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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18화 (18/29)

#18.

“너!”

물론 리카르도의 움찔거리는 입꼬리가 안토니아의 시선에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다.

리카르도를 향해 더욱 매서워지는 눈을 보며 재빨리 안토니아의 손을 잡았다.

마치 조금 전, 베네딕트가 알렉산드라를 에스코트 해 2층으로 올라가던 것을 따라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는 안토니아를 기품있게 응접실 쪽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야.”

“걱정할 일이 아니라니.”

“그냥 긁힌 상처 정도야. 이런 것쯤은 한 주 정도 두면 금방 낫는 거라고.”

안토니아는 그 말에 의심스러운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럼 보여줄 수 있어?”

“보기 좋지도 않은 걸 굳이? 난 내 아가씨가 예쁜 것만 봤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안토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가벼운 상처가 아니잖아.’

이렇게 능글맞게 빠져나갈 생각이나 하고.

괜히 얄미워져서 그의 팔뚝을 툭 치자 그에게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걱정 끼치지 않으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정말 사소한 거면 말해도 되잖아.”

“그래도 말이야, 안토니아.”

리카르도는 한숨 섞어 잔소리하는 안토니아의 손을 꼭 잡으며 어깨에 살짝 이마를 비비며 이야기했다.

“뭐.”

좀 귀여워서 봐주지 않으려 하다 보니 절로 더 말투가 딱딱해졌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보아온 리카르도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자신을 더 봐달라는 듯 조잘거렸다.

“매번 다녀온 다음에 나 오늘은 여기 다쳤어, 저기 다쳤어. 하면서 봐달라고 하면 또 그건 그거대로 한심해 보이지 않을까?”

“윽.”

“물론 날 귀엽게 봐준다고 하면 환영이지만.”

절로 말문이 막혔다.

‘……리샤르의 말대로 애 보는 기분일 것 같긴 해.’

조용히 침묵하는 안토니아를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시선을 맞춰오며 다시 물었다.

“그런 철없고 애 같은 사람이 좋아?”

그럼 얼마든지 그렇게 굴어주겠다는 듯 뻔뻔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니.”

그런 건 지난 삶에서 제레미야 한 명 상대한 걸로도 차고 넘쳤다.

리카르도는 진지하게 싫은 듯한 안토니아의 말투에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안토니아. 정말로 네가 걱정할 정도로 다친 거라면 말하기 전에 네가 먼저 알 테니까.”

“알았어.”

안토니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몇 주 째인지.’

수도 인근에서 계속 마물이 출몰했다.

자신의 조부모님도 그렇고 리카르도도 그렇고 한주에 사나흘은 토벌에 나서야만 했다.

근래엔 출몰이 빈번하여 세 사람 모두가 쉬는 날은 하루도 없었고 말이다.

그런 만큼 그들 모두 자잘한 상처를 달고 살았다.

안토니아는 그때마다 매번 걱정했으나, 세 사람은 정작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했다.

‘며칠 지나면 나을 상처에 그렇게 신경 쓰다간 나중엔 못 버틸 게다.’

알렉산드라는 크게 걱정하는 안토니아를 보며 가볍게 넘기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리카르도는 생각에 잠긴 안토니아의 손을 꼭 잡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안토니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응, 뭘?”

“풀멘 변경백님이나 라테르 후작님은 황태자 전하가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하고 일을 벌였을 거라고 하셨잖아.”

“두 분은 황태자씩이나 되는 분이 그렇게까지 악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겠지.”

리카르도는 그 말에 얕은 한숨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겪으신 분들이니까.”

“맞아,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오히려 아쉬워하고 계실걸.”

“아쉬워할 거라고?”

리카르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철없는 조카라지만 지금 수도를 보며 더 난장판이 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한다면 당장에라도 황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려야만 했다.

만약 서북부에서 기사단이 오지 않았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수도에서 떠안아야 했을 것이다.

서북부 지역은 원래도 전장이 되는 일이 잦아 방비가 탄탄했다.

하지만 수도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수도인 만큼 어느 정도 성벽도 견고했고 중앙신전이 있는 만큼 신관이 많아 결계도 쉽게 무너지진 않았겠지만.

‘마물은 예측 가능한 것들이 아니라고.’

그것들이 꼭 수도 밖에서만 발생해 안으로 침공하기라도 할 줄 아나?

“운이 나쁘면 황태자궁 한가운데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게 마물인데.”

너무도 한심한 생각에 리카르도가 혀를 찼다.

“원래 사람은 자기 자신만큼은 예외일 거라고 생각하잖아. 특히 세르미아 황태자 전하 같은 분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안토니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예측 장치를 발표하던 날, 황태자는 그날 단순히 자신이 주목받는 것만 꾀한 게 아니었다.

수도가 이렇게 어지러워지는 것도 같이 노린 것이었다.

그래야 그가 움직이기 편해질 테니까.

“여기, 루페가 오늘 전해준 귀족 명단이야.”

“황태자 전하와 손을 잡기로 한 자들인가?”

“응. 리샤르는 어떤 귀족 가문이 수도로 기사단을 지원하기로 한 건지 알고 있지?”

리카르도는 그 말에 무거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의 출현이 장기화될 것 같자, 상대적으로 여력 있는 귀족 가문들은 영지에 있는 자신의 기사단을 기꺼이 지원하기로 했다.

당연히 황제의 승인까지 받아서 말이다.

리카르도는 현재 황제의 명에 따라 수도에 출몰하는 마물 토벌의 책임자였기에, 승인받은 명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예상보다 많은 수가 지원한다며 복잡한 얼굴을 하시더라니.”

“……폐하께서도 짐작은 하고 계시구나.”

“그래, 하지만 내게는…….”

리카르도는 복잡한 얼굴로 제 이마를 짚었다.

“그저 방비를 잘하라고만 하셨지.”

한 마디로 황태자는 반역을 위한 밑 작업 중 하나로 마물 출몰을 택한 것이다.

‘정말 나쁜 쪽으로만 머리가 잘 돌아가서.’

안토니아는 안타까운 말투로 답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믿어보고 싶으신 거겠지.”

“새삼 느끼지만 안토니아는 정말 신기해.”

“응?”

“누구도 폐하께서 정에 약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근데 넌 알고 있던 것 같아서 말이야.”

안토니아는 그저 말을 아꼈다.

그녀 또한 회귀 전 기억이 없었다면 황제를 그저 무정한 군주로만 기억했을 테니까.

‘고단해 보이는구나.’

‘폐, 폐하.’

제레미야와 결혼하고 한동안은 황궁에 거의 갇히다시피 지냈다.

황태자는 부족한 막냇동생의 그릇을 안토니아가 모두 커버해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온갖 요구를 그녀에게 했었다.

그때만 해도 안토니아는 거절한다는 선택지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8년여를 바올로 아래에서 자란 탓에 자기주장 대신 순응만이 그녀에게 남아 있었으니까.

솔직히 황제는 안토니아에게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자신을 지켜보았단 느낌이 들었다.

황궁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음에도 그때마다 깜짝 놀라는 안토니아를 보며 황제는 드물게도 허허 웃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도 자지 않고 무얼 하느냐.’

‘황태자 전하께서 지시하신 일이 있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폐하.’

‘세르미아가?’

황제는 그렇게 말하더니 안토니아의 앞에 놓였던 문서들을 슥 훑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이…… 아니, 아니다. 오히려 짐이 나서면 네가 더 곤란해지겠구나.’

‘네?’

안토니아는 그때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았다.

황제는 아마 그때, 황태자를 책하려고 했을 터였다.

그가 처리해야 할 일 중 일부를 안토니아에게 맡겨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황태자는 그런 것 중 대다수를 자신이 했다고 포장하여 황제에게 말하곤 했다.

물론 황제는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날 황제는.

‘아마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지.’

안토니아는 그 생각을 하며 다시 손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수년을 황궁에서 지내서일까.

처음에 무섭기만 했던 황제와도 그럭저럭 정이 붙어버렸다.

가끔은 오래전 잃어버렸던 부모님에 대한 정을 느낄 정도로.

‘많이 힘들거든 말하거라, 안토니아.’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폐하.’

‘모른 척하지 말거라,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니. 짐은 널 도와줄 수 있으니까.’

회귀 전에도 지금과 비슷했다.

시기가 더 늦어졌을 뿐.

황제는 황태자의 모자란 능력, 게다가 정당하지 못한 수단들에 크게 실망한 차였다.

그렇게 부딪치던 와중, 먼저 손을 쓴 건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사람은 정말 변하질 않아.’

황태자도, 그리고 최후의 최후까지 믿어보려는 황제도.

그래서 안토니아는 황태자를 직접 겨눠선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런 사정 모두를 리카르도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저 핀잔을 주듯 그에게 말했다.

“리카르도가 형님인 황제 폐하께 너무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야.”

“흐음.”

물론 리카르도는 그런 걸로 해두자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 * *

“어젯밤에도 또 마물이 나타났다고 하더군.”

“그렇습니다.”

황제의 말에 시종장은 씁쓸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아달베르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조용하길 바랐거늘.”

이른 새벽녘, 황제는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미 황제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측 장치는 오늘도 수차례 마물이 나타날 것이라 했으니까.

지금까지 그 예측이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세르미아는 모르는 걸까, 오늘은 그녀가 떠난 날인데.”

다름 아닌 황후의 기일이었다.

황태자는 몰랐으나, 황제는 황후의 기일이면 늘 오전 일정을 모두 물리고 중앙신전을 방문하곤 했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건 이미 유폐 당한 교황과 일부 수석신관 정도였지만 말이다.

“마물의 출현을 황태자 전하께서 어찌 좌우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이미 터트려버린 둑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황제는 싸하게 드는 불안한 예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신년 무렵 리카르도가 가지고 왔던 안토니아의 선물이 눈에 밟혔다.

‘꼭 늘 몸에 지니고 계시라고 하였으니, 떼어 두시면 안 됩니다.’

평소에도 떼어 두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더욱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안토니아가 주었던 선물을 다시 한번 제대로 챙긴 다음,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오래도록 황제의 곁을 지킨 시종장은 커다란 망토를 걸쳐 주었다.

“중앙신전에선 이미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합니다. 늘 따르던 기사들도 준비가 되었고요.”

“그래.”

황제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황후의 기일이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겠지.’

어쩐지 어깨가 싸늘해 망토를 단단히 여미며 황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디 오늘 하루 수도가.

아니, 제국 전체가 평온하기를.

* * *

석실 안은 어딘지 신전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올 때마다 생각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이곳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걸까.

제레미야는 잔뜩 긴장한 손으로 벌벌 떨며 엄중히 채워둔 석실의 자물쇠를 풀었다.

‘으, 무거워.’

평소엔 기사들이 열어주어 쉬웠는데!

낑낑거리며 겨우 석실 문을 열자 그 안에는 교황과 수석 신관이 꽤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아, 아직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인데!’

다들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절로 주눅이 들었다.

“조금 늦으셨군요, 황자님.”

“뭐?!”

제레미야는 그 말에 부루퉁 화를 내려 했다.

‘내, 내가 얼마나 일찍 일어났는데. 오늘!’

지레 찔려 벌컥 화를 내려 했으나, 이내 곁에 있던 수석신관의 말에 제레미야의 치솟았던 눈썹이 곧 가라앉았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황자 ‘전하’. 성하께서도 워낙 기다리던 날이라 그러시는 것뿐이니까요.”

“그, 그렇군, 그럴 수도 있지!”

전하라는 호칭에 제레미야는 금세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형님께서 전하라고 한 거야.”

제레미야는 고개에 힘을 빳빳이 주고서 대단한 일을 한다는 얼굴로 신관들에게 쪽지를 전했다.

재빨리 쪽지를 읽은 교황이 곁에 있던 수석신관에게 전하자, 그는 푸른 불길로 이내 쪽지를 태워버렸다.

“잘 알았습니다. 황자 전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럼! 무척 무서웠다고. 기사들이 바로 잠들지 않아서 얼마나 긴장했는데.”

