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고양이의 비밀
태일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해인은 모처럼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이곳이 마치 제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태일의 가슴 근처에 기대어 골골거리며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드는 건, 꽤나 행복한 일이었다.
[해인아, 박해인아.]
홀연히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해인을 반짝, 두 눈을 떴다.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이 감각, 분명 사신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려보는 해인이다.
“먀?”(사신님?)
[여기다, 여기. 창밖.]
해인이 계속 찾지 못하자 사신이 부리 끝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침실의 한쪽 벽을 채운 커다란 유리창 너머에 두 달 만에 보는 사신이 있었다.
까만 하늘 중간에 날갯짓도 안 하고 멈춰 서 있는 하얀 새는 정말이지 기이해 보였다.
그대로 유리를 통과해 방 안으로 날아오는 건 저절로 입이 벌어지게 하는 일이었고.
“엇!”
사신이 제 코 위에 내려앉는다 싶은 순간, 해인은 이미 태일의 방이 아닌 다른 공간에 있었다.
처음 죽음을 예감한 순간 옮겨졌던, 위아래가 없는 회색빛 사신의 공간 말이다.
무중력 상태를 느끼며 해인은 공중을 부유했다. 우주에 온 느낌이었다.
[편지 봤다.]
“아, 그거요.”
[이게 무슨 소리냐, 아가?]
사신이 발톱으로 쥐고 있던 쪽지를 해인 쪽으로 흘려보냈고 해인은 그것을 슬그머니 외면하며 말을 돌렸다.
“전 아가가 아닌데요.”
[아참, 미안하구나. 복제를 만들다 보니 헷갈렸다. 그러고 보니 너 말을 제법 하는구나.]
사신이 제법이라는 듯 말했다. 뭔가 전보다는 많이 친근한 어투였다.
해인은 샐쭉한 눈으로 사신을 바라봤다.
“그건 잘되고 있나요? 제 몸 만들기요.”
[그럼, 그럼! 이제 콩알만 하다.]
“태아네요, 그럼?”
[그렇지. 여덟 달을 더 채워 선계로 보내야 하니 이제 시작이기도 하고. 지금은 백두산 호랑이 선인이 봐주고 있지.]
“호랑이이? 웬 호랑이예요?”
해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공에서 파닥대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건 설명을 안 했던가? 아, 네가 워낙 혼란스러워해서 자세한 건 생략했었지.]
“그러셨겠죠…….”
이 사신, 귀찮다는 이유로 멋대로 생략한 설명이 또 있을 게 분명해.
[나는 일이 많아서 계속 네 태아에 붙어 있을 수가 없으니까. 지금부터가 중요한 시기라 한가한 친구 녀석에게 맡긴 거다.]
“호, 호랑이면 육식동물 아니에요?”
호랑이에게 어린아이를 맡기다니. 그거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느낌인데?
해인은 제 장래가 호랑이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전에 도인 같은 존재니까 안심해라. 정확히는 도를 닦는 호랑이라고 해야 할까? 뱀이 도를 닦으면 용이 되는 것처럼, 선계에 가기 위해 도를 닦는 내 오랜 친구지.]
“도……. 그렇군요.”
[덕을 쌓는 셈치고 도와주고 있다. 고마워할 일이지.]
도를 믿는 호랑이 친구가 있다니. 사신이라 그런지 영 하는 짓이 인간과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정말이냐?]
해인의 눈앞을 흘러 지나갔던 쪽지가 사신의 눈짓 한 번에 다시 팔랑, 하니 날아와 눈앞에서 펼쳐졌다.
염력 같은 것도 쓰는 모양이었다. 사신이라 그런지 별 해괴한 능력이 다 있네.
유리를 통과하질 않나, 이런 공간을 만들지 않나. 호랑이 선인 친구가 있질 않나. 선계라는 걸 이용해 사람을 만들지 않나.
근데 이런 신기한 것들을 너무 서슴없이 보여주는 것 아냐?
해인은 문득 그게 이상했다.
저승의 일은 비밀이라며 그리 겁을 주더니 정작 사신은 묻는 족족 대답해주고 있었다.
[대답을 좀 해봐.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고?]
“……네.”
[어쩌다?]
사신이 희한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게, ‘어쩌다’일까? 처음엔 그저 마음 둘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을 붙인 사람이 하필이면 너무도 좋은 사람이었고 말이다.
가장 힘들고 약해졌을 때 곁에 있어준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가, 주인이 됐어요.”
[이런, 이런…… 인간이란 하여간.]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한 주제에 사랑에 빠지다니, 해인도 스스로가 기가 막혔다.
“나도 내가 바보 같아요. 그런데 마음이란 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거잖아요.”
[겉은 고양이어도 속이 사람이니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거야 당연하겠지.]
