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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47화 (47/114)

47화. 이불 속 고양이

해인의 빤한 눈길에 시율은 텔레비전을 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네가 좋아 죽는 그 주인 녀석이 아프리카로 가버렸으면 좋겠다고는, 그런데 저렇게 사람 좋은 녀석인 걸 느낄 때마다 질투해서 미안한 마음이라고는 말이다.

“뭔데?”

“……별로.”

해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나 싶었지만 이내 관심을 잃고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당장은 무언가 말을 하다 마는 시율보다는, 하은과 태일이 더 신경 쓰였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이 극에 달해 있는 태일인데 혼란만 더 가중되면 어쩌나 싶었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계속 봐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하은의 존재가 그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것 역시 해인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괜찮을까?”

놀라 달려온 하은도 이제 남 같지가 않아 걱정이 됐다.

전에는 언짢고 얄밉기만 한 존재였는데, 태일이 떠날까 놀라 달려온 걸 보니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자신만 해도 태일이 아프리카 얘기를 꺼냈을 때 얼마나 기겁했는지…….

아프리카가 누구네 옆집도 아니지 않은가..

해인은 걱정스러운 귀 모양을 하고는 현관 앞을 불안하게 서성였다.

그리고 시율은, 오히려 그게 더 신경이 쓰였다.

“……태일이가 그렇게 신경 쓰이냐.”

“당연하지.”

묻는 말에 대답은 했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는 해인이었다.

그에 시율의 잘생긴 미간이 뚱하게 좁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거야 대놓고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뭐, 태일에 비하면 항상 그래왔지만 이제는 달라질 때도 됐지 않은가.

자신은 명색의…….

“저기, 네 남자 친구는 나거든?”

“응? 그게 뭐?”

“내가 너무 뒷전인 것 같아서 하는 소리다.”

해인은 그제야 시율을 돌아보긴 했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주인은 주인이잖아?”

“그…….”

남자 친구를 ‘그거’라니! 이 여자, 정말!

시율은 일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살면서 여자에게 이렇게 무시당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대놓고 밀린 적도 당연히 없었다.

애초에 바로 옆에 남자 친구를 두고 다른 남자만 신경 쓰다니, 연애 초보인 고양이에게 바랄 건 아니지만 이건 매너가 아니었다.

천하의 강시율도 울컥하는 수밖에 없었다.

“너 말이야!”

“아! 베란다로 가면 보일까? 놀이터에 갔을 것 같은…….”

“얌마! 너!”

“엥? 왜 그래, 귀찮게?”

해인은 지금 온통 태일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게 아주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게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된 남자 친구에 대한 대접이라니.

“너…… 날 좋아하긴 하는 거지?”

시율은 제 입으로 내뱉어놓고는 순간 식겁하고 말았다.

방금 내가 뭐라고 한 거지? 이거 지금 내가 말한 건가? 내가 물어본 건가? 정말?

내가 이런 얼빠진 질문을 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살면서 여자한테 이렇게 속 좁고 유치한 질문을 해보기는 난생처음이었으니까.

그는 내내 여유 넘치는 연애를 해온 남자였다. 항상 우위를 점하는 건 그였다. 더 좋아하는 쪽은 항상 상대편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간 친구 놈들이 여자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했거나, 받았다고 하면 어지간히 어수룩하다며 코웃음 치고는 했다.

그런데 자신이 이런 질문을 할 줄이야.

더 놀라운 점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인의 대답이 부정적일까 봐 그게 진심으로 두렵다는 점이었다.

이 고양이, 늘 그랬듯 쿨하게 ‘전혀’라고 대답하면 어쩌지?

이젠 그러면 상처 받을 것 같은데.

시율은 자신이 한 질문을 어마어마하게 후회하며 곧장 수습하려고 했다.

“잠깐, 대답하지…….”

“당연히 좋아해.”

“뭐?”

“말이라고 해? 좋아하니까 사귀는 거잖아!”

해인은 마치 한심하다는 투로 소리쳤다. 오히려 시율의 질문이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안 좋아하면 키스하거나, 네 곁에서 잠들지 않는다고. 흥!”

그 새침한 대꾸에, 시율은 잠시간 멍해 있다가 얼른 한쪽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젠장, 얼굴이 좀 빨개진 것 같은데.’

