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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29화 (외전 완결) (29/29)

#외전 10. 행복은 이곳에 담았다

“헉……!”

리카르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무슨…….’

끔찍한 꿈이었다.

아니, 정말로 꿈인 걸까?

팔다리가 저릿저릿했다.

리카르도는 무심코 침대 옆을 더듬었다.

그 손길에 깬 것인지, 안토니아가 졸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리샤르?”

평소와 다름없이 사랑스러운 제 아가씨의 목소리였다.

“안토니아…….”

리카르도가 안도하듯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허벅지 위에 고개를 얹었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

따스하고 친근한 그녀의 말투가 자신에게 와닿았다.

너무도 생생했지만 그래, 꿈일 뿐이었다.

“응, 조금.”

그 말에 안토니아는 잠을 떨치고 일어나 앉았다.

“무슨 꿈이었는데?”

“…….”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말하기가 힘들면 그냥 이상한 꿈이었다고 하고 넘기면 될 터였는데.

리카르도는 왠지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그가 입을 어물거리자 안토니아가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꿈이었길래 용맹한 대공 전하께서 이렇게 손이 차가워지셨을까.”

“그냥, 그냥 꿈이었는데…….”

“꿈이었는데?”

“나는 멍청이였고.”

“응?”

“너는……. 나보다 빨리 떠났어.”

죽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마음이 아려 와서 애써 돌려 이야기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자신을 꼭 끌어안더니 토닥거렸다.

“내 리샤르, 카리티나 때 정말 무서웠구나. 미안해.”

안토니아는 몇 달 전 막내가 태어났던 때 그를 너무 걱정시킨 것 같다며 다독였다.

확실히 그날 이후로 꿈자리가 뒤숭숭하긴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생생하게 꿈 내용을 다 기억하는 건 처음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약속했잖아. 널 떠나지 않겠다고.”

리카르도는 그 자신만만한 말투에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너무도 생생했으나, 제 아가씨는 꿈속 그 소녀처럼 겁에 질려 있지도 않았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당당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바올로를 처리한 게 지금의 안토니아이지 않은가.

리카르도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긍정했다.

“맞아, 내 아가씨는 지키지 못할 말을 하지 않으니까.”

“좀 진정이 됐어?”

“응.”

리카르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토니아는 그런 자신에게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위로해 주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그래서 내 리샤르가 어떻게 바보 같은 짓을 했는데?”

특유의 장난스러운 놀림까지 곁들여서.

리카르도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이야기했다.

“꿈에서 네가 열여덟 살까지 바올로 그자의 아래에서 자랐어.”

“……응?”

리카르도는 의아해하는 안토니아의 답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 그렇게 답하는 거라 여겼다.

“그리고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네 가호의 힘이 밝혀져서……. 제레미야와 결혼하는 걸 눈 뜨고 봐 버렸지 뭐야.”

더 무거운 내용이었지만 리카르도는 정말 이상한 꿈이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자세히 설명해 봐, 리샤르.”

안토니아의 반응이 이상했다.

* * *

진지한 안토니아의 표정에 리카르도는 의아해하면서도 자신의 꿈을 차분히 설명했다.

꽤 긴 이야기라 끝났을 때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동이 완전히 튼 뒤였다.

이야기해 보라는 말에 모두 털어놓긴 했지만 마친 뒤에도 한참을 가만히 있는 안토니아의 모습을 보니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토니아?”

리카르도는 묵묵히 기다리다, 정말 그녀가 기절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싶어 불렀다.

그녀는 어딘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 왔다.

“네가 왜 그걸 기억해.”

“……응?”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인데.”

“안토니아…….”

지나간 일이라고? 그리고 꿈이 아니라 기억한다고……?

리카르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아니, 무언가 짐작되는 건 있었다.

하지만-

“네게도 평생 말할 생각 없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꿈이라고 생각해도 돼.”

리카르도는 털어 버리라는 듯 가볍게 이야기하는 안토니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언가 말을 하는 것보다도 빨리 갑자기 눈가가 확 시큰해졌다.

“리샤르?!”

안토니아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갑자기 왜 울어, 응? 나 여기 있는데.”

“응? 아니,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그냥 무언가 가슴속 가득히 맺혀 있던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무언가로 눌러두었던 것처럼, 실은 참아 왔던 것처럼 갑자기.

“그냥 꿈이라고 생각하게 둘 걸.”

“아니, 아니야……. 그건 싫어.”

무슨 의미인지 다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리카르도는 거절부터 했다.

“나는, 제대로 알고 싶어. 안토니아. 네 일이니까.”

