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8. 차곡차곡 쌓아 가는 나날
첫 아이가 태어난 뒤, 리카르도는 사실 좀 긴장했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안토니아가 농담처럼 하던 말이 있었으니까.
‘아들이면 리샤르라고 이름 붙일까?’
그는 솔직히 말해서 ‘리샤르’라는 애칭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안토니아와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때는 자신이 나이보다 어려 보이고 예쁘단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는 얼마나 배부른 소리를 했던 건지 깨닫고 말았지만.
물론 자신의 아이에게까지 속 좁게 굴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안토니아에게 ‘리샤르’라고 불리는 걸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안토니아가 아이를 낳고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물론 자신이 선수 쳐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생해서 낳은 건 안토니아였고, 두 사람의 아이니까.
* * *
안토니아가 입을 연 건 아이가 태어나고 사흘이 지난 뒤였다.
“이름을 뭐라고 붙이지?”
안토니아는 그사이 생각한 게 없냐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정해도 돼?”
오히려 그 시선에 놀란 건 리카르도 쪽이었다.
물론 그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아이인데 어떻게 기쁘지 않고 감격스럽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이름은 몇 가지 있었으나, 이건 그의 습관 같은 거였다.
자신의 의견이 있다고 해도 안토니아가 의견이 있다면 그쪽을 따르는 게.
물론 늘 그렇게 행동해 왔어도 지금까지 생각해 보면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묵살당한 적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안토니아는 그럴 때는 꼭 자신에게 의견을 물어 왔으니까.
리카르도의 반문에 안토니아는 작게 웃으면서 답했다.
“그럼, 리샤르가 정한 이름이 예쁘면 그걸로 하면 좋지. 내가 열심히 힘내서 낳았으니까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그렇지? 안토니아는 눈만 말똥말똥 뜬 아기를 보며 웃었다.
리샤르는 그녀의 곁에 앉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 생각해 둔 이름은 있었지만, 사흘 동안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딱 어울린다 싶은 이름은 하나였다.
“유스비안은 어때?”
“유스비안?”
안토니아의 반응이 호인지 불호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신이 결정하는 대신,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유스비안, 네 이름으로 마음에 드니?”
신기하게도 안토니아가 그렇게 부른 순간 표정 변화 없이 두 사람을 구경하듯 굴던 아기의 입가가 배시시 풀렸다.
“좋아, 우리 유스. 마음에 들었어요?”
금세 줄여 부른 애칭에도 아이는 뭐가 좋은지 방긋거리는 얼굴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리카르도는 자신의 애칭을 지키고, 아이는 유스비안 트라체스 세르히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 *
아이들의 성을 어느 쪽으로 따를 것이냐에 대해서도 사실 두 사람은 좀 고민했었다.
두 사람이 계승권을 가진 영지가 세 군데고, 제국은 영지 계승자는 해당 영지의 성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는 서로 부부였음에도 성을 따로 썼다.
“그냥 아이들에게 맡길까?”
“맡긴다고?”
“응, 어차피 지금 당장은 나도 풀멘 성을 쓰지 않으니까.”
물론 풀멘 변경백이 된 뒤에도 이미 세르히 백작이기 때문에 굳이 성을 붙이거나 바꾸진 않아도 됐다.
“트라체스와 세르히를 함께 쓰다 데뷔탕트 무렵에 결정하면 되지.”
“하긴.”
“더 마음에 드는 성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야.”
안토니아는 아이들에게 태어난 순서나 성별로 영지 계승권을 정하고 싶진 않다고 이야기했다.
“뭐, 개인적으로 다른 곳은 몰라도 풀멘 변경백령은 딸이 물려받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건 그래.”
리카르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보다도 풀멘 변경백령은 지금껏 여성 영주가 많았던 영지였으니까.
모계 성향이 워낙 크기도 하고.
물론 풀멘 변경백령에 대해 알아보다 모계 계승을 위해 은근히 서류 조작을 많이 했다는 것도 깨달았으나, 둘 다 모른 척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와선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만큼 중앙에서 서북부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단 증거기도 했고 말이다.
* * *
두 사람의 첫 아이인 유스비안은 생각보다도 꽤 겁이 많고 울보였다.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는 사교계 시즌이 시작되었던 가을이었기에 안토니아와 리카르도는 백작령에서 머물며 아이에게만 집중했다.
