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어장관리 하는 고양이
해인은 생각했다. 역시 찔리게 둘걸!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후회했으리라.
“하악?!”
그것은 분명 해인이 아닌 시율이 낸 소리였다.
인간 자체가 좀 의뭉스럽고 능글능글한 타입인 시율이었지만 이것만은 경박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했다?!
놀란 입에서 나오는 것은 어, 어! 이런 말뿐으로 시율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몸에 중심을 잃었다.
정확히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 바르작대는 페르시안에게 밀려 살짝 뒤로 기우뚱, 한 것이다.
해인이 저를 받치고 있는 뒤쪽으로.
그리고 180센티 이상의 장신인 그를 지탱하는 것은 해인에게 아무래도 무리였다. 둘은 머리 하나 보다 더 키 차이가 났다.
“아얏!”
시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해인은 거의 넘어질 뻔했다.
진찰대를 겨우 붙잡았지만 대신 유리 조각을 살짝 밟고 말았다.
아픔에 눈을 질끈 감으며 시율을 노려봤다.
“대체 이게.”
“……정신 차려!”
답지 않게 얼이 빠진 시율에게 욱해서 소리치긴 했지만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알았다.
아무렴 ‘말하는 고양이’보다는 ‘사람으로 변하는 고양이’가 훨씬 더 충격적일 테니까. 둘은 비할 바가 못 됐다.
사람으로 변해가면서까지 그를 구한 해인이 얻은 거라고는 유리조각에 발이 크게 베이는 상처였다.
“너…….”
시율은 그 자리에서 굳어 선 채 해인을 바라봤다.
개냥이가 아닌 해인 말이다.
해인의 목소리나, 태도와 눈동자로 그는 누가 알려줄 것도 없이 둘이 동일존재임을 깨달았다.
믿을 수 없지만, 이 사람과 그 고양이가.
“……맙, 소사…….”
해인은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이 수의사 녀석이 피를 보는 게 자신이 이만한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일이었던가?
눈앞에서 사람이 다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서 반사적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해인은 크게 후회에 중이었다.
하나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하고 말리라.
그새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뭐야, 너…….”
“……뭐긴 뭐야.”
지금 시율이 인지한 것은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회색빛 진찰실 한가운데 선 이질적일 만큼 몸이 새하얀 여자.
작은 몸집에 유난히 반짝이는 눈동자. 어깨를 덮고 내려와 가슴을 살짝 가리는 새까만 머리칼과…….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맨가슴.
시율은 얼마나 놀랐는지 해인이 자신 대신 유리를 밟고 다친 거나, 그렇게라도 막아서지 않았다면 자신이 더 크게 다쳤을 거라는 걸 아직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놀라 경직됐던 그의 표정이 이내 살짝 풀어졌다.
그건 난감함과 약간의 화로 시율과 마차가지로 굳어 있던 해인이 발꿈치를 들며 고통을 호소했을 때였다.
“아파…….”
피가 흐르는 발을 살짝 들어 올리며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해인은 한 가지 더 후회할 것을 직감했다.
놀라고 경악한 시율이 표정이 이내 소름 끼친다는 듯 변하거나, 공포에 물들거나 하는 걸 상상해버린 거다.
아아, 그것도 당연하지. 자신이라도 눈 앞에서 짐승이 사람으로 변하면 끔찍한 기분이 될 거다.
무섭고 소름 끼치고 괴물을 본 듯 그렇게.
아니, 괴물은 본 거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해버렸다.
“너 개냥이 맞지?”
그런데, 얼떨떨한 물음과 함께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천 자락이 느껴졌다.
시율이 뒤늦게 자신의 하늘색 가운을 벗어 어깨에 둘러준 것이다. 해인은 그건 받아 입으면서도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개냥이라고 부르지 마!”
“……개냥이 맞네.”
“개냥, 개냥 하지 말라니까?!”
해인이 기겁을 했지만 시율의 관심사는 이제 피가 배어나오는 해인의 발바닥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무릎 꿇으며 해인의 발부터 살피려 했다.
종아리를 들어 올리려고 해서, 해인은 가운을 여며 입다 말고 몸을 굳혔다.
“그보다 좀 보자.”
알몸에 가운 하나 입었을 뿐인데, 다리를 들어 올리면…… 해인은 놀라 시율을 걷어차다 시피 했다.
“이 변태야!”
“얌마, 봐야 알지. 피 나잖아.”
“끄악!”
사과를 바란 것도 감사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반응은 뭐란 말인가!
