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어서 오렴, 안토니아. 너도 바쁠 텐데 이렇게 불러서 좀 미안한걸.”
영지로 떠나기 사흘 전, 안토니아는 대부분의 일을 마무리한 뒤 만나야 할 사람들을 찾았다.
물론 약 반년 뒤, 가을쯤에는 수도에 다시 돌아오긴 할 거지만 말이다.
‘반년이면 아주 긴 시간도 아니지만 짧은 시간도 아니니까.’
그런 연유로 안토니아는 오랜만에 트라체스 대공저를 찾았다.
리카르도가 아니라 이스베르가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아니에요, 이스베르가 님. 제가 한창 바쁠 때는 이스베르가 님이 와 주셨는걸요.”
안토니아의 말에 이스베르가는 복잡한 듯한 얼굴로 눈을 찡그리며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그건 그렇네, 내가 이런 처지에 놓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너니까 말이야.”
“네? 그건 좀 억울한 말씀인걸요.”
안토니아의 말에 이스베르가는 웃음을 터트리며 곁에 와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울피나는요?”
“어린애가 지켜보고 있기엔 따분한 일이잖아.”
“울피나에게는 좀 미안해지기도 하네요.”
“뭐, 어쩔 수 없지. 오라버니가 마음을 접지 않으신다면 15년쯤 뒤엔 울피나도 겪어야 할 일일 텐데.”
이스베르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막 검토를 끝낸 서류를 탁 접어 내려놓았다.
“대신 리카르도는 네가 쫓아내 줬으니까 봐줄게.”
“저도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말이야, 진짜 짜증 나지 뭐니.”
이스베르가는 투덜거리며 서류들을 죽 밀어 하녀가 차 트레이를 놓을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럴 때라도 휴식을 취해야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그렇게 대공령에도 신경 쓰라고 할 때는 적당히 굴더니.”
“이스베르가 님을 아주 신뢰해서 그런 거겠죠.”
“지금 리카르도 편을 드는 거니?”
이스베르가가 조금 부루퉁하게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요, 이스베르가 님은 유능하고 리샤르는 못났다는 의미인걸요.”
“하하하, 하긴 그건 그래. 아무튼 정말 못된 남동생이야.”
이스베르가는 오래 일에 몰두해 눈이 지끈거린다는 듯 눈가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날 불러서 일을 떠맡기려 하시기에 난 대공령 핑계를 댈 생각이었거든.”
“어머.”
“그런데 이럴 때 자기가 홀랑 대공령 일은 걱정 말라며 도망치다니, 정말 인생에 도움이라곤 안 되는 남동생이지 않니?”
안토니아는 그 말엔 스스로 찔리는 것이 있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트라체스 대공령으로 그를 떠밀듯 보낸 게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이스베르가는 그런 안토니아를 그저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가 얕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했다.
“정말로 이렇게 돌아가신 어머니 말대로 될 줄은 몰랐어.”
“황태후 폐하 말씀이신가요?”
“응, 어릴 때도 마녀 같다고 생각은 했거든.”
어머니에게 보통은 하지 않을 법한 어휘 선택이라고 안토니아는 조용히 생각했다.
물론 이스베르가 본인은 어머니에게 그리 큰 정이 남아 있지 않다고 이야기했지만 말이다.
“어릴 때 그러셨거든, 넌 분명 누구보다도 이 나라에서 많은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즉위하게 된다가 아니라요?”
“응, 왜 그렇게 되냐고 물어봤더니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알아?”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 딸이니까 그렇지.’라고.”
“네?”
“어머니도 일복은 타고나신 분이었거든, 뭐……. 황태후가 되신 이후에도 내궁 관리를 비롯해서 원래는 황후께서 하셔야 할 일을 다 하셔야 했으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에 왜 황태자가 그토록 오해했는지 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회귀 전 정보나 이번 황태자 일을 통해 실은 황후를 위해 황태후가 전면에 나섰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세르미아 걔도 오해한 거지.”
“이스베르가 님은 역시 다 알고 계셨어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답일 때도 있으니까, 어머니나 돌아가신 황후 폐하께서도 여러모로 오해를 막으려고 노력은 하셨지만.”
이스베르가는 잘 안 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외가가 그렇게 날뛰면 쉽지 않지, 돌아가신 황후 폐하께서 세르미아와 접촉하지 않도록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말이야.”
이스베르가는 그렇게 말하더니 조금 지쳤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덜렁 기댔다.
그러곤 안토니아 쪽으로 고개만 살짝 젖혀 웃으며 이야기했다.
“지나간 일은 대충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이스베르가는 그렇게 말하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좀 궁금했던 내용이지 않았냐는 듯 말이다.
‘이래서 이스베르가 님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 거지만.’
안토니아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내게 귀찮은 일이 떠밀려 온 데는 네 탓도 있잖아, 안 그러니?”
“네?”
“모른 척하지 말렴, 안토니아. 오라버니가 말씀하진 않으셨어도 리카르도도 추측할 법한 일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 아냐.”
“네.”
안토니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스베르가는 좋다는 듯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내 동생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트라체스 대공령이나 잘 관리하라고 맡겨 둘 생각이지만 넌 안 돼.”
“저도 세르히 백작령과 풀멘 변경백령을 관리해야 하는 데도요?”
“리카르도에게는 드비뿐이지만 넌 아니잖니.”
안토니아는 그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제가 어떻게 이스베르가 님의 부름에 거절할 수 있겠어요.”
“그래. 뭐, 그래도 발렌타인 오르테가도 있으니까. 늘 덤덤하던 드란제아 소공작도 발렌타인 덕에 불이 붙은 것 같고.”
이스베르가는 그렇게 말하며 손뼉을 짝 치더니 다시 문서를 끌어당겼다.