간간이 리카르도는 어쩔 수 없이 수도나 대공령에 다녀오는 일이 있었으나, 보통은 백작령에서 머물렀다.
덕분에 백작령에서 떨어져 지내야 했던 건 로레나와 드비 쪽이었다.
“사실은 내가 대공령에서 지내고 로레나와 마틴에게 백작령을 부탁하는 게 더 효율적이긴 한데 말이야.”
“효율이 아니라 네가 편한 쪽을 택해야 하는 거잖아, 이런 경우엔.”
“그래서 로레나를 대공령으로 보낸 거잖아.”
이런 경우 안토니아를 대신하기 위해 공부했던 로레나는 뜻밖에 리카르도를 돕게 되었다.
그녀는 안토니아와 떨어져 지내는 걸 무척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게 제 의무겠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 전하가 부재중이신 동안 제가 힘낼게요.’
물론 그 결정엔 곁에 드비가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드비가 바보처럼 구는 것도 친한 사람, 그러니까 그가 안심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만이라는 것도 함께 지내며 알게 되었으니까.
괜히 리카르도가 오래도록 곁에 둔 게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행정적인 부분은 대부분 로레나의 몫이었지만.
아무튼 여러 사람의 도움 덕에 안토니아와 리카르도는 1년 동안 유스비안의 육아에 신경 쓸 수 있었다.
아이는 말은 더뎠으나 신체 발달은 빨랐다.
첫 생일을 맞기도 전에 제법 잘 걸어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게다가 리카르도의 아들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안토니아에게만 해당 없던 풀멘 변경백의 피가 흐르는 건지 체력도 무척 좋았다.
아기들의 체력이 좋다고는 해도 그 이상으로 좋았다.
“아무래도 말이야.”
“응?”
안토니아는 신나게 방 안을 뒤뚱거리며 돌아다니는 자신의 아들을 보며 결정을 내렸다.
이대로는 유스비안을 담당하는 하인이나 유모가 먼저 지치겠단 생각이 들었다.
“유스에게 기사를 붙여 줘야겠어.”
“기사?”
“응, 기사를 붙여 주면 아무리 유스라고 해도 지치지 않을까?”
그러나 안토니아의 이야기에 리카르도는 무척 찔리는 듯한 눈으로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흐렸다.
“너 닮아서였구나, 리샤르.”
“……아이는 건강하면 좋은 거야.”
“그건 그래. 유스, 이리 오렴.”
“암마!”
안토니아의 말에 아이는 뭉그러진 발음으로 신나서 달려왔다.
덧붙여서 유스비안은 엄마보다 아빠를 훨씬 빨리 말했다.
아무래도 머무는 곳이 백작령인 만큼, 안토니아 쪽이 할 일이 더 많은 탓이었다.
쌩쌩한 아들의 체력을 감당하는 것도 리카르도 쪽이 더 나았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런 이유를 다 떠나서도 리카르도는 낳느라 안토니아가 고생했으니, 당연히 육아는 자신이 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토니아가 이에 대해 이스베르가에게 편지했더니, 잔뜩 폭소한 듯한 답장이 돌아왔다.
[안토니아, 냉큼 넘겨 버리렴. 이 말은 정말 진심이란다.
네가 리카르도의 어린 시절을 봤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아마 지금처럼 고민도 하지 않고 결정했을 테니까 말이야.]
늘 그렇듯 이스베르가의 조언은 정확했다.
안토니아는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유스비안과 오래 시간을 보냈다면 체력이 버텨 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으니까.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침대 위에서 자신의 남편과 아들이 나란히 잠든 모습을 보는 것도 무척 행복한 일이었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제게 와 폭 안기는-아직 어린데도 달려오는 기세가 매서워서 리카르도는 안토니아가 아이를 안을 때마다 걱정하며 뒤를 받쳐 주곤 했다-유스비안을 꼭 끌어안고서 흐뭇한 얼굴을 했다.
“어쩜 이렇게 우리 유스는 예쁠까.”
아마 다 크고 나면 리카르도와 비슷한 검은 머리가 되겠지만 지금은 옅은 갈색빛이라 포슬포슬하게 예뻤다.
눈은 안토니아와 비슷하게 물빛에 가까웠는데, 이것도 어떻게 바뀔지는 다 커봐야 안다고 이스베르가가 이야기했다.
“나도 예쁘다고 해 주면 안 돼?”
