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고양이, 모델 되다
직업 특성상 한번 일하러 나가면 기본 12시간 이상 집을 비우는 태일이었다.
1박 정도 집을 비우는 건 잦은 일이었고, 2박 이상 출장이 잡히면 그땐 해인은 호텔에 맡겨졌다.
애완고양이가 된 지 두 달 차. 해인은 이제 혼자 집을 보는 일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혼자가 되면 주로 즐겨 하는 일은, 역시 TV 보기였다.
틱틱.
리모컨을 눌러 TV를 보는 정도는 고양이 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집의 주인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으냐. 볼 게 뭐 이리 없냐앙.”
평일 한낮에는 당연히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툴툴대는 해인의 입에서 고양이의 언어와 사람의 언어가 기묘하게 섞여서 나왔다.
이런 고양이 말투는 몸이 너무 편할 때, 혹은 방심하고 있을 때 멋대로 튀어나오곤 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해인은 늘어져서 뒹굴댈 뿐이었다. 집에 혼자 있는데 뭐, 아무렴 어때. 편한 게 최고지.
그새 TV 보는 것에 싫증 난 해인은 까칠한 혀로 제 앞가슴의 털을 핥아 내렸다. 심심하니 몸단장이나 할 심산이었다.
손바닥도 열심히 핥고, 고개를 돌려 등도 핥았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한 기묘한 자세들이었다.
“엇. 나 너무 유연한데?”
핥핥. 해인은 등 부분을 핥다가 번뜩 깨달았다.
“좀 짱인 듯.”
사람일 때는 너는 애가 뭐, 그리 뻣뻣하냐는 소리를 툭하면 들었으니까. 그에 반해 지금은 발레리나 언니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유연했다.
왠지 콧노래가 나왔다. 기분이 좋아져서 꼬리도 열심히 살랑대며 몸단장에 더욱 열중했다.
“흐흥.”
해인은 요즘 생활에 나름 안정이 되어서인지 본래의 낙천적인 성격을 서서히 되찾아가고 있었다.
청결 작업에 한창 몰입하던 그때.
고감도 센서를 가진 고양이의 귀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를 캐치했다.
두 귀를 쫑긋하며 해인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지체 없이 리모콘을 향해 몸을 날려, TV 전원을 껐다.
그러곤 귀를 세우며 현관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관심을 기울였다. 태일일까? 아니면 앞집?
의문을 가지는 그 순간, 익숙한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띠디딕, 띡.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면 태일이 왔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상했다. 태일이 촬영 짐을 싸서 나간 지 겨우 3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돌아온 걸까?
일단 반길 준비를 해야지! 해인은 얼른 현관 쪽으로 뛰어갔다. 그의 귀가는 언제나 신 나는 일이었다.
“미야앙?”(벌써 온 거야?)
현관문이 열리며 훅, 하니 끼쳐오는, 태일이 아닌 자의 체취에 곧장 뒷걸음쳤다.
해인은 그나마 방문자가 시율이 아니라서 그 정도로만 도망치긴 했다.
“어디……. 아, 있네, 있어.”
남의 집 도어락을 열고 불쑥 집 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태일의 매니저 친구였다.
그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해인을 바라봤다. 마치 해인에게 용건이 있는 사람처럼. 고양이에게 웬 용건?
해인은 매니저를 똑바로 보며 슬금슬금 또다시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그보다 빠른 속도로 매니저가 다가왔다. 그리고 해인이 저와 친하다고 착각이라도 하는지 대뜸 안으려 드는 게 아닌가.
당연히 해인은 뱀처럼 그 손아귀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빠져나왔다.
고양이의 유연함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으왁, 뼈가 없나.”
“미약!”
“자, 잠깐. 이리 와라, 고양아. 응?”
이건 또 뭐야, 하는 미심쩍어하는 고양이의 시선에 매니저 녀석은 매우 난감해했다.
자신이 다가갈수록 해인은 뒷걸음질 쳤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해인은 영락없는 새침데기라, 태일에게만 개냥이였다. 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매니저 따위에게 순순히 꼬리 흔들쏘냐!
“얌마, 야옹이! 나 기억 안 나냐? 응? 이리 와보라니까.”
“…….”
“자, 개냥이 착하지? 어이! 얌마!”
도망만 치는 해인에게 매니저가 버럭! 소리쳤고 해인은 미련 없이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그래도 아는 낯이라 봐주고 있던 건데 큰소리를 내다니.
저놈 혹시 도둑일까? 아니면 나를 납치하려고 하나? 침대 밑에 숨은 해인은 그저 두 눈을 반짝이며 매니저를 감시했다.
