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사랑받는 고양이
상황이 좋지 못했다.
고양이의 몸에, 금언술까지 걸려서 모든 게 답답한 상황이었다. 겨우 목숨만 유지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였다.
고양이의 몸으로라도 살아 있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했다.
그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도 포기한 마당에, 저를 좋아한다는 사람을 받아들이기가 쉬울 리 없었다.
“강, 네가 이상한 거야.”
“난 지극히 정상이야.”
“……사람도 아닌 것을 좋아하는 건 이상해!”
“내 눈에 네가 여자가 된 걸 어쩌겠어. 난 네가 그냥 여자로 보여.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전에는 만날 짐승 취급 했으면서!
해인은 시율이 은근히 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볼을 부풀렸지만 고양이의 몸이라 변변찮은 시늉일 뿐이었다.
이 감정이 부끄러움이라는 걸 알았다.
“넌…… 너무 뻔뻔해!”
“그거 칭찬이겠지?”
“아니거든?”
“하여튼 봐봐, 내 말이 맞잖아? 네 본능은 태일이를 사랑하지 않아.”
시율이 여전히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다른 여자와의 행복을 바랄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것과 이건 별개야.”
“어떻게 다른 거야. 같아.”
“난 그 사람이 좋지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해. 그 다른 사람도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이건 나만 없으면 행복해지는 거잖아.”
“너만 불행해지고?”
“……그 둘이 서로를 마음에 뒀다면, 내가 빠지는 게 가장 평화로운 방법일 뿐이야.”
어차피 난 이루어질 수도 없고, 가망도 없어. 그렇게 수십 번을 되뇌었다.
태일의 집을 떠났던 이유 역시 바로 그것이었다.
사신과의 약속 장소가 태일의 아파트 옥상인데도 기어코 도망친 건 그런 현실이 너무도 힘겨웠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할까?”
“……뭘?”
“너를 원하는 나로서는 원하는 걸 포기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는 동시에, 환영하고 싶기도 해.”
하지만 시율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해인과 이루어질 수 있고, 가망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해인이 태일을 포기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과 태일의 사랑을 거들어줄 정도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다.
너무도 상반된 마음이라 반박도 통하지가 않았다.
“내 마음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다만, 난 고양이니까…….”
“사람이 되는 고양이지.”
“으씨!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 그보단 이 하은이…….”
“이봐, 고양이 아가씨. 간과하는 게 있는 모양인데, 난 그 둘이 서로를 사랑하건 말건 전혀 관심 없어.”
시율은 손사래까지 쳐 보였다. 더는 듣기 싫다는 태도였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확고한 얼굴. 하여간 매정한 인간 같으니라고.
해인에게는 제 마음만큼이나 태일의 마음도 소중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니까.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싶었다. 사실은 하은도 그를 좋아하는 거라면……. 그런데 어디선가 오해가 있는 거라면.
문제는 시율이 아주 비협조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럼 네가 관심 있는 게 대체 뭔데!”
“나한테 중요한 건 오로지, 너야.”
“으이엑.”
“내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놀란 눈을 하는 네가, 언젠가는 날 사랑했으면 하는 바람이지.”
본래부터 남자에게 그리 익숙한 해인은 아니었다.
평균 이하의 연애세포를 가진 데다가, 당연하게도 누군가에게 이런 열렬한 구애를 받아본 적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난생처음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가…… 하필이면 너무도 저돌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으…… 그렇게 애처럼 조른다고…… 너, 널 좋아하게 되지는 않거든?!”
“과연 그럴까? 사랑을 쟁취하는 데는 특별한 게 필요하지 않아. 계속 구애하고, 구애하고, 사랑을 속삭여서…… 함락시키는 거니까.”
그는 고상하면서도 섹시하게 웃는 남자였다.
“우리가 사귀었으면 좋겠어.”
간지러운 말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속삭였다. 그럴 때면 그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다정한 눈길을 쏟아냈다.
해인은 가끔 숨이 막힐 정도로 그게 버겁게 느껴졌다.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 지금 해인이 하는 반항은 시율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는 벼랑 끝에서의 마지막 발악과도 다름없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랑 사귄다는 그런 거, 전혀 상상이 안 가!”
“흐음.”
꽥! 하니 해인이 소리 질렀다.
근데 혹시…… 이거 너무 상대에게 상처 주는 소리일까?
아니, 주면 어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데! 엄마가 이런 건 딱 잘라 말하는 거랬어!
해인은 한껏 경계하는 자세였다.
“너랑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는 거…… 상상도 안 간다고! 아, 아…… 알겠냐?!”
나름 결연한 의지로 다부지게 말했지만, 한편으론 냉정한 말에 시율이 상처 입을까 봐 내심 겁이 났다.
그건 정말이지 이상한 마음이었다.
거절하면서도 상대가 걱정되다니! 왜냐!
하지만 시율은 그렇게 섬세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하게 뻔뻔하고 능글맞은 쪽이었으니까.
그는 오히려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사귄다는 거 별거 없어. 그냥…… 항상 서로를 보고 싶어 하는 거, 그런 게 사랑이야.”
“……난, 평소에 너 안 보고 싶은데.”
