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고양이의 마음
“형, 저 왔어요.”
“먀옹!”(왔다!)
“빨리 왔네?”
저녁 무렵, 병원으로 이 동물병원의 인기 투 탑 중 하나가 나타났다. 바로 태일이었다.
그는 시율과 함께 젊은 여자들의 인기를 양분하고 있었다.
시율이 유들유들한 냉미남이라면, 태일은 아침 햇살같이 화사하고 예의 바른 남자라서 추종자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일이 순조롭게 끝나서요.”
“길 안 막혔나 봐?”
“퇴근 시간 전에 출발했거든요. 참, 이거 드릴게요. 수간호사 분들 나눠주세요.”
“이게 뭔데.”
태일이 예의 그 여자들 애간장을 절절하게 만드는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시율에게 쇼핑백 하나를 넘겨줬다.
“오늘 촬영한 화장품 샘플인데, 좋은 거래요.”
“이런 걸 왜?”
“개냥이가 항상 신세를 지는데 보답할 게 이런 것뿐이네요.”
아쉬운 점이라면 저 선량한 미소가 여자들에게 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건 순전히 친한 형과, 자신의 애완 고양이에게만 보여주는 친밀함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태일의 손에는 아직 쇼핑백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건?”
“이건 하은이 몫으로…….”
“아. 그래, 가봐”
둘이 그러는 동안 해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데스크 안쪽에 있는 제 캐리어로 들어가 있었다.
그러고는 집에 가자는 눈을 반짝이며, 예쁘게 앉아 있었다.
태일이 기가 찬 웃음소리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집에 갈 때만 되면 귀신같이 캐리어에 들어가 있는 해인이었던 것이다.
“신기해요. 하여간 말귀를 다 알아듣는 것 같다니까요.”
“뭐, 개들은 많이 저래. 고양이 중에는 드물지만 말이야.”
“그래요?”
“병원 오는 캐리어, 집에 가는 캐리어를 구분한다니까.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진짜야.”
시율이 가운 주머니 속으로 깊숙이 손을 넣으며 느른하게 웃어 보였다. 태일은 그런 시율을 볼 때면 같은 남자가 봐도 참 잘생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성인 남자 특유의 여유랄까, 노련미가 넘치는 시율이었으니까.
“아,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형.”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오늘 태일은 퇴근길에 해인을 데리러 잠시 들른 거였다. 오늘은 시율이 병원 당직인 날이었으니까.
***
집에 도착하니 무슨 일인지 하은이 먼저 와 있었다.
마치 태일과 몇 년 지기인지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집 안에 들어와 있었는데, 아마도 도어락 비밀번호를 아는 것 같았다.
“미안, 늦어서.”
“아니야. 고양이 데려온다고 해서 좀 늦는구나 했어.”
기분 좋게 캐리어에서 나오던 해인은 곧장 불만스러운 의미의 꼬리가 되었고, 기분 나쁘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온몸으로 적의를 표출했다.
매서운 눈 모양을 하고는 꼬리를 탁, 탁, 매처럼 휘둘렀다.
“노, 노려보네. 개냥이는 역시 내가 싫은가 봐.”
하은은 자신을 침입자 취급하는 해인이 적잖게 무서운 모양이었다. 직업이 모델이다 보니 혹시라도 손톱을 세울까 그것도 겁을 냈다.
“그런 거 아닐 거야. 보니까 나 말고는 다 싫어하더라고.”
“정말?”
“같이 사는 시율이 형한테도 죽어도 안 안겨 있던걸.”
“아…… 그, 수의사 분, 손이 엉망이던데.”
소파 앉아 있던 하은은 해인이 소파 등받이 위로 뛰어오르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그녀는 좌불안석이었다.
“그거 본인은 영광의 상처라던데.”
“개냥이가, 갑자기 날 물고 그러진 않을까?”
“절대 안 그래.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이도 안 드러내더라. 평소에는 얼마나 순한데.”
글쎄. 그건 장담할 수 없겠는데?
해인은 태일의 변호가 무색하게도 저를 겁내는 하은에게 이를 드러내 보였다. 너 싫어!
“……저기?”
“내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하은이 결혼할 상대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태일이 하은에게 애틋한 마음을 아주 오래 품었다는 것도 알아서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가 없었다.
젠장, 이 여자가 태일의 마음도 모르면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사이란 말이야?
그거 이상해! 이상하다고! 싫어!
“일단, 음, 전에 빌려간 카메라 거기 식탁 위에 올려놨어.”
다른 건 몰라도 고양이가 취하는 부정적인 태도는 알아보기가 쉬운 것이었다. 하은은 해인에게 떠밀려 소파 끄트머리에 겨우 앉아 있었다.
“봤어. 일부러 가져다줄 필요 없었는데.”
“……그냥, 지나가다가. 비싼 거잖아.”
