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리카르도는 성큼 안토니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마치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닌지, 떨리는 손으로 안토니아를 붙잡았다.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야. 살아 있어서, 내가 늦어 버렸을까 봐…….”
버석하게 건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며 달려왔는지 고스란히 감정이 쏟아져 내렸다.
“리샤르…….”
“응.”
안토니아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그가 긍정을 말했다.
이렇게 쉽게 답할 거면서 도대체 왜 지금까지 엇갈리는 길을 택한 것일까.
“……이, 바보야!”
리샤르라는 걸 다시 확인하자 절로 소리가 나왔다.
“왜, 왜……! 왜 지금껏 말을 안 해서!”
리카르도가 리샤르란 걸 확신한 그 순간부터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제일 먼저 이걸 묻고 싶었다.
“나는 널 못 알아봤다지만, 넌 날 알았잖아!”
안심이 되어서일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확 터져 나왔다.
좀처럼 잘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긴장하고 또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를 맞닥뜨려서일까.
말이 멈춰지질 않았다.
눈앞에 있는 건 제 어릴 적 친구인 리샤르이기 전에, 트라체스 대공이라는 걸 아는데.
“안토니아…….”
“바보, 머저리! 너라는 걸 진작 알았으면……!”
아니, 역시 제게는 트라체스 대공이기 전에 어릴 적의 리샤르였다.
그라는 걸 알았다면 트라체스 대공이라고 해도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내는 짓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가 황실 남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어릴 때 인연을 맺어 버린 걸 어쩌겠는가.
한번 알아 버린 소중한 연을 외면하고 칼같이 잘라 버릴 정도로 안토니아는 냉정하지 못했다.
그 길이 자신을 힘들게 할 가능성이 있다 할지라도.
“미안,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안토니아.”
“맞아, 네가 다 잘못했어!”
안토니아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되돌려주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날 속일 생각이야……. 난 너와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진짜 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생각하니 억울했다.
리샤르라는 걸 몰랐으니 그가 제게 하는 행동들이 다 부담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전생엔 그저 스쳐 지나갔던 인연이었다.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제게 반한 티를 내니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애초에 아무리 반했다고 해도 보통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상대를 위해 그 큰돈을 쓰고, 영영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한 조부모를 설득해서 데려오기까지 하는가.
누가 생각해도 평범하게 반한 상대에게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인도 과하다는 걸 아니, 뒤에서 멋대로 움직이고 그러다 보니 자신과 타이밍까지 맞지 않았다.
“거래하자고 했을 때는 드디어 말할 결심을 했던 거였지?”
“……응.”
어릴 때와 달리 예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빼어나고 잘생긴 데다 카리스마까지 갖춘 남자는 잔뜩 혼이 나 귀가 접힌 커다란 강아지처럼 끄덕였다.
정말로 자신이 다 잘못했다는 듯 납작 엎드리는 태도를 보니 좀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런데 왜 예전을 떠올리라는 것처럼 총부터 선물한 거야. 설마 내가 못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당연히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어!”
그는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갑자기 말하면 내가 믿지 못할까 봐?”
이건 단순히 지금이 아니라, 후작저에서의 일까지 포함한 질문이었다.
“…….”
잠시 그가 침묵을 지켰다.
정말 어이가 없어졌다.
“어릴 때 내 친구 리샤르는 이렇게 똑똑지 않게 굴지 않았는데!”
안토니아는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정작 리카르도는 뭐가 좋은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날 영영 보지 않을까 봐 걱정했으니까.”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내 주었다.
“……너 진짜 바보야?”
리카르도는 그 말에 겸연쩍은 듯 웃기만 했다.
안토니아는 그의 팔을 퍽 때리며 말했다.
“내가 왜 안 볼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난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게, 내 아가씨는 이런 사람이었는데.”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몸을 부축하듯 꼭 끌어안았다.
본인은 느끼지 못한 것 같지만 그녀의 몸이 흔들거리는 게 보였으니까.
“5년 동안 겁만 잔뜩 쌓았나 봐.”
“바보!”
“안토니아, 얼마든지 날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아. 하지만.”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몸을 안아 들었다.
“걸을 수 있어.”
그 말에 리카르도는 고개를 저었다.
“폭발 때문에 앞이 온통 엉망이야, 지금 상태로는 넘어질걸. 부디 그렇게 하게 해 줘.”
그는 자신이 다 잘못했고 미안하다는 듯 옅은 미소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얼굴을 무기로 삼는 건 똑같았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허락해 주는지 참 잘도 알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그렇게 빙빙 일을 꼬아 뒀으니, 더 화가 나는 거지만.
“게다가 어깨에 상처도 난걸, 얼른 치료도 해야지.”
그가 이야기해서일까, 어깻죽지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올라왔기에 안토니아는 마지못해서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자신의 체력이 좀 버텨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리카르도는 조심조심 폐광을 걸어 나왔다.
그사이 대공가 기사들이 잔해를 좀 치워 두어 걸을 만했다.
안토니아가 놀라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 덕인지, 그녀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게 티가 났다.
‘잠들어도 되는데.’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려다 관뒀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면 안토니아는 눈에 힘을 줄 것 같았으니까.
납치당한 게 어젯밤, 루퍼스의 연락을 받자마자 움직였다지만 어느새 한낮 무렵이었다.
“할 말이 많아.”
마차에 내려 주자, 안토니아는 리카르도를 붙잡으며 이야기했다.
“알아, 나도 그러니까. 그래도 치료는 해야지.”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대기시킨 주치의를 들여보냈다.
안토니아가 치료를 받는 사이, 리카르도는 드비를 찾아 물었다.
“제레미야는?”
“당연히 공손히 마차에 태워 드렸지요, 세르히 백작님을 자신이 에스코트해야 한다는 헛소리를 하길래 따뜻한 코코아를 드렸더니 조용해지시던데요?”
“잠들었나?”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걸 들으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어떻게 주는 걸 홀랑 받아 마시고 홀랑 잠들 수가 있는 거지요?”
“어떤 의미로 너보다 신경줄이 굵은 녀석이거든.”
“헐, 황자님이신데도요?”
“황태자가 그렇게 키웠으니까.”
리카르도의 말에 드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드비의 얼굴이 금세 헤벌쭉해졌다.
“그래서 좋으셨습니까? 5년 만에 백작님을 어, 막 이렇게 안아도 보시고.”
리카르도는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드비의 정강이를 한 대 후려 차 주었다.
“아악! 한 대는 봐주신다고 어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오는 길에 봐줬다.”
“네? 오는 길에 저 입 다물고 있었는데요?!”
“아니, 넌 시끄러웠어.”
“와, 진짜 너무하십니다. 기사단 움직인 거 때문에 제가 황궁과 수도를 새벽 내내 돌아다닌 거 알고 계시면서!”
“그래서 지금까지 봐준 거야.”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통신구를 눌러 루퍼스가 말한 대로 꾹 눌렀다.
안토니아를 무사히 되찾았다는 연락이었다.
드비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부터가 일이겠네요, 폐하께서야 그냥 넘어가 주실 것도 같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노발대발 난리도 아니셨단 말입니다.”
“그렇겠지.”
“그렇게 태평하게 남 일처럼 말하실 때가 아닙니다! 오늘 조간 내용을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리카르도도 잘 알고 있었다.
안토니아를 수색하며 달려오는 사이 루퍼스가 통신구를 통해 알려 줬으니까.
[세르히 백작, 제레미야 황자님과 납치?!]
[밀회 끝, 사랑의 도피? 세르히 백작의 마음은?]
안토니아와 제레미야가 동시에 사라진 것을 두고 신문들은 멋대로 해석하며 떠들었다.
“석간부터는 정리될 거야.”
안토니아도 제레미야도 무사하다는 걸 루퍼스가 알게 되었으니, 그쪽에서 어떻게든 해 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안토니아에게 불리한 기사를 쓰는 곳은 대공가의 이름을 써서 눌러도 좋다.’
‘진심입니까, 대공 전하?’
‘그래, 그러려고 만든 힘이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루퍼스는 어쩐지 기가 차 했다.
그러나 그도 거부하진 않았다.
그게 안토니아에게도 그 본인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쟈힘은?”
“폭발 때문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입니다.”
드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그래, 일단 수습은 해 둬, 그리고 쟈힘을 도와준 자들은 모두 잡았나?”
“네, 모두 수도로 압송할 예정입니다.”
“그래.”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증거들은 모두 손에 넣어야 했다.
그래야 안토니아의 명예를 제대로 지킬 수 있었다.
리카르도는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전한 뒤, 마차로 돌아갔다.
때마침 주치의가 치료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상태는?”
“어깨 쪽 상처는 그리 깊지 않습니다. 다른 쪽도 혹시 몰라 꼼꼼히 살펴보았는데 큰 이상은 없는 듯합니다.”
리카르도는 그 말에 안심하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많이 피곤했구나.’
마차에 데려다줄 때부터 눈이 감기던 안토니아였다.
옆으로 쓰러지듯 잠든 안토니아를 보며 리카르도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는 마차를 출발시키기에 앞서 안토니아가 흔들림에 깨지 않도록 조심히 끌어안아 제 품에 기대도록 했다.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이마를 찬찬히 손으로 그리듯 매만졌다.
만나기는 몇 달 전에 보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재회한 기분이었다.
‘……리샤르.’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리카르도는 조용히 안토니아의 손을 들어 그 손등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내 맹세는 그때도, 지금도 줄곧 네 거야. 안토니아.’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 * *
눈이 번쩍 떠졌다.
