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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22화 (22/114)

22화. 고양이의 변덕

어느 주말, 해인은 우울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다시 시율의 집에 맡겨져서는 아니었다.

순전히 자신이 걸린 주술 때문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사신에게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하지 않았을 텐데. 기억을 잃기 싫다고 떼를 쓰지도 않았을 텐데.

말하지 않기로 약속해서 침묵하는 것과 이렇게 강제로 침묵해야 하는 건 명백히 느낌이 달랐다.

“너 요즘 왜 그러냐?”

“……내가 뭘?”

“앙칼진 맛이 없어졌잖아.”

사납게 구는 것도 기운이 있어야 하지.

지나가던 시율의 놀리는 물음에도 썩 대꾸하고 싶지가 않았다.

평소라면 벌써 말려들어서 말씨름을 하고 있을 텐데. 다시 디귿자로 누워버리는 해인이다.

“다 귀찮아.”

“……이상하긴.”

요즘 시율은 전법을 바꿨는지 섣불리 해인에게 다가오거나 건들지 않았다.

고양이와 친해지는 데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가까워지는 게 최고라는 걸 되새긴 모양이었다.

대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치이익!

그래서일까. 드물게 해인이 시율을 관찰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시율이 어울리지 않게 파스타 같은 걸 할 때. 그것도 앞치마까지 두르고 아주 능숙한 솜씨로.

“강, 너…… 제법이다?”

“그치?”

“요리하는 남자였어!”

“이 정도는 돼야 사랑받지 않겠냐.”

젓가락으로 막 완성되어가는 비프 크림스파게티를 뒤적이며 시율이 콧대를 세웠다.

마침 심심했던 해인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새침하게 앉아 시율이 요리하는 모양을 구경했다.

태일은 거의 음식을 사 먹는 남자라 이건 나름의 볼거리였다.

풍기는 음식 냄새도 제법 유혹적이었고 말이다.

“후추 넣어야지!”

시율이 스파게티를 맛깔나게 그릇에 담는 걸 구경하던 해인은 참지 못하고 훈수를 뒀다.

“난 크림스파게티에 후추 안 넣는데?”

“……넣어야 맛있어!”

“너도 먹을 거면 넣어줄게.”

해인은 부루퉁해졌다.

“안 먹어!”

사실 먹고야 싶었다. 하지만 이 몸으로는 액체 외에 무언가를 먹는 것은 부담됐다.

해인은 야속한 제 고양이 앞발을 한참 할짝였다. 스파게티 대신 아쉬운 대로. 그러자니 시율이 스파게티를 접시를 식탁으로 옮기며 잊고 있었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너, 정말 네 주인 소개 안 받을 거야?”

“……안 받아.”

“왜?”

“마음이 바뀌었어.”

“아무리 고양이 변덕이 심하다지만 너무하는 거 아니야?”

흥, 하니 해인이 고개를 돌리자 시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태일에게 자기를 소개해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막상 자리를 만들어주자 안 한다는 해인이었으니까.

이랬다저랬다. 비위 맞추기가 참 힘든 동물이었다.

“사람으로 만나고 싶은 것 아니었어?”

“……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

“왜?”

“그냥!”

해인은 지금 은근히 시율에게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기억도 잃어야 하고, 자신이 남자의 양기를 흡수하는 요괴 비스므리하다는 걸 깨달아버린 마당에 그런 기분이 들 리 없는데 시율이 자꾸만 이유를 물었으니까.

“이봐, 넌 마음을 바꾸면 그만이지만 말이야. 난 이미 소개해주기로 했다고.”

“흥!”

“기껏 꼬셔놨더니 네가 발을 빼버려서 내가 난감해졌어.”

시율은 프라이팬을 물에 담그며 말을 이었다.

“네가 싫다면 다른 여자 후배라도 소개해줄 생각이야.”

“……그건 싫어!”

시율이 미간을 꿈틀댔다.

“심술도 적당히 부려. 어차피 넌 안 만난다며?”

“그래도 나 있는 동안은 안 돼!”

