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25화 (25/29)

#외전 06. 두 사람만의 계절은 천천히

어느덧 결혼한 지도 3년이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안토니아와 리카르도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7월이 되자 트라체스 대공령으로 거처를 옮겼다.

첫해에는 각자 자신들의 영지에서 머무느라 떨어져 지냈으나 그다음 해부터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덕이었다.

3월부터 9월까지 두 사람은 3개월씩을 나눠 각각 백작령과 대공령에서 지내고 그중 중간 달인 6월엔 풀멘 변경백령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건 안토니아를 위한 리카르도 나름의 배려이기도 했다.

안토니아는 세르히 백작이자 풀멘 소변경백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안토니아 본인은 내년부터는 2주 정도로 기간을 줄일 생각이었다.

변경백령에도 익숙해졌거니와 그녀에게도 계획이 있었으니까.

“7월이라곤 해도 그렇게 얇게 입고 바람을 맞으면 감기 들어.”

언제 온 건지 리카르도는 호숫가 그늘에 앉아 있던 안토니아의 곁에 앉으며 어깨에 얇은 겉옷을 둘러 주었다.

“아직 일이 끝났을 시간이 아닌데?”

“일찍 끝났어, 대공령은 그렇게 일이 많은 곳이 아니니까. 미리미리 서류는 받아서 처리하기도 했고.”

“흐음.”

안토니아는 영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종종 일하다 말고 안토니아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멋대로 퇴근하곤 했으니까.

“정말이야.”

그는 안토니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드비 경에게 물어봐야 하나.”

“그 녀석에게 물어봐도 돼, 정말로. 애초에 오늘 일찍 끝난 게 그 녀석 때문인걸.”

“아, 하긴…….”

안토니아는 그 말에 오늘 아침부터 서두르던 로레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2년이 넘게 걸렸네.”

“그러게, 드비 녀석이 바보라서 그렇지.”

“맞는 말이야. 그래도 옆에서 지켜보면서 재밌긴 했어.”

“그 말 꼭 드비한테 해 줘.”

리카르도의 말에 안토니아는 작게 웃었다.

드비가 로레나와 첫 데이트에 성공한 그날로부터 무려 2년 반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드디어 약혼 관계가 되었다.

드비는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으나, 로레나는 대공령에 온 김에 그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분명히 다들 로레나 양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 말 드비 경도 했었는데. 안심하라면서.”

“오랜만에 그 녀석이 쓸모 있는 말을 했는데?”

눈을 찡그리면서 하는 말에 안토니아는 그의 너른 품에 몸을 푹 기댔다.

리카르도는 익숙하게 몸을 열어 안토니아가 편히 기대도록 해 주었다.

“리샤르는 드비 경의 가족을 만난 적 있어?”

“있지, 애초에 그 녀석이 살던 동네에서 주웠으니까.”

“주웠다고?”

“응, 뭘 부숴 먹었다고 혼나서 집에서 쫓겨났길래 말이야.”

리카르도는 그때를 떠올리면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배고프면 따라오라고 했더니 왔거든.”

“정말로?”

“응. 그 녀석 머릿속에서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거든.”

안토니아는 그 말에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뒷날 그 녀석네 집은 난리가 났는데, 드비 녀석은 실실 웃더니.”

“웃더니?”

“내가 책임져 주기로 했다고 하지 뭐야.”

“어머.”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책임질 사람이 있었는데 나한테 청혼을 하신 거였어요?”

“안토니아…….”

질색이라는 듯 얼굴을 찡그리는 리카르도에게 안토니아는 가볍게 턱에 입을 맞췄다.

“농담이야.”

리카르도는 안다는 듯 안토니아의 입술에 키스를 돌려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무튼 다들 좋은 사람들이야. 그 녀석이 기사가 됐다고 덕 보려고 그러는 것도 없고.”

“그건 정말 신기하네.”

“다들 자기 일하면서 사는 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거든.”

리카르도는 그러면서 안토니아에게 드비네 가족에 대한 정보를 술술 이야기했다.