안토니아의 표정에 리카르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다행히도 이제 그는 ‘예쁘다’에 예전처럼 집착하진 않았다.
하지만 안토니아가 유스비안을 보며 뿌듯해할 때마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물어보곤 했다.
아들에게 질투하는 것은 아닌데, 자신의 어릴 때와 똑 닮은 얼굴을 보면 좀 복잡한 감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내 리샤르는 잘생겼지.”
“유스, 기억하렴. 넌 꼭 예쁘다는 말이 싫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라야 해. 엄마가 네 얼굴을 무척 좋아하니까.”
“우응?”
안토니아는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리카르도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은 거의 진심이었다.
유스를 보며 행복해하는-사실 얼굴 때문이라기보다, 그냥 자신과 리카르도의 아이라서 마냥 좋은 거였지만-안토니아를 보며 다행이라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래서 안토니아는 리카르도에게도 들으라는 듯 이야기했다.
“엄마는 네가 크고 싶은 대로 커도 상관없어, 유스. 어차피 달라져도 무척 잘생겨질 테니까.”
마지막 마디 때에는 유스비안이 아니라 리카르도와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리카르도가 그 모습에 자신도 이제는 그 사실을 안다는 듯 미소 지으며 안토니아에게 입을 맞췄다.
* * *
유스비안의 첫 생일 파티는 두 번 치러졌다.
한 번은 세르히 백작령에서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를 불러 그리 크지 않게 보냈다.
아이는 알렉산드라에게는 잘 안겼는데, 베네딕트를 보면 크게 울어 댔다.
“할아버지란다, 유스비안. 어흥 하지 않아요.”
“포기해, 베네딕트.”
“아, 알렉산드라. 하지만요.”
“그대의 얼굴은 나에게만 예뻐 보이면 되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저도 증손자에게 사랑받고 싶단 말이에요.”
다행스럽게도 이틀쯤 지나면 베네딕트의 배 위에 꼬물꼬물 올라가 잠들 정도로 괜찮아지긴 했지만.
문제는 만날 때마다 알렉산드라는 알아보면서 베네딕트의 얼굴은 홀랑 까먹는다는 것이다.
아이의 첫 생일 파티 이후 안토니아와 리카르도는 오랜만에 수도를 방문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이스베르가는 웃음을 터트리며 이야기했다.
“어쩜, 얜 누가 봐도 리카르도의 아들이구나.”
“그렇지요?”
“그래, 얼굴만이 아니라 하는 행동도 말이야.”
이스베르가가 웃으면서 팔을 벌리자 유스비안은 베네딕트에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리카르도도 그랬어, 어릴 때.”
“그랬다고요?”
“아바마마, 그러니까 돌아가신 선황 폐하만 보면 울었거든. 아, 그리고 대공령 기사들한테도 엄청 낯가리고 말이야. 남자 어른들을 별로 안 좋아했어.”
“어머나.”
“걔는 기억에 없다고 하겠지만.”
이스베르가의 말에 안토니아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유스비안이 사고를 칠 때마다 은근히 딴청을 피우곤 했으니까.
그래도 그게 싫다기보다는 그냥 귀여웠다.
자신이 보지 못한 그의 성장 과정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무튼 유스비안은 특수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두 번째 생일 파티를 수도에서 치르게 되었다.
안토니아는 작은 규모로 치르고 싶어 했으나, 그녀가 임신, 출산으로 수도를 거의 2년간 오지 않은 탓에 이 기회에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워낙 많았다.
물론 유스비안 자체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대로 안토니아가 아이를 더 낳지 않을 경우 세 가지 굵직한 작위의 주인이 될 아이니까.
물론 안토니아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정말로 셋이나 낳을 생각이야?’
유스비안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고생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리카르도가 그녀에게 물었다.
‘응. 나는 내 아이가 너무 많은 책임을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토니아는 잘하고 있는데도?’
‘내가 해 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심지어 안토니아는 ‘사도’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더 바빴다.
없으면 없는 대로 굴러갈 텐데, 막상 눈에 보이니 가만히 두질 않는다고 해야 할까.
물론 안토니아 본인은 그 책임들을 싫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힘든 건 사실이었다.
애초에 회귀하면서 그녀가 바랐던 건 세르히 백작으로서 소소하게 중앙과 연도 맺지 않고 사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너무 주목받고 그녀의 품 안에도 주렁주렁 너무 많은 게 안겨졌다.
