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심부름하는 고양이
두 남자는 둘 다 어른스럽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원만하게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언제까지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있는 동안 밥이랑 청소는 내가 하마.”
“네?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편하게 계시죠, 형님.”
“원래 하던 일인 걸, 뭐. 요리는 내가 좋아해서 그래. 청소도 거실만 할 거다.”
한쪽은 조용한 걸 못 견디고 한쪽은 조용한 걸 좋아했으나, 태일이 약간 감수함으로써 그건 해결됐다.
그리고 요리하는 재주가 없어 편의점 도시락으로 매 끼니를 대충 때우던 태일은 하루 한 끼는 만들어 먹어야 하는 시율 덕에 따뜻한 저녁을 보장받았다.
어느 날은 크림스튜였고, 어느 날은 연어 샐러드였고, 어느 날은 또띠아를 먹을 수 있었다.
남자면서 여자들이 좋아하는 서양식 요리만 왜 이리 줄줄이 해내는지. 게다가 신기하게도 전부 맛있었다.
두 남자와 고양이 한 마리의 동거 일주일째.
태일은 매우 만족하고 있었고 시율 역시 그런대로 흡족해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어이, 고양이! 오늘은 베란다 문틀 청소다.”
“으으…….”
“다 하면 꼭 베란다 한번 쓸고.”
해인만이 이 동거에 대해 불만투성이였다. 자신에게는 이익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율은 해인의 영역에 멋대로 침입한 주제에 해인을 부려먹었다.
태일은 모르지만, 지난 일주일 내내 시율은 청소를…… 해인에게 시켰다. 일주일째 말이다.
시율이 이 집에 있는 한 앞으로도 쭉- 해야 할 것 같은 불길함에 해인은 치를 떨었다.
감히 게으름의 대명사인 고양이의 손에 걸레와 빗자루를 쥐여 주다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을!
해인은 결국 참다 못해 오늘은 걸레를 집어 던졌다.
“내가 우렁각시냥?!”
“……고양이잖아.”
“그거나 그거나!”
“우렁이는 연체동물이고 고양이는 포유류…….”
“부려 먹는 게 같다고!”
발을 동동거리며 해인이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시율은 심드렁한 얼굴로 귀를 팔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갑의 여유라는 듯.
“내가 못 시킬 것 시키냐? 손발이 있으니 밥값을 하라는 거 아냐. 그리고 알바비도 줬잖아.”
막 오늘의 저녁 메뉴인 카레를 위해 가루를 개며 시율이 가르치듯 말했다.
해인은 억울했다. 시율이 언급하는 알바비는 일전에 빌려준 버스비였으니까. 그리고 그 돈은 요 일주일간 하루 한 시간 노동한 거면 갚고도 남아야 했다.
“말은 똑바로 해! 그때 그 만 원은…….”
“이자가 붙었어.”
“그땐 그런 말 없었잖아!”
“사채가 이래서 무서운 거다.”
“……이, 악덕아!”
해인은 약이 바짝 오르는지 시율이 일할 때 입으라며 제공한 연보라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사실 처음에만 해도 빚을 갚으라기에 하루 이틀 요리를 도와주면 끝날 줄 알았다.
안 한다고 버텨도 되겠지만, 시율은 해인의 약점을 너무도 많이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너, 만날 태일이가 주는 사료, 변기에 버리기도 미안하지 않냐? 이러다 이 집 변기 막히면 그거 네 탓이다?”
“우으이……!”
“너 나한테 잘해야 돼. 불난 집에서 구해줬잖냐. 이 몸은 은인이라고.”
뻔뻔한 인간은 이래서 무서웠다. 누가 누굴 구해줘?
해인은 볼을 탱탱 불렸지만 사람 모습으로 그러는 건 하나도 위협적이지 못했다.
“그 볼 눌러버리기 전에 얼른 청소나 하시지?”
“두고 보자!”
“오, 제법 악당 대사 같네?”
반란을 꾀했지만 결국 놀림 받을 뿐이었다.
해인은 구시렁거리며 다시 걸레질을 시작해야 했다. ‘나쁜 놈, 나쁜 놈.’ 하면서 벅벅 문틀을 시율이라고 여기며 문댔다.
북, 북북.
그렇게 한참 따듯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더러운 문틀을 닦자니…… 사실 기분이 조금 개운하기는 했다. 문틀이 깨끗해질수록 말이다.
하긴, 신세 지는 입장에서 청소 정도 해주고 싶기는 했어.
본래의 그 긍정적인 성미를 못 버리고 해인은 이내 뿌듯함에 젖었다.
이왕 하는 거 내 일처럼 하자, 그래야 기분이라도 좋지! 하고는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시율이 시키면 반사적으로 반발심이 들기는 했지만 사실 해인은 청소를 좋아했다.
“다 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나는 하얗게 변한 창틀을 보니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인은 더러워진 걸레를 빨아 팡팡, 턴 다음 햇볕에 널었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또 잘한다니까? 해인은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어이.”