형과 누나가 있으며 여동생도 있는데 모두 다 키와 체구가 큼직하다는 이야기, 어머니는 그 마을 제일가는 목장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누나는 주점을 운영하는데 그녀가 만드는 음식이 엄청 맛있으며, 여동생은 그 집안사람답지 않게 얌전한데 직업은 목수고 대공저에 있는 가구 중 몇몇은 그녀가 만들었다거나.

안토니아는 그가 제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말해 신경이 쓰였으니까.

“형과 아버지는 사냥을 하셔, 하지만 그 집에서 가장 완력이 좋은 분은 역시 어머니시지.”

“그렇구나-.”

“분명히 로레나 양을 데리고 가면 다들 감격의 눈물을 흘릴걸?”

“정말로?”

“정말로, 그분들은 진심으로 드비 녀석이 결혼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거든.”

“자기 아들인데?”

“자기 아들이라서라던데.”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아무래도 드비는 가까운 사람들의 평가가 더 박한 것 같았다.

여전히 수도에서는 인기 많은 기사님이었는데.

로레나와의 약혼까지가 길었던 이유 중 은근한 방해 공작들이 한몫했을 정도로.

“그래서, 좀 안심이 돼?”

“응.”

안토니아의 답에 리카르도도 비로소 안심이 된다는 듯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의 평온은 모두 안토니아에게 달려 있었으니까.

그녀가 불안해하면 그도 그랬고, 그녀가 편안해 보이면 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속이 좁아서 말이야.”

“너무 순순히 인정하는데.”

“안토니아가 그렇다고 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관자놀이와 뺨에 쪽쪽 입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안토니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오래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더라고.”

“그래서 얼른 안심하라고 긴 설명을 해 주신 건가요, 대공 전하?”

“그럼, 그래야 나랑 같이 데이트를 해 줄 거 아니야.”

“지금 이건 데이트가 아니야?”

“날 생각해 줘야 데이트지.”

“이렇게 막 키스를 퍼부으시면서요?”

안토니아가 핀잔을 주듯 이야기하자, 리카르도는 이번엔 입술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래야 빨리 나만 생각해 주실 거잖아요, 세르히 백작님께서.”

“그러게, 아주 정신을 못 차리게 하실 건가 봐.”

“정말로 그래 주면 좋을 것 같을 때도 있는데.”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야, 나도 그럴 때 있는걸.”

“언제?”

“정말로 몰라?”

안토니아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곧 그 말에 담긴 뜻을 깨닫고 귓가를 붉게 물들였다.

“정말로 안토니아 너는…….”

“부끄러움이 없다고?”

“……밤이랑 낮의 얼굴이 너무 달라.”

“그래서 싫어?”

“그럴 리가 있겠어?”

리카르도는 정색하면서 안토니아를 꼭 끌어안았다.

“나만 볼 수 있는 얼굴인데.”

“독점욕 좀 봐.”

안토니아는 마치 그만 그렇다는 듯 이야기했다.

실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는데.

게다가 밤과 낮의 얼굴이 다른 것도 자신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수줍어하고 귀엽게 구는 것도 이럴 때만이니까.

“그래서 사용인들도 하나 없이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중요한 생각?”

“말 안 해 줄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안토니아는 몸을 살짝 돌려 리카르도와 눈을 마주했다.

결혼하고 3년쯤 지나면 남편들의 태도가 좀 바뀌기도 한다는데, 그는 전혀 바뀜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자신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니 그런 쪽으로는 바뀐 걸까.

“이런 얼굴을 보는 게 좋아서.”

“안토니아…….”

“이런 시무룩한 얼굴도 귀엽고.”

“부인께서는 절 너무 놀리시네요.”

“그래서 좋아하잖아.”

“그건…… 맞아.”

리카르도는 순순히 인정했다.

아니, 어떤 점을 이야기하더라도 그는 안토니아가 안토니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좋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안토니아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슬슬 때가 되었나 싶어서.”

“때?”

리카르도는 답을 구하듯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결혼하고 3년, 수도 상황도 꽤 안정이 된 차였다.

어느 정도냐면 사교계 시즌에 신년에만 잠시 얼굴을 내비치고 가호를 써 주면 될 정도로.

게다가 이스베르가는 언제라도 안토니아가 원한다면 휴식을 가져도 좋다고 이야기했다.

