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소풍 나온 고양이
노을 지는 한강 부지에서의 피크닉이라니, 이건 아무리 봐도 데이트다. 빼도 박도 못하게 데이트 맞아.
탁 트인 대지 위로 물소리 섞인 바람이 불어온다.
날씨는 너무도 선선하고 잔디 냄새는 폐부를 기분 좋게 찔러댄다.
해인은 꾸물꾸물한 손짓으로 자신이 앉은 체크무늬 돗자리를 괜스레 긁어댔다.
시율이 깔아준 예쁜 돗자리 위에 쪼그려 앉아서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연신 입술을 삐죽였다.
시율이 만든 이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게 바로 불만이었다.
끌려와서 하하호호, 웃는 배알이 못 되니 말이다. 즐거우면 지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넘어갈 것 같았다.
“자, 네 거.”
뚱해 있는 해인의 뺨에 무언가 와 닿았다. 악마 같은 놈이 천사처럼 웃으며 도시락을 들이밀고 있었다.
싫다는 고양이 목에 억지로 산책 줄을 매어두고는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결국 너도 마음에 들 거라는 듯.
“…….”
“입술 그만 내밀고 이거나 받아.”
도통 받으려 들지 않자 꾹꾹, 해인의 뺨 위로 눌렀다가 반항스레 볼을 부풀리자 손안에 억지로 들려줬다.
성인 남자의 한 손에 딱 들어가는 작은 유아용 도시락 통은 해인의 손으로 넘어오자 두 손 가득이 들어찼다.
아주 귀여운 사이즈였다. 소식하는 해인을 위한 게 분명했다.
아이보리색 바탕에 노란 병아리가 도트처럼 들어가 있는 도시락 통은…… 사내가 골라 온 것치고는 상당히 귀여운 것이었다.
“……귀여워.”
“그치?”
심지어 안에서 풍기는 내용물의 냄새는…… 샐러드 스파게티였다. 연어가 들어 있는. 해인의 후각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뚜껑을 열기도 전에 꿀꺽, 침이 넘어가 버린다.
시율은 해인의 취향을 이미 전부 간파한 모양이었다. 이 요망한 놈! 해인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노는 시율이 너무도 얄미웠다.
먹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다니!
“……끄응.”
“맛있게 됐는데. 먹어주면 안 되나?”
“부, 탁이냐?”
“그래. 부탁이야.”
“흐흠, 부탁한다니…… 먹어주지, 뭐.”
해인은 못 이기는 척 얌전히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열심히 먹고 있자니, 시율이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레몬수를 따라 건넸다.
마침 목이 마른 건 또 어떻게 알고. 해인은 여전히 무언시위를 하면서도 물은 받아 마셨다.
“괜찮지?”
“……뭐! 먹을 만하네.”
그 새침한 태도라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빤히 보여 시율은 그저 웃고 말았다.
억지로 끌려온 게 불만이지만 피크닉과 도시락은 제법 마음에 드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좋다는 소리를 하기는 싫은 모양이다.
왜냐하면 상의도 안 하고 데려와서 삐져 있으니까.
시율이 보기에 해인은 조그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자존심이 셌다. 툭하면 아릉아릉거리는 어린 짐승이 무서울 리 없는데도 열심히 이를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귀여워 죽겠는데 어쩌지.’
시율의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인은 슬슬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썩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맛있는 도시락에, 기분 좋은 바람 속에서 계속 부루퉁해 있기란 쉽지 않았다.
남들이 기분 풀러 오는 곳에서 계속 심술을 내고 있는 것도 우습고 말이다.
그래, 좋은 건 좋은 거야. 즐겨야지.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시원했다.
“음!”
해인은 콕, 빨간 토마토 조각을 포크로 찍었다. 천천히 입안에 넣고는 맛있어서 눈을 감은 채 포크를 한참 물고 있었다.
이 드레싱! 절묘해!
“더 줄까?”
“아니. 더 먹으면 더부룩한걸.”
“흐음, 네가 먹는 양은 거의 유치원생 수준이란 말이지.”
시율의 도시락은 해인의 것보다 네 배는 커 보였다. 샌드위치도 있었고, 버섯 베이컨말이가 무슨 김밥처럼 가득 들어 있었다.
“강 너 말이야…….”
“왜?”
“……요리를 왜 그렇게 잘해?”
넌 뭘 믿고 그리 잘났느냐고 물으려다 해인은 말을 바꿨다.
자신을 반강제로 반납치한 상대에게 칭찬해줄 심보는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 참 요리를 잘한다고 순수하게 감탄하기에도 자존심이 상했다.
여자인 저보다 모든 면에서 솜씨가 월등했기 때문이다.
해인이 애꿎은 불만을 품었다. 시율의 매력을 하나라도 덜 인정하고 싶은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그야 십 년 넘게 자취했으니까.”
“그래도 보통 남자들은 이렇게 못하잖아?”
