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뒤통수 맞은 고양이
일단 입을 열고 시율은 1초가량 생각했다.
겨우 변명거리를 짜냈는데, 그건 정말 순식간에 판단하고 최적의 결론을 내린 터라 그가 망설인 기색은 누구도 읽지 못했다.
태일과 함께 의문을 표하던 해인 역시.
특히 태일은 시율이 너무도 자연스런 모습이라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여동생.”
사실은 여자 친구라고 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해인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그냥 아는 후배라고 말하자니 시율은 그건 그것대로 찜찜했다.
해인을 아무 남자의 집에나 선뜻 들어가는 여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무엇보다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장 무난한 답변이 그것이었다. 어차피 강, 강! 거리며 강아지처럼 매달리니 말이다.
“아아, 그래서 낯이 익었구나. 잘 보니 닮은 것도……?”
“……네! 아마 그거, 그거예요.”
해인이 막힌 숨과 함께 가까스로 대답했다.
몇 달 전 일이라 태일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양이지만.
해인이 가출했던 그날 밤, 태일은 제 얼굴에 약을 발라주던 사람 모습의 해인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졸지에 시율의 여동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은 확실히 완벽에 가까운 거짓말이었다.
해인은 새삼 시율의 천역덕스러움에 깊게 감명받았다. 본받았으면 할 정도였다.
“전 신태일입니다.”
그러나 곧장 두 번째 난관이 닥쳤다.
예의 바른 태일이 악수와 함께 통성명을 시도하는 게 아닌가.
이런, 맙소사. 해인은 반사적으로 제 손을 내밀면서도 머릿속은 하얗게 되어가고 있었다.
사신이 걸어놓는 주술 때문에 사람인 자신에 대해서는 단어 하나 벙긋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
“전…….”
가명, 가명을 지어야 해. 김영희? 이철수? 해인이 그렇게 바보같이 아무 이름이나 뱉으려는 찰나.
시율이 악수하려는 둘의 손가락 사이를 막으며 해인의 손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제 쪽으로 당겨가며 말했다.
“강시연.”
역시 그는 노련하고 치밀했다. 또한 해인이 어버버거리는 것만으로 그녀에게 마땅한 사람의 이름이 없다는 것도 눈치챘다.
“아, 시연 씨. 반갑습니다. 그나저나 형님 여동생분을 너무 아끼시는 것 아닙니까?”
그에 무안해할 법도 하건만 태일은 그저 스치듯 말했다.
자신이 악수를 저지당한 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민망해진 손을 들어 올려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오히려 그 모습에 해인이 민망해졌다.
악수하자는 사람한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눈에서 불꽃을 튀겼으나 ‘오빠’인 시율은 깐깐한 인간이었다.
이건 기회였고, 좋은 위장이다.
자연스레 접촉할 수 있는 연극.
뭐, 잘됐네. 시율은 잠시 의외의 상황에 화가 났었으나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하기로 했다.
“소중한 여동생이니까.”
“맞다. 그러고 보니 전에 말씀하신 적 있죠? 치과의사라고…….”
“아니, 그건 시영이.”
“가끔 병원 앞으로 뭐 사달라고 조르러 온다고 한 게?”
“그게 시영이.”
음? 해인은 문득 가출하던 날 병원 앞에서 봤던 키 작고 발랄한 여자를 떠올렸다. 분명 그 여자도 시율에게 뭔가 사달라고 졸랐던 느낌이…….
“나이가?”
“스물…… 일곱.”
시율이 적당히 갖다 붙였다. 실제 나이는 그보다 많았지만, 어리게 만들어줬으니 해인은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럼 저한테도 동생이시네요.”
사무적인 음성이었다. 태일은 이상하게도 여자한테‘는’ 별로 친절하지 않은 편이었다.
항상 뚜렷한 거리를 뒀다.
예를 들어, 동물병원의 수간호사들이 많은 어택을 하는데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들이 안타까워하는 소리는 그의 애완고양이인 해인이 아주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역시나 지금도 태일은 해인에게서 금세 관심을 거뒀다. 대신 고양이를 찾았다.
“그런데 형님, 개냥이는?”
“아…… 시연이 때문에 숨었다. 낯선 사람이 있어서 안 나오네.”
“그래요?”
