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숙녀의 마음을 가진 고양이
시율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줄곧 신경 쓰이던 해인의 뒷발부터 살폈다.
해인은 조수석에 앉아 태평하게 발바닥을 핥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한순간 해인을 억세게 잡아 올리더니, 치킨 같은 뒷다리를 꾹 잡고 조몰락거렸다.
“먁!”(아파!)
그러더니 전혀 낫지 않은 상처를 보고는 마치 귀신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귀가 따끔할 정도였다.
“상처가 아주 그냥 다 부르텄네?! 죽고 싶냐, 이 무식한 고양아!”
“먁먁먁!”(잔소리하지 마!)
“너 이거 보통은 감염으로 골골댈 일이거든?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괴사돼서 뒷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므악!”(내 다리 놔!)
그가 갑자기 화를 내니 해인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물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이내 꼼짝 못 하고 굳어버렸다.
자꾸 소리치니까 욱했지만, 듣다 보니 전부 제 걱정이었으니까.
“다리뿐이냐?! 고양이 주제에 사람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아무나 저렇게 따라가면 안 된다고?! 그리고 가출을 왜 해, 가출을!”
“……끙.”
“나랑은 안 살아도 얌전히는 살아야 할 것 아니야, 이 멍청아! 머리 좋은 척은 다 하더니!”
차마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데 물어버릴 수가 없었다. 가운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당장 달려온 시율의 모습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잘못했다, 미안하다, 그 말은 하기 싫었다.
해인은 팩 하니 시율에게서 시선을 돌렸고, 시율은 계속 열을 내나 싶더니 트렁크로 가서 뭔가를 꺼내 왔다.
“다리 줘봐!”
차에 응급처치도구를 구비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소독약과 붕대를 꺼내 드는 시율은 무서운 의사 선생님 모드였다.
해인이 싫다며 버둥거렸지만 기어코 시율은 다친 뒷다리에 붕대까지 칭칭 감아버렸다.
하지만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해인의 몸을 이리저리 뒤집어 봤다.
분명 어딘가 더 다쳤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게 귀찮아 해인은 못마땅하게 앞발을 내밀었다.
“미양.”(여기도.)
슬쩍 내민 앞발은 털이 듬성듬성 빠져 있고 살이 드러난 자리에는 붉게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유기동물센터의 캐리어에서 탈출할 때 생긴 상처였다.
이어 해인은 등을 돌려 어깨 위의 상처도 핥았다. 돌을 맞은 자리였다.
보란 듯이 여기도 아프다는 행동이었다.
“너!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먕먕?”(가출?)
“말로 해!”
“미이~”(싫어~)
팩! 하니 고개를 돌리는 해인은 가은과의 일 이후로 말하는 게 조금 무서워졌다. 공포영화라도 본 것처럼 놀라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라 제가 마치 괴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반면 전혀 아무렇지 않은, 오히려 사람 말을 해보라던 시율이 새삼 신기해 보였다.
이 녀석은 괜찮은 건가?
해인은 슬쩍 눈동자만 굴려 자신의 앞발 치료와 잔소리에 열중하는 시율을 훔쳐봤다.
안 보는 척하고 보는 건 고양이의 특기였다.
“참 나, 기가 막혀서, 너 비도 맞았냐? 너 고양이나 개한테 폐렴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아? 골로 간다고, 골로! 아, 이상한 건 안 주워 먹었겠지? 하긴 먹을 필요가 없댔지.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식중독이나 굶어 죽을 걱정은 없으니까 말이야.”
“…….”
“내 말 듣고 있어?”
말하면서 시율이 고개를 번쩍 들었는데, 해인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관심 없다는 듯 말이다. 잔소리도 심하네, 그 양반.
해인은 속으로 툴툴대면서도 시율이 전처럼 불편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발바닥도 다 터졌잖아! 보니까 자립력이 하나도 없고만! 무슨 배짱으로 가출을 하냐, 가출을 너는!”
“흥!”
“집고양이가 길고양이 되면 열에 다섯은 죽는 거 몰라?!”
“하아암.”
해인은 듣기 싫어 하품하는 척을 했다. 그걸 잠자코 두고 볼 시율이 아니었지만.
