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 키스-27화 (27/114)

27화. 고양이의 매력이란

해인은 보름달이 뜨는 날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날은 마음껏 사람으로 있을 수 있었으니까.

달이 크다는 건 그만큼 음기가 충만하다는 뜻이었고,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소모되는 기운보다 음기가 채워지는 속도가 더 빠를 정도였다.

그래서 보름달이 뜨는 날은, 사람으로 뒹굴기 딱 좋은 날이었다.

“흐음, 흠.”

태일이 출장을 가서 더욱 자유로운 달밤.

해인은 달빛이 잘 드는 창가 앞에 엎드려서 버드나무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연필밖에 없어 완성도가 조금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마음에 들게 나와서 기분도 좋았다.

시율이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자연스레 거실로 자리 잡는 시율을 해인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봤다.

“구경하는 것도 안 되냐?”

해인은 공중으로 까닥이던 두 발을 딱 붙여 세우고는, 그러니까 성난 꼬리처럼 빳빳이 세우고는 무언의 불만을 표출했다.

해인이 사람 모습으로 있는가 싶으면 시율은 어느샌가 이렇게 옆에 와 있고는 했다.

저도 책이나 텔레비전을 보면 말을 안 하는데, 그냥, 해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면 강 너는! 네가 일기 쓰는 거 누가 옆에서 구경하면 기분 좋겠어?”

“난 일기 안 쓰는데.”

“……그럼, 그림 그리는 거.”

“난 그림 되게 못 그려.”

“우씨.”

내가 동물원 원숭인가 뭐? 해인은 구경당하는 기분이 매우 별로였다.

“그래서 네가 엄청 대단해 보여. 난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멋지더라.”

“……그, 그래?”

“심지어 넌 고양이인데 잘 그리잖아. 그 그림, 사고 싶을 정도야.”

“흥. 그럼…… 뭐, 보든가 말든가.”

제 자유시간을 침범당하자 한껏 입술을 내밀었던 해인은 이내 시율의 교묘한 칭찬에 뺨을 붉히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 그림을 칭찬하는데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일단 시율이 저렇게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지내기가 편한 구석도 있었고 말이다.

스케치북 같은 개인 물건을 시율의 방에 숨길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은 점이었다.

자꾸만 등 뒤로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

하여간 시율은 이상한 녀석이었다.

있으면 귀찮은데 분명 도움이 되고, 거슬리는데 없으면 허전하고……. 끙.

그뿐인가? 요즘 와서는 갑자기 사랑 고백을……. 뚜둑, 당시를 회상한 해인이 너무 힘을 준 탓인지 연필심이 눈앞에서 부러져 버렸다.

“……강!”

이렇게 신경 쓰다가는 그림 그리는 것도 못하겠다 싶어 해인은 엎드린 몸을 팔꿈치로 일으켜 세웠다.

상체를 들며 해인이 그를 짧게 부르자 시율이 느릿하게 눈을 마주쳐 왔다.

해인을 감상하던 눈이다.

그림 그리던 해인의 몸 위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덮은 달빛 이상으로 구석구석 살피던 그 눈.

그는 해인이 무릎을 꿇으며 진지하다 못해 인상을 쓴 것 같은 얼굴로 저를 보자 눈썹을 까닥였다.

“음?”

“정말…… 내가 좋아?”

대뜸 물었으니 당황할 만도 한데, 시율은 더 느긋한 얼굴로 웃어 보일 뿐이었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응.”

“대체, 내 어디가?”

“네 그런 얼굴이 좋아.”

“……끄응.”

“귀엽잖아. 알쏭달쏭해하는, 고양이 같은 얼굴이.”

당황은커녕, 시율은 그저 그 거만한 자세 그대로 소리 없이 웃었다.

한쪽 입매를 틀어 올리며 수간호사들이 섹시하다고 표현하는 특유의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시율이 턱을 괴며 이번엔 제가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나를 강이라고 불러?”

턱을 괸 손의 약지로 입술을 더듬으며 묻는 게,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시율의 행동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툭하면 페로몬을 뿜어대고 있었으니까.

“이름으로 부르면…… 엄청 친한 것 같잖아.”

“엄청 친해지면 되잖아.”

“……아직 널 못 믿겠단 말이야.”

“뭐, 나는 네가 강, 강 하고 부르는 것도 좋아하지만.”

시율은 근래 아주 상냥해졌다. 자주 저렇게 연인이라도 대하듯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왔다.