겨우 그 정도에 민망할 만큼 기뻤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인은 고양이 손으로 유리로 된 베란다 창을 벅벅 긁으며 문이나 열어달라는 시늉을 했지만 말이다.

“열어줘!”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 봐.”

“빨리!”

시율은 못마땅한 목소리를 냈지만 해인이 재촉하는 통에 시키는 대로 문을 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고양이 기르는 사람들을 ‘집사’라고 부르곤 했다.

***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은은 제법 진정이 되어 있었다.

태일이 아프리카에 간다는 소식에 그만 이성을 잃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태일이 그런 제의를 받았을 뿐이라며 토닥여주자 안심도 되고, 민망하기도 해서 찔끔 눈물이 났다.

“미안해, 태일아.”

하은은 뒤늦게 정신이 들어서 사과부터 했다.

“미안은 무슨, 괜찮아.”

“난 네가 아프리카에 간다는 줄로만 알고…….”

“확정된 건 아닌데 네가 들은 이야기가 좀 과장됐나 보다.”

“그랬나 봐. 부끄럽다, 정말.”

“너한테 상의하지 못한 건, 그냥 확실하지 않아서였어.”

태일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하은이 이런 반응일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을 앞둔 하은은 여자들 특유의 메리지 블루가 왔는지, 매우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상태였다.

어느 수준이냐면 최근 모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고, 태일은 익히 그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은에게까지 자신의 일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구나, 내가 요즘 너무 예민해서…… 실수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해.”

“결혼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럴 거야.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잖아.”

“……응, 그런가 봐.”

태일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대꾸하는 하은은 요즘 들어 스스로도 정신이 이상해질까 봐 두려울 만큼, 혼란이 극심한 상태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이 결혼을 해도 되는지에 회의를 느끼고는 했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태일의 아프리카행 소식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일이 떠난다면, 결혼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이제 태일의 집에 강시율이라는 남자가 함께 산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대체 무슨 민폐를 부린 건지.

“저기…… 시율 씨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그럴게.”

“그럼 너 아프리카에는 안 가는 거지?”

하은은 평소 같은 밝은 얼굴로 태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모델이니만큼 연기라면 제법 자신 있었다.

“……그건.”

하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태일을 보자니, 한순간에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왜……?”

“모르겠어.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거든.”

발밑이 무너지고 눈앞이 어두컴컴해졌다.

하은은 입술만 몇 차례 벙긋거리다가 겨우겨우 말 같은 것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럼…… 갈 수도, 있는 거구나……?”

“음.”

안 돼. 진정하자, 이하은.

하은은 울 것 같은 스스로를 다잡느라 겨우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무는데 아프지도 않은 듯했다.

“그렇구나……. 저기, 정해지면 알려줄래?”

“알겠어.”

“오늘은 미안해. 나 이만 가볼게.”

“혼자 가게? 데려다 줄게.”

당연하다는 듯 엘리베이터에서 따라 내리는 태일에게서 하은은 한 걸음 물러섰다.

“아냐! 괜찮아. 바로 앞이고……. 정말 괜찮아. 너무 민망해서 그래.”

평소라면 기쁘게 함께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도망쳐야만 했다.

“하은아?”

“미안, 다음에 보자!”

만에 하나 울기라도 했다가는 태일이 걱정스러워할 게 뻔했다. 남편 될 사람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당장 심각해질 남자였다.

하은은 태일을 억지로 떼어내고는 빠른 걸음으로 로비 계단을 내려갔다.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태일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

“없잖아? 없어!”

해인은 베란다에서 보이는 놀이터에 태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간 걸까?

성능 좋은 눈을 반짝이며 밑을 살피는 데만 열중했다. 마치 엄마 잃어버린 아이처럼 산만한 모습이었다.

“태일이 녀석, 어디가 그렇게 좋아?”

뒤쪽에 앉아 얼굴에 손 부채질을 하던 시율은 이번엔 점잖게 물어봤다.

어째 이 고양이 아가씨에게 빠질수록 자신의 페이스를 잃기는 했지만 말이다.

“응? 그야 주인은 내가 본 사람 중 최고로 좋은 사람이니까!”

“그뿐이야?”

“더 필요해?”

“……그냥 주인으로서 좋은 거지?”

해인은 오늘따라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의아하게 생각할 뿐, 별다른 이유를 짐작하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질투 같은 걸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시율 본인도 놀랐다시피 말이다.

