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래, 나는 한 번 안 본 사람들이라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닌데.’
회귀 전, 결혼 선물과 편지를 받고서 확인해 보면 좋았을 텐데.
‘하긴, 확인했어도 제대로 된 사정은 못 들었을지도 모르지.’
지금 생각해 보면 회귀 전, 제레미야가 엉뚱한 말을 한 적이 몇 번 있긴 했었다.
‘서북부는 야만적인 곳이야,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일까.
신문을 보던 제레미야가 툭 던지듯 그런 말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제레미야라서 당연히 또 헛소리나 하는 줄 알았는데.’
결혼 직후부터 쏟아지던 온갖 일들을 혼자서 모두 감당하느라 정신없기도 했고 말이다.
‘황태자 전하가 지시한 걸지도 모르겠어.’
잘 생각해 보면, 그때 그렇게 정신없이 혼자 이것저것 해결해야 되는 상황만 아녔다면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었다.
황태자는 결혼 직후 이런저런 핑계로 안토니아를 이용해 먹지 않았던가.
‘……제레미야가 내 삶에서 가장 큰 어깃장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황태자 전하가 내 삶을…….’
어쩐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안토니아가 단검을 가만히 바라보자, 황제가 나직하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어?”
“……아니에요, 폐하. 그저.”
안토니아는 한번 숨을 삼켰다.
황제는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가 지닌 건 ‘황태자가 직접 만든 단검’이지 않은가.
“부모님 생각이 좀 나서요.”
“이해한다. 아무리 의젓하다 해도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법이지.”
황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단검을 잠깐 바라보더니 갈무리해 넣으며 중얼거렸다.
“짐도 그런 마음이 있을 거라 생각해 쓸데없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걸까.”
안토니아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폐하는 누구보다도 황태자 전하의 그릇이 모자라다는 걸 아신다.’
하지만 냉정하고 강인한 황제임에도 부모의 정이 없진 않았다.
‘그래서 회귀 전엔 황태자 전하가 교묘하게 그걸 이용하기도 했지.’
무서운 황제지만 황태자에 한해 무른 선이 있다는 걸 세르미아 또한 모르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다음 계획의 방향이 정해졌다.
‘폐하와 황태자 전하 사이를 완전히 갈라 둬야겠는데.’
아주 쉽지는 않겠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회귀 전의 ‘그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다.
안토니아는 밝은 눈빛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황태자는 제대로 지휘하지 못해 기사단이 우왕좌왕하는 게 보였다.
고작 잔마물들을 정리하는 데에도 쩔쩔매는 게 훤히 보였다.
반대로 리카르도는 겁에 질린 신전 기사단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깔끔하게 마물을 상대했다.
안토니아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황제 폐하께서 잘라 낼 수밖에 없도록, 전하께서 친히 일을 벌이도록 하면 되지.’
황태자가 리카르도를 향해 보이는 열등감이 좋은 미끼가 되어 줄 것이다.
* * *
“……안토니아의 기분이 좋아 보이네.”
마물의 움직임을 한 번 더 둔화시키던 리카르도가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 소리에 드비가 입을 삐죽였다.
“이 와중에 백작님의 얼굴이 보이십니까?”
“너하고 난 다르니까.”
“하, 참. 저 창 내려놓습니다?”
“월급 깎이고 싶으면 그렇게 해.”
“와, 진짜 대공 전하는 세상에서 제일 나쁘신 분입니다. 다 돈 받고 잘 먹고 잘 사려는 일을 매번 돈으로 협박하시다니.”
“그만 쫑알거려, 그 정도면 저자들한테까지 다 들릴 거야.”
드비는 그 말에 질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신전 기사들은 정말로 엄호밖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럴 땐 차라리 서북부가 그리워집니다. 그때는 전하께서도-”
“드비.”
그 말에 드비는 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전하께서도 마물 처리에 잔뼈 굵은 기사들과 함께해서 고생이 덜했다는 뜻입니다.”
리카르도는 그 말에 마물의 몇 번째인가의 공격을 회피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네가 시끄러워서라도 이제 그만 끝내야겠어.”
“좋은 생각입니다. 이 자리에 풀멘 변경백님이 없어서 다행인 줄 아셔야 합니다. 전하는.”
“알아.”
리카르도는 흘깃 옆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조카님의 기분도 그리 안 좋아 보이니.”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발악하듯 자신을 덮쳐 오는 마물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더 나빠지라고 완벽하게 처리해 줘야지.”
리카르도는 서북부에서 몇 번이고 겨눠 봤던 마물의 핵을 직감적으로 노려 방아쇠를 당겼다.
탕-!
지금까지 그가 쏘던 그 어떤 경우보다도 깔끔한 소리가 울렸다.
“키이이익-”
마물의 비명 소리가 산산이 흩어지듯 울리며, 그대로 굉음을 내며 엎어졌다.
그와 함께 어수선하던 분위기까지 싹 가라앉았다.
쓰러진 마물 근처로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는 건 오로지 익숙하게 장총을 든 리카르도 트라체스뿐이었다.
“……대, 대공 전하가 마물을 토벌하셨다!”
대부분 위기감에 덜덜 떨어서일까.
누군가가 감격한 듯 외치자, 안심의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물론 리카르도는 그 자리에서 그 환호를 즐기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장총을 편하게 둘러매며 교황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성하.”
“……저, 저는.”
약혼 건으로 지레 찔린 교황이 눈을 피하자 리카르도는 그로서는 드물게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무사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교황 성하를 잘 모시게.”
심지어 리카르도는 그 자리에서 약혼 허가를 해 달라는 식의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깔끔하게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뒤처리 방법을 기사들에게 지시하더니 서둘러 안토니아의 곁으로 향했다.
황태자가 대대적으로 연 시연 행사였기에 모인 귀족들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어쩜……. 대공 전하께서 중간중간 세르히 백작을 확인하시더라니, 저렇게 급할 정도로 곁에 있고 싶으셨나 봐요.”
“그러게요, 오늘 정말 대공 전하도 세르히 백작도 모두 달라 보이네요.”
“정말로요. 대공 전하께서 어찌나 늠름하신지, 게다가……. 솔직히 말해 오늘 대공 전하가 아니었으면 저희도 다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잖아요?”
누군가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만인가요, 세르히 백작도 마찬가지지요.”
“맞아요, 솔직히……. 귀족으로서 부끄럽지만 마물이 나온 순간 일단 도망치기 바빴거든요.”
귀족들은 황제와 조금 떨어진 위치임에도 어느새 자신들 곁을 지키고 선 기사단을 보며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세르히 백작은 황제 폐하부터 지키려 했지요.”
“그뿐만인가요, 황태자 전하께서 아무것도 못 하는 사이, 기사단에게 대신 안내해서 저희도 이렇게 무사한 거잖아요.”
다들 그 말에 수긍했다.
잔마물들이 튀어나오니 그나마 평소 검을 다루는 자들은 어떻게 막아 냈지만, 아닌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 바빴다.
이대로 어이없이 당하려나 하는 순간에 기사단이 와 귀족들을 차례차례 보호했다.
덕분에 큰 부상자 없이 모두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새삼……. 세르히 백작과 대공 전하가 잘 어울린단 생각이 드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어찌나 행동이 닮았는지.”
귀족들은 어느새 황제에게 다가가 절도 있게 보고하는 리카르도와 옆에서 황제를 살피는 안토니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하께서도 마음을 바꿔 주시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대공 전하께서도 저렇게 매너 있게 굴어 주셨는데 교황 성하씩이나 되신 분이 그걸 모르는 것도 좀…….”
그 말에 다른 귀족들도 정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너 있는 상대에게 무례로 돌려주는 건 굉장히 교양 없는 행동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게다가 황태자와 함께 합작하여 진행한 이 시연 또한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는가.
그들이 만든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사실상 그들의 피해자나 다름없는 안토니아와 리카르도 두 사람이 해결해 준 것 또한 아이러니했다.
“게다가 최근 세르히 백작이 풀멘 변경백의 정식 후계자로 지목당했다잖아요.”
“그렇지요.”
“서북부같이 위험하고 중요한 곳을 미래에 세르히 백작이 지킬 텐데, 그러려면 더더욱 대공 전하가 곁에 있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 말에 귀족들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서북부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지만, 아니 오히려 그랬기에 그곳이 중요하고 위험하다는 걸 더더욱 잘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황태자 세르미아가 주먹을 꽉 쥔 채 바라보고 있었다.
* * *
[원망 대신 목숨을 구하다, 트라체스 대공 전하의 품격!]
[교황성하의 약혼 허가의 행방은?]
[마물 출현 예측 장치 실패……. 트라체스 대공&새로운 풀멘 소변경백의 기지로 모두를 구하다.]
이른 아침, 세르미아는 올라온 신문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젠장!’
이번 시연으로 제국 내 입지를 꽉 붙잡아 둘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날 견제하시겠다?’
리카르도가 서북부에서 돌아온 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견제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세르미아도 지금껏 나름대로 어깃장을 덜 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감정을 어떻게든 갈무리하며 시종에게 물었다.
“아바마마는 일어나셨나?”
“네, 집무실에 드셨을 시간입니다.”
세르미아는 그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카르도가 이렇게 나온다면, 자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황제의 이복동생이지만 그 전에 황제를 따르는 귀족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는 시연 자리에서 금기를 범했다.
세르미아는 곧장 자신의 부친인 황제를 찾아가 엄숙하게 고했다.
“아바마마, 숙부님, 아니 트라체스 대공께서 지난번 일을 해결한 것은 사실이나 큰 죄 또한 지었습니다.”
“큰 죄?”
“감히 아바마마의 앞에서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반역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세르미아는 확신과 자신을 가지고 외쳤다.
황제의 기사단이나 일부 허가받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황제와 동석하는 자리에서는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 리카르도도 그의 시종 드비도 심지어 안토니아까지도 모두 무기를 가진 채였다.
그러니 세르미아는 자신이 못난 모습을 보이더라도 이 사실을 지적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황실의 위엄이 흔들릴 테니까.
그러나.
퍽-!
“못난 놈…….”
“……아, 아바마마?”
황제에게서 돌아온 것은 그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행동이었다.
“리카르도가 반역이나 다름없는 짓을 했다고?!”
그동안 일정 이상 화내지 않던 황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리카르도는 네가 고려해야 했음에도 하지 않은 걸 대비했을 뿐이다. 세르미아 아인 솔리스!”
“지, 지금……. 절 때리신 겁니까.”
세르미아는 황제에게 얼굴을 얻어맞은 충격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제는 그 반응에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네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냐?”
세르미아는 그 말에 몸을 확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황제의 아들이자, 이 나라의 황태자인데!
어떻게 이런 수모를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중요합니다! 제가 설사 잘못했다 해도 어떻게 저를-.”
그러나 황제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은 그 순간, 세르미아는 차마 다음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네가 무엇이냐?”
황제의 목소리가 단숨에 낮아졌다.
“네가 무엇이기에, 짐이 너를 때릴 수 없단 말이냐?”
세르미아는 소름이 확 끼치는 걸 느꼈다.
그는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하고 황제 앞에 납작 엎드렸다.
황제가 정말로 대로하면 자신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리카르도에게 반역죄에 가까운 혐의를 씌우려다, 오히려 자신이 항명했다고 처벌받을 차였다.
‘아, 아바마마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지?’
세르미아는 자신이 얻어맞았다는 분함을 밀어내며 살길을 찾았다.
‘그래, 그래. 숙부님에 대해 이야기했지.’
세르미아는 어떻게든 답을 찾은 스스로를 대견하다 생각하며 고개 숙인 채 물었다.
“제가, 제가 너무 당황하여 실언을 했습니다. 아바마마.”
제레미야는 이마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이며 절절히 물었다.
“그러니 모자란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숙부님께서……. 뭘 대비하셨단 말입니까?”
황제는 그 말에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세르미아, 너는 마물 출현 예측 장치를 직접 개발하면서 도대체 무얼 조사한 것이냐.”
“네?”
세르미아는 영문을 모르겠단 말투로 몸을 움찔거렸다.
“며칠 전, 리카르도가 와서 그러더구나.”
황제는 세르미아가 납작 엎드린 모습에 허탈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저렇게 그때그때 상황 봐 가며 근시안적으로 구는 모습이 더욱 실망을 부추겼다.
행동에 진중함이라곤 없단 소리였으니까.
제게는 이복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인 리카르도는 나이만 따지면 오히려 세르미아보다 두 살이 어린데도 여러 가지를 고려했는데 말이다.
‘서북부에 지내다 보니, 제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폐하.’
‘편히 말하라, 그 자리는 여러 사람이 오는 자리니 네 생각을 들어 보마.’
‘황태자 전하께서 어떤 방식으로 출현 장치를 만드셨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걸 사용했을 때, 마물들 자체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황제는 그 말을 들으며 솔직히 좀 감탄했다.
리카르도 입장에서는 굳이 참견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오히려 참견했다 황제가 오해하여 그에게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다른 속셈이 있다 해도.’
그걸 수용할 이유를 만들어 온 것 자체가 리카르도의 실력이었다.
‘그래서 뭘 원하느냐?’
‘만약을 대비해 무기 소지를 허가해 주십시오.’
‘무기 소지? 기사단이 같이 간다는 건 알고 있지 않으냐.’
황제는 그날, 일부러 리카르도에게 시험하듯 물었다.
그러자 리카르도는 그에 대해서도 대비했다는 듯 즉답했다.
‘압니다. 하지만 지금 황실 기사단은 실전 경험이 매우 적지요, 그리고 그날 손님이 많을 테니 만일을 대비하였으며 하는 것뿐입니다.’
‘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저 그날 소중한 사람이 동석하니 그 어떤 위험 가능성도 없애고 싶을 뿐입니다. 형님.’
심지어 황제가 어떤 말에 약할지도 정확히 파악하고 왔다.
늘 깍듯하게 폐하라고 부르던 리카르도가 앞에는 공적인 이유를 늘어놓고, 뒤로는 평생 한 번 보지 못한 사사로운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기사단 전체도 아니고 자신과 드비, 그리고 혹시 몰라 안토니아 딱 세 사람의 무기 소지면 된다고 하니, 황제 입장에서는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황제는 리카르도와 나눈 대화를 황태자에게 간략하게 설명하며 혀를 찼다.
“……아느냐, 세르미아. 원래 네가 고려했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이…….”
“황실 기사단과 신전 기사단, 그 둘 중 누가 제대로 반응했지?”
“…….”
“하마터면 신전의 최고 지도자인 교황 성하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것도 아느냐?”
“……압니다.”
“그렇다면 교황 성하를 누가 모셨는지도 알겠구나.”
그것도 말할 것 없이 바로 세르미아 본인이었다.
“세르미아, 짐이 네게 계속 설명해야 하느냐?”
“……저는…….”
“지금 수도에는 심지어 라테르 후작과 풀멘 변경백도 와 있다. 리카르도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짐 또한 안다.”
“…….”
“그런데 어째서 그들에게조차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세르히 백작은……. 이미 숙부님과…….”
“하, 이미라고 하였느냐?”
황제는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짐이 정녕 모를 것 같으냐, 아니, 이 수도에 있는 사람 중 누가 모를 것 같으냐.”
황제의 목소리에 노기가 일렁거리며 서렸다.