제레미야의 말에 신관들은 속으로 그를 비웃으면서도 그저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제레미야는 목소리를 낮춰 그들에게 속닥거렸다.

“형님을 도와드리러 온 거긴 하지만, 그……. 만약의 경우엔 내가 풀어줬다고 절대…… 말하면 안 돼.”

“물론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일이 잘못되셨을 때 막내 황자 전하를 말려들게 하고 싶진 않다고 쪽지에 적어두셨으니까요.”

수석신관의 말에 제레미야는 안심이 된다는 듯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그들을 배웅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니콜라는 혀를 찼지만 말이다.

‘오늘 여기 온 걸 황궁 기사 중 몇이나 알 텐데, 조사하면 절대 못 숨길 것을…….’

제레미야는 족적을 숨기는 데 그리 능숙하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니콜라가 한탄할 여유도 잠깐에 불과했다.

“허, 헉……! 저, 저게 뭐야!”

“……마물이군요.”

니콜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혹시 몰라 차고 온 검에 손을 대었다.

‘역시 세르히 백작님께서는 대단하시다니까.’

오늘 제레미야를 따라 신관들을 풀어주러 간다고 하자, 안토니아는 말리는 대신 마물로부터 몸을 지킬 수단을 챙기라고 했으니까.

그 와중, 제레미야는 본능적으로 니콜라의 뒤로 숨으며 이야기했다.

“지, 지금이라도 기사들 깨울까?”

“두 시간은 두들겨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검을 뽑아 들었다.

‘세르히 백작님은 제레미야 황자님을 지키라고 하진 않았지만.’

몇 달간 곁에 있어선지 미운 정이 좀 들어버렸다.

그의 결말이 어떻게 된다 한들,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건 너무 입맛이 쓸 것 같았다.

‘정말 황태자 전하도 너무 하시지.’

니콜라는 은식기나 찻잔보다도 더 손에 익은 검을 꽉 쥐며 생각했다.

‘이제 막내 황자님은 쓸모를 다했으니 죽여서 입을 막으시겠다는 거겠지. 일이 성공하건 하지 않건 비밀을 쥔 상대가 되어버릴 테니 말이야.’

너무도 비열하고 무정했다.

니콜라는 적어도 이 생각 짧은 막내 황자의 결말은 그런 식으로 나지 않았으면 했다.

‘차라리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겪으면서 고생 좀 해봐야지.’

그게 더 이 막내 황자에겐 어울리는 벌일 터였다.

* * *

탕-!

동이 틀 무렵이었으나 수도 성벽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활시위가 당겨지는 소리, 검이 움직여 반사되는 빛,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지시하는 손짓 등 모든 것이 일사불란했다.

그 와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건 다름 아닌 리카르도의 마물을 처리하는 솜씨였다.

마스터임이 밝혀진 뒤로 리카르도는 굳이 오러를 숨기거나 하지 않았다.

기사들이 다치는 게 더 손해였으니까.

애초에 그가 자잘하게 얻는 상처 모두 다른 사람들을 지키다 보니 생긴 거였다.

탕-! 탕-!

한 번 더 요란하게 총성이 울려 퍼졌다.

“와, 진짜 징글맞아 죽겠습니다!”

쓰러지는 마물에 드비가 질린다는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야기했다.

“쯧, 아직 어린 것이 겨우 이 정도에 우는소리를 하다니.”

“이 정도라니요! 저를 가장 많이 부려 먹지 않으십니까!”

“저 애송이한테도 똑같이 시킨다.”

알렉산드라의 말에 드비는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아니, 저 괴물 같은 전하와 이렇게 연약한 저를 비교하시다니요, 아악!”

누가 들어도 명백한 헛소리에 리카르도는 개머리판으로 가볍게 드비의 등을 후렸다.

드비는 억울한 얼굴로 리카르도와 알렉산드라를 바라보았으나, 두 사람은 그런 그를 무시한 채 할 말을 나누었다.

“왠지 오늘은 바쁠 것 같아.”

“실제로 바쁠 예정입니다. 예측 장치에 따르면 3시간 간격으로 마물이 세 번 출몰한다 하였으니까요. 게다가.”

리카르도는 루퍼스가 퀭한 얼굴로 만들어 건넸던 소형 예측 장치를 꺼내 보였다.

“조금 전 다섯 건 정도 더 추가되었거든요.”

퍽-!

알렉산드라가 열이 뻗친다는 듯 옆에 있는 나무를 강하게 내리쳤다.

“미친 것들, 앞으로 몇 년은 수도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 생각인가?”

“가볍게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래서였군.”

“네?”

알렉산드라는 한숨을 내쉬며 리카르도 대신 곁에 있던 기사에게 지시부터 했다.

“당장 후작저로 가서 베네딕트를 두들겨서라도 일어나라고 지시해. 그리고 드란제아 공작가에도 당장 지원하라고 이야기하고.”

“후작님은 어제까지 너무 무리해서 오늘은 쉬게 두실 생각 아니셨습니까?”

리카르도의 장난스러운 얼굴에 알렉산드라는 그의 정강이를 가볍게 발로 까며 말했다.

“상황이 어떤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농담을 해?”

리카르도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잘못 말했다가 안토니아와 당장 헤어지란 소리라도 들으면 자신만 손해니 말이다.

“오늘 안토니아가 신전에 갈 거라고 그랬지?”

“네.”

“왠지 감이 좋지 않아. 너 혼자 가지 말아라.”

원래는 안토니아와 리카르도는 약간의 기사단만 데리고 신전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리카르도는 잠시 알렉산드라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그는 어지간한 기사 수십 정도는 혼자서도 너끈히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하려 했다.

‘그걸 모르는 분이 아니니.’

그런 데도 방비하라고 한다는 건 정말로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소리일 테니까.

서북부에 있을 때도 알렉산드라의 저 기이한 ‘감’ 덕에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긴 적이 있기도 했다.

“내 손녀를 못 지키면 내가 그 목을 따버릴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변경백님.”

안토니아를 지키지 못하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은 절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변경백님이 내 목을 딸 기회는 오지 않을걸.’

스스로 자신을 죽여버릴 테니까.

어린 날, 자신이 마스터임을 숨겨서 안토니아는 가호를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했다.

리카르도에게는 그날의 찬란한 빛이 수치와 미안함으로 짙게 남아 있었다.

* * *

“오셨습니까, 폐하.”

황제가 신전에 도착한 것은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황제는 자신을 맞으러 나온 에밀리오를 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교황의 자리를 공석으로 두었다고 들었네.”

“네.”

“짐이 보기에 그대는 그 자리에 퍽 어울린다 생각하는데.”

에밀리오는 그 말에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 급한 것이 아니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자리를 채우려 해도 이미 신전의 몸집이 커진 터라 고려해야 할 것이 많지 않습니까.”

에밀리오의 말에 황제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간 황제가 겪었던 신관들과 달리 정말로 성직자다웠다.

“짐이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말하게. 세르히 백작도 그대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 했으니.”

“백작님께서…….”

그 순간 황제는 자신이 뭔가 잘못 보았나 했다.

조금 전까지 침착하기만 했던 에밀리오의 얼굴이 마치 꽃을 피워낸 것처럼 환해졌으니까.

에밀리오는 곧 자신의 표정을 갈무리하며 황제를 내실로 안내하려 했다.

그러나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매년 오는 곳이라 어디인지 알고 있네.”

“알겠습니다. 그럼 평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에밀리오는 더 황제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 물러섰다.

‘신기하군, 교황이 자리를 비운 날이라면 말이라도 한마디 더 하려고 하던 자들이.’

에밀리오 덕인지 다른 신관들도 잠잠했다.

탐욕스러운 눈들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줄곧 걱정거리가 많아 마음속이 어둡기만 했는데.

‘아니…….’

발을 옮기던 황제는 눈을 부릅떴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몹시 놀라서였다.

‘그녀가 좋아하던 꽃이…….’

예년과 달리 내실로 가는 길 곳곳에 황후가 생전 좋아하던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어떻게 안 걸까, 지금껏 십 년이 넘도록 기일마다 왔는데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황제는 평소와 똑같이 중간쯤에서 시종장과 기사 모두를 물리고서 혼자 내실로 들어섰다.

황후의 묘소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곳은 오로지 황제가 황후를 기리고자 만든 곳이었다.

‘그대를 외롭게 해 미안하네.’

황제는 정말로 황궁에 그녀의 방을 그대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눈을 감은 그녀를 이용하려던 자들이 너무 많았다.

헛꿈을 꾸던 황후의 부친이나 오라비 같은 자들 말이다.

‘세르미아를 충동질하고, 왜곡된 이야기를 하고……!’

고작 십대였던 황태자를 어찌나 쑤셔대던지.

그들은 황후가 남긴 물건들을 좋을 대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대의 안식을 위해 신전의 잘못도 눈감았던 것인데, 짐이 너무도 잘못 살아왔나 보아.’

황제는 초상화 속에서 은은한 미소를 짓는 황후를 보며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지려는 걸 느꼈다.

매년 이곳에 올 때마다 그녀에게 부끄럽기만 했다.

처음 프러포즈했을 때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나와 결혼해주겠어? 그럼 그대가 더는 이리 숨어서 울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할게.’

그저 그런 가문의 딸이었던 그녀는 수없이 많이 울어야만 했다.

황후의 부친은 결혼하기 전부터 따로 정부를 두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오라비는 정식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던 황후를 괴롭혔다.

심지어 황후를 보호할 모친조차 약한 몸 탓에 일찍 눈을 감았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를 부친과 오라비는 오로지 출세의 발판으로만 생각했다.

황제 아달베르트가 그녀를 만난 것은 공교롭게도 황태자가 그토록 오해하던 트라체스 황태후 덕이었다.

트라체스 대공가의 유일한 후계자이기도 했던 그녀가 자신의 시녀로 황후를 데려왔었다.

‘황태후 덕에 내가 그녀를 만났다는 걸 세르미아가 알 리가 없으니.’

황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황태자를 바로 잡아야 할까.

과연 이야기한다고 듣기나 할까.

‘그대의 얼굴을 보면 방법이 생각날까, 결심이 될까 했는데, 그저 갈팡질팡하기만 해. 그대를 위해 더욱 강한 황제가 되겠다 했는데, 지금은 그게 잘못되었던 건가 싶어.’

황후가 즐겨하던 머리 장식을 매만지며 황제가 착잡한 마음을 다스릴 때였다.

들릴 리 없는 발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그저 지나가는 신관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끼이익-

그 발소리의 주인은 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름 아닌 요즘 황제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 첫 아이, 세르미아였다.

“네가 어떻게…….”

“수년 전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 시종장께서 몰래 귀띔해 주셨으니까요.”

세르미아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병을 들어 보였다.

황후가 생전에 좋아하던 와인이었다.

세르미아는 그러더니 황제의 앞에서 무릎을 굽히며 입을 열었다.

“부디 절 들여보냈다고 시종장을 책하진 말아 주십시오, 아바마마. 제가 그간 너무도 무도하게 굴어 그 죄를 청할 기회를 얻고자 간청한 것이니까요.”

수 주 전, 황제 앞에서 길길이 날뛰던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마마마의 앞에서 아바마마께 용서를 구하려 합니다.”

그 말에 황제는 마음이 크게 누그러졌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의 기일이었다.

황후가 좋아하는 와인까지 준비해 어머니의 앞에서 용서를 구하겠다고 하는데, 흔들리지 않을 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황제는 어쩐지 짠한 시선으로 고개 숙인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개 숙인 세르미아의 눈빛은 분함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 * *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셔요?”

“응, 이제 많이 익숙해진걸.”

로레나와 폴리는 안토니아가 드레스 아래에 입은 얇은 갑옷이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몇 번이고 체크했다.

안토니아는 평소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어 늘어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깔끔하게 올렸다.

머리 장식도 거의 하지 않고 대신 모자를 썼다.

‘가장 조용하길 바라는 날일 텐데.’

오늘은 다름 아닌 황후의 기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황제에게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도 소란스러운 날이 될 것이다.