안토니아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깜박였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리카르도와 충분히 이야기하고 자신이 납치된 사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고 난 뒤에 자고 싶었는데.
역시 체력이 도와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여긴 어디야…….’
이불도 천장도 묘하게 낯설었다.
세르히 백작가의 타운하우스도 아닌데, 그렇다고 트라체스 대공가의 방도 아닌 것 같았다.
안토니아가 혼란스러워하던 사이,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는 척을 해야 할까, 아니면 확인해야 할까 고민하던 사이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좀 더 자도 괜찮았는데.”
“……리샤르.”
반사적으로 불러 놓고도 안토니아는 아차 싶었다.
막 만났을 때야 감정이 격한 데다 혼란스러워서 그랬다지만, 그래도 그는 대공인데 너무 편하게 말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안토니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안토니아가 고민하는 것보다도 리카르도의 행동이 더 빨랐다.
“여기 물, 그리고 오늘 발행된 조간과 석간신문 모두.”
“…….”
좀 놀라 눈을 깜박였다.
“역시 리샤르가 맞구나…….”
그냥 리카르도 트라체스라면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걸 바로 가져다줄 리가 없으니까.
그 말에 리카르도는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안토니아는 정말로 트라체스 대공을 못 미더워하는구나.”
“응.”
즉답에 리카르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아실 텐데요, 대공 전하?”
“그러게.”
리카르도는 입이 여러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씁쓸해했다.
“배는 고프지 않아? 식사도 준비는 되어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다과를 건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제게 필요한 걸 주는 걸 보니 안토니아는 문득 장난기가 들었다.
“배고파.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은걸. 지난번에 대공가에서 먹었던 필라프가 먹고 싶은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카르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주방장을 부를 테니까.”
그 모습에 안토니아는 이상하게 입꼬리가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농담이야.”
“……농담? 정말로?”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걸 먹는 건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식사는 나중에, 그것보다 내가 얼마나 잔 건지, 여기가 어디인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더 궁금해.”
그는 정말인지 궁금해하면서도 얌전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잠은 그렇게 오래 자지 않았어. 그냥 저녁이 되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그나마 신문 양이 적었구나.”
안토니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날짜가 넘어갔을까 봐 몹시 걱정했다.
‘그러고 보니 리샤르의 옷차림이…….’
평소보다 말끔하고 격식 있었다. 그건 꼭 안토니아를 만나기 위해 치장한 거라기보다.
“황궁에 다녀왔어?”
“응.”
“나도 데려오라고 했을 것 같은데.”
리카르도는 그 말에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쟈힘 때문에 크게 부상을 입었다고 말해 뒀어.”
“큰 부상…….”
안토니아는 문득 자신의 어깨 쪽을 바라보았다.
큰 부상이라고 하기에는 몇 주면 말끔하게 나을 것 같아 보였다.
팔을 움직일 때 좀 통증이 있긴 해도 심각한 건 아니고.
‘뭐, 그래도 잘됐지. 내가 멀쩡하면 분명히 오라 가라 귀찮게 굴었을 테니까.’
부상하니까 퍼뜩 생각난 게 있었다.
“제레미야 황자님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해, 안토니아 너와 달리. 지금쯤 황자궁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을 거야.”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팔을 들어 살펴보았다.
긁힌 상처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걸 보며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그 망나니를 지키느라 이렇게 다쳤는데.”
“안 지켰으면 더 큰일 났을걸.”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조간과 석간을 침대 위에 늘어놓고 헤드라인을 훑었다.
아침과 저녁, 고작 한나절 차이의 기사였는데 온도 차가 느껴졌다.
조간에서는 멋대로 소설을 써 뒀던 헤드라인이 석간에서는 급 사실만을 건조하게 서술했다.
[납치 사건의 범인은 쟈힘 폰스]
[트라체스 대공 전하의 구출 성공, 폰스 남작가와의 연관은?]
좀 특이한 게 있다면 의도적으로 쟈힘이 제레미야의 시종이었다는 걸 가려 둔 듯한 점일까.
그리고…….
[수도를 휘젓던 트라체스 대공가, 모두 납치된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안토니아는 그 헤드라인에 이르러서는 조용히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황궁에 간 거 단순히 제레미야 황자님 때문이 아니었구나.”
“응.”
리카르도는 즉답했다.
“어쩔 수 없었어. 네가 납치당했는데 크롬프트 상단주는 위치를 못 찾았다고 하잖아. 범인도 추적할 필요가 있었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도에서 기사단을 움직이다니 너무 위험한 짓이었어.”
“망나니 조카님이 있으니 둘러댈 수 있다고 생각했어.”
안토니아는 그 말에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카르도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부지런히 자신을 쫓아와 준 덕에 자신 또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실제로 헤드라인을 보니 어떻게든 겉으로나마 수습은 된 것처럼 보였고.
‘이렇게 단시간에 신문사들이 정리된 걸 보면 말이야. 물론 루페가 손을 쓴 것도 있겠지만.’
단순히 루퍼스의 힘만으로 이렇게 깔끔하게 해결되진 않았을 터였다.
분명 리카르도가 협력하기도 했고, 자신과 제레미야가 무사히 구출된 덕이 클 터였다.
안토니아는 이어서 기사 내용도 가볍게 훑었다.
조간은 쓸데없는 소리만 잔뜩이었으나, 석간은 정보 위주로 정리되어 좀 쓸 만했다.
‘대충 주변 상황도 어떻게 된 건지는 알겠네.’
리카르도는 수도 기사단을 움직였다.
본래대로라면 긴급 시가 아닌 이상에야 해선 안 될 일이었다.
당연히 황태자의 입장에선 이걸 어떻게든 공격의 빌미로 삼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자신의 막냇동생이 껴 있었다.
‘한 마디로 리샤르가 먼저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었단 건, 제레미야의 납치 사실도 이쪽이 먼저 알았단 소리지.’
황태자 쪽에서 먼저 알았다면 리카르도는 나설 명분조차 없었을 테니까.
‘쟈힘을 내보낸 뒤, 막내 황자궁의 시종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긴 했으니까.’
안토니아는 혀를 차며 이야기했다.
“전하께서 무척 아쉬워하셨겠어.”
“덕분에 드비가 좀 고생을 했지. 내 조카님들은 하나같이 제멋대로라서.”
“리샤르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리샤르가 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안토니아는 그게 일부러라는 걸 눈치채고 얄미워서 그의 팔을 툭 쳤다.
‘어라?’
무심코 넘겨 버렸지만 순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드비, 드비 경?”
안토니아는 저도 모르게 리카르도의 옷깃을 쥐었다.
“네가 따르는 기사 노릇을 했던 그 드비 경이 있어?”
어릴 때부터 무척 궁금했다.
백작저 사람 중에서도 드비를 직접 본 건 마틴과 오두막에 물자를 전달하던 하인 둘 정도였으니까.
뭔가 드비 경에게 말을 전하려고 해도 매번 리카르도가 중간에서 전하겠다고만 한 데다, 초대했을 때도 그 혼자 왔었으니까.
“응. 안토니아 너도 수도에 온 뒤에는 종종 본걸.”
“뭐?”
리카르도의 주변에 드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더 빨리 알아차렸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안토니아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드비 경은 붉은 머리에 키가 훤칠하게 큰 분이랍니다.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엿한 기사라니 훌륭하기도 하지요.’
마틴이 말했던 인상착의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주변 인물이 하나 있긴 했으니까.
“드미트리어스 빅터 경……?”
어떻게 하면 그 훤칠한 미남자의 멋진 이름이 드비 같은 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응.”
고개를 끄덕이는 리카르도를 보며 안토니아는 정말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일을 얼마나 꼬아 놓은 거란 말인가.
게다가 드미트리어스 빅터는 리카르도와 겨우 두 살 차이 나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 드비 경의 얼굴을 봤으면 알아차렸을 텐데.’
마틴의 말에 따르면 드비는 그때 이미 거의 다 큰 상태였다고 하니까.
“너는 진짜 나빠.”
“잘못했어.”
“그렇게 단박에 잘못했다고 하지 말란 말이야, 적어도 이유는 물어보란 말이야. 불평하기가 힘들잖아.”
“뭐든지 마음껏 이야기해도 괜찮은데. 아니, 오히려 좋아.”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손등에 뺨을 부볐다.
커다란 강아지, 아니 맹수가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네 기사인걸. 내 아가씨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잘 들을 수 있어.”
“내 친구 리샤르가 이럴 리 없어…….”
안토니아가 중얼거리는 말에 리카르도는 오히려 붙어 왔다.
“예쁘지 않아서 그래?”
“뭐?”
“노력해 볼게.”
“예뻐지겠다고?”
“안토니아가 그쪽이 취향이라면. 시도는 해 봐야지.”
진지하게 말하는 그 보랏빛 눈에 안토니아는 어이가 없어서 그의 양 뺨을 손으로 찰싹 쳤다.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마.”
“쓸데없지 않아, 나는 안토니아에게 정말로 잘 보이고 싶으니까.”
농담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그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그럼 거짓말부터 하지 마셨어야지요, 대공 전하.”
“리샤르.”
장난스럽게 말한 말에 리카르도는 정색하며 말을 고쳤다.
“안토니아가 날 대공 전하라고 부르지 않으면 좋겠어.”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무리지.”
지금이야 리카르도와 둘뿐이라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엄연히 백작과 대공이라는 신분 차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황실의 일원이지 않은가.
