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순진한 고양이
“하암, 잘 잤…… 이 아니라.”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자신의 방에서 걸어 나오던 시율은 그만 멈칫, 굳어버렸다. 평소처럼 하던 아침 인사도 차마 잇지 못했다.
눈 밑이 심하게 퀭한 태일과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아, 일어나셨어요? 죄송해요. 바로 치울게요.”
“난 괜찮은데.”
“아니에요. 식사하셔야죠.”
항상 말끔한 태일이었는데 오늘은 초췌해 보이기까지 했다. 앉아 있는 식탁 주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류들로 복잡한 상태였다.
밤새 머리를 싸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보다 너…… 잠은 잤냐?”
시율이 식탁 근처로 다가가며 묻자 태일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잠이 통 안 와서요.”
“출장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
“그야 그렇지만……. 참, 아침으로 토스트 구울 건데 드실래요?”
“나야 고맙지만.”
“씻고 오세요. 정리해둘게요, 형.”
한숨도 안 자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민망한지 태일은 부랴부랴 식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긴 태일의 집이고, 월세를 내고 있다고는 해도 시율은 얹혀사는 입장이니 적당히 편하게 굴어도 좋으련만.
태일은 항상 완벽하다 못해 과하게 시율을 배려하곤 했다.
예를 들면 욕실을 쓰고 나서 항상 거울을 깨끗하게 닦고 나온다거나, 간식거리를 사올 때면 시율의 몫까지 꼭 함께 사온다거나.
노트북을 쓰다 보니 태일은 넓은 식탁 위에서 주로 작업하는 편이었는데, 시율과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는 이렇게 매번 치우고 있었다.
집주인이 오히려 세입자의 눈치를 본달까.
이래저래 냉소적인 시율이 보기에도 태일은, ‘쓸데없이 좋은 녀석’이었다.
“뭐, 정리할 것 있나? 대충 소파에서 먹지, 뭐.”
“그래도…….”
“정말 괜찮으니까 편하게 하자고, 편하게. 너도 피곤할 테고.”
“냐냐!”(맞아, 맞아!)
때마침 식탁 위로 폴짝, 뛰어오른 건 해인이었다.
“먀아옹 야옹!”(집주인은 주인인데!)
아주 어린아이 같기도 한 맑은 소리를 내며, 날렵한 검은 몸매를 뽐내고 사랑스러운 두 귀를 쫑긋댔다.
뿐만 아니라 특유의 황금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신기하게도 고양이란 존재 자체로 애교를 부리는 것과 같았다.
“봐봐, 이 녀석도 그렇다잖냐.”
시율이 자연스레 손을 뻗어 해인의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해인은 두 눈을 꼭 감고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고양이들은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바짝 세우고는 했는데, 지금 해인은 딱 그런 꼬리에 웃는 눈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와, 며칠 사이 둘이 많이 친해졌나 봐요?”
“어?”
그리고 둘의 그런 모습은 태일에게 꽤나 낯선 것이었다.
그가 출장을 떠나기 전만 해도 해인은 시율이 부르면 도도하게 못 들은 척하거나, 쓰다듬으려고 하면 새침을 떨며 몸을 뺐으니 말이다.
시율이 억지로 붙잡고 만지지 않는 한은.
“이렇게 쓰다듬게 해주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태일의 말에 쓰다듬을 받으며 골골거리던 해인은 아차! 싶었다.
태일이 없는 며칠간 시율과 딱 붙어 지냈더니 그만 스킨십에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거부감이 없어지다니!
“……뇨뇨뇨.”(……오해야, 오해.)
뭐랄까. 아빠에게 남자 친구와 있는 걸 들킨 기분이랄까.
스스로도 변한 모습이 못내 부끄러웠다.
못 보일 걸 보인 듯해 해인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서 식탁에서 내려가 버렸고, 시율은 이제 해인이 고양이 말을 해도 얼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느낌이랄까, 감이랄까.
‘저 녀석.’
겨우 길들여 놨더니 원주인 앞에서는 다시 부끄러움을 타며 도망치기 바쁜 해인을 보며 시율은 생각했다.
태일이 있는 한은 계속 이런 식일 것 같다고.
