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사면초가 고양이
해외 출장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태일은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해인을 잃어버린 뒤 가장 길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선잠이라 새벽쯤 깨어나고 말았다.
고작 한 달 같이 있었을 뿐인데 침대에 혼자 있으니 허전했다.
꿈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개냥이를 본 것 같았다. 먕먕거리며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하아…….”
미안함과 걱정스러움이 범벅되어 뭘 해도 개냥이 생각만 났다. 제가 문만 꼭 잠갔더라면.
비행기 안에 있는 동안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왔었지만 시차 때문에 바로 다시 걸지는 못했다.
태일은 아침이 밝자마자 전화를 걸어봤다.
혹시 개냥이를 보호하고 있다는 연락은 아닐까? 그런 희망을 품었다.
“……여보세요? 신태일이라고 합니다. 어젯밤에 전화를 주셨던데.”
[아~ 아! 네, 맞아요. 고양이 때문에.]
“네? 고양이요? 저희 개냥이를 데리고 계십니까?”
그의 정신을 확, 깨게 하는 단어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심박수가 저절로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흥분한 목소리가 나왔는데, 그게 화난 것으로 들렸는지 수화기 너머의 여자가 당황하며 대꾸했다.
[어머머? 아니요. 담당 수의사라는 분이 데려가셨는데요.]
“……누구요?”
[명함을 받았는데, 그러니까…… 강시율 선생님이시네요.]
“아아!”
[고양이랑도 친해 보이고, 사례금까지 대신 내주셔서……. 혹시 저희가 실수한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왜냐면 다른 부재중 전화가 그 수의사에게서 온 것이었으니까.
태일은 곧장 시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
시율의 첫마디는…… ‘살려줘’였다.
어젯밤 고양이를 보호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태일이 출장 중인 데다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어서 우선 제가 데려왔다고 시인했다.
그런데 이 문제의 고양이가 주인을 찾아 쉴 새 없이 울고 있으니, 얼른 데려가란다.
냐옹냐옹 밤새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는 울어대는 통에 한숨도 못 잤다며 시율은 대단히 투덜댔다.
[미안합니다. 귀국 날짜를 몰라서…….]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그보다 지금 개냥이 녀석이 단단히 화가 나서요. 손도 못 대게 하고 있어서 그러는데, 직접 데리러 와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당장 가겠습니다.”
개냥이가 집을 나갔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반쯤 정신이 나가 묻자 차근차근 벽보를 만들고, 반드시 사례금을 명시한 뒤 인터넷에도 글을 올리라고 알려준 시율이었다.
병원에도 포스터를 붙이게 해줬고 동물병원간의 네트워크로 해인을 찾아보겠다고 적극 나선 사람이었다. 꼭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위로도 해줬다.
그러니 해인을 먼저 데려가서 보호하고 있는 시율에게 태일은 일말의 불쾌함도 갖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어찌해야 할지,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태일은 답례할 선물을 사들고 서둘러 시율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시율을 마주 본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얼굴이…….”
예의 바른 인간의 전형인 태일이지만, 저도 모르게 손으로 시율의 얼굴을 가리키는 무례한 짓을 하고 말았다.
“심해 보입니까?”
“엄청…….”
시율은 갈등했다. 자신의 얼굴에 선명하게 그어진 이 손톱자국이 개냥이 짓이라고 말해도 될지 말이다.
하지만 고양이 짓이라고 하기엔 상처가 너무 컸다. 누가 봐도 사람이 낸 손자국이었다.
이마에서 시작해 코 위를 거쳐 뺨까지 사선으로 무지막지하게 그어져 있었다.
뺨을 맞아본 적은 있어도 얼굴에 이렇게 대놓고 손톱자국이 나기는 처음이었다. 뻔뻔함의 대명사인 시율도 이 모습은 좀 민망했다.
오늘이 휴무일이라 망정이지. 물론 이 상처가 하루 이틀 가지고 회복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쩌다 그렇게……?”
“뭐, 여자들이 다 그렇죠. 속을 알 수가 있어야죠.”
“아아…….”
“냥!”(주인!)
“어엇.”
열린 문틈으로 해인이 폴짝! 튀어나와 태일의 품에 냉큼 안겼다.
그러고는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쉬어버린 목으로 한참을 울어댔다. 태일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미양미양.
시율을 그 모양을 보며 배가 아파 죽을 맛이었다. 제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주제에 눈앞에서 순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해인은 태일의 품에 안긴 다음에야 시율을 돌아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당분간은 눈만 마주쳐도 이럴 것 같았다.
“히햐햐냥! 샤아냥!”(이 변태 새끼! 능글맞은 변태 새끼!)
