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고양이 남자 친구
해인은 순진하게도, 키스란 건 한 번 하면 끝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수를 셀 수 있는 건 줄 알았다.
몇 번의 키스를 했는지, 몇 번의 스침이 있었는지 어림이 되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와 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저를 좋아한다는 남자를 만나서 자신도 그 남자에게 빠지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아!”
마주 닿은 입술이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겹쳐왔다.
뭉클, 부드러운 살끼리 짓누르는 감각이 너무도 여실해서 해인은 저절로 부끄러워졌다.
해인은 시율의 옷깃을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점점 숨이 차 할딱이며 그의 몸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요령 좋게 키스할 수 있는 방법이 세상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긴 키스를 해도 숨이 막히지 않는 그런 방법.
문제는 해인이 그걸 모른다는 점이었다.
“숨…… 막혀.”
“음?”
“그, 그만.”
시율은 저를 미는 건지, 당기는 건지 알 수 없는 해인을 내려다봤다.
키스하던 중이라 서로의 속눈썹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해인은 이쯤 하자는 듯 지나치게 가까운 그를 슬그머니 밀어냈다.
하지만 부끄러움과 숨 막힘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여자의 얼굴은, 위험했다.
눈물이 매달린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저를 올려다보는 모습은, 그를 과격하게 만들기 좋을 뿐이었다.
그 애걸하는 눈빛이라니.
잡아먹히는 짐승 같은 숨소리라니.
“아우.”
해인이 퍼덕대며 잡힌 짐승처럼 구는데도 시율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우 숨 쉴 수 있을 만큼의 틈만 주고는, 다시 아득해지도록 겹쳐왔다.
한 뼘이 넘는 키 차이 때문에 해인은 시율의 그림자 안에 완전히 가려졌다.
목이 아플 만큼 키스는 길게 이어졌다.
해인은 이제 정말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꼈다.
숨이 부족해서인지, 심장이 미쳐 날뛰어서인지.
그건 알 수 없었다.
다만, 해인이 이 순간 염려하는 건 매서울 만큼 커다란 자신의 심장 소리였다.
그것이 시율에게까지 들릴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마치 그 심장 소리가 시율에게 좀 더, 좀 더, 하고 애타게 키스를 갈구하는 것 같았으니까.
“강……!”
“쉬잇, 착하지.”
입술이 살짝 떨어졌을 때 해인이 그를 불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금이라도 더 키스하기 위해 주는 틈일 뿐이었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그의 입술에 의해 막혀버렸다.
해인은 이제 알 수 없었다.
이 키스를 그만둘 수는 있는 건지 말이다. 이렇게 평생이라도 키스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에 시율이 말한 어른의 키스란 바로 이런 건가 보다.
깊고 내밀한.
끝이 없는.
그래서 입술 안까지 침범하게 하고 마는. 모든 걸 샅샅이 내주고 마는.
그야말로 피가 도는 모든 곳이 그의 것이 되는 것 같았다.
‘키스할수록…… 빼앗는 것보다는 빼앗기는 게 많은 것 같아.’
덜컥.
이제는 밀어내는 것도 포기하고 온전히 순응하던 어느 순간, 해인은 제 등 뒤로 책장이 닿는 걸 느꼈다.
책장에 살며시 등이 기대지고 그의 손아귀에 의해 허리가 끌어 안겼다.
남자의 힘이 가뿐하게 해인의 몸을 위로 들어 올렸다. 시선이 엇비슷해지자 키스하기가 더욱 수월해졌다.
해인은 이제 그의 가슴이 아니라 목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아, 남자의 목덜미는 이토록 단단하구나. 손아귀는 이렇게 억세고, 그런데도 부드럽구나.
서로를 끌어안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일 줄이야.
시율을 알게 된 후 세상은 몰랐던 일투성이 되었다.
“……그만, 그만해. 강.”
너무 그에게 집중한 탓일까. 해인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키스에 정신이 팔려 듣지 못했던 발소리는 아주 가깝게 들렸다.
“왜?”
깜짝 놀라 힘주어 떠밀었더니 시율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는 아직도 키스하고 있는 것 같은 눈이었다.
마치 뜨거운 숨 같은, 열띤 음성 같은…… 그런 눈길.
이제 와서 키스를 그만둬야 할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
누구보다 야하면서 순진한 척 묻다니, 반칙이었다.
“사람이…… 오고 있어.”
“아, 그래?”
“근처에 있어.”
기척이 가까워지는 만큼 해인은 조급해져서 발을 버둥댔다. 시율이 내려주지 않으면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지금의 이 은밀함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럽고 버거워서 숨이 달아오르는데.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켰다간 너무도 창피할 것 같았다.
“그럼 이쯤에서 봐줘야겠네.”
시율은 해인을 겨우 놓아주며 선심 쓰듯 말했다.