안토니아는 잠시 침묵하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의 눈물을 다시 닦아 주고 어린아이들을 달래듯 능숙하게 그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리카르도가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눈물을 멈춰 낸 다음에야 안토니아는 그의 품에 기대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음……. 내가 기억하는 건 사실 리샤르만큼 무서운 건 아닌데.”

“죽었는데 어떻게 안 무서울 수가 있어.”

“상대가 제레미야다 보니, 마지막까지 그냥 어이가 없고 화가 잔뜩 나서.”

이건 꾸밈없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열두 살로 돌아온 뒤에도 죽었단 사실에 대한 공포보다도 돌아왔다면 자기 인생을 살아 보자는 마음이 더 컸으니까.

안토니아는 리카르도가 꿈을 이야기했듯 자신도 차분하게 어떤 삶을 살았으며, 실은 그게 자신의 예전 삶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도 나는 리샤르를 못 알아봤구나.”

“……아니야, 내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거니까.”

“에이, 그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자책이야.”

“내가 트라체스 대공이라고 밝혔다면 네가 그렇게 거절만 하진 않았을지도 몰라.”

“글쎄….”

“하다못해 그 자리에서 청혼을 하는 방법도 있고.”

안토니아는 그 말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잘나고 무뚝뚝한 트라체스 대공이-안토니아는 지금의 리샤르와 회귀 전 리카르도 트라체스를 다른 사람처럼 여겼다-처음 만난 수수한 백작 영애에게 고백을 한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가 있지. 난 그때 무척 소심해서 도망쳤을 수도 있어.”

“내가 붙잡았으면 될 일이고.”

“괜찮아, 리샤르.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까.”

안토니아는 위로하듯 자신의 허리를 감은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보다 영광이네요, 트라체스 대공 전하께서 마지막 순간에 저를 생각하셨다니.”

“안토니아…….”

“정말로 지금 나는 괜찮으니까, 너무 그런 얼굴 하지 마.”

“……하지만.”

“자책할 일이 아니라니까. 오히려 자책할 거면 이렇게 쓸데없이 걱정해서 상하는 얼굴 쪽을 더 걱정해 줘.”

안토니아는 일부러 짓궂게 이야기하며 몸을 돌려 리카르도의 얼굴에 잔뜩 입을 맞췄다.

뜻밖의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가 알게 되어서, 그에게 남긴 하나의 비밀마저 풀어 버려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어째서 지금 그가 과거를 알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안토니아는 잔뜩 입을 맞췄음에도 여전히 걱정스러운 그를 향해 물었다.

“그렇게 내가 약해 보여?”

“……그건 아니지.”

“그럼 이제 안심하세요, 아시겠지요. 연약한 트라체스 대공 전하.”

리카르도는 잠시 안토니아를 빤히 바라보더니, 곧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로 이제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 * *

리카르도의 꿈 때문에 안토니아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다.

다름 아닌 원래 신의 사도는 신전에 머무르며 땅을 정화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이번 삶에도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데.’

교황이 된 에밀리오 또한 그녀의 행동을 통제하려 든 적이라곤 없었다.

그게 궁금해서 방문하겠다고 연락했더니, 에밀리오가 한달음에 대공저로 달려왔다.

“성하, 제가 또 수석 신관들에게 원망을 받을 것 같은데요.”

“감히 누가 사도님께 원망의 말을 내뱉는단 말입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에 그저 미소만 지었다.

뭐, 정말로 원망이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긴 했다.

그냥 간절하게 바라본 정도였으니까.

에밀리오의 방문에 신이 난 건 다름 아닌 아이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녀하떼요!”

유스비안과 빅토리카는 제법 의젓하게 허리까지 숙여서 인사를 했다.

카리티나는 이제 겨우 두 살이라 ‘아부부’하고 언니 오빠를 따라 하는 정도였지만.

에밀리오는 다정하게도 몸을 낮춰 아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춰 주었다.

정말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예전 삶에서 빨리 눈을 감은 게 안타까울 정도로 말이다.

그는 아이들이 종알거리는 이야기에도 꽤 오래 귀를 기울여 주다가, 상냥한 말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조금 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더 들어줄 테니, 잠시 어머니를 제게 양보해 주시겠어요?”

물론 세 아이는 착하게도 그 말에 ‘네!’하고 잘 대답해 주었다.

원래 아이들은 가족보다 남 말을 더 잘 듣는 법이었다.

안토니아는 아이들이 응접실에서 나간 뒤에야 본론을 이야기했다.

진지하게 듣던 에밀리오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본래 그것이 사도님의 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무가 아니라고요?”

“어느 때건 주신의 뜻을 왜곡하는 자들은 있는 법이지요.”