다만, 해인은 여전히 시율의 진심을 믿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난 아직도 못 믿겠어! 납득이 안 된단 말이야! 네가! 날! 왜 좋아하냐고!”

기어코 따지듯 소리치고 말았다.

그건 해인에게 요즘 가장 큰 의문거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고백을 받아본 적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여중, 여고를 나와 여자들이 많은 예대에 들어가서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항상 이런 식의 경계가 강한 성격이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보니 소개팅도 해본 적 없었고, 남자가 접근한다는 낌새를 보이면 철벽을 머리끝까지 쳤다.

그리고 본래부터 그리 솔직한 성격은 못 됐다. 스스로도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으음, 이럴 땐 내가 개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갑자기 무슨 개?”

“그러면 네가 좋으면 좋다고 꼬리를 마구 흔들며 온몸으로 애정을 표현할 테니까. 속내를 너무 잘 숨기는 것도 이럴 땐 불편하지.”

하긴, 시율은 누가 봐도 고양이 과의 남자였다.

속을 알 수 없고, 심술궂고, 나른하고, 섹시하고. 그리고 점잖으면서도 어딘가 고약스러운 면이 있었다.

해인이 아방한 고양이라면, 시율은 보스의 품격 같은 걸 가진 고양이였다.

진하게 웃으며 시율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해인에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

“으엉……? 왜 가까이 오고 그래!”

해인이 엉덩이를 달싹여 뒤로 물러섰다. 아니, 아예 일어나서 냉큼 피신하는 게 나을까 고민하는데, 시율이 해인의 앞으로 앉는 게 더 빨랐다.

그는 해인의 무릎 위를 살며시 그러쥐며 시선을 휘어잡고 낮게 속삭였다.

“네가 내 속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아우.”

“그건 아무래도 말로 설명이 되는 게 아니거든. 내가 너의 어디를 어떻게 좋아하고, 얼마나 사랑스럽게 여겨서…… 네가 날 사랑하길 바라는지. 그런 거 말이야.”

“너, 너무 가까워.”

거의 코가 닿을 만큼 얼굴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해인은 한계까지 얼굴을 돌렸고, 시율은 아직도 경계가 삼엄하기만 한 해인에게 아쉬움의 입맞춤을 했다.

보드라운 뺨 위로. 닿을 듯 말 듯 한.

“조금만 시간을 주라. 그러면, 느끼게 해줄게. 꼼짝없이 납득할 수 있도록.”

낮게 바닥을 치고 울려 나가다가 흐트러지는 목소리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시율은 상대가 암컷이라면, 자신은 수컷이 되자고 생각했다.

물론 본래 수컷이기도 했고.

“네가 얼른 느꼈으면 좋겠다.”

“……뭘? 느끼…… 는데?”

“아, 사랑받는구나.”

어째서 단어 하나하나가 이토록 야하게 느껴지는 걸까.

시율의 그 천천히 휘어지는 눈길과, 나긋한 입술의 모양, 욕망 짙은 눈길. 그 모든 게 해인으로서는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그것들이야 시선을 돌리면 어찌어찌 외면할 수 있다고 해도, 목소리만은 속수무책으로 귓가에 파고들었다.

구애하는 수컷의 진득한 음성.

그것을 이 거리에서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태일이 이틀간 출장 일정을 끝내고 제주도에서 귀가했다.

선물로는 제주도 감귤 초콜릿을 내밀었는데, 시율은 당연하다는 듯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왔다.

남자들에게 초콜릿이란 술안주 정도였으니까.

챙.

“수고했다, 태일아.”

“예, 형님.”

둘은 이제 건배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사이였다.

시율은 소파 위에 앉아 있었고, 태일은 무릎 속으로 들어오는 해인 때문에 바닥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먀옹, 먀옹.”(바다다, 바다 냄새가 나.)

“반가워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네요.”

“그렇지. 넌 정도 많은 녀석이 혼자 외로워서 어떻게 살았냐.”

“개냥이가 있었잖습니까. 이 녀석은 고양이지만요. 그래도 위안이 되거든요. 형님 덕분에 요즘 출장 가도 걱정이 덜 됩니다.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해인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태일을 내려다보던 시율이 문득 제의했다.

“그보다 슬슬 형이라고 부르지?”

“아…… 그럴까요?”

“뭐, 천천히.”

“노력하겠습니다.”

두 남자의 자주 있는 술자리가 이어지는 동안 해인은 방금 씻고 나와 비누향이 물씬 나는 태일의 무릎 속에서 잠들기 시작했다.