“네가 교황 성하를 움직여 리카르도와 안토니아, 그 두 사람을 방해한다는 걸 말이다! 그런데도 그 둘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쾅! 하고 황제가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런데 너는 짐에게 아침부터 쫓아와, 리카르도를 책하라고, 짐에게 눈도 없는 황제 노릇을 하라고 말하는 게냐!”
세르미아는 조용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은 잘한 게 하나도 없단 말이었다.
그러면서 리카르도는 잔뜩 칭찬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면서도 속이 말도 못 하게 상했다.
그래서 세르미아는 황제에게 물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어째서 말해 주시지 않은 겁니까.”
“뭐?”
“숙부님께서 찾아왔을 때, 제게 한마디 언질이라도 해 주실 수 있지 않았습니까.”
세르미아는 억울하고 분통했다.
자신이 야심 차게 준비한 예측 장치가 실패한 것도 속이 상한데, 공도 모두 리카르도 차지가 되어 버렸다.
‘……교황 성하께서도 이렇게 나온 이상, 더 어깃장 놓긴 어렵겠지.’
세르미아는 그래서 더 황제를 찾아온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니까 조금이나마 제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고 말이다.
그러니 이게 그로서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황제에게 기대를 걸어 보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왜 짐이 네게 말해야 하느냐?”
“……네?”
세르미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설령 네게 말했다고 한들, 네가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
그 말에 세르미아는 입을 다문 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더는 자신의 아버지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눈이 너무도 무심하게만 느껴졌다.
제게 애정이라곤 한 톨도 없이 그저 책망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바마마는 나보다, 나보다 숙부님이 더 자랑스러운 거야.’
단숨에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바닥까지 잡아다 박아 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처참한 기분 속에서 피어난 건 반성이 아니라 원망이었다.
* * *
황태자의 마물 예측 장치 사태로부터 사흘.
신전은 생각보다도 빨리 백기를 들었다.
“일주일은 버틸 줄 알았더니.”
신전에서 도착한 허가장에 안토니아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리카르도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이야기했다.
“난 이 사흘도 수십 년쯤 지난 것 같았는데.”
“과장도 참.”
“과장 아니야.”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아가씨는 내 마음을 훤히 알고 있잖아?”
“…….”
안토니아는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다 그의 손등을 확 꼬집었다.
“아야.”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 부려야 한 번이라도 네가 날 더 봐 주지.”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더 중요한 건 다른 거야, 리샤르.”
“알아.”
“……네 마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소리도 아니고.”
“그것도 알아.”
리샤르의 말에 안토니아는 그의 셔츠 깃에 손을 대어 슬쩍 벌려 보았다.
여전히 붕대를 감은 채였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한 번 걱정 섞인 화를 낸 차였음에도 여전히 속상했다.
“진짜 아무리 내가 한 번쯤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다칠 정도로 하는 게 어딨어.”
“내가 실력이 모자란 거지.”
“거짓말하지 마, 할머니가 들으셨다간 당장 따라 나오라고 할 거야. 그렇게 게으르게 굴었다니, 단련시켜 주겠다고.”
리카르도는 그 말에는 별로 좋지 않다는 얼굴을 했다.
개인의 실력만 따지자면 리카르도가 두 사람보다 훨씬 앞서지만 경험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리카르도는 지난 5년간 그 두 사람 아래에서 가장 실전 경험을 혹독하게 쌓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약삭빠르게도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며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안토니아의 말대로 황제 폐하께서는 크게 화를 내신 모양이야.”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앞에 펼쳐진 신문 기사를 가리켰다.
신문은 온통 황태자의 오판을 지적하거나, 리카르도나 안토니아의 대단함을 이야기하는 기사들로 가득 찼다.
신문뿐만이 아니었다.
교황이 사흘 만에 백기를 든 건 사교계의 분위기까지 확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주역이 되고자 만든 쇼의 주목과 좋은 점을 모두 안토니아와 리카르도가 독차지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내 아가씨가 그날 교황 성하나 황태자 전하께 뭘 요구하지 말라고 한 것도 매우 평이 좋은 것 같고 말이야.”
“너도 똑같이 생각했으면서 왜 하나같이 나한테 공을 돌리려고 그럴까?”
“내 아가씨 기분이 더 좋아졌으면 해서, 아얏.”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다 안토니아에게 다치지 않은 어깨를 한 대 가볍게 얻어맞았다.
“아무튼, 조카님이 이렇게까지 두 손 놓고 있는 경우는 잘 없단 말이야.”
“두 손 놓고 있다고, 아닐걸?”
“응?”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좀 미안한 얼굴로 리카르도를 향해 말했다.
“있지, 리샤르.”
“응.”
“황태자 전하가 뭘 할 건지 대충 몇 가지 예상하는 게 있어.”
“그런데?”
“그중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아마도 네 평판을 일시적으로 다치게 할 거야. 너만이 아니라 이스베르가 님이 상처받을 수도 있고.”
안토니아는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네가 정해야 해. 네가 싫다고 하면 난 황태자 전하가 일을 치기 전에 막을 방법을 생각할 거니까.”
확신과 염려가 섞인 말이었다.
덕분에 리카르도는 그 믿음직한 물빛 눈을 보며 걱정은커녕, 다시 반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토니아가 그렇게 말한다는 건, 나중을 위해서 효과적이라는 거지?”
“그건 그래. 하지만-”
“그럼 괜찮아.”
“이유나 무슨 일일지도 듣지 않고?”
“일시적이라고 했잖아, 나야 너만 괜찮다면 내 평판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누님은…….”
리카르도는 어려운 듯 눈을 찡그리더니 조용히 말했다.
“과연 누님의 평판을 망가트리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그 레이디 트라체스, 이스베르가를?”
진지한 리카르도의 말에 안토니아는 어쩐지 그건 그렇다고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긴 해.”
“뭔데?”
안토니아는 뭐든지 이야기해 보라는 듯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약혼식에 문제가 생길까, 아얏.”
이번에는 뺨이었다.
“사람이 진지하게 걱정하는데!”
“나도 엄청 중요한 문제란 말이야. 단 한 번밖에 없는 약혼식이잖아. 게다가.”
리샤르는 안토니아의 품에 얼굴을 슬쩍 들이밀어 올려다보며 웃었다.
“내가 아가씨의 마음을 잡지 못하면 이게 아가씨와의 특별한 처음이자 마지막 공식 행사일 수도 있고.”
안토니아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결단코 그의 마음을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이런 행동도 얼핏 안토니아에게 부담을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반대였다.
그는 부담가지지 말라고 이렇게 구는 것이다.
안토니아는 그런 그가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그냥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리샤르가 싫은 건 아니지만.’
어릴 때도 지금도.
안토니아는 리카르도에게 명확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인간적인 호감이지, 그가 원하는 형태의 감정인가는 좀 의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결혼까지 해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해.’
회귀 전, 제레미야와 지독한 결혼생활을 해서일까.
안토니아에게 결혼 상대란 굳이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6년, 아니 이제 7년 전, 열둘의 나이로 눈을 떴을 때 죽을 날 받아 둔 나이 든 노인이 오히려 편하겠다고까지 생각하지 않았던가.
안토니아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아마 리카르도 또한 알 터였다.
그러니까 그도 마음을 보여 달라고 오히려 재촉하지 않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넌 정말 손해만 봐.”
“이게 왜 손해야.”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손길이 좋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아가씨가 날 계속 곁에 두는데.”
그 말에 안토니아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카르도는 정말이라는 듯 안토니아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정말이야. 안토니아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더 어느 정도 하고 싶은 건 하고 있으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에 그 품에 기대면서 웃으려 했다.
이상하게 그와 있으면 늘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다만 안토니아는 어디부터 단순한 호감이 아닌 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좋은 거냐면 좋은 거지만 설레는 감정이 들기보다는 편한 감정이 앞서니까.
한편으로는 단순히 끔찍하게도 싫은 제레미야와의 결혼을 피할 상대라서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꼬인 실타래는 내가 풀어야지.’
기다리고 초조한 티를 내긴커녕, 마음을 얻어 가는 건 자신이 할 일이라는 것처럼 구는 이 남자를 위해서라도.
안토니아는 리카르도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감정은 감정이고, 할 일은 할 일이었다.
리카르도의 말대로 황태자가 움직이기 전에, 자신과 그는 약혼식이 먼저 있을 테니까.
“리샤르, 황제 폐하께 약혼을 허가해 주셔서 감사의 의미로 드리고 싶은 게 있었다.”
“뭔데?”
안토니아는 물빛 눈을 반짝이며 영롱한 빛이 담긴 펜던트를 내밀었다.
“황제 폐하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선물.”
기왕이면 약혼을 구실로 여러 대비를 해 두는 게 좋지 않은가.
그 의기양양한 물빛 눈을 보며 리카르도는 그런 그녀가 정말 좋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만 준비한 게 있는 거야?”
“아니.”
당연히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안토니아는 황태자와 더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나씩 미끼를 던질 생각이었다.
그 모습에 리카르도는 작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역시 내 아가씨, 또 반할 것 같아.”
자신의 마음을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 * *
수도에서 맞는 첫 새해는 정말 정신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왜 6년 전 새해 초입, 소년 리샤르가 생일에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말이다.
“다리나 발은 괜찮아?”
“응, 어찌어찌.”
안토니아가 발코니 난간에 지친 듯 몸을 기대자, 리카르도는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신발을 벗겨 주었다.
“리샤르!”
“이럴 때라도 편하게 벗고 있어, 분명히 폐하께서 또 찾으실 테니까.”
“신발 정도는 혼자 벗을 수 있어.”
“알아.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걸.”
리카르도의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도에서는 새해를 맞아 황실부터 여러 귀족들까지.
곳곳에서 연회며 티 파티가 열렸다.
당연히 요즘 가장 화제성 높은 두 사람이 그 일정들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안토니아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거였지만.
다만 낮에는 티 파티, 밤에는 무도회며 연회를 나가는 데다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알렉산드라의 훈련에 영지 관리까지.
수도에 올라온 뒤 줄곧 바쁘긴 했지만 요즘처럼 눈이 핑글핑글 돌아갈 정도로 바쁜 적이 없었다.
“이 미친 일정도 이제 곧 끝이라 정말 다행이야.”
안토니아는 발코니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마 편하게 쉴 수 있는 게 무도회 사이사이 있는 이런 휴식 시간이라니.
안토니아는 회귀 전과 비교해 참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발코니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걸 생각도 못 했는데.’
황자비였으나,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월플라워 또한 바로 안토니아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춤을 신청하는 사람이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상하게 안토니아를 어려워했다.
‘그건 꺼려서도 아니라…….’
심지어 남성 귀족만이 아니라 다른 여성 귀족들 또한 그랬다.
‘아마도 황태자 전하가 한 짓이었겠지.’
안토니아는 속으로 욕했다.
‘처음에는 제레미야의 황자비 노릇만 잘하고 영지 관리만 해도 된다고 하더니.’
왜 안토니아가 회귀한 뒤, 영지 관리며 다른 일에 이골이 낫겠는가.
황태자는 쓸모없는 제 동생에게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달랐다.
막 결혼했을 때만 해도 가호의 힘을 구실로 삼아 안토니아의 얼굴을 여기저기 내비치게 했다.
실제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엔 무리하게 가호를 쓰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거기까지면 다행이지.’
안토니아는 한 해의 반은 영지에서, 한 해의 반은 수도에서 보냈는데 늘 일과 싸워야만 했다.
지금처럼 그녀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으니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몇 가지 일을 시키던 황태자는 해가 갈수록 더 무리한 일을 요구했다.
‘그러고 보니, 제레미야와 그래서 해가 갈수록 사이가 더 나빠졌지.’
안토니아는 황태자의 지시였기에 한눈팔지 않고 정말 미련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대는, 그대는! 형님과 결혼한 것인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왜 매번 형님의 일 핑계를 대는 거야! 형님께선 나에게도 그런 건 맡기지 않는데!’
‘뭐가 불만인 거예요, 당신.’
‘……요즘 내 식사가 부실해지고 있어! 그건 알아? 게다가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아서 내가 유글란스 백작의 신작을 놓칠 뻔했지 않나!’
그때는 단순히 제레미야의 열등감이려니 했다.
그도 그럴 게 말한 내용이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근데 그거 혹시 질투도 섞였던 건가.’
하도 자신에게 호감이라곤 내비치지 않고 틈만 나면 고오귀한 자신을 데려왔으니 떠받들라는 듯 굴어, 그쪽으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몇 번 다툰 뒤부터는 보란 듯이 이 여자 저 여자 끌어들여 염문설을 흘리고 다녔다.
뭐, 그나마 정부로 들이겠다며 난리 피우지 않은 것 정도나 칭찬해 줄 만할까.
그러나 오히려 회귀하고 지금의 제레미야를 보자, 그 모든 게 일종의 관심 끌기였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토니아가 폭 한숨을 내쉬자 리카르도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왠지 내 아가씨가 다른 남자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완전 귀신이었다.
안토니아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리카르도는 몸을 낮춰 그녀의 발 앞에 신발을 놓아주며 말했다.
“난 안토니아를 늘 진심 가득 담아서 바라보고 있으니까, 당연히 알지.”
“미안.”
“왜 사과해? 안토니아의 생각은 안토니아의 것인데.”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다.
“나는 안토니아가 의무감을 갖길 바라지 않아.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좋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그런 목적이라면.”
리카르도는 신발을 모두 신겨 준 뒤 고개를 들어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마음을 고백하는 게 아니라 청혼을 했을 거야. 안토니아에게 이득이 될 만한 것들을 잔뜩 늘어놓으면서 말이야.”
“리샤르.”
“난 나와 함께 하는 안토니아가 행복하고 즐겁길 바라는 거지, 뭔가에 얽매이길 원하는 게 아니야.”
안토니아는 편하게 생각하라는 그의 말에 오히려 술렁이는 걸 느꼈다.
이상했다.
지난 삶에는 누구나, 심지어 자신조차도 의무에 늘 매여 살았다.
그게 아니면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뭐든지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정말로, 리샤르는.’
어린 시절의 예쁜 추억만이 아니라, 자신이 영영 갖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감정까지 되찾아 주려고 하는 걸까.
“내가 더 노력해야지.”
뜬금없는 리카르도의 말에 안토니아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뭘?”
“나와 있을 때, 다른 남자 생각이 든다는 건 아직 내 매력이 모자라다는 거니까.”
“……넌 진짜.”
사람이 모처럼 좀 감상적인 기분에 젖었는데.
흘러나온 타박의 말에 리카르도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안토니아, 조급해하지 마. 난 네게 재촉할 생각이 없어.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불안할 것 같아서.”
리카르도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네가 주는 감정이니까 좋아. 그리고 적어도 나 아닌 사람에겐 약혼조차 허락하지 않을 거란 확신은 있으니까.”
자신감 가득한 얼굴이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그를 조금 때려 주고 싶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멋지단 생각이 함께 들었다.
* * *
“좀 쉬고 왔느냐?”
안토니아가 리카르도와 함께 홀로 돌아가자, 황제는 염려를 담아 물었다.
‘내가 힘든 게 티가 많이 났나 보네.’
안토니아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겨우 말 한마디 건네는 게 뭐 그리 어렵겠느냐.”