그가 해인의 귀를 잡아당기며 윽박을 질렀다. 잔소리하는 의사 선생님이 따로 없다.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끄응.”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캭! 미약미약! 먀먁!”(……캭! 시끄러, 시끄러! 귀찮아 죽겠네!)
고양이한테 대꾸를 바라는 네가 이상한 거지! 해인은 시율이 계속 싫은 소리를 하자 대놓고 짜증스레 냥냥댔다.
그러자 시율은 눈썹을 실룩이며 이번엔 해인의 볼 살을 잡아 늘렸다.
고양이 말인데도 무슨 말인지 이해한 듯했다.
얼마 없는 볼 살을 수염과 함께 늘어뜨리는데, 위협용으로 드러냈던 어금니뿐만 아니라 훤히 잇몸까지 드러나 무섭긴커녕 우스워졌다.
“이~ 게! 기껏 찾으러 와줬더니 건~ 방~ 져!”
짐승 주제에 사람을 무시하니 그도 뿔이 난 것이다. ‘저는 사람, 해인은 고양이. 고로 내가 위!’라는 게 그의 쌈박한 이론이었다.
“으야우야오아옹!”(무어하느은그으야!)
물론 해인은 그 이론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나도 사람이거든!
해인이 발톱까지 세워가며 시율의 손을 긁어댔지만 사실 그는 짐승들에게 긁히고 물리는 데 익숙했다.
시율은 단단히 혼쭐을 낼 작정인지 소리쳤다. 도도한 병신미를 탑재한 이 고양이의 버릇을 잡고 싶은 모양이다.
“걱정을 끼쳤으면 사과부터 해야 될 것 아니야! 멋대로 가출하고 말이야! 말도 통하는 녀석이 그러면 되냐?!”
“우미양! 으으응…… 크악! 시! 끄! 러! 누가 찾으러 오랬어? 그리고 가출하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당장 이 손 놔!”
“너……! 지금 이 꼴을 하고는 그 말이 나오냐?! 아무리 짐승이지만 양심이 있어야지!”
“내 양심이 어때서 그런 모함을 하냥!”
해인은 시율이 제 뺨을 쭉쭉 늘려대자 참지 못하고 사람 말을 뱉어냈다.
냥냥거리는 고양이 말과 투덜대는 사람 말이 섞여 나오는 건 분명 재미있는 상황이지만, 일단 시율은 버릇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짐승에게 서열을 인식시키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시율은 해인의 등가죽을 잡아 올리며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호통쳤다. 저를 가르치려 한다는 사실에 해인은 분노했고.
“잘못했어, 안 했어! 네 주인이랑 내가 얼마나…….”
“바로 그 주인 때문에 가출한 거라고!”
“……뭐?”
“으이 씨!”
“대체 왜?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생각지 못한 가출 사유에 시율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어느새 해인의 뺨에서 손도 놓아버렸다.
해인은 얼얼한 두 뺨을 비비다가, 저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다.
“아먀먀, 아파라! 그야 내가 주인을…….”
“주인을?”
“…….”
“왜 또 말을 안 해?”
아차 싶어 해인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고양이가 자기 길러주는 주인 좋아한다는 한마디가 뭐 비밀이겠냐마는 그 뉘앙스가 문제였다.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것이었으니까. 그걸 말한들 이해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뭔데? 나 비밀 잘 지켜. 알잖아.”
“…….”
“가끔 도움도 되고.”
“그랬나……?”
“그래! 난 단지 네가 왜 가출했는지, 뭐가 힘들었는지 걱정되고 궁금해서 그래.”
시율은 머리가 좋은 인간이라 말솜씨도 탁월한 타입이었다.
그 속살거림에 해인은 그만 솔깃하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제가 만약 어딘가에 고민 상담을 한다면 그 상대는 시율밖에 없기도 했다.
“이거…… 비밀이다?”
“그럼, 그럼. 내가 어디 말하겠어.”
“정말 비밀이야?”
“알았다니까 그러네. 애초에 고양이한테 들은 이야기라고 어디 가서 말한들 나만 정신병원에 들어갈걸.”
그러게, 그것도 그러네! 해인은 털어놓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느라 끙끙댔다.
그러곤 얼마 못 가 이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을 시율에게라도 시원하게 말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있잖아…….”
“으흠.”
“듣고 또 놀리면 안 된다? 난 그냥 이게 사람인 네 입장에서 납득이 되나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뿐이라고. 알았지?”