따듯하고 익숙한 향에 안심이 됐다.

시율은 자꾸만 자신을 여자로 만들려고 하는 통에 해인은 내내 긴장한 상태로 있었지만, 태일의 품에서는 고양이로만 있으면 되어서 마음이 편했다.

어느새 깊이 잠들어 골골대는 해인의 모습이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 같았다. 힐끔, 두 번째 캔을 따며 그런 해인을 바라본 시율이 작게 중얼거렸다.

마침 아무 채널이나 틀어둔 텔레비전에서는 오래된 로맨스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로맨스 영화 좋아하냐?”

“아뇨, 별로.”

“나도 그래. 너무 인공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서 그런가, 진짜 사랑이 아닌 것 같아.”

“그야 영화잖습니까, 형님. 진짜랑은 다르죠.”

“그래도 현실이 더 영화 같을 때가 있잖냐.”

태일은 율의 시선을 따라 텔레비전 화면은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에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남자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절절한 멜로물은 배경음악까지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신태일, 네가 생각하는 진짜 사랑은 어떤 거냐?”

시율이 영화를 보다 떠오른 듯 물었고, 원체 진지한 성격의 태일은 이내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시율이 단순히 라이벌을 의식해 질문을 던질 줄도 모르고 말이다.

“사랑이란 건…….”

이내 태일이 입술을 열며 해인의 옆구리를 길게 쓰다듬었으나, 해인은 그로 인해 더욱 깊이 잠들었을 뿐이었다.

두 남자가 이런 대화를 하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거죠. 그 사람이 행복하면…… 내가 행복한 거요.”

“……그 사람이 너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래야 사랑이죠.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괜찮고, 내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괜찮은 거.”

태일이 15년간 해온 하은에 대한 짝사랑이 그런 것이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복을 빌어주는 것.

“흐음…… 그건 너무, 맹목적인 사랑 아닌가. 꼭 부모님들의 자식 사랑 같잖아.”

“그런가요? 형님 생각은 어떤데요?”

태일이 제게 되물을 거라 여기지 않았던 터라 잠시 입술을 다물었던 시율은 잠시 후 느리게 대꾸했다. 흘리듯 담담하게.

“사랑이란 건…… 승자의 것이지. 혹은 강자의 것.”

“쟁취하는 스타일이시군요?”

“그렇다고 해야 하나? 여튼 갈취하더라도 갖는 거지. 얻지 못하면 그건 내 사랑이 아니니까.”

우리 정반대 같지? 하는 시율의 어투에 태일이 가만히 웃었다.

“그럼…… 형님의 사랑은 형님을 위한 거네요. 제 사랑은 그 사람을 위한 거고요.”

태일의 사랑은 얻지 못해도 좋은 것이었고, 시율의 사랑은 가져야만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욕심 없는 자와 있는 자의 사랑의 차이였다.

태일은 그 존재 자체만을 사랑함에 만족했고, 시율은 그것이 자신을 향해야만 만족했다.

한쪽은 불완전하더라도 사랑했고, 한쪽은 완성된 걸 사랑했다.

그 두 가지의 차이에는 시율도 웃었다. 메우는 건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피차 가치관이 다르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해인의 사랑방식은 태일과 흡사한 것이었다. 바라만 보다가 일찌감치 포기한다는 게 말이다.

“넌 너무 얌전한 사랑이야. 거기에 비하면 난 확실히 폭군일지도.”

시율은 해인의 취향을 알 것 같았다. 태일이 주는 그런 온화함, 편안함, 안정에서 오는 여유.

하지만 시율 자신이 줄 수 있는 건 그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쉼 없는 떨림과 격정 어린 숨 막힘, 그로 인해 쉴 새 없이 요동치는 심장.

그 사이에는 미풍과 폭풍만큼의 갭이 있었다.

“여자들은 형님처럼 밀어붙이는 쪽을 좋아하지 않나요? 저 같은 남자는 매가리 없다고 싫어하더라고요. 자존심도 없냐고.”

“그거 김기도가 그랬지?”

“네, 그 녀석이죠, 뭐. 저더러 좋게 말하면 조심스러운 거고, 나쁘게 말하면 투지가 없다나.”

시율은 누구도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 평화주의자가 자신의 라이벌이라는 데 묘한 감정을 느꼈다.

안도보다는…… 뿌듯함. 시합에 앞서 상대가 정의롭다는 걸 확인한 그런 기분.

