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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30화 (30/114)

30화. 고양이를 잡는 법

태일이 지금 애써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런지 해인은 그게 너무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의 깊은 곳에 머물고 있는 서글픔을 자신은 알았으니까.

“저 녀석 은근히 잘 삐지거든요. 나중에 제대로 축하해줘야겠어요.”

“……안 해도 돼요.”

해인의 입에서 그만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은을 적대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그렇게 됐다. 왜냐하면 하은은 항상 태일을 아프게 했으니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좋을 리 없었다.

“네?”

“……태일 씨는 저 여자를, 저 여자분을 좋아하는 거잖아요!”

“…….”

“그러니까 그런 거 말 안 해도 돼요! 말하면 태일 씨만 아프잖아요! 그런 거 바보 같다고요!”

욱해서는 소리치고 만 해인은 말이 끝나자마자 아차 싶어 발끝만 쳐다봤다.

태일이 기분 나빠하면 어쩌지 싶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 주제넘는 훈계를 한 것 같았다.

태일이 저에게 화를 내면 어떡하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면……!

“그런 게…… 티가 납니까?”

“……보면 알아요.”

“하은인 모르던데……. 그렇군요.”

조심스레 다시 올려다보니 태일은 드물게도 쓰라린 표정이었다.

웃음으로도 감추지 못할 만큼 씁쓸함이 밀려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지금 자신이 고양이의 모습이라면 온 힘을 다해 그를 위로할 수 있을 텐데.

아프지 마, 아프지 마, 하며 그에게 뺨을 비빌 텐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슬펐다.

“여자분이라 그런지, 감이 좋으시네요. 아! 형님을 닮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전 눈치가 젬병이라……. 죄송하지만 비밀로 해주세요. 자랑할 것도 못 되고. 또, 결혼을 앞둔 친구라…….”

태일은 상황을 수습해보려는 건지 답지 않게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해인은 그런 태일을 올려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그만해도 돼요.”

목멘 소리가 나왔다.

이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 걸까. 얼마나 인내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밝게 웃으며 자신의 약혼자를 소개해주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아무리 바라보고 아무리 사랑해도 친구로만 여겨지는 건.

벽을 사랑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제가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저 때문에, 우시는 겁니까.”

“아니에요!”

“하지만…….”

“태일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난 그 말이 꼭 하고 싶었어요.”

해인 역시 태일과 비슷한 사랑 방식을 가졌기에, 그를 이해하면서도 그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좋았다.

그로 인해 그 사람이 더 행복하다면, 나 하나는 아파도 좋았다.

저 혼자 불행하고 모두가 행복하다면 그게 가장 올바른 행복일 테니까.

하지만 저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혼자 남아 아프게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행복할 테니까.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알아요. 난…… 태일 씨 말대로 감이 좋으니까 안다구요. 태일 씨는 정말 좋은 남자예요.”

“……시연 씨.”

“그러니까, 난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커다란 눈에 가득 눈물을 매달고는, 풍성한 속눈썹에 고일 만큼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저는 울고 있지 않다고 우겼다.

해인은 그를 위로하고 싶었는데, 도리어 그의 위로를 받고 있었다.

***

“대학생 때였나. 하은이 생일에 목걸이를 산 적이 있어요. 고백하려고 했거든요.”

“그때…… 왜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강의실로 갔더니 두 손이 넘칠 만큼 꽃다발이며 선물을 잔뜩 받은 하은이가…… 절 보더니…….”

“……보더니?”

“자긴, 이런 거 너무 싫다며 화를 내더군요. 바라지 않은 선물은 민폐라고. 멋대로 안겨주고 가는 선물은 부담일 뿐이라고.”

태일은 운전하느라 전방을 주시하며 작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쩔 수 없었다는 듯.

“하은 씨는 인기가 많았군요.”

“미인이라서 그렇다고 하기보다…… 성격이 원체 좋은 녀석이라 항상 사랑받았어요. 누구에게나 태양 같았죠. 난 그 녀석을 미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여기, 저 있는데요. 해인은 슬그머니 한 손을 들고 싶어졌다. 창밖을 보는 걸로 겨우 참았지만 말이다.

마침 차가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때는 저녁 무렵이었고, 해가 지고 있어서 제법 풍경은 운치 있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도요.”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요.”

태일의 사과에 해인은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저어 보였다. 사과를 하자면 제가 해야 했다.

“아니에요! 그보다는 제가 괜한 참견을 한 것 같아서…….”

“위로가 됐어요.”