맡은 일에서 도망치지 않고 묵묵하게 많은 걸 고려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 * *
영지로 내려가기 하루 전, 안토니아는 중앙 신전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중앙 신전은 황태자의 반역 건으로 명예를 일부 회복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첫 번째 수석 신관이 된 에밀리오의 노력이 컸다.
지금 교황은 원래 세 번째 수석 신관이었던 자로 점잖고 조용하여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는 교황 자리를 에밀리오가 권했을 때도 오히려 거절하려 했다고 이야기 들었다.
‘노웸 신관님, 저는 조용히 주신께 기도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어찌…….’
그러나 에밀리오의 설득에 그는 알겠다는 듯 받아들였다고 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에는 모두 그대에게 넘겨 드릴 생각입니다. 그때는 제 조용한 삶을 보장해 주셔야 합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한 책임을 지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연유로 교황으로서의 일 중 대외적인 일은 오히려 에밀리오가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수도 정화와 결계 강화는 더더욱.
“저희 쪽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사도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안토니아가 중앙 신전을 찾은 건 다름 아니라 영지에 내려가기 전, 방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정확히는 영지에 내려가는 게 늦어진 것도 이것 때문이었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널찍한 판 위에 손을 얹었다.
익숙하게 가호의 힘을 불어넣자 판이 푸른 빛으로 빛나며 신관들이 그려 둔 결계를 따라 영롱한 빛이 퍼져 나갔다.
오래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곧 판의 푸른 빛까지도 영롱한 빛으로 물들었다.
안토니아는 거기까지 보고서 천천히 손을 뗐다.
“크롬프트 씨가 도와주셔서 더 수월하게 끝난 것 같습니다.”
“모두 에밀리오 신관님이 믿어 주신 덕이죠.”
안토니아는 정화 작업을 진행하며 가시적으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루퍼스는 마력과 성력은 좀 다르긴 해도 비슷한 구석이 있으니 자신이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문제는 대체로 마력과 마법을 배척하는 신전의 태도였다.
그때, 에밀리오와 교황이 크게 힘을 실어 주었다.
‘사도님께서 인정한 분을 믿지 않는다 하는 건 신관으로서 좋지 않은 태도이지 않을까요?’
덕분에 수도 정화 작업에 루퍼스가 밤을 지새우며 만든 기계가 투입될 수 있었다.
서북부에도 조만간 사람을 파견할 예정이었고 말이다.
“저희로서는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신전 내부를 단속하지 못해서 이 땅이 위험해졌으니 말입니다.”
“지나간 일에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세요. 중요한 건 앞으로 경각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거니까요.”
안토니아의 말에 동의하며 에밀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북부 분들에게도 뭐라고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쪽도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을 텐데, 떠나시면서 기사단 일부를 남겨 신전 기사단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입만 험하시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눈에 보이는 어려움을 외면할 수 있는 분들은 아니거든요.”
에밀리오의 말대로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는 이미 서북부로 떠난 차였다.
아니, 어지간한 중앙 귀족 일부를 빼놓고는 대부분 사교계 시즌도 끝난 데다 수도도 어수선하여 영지로 떠난 자들이 많았다.
안토니아나 리카르도 쪽에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주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덕분에 안토니아도 좀 느긋하게 영지 복귀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내일 영지로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원래는 겨울쯤 갈 생각이었는데 말이에요.”
에밀리오는 그 말에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동부에 무슨 일이 있다면 꼭 저를 불러 주십시오, 사도님.”
“첫 번째 수석 신관님을 어떻게 사사롭게 부르겠어요.”
“사도님의 일이라면 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에밀리오가 힘주어 이야기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어쩐지 소리 내 웃고 싶다고 생각했다.
에밀리오가 유독 크게 반응하는 건 오로지 자신과 관련되었을 때뿐이었으니까.
‘편해.’
특별 대우는 하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회귀 전, 늘 자신을 보며 더러운 눈빛을 빛내던 교황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 * *
여행을 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리 급하지도 않기에 느긋하게 말을 달려 약 열흘쯤 지났을 때, 폴리가 신난 듯 창밖을 보며 외쳤다.
“주인님, 백작저가 보여요!”
반년 만에 아주 그리웠던 백작령으로의 귀환이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안토니아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사용인들의 우렁찬 외침이 따랐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마틴도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
“고생은요, 저야 집을 깔끔히 잘 지키기만 하면 되었던 걸요.”
마틴은 뿌듯한 얼굴로 안토니아를 맞으며 이야기했다.
“주인님께서 수도에 올라가시기 전 영지 정비를 열심히 해 둔 덕에 큰 트러블도 없었고 말입니다.”
안토니아는 마틴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도에 따라왔던 다른 사용인들에게는 쉬어도 좋다는 듯 손짓했다.
폴리와 로레나만 안토니아의 곁을 따르고 다른 하인과 기사들은 감사하다는 듯 묵례한 후 익숙하게 자신들의 숙소로 향했다.
“그래서 별다른 일은 없었어?”
“영지 내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습니다만.”
“응?”
안토니아는 의아한 듯 마틴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어쩐지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말하는 대신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이틀 전, 풀멘 변경백님이 오셨지 뭡니까.”
“할머니!”
안토니아는 정말 뜻밖의 손님에 깜짝 놀라 알렉산드라에게 다가갔다.
“어쩐 일이세요?”
“손녀의 영지에 찾아온 게 그리도 놀랄 일이냐?”
“놀랄 일이죠, 한 달 전에 수도에서 서북부에 가겠다며 떠나셨잖아요.”
그런데 자신보다 먼저 세르히 백작령에 와 있다니.
도대체 며칠이나 서북부에 머물렀는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갈 때야 루퍼스 애송이가 만든 이동 마법역을 통해 갔으니까.”
“아하.”
“얼른 이쪽에도 이동 마법역을 세우는 게 좋지 않으냐, 뭐 하러 수도에서 마차 여행을 하며 오는 건지.”
