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고양이의 유혹
“너……!”
시율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몸보다 한참 사이즈가 큰 남자 옷을 입고 있는 해인이, 그의 심박 수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으니까.
해인은 그의 속도 모르고 바로 코앞에서 칭찬해달라는 듯 웃고 있었다.
“응? 사람으로 왔잖아.”
“왜 그걸 입고 있냐. 네 옷 두고…….”
시율은 날뛰는 심장을 겨우겨우 진정시키며 해인이 입은 것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소매가 많이 길어 보이는 티셔츠는 그의 것이었고, 바지는 아마도 태일의 것으로 보였다.
가끔 집 앞 편의점에 갈 때나 입는 편한 트레이닝 바지.
여하튼 둘 다 해인에게는 무식하게 큰 것이었다.
‘너무 커, 크다고. 어깨가 다 보이잖아!’
천이 작은 것만 위험한 줄 알았더니 천이 너무 넉넉한 것도 자극적이긴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의 몸이 얼마나 작고, 그래서 자신의 품 안으로 쏙 안길지가 적나라하게 실감 나니까.
“그야 내 옷은 다 이 침대 밑에 숨겨뒀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입으면 되잖아?”
“흥, 그러다가 강 너한테 옷 입는 모습을 들키면? 하여간 음흉하다니까.”
아무리 남자 친구지만 알몸을 보일 순 없잖아?
해인은 자신이 잘 무장했다고만 여겼다. 헐렁한 남자의 옷이 더 자극적일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몸보다 큰 옷을 입는 건 바보 같아 보일 순 있어도, 섹시한 건 아니라고 말이다.
심지어 급하게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입었더니 패션이 엉망이었지만, 밖에 나갈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었다.
“태일이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괜찮아! 주인이 깨는 것 같으면 얼른 변신하면 돼.”
속닥속닥, 그래도 혹시 몰라 조용히 말하며 해인은 시율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 귀 좋다구.”
방긋 웃으며 사람 모양을 하고는 네 발로 걷듯, 손과 무릎으로 침대 위를 기어서 다가오는데…….
그게 결코 순수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아주 유혹적이고 위험한 도발처럼 느껴져서 목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적어도 신체 건강한 성인 남자에게는 그랬다.
“……그래도 그렇지.”
해인은 자신만만하게 웃었지만 시율은 끙, 하는 못마땅한 소리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걱정이 됐다.
해인의 이 모습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어야 했다.
사람일 때의 해인을 태일에게 들키길 원하지 않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쪽까지 공유해야 한다면 성미가 난폭해질 것 같았다.
여동생으로 소개해놔서 태일 앞에서는 영역표시도 못 할 테니까.
“왜? 싫어?”
“싫다기보다는.”
“하지만 강 네가 이야기를 안 들어주니까.”
해인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기껏 그가 삐진 것 같아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 모습을 했더니, 이 남자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해인이 보기에 시율은 지금 무언가 참는 얼굴이었다.
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 근처를 미세하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강, 혹시 내가 주인 얘기만 해서 삐졌어?”
“…….”
워낙 속내를 숨기는 데 능숙한 남자라 대놓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해인은 시율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삐진 거야? 응? 그거야? 응응? 하고 묻는 눈길이 심하게 반짝거렸다.
눈으로 이렇게 많은 걸 말하기도 힘들 텐데, 해인의 특기 아닌 특기라면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그에 보통의 남자라면 뜨끔해하거나, 눈길을 피할 만도 한데 시율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조금 침묵하다가, 인정할 뿐이었다.
“그래, 나 삐졌어.”
퉁명스럽고 시큰둥한 대꾸였다.
그런데 뭐랄까, 지금의 시율은 평소와 다르게 귀엽게 보였다.
이 남자의 이런 구석은 처음이라 해인은 왠지 웃음이 났다. 기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데, 왠지 자꾸만 웃게 됐다.
“와, 안 어울리게.”
“나도 어지간해서는 안 이래. 네가 좀 너무하긴 하거든?”
“그래서 사과하러 왔잖아?”
“……사과는 무슨, 또 태일이 얘기만 할 거면서.”
“그래서 안 들어줄 거야?”
얄밉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초승달처럼 웃는 눈 모양이 너무도 가까웠다. 간질이는 듯한 목소리가 너무도 위력적이었다.
이제는 거리감을 잃어버렸는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곁으로 파고드는 해인을 시율은 결코 밀어낼 수 없었다.
어떤 시답잖은 이야기를 해도, 말도 안 되는 걸 졸라도, 그는 해인이 이 모습으로 웃는 한은 꼼짝 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졌다, 졌어.”
“그럼 들어주는 거야?”
들어주다 뿐인가. 고사성어를 늘어놓아도 노랫말처럼 들릴 게 분명했다.
영락없이 기쁜 얼굴로 손을 뻗어오고, 새까만 눈동자를 의심 없이 깜빡이며 당연히 만져줄 거라고 여기며 살갑게 굴어오니까.
