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고양이, 가출하다
해인은 깨달았다.
자신이, 태일과 친한 이 하은이라는 여자를, 같은 여자로서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가 태일을 태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가 그녀의 예쁜 이름을 익숙하고 친밀하게 부르는 것이 지독히도 싫었다.
“하은아.”
“응? 왜, 태일아.”
“전에 말한 제주도 촬영 말이야…….”
자신은 개냥인데. 그가 쓰다듬어주고 있다고 해도 그저 고양이일 뿐이었다.
반면 하은은 어떤가.
항상 눈웃음이 매달린 듯한 순한 눈매에 인형 같은 속눈썹, 아기 같은 피부, 복숭아 빛 뺨과 입술, 어깨 너머로 등까지 찰랑거리는 풍성하고 탐스러운 연갈색 머리카락.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아, 미스 세원대 특집 말하는 거야?”
“그래, 그거. 다른 대학 출신들도 조인할 것 같아. 미스 세원대에서, 미스 명문대 출신 특집이 되어버려서. 뭐랄까, 거의 추억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랄까? 잡지사에서 기획을 크게 만드는 모양이야.”
“정말?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캐스팅이 다 되면 보여줄게.”
“기대된다.”
심지어 대화를 들어보니 그녀는 명문인 세원대를 나왔고, 그중에서도 대표 미인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해인이 보기에도 하은은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해인으로서는 새까만 고양이일 뿐인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사랑이 이어질 가망 없다는 걸 깨닫게 되다니. 이건 너무도 잔인한 일이었다.
힘들 때 상냥하게 보듬어준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면.
이유 없이 그 곁에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건 얼마나 흉측한 감정인가.
화끈,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고양이 형태라 밖으로 내보이진 않았다.
“개냥아?”
황급히 태일의 품에서 빠져나온 해인은 침대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러고는 두 앞발 사이에 얼굴을 푹, 하니 묻고는 자신을 원망했다.
어쩌자고 이런 꼴로 사랑에 빠진 걸까.
그것도 자신을 애완고양이 삼아 보살펴주는 남자에게,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냥아? 개냥아?”
태일이 침실로 쫓아 들어왔다.
자꾸만 이상하게 구는 해인이 걱정스러운지 침대 아래로 몸을 숙이고 들여다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해인은 손이 닿지 않을 만큼 깊숙이 숨어들 뿐이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깨닫고 나니 그를 보기가 창피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지난 한 달간 태일과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벌거벗은 몸으로 끌어 안겨 잠들고, 뺨에 뺨을 비비고, 턱 아래를 만져지고, 키스하고. 그것들이 즐거웠던 이유를 깨닫는 순간의 아찔함이라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해인은 계속 구석으로 웅크리며 벽을 팠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답 받을 수 없는 마음일 게 뻔한데, 왜 싹트고 만 걸까. 그저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될 뿐이었다.
***
술자리가 파하고 모두가 돌아간 새벽.
그는 다시 해인을 달래고 있었다. 왜 저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제 고양이를 목이 칼칼해지도록 불렀다.
“개냥아? 왜 그러고 있어.”
“…….”
“나와 보자. 응? 모르는 사람이 많이 와서 그래?”
저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는 것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제 속이 너무 엉망이라 심통을 부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해인이었다.
“아, 어디 아픈가.”
그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지금 자신이 우울한 이유가, 자신이 고양이이기 때문이라고.
난 당신이 좋은데. 당신은 사람이고, 난 지금 고양이라서 화가 난다고.
이게 다 사신 때문이야.
“먕?”
어느 순간 용케도 그의 손이 해인이 있는 침대 바닥 구석까지 닿았다.
그의 손이 꼬리에 닿자 해인은 꼬리를 번쩍, 들었고 그의 손이 뒷다리에 닿자 더욱 아등바등 안쪽으로 파고들어갔다. 지금은 그의 손에 닿고 싶지 않았다.
고양이로 안기는 게 지금은 아주 싫었다.
하지만 숨을 곳은 한정되어 있었고, 길고 늘씬한 태일의 손은 금세 해인을 잡아챘다. 말랑한 아랫배를 감싸 올리며 그가 침대 아래에서 억지로 해인을 꺼내 들었다.