서로 존대를 하는 거면 몰라도, 이렇듯 편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간 사교계에서 딱 좋은 안줏거리가 될 터였다.
“말투는 어쩔 수 없다지만, 이름은 그러지 않을 방법이 있어.”
“뭔데?”
안토니아는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꺼내려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쥐고 있던 안토니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와 약혼해 줘, 안토니아.”
“……응?”
안토니아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 흐름이었다.
‘맞아, 리샤르는 날 좋아하지.’
트라체스 대공이라고만 알 때부터 그의 감정만큼은 참 투명하게 보였다.
그가 일부러 숨기지 않은 것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지만.
“내 아가씨는 이미 눈치챈 것 같지만, 난 널 좋아하고 있어.”
“…….”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여기서 즉답하긴 좀 그랬다.
왠지 그의 마음 자체를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보일까 봐.
“너무 그렇게 딱딱한 눈으로 보지 않아도 괜찮아, 당장 날 좋아해 달라거나, 그런 의미는 아니니까.”
“나는…….”
“날 좋아하지? 친구로서.”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의 예쁜 인연이었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런 친구.
‘메말랐던 내 삶에 예쁜 어린 시절을 준, 아주 소중한 사람.’
하지만 리카르도는 아마도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좀 더 나아간 감정을 품고 있었을 터였다.
밀어내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지금 당장 명확한 답을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혼이 아니라 약혼을 청하는 거야, 내 아가씨에게.”
“약혼만 하고 나중에 널 떠나도 좋다는 이야기야?”
“좋지는 않아.”
이번엔 리카르도가 즉답했다.
“하지만 안토니아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니까.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좀 더 차근차근 너에게 남자로서 호감을 사려고 했을 거야. 하지만.”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뺨을 타고 내려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이 약혼은 우리에게 무척 필요한 일이야. 그건 네가 누구보다도 잘 알 테고.”
안토니아는 그 말에 조금 씁쓸해졌다.
리카르도의 말대로였으니까.
‘황태자는 분명, 이번 일에 리샤르가 과하게 나섰다고 지적할 테고, 또 제레미야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겉보기로는 안토니아가 부상까지 당하며 제레미야를 지킨 상황이었다.
게다가 쟈힘이 죽은 이상, 황태자가 이 사건을 입맛대로 재구성하기에도 딱 좋은 상황이었다.
‘거짓 증인을 내세워 나와 제레미야가 밀회를 즐기다 납치당한 거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러니 리카르도의 말대로 정말로 필요한 일이 맞았다.
안토니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다른 것보다 제일 큰 이유는 역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네 곁에 있고 싶어서야.”
그가 안토니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니까 안토니아, 부디 날 이용하고 필요로 해 줘.”
어느 사이엔가 손안에서 무언가 작은 상자가 걸렸다.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손을 끌어다 그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자수정을 쓴 우아한 디자인의 반지가 있었다.
흔히 프러포즈 링으로 쓰는 것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리카르도의 마음 씀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계산과 거래 같은 잇속을 먼저 말한 남자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감정을 담아 속삭였다.
“그러니 부디 저와 약혼해 주세요, 나의 유일한 아가씨.”
거절할 이유는 너무도 적었다.
그걸 리카르도도 분명 잘 알 터였다.
그러나 그가 만약이라는 가능성에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멋진 어른이 되었는데, 귀엽단 느낌이 들면 이상한 걸까.’
정작 어릴 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는데.
그저 예쁘고 멋지단 생각뿐.
그가 준비한 반지의 자수정만큼이나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조금 짓궂은 마음이 들어서 좀 뜸을 들여 버렸다.
초조함이 공기 중에 느껴졌는데도 리카르도는 착실하게도 잘 기다려 주었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어릴 때처럼 어쩐지 몽글몽글하고, 제 삶에서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은 그런 보드라운 느낌이었다.
분명 고개를 끄덕이면, 자신이 원하건 원치 않건 인생 계획을 크게 수정해야만 했다.
6년 전, 눈을 떴을 때 트라체스 대공과의 결혼은 그 어떤 선택지에도 넣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뭐 어때, 어린 시절 리샤르가 내 삶에 끼어들었던 것도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그래서 나쁘긴커녕, 오히려 그랬기에 제대로 그때의 나이와 감정을 겪으며 열여덟의 안토니아 세르히가 될 수 있던 걸지도 몰랐다.
지난 삶과 달리 제대로 된 애정을 받아들이면서.
안토니아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잔잔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할게.”
그 대답을 한 순간, 안토니아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마주한 사람의 얼굴 위로 참으로 솔직하고 직설적인 감정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기쁘고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감정, 그걸 안토니아는 눈으로 본 것 같았다.
조각같이 잘생긴 남자의 눈가가 어쩐지 촉촉해졌다.
“고마워, 안토니아.”
“……네가 너무 손해 보는 것 같은데.”
리카르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손해가 아니야.”
그는 안토니아의 왼손 약지에 조심스레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 손길조차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반지에 마치 그녀의 손가락이 다칠 수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이제부터 당당하게 내 아가씨라고, 나와 약혼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째서 손해야.”
그는 반지를 끼운 안토니아의 손을 보며 기쁨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이러다 정말로 내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면.’
이 남자의 심장이 멎어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감격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런 건 또 어릴 적 리샤르와 좀 다른 점이었다.
예전에는 늘 자신의 감정을 단단히 갈무리하던 느낌이었는데, 도대체 지난 5년간 어떻게 자랐기에 제 앞에서 이리도 주체를 못 하는 걸까.
겉보기로는 맹수 같은 남자가 마치 자그마한 고양이처럼 구는 게 보기 싫지 않고 귀여우니, 어쩌면 이미 제 눈도 조금은 이상해진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너에게 반지를 선물해 줄게.”
“……정말로?”
“혹시 준비했어?”
왠지 리카르도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토니아는 그걸 보며 속으로 웃었다.
잠깐 사이에 분명 속으로 갈등했을 그의 마음이 그려졌다.
‘나한테 받고는 싶고, 거짓말을 또 하자니 양심에 찔린 거겠지.’
안토니아는 그래서 꾹 참고 진실을 말한 소꿉친구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그럼 나도 한 쌍을 준비할게, 가드 링으로 준비하면 딱이겠다.”
그 말에 리카르도는 놀란 얼굴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약혼자가 누구인지 알리고 싶어 하는데, 이 성의를 무시할 순 없지.”
안토니아는 제 약지에 자리한 반지를 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저 보랏빛의 자수정이 아니라 살짝 푸른빛이 도는 게 딱 리카르도의 눈 색과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네 것도 줘, 내가 끼워 줄게.”
“……고마워, 안토니아.”
“이런 걸로 고맙다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나는…….”
안토니아는 진지하게 그에게 말했다.
자신만 인생 계획을 크게 수정한 게 아니었다.
리카르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리샤르라고 밝힌 순간, 그리고 그의 마음을 안 순간.
안토니아는 그가 어째서 지난 5년간 서북부에서 지낸 것인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네가 뭘 각오한 건지 모르지 않아.”
“……난 언젠가 이런 각오를 했어야 했을 거야.”
안토니아는 그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회귀 전엔 그의 말대로 그는 황태자와 대립했었다.
하지만 거기엔 특별한 사건이 껴 있었다.
원래부터 그가 대립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삶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가호의 힘을 가지고 있단 걸 알았기에, 서두른 거야.’
원래는 그저 트라체스 대공으로 적당히 진지하지 않게 굴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안토니아는 리카르도에게서 반지를 받아 그의 손에 끼워 주며 말했다.
“미래의 일은 몰라, 하지만 리샤르. 이번 삶에서 넌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날 위해서 각오했어.”
“안토니아.”
“부담 갖지 말란 소린 하지 마, 그게 오히려 내겐 어려우니까. 아니, 오히려…….”
그의 도드라진 손가락 마디마다 반지는 한 번씩 걸렸으나 약지에 꼭 맞게 자리했다.
“내게 책임져 달란 소리 정도는 해야지, 네 인생 계획에 내가 끼어들어 버렸는데.”
“내가 바란 거니까.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난 거절하지 않을 거야, 안토니아.”
“응.”
그래야 자신이 아는 ‘리샤르’다웠다.
앞으로를 위해서는 더욱 그래 줘야 했다. 자신과 리카르도가 걸을 길은 서로 배려만 하며 갈 만큼 그리 평탄하지 않았으니까.
잠시 리카르도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안토니아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크게 다쳤다고 말했다고 했지?”
“응, 의식도 없고 거동도 못 한다고 이야기했지.”
“좋아.”
무도회 이후로 줄곧 닥치는 일을 막아내기 급급했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제레미야 때문에 안토니아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그러니, 당연히 이 빚은 크게 돌려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황자인 이상 단숨에 무너트릴 순 없겠지만.’
제대로 된 유효타는 먹여야 했다.
자신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리샤르를 위해서라도 더더욱.
제레미야는 꼴 보기 싫은 전 남의 편이지만, 황태자가 가진 이용패기도 했다.
안토니아는 리카르도를 향해 즐거운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리샤르,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내 아가씨가 바란다면 무엇이라도.”
리샤르라는 걸 알고 들으니 너무도 든든한 한 마디였다.
* * *
[위험을 무릅쓴 대공전하, 정말 단순히 레이디 트라체스의 피후견인이라서인가?]
[대공가에 퍼지는 염문설?!]
[세르히 백작, 중태.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대공 전하]
“이, 이게 뭐야?”
