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고양이 마음 흔들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시율이 느긋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며 짝사랑한다고 말하거나 말거나 시종일관 시큰둥해야 하는데, 심장이 주책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미…… 먀먀?”(뭐…… 뭐지?)
큰일이었다. 이건 전과는 전혀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처음에는 시율에 대한 경계와 불만으로 심장이 뛰었다면, 지금은 오로지 저를 향한 남자의 열띤 욕망을 알아 그것 때문에 심장이 반응하고 있었다.
사람일 때 누군가에게 이렇게 갈구당한 적 있었던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끊임없이 구애받은 적은?
대체 뭘까, 그냥 얼굴이 달아오르는 이 느낌은.
자신이 이제 시율을 싫어하지 않는 건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혹시 제가 이제는 그걸 뛰어넘어 시율을…….
“냐옹이!”
“므악!”
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에 놀라 멀뚱히 서 있던 해인은, 그만 어린아이의 손에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평소라면 어림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얼이 빠져 있었다.
잡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엄마! 냐옹이!”
“응? 무슨……. 소, 소희야! 그 손 놔, 손!”
“왜에?!”
“얼른!”
로비도 아니고 진료실 근처에 어린애라니!
손님이 데려온 아이인 듯했는데, 아이는 끈적이는 걸 먹던 손으로 해인의 꼬리를 힘껏 붙들고 있었다.
꽃무늬 치마에도 먹을 걸 잔뜩 묻힌 여자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빙빙, 해인의 꼬리를 흔들어댔다.
“먀악!”(아파아!)
어른들이 놀라 달려왔지만, 운 좋게 잡은 고양이를 빼앗길까 아이는 손에 더욱 단단히 힘을 줄 뿐이었다.
“냐옹이랑 놀 거야!”
조그만 손이 뭐 이리 억센 걸까. 해인으로서는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안 돼! 손 놔, 어서! 안 놓으면 아야 한다?”
“싫어!”
“문다니까?”
“싫어어어! 냐옹이 소희랑 놀 거야!”
다급한 엄마의 만류에도 자그마한 아이는 도리질까지 치며 두 손으로 해인의 꼬리를 붙들기에 이르렀다.
그 탓에 엄마가 억지로 떼어내려고 하자 해인에게는 그게 더 고통스러웠다.
아이는 고양이를 놓칠 듯싶어지자 더욱 있는 힘껏 잡아당기며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정체불명의 간식이 해인의 몸 위로 쏟아졌다.
“안 놀 거야!”
해인은 꼬리가 빠질 것 같은 아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 문득 달고 새큼한 냄새가 풍겼다. 하필이면 아이가 흘린 그것은, 점성 높은 요거트였다.
“먁먁!”(끈적거려!)
스틱형으로 되어 있어서 한입에 먹기 좋은…… 이 아니라, 흘리면 난리 나는 것.
“냐옹이 이거 냠냠해!”
“미, 미안! 미안, 고양아. 물면 안 된다? 제발.”
해인의 비명에 아이 엄마가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성질 사나운 고양이였다면 진작 할퀴거나 물고도 남았을 상황이니 말이다.
꼬리를 꽉 붙잡힌 해인은 갖은 성질을 부리면서 바닥에서 파닥이고 있었다.
이걸 콱 물지도 못하고!
그걸 못 먹어서 나한테 흘리냐! 내 꼬리!
“세상에, 무슨 일이에요?”
“어머! 개냥이.”
“애가 손을 안 놔요! 도와주세요, 선생님.”
겁에 질린 아이 엄마의 도움 요청에 수간호사들이 여럿 달라붙은 뒤에야 해인은 아이의 손에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해인의 꼬리는 밤송이처럼 숭숭하게 부풀어 있었다.
아프기도 아프지만, 얼마나 놀랐는지는 온몸의 털이 거꾸로 서 있었다.
“힝……! 냐옹이 이거 줄래! 나랑 놀아.”
“안 돼!”
“냐옹이 이거 먹어. 냐옹아!”