“어디로 숨었는지 감쪽같이 안 보이네.”
시율이 너스레를 떨었다. 태인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런가 보다 하는 눈치였다.
“이, 그러고 보니 하은이도 이상하게 싫어하더라고요. 여자는 싫은 건가.”
“그런 동물들도 있지. 남자만 싫어하는 녀석들도 많거든. 동물들마다의 개성이랄까.”
해인은 두 남자가 대화를 주고받을 때마다 움찔거렸고, 해인이 갖추지 못한 태연함으로 무장한 시율은 그런 해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태일에게 턱짓으로 물었다.
“그보다 오늘은 늦는다더니.”
“아아, 모델 스케줄이 꼬여서 좀 복잡하게 됐어요. 펑크 나서 다른 모델을 찾는 중입니다. 어쩔 수 없이 촬영 내용도 좀 바뀔 것 같고, 렌즈를 다시 가져갈 겸 들렀습니다.”
“그렇구나.”
“그리고 오늘은 밤샘 촬영이 될 것 같아 잠깐 있다가 다시 나가봐야 합니다.”
그거 듣던 중 다행이었다. 해인은 두 눈을 빛내며 도망갈 타이밍을 노렸다.
“동생 오는 건 말 못 해서 미안하다. 내가 얹혀산다니까 걱정됐나 봐. 오고 싶다고 해서 잠시 부른 건데.”
“얹혀살긴요. 정당하게 월세도 내시잖습니까.”
시율은 태일이 한사코 안 받겠다는 월세를 쥐여 주고 있었다. 빚지고는 못 사는 타입이었으니까.
“참, 그런데 카레가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형님? 5인분은 족히 되어 보이는데.”
“맞다, 카레.”
“제가 불은 껐습니다.”
“다행이다. 원래 카레는 묵혀야 맛있거든. 냉동했다가 해동해서 먹어도 되고. 할 땐 넉넉하게 하는 편이야.”
“그렇군요. 저도 온 김에 같이 먹어도 될까요? 여동생분이 너무 불편하지 않으시다면요.”
캭?! 해인이 속으로 식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어 안달이 난 고양이더러 카레를 먹으란다.
태일은 시율과 해인, 두 사람이 카레를 먹을 예정이었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말하자면 길지만, 전혀 아니었다.
“얘가 낯을 좀 가려서…….”
“아, 그러면 제가 빨리 나가겠습니다. 두 분이 드세요.”
어느 타이밍으로 보나 태일은 밥을 먹으러 집에 들른 거였다. 그리고 태일은, 이 집의 주인이었다.
해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앞으로 나서야 했다.
“머, 먹어요! 먹어! 아이참 오, 오…… 오빠는…… 내가 무슨 낯을 그리 많이 가린다고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고 그래?”
“……먹겠다고?”
오빠? 시율의 눈썹이 위로 씰룩거렸다. 해인의 입가도 만만치 않게 어색한 경련을 했다.
“그러엄!”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카레…… 울며 겨자 먹기로 먹어주마. 해인의 처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일이 물었다.
“불편하신 것 아닙니까? 전 나가서 대충 먹어도 되는데요.”
“그럴 리가요. 아까는…… 그, 오…… 빠가 없어서 당황한 거예요. 저 원랜 안 그래요. 그치, 오빠?”
아, 이런, 씨.
시율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해인을 보며 여동생으로 소개하면 안 됐던 이유를 한 가지 깨달았다.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는 입술이 아무리 촉촉해 보인들…… 키스할 수 없을 테니까.
망할, 망할. 그걸 염두에 뒀어야 하는데.
띵동!
세 사람이 그렇게 현관에서 기묘한 신경전을 벌이는데, 누군가 또 초인종을 눌렀다. 더 이상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누구랄 것 없이 문 쪽으로 모두 시선을 틀었다.
***
이상한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해인이 사람 모습으로 카레를 퍼먹는 것도 어색한 일인데, 거기에 남자 셋이 더 껴 있었다.
오빠 역이 된 시율과, 오빠의 룸메이트인 태일, 그리고 태일의 친구인 김기도까지.
태일이 소속한 엔터테인먼트의 매니저인 기도가 일이 펑크 난 태일을 도우러 온 건 당연했다.
“이야, 동생분이 아주 귀여운데요, 형님.”
