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9. 신의 가호가 사라진 세계
제레미야는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왜 죽어?”
목을 조른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죽을 줄은 몰랐다.
멍청한 소리였지만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안토니아는 신의 가호를 받은 성녀라고 모두 그러지 않았는가.
“자, 장난치는 거지? 안토니아…….”
제레미야는 축 늘어져 바닥에 쓰러진 안토니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한 걸까, 그녀의 몸에서 익숙한 가호의 빛이 깜박였다.
“그, 그래……. 날 너무 놀래키지 말라고……! 너는 내 아내잖아! 이혼 같은 소리도 그렇고…….”
그러나 제레미야는 다음 순간 숨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다.
깜박이던 가호의 빛이 점점 멎어지려 하더니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안……토니아?”
그의 눈앞에서 안토니아의 몸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 * *
제레미야는 현실을 부정했다.
그는 하인들을 닦달하며 안토니아를 찾아오라고 소리쳤다.
“왜 안토니아가 없단 말이야! 내 아내를 데려와!”
“하, 하지만 주인님…….”
백작저의 집사이자 제레미야의 시종, 쟈힘은 짜증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어디를 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리 없어! 안토니아가 여길 두고 어딜 간단 말이야!”
“도망간 것 아닐까요?”
귀찮았던 쟈힘은 제레미야에게 멋대로 지껄였다.
“뭐?”
“바람이 나셨단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제레미야에게 난 소문이었고, 안토니아는 결백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제레미야는 왈칵 화가 치솟았다.
‘이혼해요.’
쟈힘에게서 바람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 싸늘한 얼굴로 자신에게 이혼하잔 이야기를 하던 안토니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으니까.
짝-!
그는 그대로 참지 못하겠다는 듯 쟈힘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헛소리하지 마!”
“하, 하지만 주인님.”
“안토니아 그 촌스러운 게 나 말고 누구한테 눈을 돌린단 말이야!”
자신은 그럴 수 있어도 그녀는 그래선 안 된다.
적어도, 적어도……!
매번 일, 일, 일.
책임, 의무 따위를 이야기하는 게 지겨웠다.
하지만 그래도 단 한 번도 자신 외에 다른 남자를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그냥…….
‘그냥……. 일 말고 날 좀 봐 줬으면 해서.’
그래서 그랬다. 그녀 외에 안은 여자 중 정말로 마음을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자신은 안토니아에게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혼한단 말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다시 찾아와.”
“주인님……. 아니, 전하…….”
“찾아오라고!!!”
그러니까 그녀가 사라진 것도 현실이 아니어야 했다.
이혼하지 않았으니까.
죽어서도 자신의 아내여야 했다.
쟈힘이 나가며 혀를 차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실은 자신도 알았다.
모두가 그를 바보 취급한다는 걸.
그래도 안토니아는 자신을 남편 취급해 줬다는 걸.
그래서 더 그녀에게 요구했다.
자신만 보라고, 자신을 위해서 바뀌라고.
그래야 자신이 인정받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넌 돌아와야 해, 내 앞에 있어야 해. 안토니아!’
그대로 제레미야는 주저앉았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멀리, 더 멀리 없애 버리기 위해서.
* * *
“무슨 헛소리인가!”
세르미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들이닥친 교황을 향해 노성을 내질렀다.
“성녀의 힘이 아예 사라졌다, 이 말입니다!”
“세르히 백작은 멀쩡하게 영지를 다스리고 있어!”
황제 세르미아는 단칼에 이야기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신전은 눈이 없는 줄 압니까?”
“그럼 이 보고서는 누가 썼단 말인가!”
세르미아는 그렇게 말하며 몇 달 전 안토니아가 쓴 보고서를 들이밀었다.
교묘하게 최근에 쓴 것처럼 날짜를 고쳐 쓴 것이었다.
“그런 것쯤, 폐하께서는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의 교황은 정말 큰일이 났다는 듯 책상을 탕-! 하고 내리쳤다.
“아니, 애초에 폐하와 입씨름할 때가 아니지요.”
