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제레미야는 죽을 맛이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무릎을 꿇고서 수 분이나 견디라니, 그로서는 1초 1초가 고통스럽기만 했다.
그는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자신의 형, 세르미아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제레미야, 진중하게 굴어야지.”
“네, 넵!”
귀신같이 알아차린 세르미아를 보며 제레미야는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주신께 기도를 드리는 자리이니, 정성을 다해야 한다. 너는 간절히 바라는 게 있지 않으냐.”
“네……. 알고 있습니다.”
제레미야는 그의 말에 꼬리를 말고서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지난 며칠간, 세르미아는 마치 제레미야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한계를 시험하듯 몰아붙였다.
덕분에 제레미야는 검술과 체술, 댄스 등을 익혀야 했고 머리에 쥐 나도록 책을 보고 세르미아가 보낸 교사들과 공부해야만 했다.
조금만 딴짓을 할라치면 교사들은 으름장을 놓았다.
‘황자님께선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저희는 그저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황자님께 정해진 교육만 하면 되니까요.’
치사한 것들.
목구멍까지 그 말이 올라왔으나 제레미야는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3개월간 근신을 명한 이상 자신의 운신 폭을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황태자 세르미아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제레미야는 황태자에 대해 다시 한번 존경의 마음을 품었다.
황자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자신이 이곳, 중앙 신전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평소라면 오길 질색하는 신전이었으나 매일같이 황자궁 내의 실내에만 갇혀 지내다 보니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정원에 나가는 것조차 제레미야는 허락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고 이 차가운 돌바닥과 불편한 자세로 수 분을 버티는 건 제레미야로서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시 한번 슬그머니 실눈이라도 떠 세르미아의 상태를 보려 할 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제레미야는 화들짝 놀라 손을 모으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만하면 주신께서도 정성을 아셨을 겁니다.”
살짝 쉰 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다소 병색이 느껴졌으나, 위엄은 있었다.
제레미야는 마치 황제를 상대할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어 몸이 쭈뼛거렸다.
황태자 세르미아는 그 목소리가 들린 뒤, 수 초가량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교황 성하.”
“황태자 전하의 정성은 신전 모두가 알 것입니다.”
그 말에 세르미아는 빙그레 웃으며 교황에게 다가갔다.
황실 무도회 이후, 병을 핑계로 어지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염려했다.
‘그간 들인 정성이 얼마인데, 벌써 눈을 감으면 곤란하지.’
다행히도 며칠 전, 교황의 상태가 호전되었단 이야기를 들어 세르미아는 재빨리 오늘 신전을 방문한 것이었다.
“요 몇 달, 성하의 모습을 보기 어려워 염려하였습니다. 이제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예에, 주신께서 아직은 저를 거둬 가지 않으실 모양입니다.”
교황은 잔잔한 미소로 주신상을 향해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아직 이 노구도 쓰임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하하, 몇 달을 병석에 있다 보니 마음이 약해진 모양입니다. 또, 교황으로서 주신의 곁에 불려 가는 것은 큰 영광이기도 하고요.”
황태자는 그 이야기에 속으로 비웃었다.
속에 품은 야욕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황태자는 당연히 모르는 척하며 신실한 얼굴로 교황에게 말했다.
“성하께서 제국민을 위해 많이 염려하고 기도하시니 그런가 봅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교황은 성직자 특유의 자애로운 미소를 보였다.
“그런데 이런 성하의 정성을 알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없으니 안타까울 수밖에요.”
황태자의 말에 교황이 그저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그의 말대로 나날이 신전의 권위는 약해져 가는 추세였으니까.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면서 매해 기부금도, 신전의 행사 규모도, 그들의 영향력도 모두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즉위 초반에는 흉년과 한파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었으나 한번 줄어든 게 돌아올 일은 없었다.
황실이 그렇게 나오자, 귀족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발을 뺐다.
항의하고 싶은 마음은 크나, 신전 또한 오래전 ‘그 사건’을 아는 황실에는 강하게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교황은 이대로 웅크리고 지낼 생각은 없었다.
십여 년 전, 그가 받은 계시가 있었으니까.
‘신의 사도께서 오시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그것 하나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약속한 때에 다다랐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게 의문일 뿐.
황태자는 씁쓸한 교황의 얼굴을 보며 진중하게 이야기했다.
“올해는 예년보다 황태자 궁과 오르테가 후작가의 기부금을 늘릴 생각입니다.”
교황이 무슨 생각이냐는 듯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저라도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리도 감사할 데가.”
“게다가 제레미야가 올해 큰일을 당할 뻔했지요, 생각해 보니 제레미야가 신전을 자주 찾지 않아 그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주신께서는…….”
“물론 압니다. 주신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걸요.”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며 드디어 제레미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래 꿇어앉아 있던 제레미야는 그 손을 붙잡고서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후들거리고 쥐가 나 죽을 지경이었으나, 제레미야는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며 나름대로 진지한 얼굴을 했다.
“아직 저희 막내가 어리긴 하나 황족, 주신께서는 황실을 통해 얼핏 경고해 주신 게 아니겠습니까.”
교황과 황태자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신께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걸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백작가 이상의 귀족들 또한 제국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성하.”
세르미아는 안토니아가 수도에 올라온 뒤 중앙 신전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5년 전, 안토니아가 동부 대신관을 고발했다는 것도 알아냈다.
“전하의 말씀은…….”
“주신의 은혜를 가벼이 여기고 신전을 무시하는 자들을 제국민들이 괜찮다고 본다면 앞으로 다들 신전을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세르미아의 말에 교황의 눈이 잠시 음흉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성하. 신전은 주신의 뜻을 전하는 곳인데요.”
황태자의 말에 교황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는 조용히 손을 모으고서 주신을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주신을 제대로 모시지 않는 자는 그자를 이끌 제대로 된 사람과 맺어 줘야 하는 법이지요.”
그 말에 세르미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건 오로지 멍청한 제레미야뿐이었다.
‘형님은 교황에게 부탁해서 약혼을 못 하게 한다더니, 그 말씀은 언제 하실 생각이지?’
제레미야는 다리가 아프고 저려 신발 속에서 발가락만 꼼지락거리며 불만스러워했다.
* * *
[신전, 트라체스 대공과 세르히 백작의 약혼 허가를 보류!
-황실의 약혼이니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밝혀…….]
예상한 대로 황제의 약혼 허가는 쉽게 떨어졌으나, 신전은 거부를 하고 나섰다.
물론 귀족 대부분은 혀를 차며 안토니아를 동정했다.
‘신전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고 성의가 없다고 그랬다면서요?’
‘그저 꼬투리를 잡는 것뿐이지요. 세르히 백작이 수도에 와서 얼마나 바빴어요.’
‘기부금을 꼬박꼬박 내지 않은 것도 아니던데 말이에요! 신전은 아직도 옛날인 줄 아나 봐요.’
‘세르히 백작만 안 되었지요, 백작도 참 운이 없어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리도 난관에 부딪치니.’
다행스럽게도 수도 내 여론은 안토니아의 편이었다.
솔직히 말해 신전의 부패함은 평민들보다도 귀족들이 더 잘 알았으니까.
게다가…….
‘황태자 전하께서 기부금을 1만 골드나 내겠다고 하셨다지요?’
‘매년 황제 폐하께서 황실의 이름으로 5천 골드만 내셔서 저희도 부담이 많이 줄었는데.’
‘오르테가 후작가도 8천 골드를 냈다잖아요. 당장 저희도 걱정이에요.’
대놓고 말하지는 못해도 황태자의 거액 기부금은 귀족들에게 좋은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솔직히 똑같은 돈을 쓴다면 신전을 통해 영지민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자신들의 이름으로 직접 베푸는 쪽이 더 효과적이었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말해 정기 기도를 챙기는 귀족도 드물었고 말이다.
당연히 안토니아 입장에서도 지금 상황은 조금은 곤란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 황태자는 제레미야랑 날 어떻게든 엮으려고 들걸?’
근신을 명받은 제레미야가 요즘 정말로 침착하게 지낸다는 이야기만 해도 그랬다.
게다가 루퍼스의 말에 따르면 라테르 후작가와 리카르도의 뒷조사를 요즘 들어 더 열심히 한다니.
‘한마디로 이쪽의 힘을 어떻게든 허물겠다는 뜻이지.’
안토니아는 마차에서 내려 오랜만에 보는 커다란 건물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앙 신전, 회귀 전에도 몇 번 오지 않은 곳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귀 전에는 황태자와 신전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으니까.
‘내가 제레미야를 선택한 걸 두고서 황태자는 주신께서는 신전을 버렸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권한을 더 축소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들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고 나서다니, 권력욕은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뭐, 그렇다고 안토니아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가호를 밝히기 싫어서 기부금만이라도 꼬박꼬박 내준 거였는데, 그걸 그렇게 이용한다면.’