“날씨가 좋잖아요.”
안토니아의 답에 알렉산드라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정말 예쁘긴 하더구나.”
“할머니도 오면서 둘러보셨어요?”
알렉산드라는 그 말에 씁쓸한 표정을 숨기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토니아는 그녀가 제 어머니를 생각한다는 걸 알고 옆에 찰싹 달라붙듯 앉았다.
“오신 김에 길게 머무르시다 가셔요. 어머니가 좋아하던 곳도 많이 가 보고요. 아, 그리고 생일 선물로 주신 곳에도 놀러 가 보고요!”
“영지에 일하러 온 게 아니더냐, 온통 놀 생각뿐이구나.”
“할머니가 왔으니 그렇죠, 게다가 마틴이 워낙 일을 잘해서 제가 할 일은 많지 않을 텐데요. 뭐.”
안토니아의 말에 알렉산드라는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면서도 싫단 소리는 하지 않았다.
“리카르도 애송이에게는 일하라고 내쫓아 놓고선?”
“리샤르는 6년이나 이스베르가 님에게 책임을 떠밀어 뒀고, 전 아닌걸요!”
“그건 그런 것 같더구나. 같이 따라온 기사 녀석들이 어찌나 부러워하던지.”
“정말요?”
“그래, 도로를 깔끔하게 정비해 뒀더구나. 10년 전과는 달라.”
알렉산드라의 말에 안토니아는 놀란 듯 눈을 깜박이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영지에 오신 적이 있었어요?”
“그래, 설마하니 정말로 나 몰라라 했을까. 10년 전이 마지막이긴 했지만 멀리서나마 둘러보고 간 적이 있었어.”
“어머니도 보고 가시지.”
“그랬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너도 혼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알렉산드라답지 않은 솔직한 말에 안토니아가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곧 멋쩍은 듯 손녀의 팔을 풀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쉬어라, 느긋하게 왔다고 해도 피곤할 테니. 네 일이 끝날 때까지 백작령에 있을 생각인데 싫다 하지 않겠지?”
알렉산드라의 말에 안토니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죠, 대신 일 좀 도와주셔야 해요?”
“고약한 것 같으니, 아주 날 부려 먹는 데만 점점 능숙해지는 것 같구나.”
“그러려고 오신 거잖아요, 아니에요?”
알렉산드라는 손녀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저 약은 손녀는 머리가 좋으면서도 가끔은 좀 얄밉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손녀이기에 귀여웠지만.
* * *
수도에서 마물이 들끓은 영향일까.
백작령은 초여름부터 예년보다 더 더웠다.
‘왠지 올해 심한 한파가 오긴 할 것 같은걸.’
안토니아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겨울의 대비도 미리 해 두었다.
정작 올라간 기온에 지쳐 한 건 알렉산드라 쪽이었다.
“확실히 아랫지방이라 그런지 금세 더워지는구나.”
“덥다고 하시면서 오늘도 기사단 훈련을 보고 오셨어요?”
안토니아의 핀잔에 알렉산드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것 아니냐, 너와 이 영지를 지켜야 하는 기사단인데. 게다가 네 이름이 알려졌으니 헛짓거리하려 드는 녀석이 아직 있을 수도 있어.”
알렉산드라는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 기사단을 살펴 주었다.
기사단장 라미나는 처음에는 무척 반가워하였으나, 지금은 지나치게 고돼서인지 조금 복잡한 심경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싫다는 소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괜찮아요, 어지간해서는 제 목숨을 위협하긴 힘든걸요.”
자신이 방심해서 당하는 경우가 아니고선 가호가 자신을 지켜 줄 테니까.
제레미야에게 죽은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스스로가 어이없을 지경이었고 말이다.
‘어떤 의미로 제레미야가 그 정도로 큰 사고는 못 칠 거라고 믿은 거긴 하지만.’
그러나 안토니아의 말에도 알렉산드라는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걱정이 안 될 리가 있나, 어릴 적부터 암살자 길드장과 알고 지낸 손녀를 말이다.”
“테넌은 제게 검을 들이대지 않는걸요.”
“암살자는 쉽게 믿는 게 아니다.”
‘그냥 믿는 게 아닌데.’
안토니아는 오히려 그녀와 맺은 철저한 계약을 믿는 편이었다.
‘동부에서 암살 대신 나쁜 짓 하는 녀석들을 손봐 주는 대가로 대금을 지불하고 있으니까.’
그게 지난 6년간 세르히 백작령의 소속된 게 그리 큰 규모의 기사단이 아님에도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했다.
특히 가정 폭력이나 부녀자 폭행 등의 사건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가해자도 있고 피해자도 있었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그런 유의 사건은 테넌에게 맡겼다.
테넌은 특히 약자에게 손대는 쓰레기 같은 남성들에게는 가차 없는 편이었으니까.
루퍼스가 정보까지 쥐고 있었으니 이곳 세르히 백작령에선 그런 유의 범죄는 많이 줄어든 편이었다.
안토니아 본인이 작은아버지에게 당하면서도 어디에 도움 청할 곳이 없었기에 특히 신경 썼다.
‘음, 역시 더 줄었네.’
덕분에 집안 사정이 어렵거나 해서 억지 결혼 당하는 여자아이들의 수도 줄어드는 게 매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안토니아가 도로 정비를 포함해 여러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 낸 덕도 있었지만.
물론 이런 내역을 알면서도 알렉산드라가 손녀 걱정을 거두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신중하게 굴게요. 그러니까 할머니는 조금 쉬고 계셔요.”
“흥, 지금 날 노인 취급하는 것이냐?”
“초여름 햇빛을 무시하시면 안 돼요. 마틴이 라임 주스를 만들었으니 잠시 쉬고 조금 있다가 이것들을 봐주세요.”