“드란제아 소공작과 오르테가 소후작이 결혼해서 이스베르가 님이 새로 일할 몇몇을 더 뽑았잖아?”

딱히 그 둘 중 누군가가 일을 그만둔 것은 아니고, 올해 결혼 후 신혼여행을 떠나며 공백을 메우려고 하다 보니 필연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녀가 황태제가 된 지도 시간이 좀 되어 슬슬 기량이 올라온 후계자들도 있었고.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들은 자극을 받는 법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스베르가 님이 난 보좌 의무에서 좀 벗어나게 해 줄까, 하고 말씀하셨거든.”

“아, 그럼 아예 백작령에서 오래 머무를 때가 되었단 소리야?”

리카르도다운 대답이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리 리샤르, 어쩜 좋지?”

“응?”

“이렇게 나만 생각해서.”

안토니아의 말에 리카르도가 의아한 눈이 되었다.

그녀는 제 사랑스러운 남편의 궁금증을 길게 끌지 않고 곧장 풀어 주었다.

“리샤르, 나 아이를 갖고 싶어.”

결혼하고 3년, 슬슬 아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기였다.

안토니아는 자신의 일을 무척 사랑했고 자신이 가진 의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리카르도, 두 사람이 승계하는 굵직한 영지만 무려 세 곳이었다.

후계자에 대한 생각은 결혼할 때부터, 아니 결혼 전부터 하던 것이었다.

다만 지난 3년간은 워낙 바빴고 안정적이지 못했다.

리카르도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 사실을 깊이 이해한 것인지 피임에 각별히 신경 썼다.

‘난 안토니아가 충분히 준비되기 전에 갑작스러운 일을 맞이하게 하고 싶지 않아.’

리카르도다운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의무가 아니더라도 안토니아는 아이를 원했다.

자신과 리카르도를 닮은 아이라니, 틀림없이 사랑스러울 게 분명했으니까.

안토니아는 이야기하며 그도 비슷하게 여길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어?”

그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놀란 눈을 했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 리샤르와 내 아이.”

안토니아는 혹시 몰라 다시 한번 강조하듯 이야기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좋아할 거란 예상과 달리 굳은 얼굴을 했다.

“안토니아, 혹시.”

“응?”

“영지 후계자 때문에 그래?”

“그런 이유도 있지.”

“그런 거라면 대공령은 울피나가 물려받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어머니가 선황 폐하와 결혼하면서 반쯤 황족령이 된 곳이니까.”

“리샤르?”

“세르히 백작령은……. 그래, 거기는 아이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어쩐지 그는 무척 초조한 얼굴이었다.

아이를 갖자고 하면 당연히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리샤르.”

“응?”

“리샤르는 보고 싶지 않아? 나 닮은 아이.”

“보고 싶어.”

그는 즉답했다.

그러나 걱정 가득한 얼굴로 안토니아의 양어깨를 꼭 잡았다.

“……하지만 내가 낳아 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뭐?”

“안토니아가 고생하게 되잖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으니까, 루퍼스에게 부탁해도 그건 무리라고 이야기할 게 뻔했다.

마법이 만능인 줄 아냐면서 말이다.

“난 아이를 가지고 싶고, 너와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생각이야. 리샤르.”

“난…….”

“무서워?”

안토니아는 그에게 파고들듯 질문했다.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았으니까.

“아빠가 되는 것도 각오가 필요한 일이긴 하니까.”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리카르도는 결코 정상적인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지 않았다.

그가 어린 시절 황실은 꽤 피비린내가 나는 곳이었다.

그의 이복형제들은 다 지금의 황제에게 죽었고, 비슷한 또래의 조카는 그를 줄곧 견제했다.

아빠가 될 자신이 아직 없는 걸 수도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준비가 되기 전까지라고 이야기했듯, 그도 그런 시간이 필요한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건 안토니아 나름대로 애써 리카르도를 이해하려는 사고의 과정이었다.

“아니야, 그런 건 네가 고생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하지 마, 리샤르. 네가 책임감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의 남편이니, 당연히 제 아이의 아빠가 될 사람이지 않은가.

그래서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싫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안토니아, 넌 무섭지 않아?”

“무섭다고?”