“그, 그쵸?”
[네 마음대로 해봐라. 본래 사람이고 사람의 몸이 될 수도 있는데 뭐가 문제겠냐.]
“……정말요?”
말릴 줄 알았던 사신이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심지어는 장려하는 느낌이었다. 이 사신, 무슨 꿍꿍이지? 분명 혼이 날 줄 알았는데.
사실은 혼이 나고 싶어서 사신에게 편지를 쓴 것이기도 했다. 지금 연애 같은 걸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줄줄이 나열하며 혼내주기를 바랐건만.
[그래, 전에 너한테는 무리일 것 같아서 알려주지 않았다만, 그 몸 말이다. 양기로도 충전이 돼.]
“헤에……?”
양기가 뭐 어쨌다고? 해인은 또 사신이 어려운 얘기를 하자 머리를 갸우뚱하며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을 했다.
[평소엔 너 달빛으로 충전하잖냐.]
“그렇죠.”
[그건 음기, 여자의 힘이지.]
“그렇군요.”
사신은 쉽게 설명해줬다. 묘하게 친절한 태도였다.
[양기는 남자들이 가진 힘으로, 음기보다 파워가 세지. 당연히 효율도 훨씬 좋고.]
“……그래서요?”
[결론만 말하자면, 그 몸으로 여자로 변해서 사내놈과 교접하면 양기가 충전된다. 어때? 참 쉽지?]
“푸웁.”
미쳤어. 해인은 정말로 대놓고 사레가 들려서는 콜록대기 시작했다.
쉽긴 뭐가 쉽다는 거야?!
교, 교, 교……!
해인의 뇌가 차마 이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사신이 말을 덧붙였다. 못 알아들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교접. 혹은 성적 접촉.]
“끄아아악?!”
[쉽게 말하면 수컷들 양기를 빨아먹는 거지. 사실 그게 음기보다 농도가 진해서 더 좋…….]
“내가 뭐 구미호예요?!”
[비슷해, 너.]
하여간 이 사신은 배려심이 너무 부족했다.
이건 정말 충격의 연속이었다. 해인은 뜻하지 않은 사실에, 자신의 몸이 가진 몰랐던 기능에 거의 게거품을 물다시피 했다.
해인이 충격으로 반쯤 앓아누웠는데도 사신은 잘됐다는 듯 전에 못다 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네가 그 몸으로 수컷 만날 생각을 할 것 같지 않아서 안 알려줬지만 말이다. 사실 한달 내내 달빛으로 충전하는 것보다는 인간 사내와 키스 두세 번 하는 게 효과적이야.]
“……말도 안 돼!”
[본래 그 사신탈은 요괴들을 본떠서 만든 거거든. 같은 원리라고 해야 하나? 인간으로 변하는 기능을 넣으려면 그래야 했어.]
이 이야기 안 들은 귀를 사고 싶었다. 순진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것도 안 되면 들은 이야기를 당장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내가 요괴라니! 그것도 남자 양기를 빨아먹는!
[그런 반응일 것 같아서 비밀로 했던 건데.]
“계속 비밀로 해줬어야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그럼 써먹어야지 않겠냐. 이왕 키스할 거 충전도 하면 좋지 않니. 일석이조.]
반쯤 패닉에 빠졌던 해인은 문득, 자신이 이 몸으로 키스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시율과.
“……헛?”
해인은 사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였으면 했다.
그래서 얼른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이의 있다는 듯.
“사신님, 질문 있어요!”
[뭐냐?]
“전에 어쩌다 보니, 우연히, 그러니까 본의 아니게 사고처럼 키스를 한 번 했는데…… 전혀 충전이 안 되던데요?”
이성과의 접촉으로 따지면 태일과도 매일 키스를 하는데. 조금도 충전된 적은 없었다.
사신의 말대로라면 달빛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만큼 기운이 차야 하는데 말이다.
[성적인 접촉이라니까?]
“성적?”
[음…… 아빠가 딸한테 하는 그런 키스는 전혀 양기가 안 나와. 너한테 성적으로 흥분한 남자가 너를 갈구하면서, 너를 가지고 싶어 하면서, 너에게 음심을 품고 키스를 해야…….]
“왁왁왁!!”
[네가 물어봐 놓고는 그게 무슨 난리냐?]
온몸을 버둥거리며 자체 모자이크를 시도했던 해인은 격렬하게 난리를 친 탓인지 숨이 차는 걸 느꼈다.
아니, 야한 이야기를 들어서 숨이 차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쪽일 확률이 높았다.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정말?!”
해인은 왠지 눈물이 핑 돌아서 사신에게 빽빽거리며 항의했다. 고양이 꼴로 만든 것도 모자라서 양기를 빨아먹는 요괴라니!