“난 보고 싶은데.”
능글맞게 웃으며 시율이 손을 뻗어 왔다.
해인은 슬쩍 피하며 언제든 도주할 준비를 했다.
뿐만 아니라 상체를 낮추고, 뒷다리에 힘을 줬다. 두 귀를 레이더처럼 시율 쪽으로 펼쳐 세웠다.
“그런 거 이상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치는 건 정말 알 수 없어서였다.
“뭐가 그렇게 이상해? 뭐가 무서워? 넌 너무 겁을 내.”
“……나랑 사귄다고 좋을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왜 사귀고 싶어 하는 거야? 난 이해를 못 하겠어!”
“좋은 거 있지.”
시율은 갈 곳 잃은 손으로 턱을 괴더니, 가장 진하게 웃어 보였다. 뒤이어 그의 나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선, 너한테 마음껏 키스할 수 있겠지.”
“흐힉!”
무서운 소리를 들었어!
해인은 딱 그런 얼굴이었다.
“크, 큰일 날 소릴……!”
그러면 매일을 사람으로 지낼 수 있겠다. 양기가 아주 넘쳐나겠어. 그전에 시율이 말라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언뜻 볼이 홀쭉해지고 말라비틀어진 시율이 상상돼서 해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건 분명 두려운 감정이었다.
그가 한탄하듯 말했다. 마치 조르는 듯한 어투였다.
“연애하고 싶다.”
“누구 맘대로?!”
“너랑.”
해인은 시율의 손에 닿지 않도록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나마 지금이 고양이의 몸이라 버틸 만했다. 만약 지금 사람의 몸이었다면, 필시 버티지 못했을 거다.
시율은 쓰다듬는 방식조차 어딘가 야했으니까. 만져지면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그래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
태일이 해인을 데리고 동물병원에 들른 건 평일의 어느 점심 무렵이었다.
한 손에 캐리어를 든, 잘생긴 남자의 등장에 병원 로비는 당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태일 씨!”
“안녕하세요.”
“개냥이 맡기러 오셨나 봐요.”
“네.”
병원에 올 때면 늘 그렇듯 품에는 먹을 것을 한가득 가지고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태일이었다.
그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여직원들이 인사 세례를 받고 있었다.
데스크에 기대 차트를 살펴보는 시율은 이제 그 광경이 매우 익숙했다.
“왔구나. 오늘부터 출장이라고?”
“네, 오늘 형도 당직이고 저도 출장이라, 개냥이 혼자 심심할까 봐 데려왔어요.”
“잘했네.”
워낙에 훈훈한 미남자인 터라 태일은 등장만으로 오늘처럼 환대를 받고는 했다.
물론 시율도 만만치 않게 이 병원에서 인기 있는 남자였지만, 항상 병원에 있는 시율과 달리 가끔 나타는 태일은 더 귀한 남자였다.
태일이 와 있을 때면 여직원 일동은 물론이고 손님들까지 로비에서 미적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저께도 당직 서지 않으셨어요?”
“그랬는데 교대했어. 원래 당직의가 갑자기 사고가 나는 바람에.”
“이런.”
“큰 사고는 아니지만 일단 검사차 입원해 있거든.”
“별일 아니면 좋겠네요.”
차트를 덮으며 시율은 턱짓으로 태일이 들고 있는 하얀 종이봉투를 가리켰다.
“그건 뭐야?”
“아, 계란빵이에요. 벌써 나오더라고요.”
태일은 결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시율은 종이봉투를 받아 들며 슬쩍 핀잔을 줬다. 입으로 빵을 하나 밀어 넣으면서도 말이다.
“이런 거 사오지 말라니까 그러네. 올 때마다 사올 것 없어.”
“개냥이가 매번 신세 지잖습니까.”
“내 고양이인 셈치니까 괜찮아.”
“그래도요.”
시율이 은근슬쩍 해인의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워낙 사람이 좋아 별로 개의치 않는 태일이었다.
태일이 캐리어를 열어 해인을 풀어주다가 물었다.
정말 뜬금없이.
“참, 형님, 시연 씨는 요즘 뭐 하십니까?”
그 물음에는 캐리어에서 걸어 나오던 해인도 움찔했고, 시율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평소와 같은 느긋한 태도였다.
“바쁜 것 같더라. 왜?”
“아아…… 그럼 이걸 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뭔데?”
안주머니에서 금갈색 봉투를 꺼내는 태일은 약간 낭패라는 투였다.
“별건 아니고, 공연 초대권이에요.”
“미양?”(공연?)
초대권이라는 말에 최근 문화지수가 바닥을 치는 해인의 눈은 대놓고 호기심으로 차올랐다.
“발레공연인데 인어공주라고…… 특이한 주제거든요. 다음 주까지만 하는 특별전인데 지인에게 얻었습니다.”
“미야앙!”(인어공주!)
“그러니까…… 이걸 시연이에게?”
“네.”
시율은 일단 손을 내밀어 태일에게서 봉투를 건네받았지만,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왜 주는 건데?”
“전에 파트너 해주신 보답입니다. 저도 아는 분에게 얻은 거라 거창한 건 아니고요.”