마물 사태 이후, 황제의 태도는 그전보다 더 누그러져 있었다.
이번 새해 일정 탓에 안토니아는 황제와 여러 번 보았는데, 볼 때마다 조금씩 황제의 태도가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약혼 때문만은 아니고, 아마도 만날 때부터 물어 오는 몇 가지 질문들 덕인 듯했다.
“이번 겨울은 다행히 그리 춥지 않구나. 짐은 그래서 염려가 되긴 한다만.”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얼핏 소소한 날씨 이야기 같아 보였으나 실상은 아니었다.
“그렇지요, 겨울이 춥지 않으면 보통 여름에 재해가 많거나 다음 해 겨울이 혹독하게 추우니까요.”
실제로 회귀 전, 다음 겨울은 혹독하게 춥기도 했었다.
그래서 보온용 물주머니를 그때를 대비해 준비했던 거기도 했고 말이다.
“어린데도 잘 아는구나.”
“당연히 알아야지요, 백작령을 책임지고 있으니까요.”
황제의 입꼬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러더니 곧 리카르도에게도 말했다.
“대공령은 괜찮은 게냐?”
“네, 혹시 몰라 누님께서 영지에 가셨습니다.”
“짐을 피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농 섞인 물음에 리카르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누님과 저를 얼마나 돌봐 주셨는데, 그렇진 않습니다.”
“흥.”
황제는 코웃음을 치며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다 거짓말이란다. 안토니아.”
“네?”
안토니아는 일부러 의아한 듯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하니, 적극적으로 들어 주는 게 좋았다.
“이 녀석은 6년 전에 동부에서 돌아오더니 북부에 영지가 있는 자로서 마물 토벌에 책임을 느낀다며 서북부로 도망치듯 가 버렸거든.”
“도망이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덕분에 서북부가 안정되지 않았습니까.”
“그건 네가 아니라.”
황제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얼굴로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풀멘 소변경백의 조부모 덕이겠지.”
“할머니, 할아버지를 그리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토니아를 칭찬한 게 되자 본인의 실적이 평가 절하 당했음에도 빙그레 웃는 리카르도를 보며 황제는 혀를 찼다.
“짐은 슬슬 피로하구나. 이 의무적인 신년 연회도 더 줄이고 싶었는데 말이다.”
“관례는 보통 바꾸기가 쉽지 않은 법이니까요.”
“좋은 생각이 있으면 짐에게 꼭 말해 주렴. 안토니아.”
황제는 기대한다는 듯 이야기하며 퇴장을 알렸다.
‘이런 점은 황태자 전하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회귀 전, 자신에게 이것저것 시험 삼아 시켜 보던 것과 닮아 있었다.
좋은 사람을 손에 넣었을 때, 이것저것 시켜 보려는 건 군주로서 나쁜 점은 아니었다.
다만, 황태자는 그 정도를 지키지 못했고 황제는 선을 유지한다는 게 다를 뿐.
게다가 지금 퇴장도 그랬다.
회귀 전, 황태자는 단 한 번도 연회에서 먼저 퇴장한 적이 없었다.
불안전하게 제위에 올라서일까, 그는 화려하게 행사를 치르는 걸 선호했다.
반면 현 황제의 경우 본인이 즉위한 뒤, 각종 황실 행사 중 허례허식에 불과한 건 상당수 정리한 차였다.
지금도 정말로 피곤해서라기보다는, 황제 입장에서의 배려였다.
그가 오래 있으면 아무래도 다들 편히 이야기하기가 힘들 테니까.
황제가 퇴장하자, 바짝 긴장하던 홀 내의 분위기가 싹 사그라졌다.
안토니아는 리카르도와 함께 일부러 홀 중심에서 벗어나 사이드로 빠졌다.
“봤어, 리샤르?”
“조카님의 표정 말이야?”
“응.”
황제가 퇴장하자마자, 그때까지 조용히 죄지은 사람처럼 굴던 황태자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그는 오르테가 후작을 비롯한 유력 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황태자 전하는 매우 급할 테니까. 게다가.”
안토니아는 리카르도가 건넨 칵테일로 목을 축이며 이야기했다.
세르미아는 황태자로서 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지만, 오늘 홀의 메인 디시는 거기가 아니었다.
“참 교묘하지 않아? 홀 무리 중 한둘은 꼭 황태자 전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야.”
그것도 대부분 귀족들은 황태자와의 연결 고리를 모르는 그런 남작, 자작가의 귀족들이었다.
안토니아에게는 매우 눈에 익은 사람들이었지만.
‘세르히 백작님, 이렇게 된 김에 제가 한 것으로 처리하지요. 그게 보기에도 더 낫지 않겠습니까?’
‘뭐라고요……?’
‘이걸 세르히 백작님의 이름으로 내어 봐야, 고작 가호 소유자이자 빛의 성녀의 업적 중 하나로 치부되겠지만, 저는 아닙니다.’
자신이 뼈 빠지게 일해 놓은 것들을 가로챈 자들 말이다.
안토니아가 가호를 숨기려 했던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어째서인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회귀 전에 모두가 그걸 신의 힘이라고 이야기했다.
안토니아의 명성 자체는 오를지언정, 뒤에서는 모두 수군거리기 바빴다.
‘세르히 백작님은 운이 참 좋지 않습니까.’
‘누가 아니랍니까. 한갓 지방 백작 영애가 어디 황자비까지 된 데다 백작위까지 받겠습니까. 다 운 좋게 신의 힘을 얻어서지요.’
‘자신의 능력이라고 우쭐거리려는 꼴을 보면 정말 어이가 없어서, 참.’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그런 손을 조심스레 감싸 주며 이야기했다.
“왜 그래, 손 아프게.”
“아니-”
“저자들이 너무 더럽게 생겨서 그래?”
“갑자기 무슨 소리야.”
황당해하는 안토니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리카르도는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웃었다.
“가끔 안토니아가 혼자 많은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아서. 사소한 것들이 널 괴롭히지 않았으면 할 뿐이야.”
안토니아는 그 말에 어깨에서 힘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어차피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그래 왔듯, 회귀 뒤에도 그들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제 내겐 어렵지 않아, 그들의 술수를 다 부숴 버리는 것쯤.’
그러니 느긋하게 그들이 스스로 함정을 파고 걸리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 * *
“정말 볼수록 이상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신년 황실 연회 중에서도 가장 크게 여는 날이기에, 오늘은 별별 귀족들이 다 모여 있었다.
주류 무리에 끼기에는 어정쩡한 지방 중소 귀족들은 문득 입 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앙 귀족이었던 자작에게 집중했다.
“폐하 말입니다.”
“네에?!”
그러나 황제의 이름이 나오자, 다들 주춤하고 말았다.
평소 황제와 접할 일이 드문 만큼, 그들에게 황제, 아니 황실의 일 자체가 입에 함부로 올려선 안 될 화제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중앙 귀족 출신이던 아시트 자작은 뭘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이미 폐하께서는 이 자리에 계시지 않고 이곳에는 우리뿐인데요.”
“아, 아무리 그래도.”
“듣기 싫으면 듣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중앙에서 자리를 잡으려 하시는 건지.”
아시트 자작은 혀를 차며, 천천히 발코니 근처로 발을 옮겼다.
커튼이 내려지지 않은 발코니 근처는 사람들과도 거리가 있어 은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딱이었다.
몇몇 지방 귀족들은 그래도 무섭다며 멀어졌으나, 그래도 몇몇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아시트 자작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 합니까?”
“이번에 왜, 황태자 전하를 폐하께서 크게 질책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그건 그럴 만도 하지 않습니까?”
다들 신문을 읽었다며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는 듯 아시트 자작에게 물었다.
황태자는 대비하지 못한 걸, 리카르도는 대비한 데다 그의 약혼자인 안토니아 또한 황제를 훌륭하게 지켰다.
황태자가 해야 할 일을 해 놓고도 두 사람은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반면 황태자가 황제에게 찾아가 리카르도의 부주의함을 처벌해 달라고 했단 사실도 은근히 도는 소문이었고 말이다.
“솔직히 이번 일은 황태자 전하께서 너무하셨습니다.”
“맞습니다. 대공 전하도, 세르히 백작님도 큰 욕심이 없어 보이시던데.”
“쯧쯧, 그렇게 상황을 못 보셔야.”
아시트 남작은 일이 그렇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늘 폐하께서 트라체스 대공 전하를 보시는 눈빛을 다들 눈치채지 못하신 겁니까?”
“네?”
“이건 이 자리기에 하는 소리입니다만, 흠. 흠.”
아시트 남작의 말에 다들 얼른 말해 보라는 듯 귀를 기울였다.
“귀한 정보이니 어디 가서 말하시면 안 됩니다?”
“허 참, 물론이지요. 자작께서도 다 우리 잘되라고 풀어 주시는 정보 아닙니까.”
아시트 자작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실은 폐하께서 일부러 황태자 전하를 함정에 빠트렸단 소문이 있습니다.”
“네?”
“아니, 폐하께서 도대체 그러실 이유가 어디 있답니까.”
귀족들은 그 말에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아시트 자작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들어 보십시오, 지금껏 황실은 겉은 어떻든 속은 신전과 사이가 나빴단 말입니다. 심지어 황태자 전하께서도 작년만 해도 신전과는 데면데면했지요.”
“그, 그렇군요.”
중앙 사정을 잘 모르는 귀족들은 어떻게든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궁지에 몰리셨으면 신전에 도움을 청하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번 일이 어떻게 함정이 되는지는 잘…….”
귀족의 말에 아시트 남작은 한 번 더 혀를 찼다.
“이런, 제가 힌트까지 드렸는데도 모르신단 말입니까. 다들 이상하단 생각 못 하셨습니까?”
“네?”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 말입니다. 두 분이 몹시 닮지 않았습니까?”
“허, 하지만 그건 두 분이 형제셔서-”
아시트 남작은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모르시는 분이 많으시겠지만.”
그는 크게 숨을 내쉬며 비장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게 깔고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선대 황제의 계후, 트라체스 선황후께선 원래 지금의 아달베르트 황제 폐하와 어릴 적 혼담이 오가던 사이셨단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소문을 좋아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라는 말은 반대로 본인의 과시욕을 채우기 위해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황실 무도회 이후, 다들 쉬쉬하긴 했으나 트라체스 선황후와 현 황제 사이의 몇 가지 의혹들이 입을 타고 오르내렸다.
“하긴 이상하긴 했지요, 동복형제도 모두 죽이신 분이 어렸다곤 하지만 트라체스 대공 남매를 살려 주신 것도…….”
“그러고 보니 지금 황제 폐하를 강력하게 지지해 준 것도 트라체스 선황후라 들었습니다.”
“아, 저도 기억이 납니다.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태어나셨을 무렵이던가요?”
“아아, 그렇지요. 돌아가신 선황제 폐하와 지금 아달베르트 황제 폐하께서 대립한 적이 있었지요.”
기억이 있는 자들은 기억이 있는 대로.
없는 자들은 없는 대로 자신들이 아는 사실을 서로 떠들어 대며 말을 교환했다.
“그럼 좀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레이디 트라체스와 대공 전하도 7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고…….”
“선황후께서 대공가를 지키고자 20살 가까이 나이 차이 나는 결혼을 하시긴 했지요.”
“그뿐만입니까. 황제 폐하와 어릴 적부터 교류가 있지 않으셨습니까.”
의혹에는 그럴싸한 배경지식이 더해져서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갔다.
처음에는 그저 황제와 트라체스 선황후 사이가 실은 약혼 관계였단 이야기 선에서 소문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게 선황후가 황제와 정말로 옳지 못한 관계를 가져 리카르도를 낳았다는 말로 바뀌기까진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드란제아 공작을 비롯해 사교계의 유력 인사들에게도 그 소문은 들어갔다.
어느 백작 하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드란제아 공작에게 물었다.
그러자 공작은 정색하며 답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지만 대공 전하가 황태자 전하보다 어리시지 않습니까.”
“허, 그 입 다물래도! 가능한 일이 아니야.”
드란제아 공작은 확실하게 부정했다.
그러나 오히려 공작의 강한 부정에 사람들은 더 소문에 불을 지폈다.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는 것 아냐.’
실제로 황제가 즉위할 무렵, 그런 의혹이 나오기도 했었다.
게다가 그들이 더 의심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황제는 즉위 직전 자신의 동복형제를 모두 죽였다.
공교롭게도 리카르도가 태어난 다음 해에 말이다.
* * *
“다들 참, 입이 가볍기도 하지.”
안토니아는 거의 열흘 만에 여유에 느긋하게 미뤄 둔 편지 답장을 써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지금 그 한마디로 끝날 때야, 아가씨?”
그 틈을 타 찾아온 루퍼스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그럼이 아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약혼자인 트라체스 대공 전하와 연관된 일이잖아.”
“응, 그래서?”
“아가씨, 진짜…….”
루퍼스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듯한 얼굴을 하자, 안토니아는 편지 마지막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며 펜을 내려놓았다.
“알고 떠들도록 내버려 둔 거라고 이미 설명은 했잖아.”
“하지만 이대로라면…….”
“내 약혼식이 엉망이 될 거라고?”
루퍼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가씨가 뭘 하더라도 딱히 반대하진 않아, 하지만 하필 이 시기일 게 뭐야.”
“남자 둘이 어찌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지.”
“뭐?”
루퍼스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안토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샤르도 소문은 아무래도 상관없고, 약혼식만 걱정이라더니.’
태평한 건지, 아니면 여러 가지로 안토니아와 관련된 것만 걱정하는 건지.
“루페, 넌 날 그렇게 몰라?”
“아니, 알아. 일부러 그런 거라는 것도.”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약혼식은 이 소문의 여파가 돌기 전, 치를 수 있었다.
당장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기도 해, 생일 축하도 겸해 약혼식을 열 수도 있었다.
허가를 받는 데 시간이 걸렸다 뿐이지, 리카르도의 청을 수락한 그 순간부터 약혼식 준비 자체는 진행했으니까.
하지만 안토니아는 굳이 이번 달 말로 약혼식을 잡았다.
“소문이 제대로 무르익으려면 그 정도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아가씨의 자신감은 좋지만, 이런 스캔들은 저급하기 때문에 더 잘 퍼지고 수습하기 어려운 거 알고 있는 거지?”
“그럼.”
모를 리가 없었다.
회귀 전, 황태자는 황제의 자리를 얻었음에도 불안해했다.
그는 리카르도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고자 소문을 퍼트렸다.
소문의 파급 효과는 컸다.
이스베르가가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아니라는 사실을 말했다.
그러나 모두 앞에서는 ‘그렇군요.’ 해 놓고 뒤에 가서는 수군거리기 바빴다.
‘덕분에 세르미아 황태자 전하는 대쪽 같던 귀족들의 지지는 영영 잃어버리게 됐지만.’
예를 들어 드란제아 공작과 같은 사람 말이다.
‘그래도 정말로 이 소문을 들고 나오다니, 황태자도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나 보네.’
덕분에 안토니아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황태자를 궁지에 밀어붙이고 있단 거란 소리였다.
게다가 이번 기회에 드란제아 공작의 무게 추도 확실히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예전처럼 황태자가 뭔가를 보여 주지도 않은 상태에서 바닥부터 드러낸 꼴이 되기도 했고 말이야.’