고양이를 빼앗긴 아이는 뭐가 억울한지 잠시 울먹이다가 제 손에 들린 껍질만 남은 요거트를 흔들어 보였다.
“어휴, 소희야! 고양이는 우리 쵸코랑 달라서 그런 거 싫어해요.”
“왜? 왜 안 먹어?”
“너 때문에 정말……. 고양이는 강아지랑 달라요!”
“맛있는데 왜에?”
아이에게서는 개 특유의 냄새가 많이 났는데, 본래는 개를 기르는 모양이었다. 해인은 씩씩 대며 아이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큰일 날 뻔했어요. 정말 다른 고양이였으면 물 수도 있었어요, 어머니.”
“죄송해요. 애가 개만 길러봐서 그런지 고양이만 보면 신기해서 잡으려 들어요.”
“보통은 안 잡히죠……. 고양이들이 워낙 날래잖아요. 개처럼 봐주는 구석도 없고.”
“그러니까요…….”
거칠게 굴었으니 물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인간의 친구라는 개도 이쯤 당하면 물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미안해서 어쩌지.”
졸지에 요거트 세례를 당한 해인은 끈적끈적하게 변한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핥다가 헛구역질까지 했다.
달아! 애들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먹는 건지.
“냐옹아아! 이거 먹어.”
아이는 여전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거의 터져나간 요거트를 해인에게 내밀고 있었다. 제가 생각하기에 매우 맛있는 그 음식이면 고양이를 꼬실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크악!”(안 먹어!)
봉변을 당한 해인은 이를 드러내며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난리네……. 방 쌤 불러서 얼른 목욕 시켜야겠어요.”
“그러게요. 제가 불러올게요.”
“태일 씨가 저 꼴 보면 큰일 나지.”
내 모습이 뭐가 어때서? 해인은 저를 보며 혀를 차는 수간호사들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미용한 애견들을 씻기는 샤워실 안쪽에서는 구슬픈 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므이야이앙!”(고양이 살려!)
스스로는 볼 수 없었지만 요거트 범벅이 된 해인의 모습은 정말 물에 빠진 생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마르면서 더욱 끈적거리는 요거트라서, 한시리도 빨리 씻어내야만 했다.
우선 샤워기로 미지근한 물을 끼얹었는데, 해인은 결코 순순할 리 없었다.
“아이참! 너 얌전히 안 있……. 꺄악!”
“샤아악!”(만지지 마!)
“얌마!”
“크악!”(문다!)
이 정도면 핥으면 없어진다고! 네 손에는 안 씻을 거야!
해인은 하필이면 저를 씻기는 게 방유나라는 사실에 질색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담스러운 가슴이 자꾸만 시야를 가렸다.
이를 드러내며 격렬하게 반항하는 해인이었고, 방유나는 결국 얼마 씻기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녀의 긴 머리는 금세 쫄딱 젖고 말았다.
“앗, 알았어! 알았다고! 안 하면 되잖아!”
당연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고양이는 물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해인은 특이하게도 조금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건 태일이 씻겨줄 때 한정이었다.
전혀 친하지 않은 사람이 제 몸을 여기저기 만지는데 결코 기분 좋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 돼요?”
“강 쌤!”
“이런.”
샤워실 문에 난 창문으로 흘깃 얼굴을 내민 건 시율이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반쯤 웃고 있었다.
도도한 고양이인 해인이 어린애한테 당해서 끈적임 범벅이 된 게 퍽도 재미난 모양이었다.
방유나가 당장에 시율에게 고생스러움을 호소했다.
“안 되겠어요! 개는 입마개를 하면 되지, 고양이는 발톱도 달린 게 얼마나 유연한지……. 고양이가 할퀴면 상처도 오래간단 말이에요.”
고양이란 워낙 사람을 가리는 성격이라, 미용하기 워낙에 힘든 동물이었다. 미용숍에 따라 고양이는 마취한 뒤 털을 밀어주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뭐, 워낙 까다로운 녀석이니까.”
