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23화 (23/29)

#외전 04. 기사님은 집사님에게 빠져 버렸다.

“그러니까, 어……. 벌써 아홉 번째라고?”

“응.”

리카르도는 오늘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안토니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하고 반년이 지났을 무렵, 두 사람은 수도에 올라와 있었다.

사교계 시즌이 시작되기도 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 다 중앙 귀족의 지위를 갖고 있는지라 연말만큼은 수도에서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여러 가지 편의성을 고려해 머무를 집은 대공저가 되었고 말이다.

아무튼 수도 생활 자체도 벌써 3년 차, 심지어 회귀 전까지 포함하면 몇 년이 더 불어나다 보니 낯설거나 새로운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안토니아가 놀란 얼굴로 리카르도에게 물어본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믿음직한 집사 로레나와 그의 좀 미덥지 못한 기사이자 시종, 드미트리어스 빅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로레나는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는데.”

“드비 녀석하고 달리 진중한 사람이니까.”

“근데 여덟 번이나 차이고도 또 데이트 신청을 한 거야?”

“그런 거지, 그 녀석이 그러는 건 나도 처음 봤어.”

리카르도는 자연스레 안토니아의 옷시중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이 아니라 안토니아는 폴리와 함께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서 드비가 로레나에게 장미꽃 수십 송이와 함께 데이트 신청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물론 결과는 매몰찬 거절이었지만.

“드비 녀석에게 그만 포기하라고 명령이라도 할까?”

리카르도의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야. 이런 걸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그래? 하지만 너무 귀찮을 것 같은데. 그 녀석도 한 번 차였으면 얌전히 단념하면 될걸.”

“한 번 로레나하고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왜?”

리카르도는 마치 ‘드비를 위해서 왜 그렇게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안토니아는 그의 손등을 가볍게 꼬집으며 이야기했다.

“이유가 있을 수도 있잖아, 로레나는 정말 싫었으면 다시는 데이트 신청도 못 하게 거절했을 것 같거든.”

“하긴…….”

“로레나도 뭔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말이야.”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어깨에 가운을 걸쳐 주며 뺨에 입을 맞췄다.

“그래도 너무 아깝잖아, 네 집사에게 드비 녀석은.”

“그래? 그래도 진중하고 멋있다는 평가가 더 많긴 한데.”

“넌 드비의 실체를 알면서. 정말 괜찮은 녀석이면 왜 매번 데이트만 하고 오면 차이겠어.”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확실히 드비는 좀 무게감이 없긴 했다.

‘평소 모습을 기대하고 데이트하면 실망할 것 같긴 하지만.’

다만 로레나는 드비의 평소 모습을 보고도 싫은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작게 웃은 적도 있었다.

‘부탁도 잘 들어준다며 일하기도 편하다고 한걸.’

그러니까 뭔가 외적인 문제가 있다면 안토니아는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그때, 리카르도가 안토니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잡아당겼다.

“왜?”

“계속 드비 녀석만 생각하는 기분이 들어서.”

귀여운 질투였다.

안토니아는 작게 웃으면서 몸을 살짝 틀어 그에게 입 맞추며 이야기했다.

“정말 내 리샤르는 속이 좁기도 하지.”

* * *

“로레나, 드비 경이 싫어?”

갑작스럽게 던져진 안토니아의 질문에 로레나는 깜짝 놀라 눈만 깜박였다.

“벌써 아홉 번이나 거절했다고 그래서.”

“네…….”

그렇구나, 아홉 번째였구나.

로레나는 안토니아가 이야기해 줘서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드비에게 여러 번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안토니아가 정색하고 싫으냐고 물어보니, 자신도 답을 알기 어려웠다.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 이유는 명확했는데.

로레나가 그녀답지 않게 답을 머뭇거리자 안토니아는 서류에서 눈을 떼며 로레나와 시선을 맞췄다.

“딱히 추궁하거나, 강제로 그와 만나라고 하려는 건 아니야.”

“그런 쪽으로 오해한 건 아니에요.”

자신의 주인인 안토니아는 그런 파렴치한 고용주가 아니었다.

로레나가 펄쩍 뛰며 이야기하자 안토니아가 작게 웃었다.

“정말 싫은 거면 계속 데이트 신청을 받는 것도 번거로울 테니, 드비 경에게 제대로 타이를 생각이었어. 나 말고 대공 전하가.”

분명 좋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입이 딱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지, 로레나.”

“……알고는 있어요.”

안토니아가 그녀의 그런 복잡한 속내를 지적하듯 이야기하자, 로레나도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연애라는 게 장부처럼 계산이 딱 떨어지는 게 아니긴 하지만 말이야.”

안토니아 본인도 리카르도를 기다리게 한 전적이 있으니, 로레나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차라리 한 번쯤 데이트해 보는 건 어때?”

“네?”

“오히려 데이트해 보고 나면 깔끔하게 결론이 날 수도 있잖아. 오히려 드비 경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망설여지는 걸 수도 있잖아.”

“앗, 저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로레나는 생각했다.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안토니아와 함께 자랐기에 늘 그녀가 최우선인 생활을 해 왔다.

백작령에 있을 때도 몇 번인가 고백을 받아 본 적도 있었고, 한두 번쯤 데이트를 해 본 적도 있었으나 늘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안토니아 이상으로 우선될 건 없을 거라고 말이다.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로레나, 그게 아니라면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게 예의잖아.”

“네, 그렇지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른 상대에게는 그래 왔다.

하지만 드비에게는 왠지 그게 잘되지 않았다.

안토니아와 리카르도가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자신들도 그와 접점이 많아졌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주인님의 말이 맞아.’

이대로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 로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안토니아에게 말을 내뱉었다.