어제의 원한은 목이 쉬도록 울어대고도 잊을 수 없었다.
그 격렬한 분노는, 착한 고양이 버전의 해인만 아는 태일에게는 아주 낯선 것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화가 난 겁니까? 전 이런 거 처음 보는데요.”
“며칠 밖에서 고생을 해서 그런가, 그. 냥. 예민하더군요. 집에 데려가서 안정시켜주시면 많이 나아질 겁니다.”
“목도 쉬었고…….”
“밤새 주인분을 많이 찾더라고요. 쉬지 않고 울어서 좀 고생했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집에선 전혀 안 그러는데…… 이 은혜를 어떻게…….”
“좋아서 한 건데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차나 한잔하고 가시죠?”
태일은 마침 가져온 것도 있고 해서 시율이 권하는 대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해인이 어서 집으로 가자고 버둥댔지만 말이다.
***
젊은 남자 둘은 의외의 부분에서 의기투합했다.
시율의 집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며 태일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진 분야에 꽤나 조예가 있으신 것 같네요. 이 작가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데…….”
“거의 본가에서 가져온 겁니다. 형 취미였는데…… 어느새 제가 물려받아서요.”
“그래도 이 정도면 멋진 취향인데요. 아, 직접 사진도 찍으십니까?”
“아니요. 저는 완성된 작품들을 보는 걸 좋아합니다. 그러고 보니 신태일 씨가 카메라맨…… 흐흠.”
시율은 커피를 가져오며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태일의 직업은 해인에게 들은 터라,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으면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태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했고. 잠시 집 안을 둘러보다가 식탁에 앉았다.
해인은 줄곧 그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천하의 몹쓸 곳이라는 양 바닥에 발을 대길 거부했다.
연신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우며 시율을 경계했다. 쉬어버린 목을 재차 울렸다.
“……크오오옹!”(……변태 자식!)
“화가 많이 났네요.”
“미움 받는 것도 의사의 일이려니 합니다.”
뻔뻔하고 고약한 인간 같으니!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변태 짓을 일삼아!
해인은 목을 울리며 기분 나쁜 꼬리로 찰싹찰싹 테이블을 쳤다. 시율은 그러거나 말거나 유유자적했다.
확실히 둘의 사이는 전부터 이랬다. 앙숙에 가깝다고 할까.
커피를 마시던 태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선생님. 이 녀석이 가출한 다음에 알게 된 건데. 그런 게 있다던데요? 애완동물 몸 안에 심는 칩……? 같은 거요. 위치추적 기능도 있고 인식표 기능도 한다던데, 맞습니까?”
순간 시율과 해인 사이의 기 싸움이 사그라들고 대신 해인이 일방적으로 살려달라는 눈을 했다.
둘의 관계는 항상 이랬다.
해인은 지금 처음으로 시율이 뻔뻔한 인간이라는 데 감사했다.
“아아, 조금 잘못 알고 계시네요. 그건 동물 등록제를 실행하기 위해 나라에서 추진하는 마이크로 칩인데, 내장형 외장형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도 위치 추적 기능 같은 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말 그대로 애완동물 인구가 늘면서 생긴 동물 등록제의 일환입니다.”
“아하.”
태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해인은 제 몸 안에 뭐가 심어질까 봐 공포에 떨었고. 애완동물로 살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었다.
“이런 작은 몸 안에 뭔가를 심는다는 자체가 사실 위험요소가 있습니다. 만약 그래도 하신다면 외장형이 낫겠습니다.”
“그런데 위치추적도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럼 대체 무슨 기능이 있는 겁니까?”
“주인 찾을 때 도움이 되긴 합니다. 어떤 칩이든 기능은 같거든요. 칩 안에 심어져 있는 그 동물의 고유번호를 검색하면 주인 연락처가 전산에 뜨는 겁니다.”
“그런 방식이군요.”
유기동물센터나, 동물병원에서만 칩 확인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시율은 그 효율성이 아직은 미비하다고 생각했다.
“네. 그러니까 차라리 번호가 적힌 목줄을 평소에 해주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이름표를 잘 안 달고 다니던데요. 그래서 저도 칩은 심어야 하나 했던 거고…….”
“개냥이처럼 작고 예민한 녀석은 오히려 칩을 몸속에 삼입하려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겁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목걸이가 낫습니다. 물론…… 좀…… 느슨하게 해서.”
그래, 사람으로 변해도 숨 막히지 않게 말이지. 시율과 해인은 이 순간 의견이 통했다.
***
태일이 갈 채비를 했다.