***
입 밖으로 내긴 그렇지만, 시율의 입장에서는 사실 태일이 아프리카로 떠나주는 편이 좋았다.
일단 그렇게만 되면 해인이 온전한 제 것이 될 테니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태일의 아프리카행은 엄청난 유혹이었다.
물론 너무도 개인적인 욕심이라 내색할 순 없었지만.
“어때? 밤새 생각해보니까 답은 좀 나와?”
시율은 머리도 덜 말린 채로 욕실에서 나와 태일의 곁으로 털썩 앉으며 물었다.
“에…… 아뇨.”
“많이 고민해볼 문제긴 하지.”
태일은 멍하니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마시는 건지 마는 건지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아무래도 걸린 게 많다 보니까요. 어느 쪽을 택해도 잃고 얻을 게 있어서…….”
“그러겠네.”
“밤새 고민하다 깨달은 건데, 살면서 이렇게 큰 결정을 해보기는 처음인 것 같아요.”
“그 정도야?”
시율은 제 몫으로 보이는 토스트를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 인생이 걸린 중요한 일이니까.”
“문제는 고민이 끝이 안 난다는 거죠.”
“고민은 길어도 부족하지 않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아프리카에 가서 원하는 일을 하라고 슬슬 꾀고 싶었다.
태일의 고민 중 자신에게 이득이 있는 한쪽으로 무게를 실어주는 것 따위는 시율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형이 부러워요.”
“내가?”
“뭐든지 자신 있게 척척 해내지 않습니까. 결단도 빠르고. 저는 그러질 못하거든요. 남자답지 못하다는 소리도 자주 듣고. 살면서 내내 그랬죠.”
“글쎄, 대신 넌 좋은 사람 소리를 듣잖냐. 난 항상 나쁜 놈 소리를 듣는다고.”
“설마요.”
“정말이야. 그리고 너처럼 신중해서 나쁠 건 아무것도 없어.”
시율은 태일이 자신을 정말로 신뢰한다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말을 얹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은 태일에게 조언하기 적합하지 않았으니까.
가라는 말은 해줄 수 있어도, 가지 말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에 중요한 사안이라 자신의 욕심만으로 섣불리 한쪽으로 떠밀 순 없었다.
아직까지는 욕심보다는 양심이 앞서고 있었다. 태일이 좋은 녀석만 아니었다면 양심 따위는 개나 줘버렸겠지만.
시율은 요즘 와서는 태일이 나쁜 녀석이었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텐데 싶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신중하다 못해 스스로도 답답할 정도라 문제죠.”
“넌 답답이라기보다는 그냥 모험정신이 부족한 타입이라고 해야 하나.”
“제가요?”
“그래, 넌 모든 게 너무 안정적이잖냐. 너 자신도 주변도. 변화를 안 좋아하지. 안정 지향적 인 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냥 너라는 인간이 그런 타입인 거지.”
“맞아요…… 정곡을 짚으셨네요. 전 역시 형님이 제게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태일은 간혹 순종적인 대형견 같아 보일 때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순진무구하게 사람을 신뢰하는 눈을 할 수는 없었다.
시율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심 섞인 조언을 할까 봐 말을 피하는 것도 있었지만, 본래부터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오지랖이라면 아주 질색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해인이 와서 큰일이라며, 하은이 태일을 좋아하는 거 같다고 했을 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남에게 참견한다는 건 그만한 책임도 져야 하는 일이니까. 참견에 대한.
평소 태일이 자잘한 조언을 구했을 때는 인생 선배로서, 확실한 길을 안다는 전제하에 명확한 길을 제시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이런 큰일에는 선뜻 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저는 제가 결정한 일에 후회한 적이 많아요.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의 의견을 얻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태일이 제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를 깨닫자 외면하는 건 외면하는 대로 양심에 찔렸다.
제가 언제부터 이렇게 양심 있는 인간이었나 싶은 시율이었다.
아마도 어느새 근처에 다가와 빤히, 주시하기 시작한 해인 때문이리라.
제길,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전전긍긍하는 건 제 인생에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럼…… 조언까진 아니고, 그냥 내가 뭔가 결정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울 때 쓰는 방법인데…….”