별것 아니라는 투에 해인은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시율의 말대로라면 오랜 자취를 한 남자들은 다 요리를 잘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다고 해도 이런 프랑스 요리와 이탈리아 요리를 주로 하는 남자는 드물 거다.
아니, 여자를 포함해도 드물 거다.
귀찮아서라도 사먹는 시대 아니던가. 해인만 해도 할 수 있는 메뉴가 라면에서 김치찌개까지가 한계였다.
“일단 내가 먹고 싶으니까.”
“네가 해달라면 해줄 여잔 충분할 것 같은데.”
“당연히 줄 서지.”
“……쳇! 재수 없어.”
시율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그 능글맞음에 해인은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포크로 찍은 마카로니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자니 시율이 좀 더 들어보라는 듯 말을 이었다.
장난은 그만두기로 한 모양이다.
“가장 오래 사귄 여자가 레스토랑 셰프였어. 그때 배웠지.”
“……그럼 더 안 배우지 않나? 알아서 해줄 것 아냐.”
사실대로 말하는 것 같아 해인은 다시 시율 쪽으로 조금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시율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그는 자기 얘기를 워낙 안 하는 편이었다.
그는 명백한 관찰자 타입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나는 이왕이면 내가 해주는 걸 좋아하거든.”
“퍽이나!”
“정말이야. 알잖아? 난…… 퍼붓는 걸 좋아하는 남자야. 특히 연인에게는.”
“……그야 그러시겠죠.”
확실히 퍼붓는 걸 좋아하는 남자긴 했다. 애정공세건 뭐건……. 하지만 여자한테 요리를 해줄 스타일로는 안 봤는데.
의외로 여자에게는 봉사정신이 투철한 걸까? 아니, 연인에게는.
해인은 잠시 그 단어를 곱씹어 봤다. 왠지 조금 마음에 든다. 그러니까…… 그 연인이라는 단어가, 애인 말고 연인.
으음, 깊지 않아도 소중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단어라 그럴까.
“금전적인 것보다는 성의로 말이야. 뭐, 내 마음에서 우러나면 뭐든 좋지만…….”
“헤에, 고급스러운 거 걸치는 여자 좋아할 것 같은데? 명품이 어울리는 여자.”
해인은 약간 비꼬았다. 놀려보려는 속셈인데 시율이 넘어오질 않았다.
“사주고 싶어도 사줄 수 없었어. 예전에 돈이 너무 없었거든.”
자조하는 시율의 입매를 보며 해인은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좀 사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아무래도 그는 부잣집 아들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니 저리 자신만만하고 오만하지. 그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율이 덧붙였다.
도시락을 내려다본 채였다.
“수의사가 되기로 한 뒤로, 집에 안 들어갔으니까.”
“……어, 들었던 거 같아. 반대하셨다며.”
“맞아. 사람 욕심이라는 게 그렇잖아? 부모로서 자식이 이왕이면 의사나 법관 되길 바란 거고, 난 그게 싫었던 거고. 시키면 더 하기 싫어지는 튀기거든. 알지?”
시율이 꼭 ‘너도 그렇잖아.’ 하는 눈을 들어 해인을 봤다. 약간 눈웃음이 걸려 있어 해인은 은연중에 안도했다. 시율이 순간 기운 없어 하는 줄 알았으니까.
해인은 그래서 얼른 포크를 살짝 흔들며 웃었다.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건 싫었다. 그건 시율과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말썽쟁이구나, 강? 그럴 줄 알았어!”
“비슷하지.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건데, 어른들 눈에는 그게 치기로 받아들여지니까 나만 고집쟁이가 되어버리지. 해명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았어.”
“그랬…… 구나. 힘들었겠다.”
해인도 처음 그림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그것도 서양화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친척들 반대에 부딪혔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라 어머니 혼자 꾸려가다 보니, 대신 아버지 쪽 친척들이 자주 참견을 했다.
해인은 그것들이 너무도 싫었다.
“날 가장 인정하지 않는 게 내 가족이라는 건 씁쓸하지만…… 그래도 여동생은 나를 자주 만나러 와. 부모님들도 요즘 와서는 조금 화를 푸셨고.”
“다행이다, 그래도!”
“다들 워낙 잘난 사람들이라 내 직업을 깔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만……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보나? 거의 십오 년째 그러고 있어.”
해인은 자신이 어느새 시율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진지하게 대꾸하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학비도 혼자 벌었겠네?”
“할머니가 몰래 좀 도와주셨지만, 그래도 과외를 네 개나 했어.”
“흐와아…….”
“가장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이 할머니라 은혜를 갚고 싶었는데……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돌아가셨어. 내 앞으로 유산을 남겨주셨더라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면서. 그 덕에 가족이랑도 조금 화해했지.”
이야기를 들을수록 해인은 시율에 대해 조금 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결 가까워진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다.
***
해인은 결국 시율과의 데이트가 즐겁다는 걸 인정한 터라 얌전히 따라다녔다.