‘큰 책임을 원한다면 꼭 영지가 아니더라도 다른 길도 있고 말이야.’
안토니아가 이스베르가의 보좌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영주님이 되기 싫은 아이가 있을 수도 있잖아.’
‘그건…… 그래.’
리카르도가 누구보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는 트라체스 대공이긴 하지만 안토니아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는 사실 정말로 견습 기사 리샤르라는 신분이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대공으로서도 충분히 훌륭했고 능력도 되었으나, 그는 전장이 더 어울렸고 자유로워 보일 때가 많았다.
‘그러니까 난 할 수 있는 한 선택지는 마련해 주고 싶어.’
그 말에 리카르도는 염려하면서도 더 반대하지는 않았다.
안토니아는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리카르도를 택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욕심이 있는 자 중에서는 영지를 오히려 한 명에게만 물려주어 집안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
* * *
“어머나, 너무 사랑스러운 도련님이네요.”
“세르히 백작을 닮은 모양이에요, 이 귀여운 모습이라니.”
리카르도의 어린 시절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유스비안의 귀여운 얼굴을 보며 모두 그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리카르도의 얼굴에서 동글동글한 유스비안의 얼굴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황제 아달베르트처럼 어릴 적 리카르도를 아는 사람은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쩜 이렇게 리카르도와 판박인 게지…….”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 깜짝 놀랐습니다. 어릴 적 대공 전하를 보는 듯해서.”
황제의 가장 곁을 모시는 시종장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는가?”
“대공 전하가 황자님일 시절에 하셨던 일들이 생각나지 뭡니까.”
“아, 그렇지. 황태자 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적이 있었지.”
아달베르트의 말에 시종장은 그저 추억이라는 듯 빙그레 웃었고, 리카르도는 조용히 침묵만 지켰다.
그도 기억에 있는 일인 모양이었다.
“그 정도는 귀여운 어린아이의 장난이지.”
아달베르트는 유스비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드물게도 유스비안은 아달베르트에게는 크게 낯을 가리지 않았다.
“알맹이는 안토니아를 닮은 모양이구나.”
울지 않는 유스비안을 보고 한 말에 리카르도도 안토니아도 의아한 얼굴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유스비안이 크면 클수록 황제 아달베르트의 말은 맞아떨어졌다.
안토니아가 놀려 대는 리카르도의 ‘귀여운’ 성격은 물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오히려 안토니아와 더 닮은 성격으로 자랐으니까.
* * *
유스비안이 태어난 이후, 안토니아는 중앙보다는 영지의 내실을 다지는 쪽에 더 신경을 썼다.
신전이 에밀리오의 지휘 아래 제대로 정비가 되고 그녀 또한 필요할 때는 가호의 힘을 아끼지 않은 덕에 마물 소동도 점차 가라앉는 추세였으니까.
게다가 이스베르가도 몇 사람에게만 부담이 가중되는 구조가 그리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유능한 자라고 생각되면 발탁하여 아낌없이 부려 먹었다.
덕분에 여성 작위 계승자나, 새로 단승 작위를 받는 여성들도 많이 늘어났다.
안토니아나 발렌타인, 심지어 황태제 자리에 있는 이스베르가까지 모두 걸출한 실력을 보여 준 탓에 여성은 실력이 모자란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들도 점차 줄어들었고 말이다.
어떤 멍청한 자는 발렌타인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 그녀가 신은 높은 하이힐에 정강이를 찍혀 두 달은 외출을 할 수 없었다.
물론 수도에서도 영영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작위를 물려받아 드란제아 공작이 된 그녀의 남편이 그의 집안을 이 잡듯 뒤져 파산시켜 버렸으니까.
이스베르가는 그에 대해서 당연한 듯 대꾸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내가 보좌로 기른 보람이 있지, 애초에 그렇게 영지민들을 괴롭히는 자들이라면 진작에 털렸어야 하는 거고.’
이스베르가는 의무라서 받아들인다는 태도를 취한 것과는 별개로 황태제로서 매우 훌륭한 행보를 보여 주었다.
오히려 제위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이라서일까, 그녀는 자신의 권력욕보다도 본래 황태제의 의무 쪽에 더 집중했다.
황제의 아이가 아니라 형제였기에, 그녀는 황실의 치부도 과감하게 밝히고 근본적인 부분들을 정리했다.