“저 좀 보세요! 물 범벅이라고요.”
야하다 싶을 만큼 흠뻑 젖은 제 몸을 가리키는 방유나였지만, 시율의 눈길은 해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인 검은 고양이에게 말이다.
“므으으으……!”(두고 보자……!)
해인의 귀는 불만에 찬 고양이 특유의 마징가 귀(바짝 세워 뒤로 뺀)가 되어 있었다.
날 이런 꼴로 만들다니. 감히 날 씻기려 든 것도 모자라 비웃고 있겠다! 해인은 언짢음으로 그렁그렁 목을 울렸다.
이런 꼴을 보이다니, 수치스러웠다.
“제가 씻기죠.”
“……네?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렴요.”
그게 무슨 소리! 수치 플레이냐! 외간 남자의 손에 샤워당하다니!
해인은 차라리 방유나에게 순순히 씻길 걸이라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시율로 선수가 교체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므아악!”(살려줘!)
샤워실에서는 안타까운 비명이 메아리쳤지만, 병원의 직원들은 조용히 애도를 표할 뿐이었다.
***
목욕시키면서 콧노래라니, 시율은 분명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머리 좋은 녀석이 어쩌다 당한 거야?”
“으앙!”
“그사이 요거트 범벅이 되어서는.”
해인이 몸을 털자 이리저리 물이 튀었다.
바글바글한 거품이 털 안으로 파고들었다. 남자의 손가락과 함께 뽀글거리면서 말이다.
목 아래로, 가슴털 속으로, 발가락 사이로 뽀득뽀득. 온몸 구석구석 인정사정없이.
으악! 어딜 만지는 거야, 이 자식!
해인은 분명 거세게 반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시율이 자꾸만 물이 튀자 옷이 젖는 게 싫었는지 상의를 벗어버려서, 그것도 여의치가 않아졌다.
이건 방유나와는 다른 의미로 부담스러운 가슴이었다.
“어버버……!”
“할퀴면 자국이 남는데요.”
“으바바…….”
“맨가슴에 남는데요. 와, 야해라.”
이 남자야! 흥얼댈 게 따로 있지! 어디다 가슴을 들이대는 거야?!
수의사 가운이야 샤워실에 들어오면서 진작 벗어젖힌 시율이었지만, 무슨 배짱인지 맨가슴을 드러낸 채 해인을 씻기고 있었다.
할퀴려거든 할퀴어보라는 듯.
가, 가슴 보여! 가슴! 뭐, 이런 야한 협박이 다 있담!
시율은 제 몸매에 꽤나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샤워실 문에는 작은 창문이 달려 있었는데, 그 창문을 통해 수간호사 하나와 방유나가 시율의 상체 누드를 음흉한 눈길로 구경하고 있었다.
“대박.”
“강 쌤 등근육 봐.”
작게 수군대는 목소리도 해인의 귀에는 다 들렸다.
뒤쪽에서 보이는 건 기껏해야 등짝이겠지만……. 그래도……! 뭔가 기분 나빠! 보지 말라고!
“자자, 다 됐다. 다 됐어.”
“므아앙!”(싫어!)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말은 못하고. 샤워까지 당하느라 해인은 점점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저를 샤워시킨 남자는 태일뿐이었는데!
***
이게 무슨 꼴이람.
위이이잉.
졸지에 샤워당한 해인은 내내 심통 난 얼굴이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드라이 타임이었지만 갈수록 뚱할 뿐이었다.
“개운하지 않나?”
“…….”
“좋은 샴푸 써줬는데.”
“…….”
“음, 냄새 좋다.”
시율은 그런 해인을 달래며, 쫑긋한 귀 사이로 잘생긴 코를 가져다 댔다. 가볍게 냄새를 맡더니 보송보송한 털 속으로 입술을 묻었다.
그러곤 커다란 상체를 숙여 작은 짐승의 몸을 품 안으로 가두며 친근하게 쓰다듬어 줬다.