안토니아는 그러면서 책상 한편에 빽빡하게 들어찬 서류에 손을 얹었다.
그걸 보자 알렉산드라는 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을 하는 건지, 부려 먹을 생각만 많은 건지.”
말은 그렇게 했음에도 손녀의 부탁이 역시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 * *
영지에 돌아와 매일같이 일을 했음에도 늘 자잘한 일들이 쌓이곤 했다.
덕분에 안토니아는 노을이 질 무렵에야 겨우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여기요, 주인님.”
주인의 일과를 누구보다 잘 아는 로레나는 차가운 라임 주스와 함께 쟁반에 오늘 도착한 편지를 올려 건넸다.
“고마워, 로레나.”
“별말씀을요, 아 참 근래 비가 안 와서 몇몇 마을에서 식수를 좀 염려하고 있는 듯해요.”
“저장된 물이 떨어질 때는 아니지?”
“그렇습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작년에 지나치게 가문 시기가 있었으니까요.”
“그렇지, 그래서 올해는 제때 걱정이라고 말을 한 거구나.”
로레나는 그 말에 뿌듯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올로가 관리하던 기간이 길지는 않았으나 흔적은 참 깊게도 남겼다.
남을 짜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덕분에 영지민들은 문제가 될 만한 것들도 스스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괜히 도움을 받았다가 배로 뜯길까 저어하면서.
“날씨는 루페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만약을 대비해 두는 게 낫겠지.”
“제가 진행할까요?”
“응, 부탁할게.”
그래도 지난 6년, 자신의 회귀 전보다도 훨씬 짧은 기간 사이에 영지민들이 마음을 여는 게 느껴졌다.
예전에 안토니아가 영지를 더 자주 돌아본 것도 모두 영지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었으니까.
안토니아는 로레나에게도 잠시 쉬라고 손짓한 뒤, 제게 온 편지를 하나씩 열어 보았다.
수도에 올라가기 전보다 많은 편지가 매일같이 오고 있었다.
단순한 안부 편지도 있었고 진지하게 의견을 묻는 것도 있었다.
‘발렌타인 님이 편지를 보냈네.’
발신인을 확인하던 안토니아는 가장 먼저 그녀의 편지를 열어 확인했다.
영지에 돌아온 뒤, 두 번째 편지였다.
뭐, 그녀답게 이번에도 짧은 용건이었지만.
[잘 지내고 있나요?
그대의 조력에 힘입어 무사히 소후작의 지위를 따낼 듯하네요.
생각보다는 쉬웠어요.
큰 오라버니께서 사흘 만에 양보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사흘 만이라니.
안토니아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건지 조금 궁금해졌다.
그리고 또 한 통은 드란제아 소공작에게서 온 편지였다.
[세르히 백작님에게.
그간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발렌타인이 곧장 본론을 이야기한 것과 다르게 드란제아 소공작은 정중하게 격식을 갖춘 내용이었다.
[……언제쯤 수도에 오는지 궁금합니다.
어째서 오르테가 소후작은 이번 해, 영지에도 가지 않는 걸까요?
덕분에 황제 폐하와 레이디 트라체스께 소후작과 함께 붙들려 여름을 날 듯합니다.
당연히 할아버지께서는 절 도울 생각이 없는 듯하고요.
당신의 혜안이 필요한 때가 많으니, 부디 제 애간장을 너무 녹이진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토니아는 그 편지를 보고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드란제아 소공작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뭔가 어려운 게 보일 때는 보고도 못 본 척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말이다.
괜히 드란제아 공작이 게으르다고 타박하면서도 여러 손자 중에서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여러 통의 편지가 와 있었다.
안토니아는 모두 다 둘러보고 답장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편지를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리카르도의 편지였다.
[안토니아, 여기는 아직 공기가 서늘해.
하지만 네가 있는 세르히 백작령은 그렇지 않겠지?]
은근히 오고 싶다는 것 같은 기색이 느껴져서 안토니아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
이틀에 한 번씩, 리카르도는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이 일을 아주 성실하게 하고 있다는 어필을 한껏 실어서 말이다.
[지난번 편지를 읽으면서 풀멘 변경백님에게 질투심을 느낄 일인가 고민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내 솔직한 마음이니까 말이야.]
일주일 전에 보낸 답장을 받은 모양이었다.
안토니아는 지난주, 시간을 내어 알렉산드라와 섬에 다녀왔다.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굴던 알렉산드라였으나, 섬 한편에 남은 딸의 흔적을 보고는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섬엔 안토니아의 어머니, 레베르타가 좋아하던 꽃이 잔뜩 심어져 있었다.
올 때마다 당시 섬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 조금씩 심어 둔 것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백작가를 제외하곤 드나들던 자들도 워낙 드물어 레베르타가 일 관련하여 메모를 남겨 둔 것들도 별장 내에서 종종 보였다.
‘오길 잘했지요?’
‘그렇구나. 네 할아버지도 무척 오고 싶어 하겠어.’
그 말에 안토니아는 알렉산드라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덕분에 알렉산드라와의 사이도 한결 더 가까워져 안토니아는 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편히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리카르도는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부러운 티를 숨기지 않는 것이었다.
이틀 만에 또 온 편지였기에 그 외에 별달리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그는 예전과 달리 편지 쓰는 게 더 능숙해진 듯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일과를 이러저러하다고 풀어내는 게 익숙해 보인다고 할까.
안토니아는 세 장은 되는 편지를 즐겁게 읽다가 마지막 장에 이르러 잠시 멈칫했다.
[아무튼 지금까지 안토니아에게 말한 것처럼 대공으로서의 일은 무척 열심히 하고 있어.
정말로 나는 얌전히 대공령의 일만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잠깐 쉬어야 할 것 같아.