허튼짓을 하려 들면 사납게 덤벼볼 작정이었다.
다행히 해인이 매니저를 침입자로 간주하기 전에, 태일과 통화를 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태일이 해인을 데려오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야, 태일아! 얼른 데려가야 하는데 네 고양이가 숨어서 안 나온다. 뭐? 이름? 불러봤지! 그랬더니 웬 똥개 보듯 쳐다보면서 도망가 버렸어. 그래! 역시 네가 직접 와야……. 응? 잠깐만. 드디어 나왔다.”
매니저는 어느새 기척도 없이 문지방 위에 앉아 있는 해인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변덕으로 다시 침대 밑에서 나온 걸까. 매니저는 아주 천천히 해인에게 접근을 시도했고, 해인은 이번엔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미야옹?”(나 데려오래?)
“……얌마, 이거 요물이다. 너랑 전화하니까 다시 튀어나왔어. 그래…… 잡아 갈게. 알았다니까! 살살 한다고! 끊어!”
“먀옹, 먕?”(왜, 어디 가는데?)
순순히 매니저의 손에 잡혀준 해인이 물었지만 그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매니저는 다만 어깨에 끼고 있던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로 넣으며 부랴부랴 캐리어를 찾았을 뿐이었다.
해인은 그 옆구리에 걸려 달랑달랑 잡혀 다녔다.
“캐리어가 분명 여기 어디 있댔는데?”
“먕먕?”(어디 가는 건데, 어디?)
매니저를 시킨 걸 보니 병원은 아닌 것 같고. 해인은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나름 귀엽고 깜찍하게 물어보았으나,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샤악!”(싫어!)
요괴 같은 비명에 매니저는 크게 당황했다.
분명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나름 얌전히 굴던 고양이가, 촬영장으로 데려와 캐리어에서 꺼내줄 때까지도 새침하니 있던 고양이가.
거의 30명이 넘는 스태프들을 보고도 스트레스는커녕 신경도 안 쓰이는지 태일에게 안겨 골골대던 고양이가, 하은이 다가오자 팔짝 뛰었으니 말이다.
“나…… 아무래도 얘한테 미움 받는 것 같아.”
오늘의 모델인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하은이 울상을 지었다.
태일이 ‘오늘 우리 같이 촬영할 거야.’ 하고 속삭이자 알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유순히 끄덕이며 영리해 보이던 것이 제게만 이를 드러내니 말이다.
“개냥아……!”
“미약미약미약!”(싫어싫어싫어!)
잘해보자 하고 내민 하은의 손등을 자칫 할퀼 뻔했기에 태일이 크게 나무랐지만, 그 태도는 더 사나워졌으면 사나워졌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왠지 저 고양이의 외침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너무 확고한 거절이었다.
“이러면 촬영이 안 되는데.”
“미안. 왜 날 미워하지?”
“……글쎄.”
“어쩌지, 태일아? 이제 와서 또 다른 고양이를 구할 수도 없잖아.”
본래 오늘 촬영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검은 고양이가가 갑자기 발정이 났다.
하지만 사진작가인 태일이 크게 당황하지 않은 것은, 자신에겐 영리한 고양이 개냥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예정되어 있었던 고양이보다 해인이 오늘 촬영의 모델로 더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고생시킬까 싶어 데려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한데 문제가 생겼고, 급하게 매니저에게 해인을 데려와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무리였나 봐.”
촬영장 분위기에 금세 적응하는 해인을 보며 안심했겄만,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하은을 본 순간부터는 해인은 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캬옥캬옥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촬영을 진행했다가는 모델인 하은이 피투성이가 될 것 같은 수준이었다.
태일은 아파오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결국 다시 구해야 하나. 하은이 너 스케줄 조정 안 되는 거야?”
“지금도 좀 일정이 빡빡해. 그리고 다음 주에 해외 로케도 있고.”
“……어쩐다. 그러면 가까운 펫숍에 연락해볼까? 누구 검은 고양이 키우는 친구 있는 사람 없어?”
온몸으로 격하게 하은에게 안기길 거부하던 해인은 태일이 심각하게 회의에 들어가자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졌다.
그를 은인이라고 하면서 막상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순간 이리 비싸게 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은이 싫은걸. 왠지 그냥 싫단 말이야.
볼을 부풀린 채 잠시 바닥을 긁던 해인은 결국 슬쩍, 하은의 발치로 다가가 섰다.
“전에 알던 코디 언니가 고양이 기른다고는 했는데. 회색 고양이라도 괜찮을까?”
“회색은 좀…….”
“꼭 검은 고양이여야만 해?”
“컨셉이 귀여운 마녀라서.”
