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불난 집에 고양이
어느 주말의 아침.
화재 진압이 한창인 소방차 주변으로는 넋이 반쯤 나간 주민들이 늘어서 있었다.
허공을 시끄럽게 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소방차 펌프 물의 잔재, 그리고 새까맣게 타고 있는 누군가의 집.
난리도 이런 불난리가 없었다.
바삐 움직이는 소방대원들과 구경 온 인근 주민들까지 더해져 도로는 극심한 혼란 상태였다.
“……허허.”
발화지점은, 정확히 시율의 윗집이었다. 시율의 집은 두 번째로 큰 피해를 입고 있었고.
해인은 커다란 눈을 깜빡여 주변을 둘러봤다.
갑작스레 터진 일에 잠이 깰 새도 없이 튀어나온 주민들은 대부분은 잠옷 차림이었고, 머리는 엉망이며, 손에 가까스로 통장이나 패물함 따위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아예 그도 못 챙기고 빈손으로 어린아이나, 노부만 겨우 모셔서 대피한 주민도 있었다.
드물게 애완동물을 안고 있는 주민도 있었는데, 시율이 그랬다.
뚱한 눈으로 해인은 시율이 저를 안지 않은 손에 챙긴 것들을 노려봤다. 매일 출근할 때 들고 다니는 서류가방 하나와…….
“우냐냐냐냐?!”(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응?”
그건 시율이 가장 마지막에 챙긴 물건이었다. 집을 나오기 직전에 소파를 들춰 내고 그 밑에서 자연스레 꺼내 든 것.
해인의 스케치북이었다.
“므악!”(그거 말이야!)
다른 주민들처럼, 발화지점을 조금 멍하니 올려다보던 시율이 해인의 괴 울음에 시선을 제 옆구리 쪽으로 내렸다.
아직도 불이 이글거리는 로열층은 물벼락을 맞고 있었다.
시율은 옆구리에 고양이 펀치를 맞고 있었고.
팍팍팍!
피난민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으로 손톱은 안 뺀 앞발로 시율의 옆구리를 가격하며 해인은 불만을 터트렸다.
“미야악!”(일부러 숨겨뒀는데!)
“아아…… 이거.”
시율은 다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해인이 밤이면 사각대며 무언갈 한다는 것도, 그게 그림이라는 것도 말이다.
이 녀석, 대체 모르는 게 뭐야?!
해인은 제 머리 꼭대기에 시율이 있다는 게 불만이었다.
“우으으.”
“고마워하라고. 내가 안 챙겨 나왔으면 다…… 탔을 테니까.”
활활 불타고 있는 자신의 집 때문일까? 시율은 어째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해인은 더 따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
그날 오후, 시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동물병원에 출근했다.
“강쌤~ 오늘 오후 출근이시구나.”
“어제 휴일이었거든요.”
“어머? 개냥이 또 보네? 호호, 누가 보면 강쌤네 고양인 줄 알겠어요.”
“좀 그렇죠?”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태도였기에 직원 중 그 누구도 그가 오늘 아침 불난 집에서 대피했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의 차에 얼마나 큰 짐 가방이 있는지도 몰랐다.
병원의 오후는 평소와 같았다.
시율은 이내 예약 손님이 왔다며 진료실로 가버렸고, 해인은 해인대로 산책을 시작했다.
해인은 최근 들어 직원들에게도 그 영리함을 인정받아 병원 안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느새 이 동물병원은 태일의 집 다음으로 익숙한 곳이었으니까.
아, 시율의 집도 있다. 이제는 불난 집이긴 했지만.
“개냥이 안녕? 또 놀러 왔구나. 이거 먹을래?”
“……흥.”
데스크 위에 늘어져 있는데, 지나가다 말고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수간호사가 친해지기용 육포를 내밀었다.
하지만 해인은 콧방귀를 뀌며 데스크에서 가뿐히 뛰어내렸다.
“언니, 개냥이는 개냥이라고 부르면 저렇게 삐져서 가버려. 몰랐구나?”
“에엑? 정말?”
“그렇다니까. 자기 이름이 마음에 안 드나 봐.”
“똑똑하긴 엄청 똑똑하네.”
그럼, 그럼. 개냥이도 웃긴데 육포가 웬 말인지. 해인은 우아한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디로 갈까나?
총 4층으로 지어진 이 동물병원은 규모가 인근에서 가장 큰 편이었다.
직원도 많았고, 친절한 걸로 정평이 나서 타 지방에서도 진료를 맡길 만큼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다.
4층에는 주로 암이나 중병의 동물들이 장기 입원해 있었고, 3층에는 동물 호텔과 의사들의 당직실이 있다.
주로 애완동물용품 판매가 이루어지는 1층이 해인의 주 영역이었다.
“으음.”