수치심에 바들거리는 알몸의 여자를 두고 발바닥이나 보자고? 시율의 태도는 사람보다는 그냥 짐승 달래는 듯한 것이었다.
대뜸 종아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팬티도 안 입었는데.
“싫어!”
“다쳤잖아!”
짐승을 진료하면서 줄곧 취하던 태도를 지금 해인에게 하고 있다.
이건 명백히 의사로서의 반응이었다.
이 둘의 머릿속 차이라면 해인은 ‘사람이’ 고양이가 된 것이고, 시율의 머릿속에서는 ‘고양이가’ 사람이 된 것이다.
하여튼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게 시율의 관점이었다.
누드라고 설레기에는 그의 머릿속에서 개냥이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했다.
건방지고 새까만, 말하는 고양이.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는 신기한 녀석!
똑똑.
“선생님? 혼자 힘드시면 도와드릴까요?”
“아! 아니요. 지금은…….”
인기척에 놀란 시율이 잠시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뒤를 한 번 돌아본 그사이, 해인은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니까 검은 고양이로 다시 순식간에.
그가 느낀 거라고는 손안의 발이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
시율이 목격한 것은 하늘색 가운을 뒤집어쓰고 손등을 짜증스레 핥으며 저를 노려보고 있는 개냥이었다.
마치 방금 본 여자가 환상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 병실 안에 따로 덧붙인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검은 머리에 하얀 여자.
그것을 떠올리는데 해인이 표독하니 소리쳤다.
사나운 고양이 얼굴로 말이다.
“은혜는 갚으라고!”
“뭐…….”
“당연하지만 조금 전 그건 비밀이야! 알겠어?!”
이제는 오히려 큰 소리였다. 시율은 기가 막혀 이마를 쓸어 넘겼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해인이 뒤집어쓰고 있던 커다란 가운에서 빠져나가 진료대 위로 훌쩍, 뛰어오른 다음이었다.
홀린 듯 자신의 가운을 바닥에서 주워 든 시율은 거기에 피가 묻은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바닥에 흐트러진 유리조각과 핏자국, 찬장 위에 올라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경계 중인 페르시안 고양이를 차례차례 돌아봤다.
시율은 자신을 중심으로 진료실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은 혼란에 빠졌다.
아주 잠시, 그의 뇌는 순간 과부하가 걸린 듯 생각을 정지했다. 정리가 되지 앉아 일시정지 한 것이다.
“흥!”
저를 보며 콧방귀를 뀌는 해인을 보고서야 그는 다시 머리가 돌아가는 걸 느꼈다.
역시 방금 본 건 헛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해인은 피가 흐르는 뒷발바닥을 열심히 핥고 있었다.
아까 시율이 몰랑몰랑한 종아리를 들어 올려 상처를 보려 했던 여자와 같은 부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자신이 미친 것 같지는 않으니…… 저 고양이가 그 여자였다.
그는 여전히 혼란을 정리하지 못했지만 신경 쓰이는 해인의 뒷발부터 치료하기로 했다.
천천히 다가가 고양이의 작은 뒷발을 쓰다듬으며 두 단어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리고 결국 둘 다 말하기로 했다.
“미안, 고맙다.”
“…….”
고개 돌린 해인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지만 말이다.
해인은 그대로 태일이 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율 역시 질문을 쏟아낼 만도 한데 머릿속이 어지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납득할 시간이 필요했다.
***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병원에 도착한 태일은 촬영장에서 곧장 온 듯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크게 반기는 해인을 보고 보람을 느끼는 듯했다.
“저기…… 신태일 씨?”
“네?”
시율의 부름에 해인과 태일이 동시에 시율을 돌아봤다.
품에 안긴 해인은 유달리 싸늘한 시선이다.
입조심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내오며 이를 살짝 드러내기까지 했다.
시율은 태일이 자신만큼이나 해인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았다.
왜냐면 해인은 그에게 그냥 평범한 고양이고 싶어 했으니까.
지금처럼 태일의 품에 안겨서 골골대는 게 행복한 모양이었으니까. 시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보다 개냥이 다리는 죄송합니다. 제 관리 소홀입니다. 호텔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신경써주시다가 그런 건데…… 그럴 수도 있죠.”
“정말…… 죄송합니다.”
태일은 시율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다고 느꼈다.
***
기껏 집으로 돌아왔지만 해인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러니, 개냥아?”
그가 걱정스레 묻는데도 해인은 토라져서 고개만 팩 하니 돌렸다.
평소에는 냥냥, 잘도 대답하지만 오늘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왜냐면 일주일 만에 그와 집으로 돌아왔는데…… 단둘이 아니었으니까.