꼬박 이틀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제레미야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시종이 가지런히 정리해 둔 신문을 샅샅이 훑었다.
“왜? 왜? 왜 죄다 숙부님 이야기인데?!”
제레미야는 시종을 향해 이해가 가냐는 듯 물었다.
“내가 쟈힘, 그 몹쓸 것 때문에 얼마나 위험했는데! 숙부님의 마음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는 이틀이나 꼬박 자 퉁퉁 부은 얼굴로 신문을 내동댕이쳤다.
“그, 그제 신문에는 황자님의 이야기가 실렸…….”
“하루? 고작 하루우우?”
제레미야는 그게 할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시종에게 말했다.
“그리고! 왜 숙부님과 세르히 백작이 특별한 관계인 것처럼 기사를 쓰는 거야!”
제레미야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씩씩거렸다.
“당연히 날 목숨 걸고 지켜 준 세르히 백작의 마음에 더 주목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애초에 그날도…….”
제레미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며칠 전을 떠올리며 시종이 건네는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앗, 뜨거! 나는 뜨거운 거 싫단 말이야! 차 온도도 못 맞춰?!”
“죄, 죄송합니다. 황자님.”
제레미야의 성질에 시종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엎드렸다.
“그리고 차 따위가 뭐야! 내가 이틀이나 굶었는데, 당연히 밥부터 가지고 와야지!”
“얼른, 얼른 가지고 오겠습니다!”
시종은 그 말에 혹시나 찻잔이라도 던질까 겁내 하며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제레미야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젠장, 무능한 쟈힘보다 더 무능한 것들뿐이라니.’
순간적으로 쟈힘이 아쉬워졌다가도, 며칠 전 폐광 안에서 미친놈처럼 굴던 얼굴이 떠오르자 금세 고개가 내저어졌다.
‘아니, 아니. 그래도 날 우습게 보고 미친 짓 하던 놈보다야 무능해도 고분고분한 놈이 낫지.’
제레미야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신문을 살펴보았다.
시종의 말대로 그제만 해도 제레미야의 납치 사건이나, 리카르도가 기사단을 움직인 것을 비판하던 기사들이 하루 사이에 분위기가 싹 바뀌어 있었다.
“숙부님 눈치라도 보는 것도 아니고, 나는 황자란 말이야! 왜 다들 황자가 죽을 뻔한 일엔 관심이 없는 거냐고!”
너무도 화가 났다.
그때, 혀를 차며 황태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느냐, 제레미야.”
“형님!”
제레미야는 황태자를 보자마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이것 좀 보세요! 왜 다 숙부님 이야기를, 그것도 세르히 백작이 마치 숙부님을 택한 것처럼 떠드는 겁니까!”
황태자는 그 말에 자신도 머리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느냐, 장본인인 세르히 백작은 의식이 없다고 하는데.”
“네? 아직도 못 일어났단 말입니까? 저는 일어났는데!”
그러더니 제레미야는 황태자에게 기사가 잘못되었다는 듯 말했다.
“그럼 이 기사들은 다 뭐예요, 숙부님만이 아니라 세르히 백작도 마음이 있는 것처럼 떠드는데!”
이미 제레미야의 머릿속에서 납치 사건 전에 안토니아가 리카르도와 종종 만남을 갖던 사실은 싹 지워진 채였다.
그런 것쯤 사소한 만남이라고 그는 저 좋을 대로 생각했으니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제레미야는 이유를 알겠다는 듯 외쳤다.
“모두 숙부님이 거짓말하시는 게 분명해요!”
“뭐?”
황태자는 답답함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면서 동생을 바라보았다.
“세르히 백작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면서요! 그럼 이건 다 숙부님이 조작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레미야, 네 마음은 안다만…….”
황태자는 우선 동생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제 막냇동생이 바보라는 것쯤은 그도 잘 알았으니까.
그러나 제레미야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크게 고개를 저으며 황태자에게 말했다.
“애초에 세르히 백작은 목숨 걸고 절 구했단 말입니다! 게다가 왜 구했냐고 물어봤을 때, 저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까지 했고요!”
제레미야는 자신에게 기꺼운 말만 기억하는 편리한 뇌의 소유자였다.
“……그게 정말이냐?”
물론 황태자는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 물었다.
제 막냇동생의 성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으니까.
“제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세르히 백작이 깨어나면 사실이라고 말해 줄 겁니다. 게다가, 게다가…….”
문득 떠올리는 것만으로 치욕적인 데다, 세르히 백작이 안타까워졌다.
이틀 전 그날, 리카르도는 폭력적으로 방화벽을 뚫고 들어와 만신창이가 된 자신과 안토니아를 강제로 떨어트리지 않았던가.
심지어 시종은 황태자 운운하며 자신이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녀도, 그녀도……. 분명히 억울할 거야! 나도 형님이 기다린단 이야기만 아녔다면……!’
제레미야는 억울한 듯 외쳤다.
“제가 세르히 백작을 에스코트하겠다는 걸, 숙부님이 강제로 그녀를 빼앗아 갔단 말입니다!”
황태자는 수 분 정도 인내심 있게 동생의 칭얼거림을 들어 주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그는 책상 앞에 쌓인 갖가지 서류들을 보면서도 그저 펜만 만지작거렸다.
‘그 아이의 말이 사실일까.’
물론 제레미야는 자신의 말이 무조건 사실이라며 몇 번이고 강조하긴 했다.
게다가 폐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제레미야치고는 애썼다 싶을 정도로 자세히 들려줬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말이 점점 포장되었단 말이지.’
한마디로 어느 정도 제 모자란 막냇동생의 망상이 껴 있을 거란 소리였다.
‘하지만…….’
제레미야의 말 중 기껏해야 절반쯤 사실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황태자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손 놓고 숙부님에게 서북부 세력을 홀랑 내어 주고 싶진 않단 말이지.’
황태자의 펜 끝이 톡, 톡 하고 책상을 여러 번 두드렸다.
고심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요즘 제레미야를 나름 얌전하게 두긴 했지.’
황태자의 입가에 비죽이 미소가 솟았다.
‘슬슬 그 아이가 난리를 칠 때가 되긴 했어, 게다가 납치까지 당하고 그 아이 나름대로 큰일을 겪은 게 아닌가.’
황태자는 펜을 딱 내려놓았다.
어차피 안토니아는 의식이 없었다.
혹시 몰라 안토니아의 상태를 보고자 드나드는 신관에게 확인도 끝마쳤다.
‘거짓인 게 드러난다 해도 내 면이 구겨지는 건 아니니.’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제레미야의 바람을 들어주는 척하며, 흙탕물에 빠질 만한 상황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썼다.
막냇동생은 이미 귀하고 가치 높은 상품이 아니었다.
‘쓰지 못할 정도로 흠집이 나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그 아이가 사고 한두 개 더 쳐 봐야 그 누구도 실망하지 않을 테고.’
오히려 지금처럼 흠집이 난 정도니 의미가 있었다.
안토니아와 같이 작위 승계를 원하는 여성 귀족에게 남편으로 쥐어 주어 포섭하기에 딱이었다.
‘가여운 제레미야, 너는 영영 작위를 받지 못하겠지.’
그러니 사랑이라도 이루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만으로도 자신은 부친보다도 훨씬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저 처음부터 싹을 짓밟았을 뿐, 죽일 생각은 없지 않은가.
황태자는 시종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신문사에 연락하게.”
* * *
[세르히 백작의 목숨을 건 헌신!]
리카르도가 각 신문사에 자신과의 관계를 뿌리고 사흘째가 되는 날 신문을 보며 안토니아는 즐거워했다.
‘어쩜 이렇게 생각한 대로 반응을 보여 주는 건지.’
게다가 이 말끔한 신문사의 기사.
마치 제레미야가 낸 것처럼 위장했으나, 그는 이럴 만한 머리가 없었다.
‘황태자도 참 치졸하지.’
그러니 회귀 전, 제레미야가 그토록 열등감에 빠져 살지 않았겠는가.
황태자는 제위를 위해 제레미야를 제게 팔아넘겼다.
결혼할 때 그는 막냇동생에게 작위를 약속했으나,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았다.
게다가 제위에 오른 뒤에는 그를 구슬려 불필요한 일에만 이름을 내세우곤 했다.
‘멍청한 제레미야는 자신이 원하는 걸 몇 개 쥐어 주면 홀랑 넘어가곤 했지만.’
뭐, 제레미야에게도 그만큼 매달릴 구석이 황태자밖에 없었단 증거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최악의 경우엔 제레미야의 면을 구기는 정도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과연 황태자가 생각한 대로 될까?
안토니아는 그렇게 협조적으로 굴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신문을 훑어본 뒤, 오늘 아침 루퍼스가 보낸 편지를 열었다.
[라테르 후작저에서의 생활은 아주 편하지? 남은 이렇게 뼈 빠지게 고생하고 있는데.]
그랬다. 리카르도가 안토니아를 데려다준 장소는 다름 아닌 라테르 후작저였다.
황태자가 이런저런 뒷조사를 할 거라 생각하고 손 쓰기 어려운 최적의 공간이었다.
신관 몇몇을 매수하려 들었다지만, 이미 그 신관들도 안토니아와 리카르도가 매수한 참이었고.
[ 아가씨가 말한 정보는 모두 찾았어, 아가씨의 말대로 황태자는 쟈힘과 관련된 자들을 모두 엄하게 벌한 모양이야.
고문에 가족을 이용한 협박도 서슴지 않았더라고.