서북부가 부당하게 짊어지던 책임에 대해서도 충분히 보상했으며, 그 외 귀족들의 악습이나 폐단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뿌리 뽑으려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아낌없이 안토니아의 이름도 이용해 먹었다.
‘있는 건 써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물론이에요. 좋은 일에 쓰이는 거니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회귀 전 황태자처럼 치졸하게 자신의 앞으로 공을 돌리는 짓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스베르가는 그런 것에 별로 욕심이 없었으니까.
‘난 세르미아보다는 운이 좋지.’
‘운이 좋다고요?’
‘난 너희를 굳게 믿을 수 있으니까. 그거 아니, 안토니아?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도 능력이란다.’
‘알 것 같아요.’
신뢰하지 않는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는 신하는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이스베르가는 안토니아가 단순히 제 친동생의 아내이기에 믿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안토니아는 자신이 황제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황제가 이스베르가를 선택한 것도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다.
이스베르가는 정말로 그 지위의 책임도 무게도,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방법도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의 딸인 울피나는 정말로 그녀가 ‘황태손’이라는 지위에 올랐을 때 두려워하며 안토니아를 찾아왔다.
* * *
그날은 안토니아가 느긋한 오후를 즐기던 날이었다.
울피나의 나이 열여섯, 안토니아는 어느덧 스물여덟이 된 해의 9월.
안토니아는 두 번째 아이인 딸 빅토리카를 안고서 따스한 가을 햇살을 즐겼다.
유스비안은 어머니 품에 안긴 빅토리카를 보며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배시시 웃었다가, 대공저 정원을 뛰어다니며 꽃을 꺾어 와 내민다거나 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괴롭힐 아버지 리카르도가 없었기에 그날따라 유스비안은 더 얌전히 굴었다.
신기하게도 유스비안은 여동생이 태어난 뒤, 질투를 하는 게 아니라 의젓해지는 쪽을 택했으니까.
그렇기에 급작스레 방문한 울피나를 발견한 게 유스비안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아-! 울피가 와써요!”
다섯 살이 되었으나 유스비안은 아직까지도 발음을 조금 부정확하게 하곤 했다.
리카르도도 어릴 때 그랬단 이야기를 들었기에 안토니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이의 시절은 충분히 즐기는 게 나은 법이었으니까.
아무튼 연락도 없이 찾아온 울피나는 쭈뼛거리며 안토니아에게 인사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안토니아 숙모님.”
“죄송하긴요, 울피나와 나는 가족인걸요.”
그때였다. 부쩍 어른스럽게 굴려던 울피나가 눈물을 터트린 건.
“숙모님, 저 어떡하면 좋아요? 너무 무서워요.”
평소 그녀답지 않게 흐어엉 하고 터트린 울음소리에 안겨 있던 빅토리카가 살짝 칭얼거리고.
“우, 울피……! 울어? 우지마아! 여기 꽃 이써!”
유스비안이 당황해한 건 덤이었다.
안토니아는 갑작스러운 사건에도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서인지 어지간한 사고에는 이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지경이 되었으니까.
그녀는 폴리를 불러 빅토리카와 유스비안을 데려가도록 한 뒤 울피나의 등을 두드렸다.
다행스럽게도 울피나는 금방 눈물을 그치고서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안토니아 숙모님은 데뷔탕트 이전부터 가문을 이끄셨다고요.”
“그랬지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어요? 저는 공부했지만 무척 두려워요. 제가 어리석은 짓을 할까 봐요.”
“원래 처음에는 누구나 다 어려운 법이에요. 울피나.”
안토니아는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왔던 사랑스러운 그녀를 다독이며 이야기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울피나와 달리 첫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정말 그녀와 같은 나이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바보 같은 선택을 연거푸 하고 말았다.
울피나도 분명히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는 거니까.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실패해도 괜찮아요.”
“실패해도 괜찮다고요? 하지만 저는…….”
“맞아요, 실패하면 안 되는 자리긴 하지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당신이 잘못된 시도를 하기 전에 붙잡아줄 사람이 많잖아요.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요.”
“……숙모님의 말씀은 제가 생각은 실수할 수 있어도, 그걸 바로 잡을 기회가 있을 거란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울피나. 당신에게는 이스베르가 님도 있고 저도 있고, 그리고 감시하듯 지켜보는 많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해 안토니아는 그렇게 다정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울피나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숙모님. 저도 잘 알겠어요. 어머니가 제게 운이 좋다고 한 이야기를요.”