“그럴 리가…….”

“주변에 이런 이야기 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도움이, 됐다면…… 기뻐요.”

“난 시연 씨야말로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좋은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분에 넘치는 기분이 들었다. 칭찬을 들었으니 고맙다고 말하면 될 텐데. 해인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태일은 그런 해인이 참 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에, 그런데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이쪽은 집이랑 반대쪽 아닌가요?”

“못 들으셨어요? 형님이…… 아니, 형이 데려오라고 하던데요.”

“……어, 어디로요?”

전혀 모르는 이야기인데?

태일이 말하는 형이라면 분명 시율이었다. 해인의 얼굴에서 부끄러움이 싹 가셨다. 더불어 핏기도.

“강변으로요. 전 아시는 줄 알았는데…….”

“몰랐는데요.”

“오랜만에, 나도 여동생이랑 데이트 좀 하자고…… 그러시는 것 같았는데.”

아니! 무슨, 오랜만! 처음이지! 어떻게 억지로 끼워 맞춰도 두 번째! 언제 우리가 그런 사이였다고……!

해인은 이를 아득아득 갈기 시작했다.

태일의 손으로 시율에게 배달될 줄이야. 이 날강도 같은 놈……! 어쩐지 아침에 유난히 예쁘게 입혀준다 했다.

태일과 데이트하는 데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정성을 쏟는다 싶었더니, 다음 코스를 저와의 데이트로 정해놨을 줄이야.

해인은 마지막 희망을 한 가닥 부여잡고 물었다.

“태, 태일 씨는 어디 가는데요? 집에 안 가요?”

집에 고양이가 없으면 상황이 이상해질 텐데, 라는 속내를 숨기며 질문을 던졌다. 시율의 계획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태일은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저는 오늘 큰집으로 갑니다. 제사가 있어서요. 간 김에 자고 올 것 같고요.”

“……큰집이 어딘데요?”

“경상북도 안동이요.”

거참 뼈대 있는 가문인 모양…… 이 아니라! 그 말인즉슨, 오늘 시율에게 언제까지 잡혀 다닐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밤새……?

누구 맘대로 데이트를 계획해놔?! 그것도 저녁에 잡아놔?

심지어 도망갈 수도 없는 상태였다. 해인의 기어들어 가는 중얼거림을 태일은 듣지 못했다.

“주도면밀한 놈 같으니…….”

***

시율의 농간대로, 그가 맞춰놓은 계획대로 강변에 내려진 해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들고 있던 작은 가방으로 냅다 시율을 때리는 일이었다.

물론 태일이 떠난 뒤였다.

“아으씨! 너 정말 이럴 거야?!”

“아야, 아파.”

클러치나 다름없는 작은 천 가방으로 때린 터라 아플 리 없는데 시율이 너스레를 떨었다.

반면, 해인은 또다시 그물에 걸려들었음을 인정하기 싫어서 두 발을 동동거리며 소리쳤다.

“상의 좀 하자고! 상의 좀!”

“넌 무조건 싫다고 하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아니, 그래도 그렇지!”

하여간 강시율이라는 인간은 뭐든 정당화하는 데 굉장히 능력이 탁월했다. 해인은 휘말려놓고도 곧잘 할 말을 잃었으니 말이다.

오늘처럼 잠시만 방심했다 싶으면, 아니 만반의 경계를 해도 결국은 시율의 손아귀 안이었다.

“마침 태일이 녀석이 본가에 내려간다길래, 우리가 데이트하기 딱이다 싶었지.”

능글맞게 웃기는, 무슨 남자가 이리 용의주도한 걸까!

“강! 너, 지금 나랑 연애 놀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바로 그게 하고 싶은 건데?”

“이…… 씨……! 말했잖아! 난!”

“으흠?”

해인은 뒷부분은 소리 죽여 말했다. 시율의 옷깃을 멱살 잡듯 부여잡으며 말이다.

“사람이랑…… 안 사귄다고! 아니, 못 사겨!”

그로 인해 바짝 붙어 있긴 했지만 이를 갈고 있어서 전혀 로맨틱하지는 않은 모양새였다. 그래도 시율은 그런 접촉마저도 좋은지 싱글벙글했지만.

“왜? 태일이랑은 데이트하고 싶어 했잖아.”

“그건 그냥 좋은 사이가 되고 싶었던 거지!”

“데이트라는 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닌가?”

“……나, 난 너처럼 음란하지 않아!”

이 음란한 놈!

“음…… 그럼 안 사귀어도 되니까 만나만 주라.”