“뭐?”
“이대로 두었다간 다 죽고 말 테니까요.”
“그게 무슨 소린가!”
“하, 이래서 성녀께서 나타나셨을 때 신전이 보호해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무슨 소리냐고 묻질 않았는가!”
세르미아도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며 이야기했다.
“괜히 주신께서 몇백 년에 한 번, 가호를 지닌 자를 내리시는 줄 압니까?”
교황은 절망이 섞인 눈으로 이야기했다.
이것만큼은 권력욕과는 별개의 현실이었다.
신관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가호에 얽힌 비밀.
원래대로라면 안토니아는 가호가 발현한 순간부터 신전에서 이 땅의 정화 작업을 해야 했을 사람이었다.
그걸 황태자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멋대로 이용했다.
“그런 성녀의 힘이 사라졌습니다. 당신들이 죽인 거 아닙니까!”
“어디서 증거도 없는 소리를……!”
“증거가 있건 없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대로면 모두 죽을 판이니까요!”
교황은 다시 한번 세르미아를 향해 엄포를 놓고 뒤돌아섰다.
‘성녀의 힘’이 거두어졌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도 축소한 사실이었다.
교황은 착잡한 얼굴로 몇 해 전, 죽었던 상급 신관을 떠올렸다.
무사히 성장했다면 교황급의 성력을 지녔을 자.
금발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던 자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자라도 있었으면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것 또한 신전이 숨긴 더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다 과거의 일이었다. 그때는 성녀께서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신께서 모든 가호를 거두어 가셨다.’
그녀가 신전 아래에 종속된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일부러 ‘성녀’라고 칭했다.
하지만 원래 안토니아가 받아야 할 이름은 다른 것이었다.
신의 힘을 대리하는 자, 주신의 사도.
그게 신전이 또 감추고 있던 하나의 사실이었다.
신전 또한 권력을 위해 재앙을 자초했다.
부인할 수 없는 패착이었다.
* * *
안토니아가 사라지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제국 전체가, 아니 땅이 있는 곳 모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서부와 북부 일대에서나 출몰하던 마물들은 위치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신전은 황제를 닦달했다.
“성녀님의 시체라도 있어야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
“왜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지금 발뺌하실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폐하! 정말로 그대로 죽을 요량이십니까?!”
세르미아는 그 말에 입술을 짓씹었다.
당연히 세르미아도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제 못난 막냇동생과 쟈힘 폰스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러나 되돌아온 답이 너무도 황당해 신관들에게 말할 수조차 없었다.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니!’
심지어 그건 쟈힘 폰스가 하는 소리고, 제 막냇동생은 더 황당한 소리를 지껄였다.
‘안토니아가 숨었습니다. 제가, 제가 좀 화를 냈다고……!’
그 멍청한 것이 미친 게 틀림없다.
세르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세르미아는 그 둘이 아니라 자신의 사람을 보내 세르히 백작령의 사정을 자세히 알아 오도록 시켰다.
결과적으로 쓸 만한 답을 내놓은 건 어린 하녀 정도였다.
‘마, 마님께서 화를 내셨어요. 주인님이 저, 저를 침대로 데리고 가셔서…….’
미친놈.
세르미아는 그 이야기를 보며 속으로 벌컥 화를 냈다.
바람을 피울 거면 들키지나 말 것이지.
발렌타인에 비하면 안토니아는 매우 얌전한 아내였으니까.
발렌타인은 평소엔 무심한 주제에 자신이 다른 여성에게 눈이라도 둘라치면 손을 쓰곤 했다.
오르테가 후작가의 힘으로 그를 압박하면서.
‘이혼하자는 마님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요, 그, 그 뒤에는 잘 모르겠어요……. 주인님이 무척 크게 화내셨는데……. 그, 그 뒤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세르미아는 솔직히 확신했다.
제레미야 그 멍청한 놈이 안토니아를 제 손으로 죽이고 말았다고 말이다.
하녀가 말하길 술을 진탕 마신 상태였다고 하니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황실의 치부를 어떻게 신관들 앞에서 이야기한단 말인가.