“음, 그리고 날 구해준 사람이니까? 은인이기도 하고. 또, 먹여주고 재워주잖아?”

“은인이라…… 안 좋아하면 그게 이상하다는 얼굴이네.”

“그럼!”

시율로서는 배 아픈 일이지만, 해인은 가만두면 태일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백 가지도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해인의 주인 찬양에 시율의 속이 부글대는 이유는, 아마도 전과는 마음의 크기가 달라져서이리라.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라이벌이 너무 강력했다. 스타트부터가 한참 밀렸고……. 다행이라면, 이성의 범주에 먼저 든 게 자신이라는 정도였다.

자력으로 파고든 거지만.

시율은 싱긋, 최대한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해인의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따지면 너도 내 은인인 거, 알아?”

갑자기 뭔 소리래? 해인은 까마득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시율을 올려다봤다.

고양이일 때 보는 사람은 아주 커다란 존재였다. 지금 해인에게 시율이 그랬다.

“내가? 언제?”

“네가 처음 사람이 됐던 날. 진찰실에서 날 구해줬을 때 말이야.”

“……아아!”

“그때 네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얼마나 다쳤을지 상상도 안 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저 새침한 눈을 보면, 지금 와서는 그런 일 잘 기억도 안 난다는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고양이란 멋대로 도움을 구하고는 하나도 고마워하지 않지만, 대신 위로가 되거나 도움이 되고도 생색을 내지 않는 희한한 생물이었다.

뭐든지 제가 한 적 없다는 듯 구는 게 특징이랄까.

“너에게 평생 고맙다고 해도 부족할 거야.”

“……부끄럽게스리. 그건 구해줬다기보다는……! 그냥 도와준 것쯤이지!”

“흐음, 혹시 후회하는 건 아니고?”

“후회?”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네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몰랐을 테니까.”

그리고 이런 관계가 되지 않았을 테지. 서로 힘들지 않았을 텐데. 나는 이렇게 매번 절절한 패배자의 기분으로 널 바라보지 않았을 텐데.

시율의 목소리가 조금은 자조적으로 들렸다. 웃고 있는 음성이지만 어딘가 심난함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해인은, 시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속내를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후회 안 해.”

“오, 전에는 했다는 거네? 지금은 왜 안 하는데?”

“말했잖아. 나도 강 네가…….”

띠디딕.

“미야!”(주인!)

“…….”

어쩌면 이렇게 순식간일까.

겨우 여자로 대하고 있었는데, 주인이 오는 소리에 금세 개냥이가 되어서는 쌩, 하니 현관으로 튀어가 버렸다.

시율은 해인이 앉아 있던 베란다의 빈자리를 노려보다가, 빤히 노려보다가…… 그 자리에 굳어서는 속으로 소리쳐야 했다.

‘나도 다음은!’

젠장, 타이밍 죽이는구만.

말하다 말고 주인 반기는 강아지처럼 가버릴 줄이야. 시율은 베란다에 웅크리고 앉아 그대로 잠시간 일어나지 못했다.

그를 이상하게 여긴 태일이 등 뒤로 다가왔다.

“형? 거기서 뭐 하세요.”

“……아냐. 네 친구는?”

시율이 몸을 일으키며 돌아보니 해인은 그새 태일의 품에 안겨 비비적거리느라 바빠 보였다.

이쯤 되면 나 좀 불쌍한 거 같은데.

여자 친구라고 하나 있는데, 대부분 고양이 모습인 데다가, 이제나저제나 눈만 뜨면 주인 타령이니 말이다.

“진정이 되자마자 민망한지 집으로 갔어요. 형한테도 죄송하다고 전해달라던데요.”

“흐음.”

“제가 아프리카에 가는 줄 알고 놀랐던가 봐요.”

내 여자 친구도 이상하지만 네 여자 사람 친구의 반응도 좀 이상한데.

수상한 느낌에 시율이 눈썹을 까닥였고, 하은에 대해서는 비슷한 생각을 하는 해인의 눈도 반짝였다.

***

그 밤에 해인은 시율의 이불 속으로 잠입했다. 물론, 고양이의 모습이었다.

행여나 잠귀가 밝은 태일이 깰까 봐 시율의 귓가에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강.”

“…….”