시율은 사실 해인을 보내기가 싫었다. 어떻게 손에 넣는 녀석인데. 너무 아쉬워서 태일까지 보내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고양이가 얼굴을 긁어놓더니 당장 태일을 불러주지 않으면 창문으로라도 나가버리겠다 협박을 했었다.
이 고층에서 뛰어내리겠다는 건 죽는다는 소리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무리 고양이라고 해도 17층에서 떨어지면 죽는데 말이다. 자기가 그렇게 싫은가?
결국 시율은 태일을 불러야만 했다.
“태일 씨, 한 가지 걱정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개냥이가 병원 호텔을 너무 싫어하는 것 같더군요. 보아하니 출장이 생각보다 잦으시던데.”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쏘냐. 시율은 태일에게 음흉한 제의를 했다. 해인으로서는 게거품을 물 일이지만.
“네…… 사실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다른 짐승이랑 같이 있다는 자체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가출한 게 호텔에서 데려온 직후였어요.”
태일이 짐짓 죄책감이 묻어나는 얼굴로 해인을 내려다봤다. 그에 열심히 그건 절대 아니라고 도리질 치는 해인이지만 그 뜻이 전달될 리 없었다.
말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말이다. 먼저 말하는 자가 승자다. 시율처럼.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입니다. 앞으로는 출장을 가게 되면 개냥이를 저희 집에 맡기는 건 어떻습니까?”
“예? 아뇨, 그럴 수는…….”
“저도 개냥이가 좋아서 그럽니다. 괜찮은 이야기 아닙니까? 어차피 개냥이를 굶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므미야아악!(이 제대로 미친놈이!)
‘어차피’라는 단어가 너무도 무섭게 들려 해인이 벌떡 일어나 경기했다. 교묘하게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말을 돌리는 시율은 천재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누가 보면 정말 엄청 위하는 줄 알겠다.
“……어째,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제 품에서 바들바들거리는 해인을 쓰다듬으며 태일이 의문을 표했다. 누가 봐도 싫어하는 기색이 분명했으나 시율은 천역덕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머리 위에 ‘나 수의사’라는 명함을 반짝이며. 그것이 사람을 홀렸다.
“하하! 고양이가 어떻게 사람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길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오늘따라 예민한 것뿐입니다.”
속지 마! 해인이 염원했으나 역시나 태일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렇군요.”
“그보단 잘 생각해보세요. 저도 혼자 사는지라 가끔 외롭습니다. 하지만 들인다면 개를 들이고 싶은데, 시간 여유가 썩 없다 보니.”
태일은 손해 볼 것 없는 시율의 제의에 조금씩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너무 감사한 제의라 선뜻 수락하기가…….”
“먀! 우먀먀먀!”(싫어! 싫어싫어싫어!)
“와아. 개냥이도 좋아 죽겠다네요. 태일 씨 서른이시죠? 난 서른둘이에요. 우리 형 동생 하면서 ‘자주’ 만납시다.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요.”
“……예에? 예, 아…… 예, 형…….”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시율은 수의사의 탈을 쓰고 있었다.
자고로 동물 좋아한다는 사람을 의심할 수는 없는 법.
“이 녀석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아무래도 길들이기가 힘드네요. 오래 보면 좀 나으려나.”
“개냥이 말입니까? 저는 전혀 모르겠던데…… 그래서 이름도 개냥이고.”
이를 악문 해인은 그저 태일이 저를 시율에게 맡길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저 악마의 품에 다시 떨어지지 않기만을.
제발 하느님, 하고 빌었다. 무교이면서.
***
아무리 애타게 빌어도 들어주는 이가 그럴 의향이 없다면 소원이고 나발이고 별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해인이 하느님에게 염원한 것이나.
지금 태일이 해인에게 바라는 그런 것.
해인이 바란 것은 다신 그 망할 놈을 만나지 않는 것이었고 태일이 바라는 것은 해인의 안전을 그 망할 놈에게 검사받는 일이었다.
그것들은 너무 상반되어 논할 가치도 없었다.
“개냥아? 잠깐만 나와보자, 응? 검진 가야지.”
사람 손이 닿기 힘든 책장 꼭대기로 올라가 버린 해인은 태일의 부름에 도통 묵묵부답이었다.
평소 그의 앞에서만은 착한 척하는 것이 특기였지만 지금은 마치 반항아와도 같았다. 그가 저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가 좋은 보호자인 건 인정하지만, 지금은 시율과 한패였으니까.
“걱정돼서 그래, 조금만 보자. 잠시면 돼!”
“…….”
“상처만 좀 보고 오자? 응?”
태일이 내려오라는 듯, 받아줄 테니 어서 안기라는 듯 손바닥을 뻗어왔지만, 해인은 그에 오히려 꾸물꾸물 좀 더 안쪽으로 기어들어가 책장 벽에 납작하니 붙어버렸다.
