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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19화 (19/114)

19화. 엄마 보고 싶은 고양이

각기 나름의 양보를 한 결과, 둘은 함께 버스를 타고 있었다.

시율은 몇 년 만에 타는 시내버스가 색달랐으나, 그건 해인이 느끼는 소풍 가는 기분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둘이요.”

삑.

그가 지갑을 갈무리하는 동안 해인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버스 안의 승객 하나하나를 예술품 보듯 바라보더니 이내 창가에 매달려서는 창밖의 풍경에 넋을 놓았다.

그런데도 그건 아주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고작 이런 것에 행복해하다니.

고양이라 그런지 버스 타는 것 하나에 아주 감동하고 있었다.

시율은 해인의 신 난 모습을 보며, 아마 그녀에게 지금 꼬리가 있다면 한껏 흔들고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비뚜름한 미소를 살짝 걸고는 해인을 바라봤다.

저렇게 착하게만 있어준다면 밖에서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오……!”

그리고 해인은 정말 크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일상적인 모든 것이 새롭고 감탄스레 다가왔다.

고양이로 지낸 지 두 달, 무려 두 달 만에야 사람답게 굴고 있지 않은가! 아무렴 이래야 사람이지.

걷고, 버스 타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아직 다소의 문제점들이 남아 있지만, 엄마 얼굴 잠깐 보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멍하니 창밖을 구경하는 해인은 바로 옆자리에 시율이 앉아 있는데도 경계는커녕 마냥 들떠 있었다.

버스 안의 다른 승객이나 사람들의 시선이 있으니 이상한 짓을 못 할 거라고 믿고 있는 거다.

“그렇게 좋냐?”

“응!”

그건 해인이 시율에게 처음 들려주는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한껏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 저절로 눈이 가고, 헤실헤실 눈웃음을 흘리는 눈에 입술이…… 갈 뻔했다.

헛, 시율은 순간 미간을 좁혀야 했다.

이게 뭐지. 방금 그 생각 뭐지?

순간 극심한 고뇌에 빠진 시율이었다. 하지만 이내 결론 내렸다. 그래, 고양이도 귀여우면 힘껏 껴안고 싶어지잖아. 그거야 그거.

***

어릴 적 살던 동네가 보였다.

“다 왔다. 다 왔어, 바로 다음 역이야.”

“……흐음.”

해인은 흥분에 겨워 방방 뛰고 싶은 걸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시율 역시 무언가 참기 위해 입술을 꿈틀거렸고 말이다.

예를 들면, 해인의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도록 쓰다듬는다거나, 발그레한 두 뺨을 마구 늘리고 싶다거나.

오동통한 입술을 엄지로 쓸고 싶고…… 또…….

“흐흠.”

여러모로 거슬렸지만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참아야 했다.

이 귀여운 것에 함락당해가는 증상.

시율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새끼 고양이 열 마리에 둘러싸여도 무너지지 않는 자신이건만!

“하우와우아……!”

하지만 이 짐승, 아니 이 고양이 제법 귀여웠다.

‘아이. 신 나.’라고 온몸으로 즐거움을 뿜어내는 것도, 저 초롱초롱 빛나는 눈도 다 무기였다. 짐승의 먹고살기 위한 사랑스러움이란 무기. 타고난 수단이라 더욱 강력한 것.

세상엔 그런 이론이 있다. 어린 짐승일수록 귀여운 이유는, 다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이것도 그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사랑스러울 리 없지.

시율은 창밖에 홀린 해인을 보며 그렇게 자신을 강하게 세뇌시켰다. 뭔가 흔들리는 정신을 다 잡으며 벨을 누르려고 손을 뻗었다.

“……?!”

“내가, 내가 누를 거야.”

그런데 그 손을 해인에게 딱, 두 손으로 붙잡혔다.

“오랜만이란 말이야!”

해인은 버스에서 내릴 때 꼭 제가 벨을 누르고 싶어 하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시율이 노리자 정말 정색하며, 어울리지도 않게 미간을 모으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시율을 노려보았다.

그저 그것뿐이었는데, 시율은 제 심장이 이상반응을 보이는 걸 느꼈다.

마치 카페인을 다량 섭취한 것처럼 심장이 시끄러웠다. 이게 미쳤나, 싶었다.

내릴 역이 가까워질수록 해인은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뭐가 그리 감격스러운지 그 기대로 들어찬 두 눈이라니.

벨 누르는 게 일생일대의 기쁨인 양 언제 누를까 움찔거리는 꼴이라니.

삑!

“…….”

“야!”

뭔가 심술이 나버려서 쓱, 하니 긴 손을 뻗어 제가 벨을 누르고 마는 시율이다. 그에 해인은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어쩜 이럴 수 있냐고 묻는 얼굴.

“너……!”

나빠! 라고 말하는 그 얼굴.

그에 시율은 모종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거 위험해. 이 녀석 하자는 대로 하다간……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어.

그는 이상한 설렘을 주체 못하고 심술맞게 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단순히 오그라드는 커플행각으로 보여, 미간을 찌푸리는 동승객들이었다.