“예! 뭔가요?!”
“결정에 대한 장점 단점을 각각 전부 종이에 적어. 그리고 눈에 띄는 곳에 두고 의식적으로 계속 읽어. 외울 때까지. 손으로 쓰고 눈으로 계속 봐.”
“외우라고요? 이미는 아는 걸 왜 새삼……?”
“그렇긴 한데, 아는 거랑 각인된 건 다르거든. 공부하는 느낌으로 손으로 적고 눈으로 계속 읽으면 이게 객관적인 의견으로 머리에 박히거든. 결정에는 그게 필요해.”
태일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곁에 앉은 해인까지 똑같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게 필요한 이유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결정을 위해서야. 알아들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데……?”
“사람의 본능이라는 게 감정적으로 결정하기가 쉽거든. 하고 싶으면 단점을 덮고, 하기 싫으면 장점을 외면하지.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각인하라는 거야.”
시율의 말이 끝나자마자 둘이 동시에 알아들었다는 소리를 냈다.
“아아!”
“먀!”
해인과 태일은 순진하다는 면에서 많이 닮아 있었다. 음흉하지 않고, 마치 때 묻지 않은 아이같이 선하다는 점도 말이다.
시율은 해인이 태일에게 끌린 게 아마 그런 부분 때문일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동물과 아이는 본능적으로 좋은 사람을 알아본다지 않는가.
이득과 실리에 연연하는 저와 달리, 인정 넘치는 태일이니까. 솔직히 시율도 태일의 그런 면이 부러웠다.
만약 저도 그랬다면 해인에게 진작 예쁨 받았을 텐데.
아무튼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알아들었으면 다행이고. 여튼, 내 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거야. 객관성을 잃지 말라고, 친구.”
“예, 도움이 됩니다.”
“도움은 무슨.”
뭘까, 이 양심에 찔리는 기분은? 시율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은 태일의 저 반짝이는 ‘당신을 무한하게 믿어요.’ 눈빛과 해인의 ‘짜식, 너 엄청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건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함은 빛의 힘으로 악함을 이긴다고 했던가.
의심이라고는 없는 둘 앞에 있자니 시율은 왠지 저만 악역이 된 기분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형!”
“……자기 일이니까 고민되고 객관적이기 쉽지 않은 건 당연하니까…… 너무 자괴감 갖진 말고.”
“네!”
“음…… 난 그럼 이만 출근이라서.”
마치 패하고 퇴장하는 악당 같은 대사였다.
시율은 혼자 속으로 끙끙 앓아야 했다. 사실은 태일이 아프리카로 가길 바란다는 건, 역시 죽을 때까지 비밀이었다.
직설적인 성격의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건 사실 따로 있었다.
양심이니 책임이니 그런 문제는 둘째 치고…… 만에 하나라도, 태일을 떠나보냈다는 이유로 해인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또다시 미움 받느니 차라리 고양이 주인은 따로 있는 지금이 나았으니까.
제가 왜 이러고 있나 싶어 투덜대야 하는 시율이었다.
***
시율이 출근한 후 태일은 그제야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나 싶었다.
하지만 뒤척이다가 얼마 못 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식탁에 앉아 심기일전한 얼굴로 시율이 가르쳐준 대로 아프리카로 갈 경우와, 가지 않을 경우의 장단점을 메모지에 적기 시작했다.
가까이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며 해인은 이 남자 뼛속까지 모범생이구나, 생각했다.
어쩌면 이렇게 말을 잘 들을까.
“이만하면 되려나?”
태일은 메모를 방이며 냉장고 문짝이며, 화장실까지 여기저기 눈 닿는 데 붙이고도 부족해서 소파에 앉아 중얼중얼, 외울 기세로 읽기 시작했다.
그 외에는 그저 멍하니 사진들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는 태일이 해인은 걱정돼 죽을 맛이었다.
옆에 가서 머리를 손 가까이 들이밀면 쓰다듬어는 주지만 그 손길이 너무도 매가리 없는 것이라서 오히려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기운 내라는 건가?”
“아옹.”