“세상에, 넌 자존심도 없어?”

“연애에서 밥 먹여주는 건 자존심이 아니거든.”

여, 연애에에에? 정말 얼빠진 얼굴이 된 해인은, 그만 시율의 옷깃을 붙잡은 채 굳어버렸다.

“난 어장 속에 나 한 마리만 있는 거면, 그것도 좋아.”

“무슨……!”

“만에 하나 다른 녀석이 들어와도, 다 내쫓고 내가 어장을 지배하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야 어장 안 물고기가 아니잖아! 어장의 지배자지!

심지어 강시율이라는 물고기는, 제멋대로 어장에 뛰어든 격이었다. 해인은 어장의 주인 자리는 빼앗긴 셈이고.

“그리고 말이야, 어차피 넌 나를 좋아하게 되어 있거든.”

해인은 정말로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의 도도하다 못해 오만한 자신감은 가히 기가 막힐 정도였으니까.

남자가 밀어붙인다는 거, 바로 이런 걸까?

열렬한 구애를 받으면 누구나 이런 기분이 되는 걸까? 심장이 간지럽게 뛰어댈까?

해인은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했다. 차가운 소리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봐야 시율의 손바닥 안에서 재롱부리는 수준이었다.

“……너, 너너 근자감이라고 알아?”

“근거 없는 자신감? 난 근거라면 있는데.”

“어디?”

“내가 엄청 노력할 거거든. 너한테 사랑받기 위해서.”

강적이다, 강적이야.

시율은 철벽을 치든 단호박을 먹고 대처하든 주저하지 않았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명언에 충실했다.

어떻게 해야 이 마수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걸까.

해인의 눈이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너한테 고백 안 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가 방랑벽이 심하거든?”

“오호, 몰랐던 사실이네.”

“그래서 언제 내가 없어질지 몰라.”

“그게 뭐?”

사신과 약속한 1년이 되면, 해인은 자의와 상관없이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될 거다. 모든 기억을 잃고, 전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게 분명했다.

태일의 애완고양이로 살았던 것도, 시율과 이렇게 옥신각신한 것도 전부…… 아무것도 남길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이러지 말라고.”

“널 흔들지 말라고?”

“……으씨.”

“내가 너를 조금은, 흔들고 있어?”

그윽한 목소리를 내며, 그가 느리게 웃어 보였다.

시율은 저의 어떤 부분이 매력적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셔츠를 너무 가까이 잡고 있었나 보다. 시율의 얼굴이 다가왔다. 잡고 있는 건 해인이었는데 목을 빼는 것도 해인이었다.

황급히 손을 들어 시율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만약 방랑벽이 도져서 떠나면 어쩔 건데? 그럼 너는 날 원망할 거잖아! 그런 게 싫다는 거야!”

“…….”

“난 아무와도 특별해질 수 없어! 아무런 약속도 못 해!”

해인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시율이건, 태일이건. 결국 그 누구와도 어떤 사이가 될 수 없었는데 시율이 자꾸만 저를 뒤흔드니까.

그냥 애완고양이 이상은 해줄 수 없는 처지였다.

아홉 달 후면 모든 기억과 함께 지금의 자신도 잊을 텐데 누군가가 주는 사랑이 달가울 리 없다.

한데 이렇게 목줄을 채우려 드는 시율이 원망스러웠다.

“네가 떠나면 너를 원망할 거라고?”

“그래! 난 미움 받는 거 싫어!”

“괜찮아.”

시율은 해인의 손바닥에 입술이 가려진 채 눈을 휘며 웃더니, 손바닥 안으로 간지러운 키스를 해왔다.

해인이 깜짝 놀라 떨어지려는데,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깊숙이 속삭였다.

“난…… 내 여자가 떠나면, 날 원망할 거니까.”

시율은 해인의 심난함을 전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라면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이 아닌데 인간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장난스러운 가면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 안쪽의 맨얼굴을 보였다. 원한다면 심장 깊숙이까지 보라는 듯.

“네가 떠난다면 그건 내가 사랑받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떠나지 못할 만큼 사랑해주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여자가 떠난다면 그건…… 항상 남자 탓이야.”

“으으……!”

“널 떠나게 한 내가 바보겠지.”

하여간 시율의 말은, 그 낮고 울림 가득한 목소리는…… 사람을 괴롭게 만들었다. 절로 한숨이 끓어오르게 하는 지독한 음성이었다.

억지로 흔들지…… 말란 말이야.

해인은 시율의 시선에 사로잡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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