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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45화 (45/114)

45화. 위기의 고양이

늦은 아침, 부스스 눈을 뜬 해인은 당장 시율의 뺨부터 때렸다.

곁에 반나체로 누워 있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긴 고양이의 꼬리로 인정사정없이 찰싹, 찰싹.

일어나, 이 남자야!

“아, 아야…… 뭐야아?”

시율은 지금 침대와 거의 한 몸이었다.

저를 깨우는 꼬리가 귀찮은지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좀 더 자겠다고 덩칫값도 못하고 칭얼댔다.

해인이 봐주지 않고 계속 깨우자 그는 아예 커다란 몸을 뒤집고 엎드려버렸다.

그러곤 베개 속으로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겠다는 그 의지라니. 시율은 의외로 잠이 많은 남자였다.

해인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잠귀가 밝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전화!”

“……응?”

“전화 오잖아! 아까부터 계속!”

꼬리로는 깨울 수 없자 해인은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시율의 뒤통수를 연달아 때려댔다.

아까부터 울리는 전화 벨소리가 거슬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단잠에 빠져 있다가 남의 전화 소리에 억지로 깨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고양이 모습이라도 좋다고, 같이 자자고 졸라서 기껏 옆에 누워줬건만…….

“으음, 휴대폰이…….”

“빨리!”

잠을 방해받은 고양이는 사납기 마련이었고, 외견 완벽해 보이는 시율의 약점 아닌 약점이라면 잠귀가 아주 어둡다는 점이었다.

억지로 깨우니 그제야 시율은 비몽사몽, 시트 위에 엎어진 채로 손만 뻗어 휴대폰을 찾았다.

“여보세요……?”

-아, 오랜만이다? 나야, 나, 건태.

“건태?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해인은 시율이 통화하는 걸 확인하곤 다시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청했다.

아니, 청하려고 했다.

뒷목을 긁적이며 마지못해 통화를 하는 시율의 인상이 점점 구겨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잠을 방해받은 그는 매우 불쾌해 보였다.

“뭐? 그러니까, 네 여자 친구가 강아지를 분양받았는데…… 계속 설사를 한다고?”

-그렇다니까! 왜 그런 거야?

“……생후 며칠이라고?”

-50일쯤?

“어디서 분양받았는데.”

-숍에서.

해인은 한쪽 눈만 뜨고는 통화하는 시율을 쳐다보았다.

소감이라면, 섹시한 남자의 절정은 아침이구나 싶은 거였다. 시율이 들었다면 남자의 절정은 밤이라고 정정해줬겠지만.

“숍이라……. 그러면 거기서 뭔가 걸려왔을 수도 있겠네. 잠복기가 있는 병도 있으니까.”

-데려온 지 한 열흘 됐나?

“……미친 거 아냐? 그럼 40일짜리를 분양받았다고?”

-문제 있어?

“사람으로 치면 젖도 못 뗀 아기를 데려온 거야. 당연히 면역력은 바닥인 상태고. 밖에서 산책이라도 시킨 건 아니지?”

-에…… 시켰는데.

시율의 인상이 한결 구겨졌다. 해인은 그 모습을 몰래 구경하며, 시율은 화낼 때가 가장 섹시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바로 눈에 뭐가 씌었다는 걸지는 몰라도 말이다.

“미친놈이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이 추위에 제정신이야?”

-뭐, 말이 그러냐? 그럼 개를 산책 데리고 나간 것 때문에 병이라도 걸렸다는 거야?

“백 프로 산책 때문이라고 확답은 못 하지만 사람도 백일 안 된 아기는 밖에 안 데리고 나간다. 면역력이 약해서 병에 잘 걸리니까.”

-……몰랐지, 우리야!

“부디, 짐승을 기를 땐 공부를 좀 하고 길러라. 생명이잖냐.”

-그래, 잘못했다 치자.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해인의 성능 좋은 귀는 시율이 작게 이를 가는 소리를 포착했다.

“병원에 가.”

-아니, 단순한 설사일 수도 있는 거 아냐? 내가 묻고 싶은 건 뭘 먹여야 설사를 안 하냐는 거지.

“미친놈아, 약을 먹여야 낫지. 단순 설사가 아니라 파보나 코로나일 수도 있어. 그건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는 거고.”

-파보……가 뭐? 병 이름이야?

“그래, 폐사율이 엄청 높은 병이라고. 알아들어? 닥치고 일단 빨리 병원에나 데려가.”

확실히 시율은 인정머리가 없었다. 매정한 구석도 있고. 하지만 틀린 말은 안 한다는 점에서 상대를 곧잘 기죽이는 타입이었다.

사람한테는 유난히 강경하고 불친절한 편이었다.

-돈이 많이 들지 않나, 그러면? 그냥 네가 좀 대충 봐주면 안 되냐? 친구가 수의산데 덕 좀 보면 어때서 그래.

“내가 의산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내가 있는 병원으로 데려오든가, 가까운 병원에 데려가라고, 그러니까.”

지켜본 바로는 차라리 개나 고양이에게 더 상냥한 남자였다.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는 않달까.