누님과 폐하께서 내가 할 일이 있다고 수도로 부르셨거든.]
편지에서 투덜거림이 묻어났다.
그러면서 텀이 애매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편지하겠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날짜가…….’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에게 찾아가겠다고 조르는 대신 자신에 대한 정보를 편지에 상세하게 적어 놓는 편이었다.
지금 만나러 가고 싶다고 졸라 봐야 들어주지 않을 안토니아라는 걸 아주 잘 알았으니 말이다.
안토니아는 리카르도가 수도에 머무르겠다고 한 날짜를 보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그가 올해 생일 자신에게 선물한 마법 이동이 가능한 열쇠가 들어 있었다.
* * *
“일하기 완전 싫은 표정이십니다, 전하.”
서류에 파묻혀 심각한 얼굴로 펜을 움직이는 리카르도를 보며 드비가 이죽거렸다.
리카르도는 그에게 대꾸하는 대신 파기하려고 옆으로 둔 서류를 한 손으로 가볍게 뭉쳐 집어 던졌다.
“아니, 전하. 제가 일을 드린 것도 아닌데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이런 일에는 도움이 너무 안 되는 주제에 말만 많으니까.”
리카르도의 말에 드비는 신난다는 듯 크게 웃었다.
“안 그래도 제 선택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책상에 앉아 하는 일엔 재주가 없는 걸 깨닫고 몸 쓰는 일에 외길을 걷길 잘했지 뭡니까!”
자랑스레 말하는 그 목소리에 리카르도는 찬물을 끼얹듯 대꾸했다.
“그래? 그럼 오늘 새벽에 서쪽 성곽 건은 네가 혼자 처리해.”
“네?”
“몸 쓰는 일 외길을 걸은 기사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리카르도의 말에 드비는 잔뜩 불쌍한 얼굴을 하고선 입을 열었다.
“아니! 제가 아무리 몸 쓰는 일 외길을 걸었다지만 전하에 비하면 못하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나는 이것도 하고 몸도 쓰는데?”
“에이, 왜 그러십니까. 저는 단순 무식해서 혼자 갔다가는 기사들이 마물들에게 크게 다치고 말 겁니다!”
드비는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물론 리카르도는 그게 헛소리라는 걸 알았다.
자신보다 좀 못할 뿐, 그도 서북부에서 자신과 똑같이 6년을 고생했기에 마물 상대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단순히 혼자 고생하는 게 싫어서 하는 헛소리였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전하. 애초에 이번 마물 건이 지금 남은 기사단만으로는 버거울 것 같아서 겸사겸사 수도에 오신 것 아닙니까.”
리카르도는 그 말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토니아와 신전의 대비 덕에 마물 출현은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로 그리 잦지 않았다.
일주일에 닷새는 마물이 튀어나오던 서북부와 비교하면 아주 온건한 상태였다.
대신 한 번 나오면 규모가 좀 큰 편이었다.
지난번까지는 그럭저럭 수도에 남은 기사단이 처리했다지만 부상자가 좀 나왔다.
그래서 리카르도는 마물 건과 이스베르가가 지시한 다른 업무로 수도에 방문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럴 시간이 있으면 말을 달려서 세르히 백작령에 가고 싶은데.’
안토니아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게 어느덧 석 달째였다.
어린 자신이 어떻게 6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텼는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리카르도는 헛소리를 계속 늘어놓는 드비에게 되었다는 듯 나가라고 손짓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서 별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백작령에서도 똑같은 별이 보일까.’
그러면 좋겠다. 그리고 안토니아가 그걸 보고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리카르도는 중얼거렸다.
“안토니아…….”
“왜?”
“…….”
그냥 불렀을 뿐인데.
리카르도는 어쩐 일인지 제 책상 바로 근처에 있는 안토니아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 * *
“아, 안토니아?”
“왜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야?”
“아니, 정말 안토니아야?”
리카르도의 되물음에 안토니아는 말하는 것 대신 그의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아얏, 저, 정말로 안토니아 맞구나.”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이야.”
“놀라지! 아무 낌새도 없이 네가 나타났는데.”
“반가운 게 아니라?”
“그건 당연한 거고.”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손을 잡아서 끌어당겼다.
“리샤르-.”
다짜고짜 끌어안는 그의 행동에 안토니아가 어깨를 툭 쳤으나, 얼마든지 때리라는 듯 그는 팔을 풀어 주지 않았다.
“너무 보고 싶었어. 매정하게 꿈에도 나와 주지 않았잖아.”
“그건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
“북부 영지에 오라고 은근히 초대했는데도 들어주지도 않고.”
“백작령의 일이 많은걸.”
안토니아의 말에 리카르도는 작게 웃으면서 천천히 그녀의 몸을 풀어 주었다.
“어떻게 온 거야?”
“네가 선물하고도 까먹은 거야?”
안토니아는 그러면서 그가 선물한 열쇠를 한 손에 들어 흔들어 보였다.
“아, 그렇구나.”
“트라체스 대공령에는 가 본 적이 없어서 무리지만, 수도 네 집무실이라면 몇 번쯤 온 적이 있었으니까.”
“네가 수도에 있을 때 몇 번쯤 와 달라고 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안토니아는 진지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는 체면이 상한다며 하지 않을 말들을 그는 늘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를 편하게 여기고 더 믿을 수 있는 거기도 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리카르도만 마냥 안토니아를 보고 싶어 하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정말 그런 건 아니었다.
안토니아는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뺨과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게, 나도 그때 들어주길 잘했단 생각이 드네.”
“안토니아도 날 보고 싶다고 조금은 생각했어?”
“아니면 여기 내가 왜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할머니랑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말이야.”
그 대답에 리카르도는 모든 걸 다 가진 듯 뿌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리샤르는 기쁨의 역치가 너무 낮은 거 아닐까.’