두리번거리던 해인은 문득 시율을 떠올렸다.
아무렇지 않는 척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집에 불이 났는데 속상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째 평소랑 달리 멍해 보여서 걱정 아닌 걱정이 됐다.
평소라면 제 발로 시율을 찾아가는 일은 절대 없었을 텐데.
해인은 모처럼 시율을 찾아 나섰다.
“저기……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말이야…… 강쌤.”
“응?”
계단을 오르던 해인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누가 시율의 뒷담을 하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젊은 여자 수간호사 둘이었다. 속닥속닥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는 걸까.
고양이가 다 듣고 있다고!
“꽤 잘생기지 않았어?”
“얘, 우리 말은 똑바로 하자. 아마 수의사 중에 제일 잘생겼을걸?”
“어머, 그거 말 된다.”
“강쌤 웃을 때 완전 지적이지 않니?”
“꺅! 맞아, 거기다가 섹시하고!”
별? 저 여인들은 눈이 삔 걸까? 그 악마 같은 웃음에 무슨 어울리지 않는 찬사란 말인가.
해인은 못 들을 걸 들은 양 후다닥 계단을 올라갔다. 목적지는 원장실이 있는 3층이었다.
***
“세상에, 집에 불이 났다고?”
중년의 여자 원장이 호들갑스레 물었고, 시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이다.
“정확히는 윗집입니다.”
“강쌤 집은 그럼 괜찮고?”
“아뇨. 안 괜찮아서 그렇지 않아도 당분간 당직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에! 심한가 보구나?”
“당직실은 우선 원장님께 허락을 받아야겠지만…….”
“괜찮고말고! 그런데 당분간이면 얼마나? 불난 거 보험 처리는 된대?”
고양이 애호가인 원장의 사무실 문에는 캣 도어가 달려 있었고. 해인은 그 간이 문을 통해 원장실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다.
책상 위로 점프해 자연스레 대화 중인 두 사람 사이로 슥 하니 끼어들었다.
고양이의 뻔뻔함은 이럴 때 편리했다.
“아…… 전적으로 윗집 과실이라 보험 처리는 된다는군요.”
시율은 눈만 움직여 해인을 바라보며 해인이 제가 아닌 원장을 만나러 왔다고 생각했다.
원장실은 다른 곳에 비해 한적하고 조용해서 병원에서 기르는 다른 고양이들도 좋아하는 곳이었으니까.
“아이고, 어쩌다 그랬대?”
“캔들을 켜놓고 여행을 갔다나……. 아무튼 윗집은 거의 전소된 모양이고, 제 집도 그을음이 심해서 당분간은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모양입니다. 퇴근하고 들러봐야겠지만요.”
“이런……!”
“조만간 휴가라도 내고 새로 살 집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 어째. 우선 당직실 편하게 쓰고. 기운 내요.”
그래, 기운 내! 해인은 저도 원장을 따라 응원하며 시율의 손바닥 안으로 제 작은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러곤 부비적부지적, 쓰다듬어도 좋다는 인심을 썼다.
다른 고양이가 이렇게 하면 원장은 자지러지며 좋아하던데. 너는 어때? 좋아?
“어머어머, 개냥이가 애교를 다 부리네? 도도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저한테 이러는 건 처음이네요.”
“그래? 고양이고 개고 하여간 영물이라니까? 어떻게 강쌤 집에 불난 거 알고 위로해주나 보다.”
“그런가 보네요.”
그럴싸한 해석이 아니라 정말 정답이었다.
불쌍하니까 오늘 특별히 만지게 해준다!
해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시율의 손바닥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고, 시율은 얼떨떨한 손으로 쓰다듬어 줬다.
“그래…… 고맙다.”
눈이 가늘어지는 시율의 웃음은, 굳이 따지자면 나쁘진 않았다.
***
재앙이다. 이거야말로 진정 재앙이야! 해인은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다 못한 시율이 손을 뻗어 그 입을 다물려 줬다.
태일은 해인을 안고 있느라 그 경악한 표정을 보지 못했고 말이다. 제 품 안의 고양이가 또 스르륵, 입을 벌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저 사람 좋은 특유의 태도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느긋하나 정중하게 흔쾌히.
“그렇게 하세요, 형님! 저희 집으로 오세요.”
“……이 고양이가 안 좋아하지 싶은데.”
훈남으로 수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은 태일은 동물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시율의 사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걱정 반, 호들갑 반인 수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시율을 찾아왔다.
해인은 설마 그것이 제게 이런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재앙을 가져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미야미야. 먀!”(싫어싫어. 안 돼!)
“아닙니다. 이래 봬도 개냥이가 형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키약?!”(미쳤어?!)