결과는 아가씨가 신문에서 본 대로야.]
황태자는 절대 자신에게 흠집이 나는 걸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쟈힘 건을 캐다 보면 자신이나 안토니아의 실책에도 닿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두 쟈힘이 꾸민 소행인 것처럼 철저하게 죄인들을 관리했다.
죽여서 입막음을 하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그는 요즘 한참 자애로운 황태자 이미지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으니까.
신문에서는 그저 좀 험한 지역으로 노동을 보낸 거라고 나왔다.
물론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막내를 아끼며, 크게 걱정했는지도 빼놓지 않고 어필했다.
‘천하의 거짓말쟁이 같으니.’
뭐, 그러니 황제의 네 아들 중에서도 황태자 자리를 쥔 것이겠지만.
[아가씨, 위험한 짓을 할 거면 꼭 언질을 해 줘. 이미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진 않으니까.]
루퍼스는 안토니아가 부탁한 정보를 모두 알려 준 뒤, 마지막에 그런 말을 남겨 두었다.
‘우리 루페까지 각오할 필요는 없는데.’
조금 미안해졌다. 역시 루퍼스는 자신이 뭘 하려고 결심한 건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물론 오랜 소꿉친구의 그 결심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라 황실을 건드리기로 마음먹은 거니까.
* * *
안토니아가 신문 기사 점검을 끝냈을 쯤, 타이밍 좋게도 기다리던 방문객이 찾아왔다.
“몸은 좀 괜찮니, 안토니아?”
“그럼요, 이스베르가 님.”
“막내 황자궁이 난리가 난 모양이야. 신문사를 몇 군데 불렀다고 하더라고.”
“그럴 줄 알았어요, 막내 황자님이 지금껏 절 귀찮게 한 걸 보면요.”
“그러게, 어쩌겠니. 이렇게 우리 안토니아가 귀여워서인데.”
이스베르가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의 손끝에는 리카르도가 준 약혼반지가 있었다.
“내 동생으로 정말 괜찮은 거니?”
장난스러운 그 말에 안토니아는 슬쩍 시치미를 뗐다.
“그러게 말이에요, 이스베르가 님의 동생은 도대체 왜 그렇게 바보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요!”
안토니아의 부루퉁한 말에 그녀는 기대했다는 듯 반기며 시선을 맞춰왔다.
“그렇지? 드비조차도 말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말이야!”
“정말요? 빅터 경이 그렇게 말할 정돈데…….”
이스베르가는 안토니아의 반응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스베르가와 안토니아가 생각하는 드비의 이미지가 전혀 다른데도 대화가 맞닿았으니까.
안토니아는 세간의 평대로 드미트리어스 빅터, 드비를 진중하고 말수가 적은 기사로 알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 주제에 본인이 제일 똑똑한 줄 아니, 드비가 억울해하지.”
“이스베르가 님은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5년, 아니 6년 전부터?”
“그렇게나 오래전부터요?”
“그럼, 걔가 동부에 갔을 때 황제 폐하의 눈을 속이려고 내 이름을 팔아먹은걸.”
“어머.”
“못된 동생이지?”
이스베르가의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리카르도를 욕하고 난 용서해 주렴. 정말로 그 아이가 그토록 오래 바보짓 할 줄은 몰랐거든. 난 그렇게 키운 적 없는데 말이야.”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입가가 절로 움찔거리는 걸 느꼈다.
그녀는 자연스레 이스베르가의 품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만약에 제가 리샤르를 거절했다면 도와주실 거였지요?”
“응, 한 번 정도는. 남동생이 연애 문제로 고민하는 걸 오래 보는 것도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스베르가는 부탁하는 듯한 말투로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너에게 이해해 달라고 하고 싶진 않지만, 걔는 이상하게 소중해질수록 겁쟁이가 되는 모양이야.”
“왜요?”
“글쎄, 어머니를 눈앞에서 잃어서일까?”
갑작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제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예요?”
안토니아의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걔는 말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니, 오히려 본인도 왜 그렇게 겁내는지 모를걸. 바보잖니.”
농담을 섞으며 이스베르가는 안토니아가 생각하는 것만큼 무거운 사정이 아니라는 듯 다독였다.
“어릴 때는 황궁에서 지냈어, 나도 리카르도도. 걔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는 나름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지만 걘 아니었거든.”
안토니아는 이스베르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리카르도에게 꽤 엄하게 굴었어. 걔는 은근히 무뚝뚝한 주제에 한번 정 준 사람한테는 물러서 말이야.”
이스베르가는 안토니아도 잘 알 거라는 듯한 눈으로 이야기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어머니는 그리 다정한 분은 아니셨어. 나는 그 자리에 없어서는 모르겠지만 돌아가시면서 리카르도에게 뭔가 하신 것 같아.”
“말하지 않았어요?”
이스베르가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본인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니. 그래도 그게 뭔가 영향을 남긴 모양이야.”
이스베르가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 아이는 내게도 너에게 한 것처럼 말은 안 하고 빙빙 돌며 자기를 버리지 말라는 듯 굴었거든.”
안토니아는 그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자세한 사정을 들은 것도 아닌데 그만 이해를 해 버렸다.
‘나는 부모님을 눈앞에서 잃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 충격으로 말과 표정을 잃었으니까.’
안토니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이스베르가에게 물었다.
“지금도 그렇게 구나요?”
“다 큰 형제가 뭐 그렇게까지 애틋하겠니. 아마 너한테도 이제 바보짓을 하진 않을걸? 그때도 내가 그만하라고 한 뒤로 사라졌거든.”
꽤 신랄한 이야기였다. 물론 말뿐인 이야기 같았지만.
보통은 애틋하지 않은 상대를 위해 굳이 이런 수고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동안 리카르도에게 답답했던 점을 이스베르가에게 잔뜩 털어놓았다.
물론 이스베르가는.
“그렇지? 혹시라도 리카르도가 싫증 나거나 바보 같은 짓을 하거든 꼭 말하렴. 같이 걔에게 복수할 방법을 고민해 줄 테니까. 난 네 편이야, 안토니아.”
하나뿐인 남동생에게 가차 없는 누나였다.
* * *
[제레미야 황자님, 단독 인터뷰
- 그날, 세르히 백작은 제레미야 황자님만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안토니아의 예상대로 딱 6일째가 되는 날.
황실에 우호적인 신문사에 제레미야의 단독 인터뷰가 실렸다.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할 때만 머리를 쓰지.’
안 그래도 머리가 좋지 않은데, 이러니 발전이 없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 부분이 걸작이었다.
[세르히 백작은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황자님 없이 저 혼자 살겠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구해 드릴게요!’]
왜 구했냐는 질문에 ‘황자님이라서’라고 한 말이 이토록 변형되다니.
신문 기사만 읽으면 안토니아는 자기가 죽더라도 제레미야만큼은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목숨을 건 대단한 애정의 소유자였다.
실상은 전혀 달랐는데 말이다.
안토니아는 곧장 하녀를 불러 지시했다.
“트라체스 대공 전하를 불러 줘.”
제레미야를 단꿈에서 깨울 시간이었다.
* * *
“황자님, 황자님!”
“아침부터 시끄럽게 왠 소란이야!”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에 제레미야는 팩 성질을 부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흘 전 황자궁에 들어온 이 시종은 말귀는 잘 알아듣는데 이렇게 한 번씩 제멋대로 굴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늘 자신의 눈치만 보며 굼뜨게 굴던 자들보다는 나아 제레미야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세르히 백작님이 일어나셨답니다!”
“그, 그게 정말이야?”
“그럼요! 정말이고 말고요.”
‘역시 좀 괜찮은 시종이라니까.’
제레미야는 조금 전까지 자신의 단잠을 깨운 것에 짜증 내던 것을 금세 잊어버렸다.
쟈힘이나 다른 시종들은 제때 알려 주지도 않던 정보를 이렇게 바로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얼른 준비를 도와줘, 세르히 백작을 가장 먼저 보러 갈 거야!”
지난 며칠간, 제레미야는 신문사 몇 군데와 인사하며 달콤한 미래를 꿈꿨다.
폐광에서 안토니아가 얼마나 자신을 챙겼는가.
게다가 리카르도 때문에 그런 식으로 헤어졌으니, 분명 자신을 찾을 거라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든지 도와드리지요, 하지만 황자님. 먼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제레미야는 옷장 문과 자신의 보석함을 활짝 열어 놓고 신나게 고르며 이야기했다.
시종은 마치 우리 황자님 안쓰러워서 어쩌나 하는 듯한 염려를 가득 담아 이야기했다.
“세르히 백작님께서 트라체스 대공 전하와 중대 발표를 하신다고 해서 서둘러 온 거거든요.”
“……뭐?!”
제레미야는 그 말에 말도 안 된다는 듯 외쳤다.
“왜? 왜 내가 아니라 숙부님을 먼저 찾은 거야……?”
제레미야는 여러모로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숙부님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그걸, 그걸 발표하려는 걸 거야!”
그 말에 시종은 죄송스럽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귀동냥으로 듣긴 했습니다만…….”
“뭔데, 뭔데?!”
제레미야는 빨리 말하라는 듯 자신이 입으려고 고른 셔츠를 든 채로 시종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무슨 말 해도 화 안 낼게. 네가 날 도와주려고 하는 거 알아……!”
고작 나흘이었지만, 오랜 기간 이 시종만큼 자신을 위해 움직여 준 사람이 없었다.
“약혼 발표를 하신다고…….”
“……뭐?”