아직 해인이 자신의 발밑에 서 있는 걸 모르는 하은은 태일과 매니저와 함께 머리를 싸매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해인은 이 키 크고 스타일 좋은 여자를 한참 올려다봤다.
하은은 보면 볼수록…… 예뻐서 못마땅했다.
다리는 길고 가늘며 허리는 잘록하고 가슴은 꽤 볼륨 있다.
짜리몽당한 제 본모습이 떠올라 또 못마땅해진 해인이지만 일은 해야 했기에 앞발을 들어 슬쩍 하은의 종아리를 눌렀다. 꾹.
네가 싫지만 태일의 얼굴을 봐서 한번 어울려주겠어, 꾹. 그러니 빨리 끝내, 꾹.
“어머…… 얘 나한테 꾹꾹이 해.”
“……그 고양이 무슨 변덕이래?”
매니저가 살다 살다 이런 변덕스러운 동물은 처음 본다는 듯 해괴하게 쳐다봤고 태일은 손가락을 들어 입을 가렸다.
“쉿, 다 알아들어. 그러니까 개냥이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촬영하자.”
태일만이 해인의 변덕에 대해 조금 이해했다. 자기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난감해하니 개냥이가 양보해주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은이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제 다리를 꾹꾹 눌러대는 해인을 안아 올렸다.
마지못해 안기면서도 해인은 그게 싫어 목을 뒤로 뺐다. 하은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다행히 촬영하는 내내 눈을 마주칠 일이 없었고, 해인은 태일이 시키는 대로 하은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거나, 빗자루 위에 예쁘게 꼬리를 들고 서 있었다.
하은의 둥근 어깨 위에 올라가 있을 때엔 좋은 향수 냄새에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 속을 킁킁대기도 했다.
“개냥아, 여기 보자.”
문득 태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인은 그가 손짓하는 대로 서고 움직이고 뒤돌아봤다. 그 모습에 스태프들이 모두 영리한 고양이라며 감탄했다.
이 촬영의 주인공은 어느 브랜드의 신상 블랙 미니 드레스가 분명했다. 몸에 딱 붙은 검은 원피스들은 대부분 섹시보다는, 지적이고 도도한 느낌이었다.
청순하고 지적인 마스크에 늘씬한 몸을 가진 하은에게 썩 어울리는 것이었다.
부러운 몸매일세. 해인은 키가 작고 통뼈인 자신이 싫진 않았지만, 여자의 솔직한 심리로는 하은처럼 길고 마른 몸매가 부러웠다.
“저기…… 태일아, 얘 은근히 발톱 세우는데.”
“어, 좀만 참아라.”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
태일은 차마 대꾸하지 못했고,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가 날 때마다 애써 웃는 하은과 심술 난 해인의 모습이 필름에 담겼다.
***
보통 시간을 잡아먹는 주원인인 동물 모델이 워낙에 탁월한 지능을 가진 덕에 촬영은 모델교체에도 불구하고 예정보다 빠르게 마무리됐다.
하은이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동안 매니저가 태일에게 다가왔다.
“태일아.”
“음?”
친구의 부름에 태일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목만 올려 대답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해인을 쓰다듬어주는 손길도 여전했다.
오늘 고마웠다는 뜻인지 해인의 귀 사이, 머리 위를 어르는 손길이 유난히 정성스러웠다.
하지만 시선만은 집요하게 오늘 촬영한 사진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볼래? 건질 게 꽤 많겠어.”
“뭐, 네가 어련히 잘 찍었겠지. 여배우들도 다 너랑 못 찍어서 안달 났는데.”
“과찬이네.”
“패션 화보를 너만큼 고급스럽게 찍기도 힘드니까…….”
태일은 과연 프로였고, 오늘의 결과물들은 까막눈인 해인이 보기에도 훌륭했다.
그의 실력 덕분인지, 그가 하은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인지 하은이 유독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할 말이 좀 있는데. 하은이 일로.”
매니저의 목소리가 제법 심각해서, 태일은 결국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어내야 했다.
“뭔데, 김기도.”
“……매니저라고 불러.”
자신의 이름을 썩 좋아하지 않는 기도가 호칭을 정정했고 태일은 작게 웃으며 기도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의자째로 몸을 돌린 그의 무릎에는 해인이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뭔데, 매니저?”
“……하은이 지금 사귀는 남자가, 자기랑 결혼하면 모델 그만두라고 했단다.”
“……아아, 들었어. 안 그래도 그 일로 상담해달라고 하더라.”
기도가 꽤나 비장하게 운을 뗐지만 태일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여 오히려 기도를 놀라게 했다.
어찌나 담담하게 말하는지 정말 개의치 않는 사람 같았다.