“그건 그렇지요.”

리카르도의 꿈속에서 멸망의 방아쇠를 당긴 건 제레미야였지만 돌이킬 수 없게 만든 건 교황이었다.

신관의 몸으로 삿된 욕망을 우선했으니까.

“주신께서는 사도님을 그저 믿으실 뿐입니다.”

“네?”

“믿지 않으면 그러한 힘을 건네실 리가 없지요.”

에밀리오는 부드러운 미소로 안심하라는 듯 이야기했다.

“세상을 이롭게 할 자질이 있는 분께 가호를 내려 주시는 거니까요. 세속적인 신관에게 성력이 크게 깃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에밀리오는 친절하게도 부연 설명도 해 주었다.

“또한 땅의 정화는 본래 신관의 몫입니다. 그것을 게을리하거나 속되게 사용하여 마물이 들끓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는 건…….”

“사도님께서는 역시 알아차리셨군요.”

에밀리오는 빙그레 웃었다.

“주신께서 사도의 힘을 내리는 것은 마지막 자비이기도 합니다. 힘이 있는 자는 의무를 다하라는 뜻을 전하시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제가 사라진 뒤에는 더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로군요.”

“네, 의무를 다하려 한 자가 너무도 적었으니까요.”

에밀리오의 말이 맞았다.

회귀 전, 힘을 가진 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움직였다.

힘이 가진 책임이나 의무를 다하는 자가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그저 그 차이일 뿐입니다.”

에밀리오의 말에 안토니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강한 힘을 지녔으나, 혼자 모든 걸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확인받은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자신은 이번 삶에서 그저 행복하게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것뿐이었다.

움직이게 한 계기가 자신일 수는 있으나, 움직인 것은 각자의 판단이었다.

* * *

에밀리오에게서 답을 얻은 뒤, 안토니아는 굳이 과거 일을 이야기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지금이었다.

어느덧 안토니아의 나이 서른이었다.

회귀를 한 날로부터 무려 18년이 지났고, 리카르도와 결혼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녀는 아이를 셋이나 두었으며 과거와 달리 성녀나 사도의 이름보다도 ‘세르히 백작’으로서 자주 불렸다.

‘애초에 사도라고 부르는 건 신전 사람들 정도긴 하지.’

그 사실이 안토니아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가호는 그저 깃든 것이지만 세르히 백작의 지위는 자신의 힘으로 얻어 낸 것이었으니까.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당연히 주변에도 변화가 생겼다.

발렌타인과 드란제아 공작은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로레나와 드비는 연달아 쌍둥이를 낳은 탓에 복닥복닥한 일상을 보냈다.

물론 로레나는 여전히 세르히 백작가의 소중한 집사였지만.

귀여운 폴리는 끝없이 연애를 한 끝에 당당하게 선언했다.

‘저는 평생 연애만 할래요!’

그 소리에 마틴이 그녀의 등을 찰싹 때렸으나, 반대하진 않았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는 이제 정말 나이가 꽤 있었으나 여전히 정정했다.

오히려 안토니아 스스로가 그 두 분보다 체력이 모자라다 여길 정도로.

‘걱정 말거라, 안토니아. 풀멘 변경백이 되겠다고 하는 아이가 나올 때까지는 건강할 테니까.’

알렉산드라는 안토니아에게 풀멘 변경백령을 물려주는 대신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서른이 되던 해의 1월.

제국은 새로운 황제를 맞이했다.

아달베르트는 병환을 핑계로 -노령으로 쇠약해지긴 했어도 물러날 정도의 건강 상태는 아니었다- 이스베르가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새로운 황제 이스베르가는 제위에 오른 뒤, 몇 가지 선물을 아달베르트에게 주었다.

한 가지는 그의 두 아들을 강제로 수도로 불러 일하게 만든 것이다.

‘지금껏 길게 휴가 내서 잘 놀았으면 이제 그 의무를 다하렴.’

당찬 고모의 말에 두 황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따랐다.

아달베르트는 기뻐하긴 했으나, 상황으로서 우려를 먼저 전달했다.

그러나 이스베르가는 가볍게 일축했다.

‘오라버니, 모두 세르미아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애초에 천성이 나쁜 애들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별할 눈 정도는 있다고요. 그럴 눈도 없는 사람에게 제위를 물려주셨나요?’

물론 이스베르가는 나중에 안토니아에게 진짜 속내를 말했다.

‘그럴 담이 있는 녀석들이면 리카르도 뒤에 숨어 다니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세르미아와 맞섰겠지. 애초에 저 녀석들도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건 똑같아.’