내 상대는 부도덕하지 않은 자로구나, 하는.

시율은 상대의 가치가 높다는 데 만족했다. 그것이 자신의 가치이기도 할 테니까.

***

오늘의 집안일 할당량은 욕실 거울 닦기였다.

한참 만에야 해인은 이마에 땀이 조금 맺혀서는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때마침 부엌에 선 시율이 손짓으로 해인을 불렀다.

꼭 저렇게 부른다니까? 내가 개야? 고양이지!

해인은 입술을 내밀고는 다가갔고 시율은 언제 준비했는지 식탁 위에 뒀던 선물 꾸러미를 하나 내밀었다.

“선물이다. 받았으니 줘야지.”

“내가 뭘 줬는데?”

“그 이상한 청동 모형.”

“아아!”

주고도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태일에게는 줄 방법이 없어서 결국 둘 다 시율의 방 컴퓨터 옆에 놓여 있었다.

“풀어봐.”

잘 포장되어 있는 물건은 손에 받아 들자 제법 묵직했다. 납작하고 길었는데, 흔들어봤더니 안에서 잘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냄새를 맡아봤다. 쇠 냄새 조금, 나무 냄새 조금.

해인은 답례품은 고마웠지만 자신이 원래 준 선물이 워낙 약소한 거라 받기가 조금 민망해졌다. 선물이라고 우겼지만 어떻게 처치할 수 없어 그냥 떠안긴 거였는데.

“얼른.”

망설이고 있자 시율이 재촉했다. 해인은 일단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직감이 왔다.

이것은…… 분명 미술용품이다! 그건 그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내미는 격이라 해인은 포장지를 급하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연신 시율을 힐끔대며 속에 든 것을 꺼내는데, 심장이 콩닥댔다. 시율이 그 모양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필요했지?”

“으아……!”

그것은 전문가용 색연필이었다.

파버카스텔! 정확한 모델명은 ‘전문가용수채색연필 알러트뒤러 틴 120색’, 밑그림만 겨우 완성된 해인의 버드나무 그림에 색을 입힐 수 있는 물건이다…… 이 말이었다.

해인의 특기대로 색감을 살릴 수 있다.

어쩜 이렇게 꼭 가지고 싶을 때 꼭 갖고 싶은 것을 내미는지. 시율은 역시 사람 머리 위에 있는 타입이었다.

제멋대로 막 꿰뚫어 보는 고약한 타입. 그런데 고맙긴 했다.

“이거…… 정말 나 주는 거야?”

“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잖아.”

“……응!”

“재료가 부족해 보여서.”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걸까? 너무 좋은 거 같은데. 해인은 망설였지만 결국 품으로 색연필을 끌어안으며 시율을 올려다봤다.

은근히 감동적이었다. 저를 위해 무언가 진지하게 생각해준 것이 아닌가.

“……고마워.”

“마음에 들어?”

“응, 진짜 기뻐! 너무 좋아!”

해인이 두 눈을 반짝이며 부끄럽게 웃자 시율이 방긋 따라 웃었다.

“고마우면 말이야, 부탁이 있는데.”

“으엥?”

의미심장한 목소리였다.

그럼 그렇지, 역시 대가가 있는 거였어! 뇌물이었어, 이건?!

해인은 당장 품에서 색연필을 떼어놔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마치 품에 달라붙은 양 뗄 수가 없었다.

이거 너무 탐나는데!

“별건 아니고…… 무릎베개 좀 해줄래?”

“누, 누가 너를 내 무릎에……!”

“아니, 내가 말하는 건 네가, 내 무릎에.”

음? 그건 좀 괜찮을 것도 같고.

애초에 무릎베개 이상의 것을 상상했던 해인은 자신의 무릎에 시율이 눕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시율의 무릎에 눕는다니 그리 나쁜 요청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다 교묘하게 계산된 시율의 수법이었다.

해인은 잠시 갈팡질팡 고민하다가 물었다.

“얼…… 마나?”

“한 시간?”

“…….”

“알았어, 삼십 분.”

심지어 시간을 반이나 깎아주다니! 이건 놓치면 손해 아닐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끙끙거리며 고민하나 싶더니, 결국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해인이다.

시율은 해인의 그런 순진한 구석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해인은 그렇게 착착 알게 모르게 길들여지고 있었다.

“응.”

마수인 줄도 모르고 착하게 대답까지 했다. 기특하게스리. 시율이 씩, 하니 웃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