안토니아는 문득 자신의 대비가 어쩌면 황제에게는 오히려 잔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주인님, 대공 전하께서 오셨어요.”

“응.”

안토니아는 반쯤 비운 차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움직여야만 했으니까.

안토니아와 리카르도는 백작저 내에서 다른 이야기 하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어느덧 하늘이 환해져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하러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거리는 조금씩 붐비는 게 보였다.

마물이 나왔음에도 대부분은 겁에 질려 틀어박히기보다 일상을 택했다.

물론 마물보다도 생활을 유지하지 못할 때의 두려움이 더 커서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새벽에 나갔던 마물 처리는 괜찮았어?”

“응, 아무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다행이다.”

안토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도 일상처럼 마물 토벌에 대한 소식을 듣는 안토니아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늘 염려했다.

알렉산드라는 걱정을 덜게 하고자 사실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가르침 받은 이상 마물 토벌이 실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안토니아는 그대로 마차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오늘따라 어쩐지 기분이 더 가라앉는 건 아마도 누구보다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잘 알기 때문일 터였다.

리카르도는 배려심 깊게도 안토니아에게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그저 손만 잡아 주었다.

어느덧 마차는 중앙 신전 가까이에 도착했다.

안토니아는 한편으로는 오늘 신전 방문이 그저 돌아가신 황후를 기리는 일 정도로 끝나길 바랐다.

그러나.

“안토니아.”

리카르도의 말에 안토니아는 굳은 눈으로 신전 뒤편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절대 착각할 수 없는 빛.

다름 아닌 ‘가호’의 빛이었다.

* * *

안토니아와 리카르도가 신전에 도착하기 30분쯤 전, 황태자 세르미아는 오랜만에 황제와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황궁이 아니어서일까, 세르미아는 제 아버지의 눈이 평소와 달리 인정으로 넘친다고 문득 생각했다.

아니, 얼핏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말로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착각이다. 아바마마께서 어마마마를 그토록 그릴 리가 없어.’

신전의 내실을 이렇게 마련한 것 또한 세르미아에게는 어이없게만 느껴졌다.

‘어마마마의 흔적을 황궁에서 지우고 싶었던 것뿐이겠지.’

어릴 때 얼마나 자신이 애원했던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방을 그대로 두어 달라고, 눈물까지 흘리며 황제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황제는 단호한 얼굴로 거절하지 않았는가.

‘어마마마께서는 황궁에 계셔야 할 분이다. 그런데 그런 분을 신전에, 그것도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곳에 두고선 어마마마를 그린다고?’

모두 나중에 역사가에게 비정한 황제란 싫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한 방비에 불과하지 않은가!

‘……지금은, 지금은 참아야 한다.’

세르미아는 원망 섞인 감정을 누른 채 자신이 들고 온 와인 병을 꼭 쥐며 천천히 황제에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간 너무 아이처럼 굴었습니다.”

“세르미아…….”

“그저, 그저 겁이 났을 뿐입니다.”

세르미아는 조금 더 황제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첫아들이지 않습니까. 두 분께서 제게 큰 기대를 했다는 걸 압니다.”

“…….”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저 초조해졌을 뿐입니다.”

“예측 장치가 실패한 것 때문이냐?”

황제의 물음에 세르미아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숙부님께서는 서북부에 오래 계시며 실력을 보이셨지요, 그런데 저는…….”

세르미아는 조용히 와인을 내려놓았다.

그는 미리 가지고 온 와인 잔에 와인을 따랐다.

또르르, 맑은소리가 잔과 부딪치며 났다.

“아바마마께 책임지고 동생들을 돌보겠다 했는데, 제대로 못 하지 않았습니까.”

황제는 그 말에서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모르지 않았으니까.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둘째와 셋째는 멀리 보내 버리고, 막내는 바보에다 어리광쟁이로 자라게 한 것을 모르지 않는데.’

그럼에도 황제는 세르미아에게 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 아들 중 얼굴이 가장 황후와 닮은 게 세르미아였으니까.

성정은 너무도 달랐지만 말이다.

그러나 황제는 잠자코 세르미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미아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말이다…….’

오늘을 그냥 보내 버리면 영영 세르미아의 이야기를 들을 날이 없을 거란 생각에 황제는 어깃장 놓지 않았다.

“아바마마, 지금껏 제가 모자라게 군 것을 잘 압니다.”

“……정말이냐?”

“네, 제레미야가 그러더군요.”

세르미아는 아무 죄책감 없이 제레미야의 이름을 팔았다.

“제가 요즘 들어 너무 이상하게 군다고 말입니다.”

“제레미야가?”

믿기지 않아 되묻는 황제를 보며 세르미아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야는 아직 어리긴 하지만 제 곁에 가장 오래 있던 동생이지요.”

“그래.”

“제레미야가 제게 요즘 이상하다고 하니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속으로 조금 혀를 찼다.

세르미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계기를 말하고자, 내심 ‘멍청한’ 제레미야가 그렇게까지 말했다고 이야기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역시 제레미야의 훈육을 계속 세르미아에게 맡겨선 안 되겠어.’

이렇게 이용당하기만 해선 그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다.

그 똑똑지 못한 아이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큰일을 저지르고 난 뒤면 늦을 테니.

‘차라리 다른 아이들처럼 그 아이에게도 영지를 주고 멀리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인 자신은 분명 쓸쓸해지겠지만 말이다.

세르미아는 와인 잔을 황제에게 밀어 두며 이야기했다.

“어마마마의 앞에서 맹세하겠습니다.”

황제는 그 말에 세르미아가 바라보는 황후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어마마마께 실망을 드리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황제는 조용히 세르미아를 응시했다.

세르미아가 먼저 와인 잔을 들었다.

“어릴 적 어마마마께서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무럭무럭 자라서…….”

잠시 세르미아의 목소리가 잠겼다.

눈을 감은 어머니를 생각하니 절로 먹먹해졌다.

황궁에 자리 한편 내주지 않고 아무도 걸음 하지 않는 신전.

게다가 황제는 십여 년 전부터는 황후의 기일을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된다고 하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이 황제의 홀대같이 느껴졌다.

‘돌아가신 황태후 폐하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한 결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너무하실 수는 없다.’

세르미아는 확신했다.

그는 목을 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의 무게를 나눠 드리라고 말입니다. 어마마마께서는 그러실 수 없다며 속상해하셨습니다.”

세르미아는 그 말을 하던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뵈러 간 날, 황제는 황태후와 한참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어머니는 씁쓸한 듯 제게 이야기했었다.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자신의 자리를 황태후에게 빼앗기고……!’

세르미아는 그대로 든 와인 잔을 황제를 향해 들었다.

“부디 제 맹세를 믿어 주십시오, 아바마마.”

황제는 그 말에 조용히 와인 잔을 들었다.

물론 그는 세르미아의 말을 다 믿지 않았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 가지.

‘저 아이가 황후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니까.’

저와는 대립할 때도 있다지만 단 한 번도 황후에 대한 마음이 거짓인 적은 없었다.

그리고 황제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세르미아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자 했던 마음에 황제는 누그러진 얼굴로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걸 그녀도 바라겠지.”

황태자가 준비해 온 와인을 보자 황후와의 여러 추억들이 지나갔다.

황태자가 먼저 와인 잔을 입에 대었다.

황제는 그걸 보고 자신도 단숨에 와인 잔을 비웠다.

그러나.

쨍그랑-!

찾아온 것은 익숙한 와인의 달콤함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점멸하는 시야였다.

시야뿐만이 아니었다. 목까지도 탈 것만 같았다.

‘독, 독을 탔구나……!’

그 순간, 황제는 귓가에서 ‘쩌저적.’하는 소리를 문득 들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금세 묻혔다.

“네! 어마마마께서는 누구보다도 이 날을 바라셨을 겁니다! 아바마마께서 자신을 배신하고 이용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테니까요!”

세르미아가 저주하듯 자신을 향해 소리쳤으니까.

“괴로우십니까? 어마마마께서는 더 괴로우셨을 겁니다!”

“세, 르미아……. 네가 짐에게…….”

“하, 어떠십니까? 생각도 못 하셨겠지요! 아바마마께서는 그 높은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누구도 아바마마를 해하려 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테니까요!”

황제는 그 말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평생을 그런 위협에서 살았거늘.’

동복형제에게, 황후의 가족들에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아들까지도.

어쩐지 조금 전까지 먹먹해지고 아득해지던 감각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았다.

황제는 그게 세르미아의 말도 안 되는 저 말들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평안히 가십시오, 아바마마. 이 나라는 제가…….”

헛소리하지 말라고 황제가 일갈하려는 순간.

쩌저적-!

황제가 팔목에 차고 있던 팔찌가 부서져 내렸다.

다름 아닌 안토니아가 선물로 주었던 팔찌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어, 어……?”

세르미아가 당황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조금 전까지 가누기 어려웠던 몸의 감각이 돌아옴과 동시에 황제는 그대로 황태자의 뺨을 내리쳤다.

“네가 정녕 정신을 놓은 모양이구나, 세르미아 아인 솔리스!”

그러나 황제는 다음 순간 다른 의미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를 내려친 제 손이, 아니 전신이 묘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이, 이게…….”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음에도 그 아름다운 빛깔에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먼저 상황 파악을 한 건 황제였다.

‘안토니아가 준 팔찌가…….’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그 어린 백작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이런 걸 준비했단 말인가.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확실한 건 지금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

‘……타인도 이렇게 날 염려하는데.’

황제는 그대로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도 가혹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후를 기리기 위해 준비한 곳에서 첫아이를 베어 내고자 결심해야 한다니.

‘아니, 내가 자초한 것이로구나.’

세르미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토록 기회를 주지도 않았을 테니!

이보다 더 전에 이름을 지워 버렸을 것이다.

그런 것을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제게 검까지 겨누게 했다.

‘세르미아가 어찌 모두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가 저렇게 비틀리도록 내버려 둔 것 또한 자신의 죄였다.

황제는 회한을 느꼈다.

늘 최선을 다했음에도 황제이며, 아버지였기에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던 것이다.

게다가 참으로 잔인하게도.

“괜찮으십니까, 황태자 전하!”

내실 안으로 우르르 미리 준비한 자들이 밀고 들어왔다.

평소 세르미아가 자주 어울리던 자들의 문양이 새겨진 기사들과 황제가 직접 유폐한 신관들이.

‘참으로 이런 짓을 할 때만 주도면밀하구나…….’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제 자리를, 아니 황태자 자리를 줄 수 있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는 군주로서의 대범함도 아량도 모두 없었으니까.

심지어 좋은 아들조차 되지 못했다.

황태자는 제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뒤 외쳤다.

“참으로 비열하십니다, 아바마마.”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그토록 제위가 아까우셨습니까, 신전과 결탁하여 몸을 지키려 하시다니요.”

황태자가 비웃으며 이야기했다.

황제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신전과 결탁하여 자신의 목을 죈 것은 다름 아닌 황태자가 아닌가.

게다가…….

“세르미아, 너 시종장과 다른 기사들을 어찌한 것이냐……?”

“이런 상황에도 아바마마께서는 그들을 먼저 걱정하십니까?”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빼 들었다.

“지금 아바마마께서 걱정하셔야 할 것은 본인의 목숨일 텐데요.”

비릿한 웃음과 함께 무척 서늘하게도 말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말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니, 하도 많은 목숨을 앗고 늘 본인은 무사하셨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으시는 것인지요?”

그러나 황태자의 여유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탕-!

총성과 함께 다른 자들의 비명이 들렸다.

황태자는 그와 함께 깨달았다.

‘또, 또……! 숙부님이 나를.’

리카르도가 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전신으로 끼쳐 오는 이 소름이 리카르도라는 걸 확신하게 했다.

‘아바마마가 또 숙부님을……!’

그리고 한 번 더 그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황제는 비열하며 자신의 친아들보다도 이복동생을 더 믿는다는 사실에.

자신이 황제를 베려고 하는 이 순간에도 황태자는 그게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은 아버지를 향해 검을 들어도.