이쪽에서도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현 교황의 명분을 깡그리 없애기 위해서 말이다.
‘에밀리오?’
‘그래, 황실 무도회 때 교황을 대신해 온 신관의 이름이야.’
황실 무도회 이후, 루퍼스는 꾸준히 노웸 신관에 대해 조사했다.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으나 그래도 루퍼스는 루퍼스였다.
그는 훌륭하게도 에밀리오 노웸의 출신지며 어떻게 신관이 되었는지 상세하게 알아 왔다.
보통은 수석 신관의 본래 이름조차도 알기 어려웠으니까.
‘미안하게도 그의 속내까지 조사할 순 없었지만.’
‘아니, 이걸로 충분해.’
루퍼스가 조사한 에밀리오의 행적을 모두 살펴본 안토니아는 오히려 머릿속을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원래 이름 덕에 간신히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에밀리오 노웸 신관. 주신의 아홉 번째 수석 신관.
그리고 원래 이름은 에밀리오 펜나.
회귀 전, 동부 대신관에 의해 희생당했던 중앙의 상급 신관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직접 중앙 신전을 찾았다.
그리고…….
그리고…….
“어서 오십시오, 세르히 백작님.”
그는 마치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맞이했다.
“백작님께서 저를 찾아오실 거라 지난밤 꿈이 그토록 아름다웠나 봅니다.”
허니블론드를 가진 미인은 꽃같이 아름다운 미소로 이야기했다.
* * *
안토니아가 중앙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하급 신관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노웸 수석 신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작님.”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잠자코 어린 하급 신관을 따라나섰다.
전 신전을 통틀어 수석 신관은 열둘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기다란 복도를 따라 널찍하게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수석 신관의 방은 응접실 대신 개인 기도실과 그들의 생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며 하급 신관은 어쩐지 들뜬 얼굴로 이야기했다.
“수석 신관님이 이렇게 따로 다른 분을 부르신 건 처음이에요.”
“그렇군요.”
“노웸 신관님은 아직 젊으시지만 무척 다정하고 좋으신 분이랍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노웸 신관의 지시를 받은 게 처음인 모양이었다.
하급 신관은 신어로 ‘9’라는 숫자가 적힌 에밀리오의 방 앞까지 안내한 뒤 에밀리오에게 고했다.
“노웸 신관님, 세르히 백작님을 모셔왔어요.”
이윽고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미인이 나왔다.
“수고했어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테니 이제 개인 시간을 보내도 좋아요.”
“앗, 네. 알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하급 신관의 얼굴에 은근한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미인은 더 반박 못 할 미소로 하급 신관을 돌려보냈다.
“이리 들어오시지요.”
이래저래 안토니아는 그 말에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다름 아닌 신전이었으니까.
회귀 전부터 신전과 얽혀서 좋은 기억이라곤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에밀리오의 첫 말은 안토니아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백작님께서 저를 찾아오실 거라 지난밤 꿈이 그토록 아름다웠나 봅니다.”
“……네?”
“무척 고대했답니다.”
에밀리오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에게 찬찬히 설명하겠다는 듯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곧 그는 청량감이 감도는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수석신관씩이나 되는 자이니 하급 신관을 얼마든지 부릴 수 있을 텐데-적어도 안토니아가 지금껏 본 지위 있는 신관들은 그랬다-그는 이런 게 매우 익숙해 보였다.
찻잎을 우려내고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다소 심심한 맛의 비스킷을 내어 주었다.
“사도님의 입에는 맞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만, 신관 된 자로서 과한 것을 지닐 수 없으니 부디 양해해 주시겠어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겸연쩍은 듯 비스킷을 슬쩍 부러트려 입에 물었다.
겉보기와 똑같이 심심한 맛이었으나 나쁘지 않았다.
“제가 따로 돌보는 아이들이 직접 만든 것이지요. 나쁘진 않지요?”
“그러네요.”
곧 에밀리오는 두 잔의 투명한 차를 내었다.
차에서 맑고 깨끗한 향이 느껴져서 안토니아는 감탄했다.
“입에는 맞으시나요, 사도님.”
“……네, 좋네요. 그보다.”
안토니아는 에밀리오와 시선을 마주했다.
짙은 남색 눈이 한없이 깨끗해 보였다.
어딘가 꾸미려는 기색 없는 눈웃음에 안토니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힘이 풀어졌다.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어쩐지 에밀리오에게는 그런 장벽을 허무는 힘이 있었다.
‘그래도 물을 건 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껏 교황이 신전을 비운 날을 굳이 골라 중앙 신전을 방문한 보람이 없으니까.
“어째서 절 사도님이라고 부르시는 건가요, 노웸 신관님.”
“사도님은 이미 답을 알고 계실 거예요.”
직선적으로 물어본 질문에 에밀리오 또한 직선적으로 답했다.
“6년을 넘게 이날만을 고대했답니다.”
“…….”
“너무 그리 긴장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에밀리오는 그렇게 말하곤 눈을 휘며 천사 같은 미소를 보였다.
“사도님을 돕고 싶을 뿐이에요. 이전에는 도움 한 톨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순간적으로 호흡이 확 끊어지는 듯했다.
그의 말은 정말로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신전이니까.’
자신이 회귀하여 이전 삶을 모두 기억하듯 그런 사람이 또 있다 하더라도 정말 이상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에밀리오는 작은 웃음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꿈으로 보았을 뿐이지만요.”
“……꿈이요?”
“6년 전, 어느 가을날 긴 꿈을 꾸었지요.”
그 말에 안토니아는 자신이 눈을 떴던 날 아침을 떠올렸다.
생각지도 못해 손도 쓰지 못하고 제레미야에게 목을 졸려 죽어 눈을 뜬 다음 날 아침의 기억을.
그날 또한 가을이었다.
“제 의지는 아니었지만 사도님의 삶을 감히 엿보았으니, 부디 용서해 주시겠어요?”
“용서할 것도 아니지요, 꿈이 멋대로 보여 준 거라면요.”
“너그러운 분이라 다행이에요.”
“……그렇다면 제가 왜 다시 삶을 살게 된 것인지도 신관님은 아시나요?”
에밀리오는 그 말에 바른 자세로 고개를 저었다.
“다만 사도님께서 이전 삶에서 이루지 못한 게 있기 때문이지 않겠어요.”
에밀리오의 말에 안토니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전 삶에서 자신이 이룬 게 뭐가 있는가.
그저 하루하루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그런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안토니아는 머리를 정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먼저 접근한 이 신관에게 무슨 의도가 있는지 알아야 했다.
“신관님은 그런 이야길 숨기실 수 있었어요, 왜 먼저 말씀하신 거지요?”
“말씀드렸듯 사도님을 돕고 싶기 때문이에요.”
허니블론드 머리칼에 고운 남색 눈을 가진 미인은 정말로 순수함 그 자체로 무장하고서 말했다.
겉모습만 보면 거짓이라고 절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겉모습과 느낌만으로 그를 믿을 만큼 자신의 삶이 평화롭진 않았다.
“죄송하지만 그걸로는 답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신을 모시는 자로서 사도님을 중히 여기는 것은 제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에밀리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시종 예쁜 미소만 서렸던 그의 얼굴에 약한 불만이 섞였다.
“사도님께서 지금껏 겪은 자들이 불경하였으니, 그 마음은 이해가 가네요. 그렇다면…….”
에밀리오는 별로 원치는 않는다는 얼굴로 찬찬히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의 교황 성하를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네?”
“정확히는 싫어한다고 말해야겠네요. 주신의 뜻을 왜곡하고 자신을 위해 읊는 자를 어찌 좋아할까요. 그래서.”
에밀리오는 빙그레 웃으며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사도님과 황실 무도회에서 마주칠 것 같아 제가 조금 힘을 썼지요.”
“……네?”
“교황 성하가 여러 달 자리보전했던 것이 저 때문이라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는 참으로 태연한 얼굴로 대담한 이야기를 읊었다.
안토니아조차도 또 당황할 정도로 말이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에밀리오에게 다시 물었다.
“신관님께서는 본인에게 불리할 만한 이야기를 어째서 제게 쉽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야 사도님께서 제게 신뢰를 주실 테니까요.”
“……제가 이 이야기를 모두 녹음하여 교황 성하께 들려드릴 수도 있다곤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에밀리오는 그 말에도 그저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사도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셔도 괜찮답니다. 주신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셨으니까요.”
“…….”