형제로서 세르미아를 바로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간단히 내던져 버렸다.

‘그렇게 패배 의식 가득한 애들이 무슨 반역을 꿈꿀 수 있단 말이니? 그래도 영지 관리한 걸 보니 나름 머리는 돌아가는 모양이니 마구 부려 먹어야지.’

그녀는 정말 딱 황제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스베르가가 준비한 선물은 다름 아닌 제레미야였다.

폐태자가 되던 해에 최소한의 돈만 가지고 쫓겨났던 제레미야의 벌을 면해 준 것이었다.

‘제대로 고생해 보기도 했고, 네가 붙였던 걔 덕에 철이 많이 든 것 같으니까.’

이스베르가의 말에 안토니아는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자신의 필요로 붙였던 시종 니콜라는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제레미야를 간간이 보살펴 주었다.

‘그렇게 정에 약한 사람인 줄 알았으면 거기에 붙이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뭐, 니콜라 본인은 나름 뿌듯해했으니 되었다 싶긴 했다.

‘그래, 그 개차반을 인간 만들어 놓으면 뿌듯할 만은 하지.’

자신도 10년을 같이 살면서 못한 일이었는데, 니콜라는 사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스베르가가 제레미야에게 맡긴 직책은 다름 아닌 상황 전 시종직이었다.

아달베르트도 제레미야도 어색해하는 것 같았으나 분명 잘 풀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토니아도 제레미야를 잠깐 마주쳤는데, 그는 예전과 달리 제대로 예를 갖춰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르히 백작님.’

그냥 그거면 됐다 싶었다.

리카르도의 꿈속에서 그가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알고 나니 더더욱.

제레미야는 애초에 황태자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었고 이번 생에도 받아야 할 벌은 받았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을 십 년이 넘도록 간직하기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아까워서였다.

이미 그는 자신에게 있어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 * *

어느덧 또 여름이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계절의 변화가 너무 빨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아, 아빠아, 여기요오!”

“여기이-!”

“마아, 빠아!”

세 아이가 크게 소리쳤다.

어릴 적 안토니아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찾았던 자그마한 섬은 매년 가족과 함께 오는 여행지가 되었다.

아이들은 익숙하게 백사장에서 뒹굴며 안토니아와 리카르도를 재촉했다.

리카르도가 당장에라도 바다에 뛰어들 것처럼 구는 아이들을 보며 서둘러 달려갔다.

그의 팔에는 피크닉 도구에 커다란 천막, 아이들을 위한 수건과 덧옷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안토니아는 너무도 익숙한 애 아빠의 모습에 웃으면서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아마 자신의 어릴 때와도 닮은 풍경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느긋하게 웃고 아버지는 포르르 돌아다니는 안토니아를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부모님 사이에서 잠드는 날에는 곁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해 주는 그 목소리가 좋았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이곳에 다 같이 올 때면 커다란 침대 위에 다섯이 쪼르륵 누워 잠들곤 했으니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발아래로 자박자박 소리를 내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걷는 사이, 다시 한번 아이들이 자신을 재촉했다.

“엄마, 얼른요!”

“이거 보세요! 카리도 첨벙첨벙해요.”

“따아-!”

얕은 파도 근처에서 물장구를 치는 카리티나를 보며 아이들이 신난 듯 외쳤다.

안토니아는 조금 더 걸음 속도를 올렸다.

제 가족들을 무척 꼭 끌어안고 싶어졌으니까.

모두를 끌어안는 법은 간단했다.

안토니아는 아이들을 위한 천막을 치는 리카르도를 향해 달려가 꼭 끌어안았다.

“안토니아?”

“응? 왜? 내가 안아 주는 게 싫어?”

“그럴 리가 있겠어?”

리카르도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천막을 고정하기 위한 끈을 재빠르게 묶고서 몸을 돌려 안토니아를 꼭 끌어안았다.

“여전히 내 아가씨는 사랑스러운 나의 주인이신데.”

“사랑해, 리샤르.”

“나도…….”

리카르도는 익숙하게 안토니아에게 입을 맞춰 왔다.

그러자 자그마한 발소리들이 몰려들었다.

“나도, 나도요!”

“엄마, 아빠랑 꼬옥 할래요.”

“부우-!”

물가에서 놀던 세 아이가 금세 다닥다닥 붙어 왔다.

“그래, 우리 아가들도 엄마가 아빠랑 같이 꼭 안아 줘야지.”

금세 가족의 원이 만들어졌다.

빈틈없이 꽉 들어맞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원일 터였다.

모두 과거가 아닌 지금 자신의 인생에 담겼다.

[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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