하긴 그러니까 안토니아의 기습 키스에도 곧장 반응하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안토니아는 그대로 리카르도의 머리를 꼭 끌어안고서 토닥거렸다.
이상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도 중독성이 있었으니까.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밤이 깊어 안토니아가 열쇠를 들어 올리자, 리카르도는 일부러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시무룩해했다.
“또 얼마 뒤면 만날 텐데 뭐.”
“보통은 두세 달 뒤를 얼마 뒤라고 하지 않아.”
“바쁘면 그사이에 만나는 것도 자주 만나는 거라고 보통 이야기하는데.”
“좀 더 날 보고 싶어 해 줘, 안토니아.”
안토니아의 다소 무뚝뚝한 대꾸에 리카르도가 매달리듯 애원했다.
그 모습에 안토니아는 얼굴에 힘이 들어간다고 느꼈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얼굴 근육이 움직이려 드는 것처럼 말이다.
“원래는 트라체스 대공령에도 방문할 짬을 낼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뭐?”
“할머니가 영지 일이 일단락되면 서북부에 데리고 가겠다고 벼르고 계시거든.”
리카르도는 그 말에 눈을 찡그렸다.
“또 풀멘 변경백님이라니.”
그의 반응을 보며 안토니아는 알렉산드라가 고의로 그랬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도 서북부에 가면 되지, 대공령에서 서북부는 세르히 백작령만큼 멀지 않으니까.”
“이스베르가 님이 사교계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네가 여유가 생길 틈이 없다고 편지로 알려 주셨는데.”
“…….”
“게으름 피우면 안 되지, 그렇지요. 대공 전하?”
리카르도는 그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안토니아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손에 잡은 걸 내팽개칠 만큼 책임감이 없지도 않았지만.
리카르도는 열쇠를 사용하는 안토니아를 보며 잔뜩 아쉬운 얼굴로 손등에 입을 맞췄다.
“편지할게, 안토니아.”
“응.”
“2주 뒤부터는 서북부로 보내야겠네.”
“아마도? 할아버지에게 몰래 빼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해 둘게.”
리카르도는 제발 부탁한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토니아는 마법 열쇠로 인해 만들어진 문고리를 잡았다가 잠시 생각이 난 듯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왜?”
“잊은 게 있는 것 같아서.”
“응?”
어리둥절해하는 리카르도의 얼굴을 보며 안토니아는 그대로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안토니아!”
키스를 당해 봐서일까, 이번에는 훨씬 빠른 반응 속도였다.
“그럼, 두 달만 더 참아 보세요. 대공 전하. 알았지?”
하지만 홀랑 문 너머로 사라지는 안토니아를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당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는 못했다.
‘사교계 시즌이 시작되면……. 곧장 안토니아에게 청혼해야지.’
안토니아가 감동할 정도로 예쁜 프러포즈를 준비해야겠다고 그는 마음먹었다.
* * *
“와-.”
먼저 감탄을 내뱉은 건 폴리였다.
서북부에 도착했을 때, 안토니아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넓은 영지 규모에 감탄했다.
“좀 자신이 없어지려고 해요.”
이런 곳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니.
그나마 루퍼스 덕에 세르히 백작령과 풀멘 변경백령 사이의 거리 문제는 사라진 거나 다름없다지만 말이다.
그런 안토니아에게 알렉산드라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벌써 약한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 이곳은 지금부터 재건해야 할 땅인데.”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도가 6년간 열심히 협력한 탓에 예전만큼 마물의 출몰이 아주 심하진 않다지만 다른 곳에 여력을 쏟기에 모자란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안토니아가 가진 가호로 땅을 안정시킬 수 있단 소식을 들었을 때 황제보다도 그녀의 조부모가 더 반가워했을 정도였다.
물론 손녀가 지나치게 부담을 지게 되는 건 아닌지, 염려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제가 와서 기쁘시지요?”
안토니아가 뿌듯한 눈으로 묻자, 속내를 깨달은 알렉산드라는 헛웃음을 뱉으며 손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기쁜 건 손녀가 와서란다. 후계자가 아니라.”
“숙부님도 그러시면 좋겠어요.”
“그 녀석이 안 그럴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걱정 마라, 네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준다고 할 때 오히려 그 녀석이 더 좋아했으니까.”
“정말요?”
“그래, 애초에 어릴 때부터 레베르타의 영지일 거라 생각해서 맘 푹 놓고 있던 녀석이란 말이다.”
알렉산드라는 우리 집 남자들은 다들 영 믿음직하지 못하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숙부는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의 외향을 반반 섞어 좀 더 순한 듯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상대적으로 인상이 약한 느낌이었는데, 안토니아를 보자 과하게 반가워하지도 않고 그저 당연하다는 듯 반겼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구나, 안토니아.”
그는 부모의 체력을 물려받지는 못한 것인지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조금 의외기도 했다. 당연히 무관 타입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안토니아가 의아해하자, 알렉산드라는 괜찮다는 듯 이야기했다.
“걱정 마라, 네 외숙모가 아주 강한 사람이니까.”
그 말에 안토니아는 강한 여자에게 이끌리는 게 집안 내력인가, 하고 문득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를 포함해 외가 쪽은 모두 여자 쪽이 무력적으로 훨씬 강하지 않은가.
아무튼 출발하기 전에 염려한 것과 달리 안토니아는 서북부에서 두 달 가량을 꽤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알렉산드라에게서 이것저것 배우는 것도 즐거웠던 데다, 오히려 세르히 백작령에서보다 더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어머니 레베르타가 지내던 방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안토니아는 좀 놀라기까지 했다.
정말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딸을 아꼈다는 게 여기저기서 많이 느껴졌다.
덕분에 안토니아는 한층 더 자신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 * *
“두 달은 정말 금방이로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수도에 갈 채비를 하며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이라면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는 사교계 시즌을 맞아 수도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다름 아니라 이번 시즌 첫 행사가 이스베르가의 황태제 임명식이었으니까.