“……그 녀석 오랫동안 힘든 첫사랑을 했대. 그리고 이제 그만 접고 싶긴 하다고. 내가 소개해주는 사람이라면 만나보겠다더라.”

“이, 싫단 말이야!”

우으! 해인이 참으로 오랜만에 경계의 몸짓으로 털을 바짝 세웠다.

그건 시율이 좋아하는 해인의 앙칼진 구석이었으나, 시율은 그게 태일 때문이라는 게 불쾌했다.

제 주인만 독점하고 싶어 하는 이 고양이가 싫었다.

고양이 주제에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웃긴데, 다른 여자를 만나게 하는 건 더 싫단다.

마치 여자의 질투처럼.

“사람은 사람끼리 잘해봐야 할 것 아니야. 너도 네 주인을 정말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는 거…….”

“싫! 어!”

카앙!

앙칼진 해인의 거부에 구겨지기 시작했던 미간이 극까지 좁혀진 순간, 시율은 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싱크대 안에 집어 던져버렸다.

쇠 긁히는 소리가 부엌에 어지럽게 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느끼는 이 해괴한 감정이 싫어 죽겠는 시율이다.

하루 종일 태일 타령만 하는 이 고양이에게 갈수록 섭섭함이 생겼다.

저 역시 잘해준다고 잘해주는데도 이 짐승은 점점 털을 세울 뿐이라…… 결국 소리쳤다. 그것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넌 어차피 고양이잖아!”

“…….”

“……!”

그 윽박에는 해인도 놀랐고, 소리친 시율도 놀랐다.

아차! 하며 그가 눈을 질끈 감기 전에 본 것은 익히 잘 아는 상처 입은 짐승의 눈이었다.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납득할 수가 없어 시율은 턱이 다 아파왔다.

너무 이를 악문 탓이었다.

시율이 찰나 우겨 감았던 눈을 뜬 것은 해인이 담담하니 대꾸한 뒤였다. 쓴물이 올라왔다.

“나도 알아, 안다구.”

“미…… 안.”

“……놀랐잖아!”

이 순간 자신이 왜 프라이팬을 내던졌는지 시율은 알 수 없었다.

그냥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고집부리는 고양이에게 짜증이 났던 걸까?

그가 자책하는 동안 해인은 휙 하니 자리를 떠나버렸다.

놀라 크게 움찔거렸으면서도, 놀라지 않은 척 종종 뒤돌아 가버렸다.

하지만 한껏 놀란 꼬리털이 아직 숭숭했다. 평소의 2배로 부푼 꼬리가 해인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보며, 시율은 제가 왜 화를 냈나 싶어 큰 후회를 했다.

***

새벽 3시.

늦게 잠드는 편인 시율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해인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사람으로 돌아가 굴러다니는 그의 하늘색 셔츠 하나를 주워 입은 뒤였다.

‘알지, 안다고. 내가 고양인 것쯤. 질투할 주제도 안 되는 거 알아.’

낮에 시율이 화를 낸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반성하는 중이었다.

제가 봐도 오는 너무 답 없이 군 것 같았다.

머리는 유리창에 대고 무릎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시선은 저 멀리를 밤하늘을 배회했다.

일부러 사람의 모습을 했는데도 사람이 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몇십 층 아래 걸어가는 사람의 얼굴이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똑똑히 보이고, 귀를 조금만 기울여도 윗집에 윗집이 걸어 다니는 소리까지 전부 들렸다.

사람의 몸인데도 뛰어난 성능 때문에 사람 같지 않았다. 그게 씁쓸했다.

“…….”

멍하니 창밖의 달을 구경하던 해인이 몸을 일으킨 것은 시간이 제법 흘러서였다. 달이 반뼘 쯤 움직인 뒤.

시율이 완전히 잠든 것을 재차 확인한 뒤에야 거실의 소파 밑으로 손을 넣어 5절짜리 드로잉북을 끄집어 냈다.