제레미야의 큰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고개를 저으며 들고 있던 셔츠에 팔을 꿰기 시작했다.
“그럴, 그럴 리가 없어. 세르히 백작이, 아니야, 아니야!”
제레미야는 그렇게 말하며 시종에게 제 옷을 입혀 달라는 듯 채근했다.
“내가, 내가 가서 볼래. 형님, 형님에게는…….”
제레미야의 이야기에 시종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황자님, 황태자 전하께는 말씀드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응, 응……!”
제레미야의 머리로도 자신이 직접 그 자리에 간다고 하면 황태자가 화낼 거라는 것쯤은 잘 알았으니까.
* * *
“다들 일찍 왔군.”
미리 공지한 홀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리카르도 트라체스 대공이었다.
기자들은 혼자 온 그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세르히 백작님은 오시지 않는 겁니까?”
“아니, 조금 몸이 좋지 않아 잠시 쉬라고 내가 말했을 뿐이네.”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기자들을 향해 매서운 눈빛으로 경고했다.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늘 나는 세르히 백작과의 약혼을 발표하려 하네.”
그저 나직히 읊조리듯 하는 말인데도 이상하게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대들이 최근 일주일간 어떤 기사를 썼는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어.”
그 묵직한 말에 기자들은 모두 숨을 삼켰다.
특히 신문의 판매 수익에 매달려 되는대로 펜을 놀린 자들을 더더욱.
“곧 내 소중한 사람을 데려올 텐데, 누군가 혀를 잘못 움직여 그녀가 충격을 받는다면-.”
리카르도의 목소리가 더없이 서늘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는 그대들의 상상에 맡기지.”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남겨진 기자들은 등과 목이 동시에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리카르도가 수도에 돌아온 뒤, 워낙 얌전히 지내서 그들도 깜박 잊어버렸다.
심지어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대부분 안토니아나 이스베르가가 곁에 있다 보니 그가 저토록 위협적으로 군 적도 없었다.
그러나…….
‘서북부를 처음으로 안정시킨 분 아닌가…….’
‘마물은 어쩔 수 없다지만, 타국 놈들이나 야만족들이 트라체스 대공의 이름만 나오면 벌벌 떤다고 했으니.’
내일 가십 거리 삼기 좋게 부풀려 쓸 생각이었던 기자들은 순식간에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카르도가 안토니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기자들은 그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만하기로 유명한 그 리카르도 트라체스가 이스베르가를 에스코트할 때보다도 더 극진하게 안토니아를 데리고 들어왔으니까.
기자들은 숨을 꿀꺽 삼켰다.
이 잠깐의 태도만으로 리카르도 트라체스가 안토니아 세르히에게 진심이라는 걸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까.
* * *
“다들 와 주어 고맙군요.”
기자 한 명, 한 명만을 상대하는 자리였다면 당연히 하대했겠지만, 이번에는 여럿을 모아 둔 참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 리카르도를 시켜 그들에게 압력을 준 참이니 안토니아는 반대로 좀 부드럽게 그들을 대해 주기로 했다.
“저, 세르히 백작님, 이제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에 살짝 파리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폴리와 로레나가 정성을 다해 해 준 메이크업이었다.
그들은 ‘아직 상태가 온전하진 않지만 어떻게든 화장으로 혈색을 가린 듯한 얼굴’이라는 퀘스트를 잘도 소화해 주었다.
사실 화장 아래 안토니아의 혈색은 아주 좋았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도……. 그리고 대공 전하께서도 절 무척 신경 써 주신 덕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어요.”
“다행입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기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들 나름대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안토니아가 보지 않을 때면 리카르도가 흉흉하게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은 죄가 이미 있지 않은가.
그동안 황실이나 제레미야의 말만 믿고 쏟아 낸 기사가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안토니아와 리카르도가 약혼을 발표하다니.
솔직히 말해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자들은 신나는 진흙탕 싸움에 불을 붙일 생각이었다.
숙부와 조카의 치정 싸움이라니!
누가 들어도 재밌지 않은가.
그러나 도무지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의 눈에는 막 자리에서 일어난 안토니아가 자신들의 기사 때문에 무리하게 이 일정을 잡은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의 오해를 막기 위해서 말이다.
안토니아는 그런 기자들의 기류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들 중 지금 안달 난 자들이 아주 많을 거라는 것도 말이다.
특히 린스올 상단주 사건 때 안토니아에게 보복당해 놓고 또 헛짓거리 한 자들은 더욱 그랬다.
‘머릿속에서 아주 돈이 술술 빠지고 있을걸.’
그러게 누가 한번 한 경고를 무시하랬나.
안토니아는 그런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며 차분하게 리카르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 위로 표정이 드러나진 않았으나 편하고 안심이 된다는 듯한 눈이라는 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정도였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분위기였으니까.
“이렇게 서둘러 여러분을 모은 이유는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생각해서였어요. 그렇지요, 전하?”
안토니아의 말에 리카르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제가 의식을 잃은 사이, 저를 위해 말씀을 꺼내 주시지 않았어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말이에요. 하지만…….”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약혼반지를 낀 손을 기자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리카르도의 손 위에 얹었다.
“저는 이미 열흘 전, 대공 전하가 주신 고마운 청에 약혼하겠다고 화답한 차였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세르히 백작님?”
기자 중 하나가 황급히 질문을 던졌다.
“정말이에요, 설마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요……?”
씁쓸한 안토니아의 말에 리카르도의 눈매가 다시 한번 매서워졌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기자로서 한 번 더 확인하려는 차원에서…….”
“애초에 이번에 제가 살아 돌아올 수 있던 것도 모두 대공 전하 덕인걸요.”
“네? 그건 대공 전하께서 때를 맞춰 구출해 주셨다는 뜻입니까?”
“제레미야 황자님께서는 세르히 백작님이 목숨 걸고 지켜 줬다고 하셨는데 그건 황자님의 거짓말입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몸을 떨었다.
그러자 기자들은 술렁였다.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세르히 백작……. 힘들면.”
“아니, 아니에요. 전하.”
안토니아는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 기자들은 그 모습에 손에 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 질문은 안 되는 거였나?!’
특히 질문한 기자는 절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안토니아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는 듯 숨을 가쁘게 내쉬더니 애써 호흡을 되돌리며 찬찬히 입을 열었다.
“목숨을 건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제레미야 황자님과도-.”
그렇게 입을 연 기자는 순간적으로 귓가에서 검이 ‘철컥’ 하고 빠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옆에는 대공가의 유명한 기사, 드미트리어스 빅터가 서 있었다.
아주 큰 키의 그는 무뚝뚝한 눈으로 그저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기자는 당연히 입을 꽉 다물었다.
“죄송해요, 말하는 게 쉽지는 않네요. 다만, 다만…….”
“괜찮습니다. 세르히 백작.”
“아니에요, 이대로 모두가 오해하게 만들고 살 수는 없지요, 저만이 아니라…….”
안토니아는 이렇게 위험한 염문설이라니 견딜 수가 없다는 듯 리카르도의 팔을 꼭 잡았다.
“대공 전하께도,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실례인걸요.”
그리고 안토니아는 그때, 품속의 통신구에서 신호를 받았다.
다름 아닌 제레미야가 홀 안으로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몇 초를 더 벌고자 숨을 내쉬었다.
탕-! 하고 홀의 문이 열린 순간.
안토니아는 모든 걸 각오했다는 듯한 얼굴로 모든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 모습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명예를 위해 겨우 황실과도 연관되는 사실을 밝히는 가련한 피해자로만 보였다.
“제레미야 황자님께서 저에게 자신을 지켜 달라고 방패로 삼으셔서…….”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괴로운 듯 입술을 한번 꾹 다물었다가 간신히 입을 열며 입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안토니아에게 집중하던 기자들은 홀린 듯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는 저와, 그리고 이 나라의 귀족으로서 황실의 황자님을 지키고자 목숨을 건 거랍니다.”
덕분에 기자들은 보지 못했다.
안토니아의 눈빛이 한없이 날카롭고 냉정하게 제레미야를 향했단 것을.
그러나 그녀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은 제레미야는 그 눈빛도 이 상황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문을 꽉 쥐었다.
안토니아의 예상보다는 제레미야는 참을성이 있었다.
무려 수 초가량 가만히 있었으니까.
그것도 참으려고 참은 게 아니라 실상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에 가까운 듯했지만.
제레미야는 자신에게 확 쏠린 여러 시선과 안토니아의 그리 곱지 않은 눈길에 강한 데자뷰를 느꼈다.
‘왜, 왜, 다들 저렇게 보는 거야?!’
마치 고대하던 자신의 첫 황실 무도회 때와 비슷한 감각을.
그는 문손잡이를 구명줄처럼 잡고서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르히 백작!”
“저는 그저 사실만을 말한 것뿐이랍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대는 분명…….”
제레미야의 말에 안토니아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지만 황자라는 그 지위가 너무도 대단하게 여겨진다는 사람처럼 말이다.
“분명히 저는 말씀드렸어요, 황자님께서 왜 본인을 구했냐고 물었을 때…….”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모두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다들 뒷말을 듣고자 숨소리조차 죽였으니까.
안토니아는 리카르도의 손을 꼭 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했다.
“황자님이기에 목숨을 구해 드리는 것이라고 말이에요. 또한.”
그녀는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처럼 좀 더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황자님께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저희를 죽이려 드는 쟈힘을 맞닥뜨렸을 때, 제 뒤에 숨어 어떻게든 해 보라며 말씀하셨잖아요.”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제레미야를 향해 예를 갖추듯 살짝 무릎을 굽혔다 폈다.