어느새 어른의 얼굴을 한 아이는 어머니와 똑 닮은 말을 내뱉었다.
안토니아는 그걸 보면서 역시 그녀는 이스베르가의 딸이며, 돌아가신 황태후의 손녀란 생각을 했다.
‘어린 울피나도 깨닫는 사실을 폐태자는 몰라서 그렇게 된 거지만.’
진정된 울피나는 안토니아에게 고맙다는 듯 꼭 끌어안더니, 살짝 수줍은 얼굴로 부탁했다.
“숙모님, 저……. 유스비안이랑 빅토리카와 놀다가 돌아가도 될까요?”
“그래요. 황궁에는 제가 연락해 둘게요. 자고 갈래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의 가족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녀가 황태손이 된 지금도 전하가 아니라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는 거고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른스러운 얼굴을 했던 울피나는 금세 열여섯 아이같은 얼굴을 했다.
형제가 없어서일까, 울피나는 안토니아의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
“울피, 이제 안 아파아?”
“응, 안 아파. 유스.”
물론 유스비안이나 빅토리카도 마찬가지였지만.
* * *
폐태자 세르미아, 그의 부고가 전해진 건 안토니아가 울피나와 그런 이야기를 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늦가을 전해진 소식에 노령으로 건강에 부침이 있던 황제는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건강은 회복하였으나 황제는 무척 상심한 얼굴을 했다.
안토니아는 황제를 위해 자주 황궁에 들러 이야기를 하곤 했다.
“정말로 어리석지 않으냐, 내 아들 녀석은.”
“폐하…….”
“울피나가 황태손 자리에 올랐다는 소리를 듣고 스스로 식사를 거부했다더구나.”
정말로 세르미아는 끝까지 자신의 부친에게 너무한 아들이었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솟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던 것인지 질기게 버텼다.
내용을 읽진 않았어도 그가 황제에게 전했던 편지 내용이 하나같이 어리석었다는 사실은 이스베르가가 푸념처럼 이야기해 알고 있었다.
‘나는 오라버니가 잘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세르미아는 정말로 못 됐어. 반성도, 인정도 하지 않으려 하는 녀석이 어떻게 이 자리를 짊어질 수 있겠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조차도 황제에 대한 절절한 원망만 가득했다.
그에게 황제가 진심을 다해 사실을 이야기했음에도 끝까지 아집과 자신만의 진실 속에서 살다 떠난 것이다.
‘단순히 오냐오냐하고 떠받들었다고 모두 그렇게 클 것 같아? 걔는 그냥 못되고 그릇이 모자랐던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알았다면 훨씬 나았겠지. 물론 그걸 바로잡지 않은 건 오라버니의 잘못이야.’
그래서 이스베르가는 딱히 황제를 위로하거나 하진 않았다.
황제 또한 이스베르가에게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그나마 터놓고 이야기하는 건 안토니아가 유일했다.
“사실은 너에게도 해선 안 되는 이야기라고는 생각한다. 이건 짐이 짊어질 업보니까.”
“아니에요, 폐하.”
황제가 미안해하며 하는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토니아가 착해서가 아니라 회귀 전 자신 또한 황태자에게 지독하게 휘둘렸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래서, 자신 정도는 황제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었다.
회귀 전 그래도 황제는 자신을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 주려 했다. 해결하기 전에 세르미아의 손에 눈을 감았을 뿐.
처음 보았을 때는 단단하고 거대해 보였던 황제는 날로 초라하고 쓸쓸해지기만 해서 조금 안쓰러웠다.
“그보다 안토니아.”
“네?”
“짐 때문에 계속 수도에 머무르지 않아도 괜찮아.”
“저는 괜찮은걸요.”
“괜찮기는, 어차피 흘러간 일은 어쩔 수 없는 법이야. 애초에 네가 담아 둘 이야기도 아니야.”
황제는 안토니아의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원래는 두 달 전에 백작령에 갈 생각이었잖느냐.”
황제는 어느덧 불러 온 안토니아의 배를 보며 이야기했다.
세르미아의 부고가 전해진 다음 해 1월, 안토니아는 셋째 아이를 품고 있었다.
* * *
“안토니아, 제발, 제발……!”