“다만 한편으로는 사도님께서 그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당신께서 교황 성하를 꺼려 하지 않으신다면, 수도에 올라온 뒤 신전을 그토록 멀리하셨을 리가 없으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안토니아는 교황도 신전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황실만큼이나.
에밀리오는 식어 버린 차를 다시 우려 내어 주며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사도님께서는 교황 성하에게도 황실에도 아직은 당신의 힘을 알리고 싶지 않으신 것 아닌가요?”
하도 의외의 말들이 쏟아져서일까, 안토니아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에밀리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저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사도님을 도울 수 있어요. 부디, 사도님을 돕도록 해 주시겠어요?”
그 말에 안토니아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에밀리오는 이해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도님께서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지요. 제가 먼저 사도님에게 도움이 되는 자라는 걸 증명하는 게 먼저일 테고요.”
에밀리오는 그렇게 말하며 투명한 크리스탈로 만든 묵주를 건넸다.
“이 묵주를 끼고 계신 동안에는 사도님의 힘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그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말투로 부디 받아 달라는 듯 말했다.
안토니아는 잠깐 묵주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하면 금방이라도 그 고운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노웸 신관님. 다만, 신관님께서는 제게 바라는 게 없으신가요?”
차라리 거래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말했다.
그런데 에밀리오는.
“물론 있어요.”
“무엇인가요?”
“사도님을 곁에서 돕는 게 제 바람이에요, 다만……. 사도님께서는 납득하지 못하시겠지요. 그러니.”
에밀리오는 어떤 의미로 참 대단했다.
그는 거절하지 못하도록 따스한 얼굴로 안토니아에게 속삭였다.
“제가 교황 성하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앉고 싶다 생각하셔도 괜찮답니다.”
에밀리오의 말에 솔직히 안토니아는 안도했다.
그쪽이 더 납득이 갔으니까. 게다가 교황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건 안토니아로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마음 편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알겠어요, 노웸 신관님. 절 도우신다면 저도 신관님이 바라는 걸 도울게요.”
그저 마음에 걸리는 건, 안토니아의 수락에 예쁜 얼굴이 조금 착잡해졌다는 것 정도였다.
* * *
하급 신관을 따라 긴 복도를 걸었다.
다시 신전의 입구를 보았을 때, 안토니아는 비로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감이 없어.’
그러나 안토니아에게는 약간의 몽상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입구로 나오자마자.
“세르히 백작, 이것 참 우연이로군.”
제레미야의 얼굴이 있었으니까.
다만, 좀 다른 게 있다면.
“황자님께서도 신전에 기원을 드리러 오신 건가요?”
이 만남은 안토니아가 허용한 거라는 걸까.
‘괜히 제레미야가 칭얼거리는 걸 무시했다간 기껏 시종 노릇 하는 그만 고생일 테니까.’
그녀는 제레미야의 곁에 있는 시종과 잠시 눈을 마주했다, 다시 눈을 돌렸다.
“그래, 지난번 일도 있고……. 나도 이제 좀 의젓해지려고 한다네, 그러니 백작, 다시, 다시 한번 내게 기회를 주지 않겠는가.”
안토니아는 그 말에 최선을 다해 평범한 시선으로 제레미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간절한 희망이 보였다.
마치 회귀 전 10년 동안 꾸준히 그에게 기대했던 자신처럼 말이다.
‘난 너무 매너 있게 굴었어.’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그저 단칼에 잘라 어디론가 치워 버리는 건 제레미야 안세르 솔리스에게는 너무 너그러운 처사였다.
그가 자신이 준 너그러운 기회를 몇 번이고 걷어찼으니, 이제는 안토니아 또한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도 깨달았으니까.
과거와 달리, 지금 아쉬운 건 자신이 아니라 제레미야라는 걸 말이다.
“아, 그러시군요. 하지만 제가 굳이 황자님께 기회를 드려야 할까요? 트라체스 대공 전하가 훨씬 멋지신데요.”
“하지만, 하지만 숙부님보다 분명 나도 나은 점이…….”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대공 전하가 황자님보다 못한 거, 없는 것 같은데요.”
자신이 아무리 그에게 야멸차게 굴어도 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키도 훨씬 크시고, 단련도 하신 데다 책도 훨씬 많이 보셨을 테고, 게다가 황자님은 제 뒤에 숨으셨지만 그분은 저를 지켜 주셨죠.”
“어, 어……. 하, 하지만…….”
제레미야는 화를 내고 싶어 죽을 지경으로 보였지만, 어떻게든 간신히 참는 것처럼 보였다.
안토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줄줄 말을 내뱉었다.
“그나마 황자님이 그분보다 좀 어리다는 것 정도가 장점이 될까요? 다만 아쉽게도.”
안토니아는 몸을 돌리며 제레미야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연하는 관심이 없답니다. 하도 철이 없고 이기적인 데다 사람을 방패막이로 삼는다는 걸 잘 알게 되었거든요.”
안토니아는 앞으로 제레미야가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마음을 잘근잘근 밟아 놓을 생각이었다.
그에게 선사할 복수 중 애피타이저에 불과했지만.
“지금 그 이야기는, 나를-!”
“아, 지금 혹시 저한테 소리 지르시려는 건가요?”
“어, 어?”
“대공 전하는 절 대할 때 늘 다정하게 대하시는데.”
안토니아의 말에 제레미야가 입을 확 다물었다.
슬쩍 그를 보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글거리는 게 보였다.
“고귀하신 황자님이라 정숙 같은 말은 아셔도 다정이나 배려 같은 말은 모르시나 봐요.”
제레미야의 입이 몇 번이고 어물거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있으나, 차마 쏟아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제레미야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제가 당신을 기다리게 했나 봅니다. 안토니아.”
“리카르도.”
타이밍 좋게 리카르도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에게 다가와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어, 지, 지금. 숙부님을 이, 이름으로……?”
제레미야는 제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굴렸다.
“그게 이상한가, 조카님?”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누군가가 어깃장만 놓지 않았더라도 이미 약혼 준비에 나섰을 사이야.”
리카르도는 제레미야를 향해 하찮은 버러지를 보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그런 사이에 서로 작위명으로 칭하는 게 더 이상하지.”
“그, 그래도 숙부님은 대공이시고, 세르히 백작은 백작인데……!”
제레미야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외쳤으나, 리카르도는 그 말을 뚝 잘라 무시했다.
“이런, 제 아가씨께서 피곤한 것 같은데 제가 눈치를 못 챘습니다.”
“아니에요, 리카르도.”
“아니긴요, 아직 ‘폐광에서의 상처’가 완전히 나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 말을 무시한다며 항의하려던 제레미야는 ‘폐광에서의 상처’란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리카르도는 안토니아를 안아 올렸다.
“앗, 괜찮아요, 걸을 수-.”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절 편히 이용하시기만 하면 되니까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조금 쑥스러운 듯 그 품에 고개를 가만히 기댔다.
“……말도 안 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레미야는 평소 리카르도의 찬바람 불던 행동을 떠올리며, 현실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토니아에 이어 리카르도까지 그에게 연타로 충격을 주어서일까.
그는 두 사람이 마차 문을 닫고서 출발시킨 뒤에야 자신이 제대로 무시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감히, 감히 나한테 간다는 말도 없이……!”
그러나 제레미야는 거기서 더 언성을 높이진 못했다.
‘고귀하신 황자님이라 정숙 같은 말은 아셔도 다정이나 배려 같은 말은 모르시나 봐요.’
안토니아가 제게 남긴 말, 그리고 그 오만하고 자신을 늘 아랫사람 취급하며 무시하던 리카르도의 태도.
아무리 멍청한 제레미야라 해도 자신과 리카르도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제레미야는 조용히 제 곁을 지키던 시종에게 물었다.
“나, 나도……. 세르히 백작이 칭찬할 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 말에 시종, 니콜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말했다.
“그럼 우선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오늘도 잘 참으셨어요, 대공 전하께서 오기 전에는 백작님께서 그래도 좀 대화해 주셨지 않습니까.”
“저, 정말……?”
“백작님께서 본인은 어떤 사람이 좋은지까지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니콜라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던 제레미야는 곧 수긍했다.
“맞아……. 숙부님만 오지 않았어도 좀 더……. 좀 더 세르히 백작이 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을 텐데!”
“그렇습니다. 자아, 아직 근신 기간이니 너무 오래 궁을 비우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곧 새해지 않습니까. 그때 새로운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겁니다.”
“응, 네 말대로 할게, 니콜라!”
니콜라는 그 말에 속으로 비웃으며 제레미야를 위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몇 해 전, 안토니아에게 은혜를 입었으며 황태자에게는 원한이 있는 자였다.
* * *
‘좀 사근사근하게 굴면 내가 이러겠어?’