“그러니 이 나라의 귀족인 제가 어떻게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겠어요, 황족을 보호해야 하는 건 의무인데요.”
제레미야와 안토니아를 오가며 질문할 곳을 찾던 기자들의 목표가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켰다.
게다가 황자라곤 해도 작위 하나 없어 ‘전하’ 소리도 듣지 못하는 제레미야가 흉악한 기세를 보이는 리카르도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정말이십니까, 황자님!”
“분명히 이틀 전 인터뷰 때는 세르히 백작님이 먼저 나서서 지켜 주신 거라고 했는데요!”
“도주할 때 손을 잡았다고 한 건 어떻게 된 말씀입니까?!”
당연히 제레미야는 그 몰려드는 주문을 감당할 재주가 없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답하는 것 대신 그저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세르히 백작, 그대, 그대의 마음을 속이지 마!”
마치 망상병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수, 숙부님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작은 한숨을 내쉬며 리카르도에게 몸을 기댔다.
“황자님, 저는 폐광에서도 분명히 말씀을 드렸어요. 저는 황자님을 선택할 수 없다고요.”
그녀는 더없이 신뢰감 가득하고 친근한 눈으로 리카르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미 몇 번이나 대공 전하의 청을 보류하고 도망치기도 하다 겨우 결심한 마음이에요. 그러니 황자님, 제발…….”
그녀는 마음에 없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시달려서 힘든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려 드는 제레미야의 눈에도 안토니아의 눈길이 자신을 향하는 것과 너무도 달라,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제발 저를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황자님이 예전에 말씀하셨듯, 고작 백작에게는 너무도 감당키 어려운 마음입니다.”
“왜, 그, 그런 말을 아직도 기억-.”
저도 모르게 말하던 제레미야는 말을 뱉어 놓고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간 안토니아를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 그 한마디만으로도 기자들이 부풀려 쓰기엔 충분하다는 걸 말이다.
“아니야, 아니, 아니라고! 나는 세르히 백작에게 진심으로……!”
제레미야는 다급하게 부정하며 팔을 내저어 보았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채였다.
그는 도무지 기자들의 시선도, 그리고 안토니아나 리카르도의 시선도 견딜 수가 없어졌다.
늘 바보 취급 당하며 알게 모르게 무시당하던 제레미야였기에 저를 비웃는 눈빛만큼은 너무도 잘 알았다.
한둘이라면 무시할 수 있었지만…….
“다들, 다들 보지 마, 보지 말라고!”
제레미야는 도무지 견딜 수 없어져서 뒷걸음질을 쳤다.
납치 사건 이후로 종종 꿈에서 보던 쟈힘의 눈 같았다.
자신을 발판으로 삼을 생각 가득하던 그-.
“아아아악! 싫어!!”
그대로 제레미야는 뒤돌아서 도망쳤다.
급작스레 자기 혼자만 그 끔찍했던 폐광으로 데려다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안토니아는 달아나는 그의 모습을 그저 차갑게 바라보았다.
동정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 * *
[세르히 백작의 생환은 모두 대공 전하의 혜안 덕이었다!]
[폐광의 악몽, 두 분은 무슨 일을 겪었나!]
[트라체스 대공 전하와 세르히 백작님, 약혼 발표!]
예상대로 1면 내용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신문사는 가장 안전해 보이는 약혼 발표를 앞에 실었다.
좀 더 소극적인 곳은 리카르도가 안토니아에게 총을 가르쳐 준 적이 있어, 대비할 수 있었단 사실을 실었다.
좀 용감한 곳은 제레미야의 말과 안토니아의 말을 종합해 그저 사실을 정정하는 듯한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이럴 거면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될 텐데 말이야.”
“가만히 있으면 파산인데, 황태자의 분노를 받는 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실일 테니 당연하겠지.”
[진실 앞에서 도망치는 제레미야 황자님!]
가장 말도 안 되게 부풀려서 기사를 써 댔던 신문사는 아주 직설적으로 신문을 실었다.
“네 덕이야, 루페.”
“별말씀을, 오히려 덕분에 나는 좀 더 빨리 카메라를 공급할 수 있게 돼서 좋은걸.”
그는 신난다는 듯 안토니아를 만난 자리에서도 카메라를 조립하고 있었다.
안토니아는 이번에 자신을 배려해 기사를 내 준 신문사에만 특혜를 주기로 했다.
다름 아닌 루퍼스의 ‘3초 카메라’ 공급이었다.
루퍼스가 각 신문사에 1분이면 찍히는 카메라를 공급해 준 덕에 슬슬 사진을 찍는 게 쉬워지긴 했으나, 여전히 급박한 상황에선 차라리 그림으로 그리는 게 정확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3초 카메라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이제 많은 취재 현장에서 카메라를 활용하기가 쉬워졌다.
게다가 루퍼스는 촬영에 필요한 기타 장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할인을 해 주기로 했다.
대신, 안토니아와 리카르도에 대해 나쁜 기사를 찌끄려 댄 곳에는 반대였다.
모두 비싸게 공급하기로 한 데다, 기껏 빌려주던 1분 카메라도 모두 회수하고 그들에게는 초고가로 판매하겠다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뿐만인가.
“루페의 기술을 따라 한 카메라조차 쓰지 못하게 해 준 덕이지. 안 그랬으면 계속 뻗댔을걸?”
루퍼스는 그 말에 뿌듯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토니아가 계속해서 기술을 제한시켜 유통하게 하자, 루퍼스는 남는 시간에 자기 기술을 훔쳐다 만든 기계를 추적하는 마법을 개발해 냈다.
그에게 알리지 않고 팔거나 사용할 때마다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말이다.
약혼 발표를 한 직후 루퍼스가 그 사실을 공지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자들은 찾아와 사정했다.
‘저희가,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르히 백작님, 크롬프트 상단주!’
‘어떻게 한 번만 저희를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레미야와 황태자에 한해 이 자극적인 보도는 모두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물론 안토니아도 루퍼스도 쉽게 넘어갈 생각 없었다.
이미 한번 경고를 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건 그들이지 않은가.
“나뿐만은 아니지.”
그러나 루퍼스는 참으로 겸손하게도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트라체스 대공 전하에게도 엄청 겁을 먹었을 거야.”
안토니아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앞에서만 순둥한 대형견처럼 굴었을 뿐, 리카르도 트라체스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맹수와 같은 자였으니까.
* * *
“아바마마, 정말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뭘 말이냐?”
이른 아침, 황태자의 방문에도 황제는 그저 느긋하게 차나 홀짝였다.
“아바마마, 제레미야가 부끄럽고 속상하다며 황자궁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제레미야 또한 아바마마의 아들인데, 어찌……!”
“이 한심한 기사 때문에 말이냐?”
“황실을 능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 멋대로 떠들게 두면 제레미야가 너무도 불쌍-!”
쨍그랑-!
황태자가 언성을 높이자마자, 황제는 그대로 잔을 던져 깨 버렸다.
“세르미아, 목소리가 크구나.”
“……아, 아바마마.”
“짐이 요즘 너를 너무 오냐오냐했나 보아.”
황태자 세르미아는 그 말에 자세를 바로 했다.
지난 황실 무도회 이후, 황제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덕분에 어지간하면 너그럽게 굴어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이 한심한 꼴에 짐이 무얼 해야 한단 말이냐?”
“그, 그것은…….”
“황실을 능멸해? 이 자들이?”
황제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목소리로 혀를 찼다.
“원인을 누가 제공했지? 세르미아 아인 솔리스.”
“그……것은, 제레미야가……. 아직 어리고 뭘 몰라…….”
“그 말을 네가 몇 번이나 짐에게 읊었는지 아느냐?”
“…….”
황태자 세르미아는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그때마다 짐은 그랬지, 제레미야를 다시 짐에게 맡기라고 말이야. 그럼 네가 또 말하지 않았느냐.”
황제는 나직하고 유쾌한 목소리로 읊었다.
“막내의 일로 어찌 짐을 귀찮게 하겠냐고 말이야, 첫째인 너의 책임이라고.”
“저, 저는…….”
“어찌할까, 네가 애초에 달려온 것도 가엽고 불쌍한 막내 때문이 아니지 않으냐.”
황제는 짓궂은 미소로 신문 구석에 그리 크지 않은 글씨로 적힌 내용을 들려주었다.
“황태자 전하의 관리만으로도 충분한 것인지 염려가 되는 바이다.”
“…….”
세르미아는 전신에서 피가 확 빠지는 것처럼 느꼈다.
정말로 구석에 박힌 그 몇 줄까지 설마 공사다망한 황제가 다 읽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그조차도 자신의 시종들이 저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체크해 준 덕에 알아차린 것인데.
“세르미아, 짐이 우습게 보이느냐?”
황제의 시선이 세르미아를 향해 느슨하게 박혔다.
그리 매섭지도 않은 눈길이었는데, 세르미아는 다리가 조금씩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탁, 소리를 닫히며 문이 닫혔다.
겨우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온 황태자는 자신이 어떻게 저 안을 빠져나온 것인지조차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황태자 세르미아는 황제의 조용한 분노에 그저 엎드려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잘 돌아가던 머리가 그 순간만큼은 공포에 지배당해 굳어졌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더욱 혀를 찼다.
‘어디까지 짐이 네게 실망해야 할까.’
세르미아에게는 그게 모두 제 자리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졌다.