“얌마! 넌 아무렇지도 않냐?”
“내가 왜?”
“사내자식이 쟁취할 의지도 없냐!”
두둥!
그건 정말 귓가에 충격의 북 소리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해인은 쩍, 하니 입을 벌리며 커다란 동공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두 남자는 대화에 열중하느라 이 검은 고양이가 큰 충격을 받은 건 눈치채지 못했다.
어쩐지 그 여자가 싫더라니.
해인은 자신이 왠지 본능적으로 하은이 싫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태일이 하은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감인지 고양이의 본능인지가 그것을 일찌감치 알아챈 거다.
“쟁취라니. 우린 그냥 친군데?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너…… 은근히 거짓말 잘하는 건 알지만 나까지 속이려고 들진 마라. 친구인 건 맞지만 네 마음이 그게 아니잖아!”
“하지만.”
“하지만 뭐?!”
“내 마음이 어떻든 하은이가 원하는 건…… 친구인 나잖아. 15년지기 신태일. 그럼 그대로 있고 싶어. 내 역할은 그거야.”
기도는 이 친구가 참으로 답답한지 가슴을 쳤고 해인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태일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모니터를 봤다가 그곳에 하은이 웃고 있자 다시 시선은 내려 해인을 바라봤다.
빨려 들 것 같은 금색 눈동자에 위로라도 받는지 한참을 말이다.
그러다 문득 입술을 떼었다.
눈은 해인을 향하고 있었지만 물음은 다른 곳을 향했다. 기도에게 향하는 척 스스로에게.
“너무 오래 알아서인가. 남자로도 안 보더라고.”
“네가 너무 좋은 친구의 얼굴만 하니까 그렇지! 남자의 얼굴 없냐, 남자 얼굴!”
“글쎄. 난 원래 이런 얼굴인걸.”
사람 좋은 미소. 부드러운 시선. 눈 안에 욕망이나 욕심이라고는 없는 그런 한없이 좋은 사람.
태일의 얼굴은 늘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해인은 태일의 그런 다정한 얼굴이 좋았다.
“하은이 취향 모르냐? 남자다운 거잖아! 그런 쪽으로 노력을 좀 하든가!”
“난 평생 이런 놈이었어. 그런데 새삼 그러는 것도 웃기잖아? 그냥 내가 하은이 취향이 아닌 거지.”
“으이고, 답답아.”
“그리고 하은인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잖아. 어쩌면 결혼할 수도 있는 사이고.”
해인은 저라면 태일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텐데.
아니, 이미 지금의 그가 좋은데.
그는 자신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사람인데.
자신이라면 그렇게 씁쓸한 얼굴로 웃게 하지 않을 텐데.
***
새벽 3시, 달의 밝기가 가장 강한 그쯤 눈을 뜬 해인은 곤히 잠들어 있는 태일을 바라봤다.
물론 검은 고양이의 모습을 한 채였다.
달빛 속에서 해인은 새까맣다 못해 보랏빛으로 보이는 신비한 금안의 고양이였다. 소리 없이도 아름다운 짐승.
해인은 이제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 있는 태일이 익숙했다.
항상 상의를 탈의하고, 반누드로 맨등을 드러낸 채 엎드려 자고는 했다. 그렇게 자는 게 편한 모양이었다.
노상 함께 잠들다 보니 이제는 그 모습을 봐도 놀라지 않았다. 처음에는 낯부끄러워 도망가고는 했는데.
사진작가란 은근히 체력을 요하는 일이어서 태일은 벗으면 생각보다 남자다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뼈마디가 굵어 근육이 도드라지는 몸. 은근히 선이 굵은 남자의 육체. 바라보다 보면 저 아름다운 몸을 그리고 싶은 본능이 꿈틀댔다.
물론, 그것은 사람인 해인이 가진 화가로서의 충동이었다.
본래는 사람보다는 풍경이나 몽환적인 환상물을 전문으로 그리긴 했지만 말이다.
“…….”
촬영장에서의 일을 상기하며 해인은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뒷발로 뛰어 앞발로 바닥을 디뎠다.
해인은 한 걸음마다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소리 없었다.
성큼 한 발을 디딜 때마다 무럭무럭 커지더니 옷 방의 문지방을 넘을 무렵에는 이미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걷고 있었다.
시야는 훌쩍 높게 변했고 손은 사람의 것이었다. 전신에 잠시 쥐가 난 것 같은 까마득한 감각이 어렸으나 가시는 건 순식간이었다.
익숙하게 손을 뻗어 두꺼운 모직 셔츠를 하나 꺼내 걸치고는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태일의 휴대폰을 챙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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