“네가 올해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렀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구나.”
“그랬으면 그 자리에 있는 건 이스베르가 님이 아니셨을지도 모르죠.”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황실은 네게 더 고마워해야 해.”
안토니아는 그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서북부에 지내면서 가장 신기한 변화가 바로 제 얼굴 근육이었다.
백작령에 돌아갈 무렵부터 늘 뻣뻣하기만 하던 얼굴에 조금씩 위화감이 든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는 평범하게 미소를 짓는 등의 표정은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자신이 표정을 잃었던 게 부모님을 잃었던 것과 연관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도 없이 혼자란 생각에 잃어버렸으니까.
그리고 그건 비단 진짜 가족인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를 만났기 때문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히 회귀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내 곁에 있어 준 많은 사람들 덕일 거야.’
안토니아는 황실을 향해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는 알렉산드라에게 꼭 달라붙었다.
“괜찮아요, 저도 절대 대가 없이 일할 생각은 아니니까요.”
“그래야 내 손녀지.”
알렉산드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안토니아는 풀멘 변경백령의 상태를 보며 황실에 한몫 단단히 챙길 생각이었다.
애초에 황실이 져야 할 책임을 서북부에서 대신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 * *
“응?”
서북부에서 마차가 출발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잘 가고 있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안토니아는 계획에 없던 일에 의아해하며 한참 보던 서류에서 눈을 뗐다.
“무슨 일이지?”
“제가 알아보고 올게요, 주인님.”
폴리가 기운차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똑똑’하고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아가 눈짓하자 폴리가 문을 열었다.
“대공 전하?”
문을 연 폴리가 깜짝 놀라 외쳤다.
물론 놀란 건 폴리만이 아니었다.
안토니아도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수도에 먼저 가 있겠다고 하지 않았어?”
분명히 서북부에 도착한 마지막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러자 리카르도는 불쑥 마차 안으로 들어오며 안토니아에게 불쌍한 얼굴을 해 보였다.
폴리와 로레나는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작게 웃으며 마차 안을 비워 주었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니야.”
“변명부터 하긴.”
“정말로 먼저 출발할 생각이었어, 편지를 보내자마자 출발하긴 했거든.”
“그런데?”
“나도 모르게 서북부로 말을 달리고 있었어.”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서북부와 수도 사이에 이동 마법역사가 설치된 것처럼 최근, 대공령과 수도 사이에도 역이 설치되었으니까.
물론 안토니아는 조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차 여행을 택한 거였지만.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나 하고.”
“어쩔 수 없었어. 안토니아가 보고 싶어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는걸.”
엉망진창인 이유였다.
하지만 안토니아의 마음이 이미 그에게 잔뜩 호감을 쌓아 둬 버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절로 솟아올랐다.
그도 그럴 게 그는 겉모습은 맹수에 가까운 주제에 제 앞에서 무해한 소동물처럼 굴지 않는가.
“나도 보고 싶었으니까, 봐줄게.”
안토니아는 습관처럼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어느덧 자연스럽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그녀의 표정 변화에 리카르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진짜 너무해.”
“응?”
“오랜만에 만났는데, 처음으로 그렇게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여 주다니.”
늘 눈빛 외에는 감정 하나 실리지 않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에 가슴이 뻐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감정을 뭐라고 더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럴 때는 이상할 정도로 어휘력이 머릿속에서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겨우 짜내듯 안토니아를 향해 말했다.
“정말로 사랑해, 진짜로.”
그런 얼굴을 제게 보여 줘서, 그리고 자신을 곁에 두어 준 것도. 모두.
리카르도는 그대로 안토니아를 꼭 끌어안았다.
이상하게 벅차올랐다.
앞으로 조금 뒤 있을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의 타박이 조금도 두렵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 *
수도에 도착하고 사흘째 되는 날, 안토니아는 리카르도와 함께 황태제 임명식에 참석했다.
엄숙한 얼굴로 교황이 황제와 이스베르가에게 성력을 흩뿌렸다.
청아한 종소리가 울렸다.
황제 아달베르트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이스베르가를 향해 이야기했다.
“제국의 후계자로 짐의 동생 이스베르가 풀제르 솔리스를 임명한다. 황태제로서 책임을 다하라.”
“명 받듭니다. 폐하.”
이스베르가는 맑은 눈빛으로 우아하게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리카르도는 임명 모습을 보며 안토니아에게 속삭였다.
“역시 안토니아가 거절해서 다행이야.”
“그래?”
“응, 역시 누님이 잘 어울린다 싶으니까.”
리카르도는 그러면서 자신은 트라체스 대공령만으로도 차고 넘친다며 중얼거렸다.
안토니아는 그 모습에 살짝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흘 전 안토니아의 미소에 깜짝 놀란 얼굴을 지었던 리카르도는 이제는 좀 적응이 된 것인지 본인도 따라 입꼬리를 당기며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안토니아의 물음에 리카르도의 답이 오는 것보다도 다른 쪽에서 더 빨리 소리가 들렸다.
“황태제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세르히 백작, 드란제아 소공작, 오르테가 소후작을 제 보좌로 두고 싶습니다. 폐하.”
‘응?’
예고도 없던 일이었다.
물론 이스베르가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돕겠다곤 했지만.
‘보좌로 삼으시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하셨잖아요, 이스베르가 님!’
안토니아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안토니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카르도는 자신이 더 자랑스럽다는 듯 뿌듯한 미소로 이야기했다.
“내가 황태제가 되었다면 절대로 안토니아에게 보좌역을 맡기지 못했을 테니 말이야.”
‘알고 있으면서 입을 다물었다니.’
안토니아는 차가운 눈으로 리카르도를 보며 조용히 그의 발등을 꽉 밟아 주었다.
