가 좋겠어!”
해인은 오빠라고 해도 팔짱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시율의 팔에 슬쩍 달라붙었다.
“사람 없는 데?”
“응!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 모습으로 강 말고 다른 사람이랑 마주치는 거 너무 불편해.”
뭐랄까. 사신이 건 주술의 힘인지 자꾸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건 어떤 느낌이냐면 누군가 자신의 목에 목줄을 걸고 뒤쪽에서 때때로 경고하듯, 줄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비밀이 들킬 만한 짓은 적당히 하라는 듯, 보이지 않는 힘의 제지가 느껴졌다.
단순하게 자의는 아니지만 무언가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꺼림칙한 걸지도 모르고 말이다. 자신을 그의 여동생이라고 해야 한다거나 하는…….
“나야 좋지만, 너 괜찮겠어?”
“응?”
“나랑 둘이 사람 없는 데 가도…….”
“악! 아, 아, 아무튼 오늘은! 표가 나빴어, 표가.”
맞아, 이런 남자였지!
해인은 얼른 다시 시율에게서 떨어지며 말을 돌렸다.
사귀기 시작한 뒤로 그와의 거리감이 사라져버려서 큰일이었다. 잦은 키스 탓인지 다른 스킨십이 너무 쉽게 느껴지는 부작용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건 동감이야. 아아, 내가 다신 그 녀석이 주는 걸로 어디 오나 봐라.”
“에…… 누가 보며 주인을 싫어하는 줄 알겠어!”
“……적어도 네가 그렇게 부르는 한 예뻐하진 않을걸.”
해인도 아차 싶었지만 달리 태일을 부를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이제 와서 이름을 부르는 것도 어색했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일은 반년 가까이 해인의 주인이었다. 상냥하고 친절한, 애완 고양이로서 낙을 알려준 고마운 사람.
“그럼 오빠라고 부를까?”
“태일이를?”
“응!”
“……주인이 백배는 낫겠다.”
해인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남자는 어째 갈수록 귀여워졌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질투를 해도 귀여워서 큰일이었다. 그런 말 하면 분명 화낼 테지만 말이다.
“그치? 그리고 강,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주인을 꽤 좋아하잖아.”
“흥.”
“은근히 예뻐하는 거 알아!”
“그래 봤자 사내놈…….”
“여기 계셨네요!”
단란한 둘의 시간은 그걸로 끝이었다. 오가는 관람객 사이를 헤치고 이하은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반색하고 다가오는 모양이 시율이 가버렸을까 봐 노심초사한 모양이었다.
“즐겁게 보셨어요? 정말 좋은 공연이었죠?”
“아, 예.”
이 사교성 좋은 미인이 불편한 건 대체 왜일까. 달리 나쁜 사람도 아니고, 못되게 구는 것도 아닌데.
아마도, 눈치가 꽝이라서일 거다.
“얼른 안 가면 자리가 없을 것 같은데, 바로 카페로 갈까요?”
“그보다 저한테 묻고 싶다던 거, 태일이 얘기 아닙니까?”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뭐, 뻔하죠.”
누구와 달리 눈치가 엄청 빠르니까.
시율은 이하은이 나타난 뒤 다시 무언 모드에 들어간 제 여자 친구와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서라도, 얼른 이하은을 떼어내고 싶었다.
“차는 됐습니다. 본론만 말하죠.”
“아…… 여기서요?”
“예.”
“하지만 붙잡은 것도 저고, 차 정도는 대접하고 싶은데요.”
이하은은 공연 직후라 정신없는 로비가 불편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시율은 이하은과 오래 있는 쪽이 더 불편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자꾸만 제 등 뒤로 숨는 해인도 안쓰러웠다.
“차 안 좋아합니다. 하실 말씀이 뭡니까?”
“그게…….”
“빨리 말씀 안 하시면 갑니다?”
“그러니까! 태일이…… 이야기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아시는가 해서…….”
그게 뭐, 어려운 질문이라고. 시율은 제가 예상했던 범주의 질문에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더군요.”
“보시기에…… 어떤가요?”