‘아바마마가 제게 그러시면 안 되지요!’

모순적이란 생각 따위 세르미아의 머릿속엔 없었다.

“트라체스 대공을 모두 막아라!”

황태자는 재빠르게 신관과 다른 자들에게 지시하며 자신은 검을 들고 황제에게로 향했다.

리카르도가 자신에게 어깃장을 놓으려 한다면 그가 방해하기 전에 먼저 황제를 죽이면 될 일이었다.

황제에게서 일렁이는 빛 또한 사라졌으니 자신을 방해할 것은 없을 터였다.

“아바마마, 이번에는 정말로.”

세르미아는 그대로 황제에게로 다가가며 웃었다.

“아무도 아바마마를 지키지 못할 테지요.”

내실 입구를 저토록 틀어막고 있으니, 아무리 리카르도가 빠르다 해도 시간이 걸릴 터였다.

황태자는 그대로 검을 휘두르며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그것과 동시에.

탕-!

이번에는 내실과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겨눠진 곳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세르미아의 눈에 들어온 건 피를 토하는 황제의 모습이 아니라, 한 번 더 눈앞을 물들이는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 * *

“으아악!”

내실 쪽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총성 대신 마치 둔기로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폐하, 괜찮으세요?!”

안토니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황제의 귓가를 울렸다.

그 순간 황제는 ‘총성’이 났음에도, 그리고 세르미아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음에도 자신이 무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다름 아닌 세르미아의 안위였다.

‘설마 조금 전 총성으로 세르미아가…….’

그러나 참으로 자신의 아들은 끝까지 가혹했다.

황태자는 일렁이는 빛에 막힌 제 몸을 어떻게든 베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니까.

“……세르미아.”

“어째서, 어째서……!!”

황제는 크게 숨을 삼켰다.

“어째서……!! 어마마마는 눈을 감으셨는데, 아바마마만, 아바마마만 이토록 다 살리려 한단 말입니까!”

이토록 아들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니.

게다가 그다음으로 들린 말은 그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보호’하고 반역자들을 모두 제압하라!”

리카르도의 목소리였다.

‘이 와중에도 날 배려하는가…….’

황제는 모르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제압’ 소리를 하지 않는 것 또한 저를 생각해서임을.

“괜찮으세요, 폐하?”

“안토니아…….”

황제는 황태자가 검을 겨누는 데도 자신에게 뛰어온 안토니아를 보면서 더 마음이 아려 왔다.

황태자는 금방 매우 ‘정중하게’ 붙들렸다.

덕분에 깨달음이 머리에 와 박힐 수밖에 없었다.

‘저 아이는 황태자다. 누가 짐의 앞에서 저 아이를 굴복시킬 수 있을까.’

리카르도와 안토니아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아들이라고 한 번 더 손을 내미는 것은 절대 해선 안 될 짓이었다.

황제는 조용히 리카르도를 향해 말했다.

“황태자 세르미아 또한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반역을 저질렀으니 제압하라.”

“아바마마-!!”

황제의 말에 세르미아는 절규하듯 외쳤다.

이런 순간에도 당신은 자신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것처럼.

황제는 그래서 오히려 제 아들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모두 황궁으로 압송하라, 저 무도한 자들을 짐이 친히 다스릴 것이다!!”

더는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 * *

“짐이 무사한 건 모두 너희의 덕이다.”

“아닙니다. 일찍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황제는 리카르도의 의젓한 말에 더욱 씁쓸해졌다.

아들은 제게 한 번 잘못했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는데 리카르도는 이런 상황에도 늦게 온 것을 죄송하다 이야기하다니.

황제는 그 착잡함을 숨기며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안토니아, 네가 짐에게 준 팔찌 말이다.”

“네?”

“무얼 한 것이냐?”

황제도 짐작하는 게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이 어린 백작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내다보고 지금껏 꾹꾹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그녀가 얼마나 애써서 백작의 자리를 얻어 내고, 많은 음해를 막았는지 알기에 더욱 그랬다.

그중에는 신전으로부터의 공격도 있지 않았은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에요, 폐하.”

“대수롭지 않긴, 이건-.”

그러나 황제는 말을 다 할 수 없었다.

그가 말을 마치는 것보다도 빠르게 리카르도가 쥐고 있던 휴대용 예측 장치가 요란하게 울렸으니까.

땅이 울렸다. 이 꺼림칙한 진동은 다름 아닌 마물이 대량 발생할 때 나타나는 진동이었다.

황제는 또 알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를 압송하라는 자신의 말에 제압하여 끌고 가는 순간임에도 리카르도와 안토니아가 어째서 긴장을 놓지 않았는지 말이다.

“황태자 전하!”

“교황 성하!”

그 혼란 속에서 황태자 세르미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붙들고 있던 기사들이 당황하여 멈칫한 사이, 몸을 비틀듯 빼 벗어났다.

마물이 리카르도와 황태자 사이를 갈랐다.

“으아악!”

황태자와 반역자들을 붙들었던 기사단 쪽으로 마물들이 기어오르듯 발생했다.

“세르미아, 네가 기어코……!”

황제는 분노하여 제 아들을 향해 외쳤다.

정말로 황제가 될 생각이라면 이런 짓을 벌여선 안 됐다.

이미 수도는 인위적인 마물 출현으로 인해 제대로 생활할 수 있을 공간이 아니어야 했다.

그런 걸 서북부 기사단과 리카르도가 잘 막아 줘 겨우 유지하고 있는데……!

“너는 도대체 뭐가 되고 싶은 것이냐! 정말로 짐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

황제의 외침에 황태자가 크게 웃었다.

“수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아바마마.”

“뭐……?”

“어차피 아바마마께서 하실 걱정은 아닙니다.”

어느새 자신을 구하러 온 자들과 합류한 황태자가 여유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이 많은 수의 마물 사이에서 정말로 숙부님과 세르히 백작이 아바마마와 모두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그 말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황제 또한 몇 번이고 마물이 발생한 전장을 겪었다.

이 정도의 규모면 살아남는 게 용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걱정과 달리, 아니 황태자의 기대를 배반하듯 리카르도는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두고 볼 일입니다. 황태자 전하.”

“하, 그걸 허세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마물들은-.”

그러나 리카르도는 황태자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지시했다.

“드비, 마물부터 해치운다. 기사단은 당황하지 말고 평소대로 마물을 토벌하라.”

“네! 대공 전하!”

리카르도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따르는 기사들 모두가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황태자는 그 모습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 목숨을 이 자리에서 끊어 주는 게 맞겠지요.”

황태자는 비릿한 웃음을 보이며 교황과 제 기사들에게 명했다.

“모두를 죽여 버려라.”

선득하게 세르미아의 눈이 빛나며 가증스러운 예의를 차렸다.

“나는 마물로 인해 아바마마를 잃고 슬픔을 참으며 무결하게 제위에 올라야 하니, 모두에게 침묵을 선사할 수밖에.”

그 말에 교황과 다른 신관들이 일제히 검은 병을 깨트려 던졌다.

연기가 피어오르며 마물들이 속속 솟아올랐다.

황태자는 모두 제 뜻대로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 순간 또렷한 목소리와 함께 영롱한 빛이 퍼졌다.

“아니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저희를 침묵하게 하실 수 없을 거예요.”

“세르히 백작…….”

“주신의 가호가 제게 있고, 저는 여기 있는 모두를 죽게 두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주신의 가호라니…….”

황태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교황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보다도 더 놀란 얼굴이었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이럴 수는……. 어째서 사도님께서 이런 타이밍에, 이, 이런 식으로 숨어 계시다 나타난단 말인가.”

일찍이 교황은 사도가 등장할 거란 계시를 받았기에 더욱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사실이라고?’

교황의 반응에 진실임을 알게 된 세르미아가 이를 꽉 물었다.

‘하지만 그러면 내가 불리하잖아!’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죽여 침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황태자는 곧장 교황에게 다가가 속닥였다.

“성하, 당장 사칭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요.”

“네?!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분은……. 세르히 백작은 틀림없는 신의 사도입니다!”

아무리 더러운 곳에 속속 손을 들이대고 자신의 야욕을 위해 신의 이름을 팔았다곤 한들, 본질은 신관이었다.

신이 하지 않은 걸 신의 이름으로 행할 때는 자신의 뜻과 같다고 생각하며 행한다는 핑계라도 있었지!

하지만 안토니아에게서 나오는 저 영롱한 빛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당장에라도 천벌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금 저 앞에 넙죽 엎드리기라도 할 거란 말입니까, 성하?”

“네……? 하, 하지만…….”

그러나 황태자는 본인이 강한 욕망을 품은 사람인 만큼, 교황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자신을 위해 신의 이름을 판 신관에게 정말로 그 존재가 신성한 것일까?

게다가 이미 한 번 젊은 신관들에 의해 명예가 땅에 처박혔던 자였다.

‘유폐에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했으면서 겨우 이따위 것에 망설여?’

황태자는 교황을 향해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성하께서 그런 마음이시라면 저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저들에게 백기를 드실 수 있으십니까?”

“그, 그건…….”

“그러면 누가 성하라고 불러 드릴 것 같습니까, 여기 계신 수석 신관님들을 누가 신관이라 인정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황태자가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으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르히 백작은 제 손으로 죽일 테니 여러분이 죄책감 가질 이유 따위 없지요.”

안토니아를 죽인다는 말에 다들 심장이 덜컥하는 걸 느꼈다.

그러나…….

“아시겠습니까, 여기서 사칭이라고 외치면 이 싸움이 이겼을 때 간악한 사칭자를 처벌한 신관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승리한다고 해도…….”

황태자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선고하듯 이야기했다.

“신의 사도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얼간이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누가 신의 대리자, 교황이라고 인정할까요?”

세르미아의 말에 교황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충분한 파문이었다.

저쪽과 달리 이쪽은 모든 걸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 외에는 제 것을 되찾을 방도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설사 그게 스스로 벼랑 끝으로 밀고 가는 선택일지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제 명예를 모두 되찾을 방법이 그것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저를 따른 신관들까지도 무언의 압박과 기대를 보내왔다.

그래서 교황은 안토니아를 향해 온 힘을 끌어모아 외쳤다.

턱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외쳐야만 했기에.

“무엄하다! 감히 어디서 신의 이름을 사칭하느냐!!”

* * *

교황이 그토록 온갖 각오를 굳히고서 한 외침임에도 안토니아는 눈빛 한 번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흔들리지 않으니, 당연히 따르는 기사들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도 결계를 치고자 신전 밖으로 나온 에밀리오와 신관들이 헛소리한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슬픈 일이라니? 어린 것이 무얼 안다고 입을 연단 말인가!”

이번엔 교황이 분노에 차 입을 열었다.

에밀리오가 배신하여 자신들이 이렇게 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에밀리오는 그저 온화한 얼굴로 결계를 강화하며 답했다.

“세르히 백작님은 진실로 사도이십니다만, 제가 굳이 단언할 필요도 없을 테지요.”

“뭐, 뭐?”

“이미 눈이 흐려지신 분들께는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백작님이 사도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날카로운 말을 에밀리오는 흐트러짐 없이 부드러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당연히 그 말이 사실인 걸 아는 교황과 신관들은 그저 주먹만 쥔 채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래서 그들을 대신해 황태자가 에밀리오의 말을 한껏 비아냥거렸다.

“더러운 배신자 주제에 뭘 안다고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대 탓에 오래 신전을 지탱한 분들이 이토록 흔들리는데 말이야!”

“그 말은 틀렸습니다, 황태자 전하.”

그러나 이 말에 답한 건 안토니아였다.

그녀는 더없이 당당한 태도로 황태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게 깃든 가호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자들이 그간 신전에 있었기에 곪아 들어간 것입니다.”

“세르히…… 백작!”

“염려 마세요, 전하. 정말로 아니라고 생각하면 굳이 지금 안달 내실 필요가 없을 텐데요?”

순간적으로 황태자는 안토니아가 빙그레 웃은 것 같다고 느꼈다.

평소와 다름없이 표정 없는 얼굴인데도, 자신을 한껏 비웃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저 여유는!’