거실을 마음껏 뒹굴면서 둘이 그렇고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름을 그따위로 지어놨으니 나 같아도 그러겠다.”
“어머, 왜? 나는 귀여운데, 개냥이.”
그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함인지 술을 바리바리 싸든 두 명이 찾아온 것이다.
예의 그 안경잡이 매니저 친구와, 너무 예뻐서 그게 아니꼬운 여자 하나.
저 안경잡이 친구는 원래 싫었고, 처음 보는 여자는 뭔가 싫었다.
달짝지근한 향수 냄새를 은근하게 풍기면서 계속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자연스레 잘 빠진 목덜미를 보여주는 게, 그냥 비호감이었다.
일단 자신의 영역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 자체가 그냥 불만이었다.
시끄럽고 불편하고 거슬린다.
해인은 점차 고양이화 되어가는지 갈수록 타인에게 예민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 말고는 제 속이 이렇게 부글대는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하나 여긴 태일의 집이었다. 양심이 있어서 대놓고 내색은 못하고 시위하듯 꼬리만 탁탁 거칠게 쳐댔다.
“고양이 주제에 기분 안 좋아 보여.”
“야, 고양이도 감정이 있어.”
“아무래도 호텔에 있던 게 스트레스였나 봐.”
아니, 그냥 저 여자의 향수 냄새가 싫었다. 해인이 괜스레 코를 비비적거렸다.
뾰로통하게 세 사람이 거실에서 술판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대충 들어보니 셋은 학생 시절부터 이렇게 뭉쳐 다닌 모양으로, 아주 거리낄 것 없이 친해 보였다.
마음에 안 들어.
해인은 또 탁탁탁, 불만의 표시로 꼬리를 휘둘러댔다.
“이봐 야옹이. 이거 먹어봐. 우쭈쭈…….”
관심을 끌어보려는 모양인지 그런 해인에게 안경잡이 친구가 캔 하나를 따서 내밀었다.
짐승 비위를 맞추는 대는 먹을 게 무조건 최고라고 여기는 모양인데, 해인은 상종도 하지 않았다.
흥! 하고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여자 쪽이 귀찮게 굴었다.
“냐옹이 이리 온, 우쭈쭈.”
그 목소리가 어찌나 예쁘고 맑고 청명한지.
해인은 저를 유혹하는 여자의 부름에 땅을 파는 시늉을 하고는 소파 헤드 위로 훽! 도망쳐 버렸다.
너 싫어!
“와…… 추, 충격. 저거 고양이가 똥 덮을 때 하는 짓 아니니?”
“난 몰라. 안 길러봐서.”
“……네 향수 냄새가 싫어서 그런가 보다.”
여자는 저를 싫어하는 짐승은 처음이라며, 꽤나 충격 받은 모양이었다.
상처받은 시늉을 하며 귀엽게 흑흑대 보이더니, 하필이면 태일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게 아닌가.
둘이 상당한 친분이 있는 건 알겠는데, 그건 알겠는데! 둘이 붙는 건 싫었다.
여자와 남자니까!
해인은 곧장 달려가서 태일에게 기댄 여자의 허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굳이 그 사이를 차지하고는 술 냄새와 향수 냄새에도 꿋꿋이 버텼다.
“고양이도 질투하냐?”
“……그런 듯?”
두 친구는 어이없어했지만, 태일은 흐뭇해 보였다.
해인은 태일이 너무너무 좋았다. 그가 자신만 예뻐해줬으면 좋겠고, 자신만 봐라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쓰다듬어 달라는 뜻으로 그의 팔꿈치에 이마를 비볐다.
그가 만져주자 비로서 만족스러운 입 모양으로 가릉가릉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그건 그냥 절로 목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그 고양이 사람 가리네.”
“신기하다! 얘는 태일이 네가 정말 좋은가 봐.”
그 순간 해인은 문득, 자신이 그에게 꽤나 엄청난 독점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좀 이상하지 않나? 뭘까, 이건?
애완고양이로서 주인에게 품는 소유욕이라고 하기엔…… 자신은 사실 사람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의 관심을 받고 싶고, 그가 저만 바라봐줬으면 싶은 이 감정은 뭘까.
해인은 고양이로서의 자신과 사람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정체성에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고양이 이전에, 사람이 마음, 아니! 여자의 마음으로도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네가 나를 좋아해서, 나도 기쁘다.”
해인은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며 그를 올려다봤지만 그가 너무도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저를 향해 웃는 순간,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태일을 좋아한다는 걸 말이다.
고양이의 몸을 가진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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