제레미야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황실이 성녀를 죽였다는 소리를 듣는 건 말도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세르미아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그들에게 우길 수밖에 없었다.
“죽고 말고 간에 그대들이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않는가!”
세르미아는 목소리를 드높였다.
자신의 당황도 묻어 버려야 할 진실도 드러나지 않도록.
“세르히 백작은 멀쩡하게 살아있네! 그저 아파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뿐이야!”
“폐하!”
교황과 황제 사이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할 신경전만 오고 갔다.
* * *
수도까지 마물이 들끓을 정도였다.
원래 마물이 나타나던 북부와 서부는 더욱 처참했다.
마물에 어지간히 단련된 병사들조차도 신음을 흘릴 정도로.
“조금만 더 힘내게, 끝은 올 테니.”
“대, 대공 전하……!”
그리고 그 격전의 전장에 함께한 권력자는 리카르도 트라체스, 그가 유일했다.
그는 누구도 속을 유추할 수 없이 딱딱한 얼굴로 병사들을 다독였다.
‘……안토니아 세르히 백작이 죽었다고.’
충격적인 진실을 그저 마음에 눌러 담은 채.
리카르도가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건 다름 아닌 자신의 누나 이스베르가로부터였다.
“황제께서는 그저 아픈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교활한 애가 사실을 말할 것 같니? 그것도 제레미야가 저지른 일을?”
“도대체 왜…….”
리카르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토니아 세르히라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모난 짓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얌전하고 조용히 지냈다.
그녀가 흔적을 드러내는 건 오로지 갖가지 행정 문서 속에서 정도였다.
실제로 세르미아에게 동부와 서부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백작령에 가 해낸 일들은 모두 감탄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이라곤 없었는데 말이다.
이스베르가는 차가운 눈으로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세르미아가 키운 아이잖아.”
“그게 무슨…….”
“세르미아 그 멍청이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제대로 안 되면 어떻게 구니.”
리카르도는 그 말에 입을 딱 다물었다.
트라체스 남매는 선황제 아달베르트가 왜 죽었는지 진상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아달베르트는 꾸준히 그의 자질에 의심을 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였기에 망설였다.
“혈육도 죽인 아이가 키운 또 다른 멍청이야, 그게 설사…….”
이스베르가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하는 여자라고 해서 다를 것 같니?”
“…….”
리카르도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안토니아 세르히.
그녀와는 따로 인연이 있다고 하기도 민망한 사이였다.
자신이 손쓸 새도 없이 그녀는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신의 힘을 각성해 성녀가 되었다.
어린 시절 내내 억압받던 소녀에게는 또 다른 족쇄가 매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바올로 세르히 그 작자를 내쫓을 때 가만히 있어야 했나.’
그때 리카르도는 분명히 선의로 나섰다.
제 어머니의 것으로 소문난 목걸이를 훔친 자.
물론 그것도 용서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으나, 사실 당시 리카르도는 그래선 안 됐다.
세르미아는 안토니아를 어떻게든 제 손에 두고자 온갖 수를 다 쓰고 있던 때였으니까.
실제로 안토니아를 재판에서 도와준 뒤, 그는 세르미아의 집요한 의심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더 대공령으로 돌아오기도 했고.
그 뒤에도 몇 번 더 황실의 일원이기에 안토니아를 볼 만한 일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그녀는 늘 숨죽이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듯, 그림자 속에 자신을 숨기려 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신경 쓰여 리카르도는 종종 빤히 바라보곤 했지만.
‘그런 그녀를 도대체 왜…….’
제레미야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토니아는 늘 그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주려고 노력했으니까.
아마도 제레미야는 상상하지 못할 고생을 해 가면서 말이다.
* * *
“시, 싫어……. 나, 나는 못 가!”
제레미야는 자신을 데리러 온 기사들 앞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내 아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어, 어디를 간단 말이야!”
그는 벌벌 떨면서 이불을 부여잡았다.
“황자님, 폐하의 명령입니다.”