***

버스에서 내린 해인은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무슨 남자가 이리 잔인하단 말인가! 남의 작은 소원을 산산조각을 내다니! 사소하다고 인정사정없이 무참히 눌러버렸겠다……?!

감히 내 벨을! 몇 달 만의 즐거움을! 절로 부아가 치밀었다.

해인이 원망스레 노려보았지만 시율은 뻔뻔하게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그는 해인이 이곳에 왜 오고 싶어 했을까 의아해하며 흔하디흔한 서울 외곽 동네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별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동네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이 10분 정도 걸어야만 나왔다.

뒤로는 산이 있고 강남과는 거의 한 시간이 떨어진, 특징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런 소박한…….

“……어?”

잠시 주변에 한눈팔았던 시율은 그 몇 초 사이 해인이 감쪽같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정말 아주 잠시 주변을 둘러본 사이 소리 없이 말이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특기인 기척 죽이기를 살려, 거의 은신에 가까운 그 능력을 발휘해 해인은 시율의 시야에서 탈출했다.

고양이의 기민함은 사람일 때도 충분히 발휘되었다.

골탕 좀 먹어보라지! 하며 의기양양하니 샛길을 달려 나갔다. 분명 자신이 도망쳤다 여기고 기겁할 터다.

물론, 또 가출해서 사서 고생할 마음은 없으니 결국 돌아갈 예정이긴 했다.

그래도 잠시나마 안절부절못할 시율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오는 해인이었다. 시율 특유의 그 느긋한 얼굴이 일그러진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후후후!”

이건 해인 나름의 소박한 복수였다. 소박한 바람을 훼방 났으니 그에 상응하는 소박한 복수.

사방으로 복잡하게 뻗은 굽이길 중 해인이 어디로 향했을지 시율이 알 리 없었다.

동네는 오래됐으나 제법 넓었고, 오래 산 사람들도 종종 길을 헷갈리는 복잡한 터를 자랑했다.

그런데 이곳이 낯설기만 할 시율이 해인을 쫓아올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미아는 내가 아니라 너다, 강시율! 드디어 한방 먹인 것 같아 해인은 발걸음이 날아갈 듯한 가벼워졌다.

“흐흥.”

이곳은 10년을 넘게 살았던 동네였다. 해인은 지금은 독립해서 다른 곳에 살지만 이곳은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엄마는 잘 있을까? 해인은 두근거리며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지금의 겉모습도 본래의 모습과 같았지만, 엄마는 엄마라 혹시라도 뭔가 다르다는 걸 눈치챌까 봐 오늘은 멀리서 슬쩍 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럼 마음이 많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위안도 될 테고. 무엇보다 고양이가 된 뒤로 내내 엄마가 보고 싶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럴 수 없게 되자, 다신 못 만날 뻔하자 너무도 그리웠다.

집과 가까워지자 해인은 혹시 마을 사람들이 저를 알아볼까 싶어 모자를 좀 더 깊이 눌러썼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던 해인은, 마침내 제 집 앞에 다다라서는 우뚝 멈춰 서야 했다.

[개인 사정으로 쉽니다.]

2층은 집이고 1층은 공인중개사무실이었다. 엄마의 일터이자 삶의 낙인 곳.

가게 특성상 항상 열려 있는 곳이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이는 수다방이기도 해서 365일 중 360일 열려 있는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복덕방 안에 앉아 있던 엄마의 모습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라면 저 유리창 너머로 뒷모습이 보여야 했는데…….

불이 꺼진 가게는 어제도, 그제도, 심지어 며칠은 닫았던 것 같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해인은 당연히 있으리라 여겼던 엄마의 부재에 당황하며 유리 사이로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집에 들어가 볼까 싶었지만 열쇠도 뭣도 없었다. 있는 건 그저 몸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어깨까지 오는 담벼락 따위 지금 이 몸이면 얼마든지 타고 넘을 수 있었다.

고양이처럼 유연하고 탄력 있는 가벼운 육체로 아주 거뜬히 휙! 하니 나는 듯, 사람들의 시선만 없다면 말이다.

“음……!”

일순 당황해 안절부절못하던 해인은 지금 시율이 이러고 있을까? 하고 잠시 스치듯 생각했다.

엄마 잃은 병아리가 된 기분이다.

말없이 사라지는 거, 이거 생각보다 잔인한 짓인 거 같다. 문득 시율에게 미안하고 엄마가 야속하고 걱정됐다.

“해인이 누나야?”

“……응? 아아, 용진이구나.”

“아줌마 놀러 가던데.”

알은척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해인은 조금 안심했다. 어릴 적부터 알던 동네 꼬마였다.

“어디 가셨는지 알아?”

“그러니까…… 저기 밑에 슈퍼 아줌마랑, 진돌이네 아줌마랑, 태형이 형아네 아줌마랑…… 또…….”

“단체 여행 가셨니? 언제? 얼마나? 어디로?”

용진이가 호명하는 사람들은 전부 해인의 엄마와 친한 계모임 사람들이었다. 살짝 놀랐던 마음이 진정됐다.

사내아인 잠시 손가락을 어림한 뒤에야 대답했다.