‘뭐야, 그 어정쩡한 말투는. 여자가 요염하게 말도 좀 할 줄 알아야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소름이 다 돋는군! 당신에게 그런 말투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과거 제레미야가 자신을 향해 쏟아 내던 말들이 떠올랐다.
회귀 전 자신은 제레미야에게 희망을 가지곤 있었다.
비록 정략결혼이라고는 하나, 앞으로 오래 지낼 사람이니 부부로서 존중하며 살길 바랐다.
자신의 부모님처럼 서로 애틋하진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무턱대고 그가 바라는 모습을 흉내 냈다.
그러나 그는 늘 꼬투리 잡기 바빴다.
어제는 좋다고 해 놓고 다음 날이 되면 이상하게 불쾌해하곤 했다.
‘아마 쟈힘이 뭔가 이간질을 했던 것 같지만.’
안토니아가 그런 사정을 봐줄 이유는 없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고, 오늘 무너지던 제레미야의 얼굴을 보니 조금쯤 기분이 시원해졌다.
물론 이걸로는 한참 모자랐지만 말이다.
안토니아가 창가에 기대 생각에 빠져 있자, 리카르도는 자신을 봐 달라는 듯 손끝을 두드리며 말했다.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어?”
“아니, 딱 좋은 때 왔어.”
“정말로?”
그의 얼굴에 걱정이 섞여 있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불만이 드러난 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리샤르는 내 표정이나 기분을 잘도 알아차리네.’
저택 내에서도 폴리나 로레나, 마틴이나 고작 알아보는 차이였는데.
새삼 리카르도가 자신을 얼마나 보는지 알 것 같아, 안토니아는 기분을 털어 내며 말했다.
“응. 황자님을 제대로 괴롭힐 수 있었잖아. 조금 더 늦었으면 귀찮았겠지만.”
안토니아가 잘했다는 듯 리카르도의 뺨을 쓰다듬자, 그는 자연스레 그 손에 기대 왔다.
‘버릇이 되겠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거나 하진 않았으나, 안토니아에게 일정 이상 다가오진 않았다.
그 나름대로의 매너였다.
다만 안토니아가 그에게 먼저 손을 대면 절대 빼는 법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모자라다는 듯 굴었지.
당장, 오늘 제레미야 앞에서 안토니아를 안아 올린 것도 반쯤은 그의 욕심일 터였다.
솔직히 말해 안토니아도 싫은 건 아니었고 말이다.
“그보다 오늘 황궁 일은 괜찮았어?”
리카르도는 그 말에 어정쩡한 얼굴을 했다.
“큰조카님이 믿을 구석 없이 신전을 이용한 건 아닌가 보더라고.”
“그래? 뭔데?”
안토니아는 물으면서도 한 가지 예측하고 있는 게 있었다.
회귀 전, 이맘때쯤 황태자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해낸 것이 있었으니까.
“제국에는 큰 골칫거리가 몇 가지 있지. 그중 하나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마물이고 말이야.”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그저 궁금한 듯 리카르도를 향해 말했다.
“서부와 북부가 특히 심한 편이지, 그래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영지를 어지간해선 떠나지 못했던 거고.”
“그래. 전하께서는 마물 출현 예측 장치를 완성시킨 모양이야.”
회귀 전에는 황태자가 신전의 힘을 누르고자 만들었던 장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걸 교황 성하의 도움을 받았단 식으로 말씀하시겠는걸?”
“맞아. 역시 안토니아야. 다만 큰조카님이 그렇게 나오면 우리 약혼을 이야기하기는 좀 더 껄끄러워지겠지.”
“괜찮아.”
“괜찮아?”
리카르도는 과장되게 서운한 얼굴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만큼 제 취향은 아니어도 볼수록 예쁜 구석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안토니아는 좀 얄미워서 그의 뺨을 꽉 눌렀다.
“어릴 때부터 넌 꼭 이러더라.”
“그러면 안토니아가 날 더 잘 봐 주잖아.”
그는 안토니아에게 슬금슬금 더 붙어 오며 물었다.
“내 아가씨, 그래서 왜 괜찮은지 말해 줄 수 있을까요? 크롬프트 상단주는 내게는 말해 준 게 없는데.”
안토니아는 그 말에는 일부러 답하지 않았다.
루퍼스가 알려준 게 아니라 회귀 전 기억 때문에 아는 거였으니까.
“전하가 만든 장치는 실패작이야.”
“……정말?”
“응.”
“그럼 폐하께서 조만간 언짢아지시겠는데.”
리카르도의 말에 안토니아는 괜찮다는 듯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괜찮아, 리샤르가 폐하의 기분을 좋게 해 드릴 수 있을 거니까.”
“……내가?”
“응.”
안토니아는 자신만만했다.
회귀 전, 황태자의 불완전한 예측 장치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뚜렷했기에 이 일만큼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리카르도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것도 회귀 전 이 무렵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형님의 공을 가로채다니! 숙부님은 못된 사람이야!’
제레미야가 길길이 날뛰며 저주를 퍼붓던 게 눈앞에 선연했다.
그때, 리카르도가 마물 출현 예측 장치를 만들어 낸 건 다름 아니라, 그가 북부의 마물들을 토벌한 뒤였다.
하지만 지금 리카르도에게는 이미 그 경험이 있지 않은가.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확신에 부드럽게 웃으며 안토니아의 양 손등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내 아가씨가 그렇다면 그 기대에 난 꼭 부응할 거야.”
오늘도 맹수는 고양이의 탈을 쓰고 귀여움을 떨었다.
* * *
‘그보다 나는 이제 신전을 어떻게 움직일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데.’
리카르도가 황태자의 뒤통수를 때려 줄 테니, 제게 남은 과제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안토니아가 생각에 빠진 사이, 마차는 라테르 후작저 앞에 멈춰 섰다.
칭 밖을 보며 그녀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후작저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께도 죄송하고. 슬슬 백작저로 돌아갈까.”
“두 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야.”
“그래도. 이래저래 시끄러운 자들이 후작저에 한 번씩 오잖아?”
“두 분께는 흔한 날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이니 그런 생각하지 마. 분명 널 위해서 뭔가 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실 테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으로 그저 씁쓸해했다.
여전히 할머니와는 마주친 적이 없었고, 할아버지는 늘 자신을 유리공예품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대하곤 했으니까.
자신도 애써 정 많은 손녀처럼 굴고 있긴 했으나, 이걸로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좀 들곤 했다.
‘할아버지가 너무 좋은 분이라서.’
회귀 전에도,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안토니아는 그래서 오히려 더 가까워지는 게 껄끄러웠다.
정말로 괜한 정이 붙으면 가족으로서의 무언가를 기대하게 될까 봐.
그들이 원하는 건 그저 착하고 착실하며 사교계에서 잡음 일으키지 않는 그런 손녀일 수도 있지 않은가.
‘잡음은 이미 크게 일으키긴 했지만.’
아무튼 적어도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형태를 바라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리카르도를 택한 이상, 언젠가는 터트려야 둑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미뤄 두고 싶었다.
“자, 방까지 데려다줄게.”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 리샤르가 나랑 좀 더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런 것도 있고.”
안토니아의 장난스러운 말에 리카르도는 부정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무거운 생각을 애써 미뤄 내며 마차에서 내린 순간, 그간 제대로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아 세르히 백작.”
그 말에 깜짝 놀라 후작저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오늘은 나와 이야기를 좀 하지.”
백발을 단발로 자른 노인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할머니, 알렉산드라 풀멘 변경백이었다.
응접실에는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후작저에서 머물렀음에도 지금껏 마주치지 못했던 할머니였다.
그러니 오늘이 제대로 된 첫 대면이었다.
안토니아는 뜻밖의 사태였음에도 허리를 펴고서 나름대로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물론 알렉산드라는 말할 것도 없이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녀는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 집사가 우리는 차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오로지 초조함이 드러나는 건 안토니아의 할아버지 베네딕트 라테르뿐이었다.
“쯧.”
집사가 차를 모두 따르기가 무섭게 알렉산드라가 혀를 찼다.
“누가 그대에게 이 자리에 오라고 말했지?”
“오면 안 된단 말이에요? 가족끼리 이야기하는 자리인데.”
안토니아는 두 사람의 대화에 잠시 멈칫했다.
할머니는 예상한 만큼 위엄 있었으나, 할머니 앞의 할아버지가 이상하게 귀엽게 느껴졌다.
‘내 귀와 눈이 이상한가?’
안토니아는 찻잔의 온기를 느끼며 기분 탓이라 여기려 했다.
그러나.
“난 그대는 부르지 않았어, 베네딕트.”
알렉산드라는 딱딱한 말투로 집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사, 베네딕트를 모시게.”
“알렉산드라!”
