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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3화 (3/114)

3화. 주인 생긴 고양이

옥상에 홀로 남은 해인이 고양이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꿈을 그리듯 생각하거나, 잠드는 것이 다였다.

다행히도 잠은 순순히 그녀의 생각대로 찾아와주었다. 고양이는 잠이 많다더니, 그 덕인가 보다.

매일 여러 소리들이 해인을 괴롭혔지만 해인은 꿋꿋이 무시하고 눈을 뜨지 않았다.

혹여 사람들의 눈에 띄어 쫓겨날까 조마조마했기에 깊숙한 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하루 종일 잠을 청했다.

그러다가 하늘이 어두운 색을 띠기 시작하면 일광욕, 아니 월광욕을 하고는 했다.

달빛 아래서 뒹굴거나 난간에 아래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도시의 야경을 훔쳐봤다. 처음 하루 이틀은 오래 못 보겠더니 나중에는 난간 위에 올라가기도 했다.

적응해가는 건지, 사신탈이 가진 고양이의 본능이 눈을 뜨는 건지. 아니면 영혼이 가진 전생의 기억인지. 전에는 몰랐던 야경의 아름다움이라니.

“묘오오!”(오오오!)

분명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해인인데 점차 그 공포가 무뎌져가고 있었다.

높은 곳이 아무렇지 않아졌고 오히려 좋아지기 시작했다. 밤이면 난간 위에 앉아 저 멀리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샌가 그 높이감을 즐기기까지.

해인은 제가 점점 고양이화 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능은 변치 않는 듯했지만 청각 시각 등 신체능력이 월등해졌고, 잠이 많아졌으며 취향이 조금 변했고 변덕이 더 죽을 끓였다.

꼬리를 흔들며 개미같이 작아 보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한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 해인은 얼른 수풀 쪽으로 몸을 숨겼다.

무거운 발소리로 상대가 한 명이고,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리만으로 말이다.

지난 며칠간의 경험으로 보건대 이 늦은 밤에 혼자 옥상에 올라오는 남자는 담배를 피러 올라온 주민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유추해보는데 다소 우스운 목소리가 들렸다.

“냐옹…… 야아아옹? 야옹, 야옹, 야옹아?”

사람의 입으로 내는 것이 분명한 고양이 울음소리였다. 그건 고양이의 귀에 아주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낯설지 않아 해인은 수풀 밖으로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조금 멀찍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야옹거리는 덩치 큰 사내가 보였다. 며칠 전 밤의 그 사내였다. 왠지 좋은 사람 같아서 그냥 이유 없이 비비적거리고 싶었던 그 남자.

동물의 직감이 호의를 보이던 사람. 또 사진을 찍으러 왔나 해서 자세히 행색을 살폈지만 들고 있는 건 검은 봉지가 다였다. 왜 온 걸까? 그리고 왜 자신을 찾고 있는 걸까?

잠시 어찌할까 고민하던 해인은 조금씩 수풀 밖으로 몸을 빼냈다. 남자는 본능이 이끌릴 만큼 선량했으며 안전해 보였다.

이미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아는 남자였고 무엇보다 그녀는 외로웠다. 아주아주 쓸쓸한 상태였다. 자신을 쓰다듬어준 저 사람이라면 그녀를 보호소로 보내지도 않은 것 같았다.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니야아아?”(……나 찾아요?)

눈을 마주치곤 총총 그에게 다가갔다.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점도 있었지만 모종의 믿음이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사내가 한껏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렸으니 말이다.

부드럽고 살가운 손길이었다. 짐승을 안는 데 익숙지는 않으나 조심스러움과 상냥함이 내포된 손길, 퍽 기분 좋았다. 그렇게 남자의 품에 안기는 순간 긴 고양이 꼬리가 밑으로 대롱거렸다.

“거기 있었구나.”

“냥.”(응.)

“여기 혼자 있는 거야?”

“야앙.”(맞아요.)

기분 좋은 손길이 이어졌다. 그는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근처에 있는 벤치로 앉았다.

잠시 해인의 유려한 머리끝부터 등까지 쓰다듬더니, 그녀를 제 무릎 위에 앉혀 놓고는 들고 온 봉지 안을 펴 보였다.

“이거 먹을래?”

뭔가 해서 들여다보니 까만 봉지 안에는 고양이 캔이며 햄 몇 가지가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고 먹고 난 뒤 싸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가 고픈 건 사실이지만 그건 이미 익숙해진 감각이었다.

“니이.”(아뇨.)

“싫어? 왜? 배 안고파?”