“삼 일 전에, 태국 어디에 간다고 했는데. 울 엄마는 제사가 있어서 못 갔거든. 그래서 아까워 죽겠대.”

“그렇구나…… 놀러, 가셨구나.”

“다들 신 나서 가던걸? 우리 엄마는 아빠가 못 가게 해서 못 갔어. 아빠가 곰탕은 아주 지겹대.”

안도 반, 허탈함 반이던 해인의 마음이 이내 원망스러움으로 채워졌다.

아니! 딸이 두 달째 얼굴을 안 비치는데 태평하게 여행을 가? 이 아줌마가 정말……! 해인은 못내 그것이 섭섭해서 울컥했다.

걱정하고 있을까 봐 부랴부랴 와봤건만, 줄곧 미안했던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간간이 메일을 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보통은 더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다 큰 딸이라지만 이리 무심할 수 있는 건가?

“끙…… 고맙다, 용진아. 누나네 엄마 보면 꼭! 전해주렴. 누나 왔었다고, 알겠지?”

“응.”

“그래. 그리고 누나 삐졌다고도 전해줘.”

“알았어! 누나.”

해인은 툴툴거리다가 용진이를 바라봤다. 그때 죽었다면 이 아이도 다신 못 봤을 거다. 몇 달 새 이리 훌쩍 크고 까매진 녀석을 말이다.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돈이 있으면 용돈이라도 줄 텐데.

“고마워, 용진아. 돈 있으면 치킨이라도 사먹으렴. 반반에 무 많이로.”

“에잉?”

“누나가 돈이 좀 없어.”

지금도 채무자거든. 눈에 띄게 황당해하는 사내 녀석이 보였지만 그녀는 정말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

해인은 도망칠 때 탁월한 신체 능력을 이용했듯, 시율을 찾을 때도 그것을 사용했다. 코끝을 세워 킁킁, 시율의 냄새를 쫓아갔다.

그리고 정거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시율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한눈에 봐도 난감해하는 상태로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좌우를 살피며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갈등하는 모양이었다.

종종 개냥아! 하고 소리치는 게 누가 보면 애완견이라도 잃어버린 줄 알 거다.

고작 1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그의 옆얼굴을 보니 사뭇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

죽어라 걱정할 줄 알았는데 시원스레 여행을 떠난 엄마와, 저리 애타게 자신을 찾는 시율이 상반됐다.

거, 조금 미안하네.

해인은 저를 찾는 시율의 뒤로 슥 하니 다가갔다. 역시나 특기대로 소리 없는 접근이었다.

그리곤 톡, 시율의 어깨를 건드려 제가 뒤에 있음을 알렸다. 머쓱함이 들어 일부러 말없이.

“너…… 너 인마!”

시율과 눈이 마주친 순간! 말없이 사라졌으니 윽박을 들으려나 했는데, 그보다 시율은 눈에 띄게 안도하고 있었다.

일그러졌던 얼굴이 펴지는 그 찰나가 해인의 눈에는 아주 느릿하게 보였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진정되는 것도 해인에게는 똑똑히 감지됐다.

“잃어버리는 줄 알았잖아……!”

시율은 생각보다 많이 놀라고, 그 이상으로 걱정한 모양이다. 그거, 조금…… 감동이네.

해인은 새침하니 속삭이듯 투덜댔다.

“돌아왔잖아.”

“말도 없이 어디 갔었냐, 너?!”

으레 잃어버렸던 아이를 찾으면 안도됨과 동시에 화가 나듯, 시율이 그랬다.

찾아 헤맬 때는 찾기만 하면 더 잘해줘야지 했는데, 막상 돌아온 걸 보니 제 속을 썩인 게 그리 미울 수가 없었다.

사람 속을 이리 태우다니 너무도 고약하지 않은가. 반성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내가 미안.”

“…….”

“미안해. 이제 안 그럴게.”

고개 숙이고 순순히 사과하는 해인의 모습에 시율은 그만 기세가 죽고 말았다.

자신을 놀리려던 행동임이 명백한데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불같던 분노가 그저…… 바람처럼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신 들어찬 건 다른 무언가였다. 몽글몽글하고 간지러운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심장을 덥히는 무언가.

“……볼일은 다 봤냐?”

“응.”

어쩜 이리 고개도 잘 끄덕이는지. 역시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을까 싶어 손을 들었다가…… 가만히 해인의 정수리 위에 손바닥을 올리는 시율이다.

내가 고양이에게 뭘 바라겠어. 돌아왔으니 됐지, 뭐.

그가 미간을 좁힌 채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시큰둥하니.

“그래서 이제 뭐 할 거냐.”

“이제 집에 갈래.”

엄마가 잘 지내는 걸 확인했으니, 해인으로서는 가장 급한 숙제를 끝마친 느낌이었다.

“그래, 이번엔…… 네가 눌러라.”

시율은 계속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먼저 뒤돌아서 버렸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몇 번이더라? 기억을 되짚으며 시율은 내렸던 정거장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해인은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왠지 시율에게 쌓았던 벽이 조금 허물어져 있었으나, 누구도 의식하진 못하고 있었다. 아주아주 조금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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