그럼 자신에게는?

통화를 마친 시율을 지켜본 해인은 두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친구야?”

“자기 필요할 때만 연락 오는 걸 친구라고 해야 한다면.”

“흐음…… 강아지가 아프대?”

“그런가 보지.”

“어린데 설사하고 그러면 심각한 거 아닌가?”

해인처럼 동물병원 출근을 몇 달쯤 하다 보면 아무래도 기본적인 지식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수의학적인 부분도 부분이지만, 그보단 저렇게 동물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한 주인들이 많다는 것과 그 애완동물이 겪게 되는 고통을 알게 된달까.

“어쩌겠어. 주인이 치료해줄 의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그건 그렇지만…….”

고양이가 되고 나서, 죽어가는 동물들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국내에서 애완동물이란 단순한 주인의 소유물이었다.

그 동물이 얼마나 아프든, 설사 어떻게 죽어가든, 치료해줄 권리도 방관할 권리도 전부 주인에게 있었다.

우스운 예시지만 학대받는 동물을 주인의 동의 없이 구출해서 치료를 해준다면, 그건 절도죄가 성립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몰라서 그렇지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병원에 데려갈 거야. 저녁에 문자 좀 해봐야지.”

시율에게 수의사로서 보람 있는 일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는 걸 알았다.

치료해주고도 욕을 먹는 일이 허다하고, 치료비가 많이 나오면 동물을 버리고 찾으러 오지 않는 주인도 있었다.

치료비 견적을 듣고는 가망이 있는데도 그냥 안락사 해달라는 이도 있었다.

예전에 해인이 그랬듯, 짐승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짐승들도 사람과 똑같이 고통을 느꼈다. 다만, 아픈 내색을 하면 무리에서 도태될까 봐 안간힘을 다해 아프지 않은 척할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오래 봐오다 보면 시율처럼 때로 사나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을 듯했다.

“강.”

“응?”

“내가 아프면…… 어떻게 할 거야?”

시율이 워낙 솜씨 좋고 단호한 수의사라서 자신에게도 그럴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치료가 불가능할 만큼 아프면 안락사를 권하고, 동물이 아프면 그 주인부터 질책하듯, 자신이 아파도 그렇게 냉정하게 구는 걸까?

해인의 돌연한 물음에 시율은 입술을 몇 번인가 벙긋거리다니 조용히 손을 뻗어왔다.

귓가를 쓰다듬으며 바람을 말하듯 내뱉는 말이 어딘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아프지 마.”

차마 견딜 수 없다는 듯.

***

시율과의 사이가 어떻게 변했든, 해인은 이제 다시 애완고양이로서의 생활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주인인 태일이 모처럼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었으니까.

“다녀왔습니다. 어? 형,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오후 출근이라서.”

“아하.”

“이번 달에 당직이 잦았거든. 그 특혜지.”

커피를 마시며 대꾸하는 시율의 눈은 어느새 저를 등지고 총총, 태일에게로 달려가는 해인에게로 향했다.

저 기분 좋은 꼬리 좀 보라지. 남자 친구보다 주인이다, 이건가?

“개냥아.”

“먕먕!”

이름값을 하는 건지, 고양이가 아니라 개처럼 격하게 반기고 있었다.

시율이 귀가했을 때는 저렇게 반겨준 적이 없었다. 해인은 항상 시율이 한참 꼬드겨야 마지못해 놀아주고는 했다.

그런데 태일에게는 부르지 않아도 달려가고, 퇴근만 해도 곁에 딱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지금만 해도 기분 좋은 가르릉 소리를 흘리며 태일의 다리에 열심히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그러다 품에 안기자 엄마에게 안긴 아기처럼 행복해하며 태일의 손등을 핥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게 고양이가 하는 단순한 환영 인사라는 건 알지만…… 배가 아팠다.

‘저 녀석이 저렇게 좋을까?’

그는 뭔가 빼앗긴 기분이었다.

고양이의 주인은 엄연히 태일이었지만, 고양이 속에 든 건 제 것이었으니까.

둘을 분리할 수도 없고…….

시율이 속을 알 수 없는 지긋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자 태일이 머쓱해했다.

“그럼…… 언제 출근하시는 겁니까?”

“뭐, 한 두세 시간 후에? 1시쯤.”

“잘됐네요. 사실 바쁘지 않으시면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상담? 나야 상관없지만.”

태일이 해인을 안아 든 채로 시율 쪽으로 다가왔다.

오자마자 짐도 풀지 않고 운을 떼는 게 제법 심각한 문젠가 싶었다. 태일은 항상 그랬듯 진지해 보였다.

“뭔데 그런 얼굴이야?”

시율이 고갯짓으로 식탁을 가리키고 식탁 의자에 앉았고, 태일도 맞은편에 앉았다.

해인은 여전히 기분 좋은 얼굴로 태일의 품 안에 안겨 있을 뿐이었다.

“확정된 이야기는 아닌데…….”

“뭔데?”