이번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자신을 걱정해주는 남자가 어딘가 좋아 꼬리를 살랑이며 그의 턱에 자신의 코끝을 문질렀다. 목을 아릉거리며 대답했다.

“니양.”(네.)

“……너 내 말을 알아듣는구나?”

“니야!”(네!)

“고양이는 똑똑하다는 말은 들어봤는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남자의 손이 해인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주인은 없는 것 같은데…….”

그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해인은 딴청을 피웠다. 당연히 주인도 없거니와 애초에 자신은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고양이는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밝힐 길도 없었고 밝혀서도 안 되었다.

사신과의 약속은 둘째치더라도……. 들키는 날에는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혼자 시간을 보내며 내내 여러 가지 만약에 대해 상상해봤으나, 말하는 고양이도 끔찍하고 사람이 되는 고양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들켰다가는 실험동물이 될지도 모른다. 티브이나 신문의 특종 기삿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봐도 신기한데 다른 사람들은 더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비밀이었다. 아무리 믿음이 가는 상냥한 이라고 해도 말이다.

해인은 너무 똑똑하게 대꾸하는 것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답게만……. 그런데 고양이의 지능은 대체 어느 정도지? 해인은 알 수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고양이가 왜 이런데 혼자 있었나 싶더라고……. 누가 버리고 간 건가……. 야옹아? 그런 거야?”

“……야앙.”(……비밀.)

“으음, 일단 우리 집으로 갈까? 여긴 너무 추우니까.”

돌연 그가 해온 제안에 해인은 놀람과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고양이 모습이지만 실상은 엄연히 사람인데 정체를 들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외간 남자와 한집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인은 남자의 손에서 빠져나가려 버둥댔다.

갑자기 반항할 줄 몰랐는지 남자가 놀라 손에서 힘을 풀었고 해인은 얼른 두어 걸음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아쉬운 얼굴이었다.

그가 베풀어준 순수한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런 의도라면 곤란할 뿐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진짜 고양이라면 기뻐하며 따라갈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싫어?”

“미양.”(미안해요.)

해인은 작게 목을 울리고는 다시 수풀 속으로 파고들어 남자에게서 도망쳤다.

“야옹아?”

남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해인은 더욱 깊숙이 복잡한 수풀 안쪽으로 들어가기만 했다. 혼자인 건 무섭고 외롭다. 그렇다고 길고양이가 되는 것도 무섭다.

하지만 누군가의 애완 고양이가 될 수는 없었다. 일반 고양이처럼 지낼 자신이 없었다.

“야옹아? 어디 갔어, 야옹아?”

그가 한참을 자신을 불렀지만 해인은 나갈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눈이 빛날까 봐 눈을 꼭 감고 어서 그가 가기만을 기다렸다.

***

그날 늦은 새벽. 갑자기 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웅크려 있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옹아! 야옹아?”

“냥?”(어라?)

화단 안까지 들어와서는 수풀을 맨손으로 뒤적거리기 시작한 사람은 아까 그 남자였다. 크게 당황한 얼굴로 신발이 진흙에 엉망이 되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수풀을 뒤지다가 쓰고 있던 우산이 떨어졌는데도 계속 해인을 불렀다.

이상하게 착한 남자 같으니, 생판 모르는 고양이가 굶어 죽을까 노심초사하더니 지금은 비를 맞으며 진흙탕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있었다.

“야옹아……. 어디 있어? 야옹, 야옹아!”

젖은 눈으로 그 모양을 지켜보던 해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수풀 밖으로 주먹만 한 머리 하나 내밀었을 뿐인데 그가 해인을 발견한 듯 한달음에 수풀을 뛰어넘어 가장 안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진흙이 질척거리는 그녀 앞에 서서는 역시나 진흙투성이인 해인을 품에 안아들었다.

해인은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애타게 자신을 찾는 게 미안하기도 했다.

다소 새침하게 목을 울렸다. 물론, 고양이의 언어였다.

“니야옹?”(왜 이렇게 친절한 건데요?)

“맙소사, 다 젖었네? 안 되겠다. 우리 집에 가자 야옹아”

“……미야? 냐냐냐!”(……에? 안 돼요!)

뒤늦게 해인이 반항했지만 이미 그녀를 안아 든 그는 비에 꼴딱 젖은 검은 고양이를 가슴 속에 안아 들고는 빠르게 옥상을 나서고 있었다.

한껏 버둥거려봤지만 한 번 놓친 적이 있어서인지 그의 손힘은 단단했고, 해인은 그래 봤자 고양이였다.

흔한 말로, 냥줍이었다.

“미야악!”(이건 납치야!)

***

위이이잉.

