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술 취한 고양이
시율의 집에 맡겨진 지 이틀째 밤.
태일은 밤이면 책을 읽었다. TV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조용한 시간을 즐기는 타입이었고 그는 잔잔함의 대명사 같은 남자였다.
적당한 조도를 유지하는 거실에 앉아 침묵을 즐기며 독서를 사랑했다.
그런 그의 곁에 있으면 들리는 소리는, 숨소리와 팔랑이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시율은, 그 반대였다.
“뭐, 보는 거 있냐?”
“……아니.”
밤이 되자 쇼프로를 틀더니 소파에 털썩 누우며 홀로 캔 맥주를 땄다.
어두운 거실에서 TV만이 시율의 얼굴 위로 색색 빛깔을 터트렸다. 요즘 알던 밤과 달라서 조금 시끄럽게 느껴졌지만, 사실 이쪽이 해인이 본래 즐기던 밤과 흡사했다.
특히 저 맥주가…….
“왜? 너도 줘?”
“벼, 별로.”
“흠…… 근데 먹으면 너도 취하냐?”
내젖던 고개를 갸우뚱하는 해인이다. 글쎄, 이 몸이 된 뒤로 뭔가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모르겠어.”
먹어도 상관없고 먹지 않아도 상관없는 몸이었다. 그래서 항상 공복상태였다.
먹으면 먹은 만큼 배출해야 하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런데도 먹고 싶은 것 몇 가지를 꼽으라면 일단 치킨과 맥주, 닭발과 소주, 그도 아니면 계란찜에 쌀밥, 뼈 해장국, 삼겹살…….
끝없이 먹고 싶은 것이 머릿속으로 쏟아지자 해인은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으니까.
“아, 너 술 먹어본 적은 있냐?”
“……있지, 그럼!”
“헤에, 과연.”
약간 얕잡아 보는 어투. 시율은 일부러 해인을 자극하는 것이 분명했다.
해인이 놀림을 못 견딘다는 걸 알고 이용하는 거다. 말려들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해인은 볼을 부풀리고 투덜대고 말았다.
“정말이야. 나 이래 봬도 제법 세!”
볼 탱탱한 고양이가 저를 얕보지 말라 소리치는 모양새라니.
그것 참, 위협적이긴커녕 가로소운 꼴이었다. 그것도 검증되지 않은 제 주량을 자랑하면서 말이다.
“먹어봐, 그럼.”
“흥!”
“역시 못 먹는 거지, 너? 거짓말쟁이구만.”
“아냐!”
눈을 흘겨봤지만 말로는 백날 증명이 되질 않는다. 해인은 엎드렸던 자세에서 일어나 꼬리를 치켜세웠다.
심한 내적 갈등 중이었다. 한 캔쯤은 괜찮지 않을까? 간에 기별도 안 갈 텐데, 맥주 한 캔쯤 제 주량이면 술 냄새 맡은 수준인데, 하고 말이다.
엄마가 잘 지내는 걸 확인한 터라 긴장이 좀 풀린 해인이었다.
“많으니까 한잔하지?”
“……너 같으면 너랑 먹겠어?”
“요즘은 약속대로 이상한 짓도 안 했잖아. 어제 산책도 시켜줬고. 좀 믿어봐.”
확실히 시율은 요즘 비교적 신사적으로 굴었다.
해인의 취향이 태일이라는 걸 알아서인지 착하게 굴려고 노력하는 눈치였다.
……꿀꺽.
본의 아닌 금주가 가져온 후유증일까? 그리고 식도를 넘어가는 차가운 맥주의 감각이 뇌리에서 번쩍이자 더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액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조금쯤은?
이어지는 자신과의 싸움 끝에 결국 해인은 넘어가 버렸다.
태일과는 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은 열 달을 금주하는 건 정신건강에 해롭고. 그러니 타협하기로 했다.
사실 고양이 생활에 많이 익숙해져서, 전처럼 긴장감이 살아 있지는 않았다.
“그럼…… 딱, 한 잔만…….”
먹기로 하니 지독한 갈증이 끓어 목이 잠겼다.
시율은 웃었고, 해인의 계산은 큰 미스를 낳았다. 이 몸은 제 본래 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주량이 센 그 몸, 지금은 없지 않은가.
***
모든 면에서 그리 성능이 좋은 몸이 술에 이리 취약할 줄 누가 알았나?
사신이 준 주의사항에도 이 몸이 술에 약하다는 말은 없었다.
설마하니 캔 맥주 하나를 해독하지 못해 이리 골골댈 거라고는!
술을 마시기 위해 사람의 모습을 한 해인은 한순간에 취해서는 어쩔 줄 몰라 헤롱댔다.