“발이 아파서 그래? 발 좀 보……. 윽.”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손에 딸려 나온 해인이 조금은 성난 손짓으로 태일의 턱을 밀어냈다.
그래, 정말 그저 밀어내려고 했을 뿐인데 잔뜩 힘을 준 해인의 앞발은 발톱을 길게 빼고 있었고.
그것을 정확히 태일의 왼쪽 뺨을 날카롭게 그어냈다.
“니야앙! 먁?”(이거 놔요! 아앗?)
“아야…….”
그의 왼 뺨에 세 줄기 발톱자국이 그어졌다. 그중 가운데 것은 꽤나 깊이 긁힌 듯, 피가 뚝뚝 떨어졌다.
태일이 제 손을 들어 뺨을 쥐기는 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그은 것인데 해인이 못 봤을 리 없었다.
예민한 해인의 후각에 잡힌 비릿한 피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키워준 은혜에 보답은 하지 못할망정 제 손으로 상처를 내다니. 화들짝 놀란 해인이 안타까운 소리로 울었다.
“미, 미이이……. 이야오옹…….”(미,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응? 아아……. 괜찮아…….”
“미야아앙……. 이야옹…….”(미안해요……. 흐이잉…….)
해인은 정말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제가 처한 모든 상황에 화가 나서 투정을 부렸을 뿐이었다.
역시 고양이 몸은 싫었다. 그의 얼굴에 상처나 내고.
“놀랐구나……. 괜찮아.”
그는 도리어 해인을 달래주었다.
지금 자기가 남 걱정할 땐가? 그것도 배은망덕하게 주인 할퀴는 고양이 따위를? 그의 살가운 토닥임에 해인은 뚝뚝 눈물을 흘려버렸다.
제 손이 미웠다. 날카로운 고양이 발 따위, 왜 짐승 따위가 되어서야 그를 만났을까? 사람이었다면 좋았을걸.
하지만 그랬다면 그의 상냥함을 알지 못했을 거다. 그를 만나지도 못했을 거다.
몰랐으면 싶기에는 그가 너무도 좋은 사람이라 해인은 그저 눈물이 났다.
***
새벽 무렵, 오늘따라 안기지 않고 도망만 다니는 해인을 쫓다 결국 피곤에 지쳐 잠든 태일은 알지 못했다.
끼이익.
제 방문이 열리고, 낯선 침입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태일의 침대 위로 누군가의 하얀 무릎이 닿았다. 그 무릎은 조심스레 태일의 옆에 앉았다.
그 무릎의 주인은 사람으로 변한 해인이었다.
자신이 그은 태일의 뺨이 신경 쓰여 그가 잠들자마자 집 안을 뒤집어 약 몇 가지를 주워 온 참이었다.
핏물만 닦은 채 누운 터라 벌써 그의 상처 위로는 살짝 딱지가 앉아 있었다.
아무리 남자라지만 이렇게 무심해도 되는 걸까? 그래도 얼굴인데.
해인은 투덜거리면서도 조심스레 그의 뺨에 약을 발랐다.
“……미안해요.”
작게 사과도 해봤지만 그래봤자 몰래 하는 행동에, 몰래 하는 말 이상은 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에게 직접 사과할 수도, 난 당신이 좋아졌다고, 아주 많이 좋아져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자신은 고양이니까. 그에게는 개냥이일 뿐이니까.
되새길수록 슬픈 현실이었다.
자신도 하은처럼 태일의 앞에 사람으로 서고 싶었다. 사람으로 말하면서, 그와 사람으로 친밀해지고 싶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해인은 그래도 이 순간 그의 뺨에 약을 발라줄 수 있는 열 손가락을 가진 것에 만족했다.
인간의 몸을 할 수 있는 건 한 달에 고작 하루꼴인 아주 귀한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쓰겠는가.
“……!”
그때였다. 태일이 살며시 눈을 떴다. 해인의 손길을 느낀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고도 보드라운 손끝은 잠에서 사람을 깨운다기보다는, 부드럽게 끌고 나왔다.
이 간지러운 느낌의 정체를 확인하라고 말이다.
눈을 천천히 뜨기는 했지만 해인 쪽을 정통으로 보고 있던 데다가, ‘눈 깜빡할 새도 없이’라는 말처럼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인은 약을 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부딪쳐 당혹감에 떨렸다.