그래서 안토니아는 더 그를 부추겼다.
회귀 전, 자신은 철저하게 황태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았다.
결혼 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았기에 몇 번인가 안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당연한 것처럼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손녀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 단검…….’
투박했으나 특징적인 디자인이었기에 알아보기 싫어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의심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 자신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황태자와 제레미야 때문에 더더욱.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황태자를 제 손바닥 위에서 구르게 해 볼 참이었다.
안토니아는 걱정 가득한 루퍼스를 향해 방에서 나가라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자신이 없었다면 아시트 자작에게 돈도 안 썼으니까.”
“알겠어, 아시트 자작은 아가씨가 말한 대로 조심성 없이 말하고 다니는 것 같아. 하지만 정말 괜찮아?”
“어떤 게?”
“이대로면 아시트 자작도 연루되지 않기 어려울 텐데.”
평소 일에 필요한 사람은 처벌에 말려들지 않도록 늘 조처해 두는 안토니아였다.
하지만 이번 아시트 자작에게는 그런 안전장치가 전혀 없었다.
“응, 괜찮아.”
단호한 목소리였다.
“설마 안토니아…….”
“제 발로 불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뛰어든걸.”
루퍼스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 곧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취급 당해도 될 정도로 더러운 짓도 많이 한 자였으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을 한 뒤, 서두르듯 루퍼스를 방 밖으로 밀어냈다.
“자, 루페. 얼른 나가. 저녁때 마틴의 요리에 입을 대고 싶다면 말이야.”
이제 정말 자신의 생일 파티 준비를 할 때였다.
* * *
1월 12일.
안토니아의 생일이었다.
그녀의 생일이라는 걸 알고 백작저 타운하우스로 선물이 쏟아졌다.
덕분에 타운하우스 2층, 안토니아의 생활 공간을 제외하고는 두 개 방에 나누어 선물이 빼곡하게 들이찼다.
“생일 파티 초대객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그런가…….”
안토니아는 오늘 저녁 파티를 위해 치장 중, 로레나가 정리해 준 생일 선물 명부를 보며 중얼거렸다.
교류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가리지 않고 생일이라는 명목으로 선물 명단에 이름을 올려 두었다.
“이렇게 선물을 많이 받아 본 건 처음인걸.”
“그만큼 주인님이 중요한 분이란 이야기지요!”
안토니아의 머리를 빗던 폴리가 자랑스럽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래도 제 선물도 기쁘게 받아 주셔야 해요?”
비록 덧붙인 말이 조금 소심하긴 했지만.
“당연하지, 폴리와 로레나나 우리 백작저 식구들이 주는 선물은 다 특별한걸. 매년 무척 기대하고 있어.”
“휴, 다행이에요.”
폴리는 그렇게 말하며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에 왔더니 예쁜 게 너무 많아서 지갑 사정이 좋지 않았거든요.”
“뭐, 정말?”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가 급료를 올려 줘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로레나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폴리에게 너무 무르셔요.”
“응? 하지만.”
“이미 백작저 사용인들의 급료는 수도 내 다른 귀족 가문과 비교해도 3할 이상은 높은 편이랍니다.”
로레나의 말에 폴리는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듯 이야기했다.
“앗, 아가씨. 급료는 모자라지 않아요, 아주 충분해요. 물론 올려 주시면 좋긴 하겠지만, 아얏.”
“그렇게 말할 거면 매달 귀여운 것 외엔 쓸모가 없는 물품들 모으기나 적당히 해. 폴리.”
“귀여우면 다인걸! 난 우리 주인님도 예쁘고 귀여워서 첫눈에 반했단 말이야.”
안토니아는 폴리의 말에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수도에 올라온 뒤 줄곧 바쁘고 정신없었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건 역시 이 두 사람의 평소 같은 모습 덕이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이제는 약혼 준비를 위해 마틴도 수도에 올라온 참이었다.
“이제 그만하고 손을 움직여 줘, 폴리. 너무 늦어졌다간 후작저에서 한창 요리 중일 마틴이 무섭게 화낼 거야.”
“앗, 그건 싫어요. 수도에 올라온 뒤 한참 등짝 맞을 일이 없어서 면역이 없어졌거든요.”
폴리는 그렇게 말하며 진지하게 안토니아의 머리 모양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치장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번 달 말에 크게 약혼식을 치를 것이기도 한 데다, 새해 들어 연달아 큰 파티에 참석했더니 피곤해 생일 파티는 소규모로 치르기로 했으니까.
덕분에 안토니아는 평소보다 보석 착용도 줄이고 드레스도 심플한 걸로 고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대공 전하께서 늦으시네요.”
로레나는 안토니아의 앞에 오늘 신을 구두를 내어 주며 이야기했다.
“그러게, 보통은-”
자신의 치장 준비가 반쯤 되었을 때 기다린다고 말하려 할 때.
창밖에서 톡톡 하고 새가 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아는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리샤르.”
포르르 작은 새가 날아들었다.
6년 전 이날, 자신의 방에 날아들었던 그 새는 오늘도 자그마한 상자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새는 예전처럼 안토니아의 앞에서 포롱포롱 노래했다.
그때와 똑같이 작은 상자뿐만이 아니라, 자그마한 편지가 걸려 있었다.
안토니아는 어쩐지 기분이 묘해져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로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폴리의 손을 잡아당기며 이야기했다.
“준비는 다 되었으니,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주인님.”
“응.”
로레나는 가끔 자신보다 더 제 기분을 잘 알아 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토니아는 예전처럼 새 앞에 물그릇을 놓아주고, 빵을 조금 찢어 주었다.
그러자 새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안토니아가 아니라, 물그릇으로 관심을 옮겨갔다.
“어머나.”
안토니아는 동그랗게 말린 편지 옆면에 적힌 서명을 보고 입가가 또 말랑말랑해지는 걸 느꼈다.
수도에 돌아와 재회한 뒤로는 줄곧 리카르도의 서명은 ‘리카르도 트라체스’였다.
하지만 이 편지에는 정말 옛날처럼 ‘리샤르’라고 짤막한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크고 나서도 필체는 전혀 바뀌지 않았네.’
키도 크고 얼굴도 많이 바뀌어서 이스베르가나 드비가 인정할 정도로 알아보기에 남은 구석이 거의 없을 정도였는데.
‘회귀 전에 대공 전하와 편지 교류라도 했으면 알아봤을 텐데.’
리카르도와 대립하던 쪽에 가깝다 보니 그럴 일이 드물었다.
회귀 전 그는 바올로를 고발할 때나 안토니아와 몇 마디 말을 섞었을 뿐, 그 뒤 지나칠 정도로 자제했으니까.
마음이 왠지 설렜다.
안토니아는 돌돌 말린 편지를 조심스레 펴 보았다.
[이번에는 생일에 네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아.
하지만 나와 달리 예쁘고 귀여운 새가 보고 싶어졌을까 해서.
생일 축하해.
추신. 이번 선물도 드비는 배를 잡고 웃었어.]
안토니아는 그 내용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간질거리는 걸 느꼈다.
여전히 자신의 소꿉친구 리샤르가 여기 있는 것 같았다.
안토니아는 물그릇에 집중한 새를 보며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걸 느꼈다.
‘이제 리샤르는 이 새만큼 예쁘진 않지, 대신 아주 멋지긴 해도. 아, 그래도.’
안토니아는 편지를 다시 보았다.
귀여운 건 여전하다고 이야기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안토니아는 찬찬히 자그마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내용물에 한 번 더 ‘풋’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건 일부러겠지?’
예전에는 하나짜리 탄환 브로치였는데.
이번에는 두 가지 크기의 탄환의 크리스탈 브로치였다.
“리샤르도 참…….”
하나는 안토니아가 주로 쓰는 총의 탄환, 그리고 하나는 리카르도가 주로 쓰는 탄환과 같은 크기였다.
“……역시 마음에 든다고 하면 빅터 경은 나도 놀릴까?”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토니아는 새를 보며 왠지 리카르도가 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처럼 본인이 내 추억을 불러 줬으니까.’
자신도 똑같이 보답해 줘야지.
안토니아는 서랍에서 비슷한 크기의 편지지를 찾아 꺼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부탁할게. 작은 새야.”
안토니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조금 뒤 만날 리카르도에게 보낼 편지를 적었다.
* * *
“……백작님이 이번에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고요?”
백작가 타운하우스 근처에서 리카르도와 함께 대기 중이던 드비는 심란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거짓말 아닙니까?”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해야 하지?”
“아니, 전하야 전하라지만 백작님은 누가 봐도 평범한 취향일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게 뭐가 특이한 취향이란 말인지.”
리카르도는 오히려 드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니, 특이한 취향이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안토니아는 어떤 부분에서든 간에 마음에 들어 했단 소리니까.
[고마워, 리샤르.
오늘도 그럼 드비 경이 날 이상한 사람 보듯 하겠구나. 하지만 그래도 마음엔 들어.
그러니 얼른 데리러 와서 얼굴을 보여 줘.]
안토니아의 편지에 리카르도는 너무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6년 전, 자신에게 답장을 보낸 것과 맞춰서 쓴 듯한 내용이었다.
안토니아가 보냈던 그 짤막한 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 외웠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리카르도는 서둘러 편지를 갈무리하고서 타운하우스로 발을 옮겼다.
안토니아가 무척 보고 싶어졌다.
* * *
“어서 오거라, 안토니아.”
할아버지, 베네딕트는 리카르도와 함께 들어오는 안토니아를 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제 생일파티를 열어 주신다고 해서 감사드려요, 할아버지.”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고맙구나.”
베네딕트는 환한 웃음으로 즐거운 듯 이야기했다.
실제로 그의 즐거움은 후작저 곳곳에서 티가 났다.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누가 보아도 새해라서가 아니라, 안토니아의 생일을 위해 준비한 장식이 후작저 담장을 따라 장식되어 있었다.
게다가 정문을 통과해 들어오자 정원 곳곳이 그녀가 좋아하는 색감의 장식들로 신경 써 꾸민 게 느껴졌다.
“할아버지께서 모두 준비해 주신 건가요? 정원이 평소보다 더 예쁜 것 같아요.”
“으응? 그게…….”
베네딕트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알렉산드라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반 이상은 네 할머니가 준비한 거란다.”
“할머니가요?”
안토니아는 조금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래, 원래는 나는 좀 더 화려하고 귀여운 게 좋지 않을까 했는데 알렉산드라가 말리더라고.”
베네딕트는 좀 씁쓸한 눈을 했다.
“하지만 네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으니, 역시 알렉산드라의 말이 맞았구나.”
그럼에도 그 말속에는 아내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게 느껴졌다.
안토니아는 그런 것들이 모두 의외처럼 느껴졌다.
‘나와 있을 때 할머니는…….’
당장 어제만 해도 안토니아는 알렉산드라에게 들들 볶인 차였다.
‘여러 수를 생각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전장에서까지 망설일 게냐!’
‘자세가 무너진다. 안토니아, 훈련을 강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버텨야지.’
내용에 비해 말투가 매섭지는 않았으나 알렉산드라는 매우 엄격한 스승님이었다.
다만 리카르도는 서북부에서 그 이상으로 더 단련당한 모양이지만.
“할머니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오늘은 파티에 참석하실까요?”
“그럼,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생일이지 않으냐.”
베네딕트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으나 안토니아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진 않았다.
“자, 그럼 안토니아. 이리 오렴. 할아버지가 응접실까지 에스코트하마.”
“네?”
안토니아는 잠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는 이상하게 리샤르를 막 대하신단 말이야.’
당장 지금도 제대로 인사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도 그 애송이 운운하셨었지.’
서북부에서 지내면서 나름대로 서로 친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정말로 친한 게 아니면 진짜로 지금 같은 행동을 하긴 어려울 테니까.
“안 됩니다. 후작님.”
“뭐?”
“오늘 안토니아를 에스코트하는 건 제 몫이니까요.”
안토니아는 놀라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잠시이니 그가 제 손을 놓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단호하고 짓궂은 얼굴로 이야기했다.
“안토니아는 저를 선택했습니다.”
“아, 아니. 이 고얀 애송이 같으니!”
베네딕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집사, 내 검! 내 검 가지고 와!”
그는 당장에라도 무력으로 해결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퍽-
얻어맞은 건 리카르도가 아니라 베네딕트였다.
“쯧, 왜 이리 현관이 소란스러운가 했더니.”
“아,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는 철없다는 듯 베네딕트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참 그대는 날이 갈수록 나잇값을 못 해. 그런 건 나만 귀엽다 해 줄 테니 내 앞에서만 하라 그랬지.”
“아니, 하지만 지금 리카르도 이 애송이가-!”
“손녀 대신 날 에스코트하면 되는 것 아닌가?”
베네딕트의 입이 그 말에 꽉 다물렸다.
“싫은가?”
“싫을 리가요!”
알렉산드라는 그 반응에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헤벌쭉해진 베네딕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리카르도와 안토니아를 향해 말했다.
“너희도 따라 들어오거라, 슬슬 손님들도 올 시간인데 입구를 그리 막고 서 있으면 안 되지.”
깔끔한 상황 정리였다.
* * *
파티 손님들이 속속 도착했다.
드란제아 공작가를 비롯해 수도에서 유력한 집안의 귀족들이 모였다.
물론 안토니아는 루퍼스와 여러모로 신세 진 셀린 렘버트와 그녀의 남편 또한 빼놓지 않고 초대했다.
“이리 초대해 줘서 감사해요, 얼마나 기쁜지 모른답니다.”
셀린 렘버트는 자신의 남편과 들어서며 꿈꾸는 듯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최근 수도에서 다들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던 게 바로 세르히 백작님의 생일 파티거든요. 어찌나 기쁜지, 그렇지요. 여보?”
그러자 렘버트 자작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해 주어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시간 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하죠.”
그렇다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진 않았다.
안토니아는 일부러 이 생일 파티를 되도록 가족과 친한 지인들만으로 구성된 듯한 느낌을 받도록 했다.
“이번에도 가르제니야 홀에서 여셨어도 좋았을 텐데요.”
“홀의 주인인 백작 부인께서도 그리 말씀해 주셨지만, 새해다 보니 번잡한 게 싫어 소소하게 치르기로 했답니다.”
“어머 어머, 그렇군요. 그 마음도 이해해요.”
셀린 렘버트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렘버트 자작 부인께서는 오늘 파티에 대해 아주 잘 써 주시길 바라요.’
그걸 노리고 더 그녀를 이 자리에 초대했다.
오늘 생일 파티는 다름 아닌 대황태자 여론전을 준비하기 위한 전초전이니까.
‘이쪽이 초조한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
마치 소문을 의식해서 일부러 파티를 축소한 것처럼 말이다.
* * *
제레미야는 몇 번이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막내 황자의 시종 니콜라는 그 부산스러운 모습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았다.
제레미야는 창밖 너머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기도 하고, 또 마치 호소하듯 니콜라를 바라보기도 했다.
“진짜, 진짜로 가면 안 돼?”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황자님.”
“그건 안 된다는 거잖아.”
제레미야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서성거리는 걸 멈추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나도, 나도……. 세르히 백작에게 직접 생일 축하를 전하고 싶은데.”