“그래그래.”
뭐랄까, 여고에 다닐 때 친구에게 누굴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의 그 느낌이었다.
두근거림을 주체하지 못해 말하고 나면 이상하게 그 사람과 제가 무슨 사이라도 된 기분이 드니까.
그 사람 본인은 아니지만, 누군가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알고 있다는 건 묘하게 힘이 됐다.
“나 말이야, 주인이 좋아.”
“에, 원래 좋아하잖아.”
“바보야! 이성으로 말이야!”
“……암컷으로서?”
아, 암컷이라니! 해인은 질색했다. 하고 많은 단어 중에 암컷?!
“무례한 놈아! 여자로서지! 암컷이라니?! 난 숙녀라고!”
“……러브?”
“그래!”
“그거 놀라운걸.”
이 녀석 또 못 참고 피식 피식 웃고 있었다.
해인은 괜히 말했다는 생각에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고, 시율은 고양이의 그런 얼굴은 처음 봤는지 결국 대놓고 웃기 시작했다.
해인은 시율이 어디 가서 비밀을 이야기하진 않지만 대신 면전에 놓고 비웃는 타입이란 걸 뒤늦게 상기해야 했다.
“젠장…… 괜히 말했어!”
“푸하핫! 그래서 가출한 거야? 그게 이상해서?”
“정상은 아니잖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서 가출하셨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
사실 뭐, 시율의 말이 맥락은 같았다. 태일에 대한 마음이 대책 없이 커질까 봐 도망친 거니까. 해인은 아닌 척 시선을 돌렸지만 호락호락하게 속을 시율이 절대 아니었다.
“아아, 가출 사유가 그런 거였단 말이지. 고양이 주제 참…….”
“나 고양이 아니거든?!”
“그럼 니가 사람이냐?”
해인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시율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말도 하고 사람으로 변신도 할 수 있지만 일단 고정적인 이미지는 ‘사람은 아닌’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런 상대가 뭔가 터놓고 대화한다는 건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억울하면 말 좀 해봐. 네 정체가 대체 뭔지.”
“……흥.”
“외계인? 생체실험의 잔재? 아니면 구미호 같은 요괴? 난 마지막이 제일 그럴싸한 것 같단 말이지.”
시율은 정말 해인에 대한 모든 게 궁금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생명체가 있을 수 있는지 것부터가 의문이었다.
베일에 싸여 있는 정체를 어떻게든 벗겨보고 싶은데 남의 고양이라 지금껏 참아왔다.
지능이 높아 속내를 드러내면 도망갈까 봐 친분을 쌓으며 살살 달래기도 했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가출을 해 어렵사리 찾았더니 지금처럼 만신창이 상태가 아닌가.
“불리하면 모르는 척하고 말이야. 이봐 개냥이.”
“캭!! 그렇게 부르지 마!”
“개냥이 맞잖아? 아니면 뭐, 딱히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라도 있냐? 묘묘? 먀먀? 미미?”
“우이이……!”
해인은 약이 올라 바짝 털을 세웠지만 이게 시율의 노림수라는 걸 알았다.
저를 욱하게 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는 얄미운 수작 말이다.
이건 고차원적인 정보유도였다.
“어쭈, 말 안 해?”
“안 해!”
“뭐, 좋아. 아무튼 이 고생을 했으니 사람 품이 얼- 마나 안전한가는 새삼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개냥아.”
앞발에는 거즈를 붙이고 뒷발에는 붕대를 칭칭 감은 해인은 언뜻 보면 중상을 입은 고양이 같았다.
본래 해인은 성격이 무던한 편이었지만, 고양이가 된 뒤로는 나날이 단순화되고, 난폭해지고, 사나워지며, 예민 수치가 높아지고 있었다.
본인의 종족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환경까지 바뀌어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랄까. 이럴 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게 비정상이리라.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예쁜 원래 이름 있으면 말해봐. 불러줄 테니까.”
시율이 마치 유혹하듯 말했다. 해인은 처음 듣는 유혹적인 음성이었는데, 괜히 두근댔다. 이제 보니 이놈이 여자를 홀리는 놈이구나! 선수가 틀림없었다.