“그대 때문에 할 이야기도 못 하겠어. 계속 그리도 손녀 앞에서 못난 꼴을 보여 줄 생각인가?”
알렉산드라의 말에 베네딕트는 꾹 입을 다물더니 등받이에 몸을 붙이며 나름 위엄 있게 고쳐 앉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알렉산드라. 가만히 있으니 내쫓지는 말아 줘요.”
“왜?”
“그거야 당신이!”
베네딕트가 반론하려다 마는 모습을 보며 알렉산드라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당신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녀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잡아먹으려 한다고 얌전히 잡아먹힐 손녀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알렉산드라는 그렇게 말하며 찬찬히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분명 지금쯤 교황의 목을 어떻게 따야 좋을지 같은 걸 생각하고 있을 것 같은데.”
달칵, 하고 알렉산드라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곧은 시선으로 안토니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니, 안토니아 세르히 백작?”
“…….”
안토니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할아버지를 상대할 때와 달리 색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마치 협상을 하고 거래를 할 때 느끼는 그런 긴장감이었다.
안토니아는 잠시 베네딕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걸 순간적으로 도움 요청으로 알아들은 것인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 알렉산드라.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요.”
“내 힘으로 내보내 줄까?”
베네딕트는 그 말에 굴하지 않고 뭐라고 더 말하려 했으나, 안토니아가 곧장 제지했다.
“할머니, 지금은 저와 이야기하려 하신 것 아닌가요?”
“그래. 너는 역시 베네딕트의 손녀가 아니라 내 딸 레베르타의 딸인 모양이구나.”
알렉산드라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딱딱한 표정이었으나, 안토니아는 그게 그녀의 미소라는 걸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 * *
“너는 신전, 아니 정확히는 교황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찾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알렉산드라는 곧장 본론을 이야기했다.
“맞아요.”
“방법은 있고?”
“없지는 않아요.”
“그렇다는 건 뒤집을 방법은 있으나,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로구나.”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으로 쓰게 웃었다.
할아버지 베네딕트가 제게 잘해 주려 어색하게 애쓸 때보다, 오히려 지금 자신과 알렉산드라가 친혈육이라는 걸 강하게 느꼈으니까.
‘어머니와 닮은 데가 있어.’
아니, 반대로 어머니 레베르타가 알렉산드라를 닮은 것일 터였다.
말투야 레베르타 쪽이 좀 더 다정했지만 그녀도 본질적으로 위압감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고민한다는 건…….”
알렉산드라는 비스듬히 앉아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 패가 아까워서일까, 그도 아니면 확실치 않기 때문일까.”
“아까워서예요.”
안토니아는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알렉산드라의 태도 덕에 오히려 안토니아는 머리가 말끔해졌다.
만약 할머니가 할아버지처럼 자신을 마냥 손녀처럼 대했다면 좀 달랐겠지만, 묘한 거리감 덕에 오히려 업무 상대처럼 느껴진 덕이었다.
“아까워하다 때를 놓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에요,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쓸 거고요.”
안토니아의 당당한 답에 알렉산드라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반면 베네딕트는 자신의 앞과 달리 마냥 말랑말랑하지 않은 안토니아의 모습에 기시감을 느꼈다.
‘정말로 레베르타가 알렉산드라와 이야기할 때와 비슷하군, 누가 딸 아니랄까 봐.’
그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걸 느꼈다.
왠지 묘한 소외감을 느꼈다고 할까.
그래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자신이 본 손녀는 부드러운 구석이 있어, 혹시라도 알렉산드라와 대화하며 크게 상처받을까 염려했으니까.
‘……이렇게 알렉산드라의 말이 맞다는 걸 깨닫게 되다니.’
좀 입맛이 쓰긴 했지만 말이다. 베네딕트는 그를 그저, 집사가 평소보다 차를 떫게 우렸기 때문이라고 핑계 대기로 했다.
물론 베네딕트의 기분은 두 사람이 현재 관심 가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던졌다.
“내가 교황의 마음을 돌려줄 수도 있단다.”
“어떤 방식으로요?”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니? 넌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텐데도.”
그 말에 안토니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제 패가 아까운 것처럼 할머니가 신전과 협상하려는 내용도 마찬가지일 수 있으니까요.”
안토니아는 알렉산드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무리 할머니가 풀멘 변경백이라도 단순히 그 지위만으로 성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진 않을 테니까요.”
황태자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안토니아는 오늘 리카르도가 전해 준 ‘마물 출현 예측 장치’를 듣고서 확신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황태자 전하와 손을 잡은 성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정도라면, 최소 두 분께서 고통을 감내하시던 것일 테지요.”
안토니아는 알렉산드라를 향해 도발하듯 이야기했다.
“해 주겠다가 아니라, 해 주실 수도 있다는 건 제게 바라는 게 있단 뜻 아니신가요, 할머니?”
응접실에 한 번 더 침묵이 가라앉았다.
베네딕트는 또 한 번 안절부절못한 채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알렉산드라는.
“과연 레베르타의 딸이구나.”
그녀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맞다. 나는 네게 원하는 게 있다. 거래하겠느냐?”
“내용에 따라서요.”
그 말에 알렉산드라는 만족스럽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정말로 거래를 하다니요!”
알렉산드라의 개인실로 따라 들어온 베네딕트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하지 않을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일에 관해서 우리는 안토니아나 레베르타에게-”
“알아.”
알렉산드라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교황을 압박할 그 이야기도 사실 안토니아가 이해해 줄 필요는 없는 어른들의 사정일 뿐이지.”
서북부는 원래도 마물과 도적 떼가 들끓는 흉악한 지역이긴 했다.
그러나 레베르타가 결혼을 선택하던 무렵부터 안토니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영지에서 꼼짝도 못 하게 된 건 ‘그 사건’ 때문이었다.
선대 교황의 중대한 실책으로 서북부, 아니 정확히는 북부와 서부 지역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마물의 출현 빈도가 높아졌다.
그나마 수도는 제국 내에서도 동쪽에 치우쳐 있어 출현이 적을 뿐.
아예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신전은 그 사건을 은폐하길 원했고, 황실은 혼란을 막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희생양이 된 게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를 비롯한 서부와 북부 인근의 영주들이었다.
그중 제일가는 험지에 영지를 가진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는 모든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지를 지키는 게 우선이던 그들은 몇 가지 특권을 대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단 진부한 이야기였다.
“내가 거래하자고 그 아이에게 말한 건 그래야 받을 것 같아서야.”
“……정말로?”
“그래, 베네딕트. 그대는 이리도 오래 나와 살았으면서 아직도 나를 몰라?”
알렉산드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그 유명무실하던 ‘특권’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계기를 따지면 손녀 안토니아 덕이었다.
5년 전, 예쁘장하던 소년 리카르도 트라체스의 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으니까.
‘5년 안에 서북부에 한 계절 이상의 평온을 드리도록 제가 돕겠어요, 그러니 두 분은.’
그는 더없이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안토니아를, 두 분의 손녀를 내버려 두지 말아 주세요.’
그 뜻밖의 말이 그저 놀라웠기에.
알렉산드라와 베네딕트는 리카르도가 온 뒤에야 세르히 백작령의 진상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딸 레베르타가 죽었단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장 다 내던지고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몇 달을 고생해서 가라앉혔던 마물 떼는 고약하게도 그때를 기다린 듯 들끓었다.
그들은 고작 사람을 보내 손녀를 위한 위로품을 건네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레베르타의 부모이기 이전에 그들은 책임을 가진 영주였으니까.
그 뒤에도 안토니아의 사정을 알아보려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백작령에 보낸 자는 그저 손녀가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이야기만 했다.
알렉산드라는 리카르도에게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거짓을 말한 그 자를 자신의 손으로 베어 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모두, 우리의 변명일 뿐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안토니아의 시간을, 그리고 지키지 못했던 레베르타의 삶을 어찌 보상할 수 있을까.
지난 5년간, 이번에는 믿을 만한 자를 보내 백작령을 살피도록 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안토니아가 잘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처럼 곁에 가 줄 수 있던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정을 모두 말하지 않는 건 그래 봐야 변명이란 생각 때문도 있었지만.
“그거 알아, 베네딕트?”
“뭘 말인가요.”
“그 아이는 그대에게 어머니를 왜 보지 않았냐고는 물었어도, 왜 본인을 내버려 뒀냐고 물은 적이 없어.”
“그, 그건 안토니아가 분명 다정하고 사려 깊은 아이라…….”
알렉산드라는 그 말에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 아이는 그저 황실과 신전을 상대할 힘으로서 우리가 필요하다 여길 뿐.”