“아이를 낳는 건 목숨을 거는 거잖아.”

“…….”

그에게서 이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안토니아가 눈을 깜박이자 리카르도는 정말로 겁이 난다는 듯 안토니아의 손을 양손으로 쥐며 손등에 입을 맞췄다.

“물론 나도 무척 보고 싶어, 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너무 적잖아.”

“리샤르.”

“그거 알아? 누나가 결혼하고 말이야, 울피나를 낳을 때 정말로 죽을 뻔했었어.”

리카르도의 손이 차가워졌다.

“누나는 원래 그런 법이라고 했지만, 목숨을 거는 건 ‘원래’란 말이 붙으면 안 되는 거잖아.”

“…….”

안토니아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스베르가의 말대로 원래 그런 법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알지만 가지고 싶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아이를 낳는 건 여성인 자신의 몫이었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도 보통의 남자들은 리카르도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곤 했다.

결혼했으니 아이를 낳는 건 당연히 아내의 의무라는 것처럼.

아니, 안토니아 본인도 오히려 자신의 일이기에 그렇게 생각한 걸지도 몰랐다.

“나는……. 가족을 또 잃고 싶지 않아, 안토니아.”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카르도의 말이었으니까.

‘어머니도, 이복형들이라곤 해도 가족을 모두 잃은 리카르도니까.’

아니 넓게 보면 조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황제는 자신의 자식 중 그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하고 살 수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곤 해도 말이다.

겨우 생각해 낸 말이라곤.

“그렇게 사람은 쉽게 죽지 않아, 리샤르.”

“알아, 하지만 안토니아.”

그는 애원하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절대라고 확신할 순 없잖아, 나는 네게 혹시라도 그 드문 가능성이 스칠까 봐 무서워.”

안토니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고집을 부리면 울면서라도 들어줄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뜻만 들어주길 바라서 결혼한 게 아니었으니까.

안토니아는 자신보다 훨씬 큰 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알았어, 리샤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도무지 아이는 셋쯤 낳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 * *

물론 안토니아는 아이를 포기할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어떻게 지켜 낸 세르히 백작령인데.

자신이 노력해 얻어 낸 온전한 것을 안토니아는 제 아이에게 꼭 물려주고 싶었다.

그건 풀멘 변경백령이나 트라체스 대공령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걔답구나.”

안토니아가 급하게 찾은 상대는 다름 아닌 이스베르가였다.

“그냥 독한 술이라도 먹이는 건 어떠니?”

이스베르가는 원론적인 방법을 이야기했다.

그 상대가 자신의 남동생이라는 것도 잊은 듯, 아니 오히려 남동생이라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물론 무척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단순히 영지만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아이에 대한 꿈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막무가내로 뜻을 밀어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리샤르는 계속 절 존중해 주는데, 제가 그러면 안 되잖아요.”

“낳는 건 너인데도?”

“그건 그렇지만요. 더 가족을 잃기 싫다는데 어떻게 해요.”

이스베르가가 그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활하기도 하지.”

그 말은 이스베르가에게도 좀 아픈 이야기였으니까.

“사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래.”

“네?”

“어머니도 난산이셨거든, 걔를 낳을 때 말이야.”

“정말로요? 아니, 근데 그걸 어떻게 리샤르가 아는데요?”

“이곳은 황궁이잖니.”

이스베르가의 그 한마디에 안토니아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한마디로 일부러 리카르도에게 그 사실을 말한 사람이 있단 소리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모르진 않았지만, 돌아가신 뒤에 말이야.”

“네.”

“어머니가 죽은 건 난산의 여파가 남아서다, 뭐 이런 식으로 떠든 자들이 있었거든.”

“그걸 리샤르가 믿었다고요?”

“아마도 반쯤은.”

이스베르가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찡그렸다.

“내가 울피나를 낳은 직후에 그 녀석이 오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왜요?”

“당장 죽은 내 남편을 죽이러 올 기세였거든, 내 목숨을 위협했다고.”

이스베르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낳고 싶어서 가진 거였는데,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라고 생각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에선 약간의 의문을 느꼈다.

분명히 이스베르가는 사랑이 아니라 정략적인 이유로 한 결혼이라고 했는데.