“고마워. 이런 널 두고 내가 어떻게 갈까…….”
해인은 태일의 고민을 어렵게 만드는 데 자신도 한술 거든다는 걸 알았다.
달리 현실적인 이유도 많을 테지만 자신을 데려갈 수 없다는 사실도 그에게는 걸림돌인 것이다.
“냥이 너라면 어떻게 하려나. 고양이니까 휙, 가버리려나.”
“…….”
태일은 해인이 개냥이라고 부르면 못 들은 척하자 언제부턴가 그렇게 줄여서 부르고 있었다.
“얼른 결정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냥 고양이었다면 알아듣지 못했을 태일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해인은 자신이라면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노력은 스스로 할 수 있어도 기회는 스스로 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떠나라고 떠밀어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은 겨우 고양이였으니까.
그가 가지 않기를 마음으로 바라면서도, 떠나서 잘되고 돌아오기를 바라기도 했다.
어차피 자신은 겨우 반년 뒤면 떠나야 할 테니까.
태일이 먼저 떠난다면 그건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해인은 애탄 마음에 태일의 손등만 핥아주었다.
기운 내라는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자신은 괜찮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
저녁식사를 마친 오후 8시 무렵이었다.
시율도 퇴근하고 쉬고 있었고, 태일은 피곤이 극에 달했는지 일찍 잠들려던 차였다.
딩동.
“누가 왔나?”
“올 사람이 있어?”
“글쎄요.”
이 집은 그다지 손님 방문이 없는 편이었다. 손님이라곤 기껏해야 태일의 절친이자 매니저인 기도 아니면, 하은이었다.
기도는 특히나 자주 놀러 와서 시율까지 남자 셋이 술판을 벌이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나야 태일아!]
“하은아?”
[문 좀 열어줘.]
익숙한 손님이었다. 하지만 근래는 자주 오지 않던 사람.
급한지 문까지 두드리고 있는 건 가까이에 살고 있는 하은이었다.
인터폰 너머의 상대를 확인한 태일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현관문을 열어주었고, 하은은 거의 뛰어들다시피 집 안으로 들어왔다.
“먀?”(뭐야?)
갑작스러운 방문에 해인은 동그란 눈을 뜨고 현관을 바라봤고, 시율은 하은과 몇 번 안면이 있어서 왔나 보다 하고 신경도 쓰지 않고 텔레비전만 볼 뿐이었다.
시율은 해인 말고는 여자에 아주 시큰둥했다. 문제는 해인이 그걸 몰라준다는 거고.
“연락도 없이 갑자기 어쩐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너 아프리카에 간다며!”
“……기도한테 들었구나.”
어쩐지 뛰어드는 모양이 다급하다 했더니 하은이 그 일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해인이 보기에 지금의 하은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너무 놀라고, 당황스럽고, 그러다 화도 나서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뛰어온 얼굴.
“어떻게 그래!”
“……확정된 건 아니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고민한다는 건 갈 수도 있다는 거잖아!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은 거야!”
“확실하지 않아서 그랬어.”
“내가 이제 친구도 아닌 거야? 그래서 그래?”
하은은 숨도 안 쉬고 말하며 태일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리다시피 했다. 그 예쁜 얼굴이 절박함에 물들어서 엉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근래 결혼을 준비하면서 하은은 태일의 집에 오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태일은 결혼을 앞둔 여자가 남자들만 사는 집에 오면 안 좋은 소문이 날 수도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하은은 자의라기보다는 타의로 전처럼 자주 이곳에 오지 못하게 됐다.
“나한테만 비밀로 할 건 없잖아……!”
“그런 거 아니야. 형도 있고, 일단 나가자.”
태일은 울기 직전인 하은을 진정시켜 집에서 데리고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놀이터에라도 가려는 모양이었다.
영 신경 안 쓰고 있던 것 같던 시율이 툭, 하니 내뱉었다.
“……여긴 저 녀석 집인데.”
“그러니까 말이야.”
시율과 단둘이 된 뒤에야 해인도 입을 열었다. 아마도 오늘 처음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녀석 사람 되게 미안하게 만드네.”
“응? 뭐가 미안해?”
해인의 되물음에 시율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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