“당신…… 뭡니까?”
해인은 고양이로 변신하기에는 늦었음을 깨닫고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태일 또한 태연하지는 못했다.
눈을 뜨다 말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하긴, 자다가 웬 손길에 눈을 떠보니 바로 앞에 처음 보는 여자가, 그것도 자신의 티셔츠를 걸친 여자가 걱정스러운 듯 눈물 맺힌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제정신이긴 힘들지.
몇 차례 눈을 깜빡여봤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얼핏 꿈인가 싶었다.
달빛에 반사되기라도 하는지 뽀얀 몸에 연한 갈색 눈망울을 가진 작은 몸집의 여자는 그를 보며 떨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잠이 덜 깬 그의 얼떨떨한 물음에 해인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댁의 고양이라고 해야 할까, 주거 침입한 노출증 환자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말하지?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이 모양이람?
한차례 크게 당황한 해인이지만 이런 상황이 두 번째인 터라 나름의 위장술을 발휘했다.
입술을 꾹, 하니 물고는 냅다 그의 얼굴에 시트를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그사이에 냉큼 침대 밑으로 내려가 고양이의 몸으로 돌아갔다.
마침 술과 잠과, 피로에 취한 그가 환상쯤으로 치부해주길 바랐다.
“이게 무슨 짓……. 어라?”
자신의 얼굴을 갑작스레 뒤덮은 시트를 내린 태일은, 침대 위에 아무도 없이 휑한 것에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가 거실로 나가봤다. 하지만 집 안에는 아무도 없고 작은방과 화장실도 가봤지만 누가 숨을 곳은 없었다.
베란다도 잠겨 있었고 누가 나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귀신인가? 하지만 그렇기엔 너무 생생하잖아.
그는 여전히 한 손에 시트를 말아 쥔 채 거실 한가운데 서서는 자신의 이마를 눌렀다. 그렇지 않아도 숙취로 머리도 띵한데 갑작스레 몸을 움직이자니 욱신거림이 한결 심해지기만 했다.
헛것을 봤나? 꿈결에? 그는 순식간에 지나간 일에 대해선 다행히 해인의 바람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 외에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뭐야 대체?”
그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자신의 얼굴에 끈적하게 남은 약기운이 이상했다. 술김에 바르고 잤던가? 그는 의심과 납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는 적당히 술김에 치료한 모양이라고 납득하며 욱신거리는 머리를 쥐고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내가 술을 너무 먹은 거야, 그리고 이번 로케가 너무 피곤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올라앉은 침대 위가 문득 외롭게 느껴지는 건 그런 환상을 봤기 때문이겠지.
태일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개냥아.”
“……야옹?”
그의 부름에 조마조마하니 심장을 졸이고 있던 해인이 슬쩍 침대 밑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이리오라는 손짓에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없는 척보다는 이게 나을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이니까.
그는 해인의 겨드랑이 아래 손을 넣어 따듯하고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동자를 마주 봤다.
반짝이는 금색.
색은 다르지만. 방금 본 여자와 어딘가 닮은 눈동자였다.
“꼭 이런 눈이었는데?”
“미야앙?”
“너 때문에…… 꾼 것 같다?”
꿈이라고 치부하는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하긴, 이게 보통의 반응이었다.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한다고는 어지간해서는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
지금 제 손등을 핥는 고양이의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 해인은 그대로 그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태일이 출근한 사이였다. 문틈을 만들어두고 나왔으니 그는 자신이 도어락 문을 잘못 닫은 줄로만 알 거다.
애초에 탈출할 마음만 먹는다면 그건 하등 어렵지 않았다.
해인은 처음부터 이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무 오래 미적거렸다. 잠시만 신세 진다던 게 어느덧 한 달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당연하게 그의 애완고양이로 살 궁리를 하다니.
위험했다. 자신이 보통 고양이가 아닌데 보통으로 살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태일이 자신을 찾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한번 모습을 들킨 데다가 어느 순간 본질을 달리한 제 마음을 의식해버린 순간부터 모든 게 무리였다.
“엄마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계단으로 내려가던 해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몇몇과는 마주쳐야 했다. 그들은 아파트 비상계단에 웬 고양이냐며 경악했고, 해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유유히 탈출했다.
그렇게 험한 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건, 아직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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