그건 정말 해인의 인생에 처음 있는 만취상태였다. 놀랍게도 고작 한 잔 만에 이리 취하다니.
사신들은 술을 안 먹나? 그래서 해독기능을 아예 안 넣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순 없는 거다.
해인은 어지러운 머리를 몇 번인가 빙글거리다가 결국 소파에 푹, 하니 박아야 했다.
“흐아……!”
“……바보냐.”
시율은 잠시 재미있어하는 듯했으나 이내 한심해하는 투였다.
제 주량도 모르면서 단번에 캔 맥주 하나를 원샷 하는 고양이라니. 먹을 줄 아는 것 같기에 내버려뒀더니 그냥 바보였다.
“먹을 줄 안다며?”
“……알았는데에……?”
해인은 그리 열심히 경계하더니 녹다운은 한순간이었다. 과연 은근 허당인 게 고양이다웠다.
“이상…… 하다…… 아?”
이 술이 내가 알던 술이 아닌가?
해인이 도저히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는지 난생처음으로 겪은 심각한 취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나 그것은 혼자만의 생각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소파에 기대 손끝을 움찔, 거리는 정도의 움직임이 다였다.
그리고 시율은 이때다 싶어 해인에게 속삭였다.
“야, 고양이로 돌아가. 그럼 내가 침대로 옮겨줄게.”
“……끄으응…….”
“고양이로 변해보라니까?”
시율이 또 악마의 속삭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소원하는 것 중 하나가 해인이 고양이에서 사람으로, 혹은 사람에서 고양이로 변하는 그 물량변화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었다.
계획에도 없었건만 스스로 취해준 고마운 사태를 놓칠쏘냐.
하지만 취한 와중에도 악착같이 그것만은 보이지 않으려 버티는 해인이다.
최대, 최악의 약점인 순간이었으니까. 본능적으로 그것만은 보이면 안 된다 몸이 외치고 있었다.
“시르엉…….”
“얌마, 얼른. 그럼 편해진다니까?”
녀석이 하는 건 다 거짓말이야! 해인은 있는 힘껏 반항했다. 그러니까…… 엎드린 채 꿍얼꿍얼.
“……거짓말! ……사기꾼, ……악마, 나쁜 놈…….”
일단 시율의 눈앞에서 벗어나려 몸을 일으키는 해인이다. 하지만 다리를 세우는 것도 무리였다.
고양이의 특기 중의 특기인 중심잡기가 지금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일어나려다 다시 소파 쿠션에 코를 박기를 반복하던 해인은 안 되겠다 싶어 기어가기로 했다.
도망가려고 지렁이처럼 꼬물꼬물거리는 그 꼴을 5분가량 구경하던 시율은 결국 해인을 들쳐 안았다.
5분째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이 고집 센 짐승을 일단을 제대로 재워야 했다. 변신하는 걸 보고 싶기는 했지만 이러다 이 녀석이 죽을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본체는 4kg 남짓한 고양이였다. 변신 후가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고로 맥주 한 캔이란 실로 많은 양일지도…….
그렇게 짐작해보는 시율의 인상이 제법 험악했다.
“주량 세다며!”
“……그랬었단 말이야아. 흐엉.”
“아오! 너 열은 안 나? 구역질은?”
늘어지는 해인의 몸을 침대에 눕히며 시율이 물었다.
애초에 고양이가 술을 먹는다는 자체가 자살행위였으니 의사로서 적잖게 걱정이 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설화에 보면 구미호는 술을 좋아하고, 일본 민화에도 여우요괴가 술을 좋아하길래 해인도 그 맥락인 줄 알았다.
결정적으로 본인이 먹어도 된다고 호언장담을 해놓고는 이 꼴이 되다니.
“너 앞으로 술 먹지 마, 안 맞는 것 같으니까. 어이! 듣고 있어?”
모처럼 시율이 걱정스레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영 기운이 없다. 애초에 사람 말이 아니었다.
“……아웅, 아웅.”(……물, 물.)
“많이 울렁거려?”
몸은 사람인데 입에서는 고양이 소리만 나오고 있었다.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시율이 해인의 이마에 손을 올려봤지만 딱히 열은 나지 않았다. 혈색도 약간 진한 정도라 크게 문제 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해인의 심장 위에 귀를 대봤다. 청진기가 없으니 그렇게라도 해봤다. 역시 크게 문제는 없었다.
혹시 싶어 목덜미의 맥박도 짚어봤으나 이상 무.
전체적으로 정상수치임에 시율은 꽤나 만지작거린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평범한 고양이였다면 알코올로 죽을 수도 있었다. 특별하긴 특별한 모양이었다. 평범하게 취한 걸 보니.
“끄으흥…….”
“……물 줄까?”