그 행동이 얼마나 다정하고 간지러운지.
고양이의 몸인데도 해인은 설레었다.
졸지에 심장이 쿵, 하는 건……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분명 시율이 아직도 벗고 있기 때문일 거다.
“샥!”(하지 마!)
“아무도 없어. 다들 오후 진료 준비 중이거든.”
시율이 해인의 몸을 거의 자신의 몸 안에 가둔 채 작게 속삭였다.
그쯤이야 해인도 기척으로 알았다. 다만, 시율의 앞에서 고양이가 아닌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을 뿐이었다.
자꾸만 여자 취급을 당하니까.
“으으…… 뭣 좀 입어, 변태야!”
“변태라니? 씻을 때 벗는 건 상식이잖아.”
“씻은 건 나잖아!”
“씻겨준 건 나지.”
뻔뻔한 주제에 야한 뉘앙스로 말하는 게 이 녀석의 특기가 분명했다. 페로몬 진한 눈웃음을 흘리는 것도.
시율이 점점이 해인의 이마 위로 자잘한 키스를 쏟아냈다.
요령 좋게 해인의 앞발을 꼭 붙잡은 채였다.
“그보단 태일이도 출장 갔는데.”
“응?”
“오늘 밤 우리 둘뿐인데.”
“……넌, 당직이잖아!”
“난 역시 사람인 몸이 좋더라.”
“흐이엑!”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어림없는 소릴!
“맛있는 거 해줄게. 사람이 되어라.”
앞발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해인은 문득, 자신이 알몸으로 시율에게 안겨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거 자신이 사람 모습이었다면 엄청 거시기한 상황이었다.
남자가 샤워를 시켜준 것도 모자라서…… 구석구석 물기를 말려주기까지! 얼굴이 자꾸만 화끈댔다.
이런 식으로 시율은 자꾸만 해인의 속에 있는 여자를 끄집어내려고 했다.
“누가…… 그런 유혹에 넘어갈 줄 알고……?”
“왜? 너 단거 좋아하잖아.”
“……흥.”
“널 위해서 요즘 과자 만드는 법도 배우는걸. 나한테 달콤한 냄새 나지 않아?”
시율의 특기는 요리 만들기였는데. 요즘 어쩐지 집에서 과자를 굽긴 했다. 설마 했는데, 역시 해인을 저격하기 위한 것이었나 보다.
해인은 못 견디고 끙, 하는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시율의 ‘나 좀 봐줘’ 어택은 이렇듯 날이 갈수록 강해져서, 이제는 숨이 막히는 지경이었다. 심박수가 나날이 제멋대로 치솟았다. 이젠 반항도 점차 한계점이었다.
“내 연인이 되어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줄게.”
점점 당해내기 힘든 속삭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해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이름도 모르면서……!”
“가르쳐줄 거야?”
“……말 못 해!”
“으음, 안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왜 이 녀석이랑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해인은 정말이지 스스로도 이 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왜 자꾸만 시율의 손에 여자가 되어가는 걸까. 난 고양이라고! 고양이!
“못 하는구나.”
“…….”
“……괜찮아. 네 이름 같은 거 몰라도 좋아. 그래도 난 네가 사랑스러워.”
“이름도 모르는 상대를 사랑하는 거…… 이상하잖아.”
웅얼거리며 대꾸했다.
문득 원망스러운 건 자신일까, 시율일까. 사신이라면 답을 알까?
해인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그 증거로 남자 하면 양기라고, 강력 추천하던 사신이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사랑은 이상한 거야. 네 이름 같은 거 상관없으니까 사랑인 거고. 난 단지 네가 두 발로 서서 나를 볼 때, 기쁨을 느껴.”
“기뻐?”
“그래, 나는 너를 흠모해. 거기에 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고백에, 고백에, 이어지는 고백에…… 해인은 자꾸만 목 안이 간지러웠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이 남자에게 여자로서 사랑받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그건 제법…… 엄청난 일이었다.
이 남자의 여자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인지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