“황자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번 생일 파티는 친한 몇몇 지인과 가족하고만 보낸다고 하시니…….”
“……내가 무턱대고 찾아가는 건 무례한 행동이겠지?”
니콜라는 제레미야의 입에서 나온 ‘무례’라는 말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제레미야가 아니라, 그의 시종이 된 뒤로 인내하며 그를 타이른 자신의 인내심에 말이다.
‘뭐, 이것도 다 세르히 백작님 덕이긴 하지만.’
황태자가 평소처럼 제레미야에게 관심을 쏟는 시기였다면 택도 없을 일이었다.
자신이 안토니아가 미리 일러준 지시에 따라 제레미야를 여섯 살 어린아이 대하듯 타이르고 비위 맞췄다고 한들, 그전에 황태자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테니까.
니콜라는 ‘그렇다’라고 단답하고 싶은 걸 참으며 찬찬히 제레미야에게 말했다.
“다른 분도 아닌 황자님이시니 어찌 세르히 백작님이 무례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말이야…….”
제레미야는 그렇게 말해주는 건 오로지 그뿐이라는 듯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무례하다고 말은 안 해도, 분명히 내가 가면 세르히 백작이 날 더 싫어할 수도 있겠지?”
“생일 파티만큼은 조용히 보내고 싶으신 느낌이긴 했습니다.”
니콜라는 절묘하게 직접적으로 ‘싫어할 거다’라는 말은 피해 그에게 답했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기사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두리뭉실한 답 어디가 그리도 좋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토니아에게 몇 달에 걸쳐 철저하게 받은 교육과 원래 가지고 있는 인내심이 이런 말을 술술 내뱉게 해주었다.
“맞아, 그런데 가족도 아닌 데다……. 형님의 동생인 내가 가면 더 싫겠지.”
제레미야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수차례 쓰다 지운 편지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안토니아에게 생일 축하 편지를 보내기 위해 몇 번이고 재작성하고 연습한 흔적들이었다.
자신의 편지, 그리고 그 옆에는 다름 아닌 리카르도의 필체가 담긴 문서가 한 장 담겨 있었다.
제레미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려한 필체였다.
‘황자님, 백작님께서는 대공 전하와 편지를 주고받는 걸 좋아하신다 하더군요.’
니콜라가 그렇게 말했을 때만 해도 제레미야는 그런 번거로운 걸 좋아하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니콜라가 안토니아, 아니, 자신에게 하던 조언 중 효과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근신 기간 중에 니콜라가 말한 대로 외출은 신전으로 한해 꾹 눌러 참아 보았다.
그러자 금세 황태자가 주에 한 번 정도는 상점 거리를 다녀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허가에도 니콜라가 만류해 두어 주에 한 번 정도만 나갔다.
참지 못할 것 같을 때도 어지간하면 다른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힘겹게 참은 덕일까, 새해 연회에서는 처음으로 황제가 칭찬을 해주기까지 했다.
‘요즘은 착실하구나. 그래, 너라도 짐의 두통을 더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누군가에게는 그저 타박하지 않음에 지나지 않을 말이었으나, 제레미야에게는 생전 처음이었다.
어릴 적부터, 적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한 황제가 자신을 저런 식으로 괜찮다고 말해준 적은 없었으니까.
‘……날 지금껏 칭찬해준 건 오로지 형님뿐이었는데.’
괜찮다고 말해준 것도, 그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을 챙겨준 것도 모두 말이다.
손 위로 둘째와 셋째 형도 있었으나, 그들은 어린 시절 제레미야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대놓고 괴롭히지만 않았을 뿐, 어린 마음에도 그들이 자신을 꺼린다는 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가 태어나고 어마마마가 돌아가셨다고 다 날 싫어했어.’
그가 기억할 무렵부터 사실상 황자궁에서 방치되어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몇 번인가 황제가 자신을 보았으나,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자신의 부친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어릴 적 세르미아의 손을 잡고 집무실을 갔다가 맞닥뜨렸던 황제의 대로한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절절하게 빌던 귀족을 황제는 매몰차게 내쳤다.
제레미야는 그게 너무 무서워, 그때부터 줄곧 황태자에게만 의지해 이날까지 왔다.
그러나 쟈힘이 죽은 뒤, 황자궁에 새로 온 시종 니콜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을 절대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 안 될 때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 증거로.
“세르히 백작의 답장을 한 번 더 볼래.”
“그럼 이제 타이는 풀어서 제게 주실 겁니까?”
제레미야는 그 말에 주저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조언을 따른 덕에 짤막하고 의례적이긴 했지만, 안토니아의 감사 편지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또……. 편지를 써도 백작이 귀찮아하진 않겠지?”
안토니아에게서 긍정적인 답이 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두 니콜라의 조언을 따른 덕이었다.
제레미야가 기대를 가득 담아 니콜라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황자님의 편지를 어찌 싫다고 하겠습니까.”
니콜라가 보드랍게 받아주는 말에 생일 파티에 못 가 죽을 상이었던 제레미야의 낯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그가 펜을 잡으며 외출을 단념하는 모습에 니콜라는 속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야, 세르히 백작님이 지시한 대로 황자님을 붙들어둘 수 있어서.’
안토니아는 니콜라가 해야 할 행동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일러주며 되도록 제레미야를 황자궁에 붙들어두라고 이야기했다.
첫째로 파티 자체가 화목하길 바라서였고 둘째로, 그곳이 라테르 후작저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황자님이 난동을 피울 거라면 최대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곳이 나을 거야. 하지만 장소가 라테르 후작저야. 할머니와 할아버지 앞에 서면 황자님은 얌전해질 수밖에 없을걸.’
단언하던 안토니아의 모습에 참으로 감탄이 나왔다.
제레미야가 권위적인 어른의 모습에 약하다는 걸 꿰뚫어 보고 한 소리였으니까.
‘세르히 백작님께서는 정말 빼어난 전술가나 다름없지 않으신가, 이 골치 아픈 황자님이 가장 효과적인 사고를 칠 때와 장소를 고르고 계신 것이니.’
아주 조금 이 단순한 막내 황자가 안쓰럽게까지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니콜라는 자신의 마음에 문득 든 동정심에 고개를 저었다.
황자궁에 막 왔을 때의 고생을 생각하자, 금세 측은지심이 사그라들었다.
* * *
“음, 오랜만에 먹어도 후작가의 음식 솜씨는 여전하군.”
저녁 만찬이 시작되고 에피타이저가 나왔을 때, 드란제아 공작은 감탄하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래전 내게 요리를 내준 후작가 주방장은 이미 은퇴했다 들었는데?”
드란제아 공작이 의문이 있다는 듯 고개를 들자, 안토니아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오늘 요리는 후작저의 주방장과 함께 저희 백작가의 주방장이 준비했어요.”
“세르히 백작가의 주방장?”
“원래 라테르 후작가에서 일했었는데, 어머니가 결혼할 때 백작가에 와 주방을 책임지고 있거든요.”
“아하, 그래서 이렇게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맛이 깊어진 것 같군!”
드란제아 공작은 입맛을 돋우기에 딱 좋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맛의 수프를 맛보며 감탄했다.
“여전히 음식을 보며 하나하나 감탄하는 습관을 못 버렸군.”
“흥, 뭐가 나쁜가. 본래 요리하는 입장에서도 적절한 반응이 있어야 즐거운 법일세.”
안토니아는 조용히 수프를 먹으며 드란제아 공작과 자신의 할머니 알렉산드라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드란제아 공작님과 친분이 있으신가 봐.’
되도록이면 좋은 쪽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황태자를 대적하기 위해 드란제아 공작은 최소 중립, 더 나아가서는 리카르도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게 좋았으니까.
‘오르테가 후작가의 세력이나 지금 황제 폐하께 불만 있는 귀족가가 제법 있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안토니아는 이 자리에 드란제아 공작뿐만이 아니라 초대한 서너 팀의 무리를 모두 고심하여 정했다.
약혼식이 치러지고 난 뒤에는 제위 경쟁 구도가 본격적으로 바뀔 테니까.
‘그래서 제레미야가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길 바란 거고.’
그래야 황태자가 이 파티에 모인 명단을 입수해 의심하고 더 날뛰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안토니아는 지금 당장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바로 테이블에서도 자신과 가까운 곳에 마련한 레이디 트라체스, 이스베르가의 공석 말이다.
안토니아는 한쪽 귀로는 알렉산드라와 드란제아 공작의 이야기를 들으며, 리카르도에게 속닥거렸다.
“이스베르가 님은 정말 오신다고 한 거 맞지?”
“응.”
“……정말로 마음 상하신 걸까.”
“그런 걸로 마음 상해할 사람이 아니야. 걱정 마.”
리카르도는 단언했으나 안토니아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수도에 돌고 있는 소문은 황태자가 낸 것이지만 어느 정도 안토니아가 부추긴 것이기도 했다.
안토니아는 이번 생일 파티에 맞춰 와주길 요청하며 이스베르가에게는 솔직하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리카르도는 몇 번이나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했으나, 그의 말은 조금 신뢰성이 낮았다.
적어도 자신에게 리샤르라는 걸 밝히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걸 보면 말이다.
‘게다가 이스베르가 님은 답장을 보내주지 않으시기도 했고…….’
시간을 생각하면 진작 답장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이런 스캔들에는 여성이고 딸인 이스베르가가 더 민감할 거라고 생각했다.
초조해져서인지, 안토니아의 수저가 조금 느려졌다.
그 모습에 리카르도는 한 번 더 그녀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진짜로, 진짜로 괜찮을 거야. 내가 누님의 성격만큼은 알아. 나도 어릴 때 누님의 속을 많이 썩여봤으니까.”
“……그걸 안심하라고 하는 소리야?”
“그럼, 안토니아가 뭘 해도 어릴 적 나만큼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어.”
안토니아는 그 말에 웃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나중에 이스베르가와 리카르도의 욕을 같이 해줘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녀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에피타이저가 치워지고 다음 요리가 나올 무렵.
“제가 많이 늦었네요.”
서두른 듯한 모습의 이스베르가가 홀 안으로 들어왔으니까.
이스베르가의 등장에 잠시 홀 안이 긴장감에 휩싸였다.
물론 드란제아 공작 내외나 베네딕트, 알렉산드라는 평온했다.
하지만 최근 소문에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이 속내를 온전히 숨기지 못한 탓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스베르가 님.”
안토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이스베르가를 맞이했다.
리카르도의 말대로 이스베르가가 절 탓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좀 긴장됐다.
물론 안토니아가 저지른 일은 아니라지만, 예상했음에도 방치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스베르가는 눈이 잔뜩 묻은 외투를 서둘러 벗어 하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곤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성큼성큼 안토니아에게 다가왔다.
안토니아가 긴장한 것과 달리, 이스베르가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미안한 얼굴이었다.
“미안하구나, 안토니아.”
“네?”
“소중한 네 생일인데, 이렇게 늦었잖니.”
이스베르가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절절 흘러나왔다.
그 첫 마디에 무언가 다른 ‘흥미로운 상황’을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의 손이 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물론 귀는 여전히 열어둔 채였지만.
“아니에요, 요 며칠 눈이 많이 내렸잖아요.”
안토니아는 최악의 경우 이스베르가가 오지 않을 것도 각오했다.
물론 말한 것처럼 단순히 눈 때문만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이해해주다니, 역시 내 못된 동생하고 달리 안토니아는 착하구나.”
이스베르가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흐트러졌던 안토니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울피나도 데려오고 싶었는데 날이 너무 궂어서 일찍 돌려보냈어, 자기도 축하하고 싶다고 난리였어.”
“따로 울피나를 보러 갈게요.”
“그럼 그럼, 연말부터 쭉 못된 리카르도가 널 독차지했었잖아. 울피나가 리카르도만 보면 아주 화를 낸단다.”
이스베르가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에게 상냥하고 따뜻한 말투였다.
안토니아는 그녀의 의도가 어느 쪽이건 간에 고마웠다.
‘오늘 파티는 되도록 화목하게 보여야만 하니까.’
화목하고 분위기 좋은 파티면 파티일수록 황태자는 오히려 꼬아서 생각할 테니 말이다.
‘초조해진 내가 일부러 이런 식으로 보여주려 한다고 말이야.’
이스베르가는 안토니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마치 확답하듯 이야기해주었다.
“식사가 끝나면 내 선물을 가장 먼저 풀어봐 주렴, 네게 꼭 어울릴 만한 걸로 가져왔거든.”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럼 그럼!”
이스베르가는 그렇게 말한 뒤, 다른 손님들에게 늦게 와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며 이야기했다.
참으로 능숙했다.
자칫 어수선해지기 딱 좋았는데 말이다.
“신년 파티에서 레이디 트라체스를 보지 못해 서운했습니다.”
“어머, 그러셨나요? 하긴 제가 부인과 워낙 마음이 잘 맞긴 하지요. 저도 무척 아쉬웠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너무 좋네요, 안 그래도 지난번 레이디 트라체스께서 말씀해주신 장식법이-.”
안토니아는 귀로 들려오는 대화 내용을 들으며 한 번 더 감탄했다.
자신도 여러 사람의 관심사를 하나하나 익혀두려 노력했지만 이스베르가만큼 자연스럽진 못했으니까.
게다가 더 대단한 건, 어디까지나 그녀는 오늘 파티의 손님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단 것이다.
“아, 지난번 이야기 드렸던 것 말이지요. 사실 그건 안토니아가 알려준 것이랍니다.”
“어머, 세르히 백작님이요?”
“그럼요, 제가 안토니아의 사교계 후견인을 자청하긴 했지만, 워낙 영리한 아가씨잖아요?”
이스베르가는 아름다운 보랏빛 눈으로 사랑스럽다는 듯 안토니아를 바라보며 노래하듯 이야기했다.
“오히려 제가 배우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많이 든답니다.”
“그렇군요, 하긴 세르히 백작님은 친절하시기도 하지요. 안 그래도 지난번 일로 감사드리고 싶었답니다.”
몇 번인가 파티에서 얼굴을 보았던 라딕스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마침 기회가 생겨 다행이라는 듯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저희 영지에 급하게 폭설이 내려 큰일이 났는데 지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같은 나라의 귀족으로 도와드릴 수 있을 때는 도와드려야지요. 무엇보다 그 일은 크롬프트 씨의 도움 덕이었는 걸요.”
라딕스 백작령은 서남부로 보통 눈이 잘 내리지 않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눈에 대한 대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와중 이례적인 기상이변으로 폭설이 내리자 물자 유통망이 모두 막힌 상태가 되었다.
하필 운 나쁘게도 서남부만이 아니라 다른 쪽도 큰 폭설이 와 쉽사리 지원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안토니아가 루퍼스와 함께 나서 라딕스 백작 부인뿐만이 아니라 폭설로 오도 가도 못한 지역을 도왔다.
안토니아가 연말 내내 바빴던 건 다름 아닌 이 일 때문도 있었다.
황제가 신년 파티 내내 안토니아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말이다.
‘안토니아, 네 머리에는 정말로 많은 대비가 되어 있구나.’
‘아닙니다. 폐하.’
‘이럴 때 겸손을 보이면, 짐을 비롯해 빨리 움직이지 못한 자들이 모두 무능한 게 되지 않느냐.’
당연히 리카르도도 여력이 되는 기사단 일부를 불러 함께 도와주었다.
