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고양이의 취향
대체 어느 틈에 이 남자에게 이렇게 사로잡혀버린 걸까.
해인은 시간이 갈수록 시율에게 꼼짝할 수 없게 됐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나약하게 만드는 걸까.
그의 목소리? 눈길? 살그머니 뻗어오는 손짓……?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전부였다.
매번 도망칠 궁리만 하는 자신에게 몇 번이나 무안당하고 외면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뻗어오는 그 모든 것들.
“나는 네게 큰 걸 바라는 게 아니야.”
“……그럼?”
“모처럼 오붓한 시간이 생겼으니, 너와 데이트하고 싶을 뿐이지.”
머리 위를 쓰다듬어 오는 손.
물리고 할퀴어진 상처가 가득한 그의 손을 보노라면, 해인은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거부당한 상처가 아프지도 않은지 자꾸만 쓰다듬으려고 노력하는 이 남자의 갸륵함에 길들여지고 마는 것이다.
그뿐인가? 이 남자는 여자를 설레게 하는 재주가 아주 탁월해서, 해인은 지금 제 종족이 고양이과 요괴라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문제였다.
고양이 모습일 때도 시율에게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데, 사람이 되면…….
“키, 키스할 거잖아.”
“당연하지. 데이튼데?”
“……우앗 뻔뻔해!”
도무지 이 남자의 애정 공세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키스까지 해버린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그랬다. 애써 시율과 제 사이에 그어뒀던 경계가 허물어져 버렸으니까.
그것도 자신 스스로 키스를 허락함으로써 말이다.
이제는 싫다고 버티면 시율이 봐주던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시율은 이제 해인이 제게 여자로서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채버렸으니까.
“솔직하다고 해줄래?”
“이 변태야!”
“변태라니. 알잖아? 난 너한테만 이러는 걸.”
“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요즘 내 중심은 너인데. 정말 몰라?”
해인은 흡사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시율의 유혹은 직설적인 데다 맹렬했다.
심지어 너무도 치명적이라서, 남자에게 면역력 제로인 해인으로서는 매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는 이제 전보다 더 불쑥불쑥, 해인의 영역에 침범했다.
“아무튼 한번 생각해봐.”
“뭘?”
“집에 나랑 단둘이 있는 거랑, 밖에서 둘이 돌아다니는 거랑 어느 쪽이 더 안전할지.”
“히익.”
뭐, 이런 협박이 다 있담?
해인의 눈이 지진 난 듯 흔들렸고, 작은 머리는 어느 쪽이 안전할지 재느라 바빠졌다.
사람으로만 변하지 않는다면 집에 있는 쪽이 더 안전할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시율의 말에 현혹되지 않을 자신 같은 건 없었다.
또 무슨 꼬임으로 사람이 되게 할지 몰랐다.
이미 데이트라는 꼬임에 빠져 있었고 말이다.
“그럼, 씻고 올 테니까 생각해보라고.”
시율은 고민하는 해인을 두고 유유자적,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
내가 무른 걸까? 저 녀석이 너무 머리가 좋은 걸까.
해인은 이제 그런 고민은 포기해버렸다.
매번 당하다 보면 이제는 시율이 항상 제 머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지금만 해도 옷을 고르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시율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
“……쳇.”
하긴, 내가 저 녀석을 말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해인은 뚱한 얼굴로 거울 속에 비치는 제 모습을 들여다봤다. 표정이 자못 심각한 건 어떤 옷을 입어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이 스웨터 너무 더워 보이는데?”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해인이 입을 수 있는 옷의 종류는 선택지가 적었다.
시율의 여동생이 대학생 때 입던 것들이 대부분이라 앳된 디자인이 많았고, 창고에 몇 년 방치되어 있던 옷들이니만큼 유행이 살짝 지난 감도 있었다.
게다가 시율의 집이 한 번 불에 타면서 남은 옷이라고는, 작은 캐리어만큼이 다였다.
시율이 새 옷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더 이상의 빚은 사절하고 싶었다.
해인은 있는 것들을 뒤적거리며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원피스를 입었더니 너무 과하게 차려입은 느낌이었고, 티셔츠에 바지를 대충 입자니 또 이건 성의가 심하게 없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데이튼데…….
“으응?”
마음에 드는 코디가 나오질 않아 한참 고민에 빠져 있다 보니 이래서야 마치 제가 데이트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해인은 크게 당황했다.