“그래?”
“두 분이 닮은 듯 안 닮았네요.”
기도는 시율과도 몇 번 안면이 있었다.
그는 카레를 좋아하는지 덥석 같이 식사를 하겠다고 덤볐다. 보아하니 해인이…… 아니 시연이라는 가명을 쓴 시율의 여동생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아무리 찾아봐도 개냥이가 없는데?”
그 와중에 가장 먼저 밥을 먹은 태일은 열성적으로 개냥이를 찾고 있었다.
어딘가 구석에 꼭꼭 숨었다고 여기는 듯한데, 어디에서도 나올 리 없었다. 왜냐면 지금은 식탁에서 카레를 먹고 있었으니까.
눈물이 날 것 같은 상황이라 가시방석인 해인이었다.
“어디 숨어 있겠지. 이리 와서 한 접시 더 먹어라.”
“아, 배불러서 괜찮습니다.”
태일은 그렇게 대꾸하며 뒷베란다로 개냥이를 찾으러 가버렸다.
해인은 세 달 만에 먹는 음식이 분명 체할 것임을 예견했다. 아, 살 떨려. 거짓말을 잘 못하는 체질이라 무언가 연신 콕콕, 심장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여동생이 대학생이시라고요?”
“어어…….”
“전에 의대생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의대는 문턱도 못 밟아본 해인이었다. 하지만 시율의 집안이 죄다 그쪽인 건 식탁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근래 가장 자주 모이는 구성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해인은 고양이 역할로 그 자리에 참석했었다.
“학교에서 인기가 많겠어요.”
“……전혀요.”
“혹시, 모델 관심 없어요?”
기도는 은근히 해인에게 관심을 표했고, 해인은 이놈이 왜 이러나 싶어 입에 수저를 문 채로 시선을 회피했다.
“별로…….”
“내가 보기엔 뭔가 특이한 매력이 있는데. 잡지 모델이라도 한번 안 해볼래요?”
“전, 키도 작고요.”
“대신 비율이 좋잖아요. 팔다리가 가늘고, 얼굴도 작고. 분명 먹힐 겁니다, 시연 씨는.”
기도는 제법 끈질겼다.
평소의 고양이 모습이었다면 상대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지성과 인을 겸비한 사람인지라 어색하게라도 웃으며 분위기를 맞춰야 했다.
해인이 힘겹게 웃음을 흘리자 끼어든 건 시율이었다.
“얌마, 어딜 넘봐.”
“생각해보세요, 형님. 귀여운 의대생 모델, 꽤 먹힐 것 같은데요.”
“우리 집은 그런 거 안 시킨다.”
“……그런 거라뇨?”
“모델이라는 직업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집안이 좀 고루해. 그래서 얼굴 파는 일 안 좋아하시고.”
기도의 관심은 어딘가 독특한 매력이 있는 해인을 모델로 써보고 싶은 것이었고, 시율은 당연히 그걸 가드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나빠지기 시작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율도 기도도 말을 좋게 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아…… 가, 강 오빠? 왜 그래애……?”
화기애애했던 식사 시간이 살벌해지려는 기미가 보이자 해인이 냉큼 옆자리에 앉은 시율에게 몸을 비볐다.
뿐만 아니라 팔뚝을 끌어안으며 어깨 위로 뺨을 문질렀다.
그건 고양이의 습성으로 싸움이 날 것 같으면 그러지 말라고 달래는 본능적인 행위였다.
싸우지 마, 싸우지 마, 하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온 태일과 눈치 마주쳐서 비비적거리다가 아차! 하기는 했지만.
그 친밀한 행위를 목격한 태일과 기도는 남다르게 친한 남매라고…… 여겼다.
그러면 시율이 이렇게 아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했다.
그것을 거든 건 괴팍하게 굳었던 시율의 미간이 해인의 애교에 곧장 원상복귀 됐기 때문이었다.
“……형님이 여동생 사랑이 좀 지극하시더라. 들이대지 마라, 기도야.”
“뭐, 서로 나쁜 뜻은 없었으니까요. 제 실숩니다.”
“아니. 괜히 민감하게 굴어서 나야말로 미안하지.”
태일이 돌아오자 상황은 확실히 좀 나아졌다.
해인은 격하게 냉수가 필요해졌다.