하여간 너무 능글맞은 남자였다.
“……그것참 고오맙네요.”
해인이 시율에게서 놓아지기 무섭게 책장 옆으로 사람이 지나갔다.
대학생인 듯한 남자는 책장 안쪽에 있는 시율과 해인을 흘깃 보기는 했지만 크게 관심 두지는 않았다.
키스하고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해인은 살짝 한숨을 돌렸다.
“그만두긴 했지만, 확실히 알아둬야 할 거야.”
“응? 뭘?”
“내가 널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걸.”
“……뭐, 그런 걸…….”
“정 모르겠으면 좀 더…….”
“으아니야, 알아! 알아, 넘치게 알아. 잘 알겠어.”
짓궂게 웃으며 다시 다가오는 시율을 두 손으로 가로막으며 해인은 부지런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걸 굳이 키스로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나! 이 남자야!
몸 안에 기운이 이렇게나 넘치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 눈만 봐도 이젠 알았다.
꽉 잡은 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드러운 손아귀만으로도, 알았다.
“흐음. 매번 그렇게 부끄러움 타다간 할 때마다 지칠 텐데.”
“……그래도 부끄러운 걸 어떡해!”
“익숙해지도록 같이 노력하면 되지.”
“뭐, 지금 뭐라는 거야, 이 남자가!”
으악, 익숙해지긴 대체 뭐가 익숙해져!
해인은 새빨간 얼굴이 되어서는 당장 뒷걸음질을 쳤다.
지칠 때까지 키스하는 경우가 흔한 건 아닐 텐데, 겨우 세 번째 키스에서 그걸 겪게 될 줄이야.
키스가 싫은 건 아니지만 부끄럽기도 하고 언제 끝나는 건지도 모르겠고. 키스란 건 아직 해인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다.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일.
“태일이가 아마…… 내일 아침에나 오지?”
시율은 벌써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지만.
***
태일은 아직 출장지였다.
근래에야 휴대폰 로밍이 시작된 동남아의 작은 섬.
“전화를 안 받으시네?”
출발이 지연됐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시율에게 연락했는데 받질 않았다.
태일은 다시 한국 시간을 확인했다.
한국은 오후 8시쯤일 텐데, 자는 걸까? 아직 병원이라고 해도 전화 받기 한가한 시간일 텐데.
의아했지만 로밍해온 휴대폰이라 길게 전화하진 못했다. 대신 태일은 도착이 조금 미뤄질 것 같다는 메시지를 남겨뒀다.
사실 남자들 간에는 굳이 도착 시간을 알리고 출장을 왔기로서니 안부를 묻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게 남자들이었으니까.
다만 시율이 돌아올 때 꼭! 도착 예정시간을 미리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연락한 태일이었다.
“여자 친구라도 데려오시려나.”
시율이 요즘 들어 자신의 귀가 시간에 민감한 듯해 태일은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 친구가 없다는 이야기를 일전에 언뜻 듣기는 했지만 언제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태일은 설마 제 고양이가 여자 친구일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차가운 공기를 울리는 폭죽 소리와, 그를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의 감탄사.
한강변의 하늘을 어지럽게 수놓는 불꽃놀이를 보며 해인은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맞아, 우리 데이트 나온 거였지.”
자신의 모습이 사진에 찍히지 않는 걸 안 뒤로 충격 때문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집에서 나온 게 한참 전의 일 같았다.
그뿐인가? 도서관에서 길고 긴 키스까지 해버리는 바람에…… 당초 집에서 나온 이유는 이미 기억 저편에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해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옆에 서 있는 시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남자는 어떻게 이런 이벤트를 다 꿰고 있는 걸까.
“오늘 한강에서 불꽃놀이를 한다기에 너랑 와야겠구나 싶었지.”
“흐으음…….”
“왜, 이런 거 별로야?”
“아니? 불꽃놀이라면 아주 좋아해.”
다만 어떻게 내색해야 할지 모를 뿐이었다.
데이트도 낯설고, 키스한 남자랑 데이트하는 건 더더욱 낯설었으니까.
해인이 어색해 어쩔 줄 모르는 데 반해 시율은 싱글벙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계속 그 얼굴로 불꽃놀이가 아닌 해인만 바라봤다.
“다행이네. 나도 좋아해.”
“으음?”
“많이 좋아하지.”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하면 뭔가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지는데…….
“난…… 불꽃놀이가 좋다는 뜻이었어.”
“그래? 이런.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졌을까?”
이 남자는 자꾸만 해인을 부끄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시율은 해인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애정공세를 그치지 않았다.
“난 불꽃놀이도 좋지만, 역시 네가 더 좋아.”
“……!”
“너무 당연한 말을 한 것도 같고.”
“무슨 남자가…… 그런 말을 막……! 아우, 아주 선수야, 선수!”