풀멘 변경백의 손녀여서인가?

일국의 황태자를 대하는 데도 그녀는 지금까지와 달리 너무도 거침없고 당당했다.

‘제레미야가 했던 말이 모두……. 모두 사실이었다니!’

무도회가 끝난 다음, 제레미야가 말한 안토니아가 했다는 말들이 귀족이 입에 올리기에는 너무도 무례하여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제 막냇동생이 괜히 없는 말을 지어낸다고 생각했다.

‘속은 거였어! 그간 예의 지키고 공손하게 굴던 모습이 모두 연기였던 거야!’

그러나 안토니아는 세르미아에게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고 쐐기 박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전하,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지요. 제 가호가 진짜인지 아닌지 말이에요.”

느긋하고 우아하게 양쪽으로 팔이 벌려졌다.

너무나도 여유로우며 찬란한 자태였다.

마치 이런 날을 위해 몇 번이고, 수없이 각오를 다진 사람처럼.

그리고 그 자태에 기사단과 에밀리오를 비롯한 신관들은 잠시 몸을 낮췄다.

그녀가 사도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깊게 받아들였기에.

전설 속 주신 파벨라는 늘 여유롭고 당당하기로 유명했다.

* * *

마물과의 싸움이 끝없이 이어졌다.

황태자는 싸움이 시작되기 전 당연히 자신들이 승기를 잡을 거라 생각했다.

마물의 통제권을 쥔 것은 저희 쪽이었으니 말이다.

“헉, 허…… 헉……!”

그러나 먼저 체력적으로 한계를 호소한 건 황태자 쪽이었다.

그도 그럴 게…….

“주신의 가호가 여기 있다!”

“죽음이 우리 곁에 없으니 모두 두려워하지 말라!”

안토니아가 있었기에 기사단 전체의 사기가 오른 것은 물론, 방어에도 신경 쓰지 않고 공격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 게 줄어드니 마물 처리 속도가 빨라진 건 당연한 말이었고.

게다가 황태자 쪽 신관들은 대부분 체력이 그리 좋지 않았다.

‘마물 하나가 기사 수십 정도는 상대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니 십여 명 상대하는 것도 벅찼다.

마물도 절로 발생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성력과 체력을 쥐어짜야 하는 데다 아군을 공격하지 않게 하려다 보니 제풀에 지쳐 신관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덕분에 황태자의 전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그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안 돼, 일어서! 일어서라고! 저쪽은 계속 싸우잖아! 감히 나만 남겨 둘 셈이냐!!”

황태자는 쓰러지는 자들에게 외쳤다.

그러나 그저 허망할 뿐이었다.

오히려 상대하는 기사들이나 리카르도가 혀를 찰 정도로.

“쯧, 이미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것들에게 움직이라 한들.”

“어디 전장에 나와 보셨어야 알지.”

황제 아달베르트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모두 짐의 탓이로구나……. 짐이 아비로서도, 황제로서도 못하였어…….’

저렇게 길러 낸 자신의 잘못이란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설상가상으로 신관들이 쓰러지고 황태자 쪽 기사들의 수가 몇 남지 않게 되자, 마물들은 피아를 구별하지 못하고 날뛰었다.

그나마 남은 기사들이 황태자를 보호하려 했으나 그 수가 적어 역부족이었다.

‘정말 제 앞가림 못하는 조카님이야.’

리카르도는 황태자를 구할 생각으로 총을 겨누었다.

‘안토니아가 절대 황태자를 죽게 해선 안 된다고 했거든.’

그는 안토니아의 말을 아주 잘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리카르도.”

고개를 저은 건 황제였다.

“폐하, 하지만 이대로 두면……!”

리카르도의 말에 황제는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귓가에 황태자가 겁에 질려 외치는 비명이 잘 들렸으니까.

‘안다, 괴로울 테고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여기에서 죽는 게 세르미아에게는 차라리 온전한 죽음일 수도 있다.’

명예를 지켜 줄 방법 또한 있었다.

황제는 그래서 리카르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 순간.

“안 됩니다. 폐하!”

“안토니아…….”

“어째서 리카르도 전하에게 조카를 죽게 내버려 두었단 죄책감을 짊어지게 하시려 하세요!”

“……그러나 짐은…….”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군주이시며 황태자 전하의 아버지십니다!”

안토니아는 절절하게 외쳤다.

평소 큰소리라곤 잘 내지 않고 늘 다정하게 굴던 안토니아였기에 황제는 더욱 놀라 눈을 홉 떴다.

“폐하께서는 마지막까지 그 모든 책임을 피하실 생각이십니까, 평생 폐하만 그 죄책감을 지고 살면 된다고 그렇게 마지막까지 감싸려 하시는 겁니까!”

마음이 모두 꿰뚫린 기분이었다.

황제는 헛웃음을 지으며 안토니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도 없는 아이가 자신의 아내와 그리고 자신의 오랜 친구였던 죽은 트라체스 황태후와 비슷한 말을 하질 않는가.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제는 리카르도의 팔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아이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게 하고 이 제국의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짐의 의무로구나.”

황제의 말에 리카르도는 곧장 오러를 실었다.

조금 지체되어 아슬아슬하긴 하였으나, 그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탕-!

깔끔한 총성이 황태자 세르미아 아인 솔리스의 헛된 망상과 같은 야욕을 뚫고 지나갔다.

* * *

수도 성벽 바깥에는 여러 무리의 기사단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초조한 얼굴로 성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실패하신 건 아니시겠지요?”

“실패할 리가 없다. 황제 폐하께서 중앙 신전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듣지 않았느냐.”

황태자가 일으킨 이번 반역에 가담한 귀족은 초조한 얼굴로 자신의 기사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실패할 수가 없는 계획이었다.

이 모든 것을 누군가가 모두 예상하고 대비해 두지 않은 이상.

아니, 대비했다고 한들 황태자와 황제 앞을 누가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시간을 돌리거나 뛰어난 의술로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실패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긴장되고 초조한 것은 모두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마물 탓일 터였다.

실제로 그들은 수도 근처에서 대기하면서 마물 여럿을 처리해야만 했었으니까.

그러나 확실히 황태자가 말한 것과 달리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정오를 훌쩍 지나 어느덧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었기에.

‘혹시 눈치챈 다른 기사들이 황태자 전하를 방해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구출하러 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을 무렵, 곁에 있던 기사가 외쳤다.

“저길 보십시오,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래, 전하께서 일을 무사히 진행하셨나 보구나!”

그렇다면 남은 것은 분명 반발하고 들 서북부나 트라체스 대공가의 기사들을 쓸어 버리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많은 귀족들이 황태자를 따르지 않는가.

‘콧대 높은 오르테가 후작가의 속이 많이 상하겠어.’

그 생각을 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중앙 귀족의 지위는 없으나 영지를 건실하게 다스리고 있는 귀족은 사교계 시즌에 수도에 올 때마다 거들먹거리던 오르테가 후작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본인도 작위는 똑같이 후작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황태자는 이번 일에 참가하는 걸 환영하며 그에게 약조했다.

‘그대에게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딸이 있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얌전하고 다정한 아이지요.’

‘그대의 집안도 황실과 연을 맺기에 모자람이 없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발렌타인 오르테가의 서슬에 내심 욕심은 있으면서도 감히 황태자비 자리를 탐내지 못했던 지난 날이었다.

‘그런데 오르테가 후작가는 자진해서 빠졌다지?’

물론 후작가와 가까운 몇몇 집안은 후작가가 어리석다며 남아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반역에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딸에게 이야기하자 아이도 환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아, 아버지. 매번 수도에 갈 때마다 오르테가 후작 영애가 절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아세요? 제게 고개 숙일 걸 생각하니 벌써 너무나 기뻐요.’

‘그럼, 너는 일국의 황태자비, 아니 황후 폐하가 될 테니 말이다. 오르테가 후작 영애를 네 시녀로 들여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기쁘네요, 역시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건 오로지 아버지뿐이에요!’

그 얼굴을 떠올리니 몇 번이고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섰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딸아이가 아닌가.

다만 좀 못마땅한 건.

‘다들 무슨 헛꿈을 꾸는 건지, 마치 황태자 전하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황태자는 저를 따로 불러 이야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참가한 귀족 중 오르테가 후작가가 없다는 걸 알고 세르미아의 옆자리를 노리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공공연하게 그 때문에 가담했다고 하는 자도 있었고 말이다.

후작은 말을 몰며 혀를 찼다.

어차피 이들 중 가장 작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비록 중앙 귀족 자격을 가진 백작들이 몇몇 있다곤 하지만 후작과 백작 사이에는 엄연히 급이 있으니 말이다.

후작은 단꿈에 젖어 큰 목소리로 외치며 성문으로 진격했다.

“황태자 전하를 위해 진군하라!”

그 목소리에 다른 몇몇 귀족들은 아니꼬워했으나, 이내 동조하듯 소리를 질렀다.

수도에 있는 서북부 기사단과 트라체스 대공가 기사단에 비교하면 그 수도 훨씬 많았다.

사태를 알아차리고 다른 귀족들이 기사단을 불러온다 한들 시간이 걸릴 터, 패배의 기운은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격적인 기세로 달려 나갔음에도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들을 반긴 건.

“이미 체포된 ‘반역자 전하’를 어찌 위할 수 있단 말인가?”

“오, 오르테가 후작……? 오르테가 후작 영애?!”

성벽 위에서 여유로운 얼굴로 선 오르테가 후작과 발렌타인의 모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후방에서도 들렸다.

“오르테가 후작님, 지금부터 반역자들의 기사단을 포위하겠습니다.”

“좋네! 오르테가 기사단도 반역자들을 포위하여 막아 내라!”

자신들의 편이라고 여겼던, 심지어 어제까지만 해도 오르테가 후작을 어리석다고 이야기하던 자들이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뒤에서부터 그들을 포위했다.

오르테가 후작은 그 모습을 보며 제 곁에서 그저 덤덤한 얼굴로 선 딸을 진심으로 두렵다고 생각했다.

‘이걸 대범하다고 해야 하나, 정말로 이대로는 아들 녀석들은 뼈도 못 추리겠군!’

몇 번인가 세르히 백작과 편지를 나누더니, 대뜸 일주일 전 제게 와 통보했으니까.

‘일주일 뒤, 동쪽 성문에서 반역자들을 막을 거예요. 후작가의 영광을 지킬 생각이 있다면 따라 주세요.’

그리고 이번에도 제 딸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음, 아무래도.’

후작은 이 모든 상황을 보며 결심했다.

‘발렌타인의 남편으로는 설명을 잘하는 자를 들여야겠어.’

그래야 다음 대 후작가 가신들이나 아랫사람들이 평안할 테니 말이다.

* * *

반역자들이 체포된 건 동문만이 아니었다.

남문에서는 이스베르가가 트라체스 대공가의 기사단 반수만을 데리고 그들을 막아 냈다.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것만 보며 이스베르가를 우습게 보고 밀고 들어오던 자들은 그날 생각을 고쳐야만 했다.

‘경고는 한 번이니 경고인 거지요.’

나직이 내뱉었을 뿐이었는데.

가차 없이 자신들을 제압하라는 이스베르가의 명령에 그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기사단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베르가의 지휘가 워낙 대단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놀아나는 것처럼 당하기만 하다 제압당했으니까.

다른 쪽 또한 드란제아 소공작이나, 서북부 기사단이 훌륭하게 막아 냈다.

꽤 많은 수가 가담한 반역이었음에도 그들은 다음 날 새벽이 되었을 무렵 모두 정리되었다.

황제는 그 모든 보고를 듣고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어제 안토니아가 말한 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황태자 전하가 이미 붙잡혔다는 걸 알리지 않을 생각이에요.’

‘어째서냐?’

황태자의 명예를 챙겨 준다기에는 덮고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기에 황제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번 반역은 제국이 그간 키워 온 병마와 연관이 있지요. 중앙 신전만 이 일에 가담하였을까요, 폐하?’