“응? 왜 또, 나 청소 다 했는데?”
시율이 이리오라 손짓하자 해인은 다가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베란다에서 부엌 근처로 갔을 뿐인데 카레 냄새가 공기 가득 퍼져 있었다.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매콤한 냄새.
그리고 황금색 저녁 햇살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노오란 카레색.
맛있겠구만……. 어쩔 수 없이 식욕이 올라와 해인 꼴깍 침을 한 번 삼켰다.
“너 옷 입은 김에 심부름 가볼래? 녹말가루가 없는데. 어떻게 이 녀석 집에는 기본이 없냐.”
“……아니! 그러다 주인이라도 마주치면 어떡해?”
“네 주인 오늘 늦잖아. 밤늦게 온다던데?”
“그래도 싫어.”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건 하고 싶지 않은 해인이고, 사실은 굳이 해인의 사람 모습을 내보이고 싶지 않은 시율이었다.
일부러 해인에게 집안일을 시키며 괴롭히는 이유 자체가, 사람 모습인 해인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였으니까.
잡일이라도 시키는 것 말고는 구실이 없었다.
“그럼 내가 다녀오지, 뭐.”
결국 시율은 싱크대에 손을 털고 부엌을 걸어 나왔다.
그 모습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바라보던 해인은, 시율이 제 손에 앞치마를 들려주자 고개를 갸웃했다.
“그동안 카레 안 눌어붙게 젓고 있어라.”
“……나 이래 봬도 고급인력이거든?!”
“아, 예, 10분만 부탁합니다.”
한 달에 겨우 하루, 사람 꼴로 있을 수 있는 해인이다.
그간 저장된 것까지 합쳐도 그리 많지 않은 시간이건만, 근래 매일같이 써서 남은 게 더 없건만, 그걸 카레 젓는 데 쓰라니!
물론 모아둬도 딱히 쓸데가 없긴 하지만.
“전에도 말했지만, 이 사람 모습으로 있는 거 엄청 힘든 거거든?!”
“알겠다니까 그러네? 대신 올 때 초콜릿 사다줄게, 딸기 들어 있는 걸로. 그러면 되지?”
초콜릿 따위, 맛은 있지만 음기도 양기도 안 나와! 물론…… 먹고 싶긴 하지만.
진짜 고양이라면 초콜릿은 절대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었지만, 해인은 근래 단것에 심취해 있었다.
“……큰 거 사와.”
“당연하지.”
“빚에 안 넣는 거지?”
“그럼, 그럼.”
고양이가 된 초창기에 모든 음식을 거부했던 데 반해 요즘은 주스나 초콜릿 정도는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태일과 단둘일 때는 불가능했지만 시율이 있어서 가능했다.
다시 찾은 먹는 즐거움은 꽤나 중독성이 있었다.
해인은 싫은 척하며 앞치마를 목에 둘렀고, 그대로 시율을 지나쳐 부엌으로 걸어갔다.
다분히 속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시율은 못 본 척해줬다.
너무 놀리면 도망가 버릴 것이 뻔했다.
“빨리 다녀와!”
못 이기기는 척 해인이 넘어와 줄 때 더 찔렀다가 낭패를 본 게 한두 번이어야지 말이다.
하여간 고양이는 길들이기 어려운 짐승이야. 시율은 작게 미소 지은 채로 집을 나섰다.
***
“으흠, 흐흠~ 우흥.”
보글보글, 퐁.
부엌에 혼자 남은 해인은 왠지 신이 났다.
햇살 잘 드는 부엌에서 냄비 가득 들어 있는 맛있는 카레를 뒤적이는 것.
자글자글 끓는 소리에 작게 흥겨움이 일었다.
그래, 이건 분명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 중 하나였다.
해인은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카레는~ 맛있어요~ 엄청~ 흐흥.”
계속 카레의 맛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움찔, 거리면서도 그것만은 곧잘 참아냈다.
초콜릿 하나 먹는 것도 상당히 큰맘을 먹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해인은 카레를 저으며 이상한 노래 계속 흥얼거렸다.
즉흥적으로 작사 작곡을 해대며 이 정도면 제 노래솜씨가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완벽 할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냄비를 휘젓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인은 시율이 빨리 왔다고만 생각했다.
“카레에는 후추~ 후추는 크림 스파게티에! 스파게티에는 소고기~ 그럼그럼! 다 맛있지요~ 냐옹이도 좋아해~”
그래서 하던 장난을 계속했다.
콧소리가 섞인 고양이 울음소리와 내키는 대로 이것저것 흥겨운 소리였다.
몇 번인가 더 그렇게 냐옹거리며 기분 좋게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던 해인은 뒤로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초콜릿 사왔어?’ 하고 묻는 낯을 시율이 봤다면 그가 본 최고로 해맑은 해인의 얼굴이었을 거다.
봤다면, 말이다.
아쉽게도 시율은 보지 못했지만.
“……안녕하세요.”
목격한 것도, 목격당한 것도 시율이 아니었다.