“드비 경이 또 데이트 신청을 하면 이번엔 확실하게 이야기할게요.”

아마 벌써 아홉 번씩이나 거절당한 거라면 다음은 없겠지만.

안토니아는 그 말에 마치 자신이 마음 편한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러나 로레나의 예측과 다르게 열 번째는 빠르게 찾아왔다.

그로부터 2주 뒤, 연말 파티 준비에 바쁠 무렵이었다.

“저랑 데이트해 주시지 않겠어요, 로레나 양?”

드비는 정중한 태도로 로레나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청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로레나는 무척 바빴고 조금쯤 예민한 상태였다.

“……드비 경.”

“네?”

붉은 머리를 가진 장신의 사내는 기대감이 서린 얼굴로 로레나를 바라보았다.

‘왜 하필 지금’이라는 짜증 섞인 감정이 좀 사그라들도록 말이다. 아니, 맥이 좀 풀린 걸지도 몰랐다.

아홉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이렇게까지 데이트 한번 해 보고 싶을 정도로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단 것도 신기했고.

“데이트할 여성분들이 없으신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저랑 만나고 싶으세요?”

그리고 이건 솔직한 궁금증이었다.

솔직히 말해 로레나는 자신이 남성들이 그리 좋아할 만한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들 저택에서 내쫓기긴 했으나, 로레나를 보며 기가 세다고 한 자들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런 말들에 상처받거나 한 건 아니었다.

로레나는 본인이 집사가 되기로 선택하고 안토니아의 곁에서 그녀를 도울 수 있음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니까.

편견이긴 하지만 왠지 드비는 그런 자신에게 매력을 느낄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공가에서 실력으로는 손꼽히는 기사고, 비록 실체는 진중하지 못한 면이 있다지만 정말 여러모로 조건이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굳이 백작가의 사용인인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

물론 로레나도 일회성으로 가볍게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하필 드비는 제 주인의 남편인 리카르도의 부하였다.

괜히 발을 내밀었다가 껄끄러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드비는 로레나의 질문에 의아하단 얼굴로 시원스레 답하는 게 아닌가.

“그거야 제가 반한 건 로레나 양이니까요, 무척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2년 전부터!”

“네……?”

2년 전이면 안토니아가 막 수도에 왔을 무렵이었다.

“정말이에요, 진심입니다. 저 나름대로 무척 고민하다 데이트 신청을 한 거였어요. 저 같은 거에게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서 동경만 하려고 했는데…….”

“네? 아니, 저 같은 거라니요. 드비 경이 뭐가 어때서요.”

“……네?”

드비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로레나는 그 말에 아차 싶었다. 왠지 무척 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홉 번을 거절하는 동안 드비가 실은 계속 상처받았던 게 아닌가 싶어져서.

그래서 더더욱 로레나는 확실하게 그에게 답을 들려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맞아, 주인님 말대로 나는 드비 경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고 있어.’

그건 확실하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거절을 해 온 이유는 확실했다.

“드비 경,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는 드비 경이 모자란다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니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거절한 게 아니에요.”

“정말입니까?”

드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사실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정말 포기할 생각이었거든요, 하하, 이런 생각을 지금까지 여덟 번쯤 하긴 했지만요.”

정말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로레나 양은 무척 멋지니까, 또 매달려 보면 안 되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요.”

로레나는 어째서 그 까탈스러운 트라체스 대공이 드비를 곁에 둔 것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는 늘 제 주인님이 최우선이에요. 그래서 연애를 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드비 경에게는 대공 전하가 그럴 테고요.”

어차피 서로에게 집중하지 못할 게 뻔한 관계였다.

그러나 그 말에 드비는 정말 들어선 안 될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로레나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결단코 아닙니다.”

“네?”

“대공 전하는 혼자 있으셔도 뭐든지 잘할 분인데 제가 왜 그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그렇게 인생에 낭비되는 짓을 하다니요.”

“어……. 하, 하지만요. 데이트를 하는 사이가 된다는 건 서로가 최우선이어야 되는 거잖아요?”

“꼭 그래야 하나요?”

드비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물론 로레나 양의 최우선이 제가 모르는 연인이었다면 당연히 제가 물러나야 하는 게 맞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최우선은 로레나 양의 신념 같은 거잖아요.”

“그렇죠…….”

로레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저만 로레나 양을 최우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요, 아……. 물론 세르히 백작님 다음으로 저를 우선시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은 합니다만.”

“앞으로 주인님의 일과 당신과의 시간이 겹치면 전 늘 주인님을 택할 텐데도요?”

“상관없습니다. 세르히 백작님도 그러시는데 아무 문제 없지 않습니까.”

로레나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납득하고 말았다.

실제로 안토니아는 리카르도보다도 자신의 의무나 책임 쪽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대로 리카르도는 늘 안토니아가 최우선이었지만.

“그래도 두 분은 아주 눈꼴……. 아니 행복해 보이시지 않습니까.”

드비는 그렇게 말하더니 로레나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 한번 꽃다발을 내밀었다.

“제 답이 당신의 망설임을 걷어 냈다면, 부디 저와 데이트해 주시겠습니까, 로레나 양?”

그답지 않게 무척 진지한 얼굴로.

‘아, 그렇구나.’

로레나는 그 모습에 깨달았다.

지금껏 가벼운 마음으로 데이트에 응할 수 없던 이유를.

아홉 번이나 차이는 내내 드비가 항상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레나는 비로소 그가 내민 꽃다발에 자신도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래요, 정말로 괜찮다면.”

그가 정말로 질려서 발을 빼지 않는다면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사실, 로레나는 진지하고 무게 잡는 사람보다 오히려 그와 같은 사람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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