알렉산드라는 그런 손녀의 마음을 너무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당연했다. 자신이라도 천 번, 만 번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기대가 무언가를 보장해 주지 않지 않는가.
“그대도 알 텐데, 그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우리 앞에서 진심이 담긴 눈을 보였어. 신전을 상대할 수 있다고, 거래하자고 한 그 말에 말이야.”
“…….”
“역시, 그대도 정말 모른 건 아닌가 보아.”
알렉산드라는 축 처진 베네딕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 어떤 성인이라 해도 가족이라 기대한다면 버려 두었단 사실을 그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법이야. 근데 그 아이는 조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원망 한 마디 내뱉지 않다니,
손녀에게 이미 가족이란 존재는 지워진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조금은 잔인한 말을 베네딕트에게 속삭였다.
“그러니 그 아이 앞에서 우리를 이해해 달라 하는 말은 더는 먼저 꺼내지 말아. 우리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
베네딕트는 그 말에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라가 자신보다도 더, 이 상황을 괴로워하며 속상해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 * *
황태자는 마물 출현 예측 장치를 대대적으로 시연하는 자리를 열었다.
안토니아는 그곳에 가기 위해 리카르도와 함께 마차에 오른 채였다.
“큰 조카님도 참 대단해, 한 해 마지막 날에 자신의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다니.”
“가장 좋은 날이잖아? 연초에는 큰 행사가 많으니 화제를 만들기도 딱이고 말이야.”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리카르도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말한 건 다 준비했어?”
“그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아가씨의 말인데.”
리카르도의 말에 안토니아는 잘했다는 듯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회귀 전과 달라진 것도 있었으나, 황태자가 자신의 데뷔탕트 해 마지막 날 예측 장치를 발표하는 것만큼은 같았다.
그렇다면 그 사건도 똑같이 일어날 것이다.
예측 장치의 폭발과 그리고, 마물의 출현도 말이다.
‘신전과 황태자가 손을 잡아 줘서 차라리 잘 됐지.’
안토니아는 기분 좋은 눈으로 리카르도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오늘, 교황은 우리의 약혼을 승인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안토니아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리카르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걱정했는데.”
“왜?”
“안토니아가 별로 가고 싶은 자리가 아닐 것 같아서.”
“폐하께서 강제 참석을 명한 자리라서?”
리카르도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샤르 탓이 아닌걸, 분명 폐하는 내가 리샤르와 약혼 허락을 구하지 않았더라도 날 부르셨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어차피 볼 거라면 가까이서 보는 게 낫지, 리샤르는 대공 전하니까 꽤 좋은 자리에 앉을 거잖아?”
“내가 여러모로 안토니아에게 쓸모 있는 것 같아 좋은걸.”
“그럼, 내가 아무나 붙잡고 약혼했을까 봐.”
안토니아가 이렇게 다소 뻔뻔스럽고 장난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건 루퍼스나 백작저 사람을 제외하면 리카르도 앞이 유일했다.
아니, 정확히는 리카르도 앞에서 가장 스스럼없이 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입가에 자연스레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그보다 안토니아, 몸은 좀 괜찮아?”
“매일 그걸 물어보네.”
“걱정되니까.”
“할 만해,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체력이 약한 건 사실이기도 하고.”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리를 쭉 폈다.
그날, 할머니 알렉산드라는 예상외의 제안을 했다.
‘레베르타는 풀멘 변경백 자리를 두고 갔지, 그걸 책임지는 건 당연히 그 딸인 네 몫이지 않겠니?’
당연히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안토니아는 당황했었다.
조부모님에게 후계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안토니아의 삼촌은 건강하고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두 분이 자리를 비운 지금, 서북부 영지를 지키는 것도 라테르 소후작인 그였고 말이다.
‘풀멘 변경백의 자리는 대대로 여성이 승계하도록 되어 있어, 그걸 그 아이는 네 아버지를 택하며 놔 버렸고.’
‘하지만…….’
‘네 삼촌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아이는 후작위 하나만으로도 버거워하니까. 그게 아니면.’
알렉산드라는 마치 안토니아를 도발하듯 이야기했다.
‘네 능력이 모자라서 도저히 응할 수 없다고 할 테냐?’
알렉산드라가 말하진 않았지만, 마치 귓가에 ‘레베르타처럼’ 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알렉산드라가 어머니의 어머니라는 건 알았지만, 안토니아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집안의 전통과 규칙을 부순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 것만 같았으니까.
할머니는 이제야 겨우 본 위엄 있는 사람이었으나, 자신에게 레베르타는 멋지고 강한 어머니였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그 도발에 기꺼이 응했다.
버거울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아니요, 굳이 거래 조건으로 그걸 거시겠다면 기꺼이 하겠어요.’
‘좋아. 그럼 앞으로 각오하거라, 풀멘 변경백이 되려면 그렇게 약한 몸으로는 안 되니까 말이다.’
덕분에 안토니아는 매일같이 알렉산드라에게 훈련이라는 이름하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리카르도가 걱정하는 것만큼 알렉산드라가 못 할 걸 하게 하진 않았으나, 한계까지 아슬아슬하게 몰아붙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영주가 뭘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으니까.’
몸만 단련시키는 게 아니었다.
알렉산드라는 참 고맙게도 안토니아가 미처 배우지 못한 영지 관리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
회귀 전, 제레미야와 결혼해 10년간 홀로 영지를 지탱했고 회귀 후에도 그 경험으로 세르히 백작령을 다스렸다.
하지만 제국의 최고 험지, 그것도 넓은 영지를 오랫동안 다스린 그녀의 경험치는 정말로 남달랐다.
‘덕분에 나쁜 습관이나 효율 떨어지는 것들도 정리할 수 있었고 말이야.’
그래서 몸은 고돼도 솔직히 말해 거래하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되었다.
풀멘 변경백의 후계자란 꼬리표가 붙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여전히 염려 섞인 눈을 떨치지 못하는 리카르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내 걱정은 이제 충분해,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테니까 우선은 오늘 일부터야.”
“응…….”
“날 네 정식 약혼자로 만들려면 그렇게 다른 데 정신 팔면 안 될 텐데?”
그 말에 리카르도의 눈빛이 트라체스 대공다워졌다.
창 너머로 어느새 오늘의 발표 장소가 보였다.
* * *
“어서 오거라, 리카르도. 그리고 안토니아.”
마차에서 내려 황제에게 예를 올리자, 그는 평온한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안토니아의 말에 황태자는 꽤 정중하게 화답했다.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영광이지, 세르히 백작이 자리를 채워 주다니 말이야.”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저는 전하께서 저를 꺼려 하실까 염려했답니다.”
안토니아의 말에 황태자가 거짓 미소를 보였다.
안토니아는 그에게 ‘내 약혼을 방해해 놓고 초대는 하냐’란 뜻으로 말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황태자는 잠시 리카르도에게 시선을 두더니,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시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그대의 조부모의 영지가 있는 서북부는 마물이 많이 나와 늘 고생이지 않은가.”
“그렇지요.”
“그대와 서북부의 많은 영주들의 고생을 알기에 더욱 서둘렀다네.”
마치 이런 자신의 정성을 꼭 알아 줬음 한다는 듯한 말이었다.
“그렇군요. 부디 이 장치가 잘 성공해서 저희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고생이 덜어지면 좋겠네요, 영지 관리로 바쁘신 터라 두 분을 이제서야 처음 뵙게 되어 무척 놀랐거든요.”
물론 안토니아는 사근사근한 말투로 황태자의 말을 되받아쳤다.
한마디로 그렇게 관심이 있는데 왜 그동안은 서부와 북부의 영주들만 고생하도록 내버려 뒀냐는 의미였다.
당연히 황태자는 제레미야처럼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 속뜻을 알아듣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황태자는 그 말에 곧이곧대로 답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만났는데도 조손간이 단란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앞으로 더 시간 낼 일이 많아질 것 같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군, 그렇지 않으냐. 제레미야.”
“그렇습니다. 형님.”
그 말에야 옆에서 잠자코 있던 제레미야가 답하며 끼어들었다.
그는 어쩐지 오늘 평소와 달리 다소 장식이 적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제레미야의 취향이 아닌데, 굳이 따지자면…….’
안토니아는 문득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정말 뭐 하는 짓이람.’
제레미야의 겉모습이 묘하게 리카르도를 따라 한 구석이 있었다.
평소에 그는 뻣뻣한 감각이 싫다며 머리 손질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는 편이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이라 그게 어울리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는 마치 리카르도와 비슷하게 머리를 쓸어 넘겨 고정해 둔 채였다.
게다가 셔츠도 그는 늘 핀턱 여러 줄에, 프릴이며 레이스가 나풀나풀 달린 걸 선호했다.