몸을 둥글게 말아가는 해인은 이미 시율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것 같았다.
나중에라도 혹시 물이 먹고 싶어지지 않을까 싶어 시율은 물을 한 잔 가져오며, 그사이 해인이 고양이로 돌아갔으면 했다.
본래 몸인 그쪽이 제 몸에는 편할 테니까. 아무래도 그편이 시율이 진찰하기도 편했고 말이다.
그러나 시율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해인은 무의식중에도 변하면 안 돼, 안 돼, 하는 강박에 시달리느라 계속 사람 모습 그대로였다.
“얌마, 고양이로 돌아갈래? 안 볼 테니까.”
용쓰는 게 좀 가여워서 그렇게 말했지만 역시나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해인은 긴 머리칼을 전부 흩트려 놓은 채, 무릎을 두 손으로 꼭 끌어안고 무릎에 뺨을 대고 두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잠들어보려 이리저리 침대 위에서 뒤척이고는 있었는데 잠이 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눈을 감고 낑낑댈 뿐이었다.
무언가 찾는지 손을 침대 위 여기저기 더듬거리는 해인이다.
보다 못한 시율이 시트를 덮어줘 봤으나 훽 발로 차버렸다.
대체 뭘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해인은 저도 답답한지 시트 위로 얼굴을 비비며 칭얼댔다.
“미양…… 아냐, 이게 아냐냐……!”
반은 또 고양이 말이었다.
술에 취해 잠들고는 싶은데 낯선 침대에, 오랜만에 사람의 몸으로 잠들려니 도통 편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고양이로 돌아가면 좀 편할 텐데, 취한 고양이에게 바랄 사안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손끝에 원하던 걸 발견한 해인이다.
한참을 여기저기 헤매던 손끝이 멈춘 건 시율의…… 가슴팍이었다.
“뭐, 뭐야?”
시율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미심쩍다는 듯 꾸욱, 눌러보더니 그 단단함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마침내 베개 속에서 얼굴을 들었다.
찾았다. 해인은 얼굴에 그렇게 쓰여 붙이고 있었다.
“……벗어.”
“뭐?!”
시율은 해인을 만난 이래 자주 경악했다. 해인에게는 확실히 그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해인이 졸려 반쯤 감긴 눈을 부릅뜨며 딴에는 위협했다. 그리고 그러다…… 훌쩍였다.
“벗어, 벗으라고! 버, 벗어엉……!”
제발 벗어달라는 투정에 시율은 잠시 이게 미쳤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떼를 쓰듯 제 옷깃을 잡고 늘어지는 해인의 손에, 제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음을 깨달았다.
그걸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잠시 시간이 걸렸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라 결국 탈의했다.
시율이 머리 위로 티를 벗어내고 맨가슴을 드러내기 무섭게 해인이 납작, 안겨왔다.
베개 대신이라는 듯. 태일과 흡사한 그 가슴팍에 뺨을 문대며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거지, 이거.”
이제야 잠들 수 있다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제가 지금 시율을 덮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개운한 얼굴이었다. 사뭇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 설마…… 맨날…… 니 주인이랑 이러고 자냐?”
“야웅야웅.”
“……대답해보지?”
짐작하는 바가 틀렸길 바라면서도 시율은 해인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완연한 성인 여자의 몸과 다를 바 없는 말랑한 육체가 자신에게 꼬옥, 하니 바짝 안기는데……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 살의 말캉함이 주는 부드러움에 돌연 목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 무슨 일인지! 발육부진 고양이 따위한테 심장이! 시율은 심각한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흠냐…… 냐…….”
뭐, 사실 거기까지는 참을 만했던 시율이다. 다만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자신이 평소 아는 그 몸과 다소 다른 시율의 몸이 그럭저럭 괜찮긴 한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지 코를 킁킁대던 해인이…… 혀를 내민 것이다.
낼름, 할짝할짝 핥기 시작했다.
촉촉하고 작은 혀가 제 입술과 가까운 남자의 가슴 아래를 줏대 없이 살살 맛보고 있었다.
넓다는 듯 손바닥으로 꾹, 꾹, 눌러가며.
그건 분명 꾹꾹이었다. 새끼 고양이가 어미젖을 빨 때 젖이 잘 나오도록 본능적으로 하는 일종의 마사지 행위.
고양이들은 기분이 좋을 때도 꾹꾹이를 했다.
시율은 수의사로서 그 사실을 애써 상기해 내면서도…… 내면서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난 수컷이야!
“조…… 좀…… 떨어…….”
고양이가 그런다면 애교 부리는구나 할 텐데.
지금은 어디로 봐도 여자 사람인 해인이 자신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진정 고문이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아도 견디기 힘든.