“가져다줘서 고마워. 뭐 마실 것 좀 줄까?”
“응, 그럴까.”
“밤이라 커피는 안 마시겠네. 차 같은 건 없는데. 이제 술은 좀 그렇지?”
태일이 부엌 쪽으로 향하며 말했는데, 그건 ‘이제 너는 약혼자가 있는 여자니까 외간 남자의 집에서 술 마시는 건 안 된다’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고 해도, 이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이다.
“……물이나 조금 줄래?”
태일은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느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해인은 뜸을 들인 하은에게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아! 생각해보니까 촬영하고 받은 탄산수가 있는데, 그거 어때?”
“그것도 좋고.”
“너 그런 것 좋아하잖아.”
태일이 잘됐다는 듯 베란다로 나갔고, 하은은 어째서인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평소처럼 서글서글한 구석이 없달까?
어딘가 침울하달까. 웃고 있는데 그게 힘들어 보인달까.
이건 여자의 직감이었다.
하은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 왠지 울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해인은 등받이에서 소파 쿠션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하은에게 슬금슬금 느리게 다가갔다.
“하은아.”
“응……?”
“조용히 옆에 좀 봐봐.”
“……엄마야.”
무릎만 노려보던 하은이 작게 놀란 소리를 냈다.
아무 기척도 못 느꼈는데, 항상 저를 적대하던 고양이가 제 바로 옆에 앉아서는 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하은은 이 검은 고양이의 황금색 눈동자가 이렇게 선명하고 신기롭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이렇게 빨려들 듯 예쁜 눈이었구나.
“웬일로 네 옆에 갔지.”
“그러게, 무슨 변덕일까?”
“동물들은 사람이 우울해하면 그걸 바로 알아챈다더라. 오늘 너 기운 없어 보여서 그런 거 아닐까?”
“……내가 그렇게 티냈나?”
하은이 머쓱한지 웃어 보였다. 태일은 그럼 모를 줄 알았냐고 말하며 하은의 곁으로 앉았다.
이어 가져온 탄산수 병을 건네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음, 나쁜 건 아니고…… 결혼식 날을 잡았어.”
“……아. 벌써?”
태일이 알기로는 하은이 프러포즈 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벌써 날을 잡다니. 보통은 결혼식까지 반년은 걸리는데 말이다.
“응. 그 사람이 많이 서둘러서. 지인이 일하는 호텔이래서 가봤는데 마침…… 다다음 달 초가 비어 있더라고.”
“다다음 달 초면, 두 달도 안 남았는데?”
“그때 아니면 내년에나 빈다고…… 그러더라고. 운 좋은 거라고.”
“유명한 식장이면 그렇긴 하지. 착착 진행되는구나.”
“그러게……. 그런데, 너무 성급한 것도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네…….”
하은은 분명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해인은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여자의 감은 이럴 때 발동하고는 했다. 처음엔 태일이 안쓰러워서 그런가 했는데…… 아니었다.
“그 사람이 널 많이 좋아하나 보다. 프러포즈도 남자가 한 거였지?”
“맞아. 그 사람이 했어. 날 많이 좋아해줘.”
“그 사람이 널 보고 한눈에 반해서 몇 달이나 쫓아다녀서 사귄 거고……. 기억난다.”
“……응.”
“결혼 축하해. 파티에서 그 말 한다는 게 아직도 못 했네.”
태일은 저번 파티에서 축하한다는 말을 끝까지 못 했던 게 내내 걸렸던 모양이다.
드물 만큼 환하게 웃으며 탄산수로 하은과 건배를 하려다가, 뚜껑을 열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그도 사실은 평정을 잃은 모양이었다.
“이런, 미안. 병따개를 어디 뒀더라.”
태일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부엌으로 향했고, 그 뒷모습을 좇던 하은은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태일은 보지 못했지만, 해인은 보고 말았다.
고개 숙이며 하은이 눈 아래를 손끝으로 훔치고, 그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어어어?’
하은은 눈가를 얼른 훔치고는 태일에게 물었다.
“저기…… 파티 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때 같이 온 아가씨는, 그 뒤에 어떻게 됐어?”
“응? 형 동생?”
“이름이 뭐였더라?”
“시연 씨.”
“맞다, 시연 씨. 귀엽더라. 계속 만나는 거야?”
태일은 병따개를 찾아 부엌을 뒤지면서 대꾸했는데, 하은은 뭔가 복잡한 얼굴로 계속 해인에 대해 묻고 있었다.
해인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더욱 둘의 대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때는 그냥 내가 파트너가 없다니까 형이 붙여준 거고. 사실 연락처도 몰라.”
“……그, 자기 여동생 소개해주기가 쉽지 않은데…….”
“그러게 말이야. 고마운 일이지 뭐야.”
“형님께서 태일이 네가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내가 안전한 타입이라나 뭐라나.”