그러나 오늘 입은 건 핀턱 몇 줄만 장식처럼 들어가 있었다 소매 끝이나 카라 부분이 제법 얌전했다.
오히려 리카르도 쪽이 오늘 안토니아의 옷과 맞추기 위해 입어 화려할 정도라고 할까.
“이렇게 또 보게 되네엔군요.”
‘되네엔군요?’
“지난번 신전에서 오래 대화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네……요.”
‘다네요?’
안토니아는 얘가 지금 뭐하나 싶어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볼 뻔했다.
만약 이 자리에 황제나 황태자가 없었다면 제 눈빛을 숨기기 어려웠을 게 분명했다.
“흠, 흠. 오늘 입은 옷도 유글란스 백작의 것인가요?”
이번에는 어미만 잘 붙으면 되는 말이라 그런지 제대로 말했다.
안토니아는 속으로 어이없어하며 제레미야에게 답했다.
“네, 역시 유글란스 백작님의 의상엔 여전히 관심이 많으신가 보네요.”
“아, 아…… 아니, 그냥 조금일 뿐이야아요.”
“그러시군요, 그런데 황자님.”
“왜……요?”
“그냥 평소처럼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번거로워 보이시는데.”
안토니아의 말에 황태자가 크게 웃었다.
“세르히 백작, 그렇게 제레미야를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것도 아주 큰 목소리로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가 어찌 보면 실례를 저지른 거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그대는 평범한 귀족 가문의 영애도 아니고 한 가문의 수장인 백작인데.”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며 제레미야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제레미야도 내일이면 열일곱, 이제 의젓하고 점잖아질 때도 되지 않았는가.”
“형님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 나는 괜찮아요.”
그 와중에도 엉망진창 어이없는 존댓말을 하는 걸 보며 안토니아는 더 말을 섞기 싫어 리카르도의 팔을 몰래 두드렸다.
“조카님이 그렇게 생각했다니, 폐하께서도 기뻐하시겠군.”
안토니아가 아니라 리카르도가 불쑥 끼어들자, 제레미야의 얼굴이 당황과 기분 나쁨으로 확 물들었다.
황태자는 적어도 표정은 유지했는데 말이다.
“이만 내 아가씨를 데려가도 되겠는가?”
“네? 숙부님의 아가씨라니, 아직 숙부님은-.”
“나와 아가씨의 의사가 같은데 더 필요한 게 있는가?”
“하, 하지만…….”
제레미야가 뭔가 분하다는 듯 이야기하려던 찰나, 황제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당연히 황태자는 그 눈빛에 제레미야의 옷을 슬쩍 잡아당겨 말렸다.
황제가 불쾌해하면 이 행사의 의미가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약혼도 하지 않은 높은 귀족들이 그러는 건 경우 없는 건데…….”
제레미야는 싫다는 듯 중얼거렸으나 안토니아와 리카르도 두 사람 모두 모른 체하며 그 앞을 휙 지나쳤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중앙에 자리한 제법 큰 크기의 출현 예측 장치가 움직였다.
넓은 판 위에는 수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황태자가 신호하자 곧 마법사와 신관들이 손을 들어 힘을 불어넣었다.
“어머, 이렇게 대규모 마법 시연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신전이 참가한 것도 처음이지요, 어쩜. 저걸 보세요. 교황 성하께서 마지막으로 힘을 넣어 주실 건가 봐요.”
안토니아는 교황이 장치에 다가가는 걸 보며 리카르도의 팔을 꼭 잡았다.
회귀 전, 마물이 출현한 건 출현 장치가 완전히 작동하여 결과가 나온 뒤, 30초가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교황이 손을 들어 힘을 불어넣자 좀 더 영롱하게 장치가 빛났다.
그리고 이윽고, 상급 신관 하나가 당당하게 외쳤다.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앞으로 한 계절은 이 수도가 평온할 테니까요!”
“주신께서 어루만져 주시나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
상급 신관의 말에 교황은 의기양양해하며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는 교황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결과는 퍽 마음에 드는지 느긋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교황 성하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 장치가 완성된 것도 그렇고 말이오.”
“모두 황태자 전하께서 정성을 기울인 덕이지요. 덕분에 이 제국의 앞날은-.”
교황이 황태자를 띄워 주려 하던 그때.
우지끈-!
쾅-!
근처를 감싸던 기둥이 무너지고 땅에서 커다란 검은 덩어리가 솟아 올랐다.
“저, 저게 뭐야?!”
특히 교황과 황태자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그 검은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평소 출현한 것보다도 더 거대한 맹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럴……. 이럴 수는 없어.”
이 사태를 막기 위해 지시해야 할 황태자는 눈앞에 들이닥친 실패에 움직이지 못했다.
“마, 마, 마물이야-!!”
혼란스럽게 비명 소리가 섞였다.
그리고 마물은 뒷걸음질만 주춤거리는 교황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어억, 주, 주신이시여!”
그대로 교황이 잡아먹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
탕-!
깔끔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리카르도의 총성이었다.
탕, 탕탕-!
연달아 총성이 울렸다.
거대한 마물은 단발로 쓰러트리지 않은 채, 겨우 교황의 앞에서 밀려났을 뿐이었다.
리카르도는 아직도 상황 파악하지 못하는 황태자 세르미아를 대신해 외쳤다.
“황제 폐하와 교황 성하를 보호하라!”
그는 안토니아와 시선을 한번 나눈 뒤, 마물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어느새 대기하던 드비가 달려와 리카르도에게 장총을 건넸다.
“여기요, 전하. 황실 기사단이고 신전 기사단이고, 훈련이라곤 제대로 안 한 모양입니다.”
“요 근래 수도까지 마물이 출현하는 일이 적긴 했으니.”
물론 리카르도는 아니었다.
그는 몇 달 전만 해도 서북부에서도 가장 험지에서 끝없이 나오던 마물들을 상대했으니까.
그는 커다란 장총을 둘러메고서 마물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리카르도가 지시했음에도 신전 기사단은 어정쩡한 자세로 검만 겨우 뽑았을 뿐, 마물과 가까이에 있는 교황을 보호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크르릉, 쉬이익-!”
마물이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교황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뒷걸음질 치다 발목이라도 나간 것인지 그도 아니면 공포에 굳어 버린 것인지, 교황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 주, 주신이시여……! 부디, 부디 제게 힘을……!”
그나마 정신은 그래도 돌아왔는지 성력으로 어떻게 해 보려는 것 같았으나.
‘멍청한 짓을……!’
달려가던 리카르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마물에게 어정쩡하게 성력을 쓰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더, 더 커지다니!”
“성하! 얼른, 얼른 피하십시오!”
“나, 나, 나는…….”
교황은 자신에게 와 부축해 달라는 듯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마물에게 익숙지 않은 신관들이나 기사들 모두 주춤거릴 뿐이었다.
“키이익-!”
한 번 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교황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그러나.
탕-!
“드비, 성하를 보호해, 신전 기사단 놈들도 걷어차서라도 움직이게 만들고.”
“하, 진짜. 전하는 제 몸이 여러 개로 보이십니까?”
“하라면 해.”
리카르도는 짧게 말하며 교황 앞을 가로막고서 총을 장전했다.
“아이고, 진짜. 그쪽 마물은 전하께 맡깁니다.”
“그래.”
드비는 그 대답에 영 탐탁잖다는 얼굴로 교황의 몸을 부축했다.
그가 교황을 데리고 뒤로 빠지자, 그제야 신전 기사단과 신관들이 달려와 교황의 무사를 확인했다.
“다행입니다. 성하! 주신께서 도우신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 앞에서 아무도 엄두를 못 내서 혼자 막고 계신 저희 전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십니까?”
상급 신관의 말에 드비는 바로 반박했다.
그 말에 상급 신관은 좀 불쾌한 얼굴을 보였다.
“트, 트라체스 대공 전하를 저대로 두어도 되는가?”
그나마 교황은 정신이라도 든 듯 드비에게 물었다.
사실 그것도 리카르도가 걱정돼서가 아니라, 그가 잘못되었을 때 교황이 져야 할 책임과 마물을 상대할 사람이 없단 걸 깨달았기 때문인 듯 했지만.
드비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아무리 강하시다 한들, 마물이 저토록 큽니다.”
드비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도 우물쭈물거리는 신전 기사단이나, 황제와 황태자를 보호한다는 듯 후방으로 빠져 버린 황실 기사단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성하, 신전 기사단을 움직여 주셔야 합니다.”
드비의 말에 신전 소속 기사들 중 대다수가 몸을 떨었다.
그나마 몇몇 아닌 자들도 있긴 했으나, 그리 많지는 않아 드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리카르도 만큼이나 지난 5년간 서북부에서 몸으로 고생했으니까.