제집에 있는 낯선 이에게 저를 경계하지 말라는 듯 살며시 웃는…… 태일이었다.
“흐헉?”
해인은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깜짝 놀라 물러섰다.
모든 걸 멈춘 채 원망했다. 무엇을? 카레를. 그것이 제 민감한 후각을 둔하게 했으니까.
독한 카레 냄새만 아니었다면 귀가한 이가 태일이라는 걸 알아채고 숨었을 텐데!
카레가 밉다.
이상한 노래를 부른 제 입이 밉다. 부끄럽다.
태일이 왜 제 눈앞에 있는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그도 아니면 하느님, 이제부터라도 믿을 테니 저에게 쥐구멍을 주세요.
“그런데…… 누구…… 신지?”
퐁, 하는 카레 끓는 소리가 얼굴이 붉어지는 소리 같기만 했다.
어찌나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지가 뻔해 그것이 또 부끄러워졌다.
누, 누가 날 좀 구해줘!
남의 주방에서 얼굴 붉히고 있는 이 얼간이를 사라지게 해달라고!
어쩔 줄 몰라 하늘로 꺼질까, 땅으로 꺼질까 발만 동동거리며 파닥거리는 해인에게 태일이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물었다.
별 의심 없는 낯으로 방긋 웃으며.
“아, 형님의……?”
당연하겠지만 태일이 도달한 답은 그것인 듯했다.
보통 시율이 저녁을 만드는 시간에 부엌에서 카레를 끓이는 낯선, 여자라니.
당당하게 부엌 쓰는 도둑은 없을 테니 그건 현실적인 도달이었다. 차분하게 상황을 짚은 결론. 물론 그만의 착각이지만 말이다.
“어…… 어어……!”
뭐라 대답할 수 없는 해인은 입술만 벙긋거렸다. 살려줘! 난 변명은 젬병이란 말이야!
그리고 때마침, 해인의 그 소리 없는 절규를 듣기라도 했는지 다시 띠리릭 하는 도어락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정말 시율이었다.
두 손으로 꼭, 하니 앞치마를 쥐고 광대뼈가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던 해인은 후다다닥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이토록 시율이 반가운 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태일과 사람으로 맞닥뜨린 패닉에 해인은 그 문제의 근원이 시율인 것도 잠시 잊어버렸다.
그저 살려줘, 살려줘 하며 꼬리를 흔드는 기세로 바삐 달려 나갔다. 큰일 났다고 얼굴에 써 붙이고는.
“나 왔…….”
시율은 태일보다 정확히 1분 늦게 집에 도착했다. 정말 간발의 차였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현관에 놓인 태일의 운동화를 보고는 아차, 했다. 해인이 말하기도 전에 말이다.
그건 천하의 강시율도 예견치 못한 상황이었고. 이내 신발에서 눈을 떼고 앞을 보자 자신에게 달려오는 해인이 보였다.
당황한 얼굴로 어떡해, 라고 속내를 숨길지 모르는 그 얼굴.
강! 하고 부르는 그 당황이 역력한 얼굴.
“강, 강!”
커다란 눈망울에, 고양이의 입안처럼 부드러운 분홍빛 입술에. 저게 뭔가 싶을 만큼 뽀얗고 햇빛이라고는 모른 새하얀 피부.
약간 홍조가 들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두 뺨. 곤란해 어쩔 줄 모르는 두 눈동자.
그게 사람을 아득하게 하는, 숨 쉬는 것이 불편해져서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의 것이라는 걸 이 고양이는 모르겠지.
순간 그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한다는 걸 말이다.
“…….”
“난 몰라!”
해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반쯤 엉엉대며 시율의 뒤로 숨어버렸다. 바짝 매달리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담한 몸의 온기가 그의 등과 팔꿈치를 타고 전해졌다.
순간 시율은 심각해졌다. 어째서일까. 이보다 매력적인 인간은 아주 넘치는데. 더 아름다운 여자도…….
애초에 시율의 취향은 섹시한 여성인데.
해인은 어딜 봐도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데 분명 심장이 뛴다. 크게 뛴다. 그래서 더 큰일이었다. 취향을 넘어버린 심장의 요동질이라니.
이 망할 놈의 심장.
“나갔다 오셨나 봐요, 형님?”
그러나 지금은 심장을 탓할 여유가 없었다.
태일이 현관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느긋한 걸음걸이는 지금 시율과 해인이 자신 때문에 비상사태에 봉착했다는 걸 까맣게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아.”
시율은 설명 없이도 단번에 상황을 알아챘다.
운이 나빴군.
“저녁 재료가 조금 부족해서.”
“강……!”
“그렇군요. 한데…… 이쪽 분은?”
돌아가는 정황상 해인을 태일에게 소개해야만 했다.
분명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시율은 지금 태일만큼이나 느긋하게 굴었다.
살면서 그가 이성을 잃은 적은 정말 많지 않았다.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하는 경우가 흔하진 않았으니까.
“여긴.”
“……?”
“여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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