그렇게 이야기하는 안토니아의 물빛 눈을 보며 황제는 전신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정보를 잠시 숨기는 것만으로도 많은 자가 수면 위로 튀어나올 것임을 명확히 아는 얼굴이었다.’

싫은 감정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일로 씁쓸했음에도 한편으로는 기꺼웠다.

참으로 뛰어난 아이였다.

마치 그 난전 속에서도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올렸던, 소꿉친구 트라체스 황태후가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황제는 안토니아에게 생각한 대로 해 보라고 허락해 주었다.

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반역의 증거를 외치며 달려든 귀족들을 하나하나 잡은 데다, 각 지역 신전들의 부정 또한 루퍼스의 이동 마법 도구로 빠르게 정리해 냈다.

게다가 안토니아는 이 반역을 자신이 어디서부터 짐작하였는지 황제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해도 황제가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제거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마치 안다는 것처럼.

‘총명한 아이를 짓밟는다고? 그렇게 하면 그토록 잘못되었다 말하던 세르미아나……. 죽은 내 동생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자신의 그릇이 모자란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수단으로 부숴 버리려던 자들과 말이다.

그래서 황제는 안토니아에게 자상하면서도 씁쓸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 또한 신의 가호가 깃든 아이기에 아는 걸지도 모르지.’

황제는 회한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동이 트면 아마도, 황제 본인은 스스로 곪아 들어가기를 선택했던 것들이 모두 달라질 것이란 것을 직감했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겠구나.’

자신이 아버지로서 제 첫아들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시간이 말이다.

황제는 제 곁을 오래 지킨 시종장만을 데리고서 황태자를 가둬 둔 감옥으로 향했다.

아들에게는 말하지 않으려 했던 진부하고 해묵은 옛이야기를 할 때였다.

비록 제 어리석은 아들은 믿지 않으려 하겠지만 말이다.

* * *

추후 황태자의 짧은 봄이라 불리는 이 반역의 재판은 여러 날에 거쳐 열렸다.

가담한 자가 제국 귀족의 삼 분의 일이나 되는 데다, 각 지역의 고위 신관들도 많은 탓이었다.

재판 내내 황제는 괴로운 얼굴 한 번 보이지 않고서 판결을 내렸다.

심지어 긴 재판의 마지막 날, 주모자인 황태자 세르미아 아인 솔리스를 대면한 자리에서까지도.

“……황태자로서 의무를 다할 생각을 하지도 않고 아집에 빠져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게 한 죄를 물어 황태자의 지위를 폐한다.”

“…….”

반면에 황태자는 탈진한 듯한 기색으로도 여전히 황제를 향해 분노와 원망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친아들이 그토록 뿜어내는 감정에도 황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담담하게 황태자에게 형을 선고했다.

“또한 수도와 제국 전체에 심각한 피해를 일으켰으니, 서쪽 섬에 유폐하여 평생을 나오지 못하도록 한다. 최소한의 곡기로만 연명토록 하라. 그리고…….”

황제 아달베르트의 목소리가 떨린 것은 오직 이때뿐이었다.

그는 잠시 숨을 삼킨 뒤, 곧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맺었다.

“짐이 제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폐태자 세르미아가 그 목숨을 부지하였다면 다음 황제의 재위 1년 차에 사형하도록 한다. 이는 짐의, 황제 아달베르트가 내린 선고다.”

다음 황제가 혈육을 죽였다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아달베르트는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 * *

모든 재판이 끝난 뒤, 당연히 수도는 단번에 평화로워지지 않았다.

주모자가 무려 황태자였다.

근래 들어 황제와 점점 불화를 보이던 황태자이긴 했다지만, 반역의 칼을 들 정도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황태자가 직접 암살까지 꾀하고 있었다니, 그 누구도 충격을 받지 않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황제는 이번 반란을 처분하며 그간 덮어 두었던 신전의 치부를 드러냈다.

20여 년 전, 황제가 제위에 오를 무렵 어째서 동복형제를 죽게 한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서북부가 마물로 들끓게 된 것인지.

황태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과 비슷한 흐름의 이야기를 귀족들도 알게 되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신관이 성력을 통해 마물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물로 혼란을 일으켜 황제의 자리를 노렸다는 것 모두를.

“풀멘 변경백님과 라테르 후작님은 알고 계셨다지요.”

“그러게요, 그냥 원래도 북부는 늘 혼란한 지역이니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모두가 서북부에 대해 대단하다 여겼다.

특히 황태자의 반역 이후, 수도에 마물이 더욱 자주 출몰했기에 반쯤 경외심까지 느꼈다.

마물은 대비도 할 수 없었고 맹수보다도 더 포악했으니까.

한 번 마물로 더럽혀진 대지가 그럭저럭 정상화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모두 서북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에 침울해졌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소식에 그들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세르히 백작에게 주신의 가호가 깃들었다는 것 들으셨어요?”

“네, 폐태자가 황제 폐하를 암살하려 들었을 때 막은 것도 다름 아닌 백작이라고 하더라고요.”

안토니아가 남은 잔당들을 정리하기 위해 했던 통제가 풀린 다음부터 차츰차츰 사람들에겐 소문이 돌았다.

물론 에밀리오와 루퍼스가 반쯤 작정하고 푼 소문이기도 했다.

에밀리오는 신관에 사람들이 방문하여 걱정하면 그때마다 괜찮다는 듯 온화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곤 했으니까.

‘괜찮습니다. 주신께서 세르히 백작님께 가호를 내려 주셨으니까요.’

‘가호요?’

‘네, 그분이야말로 누구도 반박 못 할 신의 사도랍니다.’

이 일은 여러 의미로 득이 되었다.

에밀리오를 비롯해 중앙 신전이 부패한 신관으로 인해 떨어진 평판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물론 에밀리오나 중앙 신전은 소문만으로 자신들의 평판을 회복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적극적으로 신실한 신관들과 함께 연구하여 땅을 안정시킬 방법을 찾았다.

마물은 본디 성력으로 발생시키는 게 아니었다.

어두운 마음이 모여 하나둘 나타나는 것이었기에 원래는 신관이 정결하게 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안토니아가 할 일이 생겼다.

신관이 정화한 땅을 안토니아가 가호의 힘으로 한 번 더 둘러 주면 최소 반년은 안정된 상태가 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당연히 그 사실에 사람들은 기뻐했다.

“어쩐지 세르히 백작님이 수도에 오신 뒤로 그분 덕을 많이 보게 되는 기분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폐하께서 중앙 귀족의 자격도 주셨으니 수도에서 자주 머무르시겠지요?”

“그렇겠지요, 물론 영지 관리 때문에 몇 달은 백작령에 가시긴 하겠지만.”

대부분 안토니아가 앞으로 뭘 보여 줄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다만.

“그런데 말이에요, 바쁘다곤 하지만 세르히 백작님을 이런 자리에서 본 지 오래된 기분이에요.”

“기분이 아니에요, 정말로 안 나왔으니까요. 크롬프트 상단주나 마담 마기나는 그래도 종종 얼굴을 보이곤 하는데.”

“바쁘고 지친 탓이 아닐까요? 게다가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트라체스 대공 전하와 결혼 준비를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닐까요?”

“아, 그럴 수도 있겠어요. 흠, 흠. 그럼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을 수도 있겠네요.”

귀족들은 멋대로 기대했다.

반역으로 인해 우울한 소식이 가득했기에 더욱 말이다.

그러나 소문의 장본인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 * *

“고생하셨어요, 주인님.”

그 말과 함께 안토니아의 앞에 부드러운 식감의 리소토가 놓였다.

“와, 어떻게 알았어? 배고파하는걸.”

“당연히 알죠, 제가 주인님을 몇 년을 모셨는데!”

폴리가 ‘엣헴’ 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요 몇 주간 하도 바빠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든 오래 깨어 있어야 하다 보니 정신이 들도록 하루에 차를 몇 잔이고 마셔야만 했고 말이다.

덕분에 목이 쓰릴 지경이었다.

황태자가 반역을 저지른 지도 수 주가 지나, 어느새 4월도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완연한 봄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폐하께서도 너무 하셔요, 주인님이 잘하신다고 다 맡기시고.”

“그래도 내가 한 일이라고 인정은 해 주시잖아?”

“그럼 주인님이 하신 걸 남이 했다고 그래요?”

폴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안토니아는 그 반응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회귀 전에도 이처럼 황실에서 산더미처럼 업무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늘 황태자나 제레미야가 제 공을 가로채 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발렌타인 님이 나한테 이래저래 조언을 준 게, 하도 답답해서가 아닐까.’

회귀 후 그녀와 교류하며 느낀 거지만, 발렌타인은 자신이 기억하던 것 이상으로 말수가 적었다.

아니, 정확히는 불친절했다.

혼자 생각하고 깔끔하게 결론을 내리는 만큼 설명이 극단적으로 적다고 해야 할까.

요 수 주간, 황제는 무언가 시험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이번 반역에 공을 세운 귀족들을 불러 이런저런 업무를 떠맡겼다.

덕분에 트라체스 대공가의 남매를 비롯하여 자신과 발렌타인, 그리고 드란제아 소공작까지도 사교계 자리에 나갈 생각이라곤 하지 못한 채 업무를 처리해야만 했다.

물론 그 모습을 보며 드란제아 공작은 아주 즐거워했지만 말이다.

‘그러게, 내가 진작 열심히 해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동안 이 할애비의 일을 우습게 여기더니 꼴좋구나!’

저쪽도 참으로 사이좋은 조손이었다.

그런 연유로 안토니아는 여러 주 동안 발렌타인, 드란제아 소공작과도 함께 여러 건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때마다 발렌타인과 소공작은 자주 부딪쳤다.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인정은 합니다만, 오르테가 양.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건 너무 비협조적인 것 아닙니까?’

‘해야 하나요?’

드란제아 소공작의 말에 그녀는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안토니아, 소공작만 이해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듯 말이다.

그럴 때마다 소공작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이 대신 설명에 나서곤 했었고 말이다.

그 설명이 모두 끝나면 발렌타인은 태연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잘 이해하고 있네요.’

‘오르테가 양, 자선 행사나 다른 파티에서 만났을 때와 퍽 다르시군요.’

‘거기엔 이해력 달리는 자들이 많으니까요.’

드란제아 소공작은 그 뻔뻔한 답에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물론 안토니아는 그 광경을 그저 재미나게 지켜보았다.

굳이 끼어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드란제아 공작도 몇 번인가 그 광경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주 즐거워하며 드란제아 소공작의 변죽을 올렸다.

‘공작 부인이 적당히 놀리도록 말려 달라며 편지를 보내셨을 정도니까.’

아무튼 안토니아는 덕분에 행정적인 사후 처리와, 가호의 힘을 쓰는 일 두 가지로 몸이 버거운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행정적인 사후 처리를 끝낸 게 다름 아닌 오늘이었다.

안토니아는 다리를 쭉 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아름다운 꽃이 슬슬 져서 푸릇푸릇한 잎이 보였다.

‘그래도 이 사이에 마기나랑 루퍼스도 힘냈고.’

정말로 자신이 해결해야만 하는 일들이 대강 끝난 기분이었다.

“진짜로 이제 영지에 돌아갈 수 있겠네.”

“백작령으로 돌아가실 거예요?”

“그럼, 폴리는 싫어?”

“네?”

“매번 영지 저택의 큰 방이 그립다면서 그래 놓곤?”

“당연히 기쁘죠! 주인님이랑 같이 호숫가에서 또 피크닉도 하고 싶고, 주방장님의 매운 손맛을 못 본 지도 오래됐고…….”

폴리는 손을 꼽으며 하고 싶은 것들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왜?”

“주인님을 찾는 사람들이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찾지 않도록 열심히 일한걸.”

안토니아는 이제야말로 정말 아무 걱정 없이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물론 영지에 돌아가면 몇 달 치 업무가 자신을 기다릴 것이다.

그간 백작위가 없어 처리하지 못한 일들도 잔뜩 있었고 말이다.

게다가 풀멘 소변경백이 된 것도 사실이니, 서북부에도 시간을 내어 가야 했다.