“글쎄요? 저라고 뭐, 알겠습니까.”
“그래도, 매우, 친하시니까…….”
왜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걸까?
마치 예민한 부분이라도 건든 것처럼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이하은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눈치가 척하면 척인 시율도 그 이유만은 알 수 없어서 의아할 뿐이었다.
“……그렇기야 하지만, 그쪽이 더 친하지 않습니까?”
“전 단순히 친구일 뿐인걸요. 시율 씬 같이 사실 정도고…….”
“뭐, 그건 어쩌다 보니.”
살던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오갈 데가 없어졌으니까. 물론 얼마든지 새집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러진 않았다.
태일의 제의에 잘됐구나 싶어 그대로 태일의 집에 눌러앉았고, 오늘까지 왔다. 그저 그뿐이었다.
“태일이를…… 말려주실 순 없을까요?”
“……내가요?”
“네.”
“제가…… 왜?”
“시율 씨라면 설득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 무슨 어이없는 부탁일까. 오히려 그는 보내고 싶은 입장인데 말이다. 시율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저랑 태일이 무슨 사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싶었다.
“그러진 않을 겁니다. 선택은 본인 자유니까요.”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기…… 싫지…… 않으시겠어요?”
“하아?”
이하은은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조금 횡설수설했다. 시율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미안한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며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시율 씨도 태일이가 보고 싶으실 것 아녜요. 일본 정도도 아니고, 아프리칸데…….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
이 여자가 지금 뭐라는 걸까? 아까부터 어딘가 대화에 핀트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저기, 뭐, 보고 싶을 순 있겠지만……. 내가 그 녀석 안 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좀 지나친데요?”
해인도 이상함을 느낄 정도니, 말 다 했다.
“나, 남자분이라 그런지……. 그렇군요. 저라면…… 많이 그리울 것 같아서. 불안하고…… 또…….”
뭔가, 많이, 이상했다.
시율은 그제야 이하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상상하긴 싫지만 설마 이 여자…….
“……저기, 미안한데.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네?”
“난 여자 친구 있습니다.”
“……정말요?”
그게 그렇게 깜짝 놀랄 일인가?
“예! 있습니다.”
시율은 왜인지 울컥 화가 치밀어서 목소리가 굳어 있었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해인은 입을 크게 쩌억 벌리고 말았다.
“어…… 위장용……?”
“어제도 키스했고, 기회가 닿으면 오늘도 할 예정입니다만.”
“예에……?”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하은은 뭔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예를 들면…….
“당신 혹시, 날 게이로 안다든가 하는 건…….”
“어머! 웁, 으……. 죄, 죄송해요. 아무래도 비밀이겠죠?”
게다가 꽤나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어떻게 하면 저 정도로 맹신할 수 있는 걸까?
해인의 안색이 심히 나빠지는 건 오빠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이 남자가 게이일 리는 절대 없으니까.
열 손가락 거는데, 절대 아니었다.
“비밀이고 자시고 난 여자가 좋습니다만.”
참다못한 시율이 이를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맞아요. 여자 좋아해요.”
내내 조용히 있던 해인까지 한마디 거들자, 이하은은 그제야 자신이 한참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까지 빨개질 수 있다니, 이래저래 놀라울 정도였다.
“아, 으……. 세상에, 전……. 두 사람이 같이 살고, 또……. 그래서……. 영락없이……!”
착각도 착각 나름이어야 하는데,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돼서 어디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디 갔나 싶었던 이하은의 약혼자가 허겁지겁 나타난 건 그때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시율이 할 말을 잃은 사이.
“하은아! 어쩌지?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
“차에 문제가 생겼나 봐.”
“……발레파킹인데?”
“다른 차를 빼다가 내 찰 심하게 긁었다나 봐. 나 참, 성질나게, 정말.”
“어어? 같이 가! 저기, 죄송해요. 죄송해요……. 조만간, 정식으로 사과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급하기도 급하지만 제 실수가 어지간히 민망했던지 이하은이 황급히 도망치듯 사라졌다.
하지만, 남겨진 둘은 여전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
“…….”