* * *
“완전 당한 기분이야.”
“그렇게 분해 보이지는 않는데?”
리카르도는 자연스럽게 안토니아를 테라스 한편에 위치한 소파에 앉혀 준 뒤, 그녀의 구두를 벗겨 주며 이야기했다.
언제 준비한 것인지 그는 보드라운 좁은 면적의 카펫까지 안토니아의 앞에 깔아 주었다.
“이스베르가 님이 해 달라고 한 거니까.”
임명식 후 시작된 연회에서 안토니아는 덕분에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테라스에 쉬러 오는 사이에도 몇 번이나 붙잡힐 정도였으니 말이다.
리카르도는 그녀에게 와인을 건네더니, 조금 키득거리며 이야기했다.
“왠지 안토니아가 예상도 못 하고 당한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정말?”
“응, 왜 그렇게 놀라?”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한 다음, 스스로 놀라 잠시 제 손을 바라보았다.
과거와는 다른 손이었다.
생기도 없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데에만 전전긍긍해 하느라 버석버석하고 말랐던 손이 아니었다.
‘늘 당하고만 살았는데, 예상하지 않으려 한 건 아니었지만 나에게서 무언가 앗아 가려 하던 자들이 그 이상이었으니까.’
안토니아는 조용히 손을 그러모아 쥐었다.
“안토니아? 혹시 마음 상했어?”
그 말에 안토니아는 대꾸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리카르도가 초조해하는 걸 보는 게 즐거웠으니까.
‘정말로 더는 기억에 얽매일 필요가 없구나.’
얽매이지 않겠다고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도 아주, 아주 많이 바뀌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덕이긴 하지만.’
오로지 본인만의 덕도 아니었다.
과거에는 이렇게 표정도 되찾지 못했으니까.
안토니아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향해 슬쩍 시선을 향했다.
예전에는 그저 위엄 있던 시선이 지금은 제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는 당장에라도 제게 사과할 듯한 분위기였다.
안토니아는 그대로 리카르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리샤르.”
“응?”
그는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바뀔 수 있던 데는 분명히 이 낭만적인 남자의 탓도 있지.’
예전에 생각한 것과 달리 트라체스 대공은 로맨티시스트였다.
아름다운 재회를 만들고 싶어서 꾸물거리기도 하고, 조금도 안토니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 모두가.
‘그러니까, 열두 살 그때. 리샤르를 만나서, 리샤르가 내 인생에 끼어들어 줘서 바뀐 것도 분명히 있어.’
적어도 전 삶이 아니라,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 들 수 있게 된 건 그의 공이 분명했다.
그 계절, 어린아이의 마음을 그가 안겨 준 덕에 자신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자신으로서 여기까지 자랄 수 있었다.
실은 자신이 차분하고 정적이기만 한 성격이 아니라 장난기가 있는 성격이라는 것도 알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안토니아는 기꺼이 그가 앞으로도 제 삶에 비중을 차지하길 바랐다.
“있지, 리샤르.”
“응.”
보랏빛 눈이 흔들렸다.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기뻐할까? 아니면 눈물을 보일까?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이유로 실망감을 보일까.
어느 쪽이건 간에 자신은 나쁘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건 다름 아닌 이 남자이지 않은가.
허술하고 정 많은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그리고 약혼자.
자신이 아직 말로서 답을 들려주지 않은 연인.
안토니아는 아주 일상적인 말투로 그에게 툭 내뱉었다.
“우리 결혼할까?”
“……어?”
이스베르가와 달리 그는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마치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귀를 의심하면서 말이다.
“싫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안토니아의 말에 그도 현실을 직시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도가 안토니아의 앞에서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진짜, 진짜 약았어?”
“왜?”
“안토니아가 몰랐을 리 없잖아, 내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청혼하려고 했는데.”
그 말에 안토니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누가 우물쭈물하랬나.”
“내일이었는데.”
리카르도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진짜로……. 안토니아에게는 평생 못 당할 것 같은 기분이야.”
“그래서 싫어?”
리카르도는 그 물음에 손을 내리더니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것 같아서 행복하단 생각이 들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분함도 보이지 않았다.
쑥스러운 듯 살짝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안토니아는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물었다.
“그래서 답은?”
“내 답이 하나뿐이라는 걸 알잖아, 난 쭉 네 곁에 있을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고 싶어. 부디 받아 주시겠어요, 세르히 백작님?”
“물론.”
안토니아는 그대로 그와 맞잡은 손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의 커다란 몸이 끌려왔다.
안토니아는 그대로 그의 목을 확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반년 전, 마차에서 내리며 짧게 나눴던 것보다도 더 길고 달콤한 키스를.
“……리샤르.”
“응?”
입술을 살짝 떼며 부르자, 리카르도의 숨이 살짝 떨렸다.
속눈썹이 흔들리는 게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안토니아는 그의 귓가에 똑똑히 들리도록 속삭였다.
“사랑해.”
그가 기다리던 마음을 언어로 표현했다.
그의 숨결이 조금 더 흔들렸다.
“……날 죽일 셈이야.”
그의 목소리가 여러 감정이 섞여 떨렸다.
잠시 시선이 마주 닿았다.
여러 마디의 말보다도 많은 감정이 서로에게 닿았다.
그대로 이번에는 리카르도가 다시 안토니아에게 입을 맞춰 왔다.
조금은 집요한 키스 끝에 그의 목소리에 살짝 물기가 감돌았다.
그는 맹세하듯 속삭였다.
“네가 내게 준 마음을 소중히 여길게, 늘 네가 편하게 곁을 내어줄 수 있도록.”
거짓이 찾아들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순수하게 그 말을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어긋나기만 할 것 같던 발걸음이 스스로 자신만의 궤적을 찾아 그려 냈으니까.
[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