***
겨우겨우 위기의 끝이 보여갔다.
한때 위태했던 식탁 분위기는 해인의 애교 아닌 애교로 인해 다시 좋게 돌아왔고, 해인은 제가 설거지를 하겠다며 거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식사 시간 내내 자신에게 무슨 질문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했더니 분명 먹긴 했는데 카레 맛도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해인은 일부러 약하게 물줄기를 조절한 후 천천히 설거지를 하며, 태일과 기도가 얼른 식후 커피를 마시고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야 자신도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참, 태일이 너 다음 달 창립기념파티 말이야. 이번엔 누구랑 갈 거냐? 하은이는 이제 동행 안 해줄 것 같던데.”
“음…… 뭐, 구해봐야지.”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도 해인의 성능 좋은 귀는 남자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건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려왔다.
“하은이면 그 모델인 여자 친구?”
“예, 형님은 본 적 없으시죠?”
“듣기만 했지. 너희 셋이 고등학생 때부터 친했다는 것만.”
시율은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커피 잔을 기울였다. 그의 눈은 계속 불안불안하게 설거지를 하고 있는 해인에게 가 있었다.
“그 녀석이 이번에 진지하게 사귀는 남자가 생겨서, 매해 태일이랑 같이 가던 회사 창립파티에 그 남자랑 오려는 눈치더라고요.”
“아아, 커플 동반인가 봐.”
“그렇죠. 태일이 이 녀석은 당장 2주밖에 안 남았는데 파트너도 없고요.”
“괜찮아. 혼자 가지, 뭐.”
“너 그러다간 정말 게이라고 소문난다.”
과연 죽마고우는 죽마고운지, 기도는 아무도 태일에게 선뜻 말하지 못한 단어를 마구 내질렀다.
시율은 그 말에 커피를 마시다가 조금 흘렸을 정도로 움찔했는데 말이다.
자신도 전에 한번 했던 생각이니까. 멀쩡한 놈이 주변에 여자라고는 그림자도 안 보여서 잠깐 의심했었다.
“아, 안심하세요, 형님. 이 녀석 정말 게이는 아니니까.”
“……알아, 알아. 짝사랑을 뭐, 오래 했다고.”
그게 남자일 수도 있겠다고 의심했지.
“어? 그걸 아십니까?”
“들었으니까.”
“의외네요. 태일이 녀석이 그 얘기를 누구한테 할 줄은 몰랐는데.”
“전에 형님이, 자꾸 여자를 소개해준다고 하셔서……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나왔어.”
해인이 또 한 번 설거지하다 말고 흠칫거리는 건, 제 발 저려서였다. 그 여자가 저라는 걸 알아서.
상황을 알 리 없는 기도는 시율에게 반색하며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이야! 형님 의리 짱이시구나! 그럼 그 여자 얼른 소개해주시죠. 이 녀석 좀 구제하자고요.”
“……그 후배가, 그사이 남자 친구가 생겼더라고. 미안.”
“그거 아쉽네요.”
“저기, 난 괜찮은데.”
“아오, 답답아! 너 지금 회사 사람들이 다 너 게이인 줄 안다니까. 그래도 괜찮냐.”
태일은 이래저래 첫사랑의 대상이 되기 딱, 좋은 타입의 남자였다.
누구에게나 상냥하지는 않지만 타고난 인성이 발랐고,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주변에서 누구나 그를 신뢰했다.
모델들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키가 크고 몸이 다부진 데다가, 잘생기기까지 했다. 심지어 본가가 큰 사업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연히 탐내는 여자는 많은데 함락시킨 자가 없으니 공공연히 게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게! 이!”
“너 이 자식…… 저주하냐, 지금.”
태일이 친하게 지내는 여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하은뿐인데, 하은이랑은 아무리 봐도 단순한 친구 사이였으니까.
“그럼 그냥 아무나 데리고 가든가! 너 좋다는 여자야 줄 섰잖냐. 네가 부탁하면 서로 자기가 가겠다고 할걸?”
“으음. 아무나…… 라는 거 자체가 실례인 것 같아서. 여자한테…….”
“야, 인마! 부부도 원래 아무나였어!”
“……그리고 혹시 기대할까 봐. 특별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면 어쩌냐. 난 책임질 수 없을 텐데.”