‘덕분에 황태자는 더욱 안달이 났고 말이야.’
물론 안토니아는 이런 일이 벌어지리란 건 알고 있었다.
좀 다른 점은.
‘내년에 일어날 일인데 올해 일어났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안토니아는 그 이변을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굳이 고민한다고 해결책이 나올 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한텐 이득이었지.’
덕분에 상당수의 귀족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었으니까.
오늘 파티에 대표 격으로 라딕스 백작 내외를 초대한 것도 세력을 늘리기 위함이었고.
라딕스 백작 부인은 안토니아의 겸양에도 고개를 내저으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그 큰 도움을 당연하단 말로 넘어갈 수는 없지요. 그러니 세르히 백작님.”
그녀는 결연한 눈으로 자신의 남편과 한 번 시선을 교환하더니, 확신하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저희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다면 꼭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약소하지만 조금 이따 보실 저희 선물도 기쁘게 받아주시면 좋겠고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부드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 걸요.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요! 호호,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안토니아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라딕스 백작 부인의 모습을 보며 호기심이 들었다.
‘도대체 뭘 선물로 준비했기에 저러는 거지?’
안토니아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식사를 무사히 마쳤다.
* * *
훌륭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마틴은 또 한 번 아름다운 디저트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쩜 이렇게 섬세할 수가 있죠? 수도에서 파는 디저트 숍들과 견주어도 더 뛰어난 것 같아요.”
“그러게요, 맛도 무척 기대가 되네요.”
특히 단 걸 좋아하기로 유명한 드란제아 공작은 매우 만족한 눈치였다.
“호오, 이 후작저 주방장에게 부족한 것은 디저트 솜씨라고 생각했는데.”
드란제아 공작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곧장 손을 움직였다.
마틴은 손님들이 각각 먹기 편하도록 모든 디저트의 크기를 작게 내어놓았다.
특히 드란제아 공작이 손을 뻗은 후르츠 타르틀레트는 저장 과일과 세르히 백작령에서 이 시기에 나는 귤을 이용해 상큼하면서도 풍부한 단맛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과일을 장식한 모양도 하나하나 예뻤다.
손을 가져다 대는 게 아까울 정도로 말이다.
한입에 타르틀레트를 입에 넣은 드란제아 공작은 감탄하며 이야기했다.
“세르히 백작! 그대의 주방장을 부디 우리 공작저로 초빙하고 싶군.”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지만, 제 선에서 거절해 두겠습니다. 마틴의 음식이 없으면 저도 무척 아쉽거든요.”
“흠! 그건 이해가 되는군.”
드란제아 공작의 말에 베네딕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핀잔을 줬다.
“어디 우리 손녀의 사람을 대놓고 빼어가려 하는가.”
“뒤에서 이리저리 수작질하는 것보다는 훨씬 깔끔하지!
“그랬다간 내가 자네를 가만히 뒀을 것 같은가?!”
“그러니 여기서 멈추지 않았는가! 계속 질척거리며 내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이 식사 시간 때처럼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늘 어렵기만 했던 두 대귀족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분위기를 더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러자 다른 손님들은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여 놀라는 대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다들 감탄하며 디저트를 조금 맛보자, 이스베르가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자아, 이제 저는 더 기다리기 힘드네요.”
“무엇이 말인가요, 레이디 트라체스?”
“시치미도 잘 떼시네요, 저는 안토니아가 제 선물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데 말이에요. 라딕스 백작 부인.”
이스베르가의 말에 라딕스 백작 부인도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실은 저녁 식사 시간 때부터 무척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자, 안토니아. 다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얼른 선물을 열어 보렴.”
이스베르가는 그렇게 말하며 리카르도의 곁에서 낚아채듯 안토니아의 손을 이끌었다.
저녁 내도록 그녀의 곁에 있었으면서도 리카르도는 그게 너무 아쉽다는 듯한 눈을 해 또 한 번 사람들이 즐겁게 미소 지었다.
“사실 저도 무척 기대하고 있었어요, 이스베르가 님.”
“그렇지?”
이스베르가는 기대해도 좋다는 듯 안토니아에게 자신의 선물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건 상자가 아니라 얇은 봉투였다.
안토니아는 의아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이스베르가의 선물을 열었다.
‘……이건.’
그리고 거기에 적힌 글씨를 보자마자 안토니아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이, 이스베르가 님. 저는 이걸-.”
“안 돼, 생일이니까 받아줘야지.”
“네? 하지만.”
“안 받아줄 거야? 내가 파티에 늦게 도착했다고 선물조차 거부하는 거니?”
안토니아는 그 말에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요, 이스베르가 님. 이건 마석 광산의 권리증이잖아요……!”
지나칠 정도로 스케일이 큰 선물이었다.
안토니아가 한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 레이디 트라체스니 아주 값비싼 걸 선물할 것이라고 모두 예상은 했다.
특히나 그 소문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석 광산이라니, 아무리 대공가의 재력이 대단하다곤 해도 보통 생일선물로 줄 만한 게 아니었다.
‘……이스베르가 님은.’
안토니아는 그녀의 환한 얼굴을 보며 감탄했다.
대단하다고 말할 정도로 훌륭한 제스쳐였다.
소문을 낸 건 안토니아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황태자 쪽에서 흘린 소문일 거라 짐작하는 자도 있었다.
이 치욕적인 스캔들에 세르히 백작가와 트라체스 대공가가 틀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스캔들이 터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안토니아 세르히의 등장일 거라곤 쉽게 유추됐으니까.
그게 황태자의 견제건, 또는 이름 없던 지방 귀족의 활약에 누군가가 열등감을 품었건 간에 말이다.
반대로 트라체스 대공가가 안토니아를 속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 이스베르가가 안토니아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음에도 당일이 되기까지 수도에 나타날 낌새를 보이지 않자, 은근히 억측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레이디 트라체스는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래봐야 지방 귀족, 그런 자를 대공가에 받아들인 것도 어찌 보면 대단한 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아무리 황제 폐하가 예뻐한다 하지만 딱히 큰 지위를 받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중앙 귀족 자리도 고려하실 뿐, 진짜 주신 것도 아니고.’
‘하긴 신년도 겹치고 일이 많아서 검토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긴 했지요.’
‘그런데 세르히 백작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게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할 지경이라니, 레이디 트라체스의 위세도 끝이로군요.’
이스베르가는 사교계에서 유명한 만큼, 그녀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터였다.
‘아마 황태자만큼이나 이 생일 파티를 기대하는 게 그들일걸.’
그런데 이스베르가는 대담하게도 이런 행동으로 나왔다.
단순히 안토니아와 서로에게 사과하고 미안하다는 듯 구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언행이었다.
그뿐만인가, 안토니아와의 관계는 돈독하다는 듯 대단한 생일선물을 준비했다.
‘당연히 이 정도 생일선물을 하려면 평범한 사교계 후견인과 피후견인 관계로는 안 된다는 건 알 테고.’
한 마디로 그녀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소문은 소문일 뿐, 세르히 백작가와 트라체스 대공가는 평소와 다름없이 사이가 좋다는 걸 보인 것이다.
“그래서, 기쁘지 않니? 무척 고민했는데. 크롬프트 상단과의 여러 사업으로 네가 마석이 많이 필요하단 소릴 들었단다.”
“기뻐요. 하지만 너무 대단해서…….”
“안토니아 네게 주는 건데, 너무 대단한 게 어디 있니. 넌 내 가족이 될 거고, 내가 응원해야 할 사람인데.”
안토니아는 그 말에 감사하다는 듯 그 권리증을 받았다.
약혼식을 앞두고 있는 데도 안토니아의 사업적인 부분에 도움이 될 만한 걸 안겨준 것도 대단한 센스였다.
‘내가 그런 것 때문에 황실의 눈에 들었고, 그래서 더 견제받는 위치가 되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신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스베르가는 속사정을 모두 아는데도 말이다.
‘이스베르가 님껜 따로 정말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어.’
안토니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고맙다는 듯 이스베르가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제 선물을 약소하다 이야기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스베르가와 안토니아를 제외하고 다소 경직되었던 분위기를 깨트리며 라딕스 백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더 큰 선물들이 나올까 두려우니, 부디 제 선물도 얼른 열어봐 주시겠어요?”
“그럼요. 그렇게 말씀하니 기대가 되네요.”
“호호, 큰 기대하지 마세요. 정말로 약소한 선물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라딕스 백작 부인의 눈에선 은근한 자신감이 보였다.
그러자 말만이 아니라, 정말로 기대감이 다시 차올랐다.
라딕스 백작 부인이 준비한 건 드레스가 들어갈 법한 크기의 상자였다.
‘서남부는 직물 산업이 유명하니까…….’
그것 때문에 이번에 서남부를 더 지원한 거기도 했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특산 직물을 이용한 옷일까 생각하며 상자를 열었다.
“와, 너무 예쁘네요.”
상자를 열자마자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모자나 가공품이 아니었다.
상자 안에 든 건 상자 가득한 원단이었다.
하나같이 섬세하게 직조되어 은은한 광택이 너무 아름다웠다.
‘어쩐지 직접 들게 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라니.’
들자마자 무게가 달라 눈치챘을 테니 말이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랍니다. 세르히 백작님.”
라딕스 백작 부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원단 위에 곱게 놓인 봉투를 가리켰다.
“진짜 선물도 챙겨주셔야지요.”
안토니아가 조심스레 봉투를 들자, 또 한 번 실내가 술렁였다.
조금 전 광산 권리증의 여파였다.
“아참, 저희 선물은 약소한 것이라 레이디 트라체스와 비교할 만한 건 아니에요.”
라딕스 백작 부인은 이스베르가의 선물을 의식한 듯 먼저 부정했다.
안토니아는 스스로 너무 기대하지 말자고 마음먹으며 봉투를 열었다.
아무리 표정에서 티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괜히 기대하면 혹여라도 그녀에게 실례되는 모습을 보일까 염려가 되었으니까.
특히나 저 직물만 해도 어지간한 드레스 몇 벌 이상의 가격이었다.
그런데.
“……아니, 라딕스 백작 부인.”
“호호, 그 표정을 보니 제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세르히 백작님.”
“마음에 든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괜찮으신지부터 여쭈어보아야 할 것 같은데요.”
안토니아의 말에 라딕스 백작 부인은 의아한 얼굴로 손을 턱에 가져다 대었다.
“왜 괜찮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는 거지요, 백작님?”
“하지만 10년이나 ‘지카 직물’을 백작가에 독점 공급하시겠다니…….”
“호호, 그냥 드리겠다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리 놀라실 정도인가요?”
라딕스 백작 부인은 배포가 큰 듯한 모습으로 웃었다.
지카 직물.
그 이야기에 다시 한번 초대객들의 입이 벌어졌다.
서남부에서도 극히 일부 지역에서밖에 나지 않는 희귀한 직물이었다.
이 직물은 보편적으로 의복 등에 쓰이진 않았으나, 마력이나 성력과의 궁합이 좋아 마법 가공품이나 신전에서도 특수한 피복을 만들 때만 쓰이는 직물이었다.
라딕스 백작가가 서남부에 크지 않은 영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중앙에서 제법 명성을 유지할 수 있던 것도 그 덕이었고 말이다.
“세르히 백작가가 아니었다면 저희 라딕스 백작령은 이번 겨울 많은 피해를 입을 뻔했어요.”
백작 부인은 백작과 한 번 더 눈을 마주하며 교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영지민의 목숨에 비하면 그리 비싼 대가도 아니지요. 받아주시겠지요, 세르히 백작님?”
“물론이에요. 오히려 제 쪽에서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인 걸요.”
“모두 세르히 백작의 성품을 믿고 결정한 거랍니다. 독점하여 받는다 해서 공정하지 못한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 신뢰하니까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감탄했다.
역시 백작가의 실권을 쥐고 있는 안주인답다고 해야 할까.
‘백작가에 누가 봐도 대단한 이득을 줘서 은혜를 확실히 갚았단 이미지를 주면서,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증인들을 만들다니.’
안토니아가 생일 파티에 초대한 사람들은 앞으로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가까운 사람들이기도 했고.
라딕스 백작 부인은 그 점을 이용해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물론이에요, 라딕스 백작 부인. 그 신뢰를 꼭 지켜드릴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든든하네요. 그렇지요, 여보?”
백작 부인의 말에 과묵하게 서 있던 라딕스 백작은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도 연이어 안토니아는 여러 사람이 준비한 선물을 확인했다.
렘버트 자작 내외는 100년 전 활동한 유명한 작가의 친필 서적을 선물로 주었다.
“조금 약소하긴 하지만, 무얼 드릴까 고민하다…….”
“약소하긴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걸 선물로 주셨는데요.”
안토니아의 말에 셀린 렘버트는 감격한 얼굴로 렘버트 자작과 손을 꼭 잡았다.
“역시 제 말대로지요? 세르히 백작님은 가격만으로 판단하는 분이 아니라고 말이에요.”
렘버트 자작은 그 말에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드란제아 공작은 몇 년에 한 번씩밖에 세공하지 않는다는 세공사의 보석 세트를 선물했다.
“하하, 다른 사람들의 선물에 비하면 쑥스럽군.”
드란제아 공작의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평생을 걸려도 이 세공사의 작품 하나 구하기가 어렵다고 들은걸요? 황실에도 몇 점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
“알아주니 고맙네, 세르히 백작.”
드란제아 공작의 말에 할아버지인 베네딕트는 툴툴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흥, 째째하기는.”
“그러는 그대는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했는가? 나와 달리 라테르 후작, 그대에게는 친손녀이지 않은가.”
“흠, 흠.”
드란제아 공작의 말에 베네딕트는 이스베르가와 라딕스 백작 내외가 영 못마땅하다는 듯 보더니, 커다란 액자를 쑥 꺼내 들었다.
“아름다운 그림이로군, 이게 선물인가?”
드란제아 공작은 생각보다 너무 약소한 건 아니냐는 듯 도발하며 말했다.
“아니!”
“뭐?”
베네딕트는 영 찝찝하다는 듯 품에서 봉투를 꺼내 안토니아에게 건넸다.
“안토니아, 네가 원한다면 마석 광산 세 개쯤은 사줄 수 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세 개나 되는 마석 광산을 제국에서 구하긴 무척 어려울 것이다.
‘이스베르가 님이 주신 것 외에 다른 광산은 주인이 아주 확실한 데다 내놓지도 않을 거라.’
안토니아는 혹시라도 베네딕트가 귀찮은 짓을 벌이지 않길 바라며 봉투를 서둘러 열었다.
거기에는 제국 동부, 세르히 백작령 인근의 자그마한 섬의 권리증이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 전 이것도 무척 좋은걸요.”
“그, 그러냐?”
그 말에야 베네딕트는 겨우 안심한 듯 헤벌쭉 웃었다.
“어릴 때 어머니와 놀러 간 적이 있어요. 알고 계셨어요?”
베네딕트는 그 말에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웠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긴 했구나. 할아버지는.’
어머니 레베르타와 함께 매년 가던 섬이 어딘지를 알 정도면 말이다.
그리 크지 않아 섬 한 바퀴를 도는 데 어린 제 다리로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 작은 섬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소유주에게 허락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갈 수가 없었는데.
“정말 감사해요, 할아버지.”
