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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41화 (41/114)

41화. 고양이 관찰하기

먼저 잠에서 깨어난 건 시율이었다.

당직을 서고 온 날이면 그는 으레 이렇게 짧은 낮잠으로 밤샌 피로를 풀고는 했다.

비몽사몽 중에도 그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품 안에 고양이가 제대로 있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잘 있군.”

시트에 몸이 돌돌 말린 채 얼굴만 내민 검은 고양이는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자신이 자는 동안 또 어디론가 도망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웬일로 잡아온 그대로였다.

기특하긴.

공들인 끝에 길들이긴 길들인 모양이었다.

시율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쫑긋한 고양이의 귓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해인이 얼굴 근육을 움찔움찔거리며 이를 갈기 시작했다.

“므, 므으응…….”(야, 양기가아…….)

“……꿈꾸나?”

“우으우으!”(내가 요괴라니!)

심각한 울음소리를 내기까지.

풋, 구경하던 시율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꼬대하는 고양이를 구경하는 건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으으냐냐…….”(이건 꿈일 거야…….)

그저 자는 모습일 뿐인데 바라보기가 질리지 않으니 이상한 느낌이었다.

물론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 모습이었다면 훨씬 더 흐뭇한 상황이었겠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처음에 미움 받은 걸 생각하면 이건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이었으니까.

이렇게 옆에서 재울 수 있기까지 대체 몇 달이 걸린 건지.

시율은 옆으로 누운 채로 턱을 괴며 그간의 시간을 어림해봤다. 여름에 만났는데 어느덧 겨울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길들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구나 싶었다.

감회가 새로울 만도 했다.

시율은 슬슬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시계를 봤다. 아직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얼마 안 잤는걸.”

잠든 해인을 한 번 더 내려다본 그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일부러 해인을 깨우지 않은 채였다.

***

해인이 태일의 방에서 잠들어 있는 지금은 시율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애완고양이가 있는 보통의 집에서는 고양이와 사람 단둘이 있다면 그건 사람 혼자 있는 걸로 치부하겠지만…….

시율은 저와 함께 사는 고양이가 보통 고양이가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 해인의 눈을 피해 은밀히 작업해야 했다.

“어디 보자.”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켜고, 최근 즐겨찾기에 추가한 웹 페이지들을 찬찬히 순회했다.

그것들은 종종 컴퓨터를 사용하는 해인 때문에 숨김모드로 되어 있었다.

[세계 역사와 함께하는 몬스터 대백과]

[중국 설화 속 요괴의 기원]

[조상들이 알려주는 도깨비의 종류]

[귀신인가, 사람인가.]

이걸 본다면 자칭 숙녀인 고양이 아가씨가 난리를 칠 게 분명해서, 이렇게 몰래 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죄짓는 듯, 아니 걸리면 사달이 날 테니 죄짓고 있는 게 맞았다.

안전을 위해 가끔 병원에서 검색해보기도 하는 시율이지만 직장에서 딴 짓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정보만 뒤적이다 보니 더욱 그랬다.

“마녀, 악마와 계약을 한 여자들. 고양이나 박쥐로 변할 수 있다……. 비슷한 듯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정독하는 중간중간 시율은 해인이 잠에서 깨진 않았는지 동태를 살폈다.

괜찮은 내용이 보이면 자신의 메일로 보내두기도 했다.

사실 이 조사를 시작한 지는 꽤 되었지만 아직도 이거다 싶은 정보는 없었다.

“늑대인간, 평소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한다……? 알 수 없네. 이쪽 사이트에서는 보름달이 뜨는 날만 사람이 된다는데.”

이게 고역인 이유는, 너무 여러 종류의 정보가 있다 보니 하나의 개체를 놓고도 각기 답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어딘가에서는 이무기를 두고 도를 닦는 신성한 생물이라고 하고.

어딘가에서는 사람을 홀리는 요물 뱀이니 발견 즉시 목을 쳐야 한다고 적혀 있어서 진지하게 공부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에 기대야 하는 자신이 한심하지만 어쩌겠는가.

의문의 대상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고 하니, 자력으로 정체에 접근하는 수밖에.

‘나에 대해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네게 숨기는 게…… 때로 괴롭게 느껴지거든.’

바로 어제, 그렇게 말하며 애써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속내를 하나도 숨길 줄 모르는 얼굴. 화가 나면 화를 내고, 부끄러워도 화를 내고, 기쁘면 배시시 웃는 그 얼굴.

토라지며 뺨을 붉힐 때면 끌어안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그 얼굴.

너무 사랑스러워서…… 때때로 위험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이름도 모르는 너.

“…….”