그때 그녀의 곁에 있던 기사가 사레들린 듯 헛기침을 한 뒤, 무례했다며 사죄를 표했다.

“음, 왠지 걔는 네가 정말로 후계자 때문에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그렇지요?”

사실 그건 이유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있잖아요, 이스베르가 님.”

“응?”

“어린 리샤르의 얼굴을 또 보고 싶어서 아이가 가지고 싶다고 하면 더 반대할까요?”

오히려 이쪽이 더 솔직한 마음이었다.

안토니아는 어린 그의 얼굴을 무척 좋아했다.

예쁘고 귀티가 나는데, 소년 같은 매력은 고스란히 간직한 그가 제게 어린 시절의 마음을 쥐여 줬으니까.

물론 그 어린 추억이 지금은 사랑하는 제 남편이기 때문에 더더욱 특별했다.

근데 그게 자신의 아이라면 얼마나 사랑스럽겠는가. 안토니아는 꼭 리카르도와 그를 꼭 닮은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그 솔직한 욕망이 서린 표정에 이스베르가가 작게 웃었다.

“반대로 해 보는 게 낫지 않겠니?”

“제 어린 시절을 꼭 닮은 딸이 가지고 싶지 않냐고 말이에요?”

“그래. 네가 보고 싶은 걸 걔한테도 딱 반대로 들려주는 거지.”

마법 열쇠를 통해서 짧은 수도 방문을 마친 안토니아는 대공령에 돌아온 뒤 조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이런 일일수록 오히려 타이밍과 분위기가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게다가 리샤르가 그런 식으로 반응한 건 처음이었잖아.’

이스베르가는 여러모로 고민하는 안토니아를 보며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만.

‘안토니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렴, 한 번쯤 남편을 울려 보는 것도 인생의 좋은 경험이야.’

‘그러기엔 제가 지금까지 너무 괴롭힌 거 같기도 해서요.’

‘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뭐…. 너희는 오르테가 소후작네와 달리 평온한 편이니 이번 기회에 싸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물론 말과 달리 다정한 걱정이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이스베르가는 가끔은 밀어붙이는 게 답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낳는 건 내 몫이지만 부모가 되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니까.’

그러니 더더욱 리카르도를 되도록 울리지 않는 방향으로 설득하고 싶었다.

그를 울릴 거라면 차라리 기쁨의 눈물을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았으니까.

* * *

안토니아가 이스베르가와 만나고 난 뒤부터 리카르도는 묘하게 더 그녀를 신경 썼다.

언제 또 임신 이야기를 꺼낼까 염려하면서도 막상 조용하니 그건 그거대로 걱정스러운 분위기였다고 할까.

‘정말 우리 리샤르 어떻게 하지.’

결혼한 지도 어느새 3년이었다.

게다가 리카르도는 그녀에게 자신의 속내를 어지간해선 숨기려 들지 않았기에 그의 심리 상태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녀가 혹시라도 다치는 건 싫은데, 또 자신의 반대로 원하는 걸 못 하게 되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물론 안토니아는 그런 그의 전전긍긍도 그대로 두고 지켜보았다.

여러 가지로 본인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할 테니까.

그녀가 다시 그를 설득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로부터 2주가 지난 뒤였다.

“두 분이서 물놀이를요?”

“응. 여름이잖아.”

“하지만 대공령은 여전히 서늘해서 물에 들어가기엔 그리 좋지 않잖아요.”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로레나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안토니아를 말렸다.

“대공령이 아니면 되지, 어지간한 곳은 하루 사이에 다녀올 수 있는걸.”

“그건 그렇지만요. 그럼 며칠 정도 자리를 비울 예정이셔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2주를 기다린 데는 둘만의 시간을 내기 위해서도 있었다.

그리고 설득을 위해서 대공령은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뭐, 결론적으로 안토니아는 설득이 되지 않을 경우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는 걸 B안으로 삼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트라체스 대공령은 그의 말대로 울피나가 물려받는다 쳐도 세르히 백작령과 풀멘 변경백령은 그렇게 넘어갈 수 없었다.

아니, 풀멘 변경백령은 하다못해 자신의 외사촌이 물려받는 방법이 있겠지만.