‘그리고 또…….’

목을 빼고 기다리면서 제게 티 한 번 내지 않는 리카르도에게도 답을 줘야 할 테고 말이다.

‘할 일 많네.’

그렇게 생각하던 안토니아는 힘 빠진 듯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이런 할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모두 하나같이 평화로운 걱정거리이지 않은가.

수도를 안정시킨 가호의 힘이 영원한 것은 아니기에, 제대로 안정될 때까지는 주기적으로 들러야겠지만 이것도 자주는 아닌 일이었다.

게다가 에밀리오는 그렇게 꾸준히만 한다면 십수 년 후에는 완전히 예전처럼 돌아갈 것이라고 했고 말이다.

‘나는 이런 걸 정말 간절히 바란 거구나.’

회귀했던 날부터 어느덧 7년.

안토니아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과거에 나쁜 연을 맺은 사람들은 모두 정리하지 않았는가.

‘더러운 것, 모두의 눈을 속이고 이 나를 함정에 빠트렸구나! 너 같은 것이 성녀라니, 천하의 악녀가 아니라?’

압송되던 날 세르미아는 악에 받쳐 안토니아에게 내지르듯 이야기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그저 태연하게 되받아쳤다.

‘죄송하지만 저는 성녀가 아니라, 신의 사도라서요. 폐태자 세르미아 전하.’

‘지금 감히 나와-.’

‘제국의 죄인과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당신이 책무도 잊고 저지른 일들을 처리해야만 하거든요.’

안토니아는 한없이 하찮은 것을 본다는 듯한 얼굴로 세르미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평생을 자신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세르미아는 그 태도에 충격받아 소리 질렀다.

‘네 본모습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럼 너는 안전할 줄 아느냐? 아바마마의 앞에서 살랑거린다 한들 언젠가 아바마마는 너를 내칠 것이다! 친아들인 나도 내친 모진 분이니까!’

‘모두가 당신처럼 어리석고 욕심만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폐태자님.’

안토니아는 그 말과 함께 그의 곁을 떠났다.

회귀 전, 자신의 어린 삶을 일그러트린 게 바올로라면 성인으로서의 삶을 망가트린 건 세르미아라는 걸 알았기에 말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철없고 망나니 같던 남의 편. 제레미야 안세르 솔리스와도 앞으로는 볼 일이 없게 되었다.

‘아바마마,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어리석었어요! 정말로, 정말로 저는 형님이 아바마마를 해치려 한다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니콜라, 니콜라에게 물으면 알 거예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사이 니콜라는 정이 남은 건지 그건 맞다고 증언해 주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유폐된 신관들을 풀어 준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제레미야 안세르 솔리스 또한 황자로서의 책무를 잊은 죄를 물어 앞으로 평생 특정한 지역에 한 달 이상 머무르지 못하도록 하는 벌을 내리겠다. 평생을 떠돌며 황자로서 네가 어떤 걸 누린 것인지 깨닫거라.’

‘아바마마!’

‘또한 영원히 수도에는 돌아올 수 없다.’

심지어 황제는 달랑 2주일분의 여비만 들려 제레미야를 내쫓았다.

평생 오냐오냐 키워진 제레미야에게는 어떤 의미로 황태자보다도 더 가혹한 벌일 수도 있었다.

‘뭐, 니콜라는 신경이 쓰이는 건지 가끔 둘러보겠다고 하긴 했지만.’

다행히 니콜라는 안토니아가 미리 말한 것도 있어 벌금 조금으로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벌금 또한 안토니아가 내어주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 자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되었다.

앞으로 뭔가 잘못된다면 그 또한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나아가면 되었다.

어쩐지 모두 마무리된 것 같아 쭉 기지개를 켰을 때, 로레나가 그녀를 단숨에 현실로 끌어당기는 말을 전했다.

“주인님, 황궁에서 시종장께서 마중을 나오셨어요.”

예고치 않은 황제의 부름이었다.

마중 나온 시종장은 참 친절하게도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마중이라고 하긴 했습니다만, 피곤하시다면 다음에 만날 날을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니에요.”

피곤하긴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면 그냥 한 번에 마무리 짓고 싶었다.

시종장은 한 번 더 감사하다는 듯 허리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어쩐지 황태자의 반역 사건 전후로 그의 주름이 좀 더 깊게 팬 기분이 들었다.

황제의 곁에 오래 있던 만큼 그도 황태자나 제레미야에 대해서는 아들 같은 감정이 있던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오랜 업무 파트너인 황제의 고단함을 함께하는 것일지도 몰랐고.

황궁에 도착한 안토니아는 평소와 달리 알현실이 아니라 황태자궁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온실로 안내받았다.

노을빛이 저무는 하늘 아래, 황제는 온실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폐하.”

시종장의 부름에 황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안토니아는 그 모습에 어쩐지 씁쓸함을 느꼈다.

재판 기간에도, 심지어 어제까지도 보이지 않던 고단함이 황제에게서 역력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왔느냐, 안토니아.”

황제는 부드러운 미소로 안토니아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 온실은 관리는 하고 있으나 드나드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특히나 황태자는 이런 식으로 예쁜 것들을 보며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황제는 안토니아가 먼저 자리에 앉도록 한 뒤, 본인도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시종장까지 물리더니 그는 손수 차를 따라 냈다.

“너는 참 신기하구나.”

안토니아는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짐이 차를 따르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 많으니까, 그 드란제아 공작조차도.”

“……실례했습니다. 리카르도 전하가 자주 이러시다 보니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요.”

황제는 그 말에 유쾌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왠지 알 것 같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짐과 그 아이는 형제이니.”

황제는 그렇게 말한 뒤 얕게 숨을 뱉었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 짐이 무턱대고 많은 일을 시켰는데 불만 한마디 하지 않는구나.”

“제가 할 수 있다 여겨서 지시하신 것일 테니까요, 고생은 저만 한 것도 아닌걸요.”

황제는 안토니아의 대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토니아는 찻잔에 손을 대며 황제에게 물었다.

“그간의 고생을 치하하기 위함이었다면 저만 따로 부르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제가 괜한 생각을 하는 걸까요?”

황제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다.”

“…….”

안토니아는 조용히 찻잔을 바라본 채 답하지 않았다.

한 나라의 군주인데, 대화할 상대가 필요해서 불렀다니 너무 씁쓸한 이유였다.

“왠지 네게 이야기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더구나, 부담스러워하지 말라 하여도 그리하기 어렵겠지.”

“괜찮습니다, 폐하. 얼마든지 이 자리에 있을게요.”

“그런 말은 함부로 단언하는 게 아니지, 짐이 여기서 너를 얼마나 붙잡을 줄 알고.”

“폐하께서는 정이 많은 분이니, 분명 리카르도 전하가 울 만한 일은 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안토니아의 말에 황제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정이 많다라, 짐에게 그런 말을 한 건 네가 세 번째구나.”

“…….”

안토니아는 다른 두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돌아가신 황후 폐하와 황태후 폐하겠지.’

황제에게 있어 마음을 터놓고, 지위를 내려놓고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이기도 했을 것이다.

“부담스러우냐?”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에요, 폐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황제는 조용히 차를 마시더니, 이제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짐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지.”

“네.”

“잘못을 저지른 둘 말고, 다른 둘에게서 편지가 왔단다.”

“…….”

안토니아는 왠지 그 편지의 내용을 알 것 같았다.

“어쩜 그리 형제가 마음이 맞는지, 둘 다 건강히 지내고 있으며 영지를 관리하며 지내는 지금이 너무도 행복하다고 하더구나.”

예상한 대로의 내용이었다.

그 두 사람은 회귀 전, 황태자와 리카르도가 대립하느라 수도에서 귀족 간의 알력 싸움이 벌어질 때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까.

오죽하면 제레미야가 투덜거리며 이야기할 정도였다.

‘형님 폐하가 저토록 골머리를 썩이고 계신데, 다른 두 분 형님들은 어째서 도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지!’

황태자가 제위에 오른 뒤에도 두 사람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노래 부르던 제레미야가 그렇게 말할 정도였으니까.

“박정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겠더구나, 그 아이들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세르미아의 먹잇감이나 다름없었으니.”

“폐하…….”

“괜찮다. 안토니아, 짐이 아무리 못난 아버지라 해도 자식들이 싫다 하는 걸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다. 게다가.”

황제는 자신의 팔걸이를 어루만졌다.

“짐의 자리를 어디 싫다 하는 자에게 맡기겠느냐. 이 자리가 마냥 행복을 보장해 주는 자리도 아닌데.”

황제가 그렇게 말하니 무게감이 달랐다.

그는 황제가 되기 위해서 그 손에 그가 원치 않는 피를 많이도 묻힌 사람이기에.

“혹여라도 동티가 날까, 사교계 시즌에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아이들이니 짐도 강요하고 싶지 않구나.”

부드럽게 웃던 황제는 조용하면서도 깊은 시선으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짐은 너에게 묻고 싶다.”

“하문하십시오, 폐하.”

“제위를 원하느냐?”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정확히는 ‘안토니아’가 아니라 ‘리카르도’에게 제위를 주길 원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녀와 리카르도는 약혼 관계였으니까.

“리카르도는 네게 흠뻑 빠져 있으니, 적어도 이 나라가 그릇된 길로 향하진 않겠지. 어이없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야.”

황제는 신뢰 가득한 말로 그녀에게 물었다.

안토니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에게는 각자 어울리는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각자 원하는 자리도 있는 법이었다.

‘내가 원하는 자리.’

그건 결코 아득하게 높은 곳에 있지 않았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안토니아는 들었던 찻잔을 조심히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폐하, 그건 너무한 말씀이셔요.”

“너무하다? 너도 내 아들들처럼 짐을 외롭게 만들 것이냐?”

“그렇게 말씀하셔서 제 마음을 약하게 하시려는 것도 말이에요.”

안토니아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카르도 전하가 멋있어 보이는 건 유일하게 전장에 있을 때뿐인걸요.”

그 말에 황제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안토니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의외라서였다.

“이건 사실 리카르도 전하와의 비밀인데 말이에요.”

“흠?”

“제가 전하와 약혼한 건, 첫인상이 아주 좋아서거든요.”

“첫인상이 좋았다고? 그 아이가?”

황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로 되물었다.

“수도에 갓 왔을 때만 해도 리카르도가 너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첫인상이 아주 좋았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몰랐으니까요.”

그러자 황제는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 안토니아에게 눈짓했다.

“제가 열두 살일 때, 사실 전하를 뵌 적이 있어요.”

“고얀 녀석 같으니, 짐을 속였군.”

“아마 저를 위해서이기도 했을 거예요, 물론 저도 속였지만요. 견습 기사라고 하면서요.”

“흐음, 그래서 어떻게 처음 만난 것이냐.”

“산책을 하다 마물을 만났어요.”

“마물을 만났다고?”

“그걸 전하가 구해 주셨고요, 지금은 몰라도 어린 시절의 전하는 굉장히 예뻤잖아요? 게다가 절 구해 주시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것과 짐의 권유를 거절하는 이유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황제는 조금 즐거운 기색으로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당연히 상관이 있지요, 예전에는 예뻤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 좀 멋있다고 느껴질 때는 오로지 전장에서 활약할 때뿐인걸요!”

안토니아는 조금쯤 짓궂은 눈으로 황제에게 이야기했다.

“하나 남은 전하의 매력을 제게서 앗아 가실 셈이셔요?”

그 말에 황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안토니아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근래에 황제가 웃을 수 있던 일이라곤 없었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권할 수가 없구나, 짐으로서는 좀 아쉽다만…….”

“아직 폐하께서 정정하시잖아요, 그리고 그 자리가 정말 어울리는 분은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안토니아의 말에 황제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똑같은 사람을 떠올렸을 거라고 안토니아는 생각했다.

“그래, 또 풀멘 변경백에게 원망받을 짓을 할 순 없지.”

그러곤 황제는 이게 정말로 본론이라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네게 무언가 해 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짐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지 않으냐.”

