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마음을 연 고양이
이동하는 차 안에서 해인은 내내 조용했다.
조수석에 멍하니 앉아 창가에 비치는 제 얼굴만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힐끔힐끔, 그 모습을 살피는 시율의 표정도 그리 좋진 못했다.
“…….”
유리에는 분명 얼굴이 비치는데, 거울에도 비치고.
난 분명 저기에 있는데, 여기에 앉아 있고…… 이렇게 얼굴이 비치는데.
사진은 찍히지 않아.
그걸 깨닫자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이래서야 정말 제가 기묘한 생물이라도 된 것 같았으니까.
“잠시 들리고 싶은 데가 있는데, 괜찮을까?”
“응?”
“바로 이 근처야. 삼십 분 정도면 되는데.”
시율의 제의에 해인은 어딘지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건 순순한 게 아니라 그냥 기운이 하나도 없는 거였다.
예상치 못한 해인의 우울한 기색에 시율은 지금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해인이 갑자기 없어질 때를 대비해 사진 한 장 정도는 남기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어묵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설마하니 본인이 사진에 찍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도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거기에 상처받아 우울해할 줄은…….
휴대폰 속에 남은 흐린 사진들에 당황한 건, 시율과 해인 둘 모두였다.
***
“도서관?”
“빌리고 싶은 책이 있어서.”
잠시 뒤, 시율이 차를 댄 곳은 시립 도서관의 주차장이었다. 규모가 꽤나 커 보이는 곳이었다.
“어떻게…… 잠깐 여기서 기다릴래?”
차에 시동을 끄며 시율이 조심스레 물었다.
답지 않게 눈치를 살피는 게 해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했다. 나름 신경 써주는 걸까?
잠시 궁리하던 해인은 제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며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삼십 분 정도 걸린다며? 차 안은 답답하니까 같이 갈래.”
“아, 그럴래?”
저를 두고 가면 시율이 걱정하느라 편하게 볼일을 못 볼 것 같았다.
차 안에 혼자 있어봐야 더 우울하기만 할 것 같았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시율을 따라 도서관으로 들어와서도 기운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해인은 도서관 곳곳에 설치된 CCTV를 올려다보며 ‘저기에도 제 얼굴이 안 찍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나오려나, 또 흐릿하게 나오려나? 내 몸에서는 전파를 방해하는 자기장이라도 나가나?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찾느라 왔다 갔다 바쁜 시율의 곁을 멍하니 따라다녔다.
그러자 어느 순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시율이 해인을 근처 의자에 앉혔다.
“책이 위층에 있는 것 같아.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릴래?”
“……응.”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된다?”
“알겠어.”
“다른 책이라도 보고 있어. 좀 걸릴 수도 있으니까.”
해인의 태도가 웬일로 끄덕끄덕, 답지 않게 순했다.
이렇게 신신당부하면 보통은 제가 애냐며, 버럭 성질을 내는데 말이다.
평소의 앙칼진 맛이 전혀 없달까.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해인을 빤히 내려다보나 싶던 시율은, 무슨 생각인지 해인의 이마 위로 키스했다.
아주 갑작스럽게.
“착하다. 금방 올게.”
쪽 하니.
이마에 남은 입술의 감촉.
“호에?”
방심하고 있던 해인은 깜짝 놀라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시율은 뻔뻔하게도 잘생긴 얼굴을 한껏 뽐내며 웃고 있었다.
도서관이라 크게 소리치진 못하고, 이만 갈아야 했다.
“이! 이…… 멍한 틈을 타서 무슨 짓이야!”
“원래 기운 없을 때는 뽀뽀해주는 거야.”
“누가 그래?!”
“봐, 기운 났잖아. 아주 효과적인 치료지.”
얼굴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해인이 펄쩍 뛰자 시율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눈웃음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혼자 남은 해인은 괜히 제 이마만 벅벅 문지르며 씩씩댔다.
충격 요법이냐! 뭐, 이런 치료가…….
그러다가 문득 깨닫길,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제 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이건 공공장소에서 커플이 벌이는 애정 행각일 뿐이었으니까.
크게 틀리지도 않았고.
“……채, 책 좀 볼까…….”
해인은 따가운 눈살을 견디지 못하고 괜히 중얼거리며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멀리 가면 시율과 엇갈릴 테니 아무 책이나 하나 집어 와서 얼굴을 묻고 숨어 있을 요량이었다.
확실히 우울한 게 싹 가시긴 했다.
심장이 시끄러워져서 그렇지.
시율의 입술이 닿은 부근이 자꾸만 화끈거렸다.
‘이 돌팔이 의사 같으니. 기운 없는 여자는 다 자기가 뽀뽀해줄 건가?’
해인은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느라 손 부채질만 한참을 해야 했다.
시간 때울 만한 책을 찾으려고 근처 책장 앞에 섰는데, 눈에 쏙 들어오는 책이 한 권 있었다.
[이거 그린 라이트인가요?]
무슨 책 제목이……. 해인은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당연하겠지만 해인에게 딱히 관심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 어휴, 대체 누가 이런 걸 도서관에…….”