지금 거울 속에는, 영락없이 데이트에 들뜬 여자가 있었으니까.
“이, 뭐…… 기대하는 거라기보다는……. 그래! 이건 예의지, 예의!”
누구에게 둘러대는 건지 알 수 없는 핑계였다.
해인은 대충 집히는 대로 후다닥 입고는, 펼쳐놓은 옷들은 다시 캐리어에 넣어 시율의 침대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곳이 해인의 옷을 숨기는 장소였다.
혹시라도 태일이 시율의 방에서 여자 옷 무더기를 발견하면, 변명거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
“요즘 쌀쌀하니까 좀 더 챙겨 입는 게 좋을 텐데?”
“괜찮아. 난 추위를 별로 안 타니까.”
“아, 그런가?”
현관을 나서며 한마디 했던 시율은 순순히 납득했다. 확실히 해인은 평소에도 추위에 강했으니까.
“그보다 우리 어디 가는 건데?”
“좋은 곳.”
“흐음…….”
“가보면 알아.”
엘리베이터에 타며 시율이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조른다고 알려주진 않을 것 같고, 어딜 가는 걸까. 해인은 궁금했지만 일단 얌전히 따라가기로 했다.
“아, 전에 자리가 없어서 차를 옆 동 지하 주차장에 세워놨거든.”
“그래서?”
“꺼내 올 테니까 잠깐 기다릴래?”
“응.”
그러고 보니 시율이 차 키를 꺼낸 건 오랜만이었다. 태일과 살게 된 뒤로는 직장인 동물병원이 가까워져서 차를 거의 쓰지 않았으니까.
해인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시율이 재차 의향을 물었다.
“같이 가도 되고.”
“아니, 난 출구 쪽에 가 있을래.”
해인은 모처럼 사람 모습을 했으니 조금이라도 바깥 구경이 하고 싶었다.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선 뒤부터는 이미 발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그래, 그럼. 저기 후문 쪽에 있는 출구 알지? 그쪽이야.”
전이었다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해인을 억지로라도 데리고 갔을 시율이지만, 이제는 잠시 떨어지는 걸로 안절부절못하진 않았다.
다만, 조만간 해인에게 휴대폰을 하나 구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불안하니 자신의 휴대폰을 쥐여 줬다.
“이건 왜?”
“네가 미아가 될까 봐 그러지.”
“내가 앤가 뭐?”
“애는 아니지만 전에 없어진 적이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시율의 말에 크게 뜨끔한 해인은 일단 휴대폰을 자신의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엄마를 보러 갔을 때 따돌린 일을 시율이 아직 속에 담아둔 모양이었다.
“바로 차 빼올 테니까 후문 근처에 있어야 된다?”
“알겠다니까 그러네.”
“휴대폰 잘 가지고 있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한 뒤에야 시율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겨우 몇 분 떨어지는 걸로 저렇게 걱정이라니. 해인은 제가 평소에 그렇게 불안하게 했나 싶어 때아닌 반성을 해야 했다.
그냥 따라갈 걸 그랬나?
늦은 후회를 하며 해인이 후문을 향해 걸어갔다.
때는 막 해가 지기 시작한 저녁 무렵이었다.
이 무렵은 왠지 공기가 좋았다.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날이 추워지긴 했는지 다들 재킷을 입고 있었다. 드물게 목도리를 한 사람도 보였다.
사람 구경이 재미있는 줄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이렇게 혼자 걷는 순간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도.
그러니까 사고가 나기 전에는 말이다.
오늘 뒤에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 전.
해인은 마치 세상구경을 처음 하는 양 신이 나서 근처를 둘러봤다.
“오오.”
그리고 마침내 후문에 다다른 해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올해 처음 보는 포장마차였다.
특유의 그 식욕을 당기는 냄새가 멀리서도 맡아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며, 순대, 튀김 전부에 눈이 갔다. 항상 공복상태다 보니 해인은 먹을 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나 해인의 후각을 강타한 건 어묵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 베스트에 드는 바로 그 음식.
해인의 몸은 이미 저도 모르게 포장마차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가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그 훈기에 입안에는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침을 삼키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봤지만, 돈이라고는 십 원도 없었다.
내 처지가 이렇지, 뭐.
해인은 쓸쓸하게 포장마차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모습이 쓸데없이 아련했다.
“……뭐 하냐, 너.”
차를 가지고 나온 시율의 눈에도 이상해 보일 만큼 말이다.