“흠, 흠. 감사는 나뿐만이 아니라 네 할머니에게도 해라.”
안토니아는 그 말에 놀란 눈으로 알렉산드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저 태연한 얼굴로 안토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한 건 그저 소유주와 담판을 지은 것밖에 없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지?’
안토니아가 한 번쯤 방문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리 까탈스럽게 굴던 자였는데.
게다가 신전과의 관계도 있어 강하게 말하기도 어려웠었고.
안토니아는 내일쯤 루퍼스에게 알아보라고 말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이렇게 선물들이 하나같이 나름대로 화려하다 보니, 자연히 손님들의 기대는 리카르도에게 향했다.
사교계 후견인인 이스베르가가 무려 마석 광산을 내놓았다.
그러니 당연히 리카르도는 더 대단한 걸 내놓았다고 기대하게 되지 않겠는가.
‘어쩌지, 우리 리샤르…….’
안토니아는 염려 가득한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름대로 안토니아에게 귀여운 선물을 주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전혀 걱정 없다는 얼굴로 안토니아를 향해 은은한 미소만 보였다.
‘우리 리샤르가 또 다른 선물을 준비했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리카르도는 그런 류의 센스는 없는 타입이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 감성적인 부분은 기대할 수 있긴 하지만…….
‘그래, 트라체스 대공은 재력으로 해결하는 걸 못 하는 건 아니니까.’
안토니아는 그가 뭔가 준비한 게 아니라면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오히려 얼른 안토니아가 자신의 선물을 언급했으면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설마 오늘 받은 선물을 내가 보여야 하는 건 아니겠지?’
자신은 무척 기쁘고 좋았지만,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드비와 비슷하게 반응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선물이었으니까.
부끄럽진 않지만 내보이기에 좀 그랬다고 할까…….
“오늘 이미 실컷 놀라서 대공 전하께서 뭘 준비하셔도 침착할 자신이 있네요.”
손님 중 한 명이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특별한 생일 파티지 않은가요.”
“신기한 건 저렇게 선물이 쏟아지는데도 왠지 납득이 간다는 점이에요.”
누군가의 말에 라딕스 백작 부인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야, 이 자리에는 쓸데없이 가볍게 귀가 흔들리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겠어요.”
라딕스 백작 부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그렇군요.”
“연말부터 신년까지 많은 파티를 참석했지만, 오늘처럼 마음 편한 적이 없었어요.”
“그건 그래요.”
이 파티에 초대받은 뒤 꽤 긴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이 많은 파티에서는 적당히 인파에 묻어 인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토니아가 초대한 사람은 겨우 스물 남짓이었다.
아주 소규모는 아니라지만 어지간한 친목 도모 티 파티에서나 나올 법한 인원수였다.
그런데 그 적은 수에서도 거물급 인사가 많았다.
안토니아의 조부모인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도 그랬지만, 드란제아 공작이나 트라체스 남매.
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건 지금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해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웬걸, 파티 분위기는 내내 정말로 부드러운 홈 파티처럼 이어졌다.
요즘 사교계에서 도는 더러운 소문 따위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역시 헛소문인 게 틀림없어.’
‘정말이었으면 애초에 라테르 후작님이나 풀멘 변경백님께서 대공 전하나 레이디 트라체스를 여기 들이셨겠어?’
그러니 다들 식사를 마치고 선물 개봉식에 이르러서는 다들 맘 편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만 뜸 들이고 얼른 구경하게 해주세요.”
“맞아요, 세르히 백작님. 선물 개봉식이 끝나야 다들 춤이라도 추지 않겠어요?”
그 유쾌한 말에 안토니아는 반대로 긴장되는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괜찮아?’
안토니아는 강한 눈빛으로 리카르도에게 물었다.
그 뜻을 알아들은 건지, 아닌 건지.
그는 그저 안토니아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다가왔다.
“안토니아.”
그는 그러더니, 조용히 안토니아의 손에 자그마한 상자를 얹어두었다.
“반지일까요?”
“선물로 청혼이요? 분명 로맨틱하긴 하지만.”
반지나 액세서리가 들어있을 법한 상자를 보며 손님들은 은근히 기대감을 가졌다.
재력 자랑은 충분히 보았으니, 피날레는 사랑으로 끝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의 약혼 사실 또한 여전히 수도를 달아오르게 만드는 화제였으니까.
다만 정작 장본인인 안토니아는 그들의 기대를 애석하게 생각했다.
‘절대 청혼 반지만큼은 아닐걸.’
그랬다간 대번에 안토니아가 불쾌해할 거라는 걸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리샤르라고 밝힌 이후로, 단 한 번도 안토니아가 정말 싫어할 일을 한 적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이 약혼 계약에 대해서 그리 어수룩하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귀족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 하며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열쇠……?”
“그래요.”
“어디의 열쇠에요?”
“당신의 발이 닿았던 곳이라면 어디든지.”
리카르도는 마치 온 우주를 다 줄 것 같은 얼굴로 답했다.
그 아름답고 로맨틱한 얼굴에는 정말 미안했지만.
‘……그래서 어디에 쓸 수 있는 열쇠라는 거지?’
물론 열쇠 자체도 세공품으로 아주 훌륭했다.
드란제아 공작이 제게 주었던 세공 보석 세트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이거 분명 마석으로 조각한 거야.’
언뜻 보면 크리스털이나 다이아몬드로 만든 열쇠 같았으나, 루퍼스 덕에 마석을 자주 접한 안토니아였다.
“정말이에요, 안토니아.”
어리둥절해서 뭐라고 반응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리카르도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등을 들어 올려 입을 맞추며 조금 더 길게 설명했다.
“크롬프트 씨에게 특별히 주문했지요.”
“네?”
“어디로든지 간에, 한 번이라도 당신의 발이 닿았던 곳이라면 순식간에 건너갈 수 있도록 만든 마법 열쇠예요.”
“……마법 열쇠라고요?”
안토니아의 눈이 절로 커졌다.
아니, 안토니아뿐만이 아니라 초대객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한 번이라도 간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니……!”
“이동마법은 보편적으로 쓰지도 않잖아요. 마석 사용량이 너무 많다고 말이에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귀족들은 그 놀라운 신문물에 당장에라도 질문을 쏟아내고 싶은 얼굴이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열쇠에요, 안토니아. 크롬프트 씨도 다신 만들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요.”
‘만들 수가 없는 거겠지.’
어디든지 간에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니.
안토니아는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특수한 체질’이 더해져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다.
마력이나 성력이 있는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자유로운 순간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으니까.
‘……루페와 리샤르에게 당했네.’
안토니아가 크롬프트 상단의 다음 아이템으로 준비하던 게 이동마법 장치였으니까.
물론 지금 리카르도가 준 것만큼 편리한 건 아니었다.
몇몇 군데에 일종의 이동 마법역을 설치하여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그런 시설이었다고 할까.
‘루페도 리샤르도 정말 약았어.’
자신은 또 다른 무대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좋아.’
이 자리에는 셀린 렘버트도 있고 자신에게 호의적인 귀족들도 많지 않은가.
정말로 말 그대로 최고의 생일선물이었다.
‘이렇게 훌륭하게 예고를 띄워주다니.’
안토니아는 정말 기쁜 얼굴로 리카르도의 손을 꼭 잡았다.
“……정말로 깜짝 놀랐어요. 제게 비밀로 하고 이렇게 엄청난 선물을 주시다니요. 게다가 마법 장치면.”
안토니아는 조금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크롬프트 씨가 많은 수고를 한 데다 리카르도, 당신도 틀림없이 큰돈을 쓰셨겠어요.”
“안토니아, 그대에게 주는 것이잖아요. 그저 약소했답니다.”
그 말에 한 번 더 부러움과 대단하다는 감정이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앞서 나왔던 그 화려한 선물들을 압도적으로 넘어서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저 따스한 눈빛.
누가 보아도 문제없이 애정 가득한 커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귀족들은 은근히 셀린 렘버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오늘 파티에 참석한 우리를 부러워하겠어.’
신년 파티 그 어느 곳과 견주어도 이 파티만 한 곳이 없을 것이다.
귀족들은 모두 확신했다.
참석자 중 유일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베네딕트, 내 앞에서는 인상 찌푸리지 말라고 그랬지.”
“하지만 알렉산드라, 저 애송이가……!”
“그대의 창의력이 모자랐던 걸 탓해야지. 손녀가 저렇게 기뻐하는데, 기쁘지 않아?”
알렉산드라의 말에 베네딕트는 복잡한 표정으로 눈빛에 생기가 도는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찡그렸던 표정을 풀었다.
정이 고픈 할아버지는 손녀의 기쁨을 이길 수 없는 법이었다.
* * *
[1월 12일, 그날 밤은 단순한 생일 파티의 밤이 아니었다.
연이은 각종 신년 행사로 모두가 지칠 법도 한 시기, 세르히 백작님의 생일 파티는 ……중략……
솔직히 말해 나는 매우 긴장했었다. 소규모긴 하지만 처음 가는 후작저인 데다, 감히 내가 세르히 백작님의 특별한 초대객에 포함되었단 사실이 ……중략……
저녁 식사는 얼핏 평범했으나, 맛은 매우 뛰어났으며 가장 훌륭한 건 식사 시간의 분위기였다.
라테르 후작님과 드란제아 공작님이 농담을 나누고 레이디 트라체스가 누구와도 정답게 눈을 맞춰주는 그런 식탁!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 셀린 렘버트 또한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중략……
세르히 백작님의 생일선물은 모두 하나같이 특별한 것이었다.
값비싼 것들이 많아서가 결코 아니다! 그 선물 하나하나에 담긴 마음들이 특별했다.
나는 세르히 백작님을 위해 100년이 지난 친필 서적을 준비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주눅이 들었다. 마석 광산에 지카 직물의 독점 공급권이라니!
하지만 세르히 백작은……후략……]
방 안은 내내 고요했다.
저도 모르게 셀린 렘버트의 기사 모두를 정독한 황태자는 빠드득 이를 갈며 그녀의 기사가 실린 잡지를 구겼다.
‘……고작 가십 잡지!’
황태자는 속으로 화를 내며 천천히 잡지를 구기느라 힘주었던 손을 풀었다.
‘그래, 겨우 이까짓 것으로 내가 이성을 잃는다면 모두 세르히 백작의 노림수대로 놀아나는 거겠지.’
황태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누구보다 냉정하며, 이 생일 파티의 진짜 의미를 알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형님!”
참 절묘하게도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제레미야의 어리석음도 돌볼 자신이 있었다.
“이, 이대로면 세르히 백작이 정말로 숙부님과……!”
“쯧, 제레미야. 요즘 얌전하고 의젓하게 굴더니 다 잊은 것이냐?”
황태자 세르미아의 말에 제레미야는 의젓하게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곤 예전과는 달리 참을성 있게 간절한 얼굴로 세르미아를 바라보았다.
“형님…….”
“그리 허둥대지 말아라. 이미 숙부님과 세르히 백작 사이의 균열은 생긴 거나 다름없으니까.”
“……네? 하지만 그 잡지엔-”
“제레미야. 세르히 백작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교묘하며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황태자는 셀린 렘버트의 기고문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다른 귀족들은 속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셀린 렘버트의 글은 가십을 몰고 다니지, 그걸 이용해서 숙부님과의 사이도 아무렇지 않고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굴 모양인데.’
자신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지금까지 별별 화제를 일부러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크게 크게 키워 터트렸던 세르히 백작 아닌가.’
그러니 무언가 꿍꿍이가 없지 않은 이상, 굳이 이렇게 소규모로 파티를 치를 이유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형님……!”
“세르히 백작은 그 소문이 아주 끔찍하게 싫었던 거다.”
“네?”
제레미야는 세르미아의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끔찍하게 싫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기사 내용과 같이 굴 수 있을까.
‘형님이 틀린 말을 하실 리가 없겠지……?’
제레미야는 마음속에 고개를 치켜든 자신의 의문을 애써 부정했다.
지금까지 황태자의 말을 따라온 그였기에 더더욱.
세르미아는 제레미야의 갈등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큰 형으로서 지도하듯 이야기했다.
“그러니 시선을 끌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이지 않겠느냐. 게다가 약혼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다.”
세르미아는 그렇게 말하며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 난리를 피워가며 약혼 관계라는 걸 밝혔는데, 소문에 흔들리면 그 이미지가 뭐가 되겠느냐.”
“그런…… 거겠지요?”
애써 부정해보았으나 제레미야는 어쩐지 황태자의 말이 상황에 어떻게든 끼워 맞춘 이야기같다고만 느껴졌다.
니콜라가 곁에서 여러 조언을 해준 덕일까.
‘황태자 전하께 찾아간다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을 겁니다.’
기사를 보고 어찌할 바 모른 채 나서자, 니콜라가 만류하며 이야기했었다.
다만 그 말을 그냥 믿고 싶지 않아 무작정 세르미아를 찾아오긴 했다.
하지만…….
‘……니콜라가 한 말이 맞는 게 아닐까?’
제레미야는 갈피를 못 잡은 채 갈팡질팡하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세르미아는 당연히 그 망설임이 자신의 말을 의심하는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바보 같은 동생이 그렇게 한 발 더 나가 사고할 리가 없다고 그는 확신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제레미야. 너는 나만 믿고 기다리면 된다.”
“……형님.”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것이야, 고모님이 후원한다 해도 본인이 레이디 트라체스인 건 아니지 않으냐.”
황태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도에 온 뒤로 지금의 평판을 만들고자 세르히 백작이 공을 얼마나 들였느냐.”
그걸 고작 이런 일로 꺾이게 둔다고?
세르미아는 여유롭게 이야기했다.
“머지않아 백기를 들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는 얼굴만큼은 예쁘장한 자신의 막냇동생의 어깨를 콱 잡아 시선을 마주했다.
자신의 시선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흔들리는 게 딱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패로 말이다.
“그때가 되면 필요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러운 추문이 붙은 황가의 연이 아닌, 정통 황가와의 연이 말이다.”
이 멍청하고 줏대 없는 동생이라 할지언정 정통성 있는 황실의 황자라는 건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니 겁내지 말고, 너는 지금처럼 의젓하고 다정한 황자로 변했다는 걸 계속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모두 제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황을 흠집 낸다는 리스크를 진 이상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황태자는 미심쩍은 부분을 머릿속으로 지워버렸다.
꼭 자신이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었기에.
* * *
“……말씀을 잘 나누셨습니까?”
제레미야가 황자궁으로 돌아오자 니콜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레미야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들어와, 참으로 얌전하게 소파에 앉았다.
그는 여전히 확신이라곤 없이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니콜라는.”
“네?”
“……왜 형님께 가도 방법이 없을 거라고 그랬어?”
“기사를 읽었으니까요, 세르히 백작님께서 헛소문이라고 치부해버리고 개의치 않으신다면 그 마음을 누가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제레미야는 한껏 울적해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희망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제레미야는 황태자에게 뛰쳐가기 전까지 정성을 다해 쓰던 자신의 편지를 보았다.
편지의 제일 첫머리인 ‘세르히 백작에게’ 이 한 구절을 쓰는 데도 30분이 걸렸다.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다.
예전의 그였다면 모두 헛수고가 되지 않았냐며 니콜라를 질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레미야는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니콜라는 지금까지 있던 시종들과는 다른걸.’