작게 중얼거리며 슬그머니 책을 꺼내 들었다.
해인은 마치 은밀한 성인용 책이라도 보는 것처럼 주변을 경계하며 책을 펼쳤다.
제가 워낙 이런 쪽에 젬병이다 보니 아주아주 조금만 참고를 해볼까 싶었다.
도서관은 지식의 보고 아닌가! 공부하는 건 당연하지.
딱히 강시율 때문은 아니라고!
“흐흠…….”
해인은 요즘 와서는 제게 츤데레 성향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제가 지금 엄청나게 진지한 얼굴로 책을 보고 있다는 건 몰랐지만 말이다.
[Q. 제 마음이 단순한 호감인지 사랑인지 모르겠어요.
호감은 사랑으로 가는 지름길이죠. 둘을 구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아래 문항 중 반 이상이 해당된다면, 사랑입니다.
* 그 이성과 닿는 게 싫지 않다.
* 하루 종일 생각난다.
* 그 사람이 하면 로맨스, 관심 없는 사람이 하면 스토킹이다.
* 누군가 그 사람을 두고 이성으로서 별로라고 말하면, 이해할 수 없다.
* 그 사람이 나를 향해 웃을 때, 나도 모르게 따라 웃은 적이 있다. ]
……4갠가? 아차 싶어진 해인은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냉큼 꽂아뒀는데,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그 근방은 전부 사랑 이야기가 주제인 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 이상한 점은. 그것들을 보면서 생각나는 게 태일이 아니라 시율이라는 점이었다.
혼란스러울 것도 없이, 딱 한 남자.
방금 제 이마에 기습 뽀뽀를 하고 유유히 사라진 강시율.
해인은 제 이마를 쓰다듬었다.
“끄응…….”
왜일까, 분명 먼저 좋아한다고 자각한 건 태일인데.
그러고 보면 태일을 좋아한다고 자각한 후에도 그와 사귀고 싶다거나, 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태일에게 달리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이 태평하게 사랑 타령할 때가 아니라서였다.
애초에 고양이의 몸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것 따위 괘념치 않는 시율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현실적으로 이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휩쓸리게 됐다.
[이성의 말을 듣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랑이다.]
[사랑은 두려움 다음에 단단해진다.]
[사랑하라. 미련한 이처럼.]
[이 순간, 힘껏 사랑하라.]
무슨 놈의 책들이 전부 사랑을 장려하고만 있담. 사랑하지 말라는 책은 없는겨?
해인은 뚱한 얼굴로 책의 제목들만 죽어라 노려봤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지금은 매우 거슬렸다. 전부 저한테 하는 얘기 같았으니까.
[양다리학개론]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양다리]
[희망고문 하는 당신]
제목들을 쭉 훑다가 뜨끔해서 책장에서 시선을 돌렸다.
야, 양다리는……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아닐 거야. 아닐 거라고.
해인은 애써 부정하면서도, 희망고문이라는 부분에서는 양심이 찔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애완 고양이로서 태일과 키스해도 좋다고. 다만 이성으로서 키스하는 게 자신뿐이면 족하다던 시율의 얼굴이 떠올랐다.
독식하는 걸 좋아하는 게 분명한 남자가 양보 아닌 양보를 하다니…….
그 남자 왜 그런 말을 해서는, 신경 쓰이게 말이야.
“킁.”
오픈된 2층 쪽으로 시율을 찾아 코끝을 세웠다.
사람의 몸일 때도 해인의 후각은 보통의 고양이 정도는 됐다.
고양이 몸일 때가 보통 고양이의 몇 배였으니까.
사람의 몸일 때 평소보다 성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결국 사람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성능이 좋았다.
심지어 지금은 양기를 보충해서인지 모든 신체기능이 평소보다 뛰어났다.
“저쪽이다.”
2층의 서쪽, 해인은 금세 시율의 냄새를 찾아냈다.
이러니 내가 짐승이지.
이럴 때 편리하긴 하지만 저의 남다른 부분이 자각돼서 썩 기쁘지만은 않은 능력이었다. 해인은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2층으로 향했다.
***
뭘 보고 있는 걸까?
해인은 냄새를 쫓아 어렵지 않게 시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책장 앞을 떠나지도 않고 두꺼운 책에 푹 빠져 있었다.
기척을 죽이는 건 해인의 고양이다운 특기였다.
아무리 예민한 사람이어도 마음만 먹으면 몰래 다가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해인은 살금살금 시율에게 다가갔다.
처음엔 놀라게 해주려고 지척까지 숨을 죽이고 다가갔는데, 생각해보니 도서관에서 큰 소리라도 나면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강?”
“……어.”
그래서 두어 걸음쯤 남겨두고 그를 불렀다. 시율은 어느새 옆에 와 있는 해인에게 충분히 놀란 눈치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뒤로 책을 숨기는 모습이 매우 수상했다. 시율은 어지간해서는 수상한 모습을 안 보이는데 말이다.
어떤 위기도 능숙하게 헤쳐 나갈 타입이니까.