“안 된다고……! 나, 나는 안토니아를 간호해야 해!”
제레미야는 제 옆의 불룩한 이불을 가리키며 외쳤다.
세르미아는 제레미야를 아무도 모르게 데려가기 위해 자신의 근위 기사를 보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단 소리였다.
“황자님, 반복해서 말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 이 무례한! 감히 내게 명령해?!”
“폐하께서 무척 화가 나셨습니다.”
제레미야의 앙칼진 외침에도 근위 기사는 묵묵히 세르미아의 말을 전했다.
“얌전히 일어나시지요, 폐하께서는-”
“혀, 형님께서 뭐!”
“따르지 않을 경우 그 목숨을 거둬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뭐?”
제레미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무례한 기사가 뭐라고 한 것인가.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라! 형님께서 그러실 리가 없다!!”
비록 요즘 세르미아가 자신에게 차갑게 군다고 해도…….
자신이 그 잔소리가 싫어서 수도에 가지 않았다고 해도.
그래도 자신은 그의 친동생이었다.
“너, 너희들! 어디서 감히 형님의 이름을 팔아 날 협박하려 들어!”
그러나 다음 순간.
스릉-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황자님. 따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자리에서 눈을 감으시겠습니까?”
“……!”
자신에게 일제히 겨눠진 날붙이에 제레미야는 눈을 깜박였다.
‘현실, 현실일 리가 없어. 이건 꿈일 거야!’
제레미야는 한 번 눈을 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나 여전히 날카로운 날붙이가 제 목 끝을 겨누고 있었다.
제레미야는 어지러운 머리로 주변을 살피다 거의 울기 직전의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가, 갈게. 가, 가면 되잖아!”
“그럼 따르시지요.”
“오, 옷을…….”
“상관없습니다. 마차가 바로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제레미야는 어떻게 잠옷 차림으로 나가냐고 외치고 싶었으나, 날카롭게 선 날 끝이 너무도 무서웠다.
그는 애써 현실을 부정하듯 옆에 불룩하게 솟은 이불을 향해 이야기했다.
“아, 안토니아……. 나, 나 다녀올게. 그,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 모습을 보며 기사들 중 몇몇은 비웃었다.
평소라면 제레미야는 그들에게 입 다물라고 소리쳤을 테지만 이미 공포에 사로잡힌 뒤였다.
* * *
백작저를 나오는 그 길 모두가 지옥 같았다.
모두 죽어있었다. 쟈힘조차.
제레미야는 꺽꺽거리며 소리 없는 비명만 질렀다.
너무, 너무도 무서웠다.
‘아, 안토니아……. 어디 있어. 너, 너는 날 지켜 줘야지.’
그는 이미 없는 안토니아를 찾았다.
너무도 공포에 질려서일까.
“마물, 마물이 나타났습니다!”
기사 하나가 마물의 출현을 외친 순간.
제레미야는 앞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건…… 마물이 아니야!’
제레미야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너무 무서웠다. 너무 두려웠다. 그리고 외롭고 마음이 아팠다.
“아, 안토니아……. 역시 너는…….”
역시 그녀는 자신의 아내였다.
이렇게 위험한 순간 자신을 구하러 와 주지 않았는가.
제레미야는 그대로 ‘미소 짓는’ 안토니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닿은 순간 그를 덮친 건 잠깐의 통증과 영원한 감각의 단절이었다.
* * *
“어, 어떻게 하지요. 단장님?”
“쯧, 멍청하게 마물에게 달려들다니.”
황제에게 제레미야의 압송을 명받았던 기사단장은 혀를 찼다.
멍청한 황자는 갑자기 마물을 향해 달려들더니 순식간에 숨이 끊어졌다.
“어쩔 수 없지. 다음 계획대로 간다.”
“네, 단장님!”
곧장 근위 기사들은 제레미야의 시신을 깔끔하게 수습했다.
황제의 계획, 그건 제레미야를 안토니아의 시신인 것처럼 속여 신전에 넘기는 것이었다.
* * *
교황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안토니아의 시신이라도 넘겨주었으니까.