겨우 찾았는지 그제야 태일이 병따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픽, 웃으며 하은의 탄산수를 따줬는데 그 얼굴에는 정말 성욕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신태일은 확실히 이상할 만큼 안전해 보이는 남자이기는 했다. 너무 점잖기 때문인지, 신사적이기 때문인지.
그래서일까? 오히려 그에게 여자로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실례일 것만 같았다. 태일이 어떤 여자에게 남자의 얼굴을 하는 건 도저히 상상이 안 갔으니까.
해인은 태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남자가 누군가에게 이성의 얼굴을 하긴 할까, 하고.
하은을 좋아한다는 걸 알지만, 그건 고양이로서 이런 식으로 대화를 훔쳐 듣지 않았다면 절대 모를 만큼 온후한 사랑이었다.
그 예로, 하은은 꽤나 눈치가 좋은 여자 같았지만 태일이 자신을 좋아한다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아가씨는 네가 마음에 든 것 같던데.”
“설마.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난 아저씨로 보일걸.”
“……넌 어땠는데, 시연 씨?”
“음, 착한 아가씨지. 아, 귀엽기도 하고.”
태일은 탄산수가 별로 입에 맞지 않는지 한입 먹고는 바로 표정이 나빠졌다.
하은은 입에도 안 대고 있었고.
“그럼, 잘해보면…… 좋을 텐데.”
그녀는 무언가 심각할 뿐이었다.
“글쎄. 좋은 사람이라 같이 있으면 기분 좋은 거랑 연애는 별개 같아. 아무 생각도 안 들고 말이야.”
“……그렇구나.”
“잠깐, 나 다른 거 가져올게.”
태일이 도저히 입맛에 안 맞는지 소파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하은이 또 고개를 숙여서 해인은 슬쩍 그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림자 속에서 하은의 얼굴을 살폈다.
밤에도 문제없는 고양이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하은은 예쁜 얼굴을 이상하게 구기고는, 울듯 말듯 하고 있었다.
‘어어억?’
해인은 소리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이게 뭐야!
***
“이상하다니까!”
거의 우는 듯 말했다. 하지만 해인이 안달복달하거나 말거나 시율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남의 일이니까.
“뭐가.”
“이하은!”
“결혼을 앞두고 우울한가 보지.”
시율은 해인이 동동 발을 구르는데도, 저 좀 보라며 고양이 앞발을 뻗어대는데도 모르는 척, 컴퓨터만 하고 있었다.
“그…… 강 너는 눈치가 좋잖아. 네가 한번 봐주면 안 돼?”
“뭘.”
“이하은이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셋이 밥이라도 한번 먹으면…….”
“싫! 어! 내가 왜 남의 연애 사업에 참견을 해야 해?”
아주 용맹한 ‘싫어’였다.
해인은 그에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는데, 시율이 말하는 모양이 이미 둘 사이가 이상하다는 걸 아는 뉘앙스이기 때문이었다.
남의 연애 사업이라고 표현했다는 건, 친구 사이로만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그치만…… 만약 둘이 서로 좋아하는데, 땅을 파고 있는 거라면…….”
“너무 안됐다?”
“그래!”
“우리 이건 짚고 넘어가자고. 넌 신태일을 좋아하잖아. 그런데 그 진실이 왜 중요하지?”
그거 아주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시율이 의자를 빙글, 해인이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돌렸다. 영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고는 해인을 취조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다른 사람이 누굴 좋아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상관있어. 많이 있다고!”
사실 작은 의혹일 뿐이었다.
결혼 이야기를 하면서 우울해하던 하은은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해인에 보기에 그 우울함은 태일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 아닐까?
결혼하면서 태일이 걸리는 건, 하은도 태일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의문에 답을 찾으려면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시율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도 그 여자가 싫어! 하지만, 어차피 주인이 나를 좋아하는 건 불가능하잖아.”
“넌 사람이 될 수 있잖아.”
“그치만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생각해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하는데, 그걸 모르고 다른 사람이랑 살게 되면…… 그건 너무 슬프잖아.”
아주 어지러운 마음이었다
해인은 태일이 저를 좋아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저 혼자 그를 지켜보는 걸로도 충분히 벅찬 마음이었으니까.
애초에 저와의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사랑에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게 저를 향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사랑이 아닌 걸까?
“둘이 어떻든 알게 뭐야. 난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가 제일 중요해서 말이지.”
“……으씨. 난 안 된다니까 그러네!”
“자꾸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좀 속상하거든?”
“네가 왜?”
“난 불가능하다고 생각 안 하거든.”
시율의 관심사는 여전히 해인뿐이었다.
그가 턱을 괴고 눈웃음을 치며 느긋하게 웃어 보이자, 해인은 왠지 목 안이 간지러워졌다.
하여간 강시율은, 이래저래 강력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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