호기심이 솟은 건 그 때문이었다. 시율이 저렇게 평정을 잃는 건 대체 어떤 걸까.
“나도 볼래.”
“이건…….”
“나도 보여줘.”
“얌마!”
“왜 숨기는 거야?”
뭘까? 혹시 강시율의 약점이라거나!
대머리 예방법이라거나 그런 거면 재미있겠다. 두고두고 시율을 놀릴 게 제게도 생길 테니까.
해인은 책을 숨기려 드는 시율에게 달라붙어 적잖게 몸싸움을 벌였다.
“보여줘, 보여줘!”
“이건…… 야한 거야.”
“으엑!”
후딱 시율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그런 건 관심 없……. 응? 그런데 이쪽은 역사 문화 책장인데.
“거짓말이잖아!”
“……쳇.”
“내가 그렇게 바보 같냐!”
약이 오른 해인은 다시 시율에게 달라붙었다.
자꾸만 뒤로 숨기는 책의 정체가 뭔지 확인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숨기려고 하면 더 궁금한 건 만물의 본능일 테니까.
큰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속닥거리며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마침내 시율이 항복했다.
도서관이라 얼마 버티지 못한 것이다.
“아오, 정말…….”
“뭐야, 이게? 한국 전통 민담과 신화 전설집……. 이름이 뭐 이래?”
재미없게스리.
해인은 마침내 시율이 몰래 숨어서 보던 책을 빼앗았지만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그냥 한국 설화야. 내가 원래 그런 걸 좋아하거든. 자, 확인했으면 돌려줘.”
“으엥?”
“빨리.”
한국 설화면 금도끼 은도끼, 장화홍련,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그런 거 아닌가?
해인은 더 알쏭달쏭해질 뿐이었다.
제목만 봐서는 달리 약점 잡을 게 없었다. 취미가 특이하다고 흉을 봐야 되나?
책을 돌려달라고 재촉하는 시율의 손을 무시하고는 책을 펼쳤다.
“아.”
휘리릭, 안쪽의 내용을 대충 훑었는데…… 눈치가 보통은 되어서인지 시율이 이 책을 본 이유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왜 몰래 봤는지도 말이다.
온통 기이한 생물들이 출연하는 기담이었다.
그중에도 해인의 시선이 멈춘 건 시율이 붙잡고 있던 페이지였다. 방금 실랑이를 벌이면서 조금 구겨진 부분이었는데.
검은 괴, 사신, 까마귀.
놀라울 만큼 해인의 정체에 가깝게 근접해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감탄스러운 수준이었다. 대체 언제 이만큼 접근한 걸까.
“그게…… 말이야.”
해인은 제가 화를 낼까 봐 쩔쩔매기 시작한 시율을 바라봤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 열심히 정체를 찾는 걸까. 이걸 스토커라며 무서워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무섭지 않은걸.
문득 아까 본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누가 하면 스토커, 누가 하면 로맨스랬던가.
해인은 픽, 하니 웃어 보였다.
“……내가 요괴 비슷하긴 하지.”
시율은 해인이 크게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맥없이 웃자 오히려 더 놀란 눈치였다.
“그런 뜻이 아니라…….”
“아냐. 맞을지도 몰라.”
힌트를 주고 싶어도 이게 한계였다. 주술이 걸린 몸이 미웠다. 무엇도 확실하게 말해줄 수 없었으니까.
다만 확실한 건…… 이제는 시율이 좋았다. 마음 한편에 분명 이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도,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커지는 마음을 다잡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해인은 책을 덮어 시율에게 돌려주며 조용히 물었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곤 아주 맥없는 목소리를 냈다.
“……내가, 무섭진 않아?”
“뭐?”
책을 보고도 화를 내긴커녕 피식 웃더니, 이제는 시무룩하게 묻는 해인이 시율을 드물게도 당황시키고 있었다.
“기분 나쁘진 않아?”
동그란 눈에 잔뜩 겁을 달고 저를 올려다봐서, 숨이 막히게 했다.
시율은 제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안 그래.”
“난 내가 기분 나빠.”
“아니야. 어떻게 그래.”
“난…… 내 몸이 싫어.”
해인이 결국 울먹울먹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봐서, 그도 괴로워졌다.
놀란 마음에 손을 뻗어 해인을 끌어안았다.
조금도 거부하지 않고 꼭 안겨오는 해인 때문에 시율은 속에서 울컥, 눈물이 나는 걸 느꼈다.
안겨 오면서 처음으로 보여주는 속내가 너무 속상한 것이어서,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 나는 내가 싫어.”
“……난 네가 좋아.”
나지막한 대꾸에 제 허리께를 붙잡는 작은 손이 너무 간절하게 느껴졌다.
“난 네가 사랑스러워. 울리고 싶지 않아.”
시율은 스스로가 너무 싫다는 여자를 끌어안다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을 들여다보다가.
말로는 다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없어서 끝내 키스하고 말았다.
“응……!”
입맞춤은 깊었다. 그런데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키스였다.
울지 말라고 달래는 키스도, 시율의 품도, 따듯했다. 절로 파고들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해인은 힘껏 시율의 옷깃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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