하지만 이 사신은 전부터 인정머리가 조금도 없었다.
[다 싫으면 그냥 여기서 살든가.]
“……으으!”
[인간들 표현으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요괴들은 오래전부터 인간 사내를 유혹해 그 양기를 양분으로 삼아 젊음이나 힘을 유지했다. 인간이 죽을 만큼 양기를 빠는 것만 아니면 불법도 아니고.]
뭐, 그런 법이 다 있는지! 해인은 자신이 그 양기를 섭취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으로 변하는 기력을 충전하는 건, 달빛이면 충분하다고 굳게 믿었으니까.
괜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여기며 머리를 털어내는데, 사신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줬다.
[뭐, 부담 갖지 말고 유혹해봐라. 어차피 몸이 완성되어 네 영혼이 제자리를 찾으면 넌, 모든 기억을 잊어야 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 기억을 지울 거라고 말했다.]
분명 무중력한 공간임에도 해인은 온몸이 뒤흔들리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몸 안의 모든 것이 요동치고 머릿속이 흔들려 저가 뭐라고 되물었는지도 그새 잊어버렸다. 잊다? 잊어? 모든 걸?
그 말의 뜻을 채 납득하기도 전에 사신이 흔들리는 뇌리 속을 또 진탕 놨다.
[당연한 것 아니냐? 넌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으니 전부 지울 거다. 그 사고 직후의 모든 기억을 지워서 네가 평범한 인간으로 여생을 살게 할 거다.]
“하지만…….”
[네가 1년간 고양이로 살았던 것도, 그 상태로 누군갈 사랑한 것도. 날 만난 것도! 네가 한 번 죽었던 것도 전부!]
사신은 그냥 단조롭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머릿속에 들어와 박히기가 칼날 같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박해인 네가 후에, 수명을 다 채우고 염라대왕님 앞에 섰을 때 그 기억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래서야 우리가 이 노력을 하는 이유가 없지 않느냐.]
해인은 빠르게 지난 두 달간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이 모두 잊어야 할 기억이라니.
태일에게 주워지고, 병원에서 시율을 만나고, 가출하고, 다시 주워져…… 머릿속으로 쉼 없이 태일과 함께한 시간이 스쳐 갔다. 그리고 밉기만 했던 시율 역시.
그 얼굴들이 해인의 머릿속을 뒤죽박죽 헤집었다.
[너의 남은 평생을 살기 위해 그 1년, 잊어야 할 거다. 본래 인간은 몰라야 할 일들이니 억울해하지 마라.]
그래서였구나.
사신이 저승의 이야기나 선계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들려줬던 건, 어차피 지워야 할 기억들이기 때문이었구나.
해인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인데 그게 왜 결코 안 될 일처럼 느껴지는 건지.
왜 심장이 아파오는데 그것이 태일 때문만이 아니라 시율이 함께 때문인지.
“하…… 지만요. 그럼, 이…… 마음은요?”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는데, 사신은 못 들은 것인 양 군다. 양기나 빨아먹으면 그만인 이야기인 것처럼.
[마음이라. 인간 박해인아, 잘 들어라. 그건 참 부질없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소중해도 몇 년 후에는 몰랐더라면 하는 감정이 될 수도 있다. 인간들의 사랑이란 대개 그런 거지.]
“아닐 수도 있잖아요?”
[과연 그럴까? 그럼 이렇게 해보자. 네 마음이 정녕 그렇게 소중하다면, 그래서 평생 간직하고 싶거든 남은 평생을 고양이로 살 거라.]
“그건, 또……?”
기억을 간직하고 싶다면, 계속 고양이로 살라고?
[네가 인간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인생을 고양이로 살겠다면, 네 수명이 유효한 한은 그 몸을 빌려주마. 그동안은 기억을 지울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 말은, 남은 인생과 바꿀 만큼 중요한 감정이 아니라면…… 버리라면 말인가요?”
[그래! 둘 중 하나다.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가거나, 그걸 포기하거나.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지 않느냐.]
사신은 인간의 감정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었다. 평생과 바꿀 만큼의 감정이 아니라면 포기하라고.
[뭐, 설마 그만한 사랑이 세상에 있겠냐마는.]
“……아.”
사람이길 포기할 만큼 사랑할 리 없다고 말하는 사신이다. 그리고 그에 차마 반박할 수 없는 해인이고.
사신은 멈추지 않고 또 다른 파문을 던졌다.
[기억이란 쌓으면 쌓을수록 무거워지지. 나중에 잊는 것이 두렵다면 인간계로 돌아가지 말거라. 이곳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는 쪽을 권하마.]
“난…….”
[어차피 잊을 기억을 새로 쌓아 무엇하겠느냐.]