눈치 봐가며 잘해주는 척, 은근히 깔보던 쟈힘과는 달랐다.
니콜라에게도 이상하게 차가운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가 하는 말 자체에 거짓은 없었다.
게다가 다른 시종이었다면 황태자에게 가기 전 굳이 만류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짜증 낼 거란 걸 다들 알았을 테니까.’
시종들에게 짜증 부려가며 제멋대로 살았지만, 어떤 의미로 누구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그였기에 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나는…….”
니콜라는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하라거나, 제레미야에게 답을 내어주진 않았다.
그가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채근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봐 줄 뿐.
“……그래도 세르히 백작과 인연이 끊어지는 건 싫어.”
“그러십니까.”
니콜라에게서 어쩐지 딱하다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명백한 동정이었다.
그럼에도 제레미야는 그게 나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동정심 속에는 자신에 대한 걱정도 섞여 있단 걸 알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제레미야는 자신을 향해 확신하던 황태자의 시선을 기억했다.
‘나는 지금의 세르히 백작이 좋아.’
이젠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깍듯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토록 예의 바른 사람인데, 이상할 정도로 자신에게는 싫은 티를 냈다.
멍청해서 눈치채는 게 늦었을 뿐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무례하고 무시당했는데도 계속 그녀에게 말 붙이고 싶었다.
‘……내가 바보라는 건 아주 잘 알지만.’
자신이 좋아한 건 그런 그녀였다.
자신의 큰 형이 쥐여주려는 어딘가 꺾이고 부서져 자포자기한 안토니아가 아니었다.
“니콜라, 솔직하게 말해줘.”
“네. 그럼요.”
“……세르히 백작이 날 좋아하게 될 일은 영영 없겠지?”
니콜라는 그 말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까지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하고 좋은 방향으로 조언해주던 그였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고 한 건 나야, 니콜라. 넌, 너는 거짓말 하지 마.”
제레미야의 말에 니콜라는 가슴 한구석이 조금 찔리는 걸 느꼈다.
그러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백작님은……. 황자님도 아마 아셨을 테지만 굉장히 생각이 깊으신 분이니까요.”
“맞아, 나도, 나도 알았어.”
그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 죽도록 부정했을 뿐.
자신의 앞에서 안토니아가 몇 번이고 리카르도를 선택했음에도 아니라고 부정하고, 자신이 좋을 대로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처음으로 자신이 바랐는데 갖지 못하는 게 생기는 게 아닌가.
그게 지는 것 같았다. 고귀한 황자로서 손에 넣고 싶은 걸 넣으며 살아온 삶.
그게 제레미야가 유일하게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단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눈이 트였다.
그 폐광에서의 일 이후, 니콜라가 곁에서 지켜봐 줘서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이 바라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해서일까.
제레미야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형님도 나처럼 모르는 걸지도 몰라.’
세상엔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말이다.
제레미야는 남들과 비교하면 한참 어린 생각을 어떻게든 움직여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도 자신을 어릴 적부터 지켜봐 주던 황태자였다.
지금껏 그의 말은 믿고 따라야 할 대명제와 같았다.
근데 처음으로 황태자의 말에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가 안토니아를 망가트리는 건 싫었다.
리카르도를 괴롭히는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안토니아에겐 그러기 싫었다.
그 혼란스러움을 바라보며 니콜라는 조용히 속삭였다.
“황자님은 황태자님의 친동생이시고, 황실의 황자님이십니다.”
“……응?”
제레미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이런 답답한 상황을 겪었던 니콜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설명했다.
“그러니 황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황자님이 보시기에 황태자 전하와 세르히 백작님, 어느 분이 더 불안하십니까?”
제레미야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형님은 황태자 전하시니까!’
하지만 안토니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겨우 백작이지 않은가. 게다가 여자였다. 좀 강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레미야는 갑자기 어깨가 으쓱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곤 잔뜩 자신감에 찬 얼굴로 니콜라에게 말했다.
“레이디를 돕는 게 신사의 의무라고 배웠어!”
니콜라는 그 말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런 사람이기에 세르히 백작님은 황자님을 꺼리시는 거겠지.’
한껏 고민하고 생각해도 사람이 가진 껍데기에 끝내 구애받으니 말이다.
좀 딱하기도 하고 불쌍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니콜라는 일은 제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며 제레미야를 부추겼다.
“그렇지요, 황자님께서 배우신 대로 행동하면 모두 잘 풀릴 것입니다.”
거짓 한 점 없는 말이었다.
니콜라의 ‘잘 풀린다’는 어디까지나 안토니아와 관련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 * *
“어서 오너라, 안토니아!”
셀린 렘버트의 기사가 나가고 일주일 뒤.
안토니아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입궁했다.
황제는 아주 기분 좋은 미소로 안토니아를 맞이했다.
“이번에도 짐이 깜짝 놀랄 일을 준비했더구나, 너는.”
“과찬이십니다. 폐하, 그리고 기사에는 분명 제가 아니라 대공 전하께서 선물한 것이라 나온걸요.”
그 말에 황제는 크게 웃었다.
그는 잠시 안토니아의 곁에 따라온 사람처럼 얌전히 앉은 리카르도를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한 것을 저 녀석이 잠시 예쁜 형태로 낚아챈 것이겠지! 안 그러냐, 리카르도.”
황제의 물음에 리카르도는 당연하다는 듯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세르히 백작이 이미 공들인 것을 그녀를 위해 조금 손본 것뿐입니다.”
그 뿌듯한 얼굴에 황제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세르히 백작이 아니었다면 누가 루퍼스 크롬프트를 여기까지 이끌었겠느냐.”
황제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리 올려둔 서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눈앞에는 다름 아닌 지역별 이동마법진에 대한 계획안이 적혀 있었다.
“아주 획기적이야. 마물이 들끓을 때마다 기사들을 제때 보내지 못해 피해가 더 컸는데 말이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리카르도와 눈을 맞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마법진은 그저 예고일 뿐이었다.
황태자가 이리저리 흔들어보려 하는 이상, 황제가 이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안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염려가 많으셨답니다.”
“그렇지, 그럴 수밖에.”
“저 또한 폐하께서도 인정해주셨듯, 풀멘 소변경백으로서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고요.”
그는 기대가 된다는 듯 말했다.
“또 네가 짐을 놀라게 할 물건을 준비한 모양이로구나!”
“부디 기뻐해 주시면 좋겠어요, 이 이동마법진에 완성된 마물 출현 예측 장치를 함께 설치하려 하니까요.”
황제의 눈이 단번에 짙어졌다.
“마물 출현 예측 장치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폐하.”
되묻는 황제의 말에 안토니아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마냥 기분 좋게 웃던 황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물은 제국의 골칫거리나 다름없어. 폐하께서 즉위하던 무렵에도 마물로 인한 사건이 있었고.’
회귀 전 황실의 막내며느리였기에 그녀도 평범한 귀족들보다는 사정을 좀 더 알았다.
황제가 제 혈육들을 베어낼 수밖에 없던 것도 마물과 사정이 엮여 있었으니까.
‘그러니 완성되었단 사실 자체는 기쁘시겠지. 하지만.’
하필 그의 친아들인 황태자가 만드는 데 실패한 마법 도구였다.
그렇기에 황제는 드러내놓고 기뻐하기가 애매해진 것이다.
‘요즘 떠도는 소문, 그리고 리샤르의 특수한 위치 때문에.’
황제는 아들들처럼 바보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안토니아와 리카르도가 이 마물 출현 예측 장치를 발표했을 때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안토니아, 짐은 너를 꽤 예뻐한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장치는 이미 한 번 실패했다. 지금은 그저 짐만 들은 것이다. 그러니 무를 수 있다.”
황제는 단순히 경고하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한 번 실패한 물건을 또다시 들고나왔을 때는 확실히 성공해야만 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괜찮습니다.”
“안토니아.”
“게다가 이번 장치는 제 공이 아니에요.”
“뭐?”
당연히 안토니아가 주도했을 거라 생각한 황제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비록 풀멘 소변경백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전을 겪은 건 아니지요.”
안토니아는 따스한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도가 해낸 일이다 이 말이냐?”
“네, 폐하.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도움을 청하고 크롬프트 씨도 많이 힘써주셨어요.”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똑바로 폈다.
황제에게 믿음을 주려면 자신 또한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게다가 황태자 전하가 만든 것을 개량한 게 아니랍니다. 크롬프트 씨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제 의뢰를 받아 이 장치를 개발하고 있었어요.”
“정말이냐?”
“네, 연이 없었다고 해도 서북부에 영지를 가진 조부모님이 있었으니까요.”
황제는 조용히 리카르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토니아가 아니라, 그의 입으로 똑바로 말해 보라는 의미였다.
“폐하, 저 또한 세르히 백작과 생각이 같습니다. 이 장치는 꼭 공개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지금도 이미 곤란하지 않으냐?”
그 물음에 두 사람은 긍정하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심지 굳은 얼굴로 황제에게 말했다.
“이 일은 제국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제국민의 안정, 그렇게 거창한 것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리카르도는 조용히 황제와 시선을 마주했다.
“저는 5년 전 형님의 허락을 받아 서북부로 향했습니다. 같은 북부에 영지를 가진 대공으로서 피해를 줄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북부는, 솔직히 말해 심각했습니다. 풀멘 변경백이나 라테르 후작이 다스리는 곳은 차라리 낫습니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지난 5년간을 떠올리는 듯, 마음이 아픈 것처럼도 보이는 얼굴이었다.
“폐하께도 보고드렸지만, 서북부에는 마물로 인한 사상자 수가 적지 않습니다.”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 분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고작 열 살짜리 아이가 마물에게 상처를 입고 눈 감은 걸 봤습니다. 저는 그런 일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폐하.”
그의 목소리에서 절절함이 느껴졌다.
이 내용만큼은 안토니아와 상의한 게 아니었다.
그의 진심이었다. 서북부에서 겪은 것들은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리카르도는 황제와 시선을 마주했다.
황제 앞에서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해 이토록 감정을 드러내 보인 건 처음이었다.
“고작 제 조그마한 곤란을 어떻게 그 많은 영지민들의 목숨과 견주겠습니까.”
“…….”
잠시 조용해졌다.
십수 초가 흘렀을까, 황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리카르도.”
황제 또한 생각을 정리하듯 팔걸이에 기댄 손을 까딱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짐 또한 다른 무엇보다 제국의 황제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되겠지.”
“감사합니다. 폐하.”
리카르도와 안토니아의 감사 인사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정말로 좋다, 아주 좋아.”
황제는 그렇게 말하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얕게 한숨 섞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쓸모없는 일에 휘둘리지 않고 앞을 바라보니, 아주, 아주 좋구나.”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어깨가 평소보다 고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문득 생각난 듯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정말로 괜찮으냐?”
목적어는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그 소문’에 관한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사소한 질문 하나로도 황제와 리카르도 모두 정말로 무결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뭔가 찝찝한 게 있다면 절대 할 수 없을 말이니까.’
그럼에도 황제가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건 아직까지는 사교계 풍문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아는 태연한 얼굴로 황제에게 답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안토니아의 첫 마디에 황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신경 써서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는 일이 아닌 데다, 당장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굳이 심력을 소모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대범한 발언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타격이 올 법한 소문을 당장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니까.
황제는 그 말에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 말하니 다행이구나. 짐은 이대로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구나.”
안토니아는 그 말에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 * *
두 사람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뒤 밖으로 나왔다.
안토니아는 리카르도의 에스코트를 받아 황제궁을 나서며 황제의 말을 떠올렸다.
황태자가 이 이상 나가지 않길 바라는 감정이 절절히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폐하께서도 아버지신 거겠지.’
게다가 황제는 이미 눈을 감은 황후에게 부채감도 느끼고 있었다.
황제가 뭔가 나쁜 일을 한 게 아니다.
겨우 11세에 어머니를 잃은 자식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건 인간적으로 당연한 감정이었으니까.
‘무척 유순한 분이었다고 했었으니까.’
아니, 유순하다는 건 어떻게 보면 남은 사람들이 마음 편하고자 한 소리일 수도 있었다.
회귀 전, 아마도 황후의 기일 무렵.
황제가 지나가듯 이야기한 말이 있었다.
‘마음 편하게 지내면 그걸로 족했는데, 황후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앉힌 게 짐의 잘못이었을까.’
그래서 안토니아는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황태자가 낸 트라체스 선황후와 황제 사이의 염문설을 믿지 않았다.
그 회한 가득한 말은 애정없는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니까.’
황제에게는 의연한 듯 이야기했지만, 당연히 안토니아는 이 소문을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
사교계에서만 도는 소문으로 그치면 이스베르가와 리카르도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으면 해명할 기회조차 없는데.
‘이스베르가 님은 정말로 개의치 않으시는 것 같긴 했지만.’
생일날, 안토니아는 초대한 손님들을 모두 배웅한 뒤 이스베르가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이스베르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인데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게다가 네가 한 것도 아니잖니.’
냉소적인 말에 오히려 안토니아가 깜짝 놀라자 이스베르가는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모든 어머니가 다 애틋하고 좋은 건 아니란다.’
‘이스베르가 님…….’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 들려주고 싶진 않지만 말이야, 하지만 나도 울피나를 낳은 엄마가 돼서일까.’
이스베르가는 안토니아에게 심각한 표정 지을 필요 없다는 듯 뺨을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그냥 좀 의아할 뿐이야, 어머니는 왜 그렇게 구신 건지. 날 믿은 건지, 그도 아니면 그게 최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트라체스 선황후가 죽었을 때, 이스베르가는 열일곱, 리카르도는 열 살이었다.
‘이스베르가 님이 고생했던 건 알아.’
데뷔탕트를 코앞에 두었던 황제의 이복동생.
커다란 버팀목을 잃은 열일곱의 소녀는 자신과 남동생을 모두 지키고자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황실에 대해 자세히 알아둘 걸 그랬어.’
전 막내황자비는 당장 철없는 남의 편을 거두고 영지를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 쉽진 않았겠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안토니아가 한참 조용하다 한숨을 내뱉자, 그제야 리카르도가 물었다.
잠깐 망나니던 제레미야의 과거를 떠올려서일까, 급작스레 리카르도가 예뻐 보였다.
“사교계에만 도는 소문을 어떻게 제대로 엿 먹일까, 하는 생각?”
“폐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으면서?”
“그게 폐하께서 듣고 싶은 말이었을 테니까.”
“역시 안토니아는 똑똑해.”
약았다가 아니라 똑똑하다고 말하는 게 괜히 기분 좋았다.
누가 봐도 약아빠진 행동이었는데.
걸리는 건 많았으나 황제에게 이동마법역사 설치도 허락받았고 곁에 있는 게 리카르도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리카르도와 손을 마주 잡으려던 차.
“세, 세르히 백작, 그리고 숙부님!”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도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이상하리만큼 결연한 얼굴로 말이다.
‘뭐, 미리 니콜라에게 연락을 받긴 했지만.’
안토니아의 앞에서 흐물흐물한 얼굴이었던 리카르도는 대번에 딱딱하고 위엄있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막내 조카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토니아는 제레미야의 뒤에 있던 니콜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니콜라의 시선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세르히 백작님의 뜻대로 진행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