‘세르히 백작령은 아니라고.’

그렇기에 안토니아는 단 한 명, 그리고 되도록 셋까지는 낳을 생각이었다.

거기까지 포함해서 안토니아는 영주의 책임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러다 보면 또 리카르도가 풀 죽거나 자신을 향해 애원하거나 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공령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겐 할 수는 없지.’

여기선 그가 이 영지의 주인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번 여행도 안토니아는 당연히 사용인 없이 둘만 떠날 생각이었다.

신혼여행 이후로 그런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리고 일을 치기도 둘만 있는 쪽이 변수도 적고 훨씬 낫지.’

그래서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백작령 내 숲속 오두막이었다.

‘그때는 끝내 거기 머무르는 건 못 했으니까.’

마틴이 정비가 안 되었다며 반대하기도 했고, 백작령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사건이 터져 안토니아가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으니까.

리카르도도 상황을 보고 얌전히 포기하고 그녀의 일을 도왔고 말이다.

“그러니까 폴리랑 함께 준비 부탁해. 아, 그리고.”

안토니아는 작은 목소리로 로레나에게 특별한 무언가도 부탁했다.

로레나는 그 말에 살짝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말로 마틴은 대단한 사람이야.”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 리카르도는 잘 정돈된 주변을 보며 감탄했다.

내부는 예전에 그가 머물렀을 때보다 좀 더 아늑했고 근처에 있는 호수와 숲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10년 만에 방문한 기분이 어떠세요, 대공 전하? 아니 견습 기사님 이라고 불러야 하나?”

“리샤르라고 불러 주는 게 제일 좋지.”

리카르도는 정말로 그때처럼 안토니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답했다.

두 사람은 오두막에 도착해서 근처를 산책하고 정말로 물속에도 들어갔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백작이니, 대공이니 하는 무거운 지위들은 잠시 잊고 어린아이처럼 놀았다.

물수제비를 뜨고 그때를 떠올리듯 총 쏘는 법도 알려 주고, 또 해가 지기 전에는 가벼운 피크닉도 즐겼다.

어둑해진 뒤에는 오두막 근처에 일부러 모닥불을 피워 두고 불빛을 바라보며 서로 기대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사교계 이야기, 신문에서 봤던 이야기, 대공령에서 일어났던 소란이나 백작령에서 테넌이 거의 자경 대원쯤으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

늘 붙어 지냈음에도 함께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해서 이어져 나왔다.

당연히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일이 없었다.

이틀을 꼬박 마음 편하게 논 뒤, 함께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안토니아는 종알종알 이야기를 시작했다.

“10년 전에는 내가 너랑 이렇게 같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정말로? 난…….”

안토니아는 자신이 기댄 그의 가슴팍의 고동이 조금 빨라진 걸 느꼈다.

“……그때부터 안토니아와 미래에 만날 생각만 했는데.”

“만날 생각만 했어?”

“그건…….”

“나랑 약혼할 생각도 했잖아.”

“……그랬지.”

“결혼하고 싶단 생각도 했고.”

“맞아…….”

안토니아가 살짝 고개를 들자, 그가 좀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입 맞출 생각도 했지.”

안토니아는 몸을 일으켜 그의 입술을 쫓아 쪽하고 입을 맞춰 줬다.

아직 잔열이 남은 탓일까, 리카르도는 조금 전의 수줍은 태도는 버리고 그대로 안토니아를 붙잡아 깊게 입을 맞췄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안토니아가 무척 좋아하는 그의 촉감이었으나, 일부러 그를 떼어 놓았다.

“내 리샤르가 그 예쁜 얼굴로 이런 응큼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안토니아.”

“입 맞출 생각도 하고 이런 생각도 했으면서.”

안토니아는 그대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왜 내 어릴 적을 꼭 닮은 아이를 보고 싶단 생각은 안 했어?”

당장이라도 닿을 듯 굴던 그의 눈이 흔들렸다.

2주가 훌쩍 지난 데다, 거기다 안토니아가 기분 전환 겸 여행이라도 가자고 한 탓에 그는 조금쯤 방심하고 있었다.

“안토니아……. 그건.”