비록 마물에게 당해 얼굴도 알아볼 수 없었으나, 교황은 부디 이번에는 황제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길 바랐다.
‘이것만 있으면 그래도 재앙을 일부는 막을 수 있다.’
아주 오래전 불의의 사고로 신의 사도가 그 생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그때 신관들은 시신을 확보해 신께 간절히 기원을 드렸다.
덕분에 한동안 지옥 같은 시기를 겪었으나 멸망만큼은 막았다고 이야기했다.
비록 그 기록이 아주 오래전의 것이라 해도 믿을 길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몇 년 전, 탐욕스러운 다섯 번째 수석 신관이 벌인 짓으로 성력을 제대로 타고난 자들은 모두 죽어 버린 상태였으니까.
“모두 간절히 기원합시다. 주신께서 사도의 마지막이나마 어루만져 주시기를 바라며.”
“네, 성하.”
신관들은 모두 사명을 띠고 준비한 제단에 성력을 불어넣었다.
성력이 있는 자는 모두 모여 쥐어 짜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들의 앞을 채운 건 아름다운 가호의 빛이 아니라, 기원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새카만 빛이었다.
“서, 성하……. 어떻게 합니까?”
“성하…….”
신관들과 똑같이 멍하니 제단을 바라보던 교황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신만 품고 있던 말을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주신의 가호는……. 이제 없네.”
가호가 사라진 세계, 그 끝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멸망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초한 건 황실의 멍청한 형제임을 교황은 깨닫고 말았다.
아니, 자신 또한 삿된 욕망에 희망을 모두 부수어 버린 것은 똑같았다.
교황은 끝을 직감하며 그저 허망한 웃음만 흘렸다.
* * *
마물을 베고, 또 베어도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황제는 군대를 닦달했다. 왜 마물들을 토벌하지 못하냐고 소리쳤다.
‘그것도 벌써 세 달 전인가.’
리카르도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황제 세르미아가 그렇게 소리칠 수 있던 것도 안토니아 세르히가 죽고 난 뒤 고작 한 달을 채우지 못했다.
마물은 나타나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설사 그게 지엄한 황제의 침실이라 할지라도.
제국은 하루아침에 황제를 잃었다.
그나마 지금 영지로서 기능하는 곳은 서북부의 일부 지역과 북부의 트라체스 대공령, 그것도 주도에 한해서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리카르도는 10년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저 평범한 데뷔탕트 무도회였다.
리카르도는 어리숙한 소녀를 보았다.
“미안하게 되었네, 커튼이 내려가 있지 않아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
“아, 아니에요. 저는 다 쉬었으니 나가도 괜찮아요.”
소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갓 수도에 올라온 게 빤히 보이는 어리숙한 소녀는 맑은 백금발과 어딘지 울적해 보이는 물빛 눈을 가지고 있었다.
테라스에서 홀 안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넘어지려 하는 소녀를 붙잡았을 때, 리카르도는 소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낯선 남자에게 부끄러움을 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팔에 닿은 체온에 깨달았다.
“열이 있어, 몰랐나?”
“네? 아, 아니요…….”
“이렇게 열이 나는 걸 아는데도 데뷔탕트 무도회에 나왔다고?”
평소라면 손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그 소녀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어딘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여서.
“호의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내가 그대를 데려다주지.”
“네……?”
“내가 그대를 데려다주겠다고 했어, 아픈 숙녀를 두고 가는 것은 신사로서 할 일이 아니니까.”
솔직히 말해 헛소리였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가족을 제외한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날부터 그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했다.
이스베르가 또한 그게 자신들의 몫이라고 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그래서 리카르도는 무감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전장에서 보내며 사선을 수없이 넘었기에 더더욱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러니 그날의 제안은 리카르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변덕이었다.
“아, 아닙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작은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셔요.”
“작은아버지?”
“네…….”
소녀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리카르도는 대충 사정을 눈치챘다.
이스베르가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이런 귀족 아가씨들을 도와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 모두 앞으로의 기반을 위한 일종의 준비 과정이었지만.