“그러니까 오세요. 어차피 방도 남고, 무엇보다 형님 병원이랑도 가깝고요. 아, 남는 방이 제일 큰방이니까 형님 지내시기 불편하진 않을 겁니다. 두 달이고 세 달이고 정리될 때까지 계세요. 저는 어차피 당분간 출장이 잦으니까요.”
이 사람아, 이 사람아! 왜 그러는 거야?! 해인은 처음으로 태일의 이 넘치는 호의가 원망스러웠다.
태일로서는 그간 시율에게 고마운 게 많아서 그러는 거겠지만, 해인에게는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흐음…….”
해인이 싫다며 격렬히 항의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지만, 시율에게 이건 정말이지 두 번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룸메이트를 둬본 적은 없지만, 분명 구미가 당겼다.
당직실에서 지내는 거나, 한두 달 지낼 단기숙소를 찾는 거나, 퀴퀴한 고시원에서 묵는 것보다는 아무렴 백번 나은 제안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그 집에는 해인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건 엄청 큰 포인트였다.
이게 바로 전화위복일까?
해사하게 변해가는 시율의 표정을 보며 해인은 이것이 엄청난 비상사태임을 깨달았다.
“사실 전부터 은혜 갚을 기회가 없을까 하고 있었습니다. 개냥이도 많이 보살펴 주시고. 항상 신경 써주시니까요.”
“별것 아니었는데…… 고양이 맡아주는 게 무슨 은혜거리라고.”
“물론, 제 사심도 있습니다, 형님.”
해인은 이미 이 사태가 걷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절망해 기절하듯 몸을 늘어뜨렸고, 시율은 시율대로 그 단어가 주는 묘한 뉘앙스에 몸을 굳혔다.
이 녀석 멀쩡하니 생겨서는 총각이더니 혹시…… 나를……? 하는 것이다.
“너 설마 게…….”
“제가 얼마든지 집을 비워도 안심이잖습니까.”
“아아, 그거.”
“속셈이라면, 개냥이 전속 수의사가 생기는 거구요. 맡길 때마다 죄송하지 않아도 되고…… 신세 갚을 기회도 되고. 이런, 말하다 보니 괜히 신 나는 것 같아 죄송하네요. 형님이 큰일 당하셨는데, 그런데…… 게…… 뭐요?”
“아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었어.”
태일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서로에게 아주 좋은 제의라고 생각했다.
“오시죠, 형님.”
“……이거 참, 정말 신세 져도 될지 모르겠네.”
“형 동생 좋은 게 뭐냐고 형님이 그러셨잖습니까. 뭘 망설이세요. 남자끼리.”
품 안의 고양이는 암컷이었으나 짐승이니 예외였다.
시율은 잠시 힐끔하고 태일의 품 안에서 죽어가는 해인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느긋하게 웃어 보였지만.
역시 좋은 게 좋은 거지?
“염치없지만 그럼 신세 좀 질까?”
방긋, 강시율은 매사 운 좋은 인간이었다. 또한 철저한 기회주의자였고.
반대로 태일은 참으로 사람 좋은 남자였다. 그것도 기회주의자에게 호의를 가득 품은.
그러니 결국 운명처럼, 어느 고양이에게는 저주처럼, 셋의 동거가 시작됐다. 바로 그날 저녁부터.
해인은 자신의 안식처가 악마에게 침범당했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이러다가 미운정이라도 들까 무서웠다.
***
그날부터 해인은 아침이면 두 남자가 풍겨대는 스킨 향에 몸이 흐물흐물해져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태일이 집에서 잘 벗고 다니는 사내라 익숙해지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모됐는데, 거기에 신상남이 얹어졌다.
그러니까 반나신이 신상인 강시율 말이다.
태일이 과하진 않지만 한눈에 보이는 울룩한 근육을 자랑한다면, 시율은 움직일 때면 자르르, 비늘 드러나는 철저하게 관리된 매끈한 근육의 소유자였다.
둘 다 탐스럽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그건 해인에게 메두사의 머리와도 같아서 직시하면 굳어버리고는 했다.
왜 남자들은 아침이면 벗고 다니는겨?
꼭 머리에 물을 뚝뚝 흘리며 돌아다녀야 하는겨?
해인은 아침마다 이런 답이 나올 리 없는 물음을 이어야 했다.
시선 둘 곳이 없어 괜스레 베란다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고는 했다. 아침의 남자들이 자랑하는 그 느른한 관능미라니.
확실히 혈액순환에는 좋은 느낌이었다.
심박 수가 자동으로 상승하니까.
“왜 저렇게 멀리 있지?”
“왜 이렇게 가까이 있냐?”
해인은 다소 불만스러운 눈으로 상반된 의문을 품는 둘을 주시했다.
태일에게 부비적거려야 하는데, 시율 때문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시율과 거리를 둬야 하는데, 태일이 그 옆에 있었다.
두 남자와의 동거생활은 이래저래 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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