“벌써 왔어?”
“……설마, 넋 놓고 있느라 시간 가는 것도 모른 거냐.”
“……설마아아.”
“저게 먹고 싶어서 그래?”
“아니이?”
거짓말도 참 못하지. 얼굴에 먹고 싶다고 대문짝만 하게 써놓고는……. 시율은 포장마차 옆에 차를 대고 내렸다.
저 미련 넘치는 얼굴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 없었다.
해인은 요즘 들어 시율이 뭔가 사준다고 하면 꽤나 부담스러워했다. 항상 받기만 해서일까.
“먹고 싶은 게 뭔데? 골라봐. 됐다는 소리는 하지도 말고.”
“……사주는 거야?”
“설마 떡볶이를 못 사주겠냐.”
시율은 거의 못마땅해하는 수준이었다.
“나도 저녁 먹을 겸 먹으면 되니까, 골라봐.”
“그럼, 난 어묵.”
“하나? 어차피 많이는 안 먹을 거잖아.”
“응!”
“아주머니, 여기 어묵 하나랑…… 떡볶이랑 순대 1인분씩 주세요. 물도 좀 주시고요.”
뭘 사준다고 해도 한사코 도리질만 치더니, 겨우 반색하는 게 어묵이었다.
시율은 모처럼 하는 데이트의 시작이 포장마차라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해인이 신 나 하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해인은 잽싸게 어묵 국물을 뜨고 있었다.
“……어묵 좋아해?”
“어묵 국물 엄청 좋아!”
고양이는 보통 뜨거운 걸 싫어할 텐데. 시율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묵 국물을 호호 불어 먹는 해인을 바라봤다.
열심히 먹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흐뭇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맛있어?”
“응! 너무 좋아.”
“너…… 여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여우는, 여우지?”
일본 설화 속 여우 요괴들은 어묵을 좋아하는 걸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걸 떠올린 시율의 머릿속을 알 리 없는 해인은 뜬금없이 웬 여우 타령인가 무심코 넘길 뿐이었다.
해인은 요괴 같은 것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시율이 웃으며 손을 내밀어 왔다.
“내 휴대폰 좀 줄래?”
“휴대폰? 응, 여기.”
아까 맡긴 이거 말이지? 해인은 시율의 휴대폰을 돌려주고는 다시 어묵 국물을 먹는 데 집중했다.
뜨거운 국물이 든 종이컵을 돌려가며 호호 불어 식혀 먹는 행복에 푹 빠져 있었다.
시율이 바로 곁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신경 안 쓰고 있었다.
그 휴대폰이 찰칵, 찰칵, 맹렬한 셔터음을 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도 바로 제 쪽을 향해서.
“흐에……?”
찰칵, 찰칵, 찰칵.
셔터음은 끝나지도 않았다. 대체 몇 컷이나 연속 촬영을 하는 건지!
뜻밖의 기습에 해인은 먹던 국물을 반쯤 뱉어내고 말았다. 잠깐, 지금 이 모습이 찍히는 거야?
“뭐 하는 거야!”
이런 흉한 모습을!
“……안 찍힌다, 너.”
“뭐?”
“봐봐.”
해인은 그만 화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시율이 눈앞으로 보여준 휴대폰 화면 중에는, 정말 제 얼굴이 제대로 나온 게 한 장도 없었으니까.
이상했다.
분명 셔터음에 놀라 가만히 있었는데.
마치 방해하는 힘이라도 작용한 것처럼 얼굴 근처만 유난히 흐릿했다. 모든 사진이 그랬다.
찍는 순간 얼굴을 열심히 흔들면 이렇게 될까?
“……이게.”
해인은 저도 놀라 휴대폰을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봤다.
고양이 모습일 때는 문제없이 찍혔는데, 지금은 왜 이런 걸까. 이건 해인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사진 찍힐 때는 그저 먹는 걸 찍으니 울컥했는데, 말도 안 될 만큼 얼굴이 안 나온 사진을 보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건 사신의 힘일까? 아니면 이 몸이 본래 가진 힘일까.
어느 쪽이든 보통 사람은 이럴 수 없었다.
“네가 없어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득 들려온 시율의 갈 곳 없는 목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들면서 해인은 울고 싶어질 뿐이었다.
그건 분명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해인은 시율과의 이 일분일초가 다신 돌아올 수 없다는 걸, 되새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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