묻지 말아달라고 하니 찾지 말아야 하는 걸까? 시율은 마우스를 쥔 손을 멈췄지만 그건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묻지 말라고 한 거지, 찾지 말라고 한 건 아니니까.

너를 잃어버린 뒤에 엉엉 울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시율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부지런히 눈으로 쏟아지는 글씨를 읽으며 조금이라도 해인의 정체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처음 이 조사를 시작한 게 호기심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순전히 만에 하나라도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만약의 때에, 네가 경고했듯이 하루아침에 없어져서 나를 놀라게 할 때.

눈물이 나고 허무해서 온 세상을 뒤지고자 할 때…… 내가 갈 곳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절대로 귀신은 아닌 것 같고. 만져지기도 하고, 체온도 있으니까. 일단 그럼 압축할 만한 후보는 이 두 가진데.”

그 속이야 어떻게 문드러지든 시율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검색을 계속하며 정보를 압축했다.

그가 근래 해인의 정체와 가깝다고 여기며 꼽은 후보는 두 가지였다.

구미호와, 늑대인간.

딴에는 검색에 검색을 거쳐 최선을 다한 접근이었다. 전에는 전혀 관심 없던 정보들이다 보니 여전히 헷갈렸지만 말이다.

“구미호가 그나마……. 하지만 간은커녕 고기를 안 좋아하는데?”

구미호의 고양이 버전이 있다고 가정해보려고 해도 여전히 애매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해인이 흥미를 보이는 먹을 것은 기껏 단것 정도였다.

이전에 안 먹어도 몸에 지장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턱을 괴고 한참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시율은 서류 가방 속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일전에 적어둔 정보들을 다시 하나하나 체크했다.

1. 고양이에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2. 고양이일 때도 사람 말을 할 수 있다.

3. 동물들의 말을 대충 알아들음.

4. 수술 직후의 동물이랑 마주치면 울어버리기도 함. 아픈 게 느껴진다고.

5. 사람으로 변하는 데는 뭔가 제약이 있는 듯. (무한하지 않음)

6. 술을 잘 먹는다고 말하지만 상당히 약함. (주사 있음)

7. 한국말은 하는데 영어는 별로 모르는 눈치.

8. 시험 결과, 중국어도 못 알아들음. (한국산?)

9.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함.

10. 코가 매우 좋음. 하지만 사람 모습일 때는 약해지는 것 같음.

11. 잠이 많음. 하루 종일 잠.

12. 잘 토라짐. 단것으로 풀어줄 수 있음.

13. 달빛을 좋아함.

.

.

.

쭈욱 읽어 내리던 그는 맨 밑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29. 자꾸 귀여워짐.

그것도 또박또박,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었으니까.

어쩌면 이게 바로 홀린다는 걸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이어리를 접고 다시 검색 창을 열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틈이 났을 때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찾아야 했다. 귀여운데 무서운 그녀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까.

시율은 오늘은 토종 신화에 집중적으로 매달리기로 했고, 고양이의 옛말인 ‘괴’로 무작위로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운이 좋은지 얼마 안 가 눈에 띄는 정보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과거, 충청남도 영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로, 검은 괴가 나타나면 꼭 까마귀 떼가 쫓아와 사람이 죽었다 하여 검은 괴가 저승사자를 본다고 일컫다. 검은 괴를 불행한 것으로 취급…… 이 검은 괴의 눈은 꼭 호랑이의 것처럼 금색으로…….”

쓸 만하다 싶은 건 대부분 그랬지만, 이것도 역시 짤막하게 몇 줄 적어놓고는 자세한 정보는 책을 참조하라고 되어 있었다.

확실히 오래전 기담을 알아보기에는 인터넷보다는 책이 나았다.

“한국 전통 민담과 신화 전설집 발췌……. 젠장, 1992년 발행? 심지어 절판이잖아.”

문제라면 쓸 만한 것치고 남아 있는 책이 없다는 점이었다. 시율은 아쉬운 대로 책이 있는 도서관을 찾아봤다.

근래 그는 쓸데없이 검색 실력만 늘고 있었다.

***

“먕?”(강?)

한편, 잠에서 깨어난 해인은 곁에 시율이 없다는 사실에 슬쩍 삐져 있었다.

아니, 이 남자, 같이 자자고 꼬드겨 놓고는 혼자 어딜 간 거야? 모처럼 인심 써서 옆에서 잠들어줬더니…….

“무응.” (하여간 괘씸하다니까.)

해인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시율의 기척을 쫓아봤다.

아마도 자신의 방에 있는 모양인지 시율의 방 쪽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근처에 있으니 됐나?

해인은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고는 늘어져라 기지개를 폈다.