“그럼 잠시 기다리게.”
“네?”
“이대로 나갔다가는 분명 쓰러질 거야, 내가 약이라도 가져다줄 테니.”
“네? 아, 아니…….”
리카르도는 그대로 소녀를 테라스에 준비된 의자에 앉힌 뒤, 자신의 겉옷을 둘러 주었다.
“이것만큼은 나도 양보할 수 없어. 금방 다녀오겠네.”
“저, 저어…….”
“정말 몇 분이면 돼.”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홀로 향했다.
누군가 들어올 수 없도록 커튼까지 내려 두고.
어릴 적에는 황궁에서 살았던 그였기에 황궁 지리는 훤히 알고 있었다.
약을 받아 돌아오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긴 건 어리숙한 소녀의 얼굴이 아니라 잘 개켜진 자신의 겉옷과 온기가 남은 소파였다.
그리고 그날, 얼마 지나지 않아 리카르도는 신관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신의 가호가 깃들었습니다!”
덧붙여 질세라 외치는 제 조카 세르미아의 목소리도.
“주신께서 보낸 성녀시다! 극진히 모셔라!”
그 어리숙한 소녀가 바로 안토니아 세르히였다.
* * *
리카르도는 그 뒤에도 한 번씩 생각하곤 했다.
그날 억지로라도 그녀를 집에 돌려보냈다면 운명이 바뀌었을까, 하고.
다음에 만났을 때, 안토니아는 지독한 열 때문이었는지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세르미아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경계는 했어도.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 전하.’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세르히 백작 영애가 아니라 세르히 소백작이 되어 있었다.
황태자의 비호 아래 황실에서 머무르며 그녀는 바올로에게서 자신의 것을 하나씩 되찾기 시작했다.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작은아버지를 두려워하며 떨던 소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게 안토니아가 잘못한 선택 중 또 하나였다.
이스베르가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세르미아가 절대 그 아이를 놓아주지 않겠어.”
“세르히 소백작…… 말입니까?”
“그래.”
“평범한 아가씨 같았습니다만.”
그 말에 이스베르가는 리카르도를 천하의 멍청이 보듯 바라보았다.
“진심이니?”
“……아닙니다.”
“그래, 너도 아는 그 이유 때문에 말이야.”
가호의 힘을 지닌 것만으로도 세르미아가 안토니아를 절대 놓지 않을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데 그 어린 아가씨는 지나치게 영리했다.
무기를 하나 쥐여 주자 그녀는 당연한 것처럼 자신이 빼앗긴 것을 돌려받기 시작했으니까.
순진한 아가씨가 큰 도움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황태자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으니까.
그 어떤 귀족에게 똑같은 것을 주어도 안토니아만큼 잘 해내지 못했으리라.
“차라리 신전이 보호하는 게 그 아이에게는 나을 텐데 말이야.”
“신전 쪽에 정보는 계속 흘리고 있습니다만.”
“세르미아가 작정하고 나서는데 쉽지 않겠지, 명분 싸움이니까. 게다가…….”
“게다가?”
리카르도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이스베르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번 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레미야가 있잖아.”
“…….”
이스베르가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리카르도는 어쩐지 가슴이 갑갑한 것을 느꼈다.
그때 그는 앞으로 판세에 유리한 카드 하나를 그대로 내어 줄 참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 * *
‘바보였구나.’
리카르도는 오러를 실어 마물을 베어내며 그렇게 생각했다.
벌써 며칠째, 아니 몇 달째일까, 이런 옛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는…….’
이 지옥 끝에 위치한 것이 무엇인지 직감하고 있어서일까.
그는 순순히 그때 자신이 품었던 감정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리카르도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작은 마물이 후두둑 쓰러졌다.
‘안토니아 세르히에게 관심이 있었어.’
그 감정이 감히 이름을 붙일 만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키워 보기도 전에 사그라트렸던 것이니까.
하지만 이 순간에 이토록 후회가 되는 걸 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밖에 없었다.