해인은 더욱 경계했다. 더 이상 정보를 내뱉었다가는 사신한테 그 회색공간으로 잡혀 갈지도 몰랐다. 하여간 시율 앞에서는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뭘 그리 경계하고 그래. 알았어! 안 물어볼게. 그보단 가출해본 소감이 어때? 보통은 이렇게 개고생하고 돌아온 애완동물의 배부터 채워주겠지만 너는 딱히, 먹고 싶은 건…… 없을 테고. 하고 싶은 거 있나? 샤워? 마사지? 드라이브라거나?”
“……하, 하고 싶은 거?”
“그래. 보통은 참치 캔이나 따주겠지만, 넌 다를 것 같아서.”
시율은 해인의 이름 대신에, 해인의 취향을 은근슬쩍 알아보기로 했다.
“뭐가 필요해? 뭐가 좋아?”
좋아하는 걸 알아야 길들일 텐데. 시율은 뭐든 들어주겠다는 듯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해인은 꽤나 시율에 대해 조심하고 있었지만, 시율 쪽이 훨씬 고단수였다.
“……그.”
“말해봐. 고생하고 돌아왔는데 뭘 못 해주겠어.”
너무도 유혹적인 문구였다. 해인은 맹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가 또 휘둘리고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하고 말이다.
사실 꼭 필요한 게 있긴 있었다.
해인은 한참 만에야 어렵사리 입을 뗐다.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가까스로.
“돈 좀 빌려줘…….”
꿍얼, 너무 작게 말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시율은 해인만큼 청력이 좋지 못했기에 되물었다.
“뭐라고?”
“……돈 좀 빌려달라고!”
“푸합!”
“우, 웃지 마! 난 진지하단 말이야! 강시율 너 왜 자꾸 웃고 그래!”
엄마에게 전화 한 통 편지 한 통 쓸래도 돈이 필요하고, 사람으로 변해서 옷이라도 한 장 사 입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은 무일푼 빈털터리였다.
사람일 때 가지고 있던 돈을 찾으려고 해도 또 약간의 돈은 필요했다.
해인은 그렇게 심각한 데 반해 시율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고양이 주제에 이런 인간적인 대사를 할 줄이야!
핸들에 이마를 박고는 얼마나 신나게 웃는지, 차가 흔들리고 클랙슨이 울릴 정도였다.
빠앙!
“크하핫?! 내가 살다 살다…… 크크큭, 고양이한테 돈 빌려달라는 소리를…… 흐히힉……!”
“니가, 니가 말해보라며!”
“아, 정말…… 웃겨 죽겠네. 그래! 얼마면 되냐? 천 원? 이천 원? 멸치 사먹게? 아니면 고등어 통조림? 크크큭!”
“이이익…… 됐어! 너한테 안 빌려! 관두라고냥!”
억울하지만 빌릴 곳도 시율뿐이었다. 시율도 그걸 알았다.
이 도도한 척하지만 어딘가 불쌍한 고양이가 의지할 데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정도는 말이다.
삐져서는 씩씩대는 고양이는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시율은 웃음을 참지 못한 채 해인의 머리를 토닥였다. 놀리는 건지 달래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안, 빌려줄게…… 빌려준다고……. 크큭, 정말로…… 미안미안, 안 웃을게 응?”
“지금 웃고 있잖아!”
“이제 안 웃을게, 정말이야. 대신 그 돈을 어디에 쓸 건지만 알려주라. 궁금해서 그래. 안 갚아도 되니까 말이나 해봐라. 돈 없는 냥이 씨.”
이 고양이는 과연 돈을 빌려서 뭘 하고 싶은 걸까. 그건 시율에게 꽤나 흥미로운 주제였다.
“갚…… 을 거지만…… 될 수 있는 한 빨리. 정말이야!”
사람이 되면 돈쯤이야 얼마든지 갚을 수 있다.
시율은 갚는다는 말을 그다지 믿지는 않지만 일단 웃으며 되물었다. 이것만은 인간여자들에게 묻듯 상냥하니.
“그래, 뭐가 갖고 싶은데?”
“…….”
“응? 말을 해야 알지.”
이걸 들으면 시율이 또 웃을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도 필요한 물건이었다.
“……옷.”
“옷? 고양이 옷?”
“아니! 사람 옷!”
“그게 가지고 싶어?”