교황은 드비와 리카르도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때.
“크르릉, 키잉!”
“전하!”
마물이 몸째로 리카르도를 들이박았다.
리카르도는 들이박혀 밀려나면서도 장총을 지지대로 삼아 버텼다.
“큭.”
몸으로 충격을 받은 것인지, 리카르도는 피를 한번 뱉어 내며 몸이 무너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았다.
그대로 그는 장총을 휘둘러 마물을 뿌리치고 튕겨나라는 듯 총을 쏘았으나, 마물은 한 번 휘청거렸을 뿐 쓰러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드비는 창을 꽉 쥐며 교황을 재촉했다.
“성하!”
어떻게 보아도 위태로운 그 광경에 교황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상급 신관의 팔을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얼른, 얼른……! 기사들에게 대공 전하를 돕게 하게!”
“아, 알겠습니다. 성하!”
그 말에야 신전 기사들은 마지못해 쭈뼛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 * *
‘딱 좋은 타이밍이었어, 리샤르.’
안토니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불만스러워했다.
사전에 교황이 꾸물거릴 때를 대비해, 밀리는 척 연기는 하기로 했다지만.
‘진짜로 마물한테 맞아 줬잖아.’
그 리카르도 트라체스가 말이다.
안토니아는 리샤르가 리카르도라는 걸 안 순간부터 그가 마스터라는 사실은 알았다.
회귀 전, 황태자와 본격적으로 대립하며 리카르도는 자신의 카드를 하나씩 다 꺼냈으니까.
‘오러는 보는 눈이 많아서 아직 못 쓴다고 해도, 몸을 보호하는 건 다른 이야기일 텐데.’
안토니아는 조금 전 그가 피를 뱉어 낸 걸 떠올리며 속상해했다.
탕-! 탕-!
물론 그 와중에도 손은 바쁘게 움직이며 황제 곁으로 다가오는 잔마물의 기운을 견제하기 바빴지만.
“폐하께 열 보 이상 접근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게. 소형 마물이니 제대로 베어 내면 없앨 수 있으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기사들에게도 근래 들어 배운 지식을 바쁘게 떠올리며 지시했다.
황태자가 할 일을 하지 않으니, 자신이라도 나설 수밖에 없지 않은가.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풀멘 변경백에게 제대로 배웠어.”
“……감사합니다.”
“그대가 풀멘 변경백의 후계 자리를 수락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저도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안토니아는 익숙하게 탄창을 갈아끼우며 이야기했다.
황제는 잠시 안토니아의 모습을 살피다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당장에라도 리카르도의 곁에 가고 싶은 얼굴이구나.”
“……네?”
“너는 눈이 솔직해. 다친 게 속상한 게지.”
황제의 말에 안토니아는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얼굴 근육은 고장났다지만, 눈은 멀쩡했으니까.
그래도 의외였다. 제 곁에 오래 있거나 관심을 둔 사람이 아니고서야 기분을 맞히는 경우가 잘 없었으니까.
“걱정이 많이 되는 모양이구나.”
“……네. 그럼요. 전하께서 홀로 마물을 막겠다며 나서셨으니 어찌 안 그러겠어요.”
“그런데도 짐의 곁을 지키는 걸 택했다라.”
저쪽 편에서 사색이 되어 지시조차 내리지 못하는 교황과 달리, 황제는 예상보다 느긋했다.
“정말로 짐을 지키기 위함일까?”
“…….”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황제가 낮게 웃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그는 이런 상황인데도 기사들에게 자신을 지키라고 호령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빠진 채 할 일을 못 하는 황태자 대신 안토니아가 급해서 지시를 내리자 그 말을 따르라며 도와주기까지 했다.
‘역시 황제 폐하는 폐하신가.’
황제의 뜬금없는 말에 이리저리 고민하던 안토니아는 모범 답안을 내뱉었다.
“폐하께서는 제국의 황제이시며 대공 전하의 형제십니다. 제 힘은 보잘것없으나 폐하를 지키려 하는 건 귀족 된 자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무라…….”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폐하, 위험합니다!”
황제가 움직이자 기사들이 먼저 나서서 호들갑을 떨었다.
“고작 몇 걸음이 뭐가 위험하단 말이냐, 안토니아와 그대들이 지키고 있는데.”
기사단의 정도 없는 모습에 황제는 어이없어하며, 여전히 상황 파악하기 바쁜 황태자에게로 다가갔다.
“세르미아.”
“아, 아바마마.”
“짐은 네게 기사단을 통솔할 권리를 주었다. 그런데 넌 언제까지 네 권한을 팽개쳐 둘 생각이냐?”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차고 있던 검을 들어 검집째로 땅에 쾅 찍었다.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실수를 실패로 만들 셈이냐!”
황제의 노성에 황태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저, 저는……. 제가, 제가 나서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황당하여…….”
“당황이 아니라 황당하다고?”
이 급박한 상황에 자기 변명부터 시작하는 황태자를 보며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황태자는 눈치를 못 챘나?’
황제는 워낙 엄한 사람이라,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티가 확 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 황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지난 10년간 망나니 황자의 배우자이자 황제의 며느리였기에 안토니아는 황제의 분노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처음에 황태자 전하께 목소리를 높이신 건 정신을 차리란 소리였지만, 지금은…….’
정말로 화가 난 거였다.
아무리 억울하건 당황하건, 황당하건 간에 황태자가 벌인 판에서 생긴 사건이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이 사건을 수습할 의무도 힘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야단친 게 아니었는데, 정말로 이 상황이 경황없어서인지 황태자는 황제의 물음에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마물이……. 마물이 나타난 것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제가 기사단에 지시도 내리기 전에 숙부님이, 트라체스 대공께서 나서지 않았습니까!”
“…….”
황제의 눈이 더없이 서늘해졌다.
오히려 그 말에 황제는 맥이 풀린 듯, 머리를 짚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리카르도가 나서지 않았다면, 아니다, 지금은 말하기도 시간이 아까우니 얼른 기사단부터 지휘하거라.”
“……알겠습니다!”
황태자는 황제의 반응에 이상하게 의기양양해졌다.
‘황태자 전하는 크게 착각했어.’
황제가 자신의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했다고 말이다.
세르미아는 허락받은 기사도 아닌 리카르도가 황제 앞에서 총을 소지하고 있단 사실을 지적한 거였다.
실제로 말하던 순간, 세르미아는 안토니아에게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으니까.
‘이미 폐하께서 허락했을 수도 있단 건 생각지도 못하는 걸까.’
황태자는 평소에는 나름대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이런 비상시에는 제레미야와 닮은 점이 티가 나니, 형제는 형제라고 해야 하나.’
안토니아는 머리 아픈 듯 자리로 돌아오는 황제를 나서서 부축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대로 두면 자신들이 그저 ‘잘하기만’ 해도 황제의 손에 그들이 잘려 나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리샤르도 잘해 주고 있고.’
누가 봐도 기사들은 그저 엄호벽 정도일 뿐, 실질적인 유효타는 그가 다 먹이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도움이 되는 건 다름 아닌 드비였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이대로 오늘 일은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던 황제의 품에서 스르륵 흘러내린 단검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저건.’
눈에 익은 단검이었다.
안토니아는 떨어진 단검을 주어 황제에게 올렸다.
“이건…….”
“뭘 그리 놀라느냐.”
“아니에요. 왠지 폐하께서 지니시기에는 너무 소박하게 느껴져서…….”
“그럴 수밖에. 이건 세르미아가 몇 년 전, 직접 벼른 세 자루의 단검 중 하나니까.”
그 말에 안토니아는 놀라 다시 한번 단검을 살펴보았다.
‘……조금 달라.’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정교했다.
안토니아는 황제에게 노기를 가라앉히라는 듯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어머니께서도 제가 만든 서툰 화관을 오래 보관하셨지요, 그럼 나머지 두 자루도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가요?”
황제는 그 말에 씁쓸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 자루는 죽은 황후의 묘에 올렸고, 한 자루는 세르미아에게 있지.”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지난 달부터 줄곧 의문이던 게 있었다.
회귀 후에 자신이 어렵다 하자 한달음에 달려왔으면서도 어째서 그토록 회귀 전에 조부모님이 무심했던 걸까.
‘……어릴 때는 작은아버지 때문이라는 걸 알아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와 만나자마자 루퍼스에게 알아봐 달라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로는 회귀 전, 결혼 후에도 어찌 그리 무심했는지 완전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황태자의 입지를 꺾으려 걸음 한 곳에서 안토니아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런 거구나…….’
회귀 전, 조부모님이 결혼 선물이라고 보냈던 투박한 단검이 황태자가 만든 것과 아주 흡사하단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