해인은 생각했다, 태일과 시율을. 왠지 그 둘만을 머릿속 한가득. 종내에는 잊어야 한다는 그들을 계속 떠올렸다.
결코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 남은 일생보다는 소중할 리 없는 그들을. 고작 두 달 함께했을 뿐인 둘을.
[여기 남겠느냐?]
남은 열 달을 더 기억해 그만큼 아파해야 할지, 지금이라도 외면해 덜 아플 것인지 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해인의 마음은 이성이 소리치는 것과는 반대로 기울고 있었다.
그쪽은 아프다, 많이 아프다. 아프지 마라! 이성이 외치나 소용없었다. 또 바삐 결정을 재촉하는 사신에게 해인은 한참 만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돌아…… 갈래요. 그래도…….”
그러면서 울었다.
뚝뚝 끊어지는 음성이었다.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눈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곳엔, 이 아픔 감당할 만큼 소중한 것이 있었다.
눈물이 나도록 아쉬운 것이 있었다.
잊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잊어야 한대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은 것이 있었다.
***
해인은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고양이의 일상. 겉보기에는 나른하기 그지없는 그 몸짓으로.
낮에는 일광욕을 했고 밤이면 그것을 달빛으로 바꿀 뿐인 나날.
무엇이든 가장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세 달째는 해인이 무기력한 기분에 빠진 사이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다.
속절없이 흐르는 한 달을 해인은 멍하니 흘려보낼 뿐이었고…… 그 시간 동안 시율과 태일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어느덧 자연스레 형, 동생 하며 속을 나누는 사이로 바뀌어 있었다.
“형님, 전 사실 모델들보다는…… 광활한 대자연이 찍고 싶어서 사진작가가 된 겁니다. 열대림이나, 늪지대…… 뭐, 그런 곳이요. 그럼 작품들은 잘 안 팔리지만요.”
“그래? 패션잡지 분야가 적성인 줄 알았는데. 네 사진들 훌륭하잖아. 대중성도 있고.”
“물론 모델들도 아름답지만, 가끔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이유가 떠올라서 멈칫하곤 합니다.”
특히나 술을 한잔할 때면 남자들은 다 그런지 몰라도 정말 오래 알아온 사이처럼 덧없이 보였다.
“하긴. 나도 월급쟁이만 할 게 아니라 개업하는 게 목표긴 하지. 언제까지 원장 밑에 있을 수도 없고. 지금 있는 데도 좋긴 하지만 역시 나랑은 지향하는 게 좀 달라서.”
“예를 들면요?”
“나는 가망 없는 녀석들이라면…… 서둘러 안락사를 권하는 사람이고, 원장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랄까. 뭐, 그런 식이지.”
“……형님.”
“뭐! 하여튼 자기 병원 가지는 건 모든 의사들의 로망 아니겠어? 그렇지? 자, 마시자고.”
술잔과 함께 기울이는 대화들은 제법 깊었다. 너무 친해졌다. 저 둘, 말려야 하는데…… 의식은 했지만 해인은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다.
사신과 다시 만난 뒤부터 일부러 멍청하고 싶은 것처럼 뒹굴거리기만 했다.
기운도 없고 의지도 잃었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잊을 것들이라 더 이상 정 붙이기가 무서웠다. 무력함에 빠진 해인은 모든 걸 방관할 뿐이었다.
“그런데 요즘 개냥이가 기운이 좀 없는 것 같다?”
“아, 여름 타는 거 같아요, 형님”
“그런가? 하긴 장마철이기도 하고.”
두 남자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얼굴로, 해인은 시간만 쭉쭉 흘려보냈다.
해인을 결정적으로 무력하게 만드는 건 사신이 이번에 새로 건 주술이었다.
[나, 사신 모달은 인간 박해인의 영혼에 금동술(禁動術)을 건다. 그대 저승에 대한 것이나, 인간인 자신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무언, 무행하리라. 내 영혼의 무게를 걸고 강력히 주박을 거니, 이 결코 어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저주였다.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게 하는 저주.
[한 가지 자비라면, 가족을 만날 수는 있게 해주마. 그들에겐 고양이로서의 너를 금언해야겠지.]
그게 무슨 자비야.
해인은 매일매일을 시무룩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해인이 너무 신경 쓰여서 시율은 하기 싫었던 일 한 가지를 진행하기로 했다. 꽤나 거나하게 취한 태일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태일아.”
“예, 형님.”
태일은 정말 말 잘 듣는 동생이었다. 우연히 알았더라도 친한 사이가 됐을 게 분명했다. 시율은 큰맘 먹고 말했다.
“너…… 소개팅 안 할래?”
“예?”
“소개팅 해라. 예뻐.”
“……냥?”
둘의 뒤에서 흐믈흐물 녹아 있던 해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거, 사신 때문에 완전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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