빤히 부끄러워하는데 왜 계속 묻는지. 아, 그래서 더 이러는 걸 수도 있겠군. 고약한 녀석이니까.
해인은 시선을 외면한 채 볼을 부풀렸고 시율은 그저 웃었다.
연인에게 묻듯 무엇이 갖고 싶으냐 다정하게 질문을 건넸지만 설마 대답도 인간 여자들이 하는 그것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으니까.
하여간 이 고양이랑 있으면 매사 놀랄 일투성이였다. 모든 반응이 예상 밖이었으니까.
문득 해인의 인간모드를 떠올리며 시율은 뭘 입혀야 좋을지 궁리했다.
“옷 사줄 테니까, 입은 모습을 보여주기다?”
“……싫은데.”
“하여간 츤데레 녀석. 그럼 안 사준다.”
“알았어! 알았다고!”
어쩔 수 없이 해인은 타협했다.
***
마감을 코앞에 둔 어느 여성의류 매장.
20대 여성이 주 타깃인 브랜드로 전체적으로 분홍빛 혹은 누드톤의 살랑이는 시폰 소재 옷들이 많아 러블리한 이미지가 강하고, 매장 자체도 사랑스럽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남자들이라면 딱, 출입을 꺼리는 그런 여성스러운 곳.
올해 활약 중인 브랜드 모델이 영화로 대박을 터트리는 바람에 특히 손님이 늘어난 브랜드였다.
그러다 보니 연인의 손에 죽지 못해 끌려오는 남자들이 많았다.
저렇게 제집 들어오듯 신나서 혼자 들어오는 남자 손님은 처음이었다. 당당한 걸음 거리에 여유 있는 미소.
모델인가 생각할 정도로 잘생겼는데 슬리퍼를 신은 채 들어오는 수의사 차림의 남자에게 점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시율이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마감 전입니까?”
“……네, 아직.”
“잘됐네요.”
그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웃는 타입이었다. 그걸로 여자들을 흔드는 건 그의 특기였고.
실제로 그가 일하는 동물병원만 해도 그를 노리는 젊은 여자 손님이 많았다.
필요 이상으로 잘생긴 얼굴에, 지적인 말투에, 그럴싸한 직업에. 성인 남자 특유의 부드럽고 낮은 허스키 보이스.
점원은 정성을 다해 응대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선물하실 건가요?”
“음…… 뭐, 비슷합니다. 간단하게 원피스 쪽으로 보고 싶은데요.”
“그럼 이쪽입니다, 고객님. 최근 잘나는 건 이 라인으로 올 시즌 신상…….”
점원이 대략의 설명을 늘어놨지만 시율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어떤 게 어울리려나. 고심하는 얼굴이 꽤나 진지했다.
이상하게도 딱 한 번 본 해인의 사람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라 그런가.
놀랄 만큼 속눈썹이 풍부한 커다란 눈동자, 발그레한 입술. 사랑스러운 뺨. 온전히 드러난 부드러워 보이는 어깨, 쇄골…….
그는 스스로 원피스 한 벌을 골라냈다.
“이걸로.”
“아, 사이즈는 확인 안 해보셔도 될까요?”
“이거면 맞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 속옷도 있지 않습니까?”
“네, 취급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사이즈를 알아야 하는데요.”
“아마 80B? 대충 그 정도일 겁니다.”
그는 그때 본 걸 잊을 마음이 없었다. 해인이 알면 노발대발할 테지만 말이다.
속옷 사이즈까지 정확하게 아는 남자를 보며, 점원은 이 남자가 누구의 선물을 사러 왔는지 깨달았다.
“아하! 여자 친구분 걸 사러 오셨군요.”
“풉, 뭐라고요?”
“여자 친구분…….”
“살다 살다 그렇게 웃긴 말은 처음 듣네요.”
시율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얼굴은 정색을 하고 있었다.
점원은 제가 말실수를 했나 싶어 머쓱하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속옷 사이즈까지 알고 있다면 보통은 연인 사이였다.
“그런 거 아닙니다. 절대.”
시율은 묻지도 않았는데 거듭 부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양이랑 어떻게.”
“……아, 예.”
고양이 같은 타입의 여자 친구라는 걸까? 시율은 큰일 날 말이라도 들은 양 손사래까지 쳐 보였다.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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