“있지, 리샤르. 난 널 설득할 생각이긴 하지만 끝내 넌 내가 하고 싶다는 걸 막지 못할 거잖아.”

안토니아의 말에 리카르도는 부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널 생각해서 포기한다고 해도 마음이 불편할 테고.”

“……그것도 부정은 못 하겠어.”

“그렇지? 그럼 리샤르, 역시 날 믿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이미 엄청 믿고 있는데.”

“아니, 안 믿고 있지. 내 리샤르를 두고 내가 눈을 감을 리 없다는 걸 말이야.”

안토니아는 말하면서도 이게 정말 설득인가 하는 생각을 문득 하긴 했다.

하지만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란 생각을 했다.

“내가 널 두고 어떻게 눈을 감겠어, 내가 조금만 참으려고 들어도 이렇게 전전긍긍하는데.”

“……안토니아, 나는.”

“리샤르, 난 이도 저도 아닌 게 싫어. 내가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해도 넌 걱정할 거고, 포기하겠다고 해도 넌 줄곧 마음 아파할 거잖아.”

“…….”

그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안토니아는 그대로 빙글 몸을 돌려 리카르도의 가슴팍 위에 자신의 상반신을 걸치듯 올라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냥 각오를 다져, 리카르도 트라체스.”

안토니아는 자신의 앞에서만 보여 주는 부드러운 자색 눈동자를 보며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언제 내가 네게 못 지킬 약속을 한 적 있어?”

박력이 넘치는 말이었다.

리카르도는 여전히 무서웠고 두려웠다.

하지만 자신의 아가씨가 얼마나 단단하고 대단한 사람인지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아니.”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행복한 생각만 해, 리샤르. 그리고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응?”

“난 주신의 가호가 깃든 사도거든?”

리카르도는 그 말에 눈을 깜박였다.

“내가 원하는 이상 그 누구도 날 해할 수 없다는 걸 왜 내 바보 같은 리샤르만 모르는 걸까.”

정말로 그 한마디에 바보 같은 얼굴이 된 그를 보며 안토니아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어쩜 이렇게 귀엽고 어수룩할까.

이스베르가가 그냥 밀고 나가라고 한 건 걱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녀에게는 단단한 가호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안토니아는 무력 시위를 하듯 자신의 몸과 리카르도의 몸을 화려한 가호의 빛으로 감쌌다.

“이제 내가 너와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아직도 남아 있으실까요. 대공 전하?”

“……안토니아, 정말 넌.”

“응?”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야.”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던 가호가 제게 깃들어 있어서.

‘내가 선택한 남자가 이렇게 귀여운 겁쟁이니까 말이야.’

안토니아는 그에게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며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희망을 속삭였다.

“아이는 셋은 있었으면 좋겠어.”

“셋……?”

그렇게 많이? 하는 얼굴이었다.

“왜? 키울 자신이 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낳을 자신은 있는데.”

뭐, 정작 한 명을 낳아 보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하나도 급하지 않았으니까.

리카르도는 그녀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난 평생 널 못 이길 테니까.”

“응.”

“대신 안토니아, 한 가지만 허락해 줘.”

“뭔데?”

“어떤 순간이라도 널 우선시해도 된다고.”

안토니아는 그 말에 그의 염려가 섞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호가 있다고 해도 그게 만능이 아니라는 걸, 그도 자신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안토니아는 그게 리카르도 나름의 양보선이라는 걸 알았다.

“응. 알겠어. 리샤르.”

“……역시 좀 걱정이 되지만.”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꼭 끌어안는 그에게 괜히 자신을 못 믿냐는 말을 더하진 않았다.

그건 신뢰나 그런 걸 떠나 어쩔 수 없는 염려였으니까.

세찬 그의 심장 고동이 자신을 쿵쿵 울렸다.

그건 모두 자신을 향한 그의 애정이었기에, 안토니아는 기꺼이 그 걱정도 자신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안토니아는 그로부터 머지 않아 자신의 소망을 이루었다.

첫 아이는 그녀의 바람대로 밝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아이였다.

안토니아는 뿌듯해하는 자신과 아이를 보며 끝내 울어 버리고 만 제 남자의 모습에 짙은 행복을 느꼈다.

정말로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궤적 위에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