‘그 손을 붙잡고 도망칠 것을.’
데뷔탕트 무도회가 아니었더라도 기회는 몇 번쯤 더 있었다.
멍청한 제레미야에게 그 손을 넘겨주기 전에 자신이 용기를 냈더라면.
‘그랬다면 그 안타까운 소녀는 죽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는 것은 그것 하나였다.
* * *
끝내 안토니아는 마지막까지도 이용만 당하다 눈을 감았다.
가호를 가진 자라는 이유로 안토니아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두었으니까.
서북부의 마물 토벌에 참가했던 것 또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그녀의 조부모가 산다는 걸.
바보같이 세르미아가 연락을 차단하고 있단 사실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안토니아의 죽음을 안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버텨 주고 있었다.
영주로서의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전하! 라테르 후작님께서…….”
오늘까지인 모양이었다.
리카르도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전하는 드비를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라테르 후작이 버티지 못했으니 풀멘 변경백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한쪽 날개를 잃은 새가 어떻게 오래 날 수 있을까.
“서북부마저 버티지 못하는가.”
“……전하.”
드비도 자신도 사실 이 지옥이 끝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미 드비는 제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는 슬퍼하거나 울 시간도 없이 리카르도의 곁을 지켰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재난은 드비만을 향하지 않았다.
리카르도 또한 자신의 친혈육을.
‘괜찮아, 리카르도. 나는 충분히 살았어.’
그 허망한 유언 한 마디와 함께 떠나보내야만 했다.
잔인하게도 누나를 꼭 닮은 조카마저 마물이 앗아가 버렸다.
그를 지탱하는 건 오로지 자신이 대공이기에, 영지민을 지켜야 한다는 그 책임감 하나뿐이었다.
또 시끄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마물이 솟아났다.
리카르도는 검을 들었다.
탄환의 보급도 어려우니 총을 쓰는 건 정말 위험할 때만으로 남겨 두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마물을 베고 쓰러트렸다.
과연 이 지옥은 끝이 오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전하……! 이제 그만 피하십시오! 전하만이라도…….”
끝없는 마물은 자신이 등을 댈 수 있는 유일한 상대마저 삼켜 버렸다.
그의 유언은 자신의 안부였다.
평생 놀려 먹기만 했으면서.
리카르도는 그 유언도 지키지 못하고 계속해서 검을 놓지 않았다.
도망간다 한들, 도대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그 어느 곳도 저 지긋지긋한 마물에게서 안전하지 않은데.
그래서 리카르도는 이곳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목숨 하나로 영지민 한 명이라도 조금이나마 그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닐까.
멍청한 자신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어딘가 살아남을 틈바귀라도 찾는 자가 있지 않겠는가.
리카르도가 품을 수 있는 희망은 오로지 그것이었다.
그로부터 십수일을 리카르도는 버텨 냈다.
기사들이 모두 쓰러지고 영지민들 중 살아남은 자가 정말 있을까, 그런 의문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억겁의 시간이었다.
마물들은 제어기를 잃은 기계처럼 날뛰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년 전, 여우 같던 루퍼스 크롬프트의 기계에 좀 더 투자할 것을 그랬나.
리카르도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줄곧 보험처럼 메고 있던 장총을 들었다.
“이게 마지막이구나.”
칼조차도 날이 모두 빠져 오러를 실어도 너무 효율이 떨어졌으니까.
리카르도는 침착하게 호흡하며 총구를 마물에게 겨눴다.
가장 큰 마물을 처리하고 나면 그래도 몇몇은 살 수 있겠지.
막연한 희망을 걸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깔끔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음 마물이 자신을 덮쳤을 때, 그는 순순히 마지막을 받아들였다.
이미 체력은 떨어진 지 오래였고 무거운 팔을 허우적거리듯 휘두르는 게 최선이었고 무기조차 없었다.
한 마디로 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지막 순간, 리카르도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다시 만난다면.’
정말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그 손을 잡고 도망이라도 치겠어.’
멍청한 자신을 그녀가 밀어낸다 하더라도-
두 번 잃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