해인은 어둠 속에서도 티가 날 만큼 달아오른 제 얼굴을 감출 수가 없어서 괜스레 그렇게 구시렁댔다.
저는 이렇게 여유가 없는데 시율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했다.
그건 거의 억울할 정도의 차이였다.
“선수라니? 그냥 좋아하는 여자한테 최선을 다할 뿐이야.”
“보통은 최선을 다해도 너처럼 못 해!”
“그거야 성격 나름이지.”
시율은 시율대로 선수 소리가 다소 억울한 모양이었다. 항상 자신은 평범한 연애를 해왔다고 주장하니까.
과거에 그가 몇 명의 여자와 사귀었는지 전에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두 명이랬나, 세 명이랬나?
해인은 기억을 뒤져봤지만 대충 들어서인지 잘 생각나질 않았다.
그땐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으니까, 당연히 새겨듣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와서 그게 후회가 될 줄이야.
“겨우 성격 문제로 치부하기엔…… 네 유혹 스킬이 너무 엄청나거든?”
“그거 칭찬이겠지? 내가 잘났다는 소릴 테니까.”
“……하아?”
“내가 원래 평균 이상으로 매력적인 인간이거든. 대학 다닐 때 모델 제의도 몇 번 받았지. 아, 자랑 같나?”
“자랑 아냐?”
“맞아, 자랑이야.”
하, 하긴 이런 뻔뻔한 인간이었지……!
저 잘난 맛에 느긋하게 웃어 보이는 게 특기인 남자였어.
“봤으니 알 테지만, 나는 부끄러움 같은 건 원체 타지 않는 성격이거든. 할 말은 해야 하고, 싫은 건 싫은 거고, 내가 잘난 건 내가 잘난 거지.”
해인은 이쯤 되니 정말 시율의 타고난 성격이 여자를 유혹하기에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잘난 건 자랑스러운 게 맞잖아? 부모님 덕을 본 것도 아니고, 야비한 수를 쓴 것도 아니고. 전부 내가 일군 것들인데. 난 지금의 내가 상당히 만족스럽고 뿌듯해. 그런 인간이야.”
“대단한 자신감이네…….”
“그럼, 이 정도 자신감도 없으면 널 쟁취하지 못했을걸.”
해인도 그건 인정했다. 끝내 자신을 함락시킨 건 시율의 이 당당함과 끈기였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점 하나 없는 남자가 마음먹고 유혹하니, 그 위력이 과연 대단했다.
그는 자부심이 넘치면서도 거만하거나 으스대지 않았다. 제가 잘났다고 남을 깔보거나 가엽게 보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항상 배울 점과 본받을 점이 있었다.
생각해볼수록 시율은 좋은 남자였다. 아니, 멋진 남자였다.
제게는 좀 아까울 정도로 말이다.
가만히 시율을 올려다보며 해인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아무래도 좋다고 했지만…… 그건 너무도 못할 짓이었다.
지금 이대로는 시율만 상처 입을 뿐이었다.
“있잖아, 강.”
“음?”
“난, 우리가 말이야.”
만에 하나 가장 상처받는 건 자신이 아니라 시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픈 것만 생각해서 도망치기 급급했던 게 부끄러울 만큼, 시율이 보여주는 애정은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 제 것이라는 걸, 이제는 외면하고 싶지 않아졌다.
여전히 자신은 없었지만, 이게 답이라는 확신도 없었지만, 문득 깨닫기로 외면만 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우리가?”
“……사, 사…….”
“사랑한다고?”
“아니! 사귀고 싶으면……!”
혹여 얼굴에서 펑, 소리가 나지는 않았을까? 해인 스스로도 얼굴이 한계치까지 붉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율이 기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데에는 심장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말이다.
“사귀고 싶으면…… 사, 사귀어도 좋아! 아니,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내 말은 그러니까, 그럴 것도 같다고…….”
고백이라는 건 어쩌면 이렇게 횡설수설 정신이 쏙 빠지는 느낌일까.
해인은 제게 있는 용기란 용기는 다 짜냈다.
시율은 툭하면 아무렇지 않게 해서 쉬워 보였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에 시율에게 고백받았을 때 승낙했다면 자신이 고백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굳이 힘든 쪽을 선택한 셈이 됐다.
“알아들었어. 진정해.”
어쩔 줄 몰라 가만있지를 못하는 해인에게로 시율이 손을 뻗어왔다.
키스를 해도 되고, 머리를 쓰다듬어 줘도 될 텐데.
그는 가만히 해인의 손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으로 해인의 손을 꼭 쥐고는,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배부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해인은 부끄러운 얼굴로 한 가지 사실만 오롯이 깨달았다.
‘이 남자가, 내 연인이로구나.’
그걸 증명하듯 그의 손이 느리게 제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껴 와서, 해인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어딘가 숨고 싶기도 하고, 자랑하고 싶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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