워낙에 좁은 틈새라 해인의 손처럼 얇고 가는 손이 아니면 드로잉북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사실 드로잉북을 사온 것도, 4B연필을 사온 것도 시율이지만, 그래도 나름 숨겨둔 터였다.

그림을 보여주는 게 부끄러웠으니 말이다.

“숨겨둔 거 모르겠지?”

완성되지 않은 작품에 평가를 받는 건 작가에게 좀 부끄러운 일이었다. 물론, 완성되어도 보여줄 일은 없겠지만.

해인은 위쪽 스프링에 끼워둔 연필을 뽑은 뒤, 종이를 몇 장 넘겨 저번 주에 그리다 만 그림을 펼쳤다.

흐릿한 버드나무가 보였다. 늘어진 잎이 많아 오래되어 보이는 회색빛 버드나무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

다시 달빛이 닿는 곳에 기대앉은 해인은 연필을 쥔 손을 몇 번인가 쥐락 펴락 했다.

빈종이 위에 간단한 선을 반복해 그려 손을 풀어준 뒤에야 다시 버드나무로 돌아왔다.

사각사각.

해인은 연필이 북 위를 스치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연필이 남기는 세밀한 탄 찌꺼기까지 염두에 두며 그림을 덧붙여 갔다. 수많은 나뭇잎의 그림자 하나하나까지 그려갔다.

파도의 물결이 스친 자국까지 손끝으로 탄을 문대가며 새겨 나갔다.

그렇게 아주 사소한 구석까지 형태를 잡는 게 해인의 특기였고, 취미였고, 기쁨이었다. 한없이 집중해 빠져들 수 있는 행위였으니까.

이 순간만은 복잡하고 어지러운 심중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본래 직업이 그림쟁이인 해인은 시율의 집에 맡겨진 동안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태일의 집이 더 넓었지만 혹시 들키면 정말 난감했기 때문이다.

시율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인의 비밀을 알아 차라리 편한 구석이 있었다.

종종 이렇게라도 손을 풀 수 있는 건 가뭄에 단비와 같은 일이었다.

그림 그리는 데 흠뻑 빠져서는 저도 모르게 작게 입술을 벌리고 있던 해인은 한참 만에야 손을 멈췄다. 집중의 끈이 풀린 듯 한숨이 나왔다.

“아…… 살 것 같다.”

그림을 그리면 안정이 됐다.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응?”

몇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해인이 기댄 창가로 미명이 깃들었다.

아침이 오고 있으니 그림을 숨길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 다른 것이 해인의 손을 멈추게 했다.

무언가 매캐하고 자욱한 냄새가 예민한 코끝을 자극했던 것이다.

킁킁. 해인은 일단 드로잉북을 다시 소파 밑으로 밀어 넣었다.

몸을 일으켜 위쪽의 공기를 맡아봤고, 이내 그것이 무언가 타는 냄새임을 직감했다.

그냥 누군가 아침을 하는 냄새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독했다.

음식이 아닌 다른 것이 타는 냄새. 이 집이 아니니 다른 집 중 어딘가 탄내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미약해 보통 사람이라면 감지하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해인은 알 수 있었다. 이웃집 어딘가에 불이 났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맙소사!”

해인은 얼른 시율이 잠든 방으로 뛰어갔다. 혹여 불이 커질지도 모르니 집주인에게 알려야 했다.

이 오피스텔의 구조는 거실 하나, 침실 하나였다.

평소에는 시율의 침실에 드나들지 않는 해인이었지만 이건 위급상황이었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들어가는데도 시율은 그대로 잠들어 있기만 했다. 잠귀가 밝은 태일과 달리 시율은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일어난다고 해도 한참을 몽롱하고는 했다. 저혈압인지 아침이면 둔해지는 시율을 한두 번 봤어야지.

“강! 일어나봐, 이상한 냄새 안 나?”

찰싹.

그래서 침대 위로 올라가자마자 주저 없이 시율의 뺨을 쳤다. 물론, 지극히 가볍게였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어서 이번엔 멱살을 흔들어봤다.

조금 반응이 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두 눈은 감은 채였다.

“……으음?”