“이번에 촬영 간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제의를 받게 돼서요. 그…… 롭 스미스라고, 혹시 아십니까?”

“알아. 엄청 유명한 사진작가잖아. 한국계 미국인이었나?”

“맞아요. 그분을 만났어요.”

둘이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건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해인은 신경 쓰지 않고 식탁 위로 배를 깔고 누워버렸다.

태일은 묘하게 시율을 신뢰해서 그에게 자주 이런저런 상담을 하고는 했다.

정에 약한 태일에 비해 시율은 매서울 만큼 단호한 구석이 있어서, 상담하고 나면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번 출장에서 그분이랑 친분을 쌓게 됐는데 운이 굉장히 좋았달까. 제가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지 금방 친해졌어요.”

“그거 축하할 일이네. 그 바닥도 인맥이 중요하잖아.”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요.”

“그러겠네. 내가 알 정도면 그 바닥 거물이니까.”

해인이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막연히 드는 생각이라고는, 단순하게 태일이 영어를 잘하겠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도 아니면 그 외국인이 한국어를 잘하거나.

“얘기를 좀 하다가 연락처도 주고받고, 제가 전에 찍은 사진들도 보여주고…… 나중에 제가 찍고 싶은 사진 이야기를 했는데…….”

“그랬는데?”

“……그럼 이번에 아프리카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푸웁.”

“므악?”(뭐야?)

아프리카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해인과 시율 둘 다 못지않게 기겁하고 말았다.

“프로젝트 멤버가 한 명 펑크 났답니다. 그런데 마침 제가 영어도 하니까…… 정말 생각이 있다면 함께 일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팀이 돼서.”

“실력을 인정받는 거네. 팀이란 건 롭 스미스랑?”

“네.”

태일이 전부터 열망하던 일이긴 했다. 웅장한 대자연을 찍는 일은.

언젠가 밀림에 가는 걸 꿈꾸고, 언젠가 천 가지 색을 가진 초원의 빛을 전부 카메라 속에 담고 싶다고 했다.

해인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얼이 빠져 있었고, 시율은 놀라긴 했지만 팩트를 짚고 있었다.

“언제?”

“일정상 출발은 석 달 뒤지만 한 달 뒤부터 미국에서 같이 출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답니다. 엄청 장기 프로젝트라…… 일단 가면 2년 정도 못 돌아오고요.”

“2년이라…….”

“그리고 제가 고민할 수 있는 기간은 일주일 정도 남았네요. 스텝 리스트가 워낙 중요하니까 빨리 정해야 해서요. 게다가 저 아니어도 끼겠다는 사람은 많을 테고…….”

“너무 조급한 것 같은데.”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게…… 기회라는 생각은 들지만, 확신이 서질 않아요."

엄청난 기회인 동시에 엄청난 모험이었다. 태일은 국내에서 충분히 인지도 있는 카메라맨이었다.

모델들 대부분이 그와 일하고 싶어 했다. 그는 피사체를 순결하고 아름답게 담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본인이 진심으로 찍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이든, 당장에 그의 주변에서 원하는 건 그가 모델들과 패션화보를 찍는 일이었다.

대중들이 원하고 실질적으로 그에게 돈을 벌어주는 것도 그 일이었다.

“……지금의 일도 누군가는 하지 못해 열망하는 일이라는 걸 압니다.”

“그렇지. 2년 뒤에 네가 돌아왔을 때 지금의 자리가 없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롭 스미스와 팀으로 아프리카로 떠나는 게 만날 있는 기회도 아닐 테고.”

“어느 쪽을 택해도,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버린 쪽이 아쉽기 마련이니까.”

“형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이런 물음을 할 정도면 태일은 시율을 많이 신뢰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해인의 상상 이상으로 말이다.

어쩌면 시율의 한마디가 태일의 미래를 정할지도 몰랐다.

해인은 얼른 시율을 돌아봤다.

시율은, 아주 덤덤한 얼굴이었다.

“내가 어느 쪽이 옳다고 권하기엔 너무 네 인생에 중요한 이야기 같다. 네 장래가 전부 걸린 거니까. 난 이런 건 너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습니까?”

“매정하다고 할진 몰라도 타인의 의지가 필요한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어. 지금은 후자고. 내가 조언해서 네 인생이 바뀐다면 난 그걸 책임져줄 수 없거든. 네가 결정하고 네가 택하길 빈다.”

시율은 가라고도, 가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태일은 납득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

그날 밤 태일은 밤새 잠들지 못하고 자신의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문으로 된 외국 사이트는 여러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고, 태일은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트북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진 명함이나 메모들이 그의 혼란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해인은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어서 태일의 방을 나와 시율의 방으로 향했다.

조금 열린 문틈으로 파고들어 가 시율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꾸물꾸물 시율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아직 잠들지 않았는지 시율이 손을 움직여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인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울먹였다.

“……날 놓고 가겠지?”

잔뜩 풀이 죽은 고양이 귀였다.

태일에게 섭섭해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가겠다면 잡을 수도 없었다. 저를 데려갈 곳이 못 된다는 것도 알았다.

시율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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