심지어 벗겨놓고 이러니 덮쳐지는 기분이었다. 이 짐승 같은 여자가 정말.
“너…… 너……!”
이 변태 고양이!
그는 전에 해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었다.
시율은 지금 적잖게……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짐승에게 내가 반응하다니. 내가…… 짐승한테…….
그건 분명 그의 인생 최대의 굴욕이었다.
시율은 놀라고 억울해 그 밤을 꼴딱 새워야 했다. 물론 뜬눈으로.
해인은 여러모로 복수했다. 아직은 모르지만.
***
태일의 약속대로 딱 3일 만에 해인을 데리러 왔다. 더 늦어질 수도 있다고 한 걸 감안하면 빠른 귀가였다.
그게 너무 반가워 해인은 신이 나 냥냥거렸다.
두 귀를 연신 파닥거리며 태일의 가슴에 안겨 그의 턱 아래를 까끌한 혀로 핥아댔다.
그건 일종의 영역표시이자 애정표현이자 친밀함의 상징이었다.
지금 태일에게 하는 건 단순히 반갑다는 의미였지만, 그 외에도 수십 가지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상대가 아프거나 슬퍼 보일 때 위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저가 심심할 때 놀아달라는 표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소유를 주장하는 침 묻히기이기도 하다. 해석하려면 끝이 없는 고양이의 행위.
여튼, 주로 친한 상대에게 하는 접촉이다.
하지만 그중 상대를 발정시키는 목적은 없을 거다. 그게 단순히 짐승들이 하는 인사의 일종과 다르지 않다는 건, 수의사인 시율이 가장 잘 아는 일이었다.
고양이가 사람을 핥는 행위는 그저 그런 거라는 걸 말이다.
딱히 구체적인 의미는 없는, 그냥 그런. 그저 그런……. 그런데 왜 지금 이토록 화가 날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형님, 안색이 별로십니다?”
“……너 말이야.”
“네.”
할짝.
눈앞에서 날름거리는 혀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보려 ‘저거 별 뜻 없음을’ 반복적으로 되새김질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시율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죽을 맛이었다.
그걸 태일에게 하고 있는 해인도, 당연하게 받으며 그저 간지러워할 뿐인 태일도 이상해 보였다.
자신은 그에 이상하게 반응했으니까. 차마 말 못 할 수컷의 은밀한 본능 때문에.
시율은 이를 악물었다.
“혹시 평소에 벗고 자냐?”
“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함박 웃으며 해인과 키스를, 그러니까 코끝 부비부비를 하던 태일은 오늘따라 시율이 여유가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크게 언짢은 일이 있는 모양이다. 컨디션도 별로인 것 같았다.
평소의 말끔한 모습과 달리 푸석푸석해 보였다. 눈 밑은 퀭하니 다크 서클이 어렸고 입술은 바스락거려 보였다.
물론, 그래도 성인 남자의 퇴폐미와 섹시함을 물씬 풍기는 잘난 사내임은 분명했다.
시율은 두통이 오는지 이마를 누르며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 계속 옷 속으로 파고들어서…….”
“아아. 버릇이 들었나 보군요.”
“……하하하하!”
시율이 고장 난 물건처럼 이상한 소리로 웃어 보였다. 태일은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당황하다가 물었다.
“형님, 혹시 개냥이가 또 밤새 울었나요? 그래서 못 주무신 것 아닙니까?”
얼마 전 가출했다가 시율의 손에 구출된 바 있는 해인을 태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 하루 시율의 집에 있으면서 그 하루 종일을 울었는지 목이 바짝 쉬어버렸던 것도 말이다.
“그건 아니지만.”
“그런 거라면 이제 안 맡기는 편이…….”
“아니라니까, 그런 거. 봐봐, 그 녀석, 목소리 멀쩡하지.”
확실히 해인의 목소리는 멀쩡했다. 기분도 좋아 보였고 말이다. 약간 들떠 있기까지 했다.
“먀미야앙, 먕먕”(나 안 울었어, 그런데 취해서 잤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미야미야옹?”(필름 끊긴 건 처음이다?)
들어보라는 듯, 손톱을 빼지 않은 양발로 태일의 가슴 위를 긁어내리며 해인이 간밤의 일을 설명했다.
그건 소풍 다녀온 아이가 엄마에게 가서 뭘 봤다, 뭘 했다 신 나서 보고하는 것과 흡사한 것으로.
해인은 시율의 집에서 보낸 며칠이 이번엔 썩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제 일은 술 한 잔 한 뒤로 잠든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 시율이 왜 이를 갈고 괜히 성질을 부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원래 그런 녀석이라고만 치부했다.
“하하하!”
시율이 계속 이상한 소리로 웃었지만, 뭔가 억울하다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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