“먀먀!”(나도 보여줘, 보여줘!)
표라도 보겠다고 매달리는 해인의 흥분됨을 보건대 필시 가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다.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 봐 생선에 환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저 초롱초롱한 눈을 보라지?
꼴깍꼴깍 침을 삼키는 반응으로 보니 발레 공연을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어마어마하게 기대하고 있군.
시율은 봉투 안쪽을 들여다보고는 눈썹을 까닥였다.
그런데 표가 두 장. 시율의 눈이 살짝 경계의 빛을 띠었다. 설마 태일이 지금 데이트 신청을 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오빠의 이름으로 가만두지 않겠…….
“바쁘시다니 볼 수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일단 전해주세요. 시간 되시면 친구분이랑 보러 가시면 좋을 겁니다.”
“……네가 같이 가려던 건 아니고?”
“예? 아뇨?”
설마 하는, 생각도 안 해봤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역시 사심과는 거리가 먼 태일이었다. 그럼 이건 내 거로군. 시율이 내심 속으로 웃어 보였다.
그는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고맙다. 전해줄게.”
“감사합니다. 부탁드릴게요.”
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연표를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이래서야 두 번째 데이트는 태일이 거들어준 셈이었다.
***
태일의 가는 길을 마중한 해인은 탕비실로 들어가는 시율을 냉큼 뒤쫓아 갔다.
“므양!”(같이 가!)
정확하게는 표를 쫓아서였다.
발레는 본 적이 없어서, 태일이 선물한 표에 아주 많은 관심이 있었으니까.
그거 아주아주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공연일 게 틀림없었다. 심지어 인어라니! 그건 해인이 거의 환장하는 소재였다.
시연에게 줬다는 건 자신에게 줬다는 거니까, 자신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시율과 보러 가도 좋을 만큼 가고 싶었다.
“따라올 줄 알았…….”
“어머, 그러셨어요?”
“……방유나 선생님.”
하지만 고양이 걸음을 앞서간 사람이 있었으니, 방유나 선생이었다.
시율은 웃어 보이던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고, 방유나는 무슨 생각인지 부끄러운 기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 무슨 표를 받으시는 것 같던데.”
추월당한 해인은 뚱한 표정으로 방유나의 뒤에 서서 시율을 바라봐야만 했다. 사람이 있는 데서 말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시율은 방유나가 자신을 따라온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아아.”
“혹시 같이 볼 사람이 없으시다면 저랑…….”
“제 게 아닙니다.”
“에? 강 쌤에게 주셨잖아요?”
“전해달라고 부탁받은 겁니다.”
방유나는 곧장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태일이 시율에게 표를 선물하기에 용기를 내면 그걸 같이 볼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저는 꺼내 보시기에 선물 받으신 건 줄 알았어요.”
“아닙니다.”
비좁은 탕비실에는 지금 시율과 방유나뿐이었다. 아, 물론 고양이도 한 마리 있었다.
“……강 쌤.”
“네?”
“저어…… 그러니까.”
말끝을 흐리던 방유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결심한 듯 비장하게 시율을 올려다봤다.
주변을 맴돌기만 몇 달째, 슬슬 결판을 내고 싶었다.
시율을 노리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강샘! 혹시 여친 있으세요?”
“아뇨.”
“정말요? 그럼 저는 어떠…….”
“대신 여친이었으면 하는 여자는 있습니다.”
시율이 지금 웃어 보인 건 순전히 뒤에 있는 해인 때문이었다. 다만, 방유나는 뭔가 애꿎은 기대를 한 것 같지만 말이다.
“엣, 설마?”
“방 선생님은 아니고요.”
하지만 시율은 꽤나 칼같이 잘랐고, 방유나는 생각 이상으로 시율이 치는 벽이 높다는 데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그, 혹시 가끔 병원에 오는 귀여운 여자분……?”
“그건 제 여동생입니다.”
“아, 여동생이시구나.”
이렇게 어색할 때가 또 있을까? 물론 당황하는 건 방유나뿐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고백 현장을 목격한 해인은 탕비실을 나갈까 하다가 두 귀를 쫑긋거렸다.
그녀가 말하는 가끔 병원에 찾아오는 귀여운 여자라면, 자신도 본 것 같았으니까.
가출하는 날 봤던 그 혀 꼬부라진 여자가 분명했다.
“제가 실례를 했네요. 죄송해요. 여자 친구가…… 없으신 걸로 알아서.”
“뭐, 지금 없는 건 사실이니까요, 죄송할 게 있습니까.”
“……그럼, 짝사랑이신 거네요?”
짝사랑이라면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시율이 괘념치 말라는 듯 말해서일까.
방유나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시율은 곧장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부정했지만 말이다.
“그렇긴 하지만, 세상에 짝사랑이 아니었던 사랑이 있겠습니까.”
“그야…….”
“전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랑은 외사랑으로 시작하니까요.”
아주 명언을 남기고 있었다.
시율은 지금 자신이 짝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만만해 보였다.
방유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고, 해인은 여기서 냉큼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남자가 자신을 더 뚫어지게 쳐다보기 전에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