따뜻한 드라이 바람을 맞으며 해인은 눈을 반쯤 감았다. 아, 이 얼마만의 문명인지. 해인은 자신의 밑에 깔린 깨끗한 수건에도 얼굴을 비볐다.

이마도 뺨도, 턱 끝도. 어쩜 이렇게 기분 좋고 뽀송뽀송할까.

“착하다, 착해.”

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따듯한 물로 그녀를 씻겨주었다. 어찌나 원하는 것을 콕, 짚어주는지.

처음엔 예의상 거부했었지만 이내 그 거부할 수 없는 그 노곤노곤함에 몸을 맡겼고 지금은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몸을 말리는 중이었다.

그의 칭찬이, 털을 쓰다듬는 그의 손짓이 좋아 골골, 목을 울렸다. 황금빛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가릉 대는 고양이는 퍽 사랑스러웠다.

“갸르르릉”(좋아, 좋아.)

“갑자기 비가 올 줄이야.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둘러보니 그의 집 거실 벽에는 사진 액자들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풍경이나 예쁜 동물들을 찍은 것이었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다녔던 것을 떠올렸다.

사진작가일까? 그렇다면 해인과 상성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작가라는 점에서 말이다.

“배고프진 않고? 뭔가 먹을래?”

“미야.”(싫어요.)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무릎에 기대 그의 손길을 받았다. 그는 해인의 쫑긋한 두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분홍빛이 도는 발바닥을 만지기도 했다.

때로 보드라운 그녀의 배나 가슴에도 손을 댔지만 그때는 냉큼, 몸을 돌아 뉘였다.

“왜 그래?”

“니냐옹.”(안 돼요.)

“흐음?”

배와 가슴은 못 만지게 했다. 고양이면서도 어째 민망해서 말이다. 대신 그의 손 가까이 자신의 꼬리를 내밀었다. 살랑살랑거리며.

“미야앙!”(꼬리는 돼요!)

그가 꼬리에 손을 대면 꼬리를 움직여 그의 손을 휘감았다.

그러면 그는 낮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볼수록 그는 수려한 남자였다.

상냥하게 웃었으며 기분 좋은 손으로 그녀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너무 기분 좋아 문득 잠들었을 정도였다.

그가 자신을 잊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와 기분 좋은 샤워, 그리고 손짓이 더욱 해인을 잠의 세계로 이끌었다.

요 며칠 잠을 설친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양이의 몸 때문인지 유난히 필요한 잠의 양이 많았으니까.

해인은 이내 꼬리를 살랑거리는 것도 잊고 납작하니 누워 잠들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까맣고 예쁜, 마치 벨벳 같은 털을 가진 검은 고양이를 제 침대 위에 눕혀 놓고는 상의를 벗고 그 옆으로 누웠다.

지금은 눈을 감아 보이지 않지만 진한 금색 빛을 내는 고양이의 눈이 내일 아침이면 자신을 바라보고 있겠지 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가릉거리는 고양이의 기분 좋은 목울림 소리를 들으며 그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의 작은 몸을 가슴팍으로 끌어들였다. 따듯했다. 둘 다 오랜만의 안도감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름어름 겨우 보름달 모양새를 갖춘 달빛이 해인과 남자가 잠든 침대로 살며시 깃들었다. 커다란 창문을 넘어 커튼을 가르고 새어 들어왔다.

해인의 꼬리께에 옅은 달빛이 닿았는데, 그것이 마치 증폭되는 것처럼 해인의 꼬리를 넘어 유연한 몸과 얼굴을 감싸 올랐다.

달빛이 비출 수 있는 자리가 아닌데도 해인의 얼굴까지 말이다. 해인의 몸 위로 달빛이 한가득 내려앉았을 때 그녀의 몸이 뽀얀 빛을 뿜어냈다.

달빛과 닮았지만 그보다는 흐리고 충만한 느낌이었다.

“미이…….”(으음…….)

자신의 몸이 빛을 내며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인이 몸을 뒤척였다. 뽀얀 빛이 진해질수록 그녀의 몸은 스륵스륵 길고 가늘게 자라났고 몸은 점차 하얗게 변했다.

검은 털은 빛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대신 길고 검은 생머리와 그와 닮은 곧고 가느다란 속눈썹이 생겨났다. 촘촘한 속눈썹 아래로는 오뚝한 코가 있었고, 그 아래는 연분홍 빛 입술이 반쯤 벌어져 새근댔다.

뽀얀 빛이 완전히 사그라지자 남은 것은 하얀 나신을 하고 잠든 해인과, 역시나 잠들어 있는 반 나신의 사내뿐이었다.

해인은 꿈속에서 사람이 되었다. 그 여파인지 현실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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