기도가 답답하게 소리쳤고, 시율은 커피를 거의 비우며 부엌에서 긴장하고 있는 해인을 바라봤다.
저기 있는 고양이 한 마리도 그중 하나지. 다정하고 금욕적인, 신사 같은 남자 태일에게 푹 빠진.
해인의 취향이 그런 거라면 저는 맞출 수 없었다. 그는 금욕과는 좀 거리가 멀었으니까.
시율은 잠자코 생각에 빠지나 싶더니, 대뜸 웃으며 태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언젠데, 그 창립기념파티?”
“아, 다음 달 8일입니다.”
“잘됐네. 그럼 쟤 좀 데려가.”
“예?”
지금 시율이 가리키는 건 누가 봐도 해인이었다. 지금은 강시연이라는 가명을 사용 중인, 그의 여동생 인 척하고 있는 여자.
해인은 돌연 시율이 자신을 숟가락으로 가리키자 소리칠 뻔했다. 가까스로 참았으나 그 어색한 웃음, 오늘 식탁에서 내내 띠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 강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마침 쟤 애인도 없고, 시간도 남아도는 녀석이고, 뒤끝도 없고. 딱이지?”
“……아무리 그러셔도, 형님.”
“오빠아?”
“이 악물지마. 내 심부름하는 셈치고 하루만 태일이랑 파티에 동행해주면 되잖아.”
오빠라고 그를 부르는 그 소리는 무슨 짓이냐, 죽고 싶냐, 미쳤구나?!
그런 의미들을 내포한 강력한 분노를 담고 있었지만, 시율은 아무렇지 않게 눈앞에서 사람 뒤통수를 쳤다. 아니, 고양이 뒤통수.
네 마음대로 결정하지 마!
“좋은 생각 아닌가? 내 동생이라면 너한테 쓸데없는 기대도 안 할 테니까. 당연히 책임질 필요도 없고.”
“전 괜찮지만 동생분한테 다른 일정이 있을 수도 있고.”
“절대, 그럴 리 없는 녀석이니까. 편하게 일일 파티 도우미라고 생각하고 다녀와.”
이 미친놈의 자식 속을 알 수가 없네? 해인은 행주를 쥔 제 손이 부들거리는 걸 느꼈다.
야, 이 사차원, 아니 오차원 자식아! 제발 상의 좀 하자!
아니, 그 전에 네 녀석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 좀 알자! 시율은 정말이지 그 속이 고양이처럼 미스터리한 녀석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부담스러운데요. 시연 씨랑은 오늘 초면이고…….”
“내가 너한테 고마운 게 많아서 그래.”
“정말 괜찮은데요…….”
태일 역시 시율의 때아닌 호의에는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율의 말을 빌리자면 ‘아주 소중한’ 여동생 아닌가.
기도가 모델로 눈독을 들이자 으르렁거려놓고는, 제 손에 대뜸 쥐여주다니.
“기도랑 달리 넌, 늑대 과는 아니니까.”
“믿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동생분이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뇨. 가요. 가! 가! 두 번 가요! 아니, 세 번 가!”
해인은 울화가 치밀어 결국 소리쳤다. 이놈의 데이트! 차라리 한 번 해버리고 말지!
어차피 시율의 속은 알 수 없으니 까짓 호쾌히 승낙해버렸다. 머리 아픈 건 이제 질색인 해인이 아니던가.
시율은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인데, 피할 수 없다면 즐기랬다.
“아니, 데이트는 딱 한 번 허락할 건데? 그리고 태일이 너…… 알아서 잘해라. 내 소중한 여동생한테.”
데이트 상대로 제 동생을 내주면서 손잡는 것도 안 된다고 눈으로 말하는 그 살벌함.
그럴 거면 굳이 인심 쓰지 않아도 되는데…….
“가면 되잖아!”
그러나 이제 와서는 거절하기가 힘들어졌다. 태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내버려 두면 없었던 일이 될 것 같다고도 여겼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이건 시율이 거는 일종의 싸움이었으니까.
시율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고로, 여자는 젊을 때 남자를 많이 만나봐야 하는 법이거든. 그래야 정말 좋은 남자를 알아볼 수 있는 법이지. 예를 들면…… 나처럼.”
그건 실로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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