양기로 충만한 몸은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이 고양이의 몸이 된 이래 이렇게 기운이 쌩쌩한 건 처음이었다. 그간은 충전이 덜되어서 제 기능이 다 발휘되지 않았던 걸까?

양기가 좋긴 좋은 모양인지 컨디션까지 최고조였다.

그건 어떤 느낌이냐면, 기운이 너무 넘치는 나머지 당장 사람으로 변신해 백 미터 달리기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폴짝 침대 아래로 내려온 해인은 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시율의 방으로 향하며 콧노래를 흥흥거리는 건, 그냥 푹 잠을 자고 일어나 기분이 좋은 덕분이었다.

“어, 일어났구나.”

“응!”

방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빨리, 시율이 방에서 걸어 나왔기 때문에 해인은 거실에 멈춰 섰다.

고양이의 몸으로 키가 큰 시율을 올려다보는 건 목이 아픈 일이라 소파 위로 올라갔다.

왠지 시율이 후다닥 방에서 나온 느낌인데? 해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 했어?”

“그냥 인터넷.”

그거 이상한데?

시율이 해인을 관찰하듯, 해인도 시율을 관찰하는 일이 취미였다. 그는 게임도 별로 하지 않고, 신문도 아침마다 배달받아서 보는 남자였다.

“강, 컴퓨터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네가 자고 있었잖아. 텔레비전 보긴 좀 그래서.”

“그런가?”

“깨면 미안하니까.”

그것도 그러네. 해인은 쉽게 납득해버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살랑살랑 기분 좋은 꼬리를 하고 있자니, 시율이 다가와 그런 해인의 머리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예쁘다, 예쁘다 하는 그 손짓.

고양이일 때 쓰다듬어지는 건, 나쁘지 않아.

해인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손길을 느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푹 잤거든.”

“내 옆에서 말이지?”

해인은 제가 기분 좋아하자 덩달아 기분 좋은 얼굴을 하는 시율을 보며 괜스레 심장이 간질간질거렸다.

하여간 이 남자는 이상한 걸로 뿌듯한 얼굴을 한다니까? 부끄럽게스리.

“그 녀석이 출장을 자주 가길 빌어야겠군.”

아주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태일이 없어야 제가 해인을 차지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누군가에겐 행운이고 누군가에겐 위험하게도, 당분간 태일은 출장이 잦은 시즌이었다. 지금부터 봄 화보집을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어났으니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깨울까 했거든.”

“왜?”

“나 씻고 올 동안 변신해서 기다릴래?”

“흐엑? 네가 씻는데 내가 왜 기다…….”

“대체 무슨 야한 생각을 하는 걸까, 이 아가씨가.”

시율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인의 음흉함을 탓했다. 음란마묘라는 타이틀이 해인은 정말 억울했다.

내가 얼마나 정숙한데! 네가 야한 뉘앙스로 말하는 거잖아!

“난 그냥 데이트하자는 뜻이었어. 내가 씻는 동안 너도 변신해서 옷 좀 입고 있으라고.”

“……당당하긴! 누가 보면 우리가 사귀는 줄 알겠네!”

“키스는 했잖아.”

“그야…… 그야……!”

시율의 뻔뻔한 대꾸는 해인이 할 말을 잃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때 분위기가 그랬다고 핑계를 대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여러 번의 키스를 해버렸다.

지금이 고양이 모습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사람 모습이었다면 이상한 표정이 됐을 테니까.

“그 녀석 출장 갔을 때 놀아야지. 안 그래? 그리고 너 사람으로 있는 거 좋아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 아니라! 강, 너!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구는데…… 우리 사귀는 거 아니거든!”

비상이었다. 자칫 이대로 휘말렸다가는 자연스럽게 여자 친구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해인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너랑만 키스할 거고, 너도 나랑만 하잖아. 그럼 그게 그거지.”

“으에?”

시율의 현란한 말재간 앞에서는 별로 소용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 태일이랑 애완동물이랑 주인으로 하는 건 아예 제외야. 그리고 사실 사귀니 마니 하는 건 너한테 별로 의미 없는 일 아닌가?”

저 눈웃음 앞에서도 말이다.

이 남자, 어쩌면 이렇게 진지한 얼굴일까.

사귀지 않겠다고 튕기는 것 따위 하나도 효과가 없었다. 이미 해인은 영혼까지 탈탈 시율에게 털린 뒤였으니까.

“사귀지 않아도 좋아. 너와 이성으로 키스하는 게…… 나뿐인 거면 돼.”

나른한 웃음을 보며 해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제가 이미 시율에게 단단히 목줄이 잡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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