어차피 혼자서는 이도 저도 할 수도 없었다.
강변에서 간단한 소풍을 겸해서 저녁을 먹고, 시율이 해인을 데려온 곳은 다름 아닌 인사동 카페거리였다.
“너 그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응.”
“이쪽에 화방도 많고, 늦게까지 하는 갤러리도 있더라고. 구경해보자.”
시율이 두 갈림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동은 특유의 매력이 있는 거리였다. 오래된 것과 현대적인 것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외국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해인도 몇 번 와본 적 있는 곳이었고.
“나 때문에 여기 온 거야?”
“당연한 걸 왜 물어?”
“……그런가?”
“데이트잖아. 네가 즐겁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걸.”
시율이 너무 당연하게 한 이야기에 해인은 입술을 삐죽댔다.
그 말이 은근 설레어서 그걸 감추려는 것도 있었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너 경험 많다, 이거지? 난 초보라고.
“뭐가 불만이야?”
“……흥!”
시율은 해인이 토라지는 포인트는 도통 알기가 어려웠다. 정말 딱, 고양이 같은 성격이었다.
시율은 먼저 가버리는 해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또 잃어버리면 큰일이었다.
반면, 해인은 연신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센스가 좋아? 내가 인사동 거리 좋아하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아서.
얼마나 많은 데이트를 해보면 이렇게 여자 취향을 딱, 맞춘담? 흥흥.
“어이!”
“왜에.”
“저거 사줄까?”
시율이 앞서 가는 해인을 불러 세우더니 가리킨 것은, 과일 꼬치를 설탕물에 절인 것으로 외관은 분명 해인이 침을 삼키게 하는 것이었다.
근방에 유명한 음식인지 여자 몇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해인은 과일꼬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상에 저런 음식이 있었나? 대체 언제부터 유행이람?
“네 취향일 것 같은데.”
“돼, 됐어!”
“아, 배불러서?”
“……응.”
먹고 싶었지만 지금은 먹을 수 없었다. 이미 한계까지 도시락을 먹은 뒤였으니까. 그래봐야 정말 쥐꼬리만큼의 음식이었지만.
위장이 작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사줄게.”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해인은…… 이게 아닌데 싶어졌다.
“뭐야! 누가 또 너랑 데이트를 한다고!”
“왜, 할 수도 있지.”
“은근슬…….”
새침하게 몸을 돌리던 해인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시율은 해인이 돌연 기겁하자 그 시선을 따라가 원인을 찾았다. 아마도 비탈길 중간에 위치한 저 작은 갤러리로 인해 해인이 멈칫한 모양이었다.
그 갤러리 외에는 양쪽으로 흔한 기념품 가게뿐이었다.
“왜? 저 그림이 마음에 들어?”
오래됐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갤러리의 입구에는 그림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다. 유리관 안에 자랑스럽게 걸린 그건…….
“아우.”
“……박해인.”
왠지 시율도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다. 날아갈 듯 가벼우나 다채로운 색채였다. 오로라를 파스텔 톤으로 뭉개버린 듯한, 색을 셀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해인은 몇 달 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풀 네임에 벼락 맞은 듯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화랑에 전시된 자신의 그림을 본 것만 해도 기함할 일인데, 시율이 해인의 그 이상 반응에 관심을 갖나 싶더니 그림의 화가 이름을 읽어 내린 것이다.
“우, 우리 가자……!”
“왜? 난 이거 마음에 드는데.”
“나, 나나난 별로.”
시율은 해인의 그 이상한 반응에서 하나라도 더 캐내려는지 그림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국을 그린 작품이었다.
수국 잎 하나하나가 깃털 같이 세밀했다. 캔버스 사이즈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저렇게 조밀하다는 게 더 놀라운 점이었다.
색을 알 수 없는 안갯속에 잠긴 수국은 흐드러지기 직전으로 피어 있었다.
“좋네…… 이거.”
“……나 꼬치 먹을래.”
“원래 나는 분명한 느낌이 드는 사진을 좋아하는데.”
“꼬치!”
“주인분 안 계시나? 이거 좀 물어보고 싶은데.”
해인은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림을 보기만 해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 눈치 좋은 사내의 눈에는 그게 더 수상해 보였다.
“그만 가자! 응? 강…… 강!”
해인이 팔뚝을 잡아당기며 애걸했으나 소용없었다. 하긴, 시율이 이런 게 통할 남자였다면 해인이 그리 애먹지는 않을 거다.
“잠깐만, 좀 보자.”
“뭘 찾으십니까? 아, 그거 좋은 그림이죠?”
그리고 전시물에 관심을 보이는 손님을 놓칠 리 없는 갤러리의 운영자가 나타났다. 시율이 반갑게 그림을 가리켰다.
“이 그림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그우악!”
해인이 지금 고양이의 모습이었다면, 온몸의 털을 거꾸로 세웠을 게 분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