관람객으로 북적이던 로비가 휑해지도록. 내내.
***
한참 뒤에야 반쯤 홀린 걸음으로 차로 돌아온 둘이었다. 시율이 먼저 입을 열었지만, 드물게도 평정을 잃고 뒷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영혼을 잃은 표정이랄까.
“그러니까…….”
“…….”
“그러니까, 날 게이로 알고 있었다는 건…… 태일이를…….”
“……주인이 영 가망이 없는 건 아닐지도.”
해인도 나라 잃은 표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참 만에 도달한 답은, 그다지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시율이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 건 그래서였다.
“하하하! 게이인데 아무렴 가망 없지.”
“하지만 게이가 아니잖아!”
“……왜 게이로 알고 있는 거야?!”
둘은 차 안에서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분노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야 했다. 이하은, 이 여자를 정말!
“나도 모르지!”
그거 아주 어마어마한 오해인데, 이하은은 저를 좋아하고 있는 남자를 완벽하게 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 여파로 함께 살고 있는 시율도 덩달아 그쪽으로 여긴 눈치였다.
시율은 지금 억울해 죽을 맛이었지만 아무렴 태일만큼 비상사태는 아니었다.
“태일이랑 이하은, 오래 알아온 사이 아니었어?”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걸로 아는데?”
“그런데 그런 착각을 해?”
“물론 주인이 좀 초식 성향이 짙은 데다가, 여자에게 관심이 심하게 없기는 하지만! 듣자니까…… 모태 솔로긴 하지만……! 여자들한테 엄청 시큰둥하긴 하지만……! 그건 다 이하은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그 외에도 너무 건전할 뿐 아니라 성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여자가 싫은 건가 싶은 적이 해인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사람이 재미없다 싶을 만큼 선할 뿐이고, 밝히지 않을 뿐이고, 매너가 너무 좋다 보니 오히려 사람한테 거리감이 심하긴…… 하지만…….
태일의 변호를 하려던 해인은, 그러다 보니 오히려 태일이 왜 그런 오해를 샀는지도 알 것 같았다.
“으으악!”
“뭐야! 왜 그래?”
“게이 같은 것도 같아아……!”
반쯤 절망한 해인은 울고 싶은 것처럼 소리쳤다.
워낙 순정파라 하은 말고는 여자에 관심 없는 게, 하은이 보기에는 그냥 여자에 관심이 없는 걸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10년 가까이 주변에 여자라고는 저 하나뿐이니, 지켜보면서 오히려 엉뚱한 확신을 한 게 분명했다.
너무 오래 알아서 되려 그게 문제겠구나 싶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연애하는 걸 한 번도 못 봤다면, 심증은 확신이 될지도. 심지어 장가갈 나이에 연상의 남자랑 동거를 시작한다면…….
“맞다. 그 녀석 동정…….”
“아악? 갑자기 뭐라는 거야!”
“내가 그거 어디다 쓸 거냐고 한 적이 있거든. 장난이긴 했지만 얼마나 철벽을 치는지 주변에 여자라고는 완전히 씨가 말랐길래……. 생각해봐, 얼마나 안전해 보였으면 너랑 데이트를 하게 두겠냐고.”
“……그야.”
“솔직히 몇 번인가는 나도 혹시 하긴 했지만…… 주변에 오픈한 게이가 많아 보이긴 하던데……. 하지만 그야 직업이 아티스트니까…….”
중얼중얼, 쓸데없는 확신을 하며 해인에 이어 시율의 안색도 파리하게 변해버렸다. 이거, 좋지 않았다.
해인은 왠지 울고 싶은 목소리였다.
“나, 지금 생각났는데…….”
“뭔데……?”
“이하은이 약혼한 거……. 강, 네가 주인집에 들어온…… 직후야.”
“……미치겠네.”
무슨 이런 경우가, 시율은 아파오는 머리를 주물러봤지만 하나도 나아지진 않았다.
해인은 스킨십을 자제하려고 했었지만, 지금은 그의 어깨에 힘없이 머리를 기댈 수밖에 없었다.
“강……. 나…… 왠지 어지러워.”
“음,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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