“타는 냄새 말이야! 근처에 불이 난 것 같아!”

“어우…….”

시율은 깨우는 사람이 민망하도록 뭉그적거렸다. 냄새는 점점 강해지는데 말이다.

동물의 감이 경고등을 울렸다.

조금 마음이 급해졌다. 물을 가져다 부어볼까? 해인이 심각하게 궁리하는데 시율이 그제야 슬쩍 눈을 떴다.

부스스 눈가를 비비며 시야를 살려보려 애쓰는 게 보여 해인은 다시 시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얼른 일어나 보라니까?”

바짝 붙어 이놈이 언제 정신을 차리려나, 하고 내려다봤다.

시율의 눈이 조금씩, 천천히 깜빡였다. 정신을 차릴락 말락 하는 잠에 취한 눈이었다. 해인은 손을 뻗어 시율의 어깨를 흔들었다.

“큰일…….”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시율이 그 손을 제 뺨으로 가져갔다.

이게 뭔가 싶어 해인이 내칠 생각도 못 하고 있자, 이번엔 해인의 손바닥 안으로 깊숙이 키스했다.

부드럽고 경건했다.

그리고 이내 끌어당겨졌다. 시율의 다른 손이 시트 속에서 슥, 하니 올라오더니 아주 느릿하게 해인의 뒷목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이용해 해인을 제게로 당겨가 그대로……

때르르르르르르릉!

“……!”

화재경보벨이 온 집 안을 진동시킬 듯 찢어져라 울리자 그제야 시율이 부릅,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시율이 한 일은 해인을 거의 내던지듯 풀어주고 몸을 경직시키는 일이었다.

시율은 어째서인지 해인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봤다.

경적과 같은 커다란 비상벨 소리에 깨어났으면서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경악한 채 말이다.

경보음이 울리는 통에도 상반되게도 정지해버린 시율과.

인상을 찌푸린 채 제 입을 비비적거리는 해인의 시선이 마주 닿았다.

“예쁜 언니랑 키스하는 꿈이라도 꾼 모양이지?”

해인은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자칫 닿을 뻔했지만 미수로 그쳤으니 인심 써서 봐주기로 했다.

아침부터 남자의 침대 위에 사람 모습으로 올라온 저를 탓하기로.

“……아니…….”

시율이 문득 탄식했다. 절로 입술이 벌어져 신음이 나왔다. 그는 아직 몽롱한 채였다.

“……?”

“분명 너 였…….”

[아, 아! 알려드립니다, 화재경보입니다. 훈련이 아닌 실제상황이니 주민 여러분은 신속하게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귀중품을 챙겨 서둘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아직 꿈속인 듯 멍한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지만 쉬지 않고 울리는 경보벨과 급박함을 알리는 방송은 이게 현실임을 억지로 일깨워줬다.

시율은 해인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급박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해인을 냅다 둘러업으려고 들자 해인이 소리쳤다. 순서가 틀렸다는 듯.

“귀중품부터 챙겨!”

“……너부터…….”

“난 고양이로 돌아갈 테니까 챙겨와.”

어딘가 불이 났다고 해도, 그게 아주 가깝다는 걸 인지했어도, 해인은 그게 당장 이곳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

온몸이 안테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잠시 얼떨떨하니 손 둘 곳을 찾던 시율이 침실을 뛰어나갔다.

해인은 킁킁, 다시 탄 냄새에 집중하며 고양이로 돌아갔다.

그 모습이 시율의 손에 안겨 대피하기도 편했고, 저에게도 훨씬 익숙한 모습이었으니까.

“개냥아!”

얼마 안 가 다시 방으로 뛰어 들어온 시율은 얼른 해인을 품에 안아 들었다.

매캐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집을 벗어나며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번개처럼 깨달아야 했다.

평소라면 무슨 꿈을 꿨는지 잊어버렸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전부 기억이 났다. 그는 일종의 각성처럼 깨우쳤다.

자신이 해인을 고양이로‘만’ 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꿈에서 그런 짓을 할 리 없었으니까. 아득한 키스 같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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