식빵처럼 누워서는 시선까지 돌려 보란 듯 무시했다.
“개냥이 너!”
태일이 짐짓 엄하게 소리쳤지만 해인은 여전히 못 들은 척 상처 부위를 할짝일 뿐이었다.
고양이답게 의뭉을 떨었다. 온몸으로 싫다 시위 중인 것이다.
애초에 그 개냥이라는 이름도 마음에 안 들었거니와 가출로 생긴 상처와, 혹여 밖에서 옮아왔을지 모를 질병에 대한 검사 따위 해인은 바라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필요도 없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온 지 만 이틀, 안정을 취하자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고 해인은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질병에 걸릴 염려가 전혀 없었다.
그런 해인에게 병원이란, 필요는 둘째치고 가장 멀리해야 할 곳이었다.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그러나 지금 해인이 기피하는 것은 정작 병원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시율을 피하고 싶었다.
녀석이 있는 한 그곳은 동물병원이 아니라 악마의 소굴이었다. 녀석을 생각하면 그 머리 위로 빨간 뿔 두 개가 함께 연상됐다.
손에는 번쩍이는 은빛 메스를 들고, 등 뒤로는 검고 뾰족한 꼬리를 감출락 말락 살랑이며 저를 해부하려 드는 딱 그런 모습.
그것이 해인이 가진 시율의 이미지였다. 웃을수록 무서운 사악한 악마.
“으오…….”(우으…….)
해인은 상상만으로 끔찍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천적을 연상하면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하듯 말이다. 또 녀석의 손에 들어갔다가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더 당할 일이라고는 이제 그야말로 해부밖에 남지 않은 거 같았다.
오싹함을 떨치려 발바닥을 열심히 낼름낼름 핥아보는 해인이다.
태일은 자신이 캐리어를 꺼낸 것이 문제라고 여긴 듯 슬쩍 그것을 구석으로 밀어 넣고는 상냥한 투로 해인을 꼬드겼다.
“자, 캐리어 치웠다. 병원 안 갈게, 내려와 보렴.”
“……먀옹.”(……절대.)
우쭈쭈, 하며 말하는 태일에게 콧방귀를 뀌어 보인 해인은 고개까지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태일은 애완동물이 엄청 똑똑하다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눈치가 이렇게 좋아서야 속일 수가 없지 않은가?
“……후.”
한참 만에야 드디어 포기했는지 태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침실로 들어갔다.
해인의 눈이 반짝였다. 해인이 요새로 선택한 높고 아슬아슬한 책장은 거실에 있는 것이었고 그 위에서는 거실과 부엌, 현관, 침실이 한눈에 보였다.
그곳에서 멀어지는 태일을 내려다보며 해인은 자신이 승리했음에 기분 좋게 목을 울렸다.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미 부르고 있었다.
“미웅, 미우웅, 먕먕.”
저가 뭐라고 울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고개를 까닥이며 흥얼거렸다.
승리다! 녀석을 보지 않아도 돼! 가늘어지는 눈과, 쫑긋거리는 두 귀와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가 썩 기분 좋은 모양새였다.
아무렴 이래야지, 내버려 두면 나을 텐데 뭣하러 돈 주고 그 변태 수의사를 만난단 말인가.
해인은 짐승들이 대체로 의사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물론 해인이 가진 거부감과 분노는 보통 짐승들의 것에 비해 좀 더 지능적인 것이었지만 말이다.
진짜 동물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아픔이나 굴욕을 준 의사에게 적개심을 가지는 것이고.
해인은 나름의 일목요연한 원한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입술로 검사당한 것 말고도 말이다.
1. 저를 짐승 취급한다.
2. 그러면서 가지고 싶어 한다.
3. 최종 목표는 아무래도 해부인 거 같다.
4. 그러면서도 선한 인간인 척하는 가장 위험한 족속이다.
5. 믿을 뻔했지만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개냥아! 고마워해야겠다. 너.”
“묭?”(엥?)
끝없이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강시율이 싫은 이유를 몇 가지를 꼽고 있던 해인은 다시 거실로 나오는 태일과 눈을 마주쳤다.
올려다보며 손에 든 휴대폰을 까닥이는 태일은 기뻐 보였다.
“방금 통화했는데, 형님이 직접 와주시겠대.”
“……먀아?”(……뭐?)
“오늘은 바쁘니 내일 저녁에 우리 집으로 외진 와주신단다. 널 정말 예뻐하시는 것 같아.”
태일의 그 해사한 웃음에 해인은 그만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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