마치 노예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래,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강 네가 보기엔 어때?”
“뭐가 대체?”
“이하은 말이야.”
시율은 들어는 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관심 없다는 얼굴이었다. 유일한 말 상대가 이렇게 비협조적이라 해인은 답답할 따름이었고.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모르겠는데…….”
“중요해!”
“귀찮아질 거 같아서 표를 얹기는 싫지만, 나도 동의해. 이하은이 신태일을 좋아한다는 데는.”
“그치?! 강,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역시 내 눈에만 그런 게 아니었어! 해인은 한층 더 눈을 반짝였고, 시율은 시큰둥하게 지적했다. 아주 정곡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이하은도 신태일을 좋아한다고 쳐. 그래서 어쩌고 싶은 건데.”
“……둘 사이에 오해가 있으면 풀어주고, 둘이 잘됐으면 좋겠어.”
“잊은 모양인데…… 이하은은 약혼자가 있어.”
“그치만! 좋아하는 건…….”
“물론 태일일 수도 있지. 하지만 이하은이 두 남자를 동시에 좋아하는 여자일 수도 있어.”
“그, 그런 게 돼?”
그건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경운데! 해인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은도 태일은 좋아하고, 태일도 하은을 좋아한다면 둘이 잘되는 게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건 이상하다고.
“안 될 거 뭐 있겠어? 세상에는 양다리라는 게 존재해. 모든 사랑이 네 생각처럼 순수하진 않다는 걸 알아둬야 할걸.”
“……강, 너도 양다리 걸칠 거야?”
갑자기 무서운 기분이 드는 건 그런 불안함 때문이었다. 시율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얼굴이 됐지만.
“……왜 얘기가 그렇게 되냐. 난 그런 거 못 해. 너도 그럴 테고. 하지만 우린 이하은에 대해서 잘 몰라.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런 건 생각 못 해봤어.”
“우리야 모르지. 그러니까 남의 연애사에 끼는 건 좋지 않다는 거야. 연애 속사정이란 건 정말 어려운 거라고.”
“그렇구나…….”
털썩, 해인은 갑자기 맥이 빠져서는 침대 위로 머리부터 엎어졌다.
자신이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말이다. 시율은 어른이고, 저는 애 같았다.
“네 성격상 가만있기 힘든 심정도 이해는 하지만 말이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뭔가 해주고 싶었어. 주인한테…… 너무 받기만 했잖아.”
“따르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두 남자를 좋아하다가, 약혼자 쪽을 고른 걸 수도 있어.”
시율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시무룩한 기분이 되었다.
태일과 하은을 보며, 뭔가 이상한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고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둘이 안타까웠다.
지금 보니 그런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지만.
그렇구나, 쓸데없는 참견이겠구나. 어른의 속사정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해인은 제가 이 정도로 연애에 젬병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어느 정도냐면, 시율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하나하나 가르치느라 수고가 많구나, 이 남자!
“그보다, 방문은 잠근 거야?”
“응.”
“그럼 이대로 같이 자도 되겠네.”
“……그건 아닌데!”
하여간 이 기회주의자! 틈을 놓치는 법이 없어!
“그러면 옆에 있어주라. 내가 잠들 때까지만이라도.”
“……좀, 그렇지 않나?”
그거 19금 아닌가? 해인은 도망칠까 말까 궁리했다. 그리고 그게 얼굴에 훤히 보였지만 이 기회를 놓칠 강시율이 아니었다.
“괜찮아. 나는 남자 친구잖아.”
이거 해석하면 ‘오빠 믿지?’ 같은데…….
해인의 연애감은 유치원 시절의 소꿉장난에 머물러 있었지만 시율이 위험한 건 유치원생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위험한 거 같은데…….”
“이거 섭섭한데? 난 항상 진심으로 네 말을 들어주는데 너는 도망칠 궁리만 하고 말이야. 그도 아니면 태일이 얘기만 하고. 아, 또 삐져야 하나.”
“……끄응.”
“그러면 이렇게 하자. 절대로, 야한 짓 안 할게.”
이 남자는 당연한 걸로 딜을 거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해인은 그에 홀딱 넘어가는 재주가 있었고.
“조, 좋아. 대신 약속하는 거지? 정말로 야한 짓 하면 안 돼?”
“물론이지. 내가 얼마나 젠틀한데. 대신 너도 약속하는 거다.”
“뭘?”
“내가 잠들 때까진, 옆에 있어주기로.”
시율이 먼저 손을 내밀어 와서 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보다 훨씬 큰 시율의 손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제법 믿음직해서, 이만하면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해인은 자신이 워낙 마음을 여는 것도 느리고, 유치하게 굴고 경계만 하는데도 그에 수준을 맞춰 주는 시율이 내심 고맙게 느껴졌다.
딱, 한 시간 정도는.
***
“아, 안 자아?”