봄이 완연한 5월, 백작령이 또 한 번 떠들썩해졌다.
세 번째 출산인데도 불구하고 리카르도는 첫 아이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안해했다.
그는 둘째 빅토리카의 출산을 겪은 뒤 얼굴 한가득 셋째는 갖지 않으면 안 되겠냐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안토니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가 몰래 피임하려다 걸린 것도 수차례였으나, 끝내 승자는 안토니아였다.
뭐, 실제로 세 번째 출산은 리카르도가 사색이 될 만큼 위험하긴 했다.
임신 초기에 여러 일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배가 꽤 커진 뒤에야 백작령에 와서인지 아니면 그저 셋째가 별나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조건 백작님이 우선이네.”
리카르도는 단호한 얼굴로 태의들에게 이야기했다.
안토니아도 체력이 부쳐서 가호의 빛이 이어지지 않고 깜박였다.
리카르도가 정말로 기절할 정도로 낯빛이 새파래졌을 때, 다행스럽게도 셋째 아이가 태어나 주었다.
그 뒤 안토니아가 풀썩 기절한 데다 다른 때보다도 출혈량이 커서 그의 심장을 정말 멈추게 할 뻔했지만.
* * *
“내 리샤르, 얼굴이 이게 뭐야…….”
안토니아가 눈을 뜬 건 꼬박 나흘이 지난 뒤였다.
“지금 내 얼굴 걱정할 때야?”
“어머……. 리샤르가 화를 내잖아. 나한테.”
리카르도는 배시시 웃으며 장난스럽게 건네는 그 말에 크게 숨을 내뱉었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안토니아가 정말로 살아 있다는 게.
“진짜 이제 더는 싫어. 안토니아.”
“나도 더 안 할 거야. 무지 힘드니까.”
“……이번엔 너한테 미움받더라도 고집을 꺾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어.”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그게 얼마나 그에게 큰 의미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는 죽는 것과 안토니아에게 미움받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죽는 걸 택할 사람이었다.
“못 했을걸.”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랬을 거야.”
“그래도 못했을 걸, 그래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걸 알 테니까.”
“안토니아…….”
리카르도가 떨리는 손으로 잡는 손길에 안토니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했어.”
안토니아에게서 나온 말에 리카르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못은 그의 몫이라고 리카르도는 생각했으니까.
“내가 약속한 걸 못 지킬 뻔했으니까.”
“지켰으니까 괜찮아. 안토니아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더 싫어…….”
“리샤르는 수도 없이 하면서?”
“난 모자란 사람이니까.”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손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러니까 모자란 날 두고 가면 안 돼. 정말로.”
“응.”
“정말로……. 난 그럼 숨도 못 쉴 거야.”
“그럼 안 되지, 애가 셋이나 있는데.”
리카르도는 그 말에는 살짝 정색하다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등과 손목에 몇 번이고 입 맞추며 이야기했다.
“나는 네가 제일 중요해, 아이들은 그다음이야.”
“알고 있어.”
정말로 그랬다.
그는 아이들을 끔찍이 아끼는 아빠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안토니아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안토니아는 가끔 아이들을 우선할 때도 있었는데도.
그는 속 좁다 놀림받는 것과 달리, 그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최우선으로 여기는 안토니아의 행동이었으니까.
“괜찮아, 정말로 이제 마지막이야.”
“응…….”
“그래서 우리 아기는? 이름은?”
“딸이야, 카리티나라고 지어 줄까 하는데…….”
안토니아는 조심스레 이야기하는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비안의 이름을 그가 지은 뒤로 안토니아는 작명은 모두 그에게 맡겨두었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 이름은 너무 고풍스럽거나 고루한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유스비안, 빅토리카, 카리티나.
세 아이의 이름 모두 자신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 이상의 이름은 없다고 느낄 정도로.
안토니아는 수척해진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를 꼭 안아 주고 싶은데 힘이 없었다.
그러자 리카르도는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더니 끝내 눈물을 떨어트리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안토니아. 내 심장도, 내 목숨도, 내 숨도 모두 네 거야.”
“응.”
“네가 없으면 난 정말로 안 돼. 응?”
“응. 알아.”
넘쳐흐르는 그의 감정이 느껴졌다.
문득 안토니아는 궁금해졌다.
이토록 리카르도가 자신 없이는 못 살 것처럼 굴어서일까.
지난 삶, 자신이 죽은 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