“제가 바라는 건 수도에 올라온 순간부터 한 가지뿐이었어요, 폐하.”

“너의 온전한 영지 말이냐?”

안토니아는 그 말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도와 약혼 관계였다.

그와 결혼하면 간단하게 얻어질 작위였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그런 식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작위라면, 회귀 전과 다를 게 없어.’

물론 리카르도는 제레미야처럼 자신을 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온전한 제 것을 가지고 싶었다.

게다가 제 아이가 모두 딸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래야 발렌타인 님과의 거래도 성립되고 말이야.’

그리고 누구보다도 황제에게도 필요할 명분이었다.

그가 다음 후계자로 떠올린 사람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래, 마침 좋을 때로구나. 너뿐만이 아니라 오르테가 후작 영애도 큰 공적을 세워 주었으니. 사실.”

황제는 작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오르테가 후작도 청하긴 했단다. 자신의 아이들 관계가 온전하길 바란다며 말이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정말 훌륭한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발렌타인이 마음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안다는 의미였으니까.

“네 소원을 짐이 들어주마, 안토니아.”

“감사합니다, 폐하.”

안토니아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이 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다만 말이다, 안토니아.”

“네?”

“그렇게 되더라도 짐은 네가 가족이 되어 주면 좋겠구나.”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역시 만만찮은 분이셔.’

조금 전 첫 만남까지 이야기했는데도, 리카르도와 자신의 관계가 아직 매듭지어진 게 아니란 걸 꿰뚫어 보다니 말이다.

심지어 마음을 흔들어 놓듯.

“많이 외로워져서 하는 늙은이의 부탁이라 들어주어도 된단다.”

이런 말까지 덧붙이는 걸 보면 말이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그저 얼버무리듯 최선을 다해 입가를 당겨 올려 보았다.

제 마음의 답을 황제에게 제일 먼저 들려주는 건, 아무리 그래도 리카르도가 너무 불쌍해지는 일이지 않은가.

* * *

“참 영리한 아이지 않은가.”

안토니아가 물러난 뒤, 황제는 온실 안으로 들어오는 시종장을 향해 말했다.

“대화가 즐거우셨나 봅니다. 폐하.”

“즐겁고 말고, 짐이 고민하던 것을 저 아이가 들어줬으니.”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그런 한숨을 쉬십니까.”

“오랜만에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러네.”

황제의 말에 시종장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황제만큼이나 그도 여러모로 많이 걱정했었으니까.

“저 아이도 염려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곤 그저 즐거워 보이십니다만.”

“그래, 짐에게 저토록 편하게 이야기해 주는 아이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걱정되는 거야.”

황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권력을 쥔 자를 너무 믿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확신할 만한 근거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제가 폐하께 드릴 말씀은 기꺼이 드리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짐과 그 아이는 그리 오래 보지도 않았는데 말인가?”

시종장은 그 말에 작게 웃으며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돌아가신 황후 폐하께 반한 것도 금방이지 않았습니까.”

“고약한 예를 드는군.”

황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쁘지 않다는 듯 웃었다.

“하긴 안토니아가 그런 성정이니, 오히려 짐은 걱정을 덜 수 있겠어. 다음 이 자리에 올 내 동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결심하셨습니까?”

“그래, 정말로 안토니아가 제위를 원한다고 하면 리카르도에게 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시종장은 그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잘 알고 있었나 보아. 어울리는 사람이 자리에 올라야지, 누군가 보완해 주고 대신해 줄 거라 생각하는 건 의미가 없단 걸.”

“그러니 폐하께서 이리 짧은 기간 만에 예뻐하시는 거겠지요.”

“그래.”

황제는 얕게 한숨을 내뱉으며 온실 밖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오히려 리카르도 녀석이 좀 안절부절못하겠군, 그 녀석의 성격상 안토니아에게 강하게 말도 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안토니아는 분명 리카르도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것도 황제는 알고 있었다.

정말로 여지가 없었다면 안토니아는 곁에 그 아이를 두지 않았을 테니까.

황제는 어쩐지 씁쓸해서 중얼거렸다.

“왠지 짐만 홀로 버텨 내야 하는 것 같은 기분이야.”

“돌아가신 두 분께서 들으시면 엄살이라 하실 겁니다.”

“그러니 짐이 외롭다는 것이지, 얼마나 박정한가. 짐은 아직도 혼자 살아남아 사랑하는 황후도, 오랜 친구인 황태후 폐하도 그리는데.”

황제는 직접 온실의 문을 닫으며 과거를 그리듯 묘한 미소로 이야기했다.

“그들은 박정하게, 짐의 작은 엄살도 받아 주지 않는 그대만 남겨 두지 않았는가.”

시종장은 그 말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황제에게 이야기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적어도 저는 폐하의 오랜 길을 함께할 테니까요.”

“그래, 그래 줘야지.”

황제는 편한 사람 앞에서만 보이는 무른 표정을 버리고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안토니아의 소원을 들어주려면, 그리고 이스베르가에게 제대로 된 정통성을 주려면 자신이 해야만 할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 * *

“이야기는 잘했어?”

황제와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온 안토니아는 어떻게 알았는지 마중 나온 리카르도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리샤르를 길들였나?’

순간적으로 주인님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커다란 강아지처럼 보였으니까.

“왜?”

“아니야.”

물론 안토니아는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런 말을 했다간 괜히 그가 예뻐해 달라며 애교를 부릴 게 눈에 선했으니까.

“폐하께서 네게 어려운 요구라도 하셨어?”

“음, 아니. 그렇진 않은데.”

안토니아는 그렇게 답하면서 문득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왠지 그에게 실례를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회귀 전에는 황태자와 대립했었잖아. 물론 트라체스 대공가의 안위가 걸려서긴 했지만…….’

그의 손을 잡고서 마차에 오른 뒤, 안토니아는 자신의 찝찝함을 없애고자 그에게 물었다.

“리샤르, 혹시 제위에 오르고 싶어?”

“아니.”

직설적인 물음에 리카르도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알 만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제위를 줄까, 하고 물어보셨구나.”

“응. 역시 형제는 형제인가.”

“둘째 조카님과 셋째 조카님의 성격을 모르는 게 아니니까. 그 둘은 어릴 때도 폐태자 전하가 괴롭힐라치면 날 방패로 삼았거든.”

“뭐, 정말?”

“응. 괜히 첫째 조카님이 나만 보면 이를 닥닥 간 게 아닌걸.”

“그래서 폐하께서 다음 후계자로 널 고려할 거라고 생각했구나.”

“응, 내가 아니라 안토니아에게 물을 거라는 것도 대충.”

안토니아는 그 말에 좀 복잡한 마음이 들어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존심 상해야 할 만한 이야기 아닌가? 네게는 선택권을 주지 않은 건데.”

“왜? 내가 봐도 나보다 안토니아가 더 믿음직한걸.”

자존심이 없는 건지, 그도 아니면 자신을 지나치게 믿는 건지.

‘이런 걸 보면 회귀 전 트라체스 대공이 괜히 만만찮던 게 아닌데 말이야.’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소동물인 것처럼 굴 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두 안다는 소리였으니까.

“거절했지?”

심지어 안토니아의 대답도 정확하게 맞춰 냈다.

“응.”

“잘했어, 그런 딱딱한 자리는 나하고 안 어울려. 정말로 안토니아가 황제 폐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폐하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알겠네?”

“그렇지. 아.”

“응?”

“안토니아 곧 영지에 내려갈 거지?”

“응.”

딱히 숨길 일도 아니기에 안토니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백작령에 갈래.”

“뭐?”

“난 거기서 지냈던 기간이 즐거웠는걸, 그리고 쫓아가지 않으면 나만 또 그리워하고, 안토니아는 홀랑 잊어버릴까 봐 무서워.”

그 말에 안토니아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지금 내가 본인을 못 알아봤다고 이러는 거지?’

리샤르에 대해서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본인이 멋대로 자라 버린 게 문제였는데 말이야.’

원래 거절할 작정이긴 했지만 좀 그를 괴롭히고 싶어졌다.

“안 돼, 너한테 줄 만한 방이 없어.”

“뭐? 백작저가 얼마나 큰지 아는데?”

“그래 봐야 대공령에 있는 성만큼 크지는 않은걸. 어떻게 트라체스 대공 전하를 그렇게 소박한 곳에 모실 수 있겠어.”

“난 견습 기사 리샤르로 가도 되는걸?”

안토니아는 그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 리샤르는 이렇게 거대하지도 않고 예뻤는데, 리카르도 전하는 거대한 데다 예쁘지도 않잖아.”

“너무한걸.”

“그런 사람에게 내 오두막을 빌려줄 순 없지, 드비 경이면 몰라도.”

리카르도는 그 말에 눈을 찡그렸다.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안토니아는 그런 리카르도의 뺨을 달래듯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사교계 시즌도 끝났으니까 대공령에도 가 봐야 하잖아, 너 서북부에 있는 동안 이스베르가 님에게 모두 맡겨 놓기만 했잖아.”

“누님이 잘하시는걸, 아얏.”

당연한 듯 이스베르가에게 맡기면 안심이라는 듯 구는 그를 보며 안토니아는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앞으로 이스베르가 님이 얼마나 바빠질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알지만 어쩔 수가 없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토니아는.”

리카르도는 조용히 그녀를 당겨 왔다.

“날 두고도 혼자서 성큼성큼 걸어갈 거잖아.”

역시 착각이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보랏빛 눈이 마치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것처럼 갈구하는 걸 보면 말이다.

‘오래 기다리게 하긴 했지.’

하지만 안토니아는 그를 좀 더 기다리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아무런 답도 주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폐하가 그렇게 말씀하셔서가 아니라.’

안토니아는 로맨티시스트는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레는 감정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단꿈에 젖어 있지도 않았다.

리카르도는 자신을 가끔 설레게도 했고, 가끔은 얄밉기도 했고 또 못나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감정의 베이스에는 편안한 안정감이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는 절대 뒤돌아서지 않을 테고, 관계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저를 불안하게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기분으로 그를 선택하는 게 이기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귀 전,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고 늘 누군가에게 이용당했던 그녀였기에 가장 필요한 감정이었다.

신뢰가 없다면 누구에게도 무거운 감정에 이름을 붙여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말로 표현하는 건 잠시 미뤄 둘래.’

제 작위가 정말로 리카르도의 작위와 상관없이 온전히 손에 들어오는 날, 자신은 그에게 감정을 담아 말로서 들려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리샤르.”

열두 살의 그 날부터 이상할 정도로 절 쫓아온 그에게 표현을 해 주어야겠지.

“그렇게 나랑 떨어지는 게 싫어?”

“응.”

“그럼 어쩔 수 없지.”

타이밍 좋게도 마차가 멈춰 섰다.

오늘따라 그가 더 귀여웠다.

제 눈에 단단히 한 겹의 껍질이 씌워진 걸 보면 사실 이미 감정의 답은 나온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안토니아는 그대로 리카르도의 목에 팔을 두르며 짧게 입을 맞췄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실감하지 못해 어안이 벙벙해진 그의 보랏빛 눈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이걸로 몇 달만 참아 보세요, 트라체스 대공 전하. 할 일은 똑바로 하시고요, 알겠지?”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더욱 안달 내겠지만 그게 좋은 걸 테니까.

안토니아는 그가 생각지도 못한 기습 키스에 멍하니 있는 틈을 노려 그대로 마차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그리고 안토니아의 예상대로, 리카르도가 정신을 차린 건 마차가 출발한 다음이었다.

‘안토니아가 나한테, 지금…….’

그는 믿기지 않다는 듯 눈을 깜박이더니 창 너머로 이미 멀어져 버린 세르히 백작저 타운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이런 걸 당하고 도대체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안토니아!’

리카르도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닿았던 그 감각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청혼할 거야, 꼭 청혼할 거야.’

물론 안토니아가 말한 대로 얌전히 대공령에 가서 할 일은 다 끝내고 올 것이다.

그녀는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으니까.

‘100번 차이면 101번 청혼해서라도 꼭.’

안토니아에게서 허락을 받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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