“가앙?!”

문제는 시율은 잠귀가 아주 어둡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군!

해인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시율의 머리 근처로 올라가서는, 그의 귓가를 혀로 핥기 시작했다.

사악, 사악.

고양이의 혀는 심하게 까끌까끌했다. 개와 달리 아주 거칠어서 핥아지면 마치 철 수세미에 문대지는 느낌이었다.

“히익?”

몇 번 핥지 않아 시율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마치 악몽이라도 꾼 것 같은 얼굴로 말이다.

“일어나 봐.”

“……너, 꼭 잘 때 와서 이러더라.”

“지금이 아니면 말을 걸 수 없는 걸 어떡해.”

해인도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율은 잠을 방해받은 탓인지 매우 언짢은 얼굴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리광 부리는 걸 받아주는 건 좋아하지만, 잘 때는 피해줬으면 좋겠는데.

“이왕이면 이런 건 사람 모습으로 해줄래?”

“야하잖아, 그건!”

“그래서, 뭔데, 오늘 밤은 또.”

“있지! 주인이랑 이하은 말이야, 역시 서로 좋아하는 것 같…….”

“난 잔다.”

“엥?”

시율은 어지간해서는 해인이 말하는 걸 끝까지 들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닌지, 해인이 말하는 도중에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다시 누워버렸다.

이불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주 퉁명스러웠다.

“알 게 뭐냐고, 다른 커플 일을. 그 문제라면 관심 없다니까 그러네.”

그렇지 않아도 쌓인 게 많아서 태일의 일이라면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시율은 정말 잘 생각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해인이 이불 위를 알짱대며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왜, 왜에? 강 너도 주인 좋아하잖아. 둘이 친구잖아. 그러니까 이왕이면…….”

“좋아하지. 남자 대 남자로서 좋은 동생으로. 하지만 말이야, 남자들은 남의 연애사에 관심 없어. 차이고 오면 위로주를 사줄 뿐이라고. 알아들어?”

“하지만…….”

“잔다.”

“……가앙! 그러지 말고!”

해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인 시율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율은 이상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비협조적이었다.

시율을 깨워보려고 등 위에서 꾹꾹이도 해보고, 이불 위를 깨물어서 당겨보기도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정말 잘 셈인지 반쯤 잠에 잠긴 목소리만 이불 안에서 새어 나왔다.

“하암, 사람일 때 얘기하면 들어줄게…….”

“에?”

“키스라도 하면서 부탁하면 말이야……. 알겠지? 잘 자라.”

“그런 게 어딨어!”

그건 안 들어준다는 말과 거의 같았다.

해인이 토라진 소리를 내자 시율은 그제야 슬쩍 이불 밖으로 얼굴을 보여줬는데, 그 눈길이 심히…….

“왜? 고양이는 신태일 거잖아. 내 여자 친구는 사람 쪽이거든. 언제나 뒷전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퉁명스러울까.

해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시율이 단단히 삐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몇 번인가…… 아니, 해인이 생각하기에도 거의 매번 뒷전으로 밀려났던 걸 속에 쌓아둔 게 분명했다.

“…….”

잠시 말이 없나 싶던 해인은 시율의 침대에서 내려가 방을 나섰다. 시율은 포기하고 갔나 싶어 안심하고 잠을 청하면서도, 자신이 심했나 싶어서 못내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 커플이 잘되든, 잘 안 되든 남의 일이었으니까.

보통의 사람들은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지만, 적어도 시율은 제 여자 친구 일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이내 그가 깜빡 잠이 들려는데, 방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더니 침대 위로 무언가 올라오는 느낌이 났다.

분명 해인일 텐데 무게감이 전과 달랐다, 훨씬 묵직한 것이…….

“강, 강!”

“……관심 없다니까 그러…… 네.”

“나 왔어.”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해인은 웃고 있었다.

까칠한 혀 대신에, 부드러운 혀를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이제 내 얘기 들어줄 거야?”

더없이 살갑고 보드라운 손끝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고양이 눈이 아니라, 따듯한 숨결을 가진 몸이었다.

‘맙소사.’

시율은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는 걸 느꼈다.

눈앞에 있는 건, 눈에 익은 자신의 티셔츠를 주워 입고 온 해인이었다.

이곳이 한밤중의 침대 위라는 사실은 그에게만 문제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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