“이상하다. 잠이 안 오네.”
딱 붙어서 나란히 이불을 덮고 있는 건, 그것만으로 도통 안정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율이 몇 시간이 지나도록 잠들지 않는 건 이상했다.
해인은 마침내 아침 해가 뜰 무렵이 되어서야, 제가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은 자지 그래?”
손도 못 대게 하는데, 옆에 누워서 꼼지락거릴 뿐인데, 그게 밤을 새울 만큼 의미가 있는 걸까, 이 남자는?
“그럼 네가 가버리잖아.”
“출근도 해야 하면서…….”
“괜찮아. 이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느긋하게 저를 보는 시선만으로 굉장히 부끄러워졌다.
시율의 저 사랑스럽다는 눈길만으로 충분히, 야한 일을 한 기분이었다. 이상한 데서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서 자꾸만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워졌다.
이 참을 수 없는 기분으로부터 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 이제 나가야 해. 주인이 일어날 거야.”
“벌써 시간이 그런가?”
벌써는 무슨, 5시간 넘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였다. 해인은 이 정도면 약속은 다 지킨 거라고 생각했다.
슬금슬금 이불 밖으로 탈출을 꾀했다. 그보다 빨리 시율의 손에 팔뚝이 잡혔지만.
몸의 반은 침대 위에 있었고, 반은 내려간 상태였다.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넌, 태일이가 아프리카에 갔으면 좋겠어,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뭘 그리 조심스럽게 묻는 걸까.
확실히 태일의 아프리카행은 시율에게도 해인에게도 큰일이었다.
일단, 모든 일상이 변해버릴 테니까. 시율도 더 이상 이 집에 있을 수 없을 테고 말이다.
해인은 잠시 고민했지만 솔직하게 내뱉었다.
“……떠났으면 좋겠어.”
“의외네? 가지 않기를 바랄 줄 알았어.”
“그러면, 이하은을 보지 않아도 되잖아. 사실 이하은이 결혼하는 걸 견디지 못해서라도 주인은 떠날 것 같아. 도망치듯 가버릴 거 같기도 해.”
“널 두고 말이지.”
“난 괜찮아. 강이 있잖아.”
이건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시율은 입술이 멋대로 웃으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그리고 전에 말한 적 있잖아? 난 언젠가 떠나야 할 때가 와서, 누구와도 영원히 같이 있을 수는 없어.”
“……그건.”
“그래서 주인이 어디론가 간다면, 말리지 못할 거야. 난 어차피 헤어질…… 거니까.”
헤어질 사람, 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 나가지 않았다. 멋대로 막혀서, 해인은 다시 한 번 치미는 씁쓸함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몸을 반대로 돌려 시율에게 다가갔다.
그의 앞으로 무릎을 대고 바짝 굳은 그의 뺨에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그런 해인 때문에, 시율은 웃음이 나올 거 같던 기분 따위 당장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만져줘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언젠가 가버릴 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만져주는 것 따위 동정 같아서 슬그머니 화가 나려고 할 뿐이었다.
“강, 나는 확실히…… 연애 같은 건 잘 몰라. 누군가를 힘껏 사랑해본 적이 없어. 그래서 어수룩하기만 하고…… 강을 답답하게만 해서 미안해.”
“그러면 간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
시율은 몸을 일으켜 해인의 손목을 완전히 붙잡았다. 제 뺨을 쓰다듬던 손을 아프도록 붙잡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불안하기만 했다
살랑살랑 웃다가도 가끔 이렇게 자신을 미치도록 불안하게 하는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보통 사귀면 말이야. 한두 달 사귀기도 하잖아? 난 우리도 그런 거면 좋겠어.”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너의 수많은 여자 친구 중 하나였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중에 강, 네가…… 나 때문에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분명 화가 나려던 시율이었다.
하지만 해인이 저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으로 눈물처럼 말을 내뱉자 그는 조금도 화를 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사라지면, 기다리지 마.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지만…… 이별을 고하지 못하고 없어질 수도 있지만. 미워하지 마. 그냥 내가 없어지거든…… 다른 여자를 만나.”
그런 당부를 진지하게 하면 어쩌라는 걸까. 겁에 질린 얼굴로 그러면, 화도 낼 수 없는데.
시율은 다만 힘껏 인상을 구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잘됐네. 사라질 거면 헤어지자는 말 같은 거 하지 말고 사라져. 그러면 난 기다리면 되니까.”
“……바보야! 그러면 네 손해잖아! 너도 결혼도 하고, 어, 다른 여자랑 또 연애도 하고…….”
“세상에 말이야. 정말 좋아하는 여자랑 사귀면서 그다음 여자를 걱정하는 남자는 없어.”
아프지 않았다. 손목이 떨리도록 꽉 붙잡혔는데도 해인의 눈에는 시율의 심각한 얼굴만 보였다.
그가 가르쳐주는 사랑만 들렸다.
“항상 마지막 여자라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사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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