‘설마 아바마마가…….’
어릴 적부터 줄곧 품었던 불안이 스멀스멀 발밑에서부터 또 올라오는 것 같았다.
둘째와 셋째를 먼 곳으로 보내며 잘라 냈던 감각이 또 뿌리를 트는 기분이었다.
‘아니, 아니……! 난 그렇게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친형제들을 죽이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씩 잘라 냈다.
‘난 이 자리를 지킬 거야.’
세르미아는 아직 자신이 황제에 비하면 여전히 모자라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줄곧 고개를 숙이고 참는 것이었다.
‘제레미야는 3개월간 근신하라고 해라, 또 날뛰었다가는 짐이 너에게 직접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납작 엎드려 잘못했다고 빈 끝에 들은 이야기는 너무도 참담했다.
황제를 찾아가며 생각한 목적 중 그 어느 것도 손에 쥐지 못했으니까.
세르미아는 주먹을 꽉 쥐고서 제레미야의 방을 향하며 결심했다.
‘……아바마마가 날 돕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이뤄 내는 수밖에.’
* * *
하지만 제레미야의 방을 찾은 황태자 세르미아는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도 자신이 훌륭하게도 멍청하게 키운 제레미야가 뜻밖의 태도를 보였으니까.
제레미야는 이불을 돌돌 말고서 황태자를 향해 애원했다.
“형님, 저는……. 저는 세르히 백작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레미야, 백작은…….”
“처음입니다. 제가, 제가 그간 막무가내로 억지를 쓴 적이 많은 건 압니다.”
어제만 해도 제 궁을 발칵 뒤집어 두었던 제레미야는 하루 사이에 예상외로 차분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형님께서 안 된다 하면 그 말만큼은 들었습니다. 형님께서 하라고 하면 싫어도 했습니다.”
제레미야는 이불을 끌어안은 채로 주춤주춤 세르미아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아픕니다. 상상하기 싫습니다. 세르히 백작이 계속, 계속 그렇게 절 바라볼 거라고 생각하면…….”
그 말에 세르미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룻밤 새에 제레미야가 철이 든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물론 바라는 내용은 철없기 그지없었지만.
“뭐든지, 뭐든지 하겠습니다. 형님, 전, 전 싫어요!”
“제레미야…….”
그러나 황태자가 아무리 머리를 써보아도 당장 발표한 안토니아와 리카르도의 약혼을 파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서북부를 내어 주기 싫어서, 나도 아바마마께 약혼을 불허해 달라고 청하러 간 거였는데 말이지.’
그 순간 세르미아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이 철없고 복잡한 생각 못 하는 제레미야를 이용할 방법이 말이다.
“제레미야, 미안하다.”
“네……?”
“내 너를 정말 돕고 싶어 아침 일찍 아바마마를 찾아갔었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황궁의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면 너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황태자는 자애로운 얼굴로 제레미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내가 아바마마께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었는데도 아니 된다 하셨다.”
“네……?”
“너도 알다시피 귀족 간의 약혼이며 혼인은 아바마마와 신전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그, 그렇지요, 그런데…….”
“아바마마께서는 불허할 이유가 없다고 하시더구나.”
“……어째서.”
제레미야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숙부님은 숙부님이고, 저는……. 저는 아바마마의 아들인데, 왜!!”
제레미야가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황태자는 몸을 낮추며 자신의 어리고 생각 짧은 동생에게 속삭였다.
“아, 불쌍한 우리 막내.”
“형님, 형님……! 정말 안 되는 건가요? 저는, 저는……. 형님마저 안된다고 하면 저는!”
제레미야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역시 거죽만큼은 형제 중 가장 예쁘장한 막내였다.
내용물을 모르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홀랑 넘어갈 만할 정도로.
“어찌 내가 널 버리겠느냐, 제레미야.”
황태자는 제레미야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제레미야, 아바마마께서 3개월간 근신을 명했다.”
“…….”
“뭐든지 하겠다고 하였지?”
제레미야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세르히 백작이 좋아할 만한 걸 찾아서 공부를 하자꾸나.”
“……네, 그렇게 할게요.”
황태자는 그 말에 속으로 크게 놀랐다.
늘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나갈 궁리만 하던 막냇동생이었으니까.
“아바마마께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아직.”
세르미아의 눈이 반짝였다. 여느 때보다도 더 총기 서린 눈빛이었다.
“신전이 남아 있지 않느냐.”
“신전은…….”
“아바마마께서는 현 교황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지, 하지만 나는 아니다.”
“형님……!”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기다리거라, 내가 너의 마음을 꼭 지켜 주마.”
제레미야는 그 말에 씩씩하게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그 한편의 촌극을 제레미야의 새로운 시종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번잡스러워.”
“아니, 하지만……!”
“내가 몇 번이나 직접 가서 물어보라 했는데.”
퉁명스러운 그 말투에 방 안을 몇 번이고 서성이던 라테르 후작은 부루퉁한 얼굴로 우뚝 섰다.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 아이가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다고.”
“하지만, 하지만 안토니아는 나와 있을 때 아주 귀엽게 웃는단 말이에요! 게다가 늘 할아버지 하고 부르며 얼마나 사랑스럽게-”
라테르 후작의 말에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노인은 혀를 찼다.
“쯧, 베네딕트, 그대는 왜 아직도 그리도 멍청해?”
“알렉산드라!”
멍청하단 말에 라테르 후작은 미간을 구기며 자신의 아내, 풀멘 변경백 알렉산드라의 이름을 불렀다.
“베네딕트, 내가 인상 쓰지 말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안 그래도 매번 전장에서 사느라 얼굴이 상해서 속상한데. 내가 당신 얼굴 보고 데리고 산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니, 알렉산드라. 지금 제 얼굴이 중요해요? 우리 손녀가 우리에게 말도 안 하고 약혼을 발표했는데!”
라테르 후작이 갑갑한 듯 말하자 풀멘 변경백, 알렉산드라는 크게 웃었다.
“오히려 우리에게 허락을 구했다면 나는 좀 실망했을 것 같은데.”
“뭐라고요?”
“내 손녀이자, 내 딸 레베르타의 아이가 그리 유순하냐고 말이야.”
알렉산드라는 찬찬히 소파에서 일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후작저에 딸린 연무장에서 안토니아는 한참 총을 쏘고 있었다.
마르고 가늘어서 영 부실해 보이는 몸이었으나 기개는 나쁘지 않았다.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우리가 저 아이를 10년 가까이 내버려 둔 것은 사실이지.”
“…….”
“개입하기 어려웠고, 서북부를 비울 수 없었고, 사정이야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다지만 그 사실이 변하는 것 아니지 않은가.”
알렉산드라의 냉정한 말에 라테르 후작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걸 겨우 돈 몇 푼과 그 아이를 위한 인테리어 따위로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니.”
알렉산드라는 정말 제 남편이지만 참 단순하다는 듯 그의 뺨을 톡톡 쓰다듬었다.
“하, 하지만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한단 말이에요.”
“우선 거래를 할까.”
“가족끼리 거래라니요!”
“가족?”
알렉산드라는 그 말에 명백히 자신의 남편을 비웃었다.
이 단순함 때문에 그를 사랑했던 거긴 하지만.
“단순히 피가 이어졌다고 가족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네, 저 아이를 살펴보니 그런 ‘놀이’는 몇 년이고, 아니 베네딕트 그대가 죽을 때까지도 할 수 있을 아이야.”
“아니, 안토니아의 뭘 알고 그런단 말이에요. 당신은 말 한 마디 섞어 보지 않았는데!”
“저 아이 엄마를 내가 낳았는데, 왜 모를 거라 생각하지, 베네딕트 라테르?”
라테르 후작은 또 말문이 막혔다.
“진짜 가족이 되려면 원망을 토해 낼 정도의 관계가 되는 게 먼저야.”
알렉산드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어른스러워 보인다고 해도, 아니 정말로 속이 깊다고 해도 정말로 가족이라고 생각했다면 마음속으로 기대감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저 아이가 그대에게 살가울 수 있는 건 그저 관련 없는 타인이 ‘도움’이 될 수 있기에 원하는 행동을 보여준 것뿐이니까.”
그래서 알렉산드라는 황급히 수도에 왔음에도 잠자코 있었다.
그건 단순히 제 딸 레베르타에 대한 원망 같은 해묵은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라테르 후작에게 차갑게 말을 쏟아 냈지만 알렉산드라 또한 부모였다.
자식을 먼저 앞세웠음에도 자신이 지고 있던 의무와 상황 때문에 가슴에 묻고서 손녀가 어떻게든 살아 있어 주기만을 바라던 게 고작이던 못난 부모.
그렇기에 알렉산드라는 더더욱 안토니아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손녀가 기대를 품었을 때, 그래야 원망을 편히 토해 낼 수 있을 테니까.
“우선은…….”
알렉산드라는 총을 한참 쏘다 리카르도와 편하게 미소 짓는 손녀를 위해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저 아이가 아직은 상대 못 할 자들을 상대해 줘야겠지.”
* * *
리카르도와 총 연습을 하고 돌아온 안토니아는 루퍼스가 보낸 쪽지를 받았다.
다름 아닌 황궁의 정보였다.
[황태자는 신전 쪽을 움직일 모양이야, 아가씨도 알다시피 우리가 제일 손쓰기 어려운 곳이 신전이야.
게다가 황태자가 제레미야 황자를 부추겨서 어떻게 움직일지는 아직 명확한 정보가 없어.
아가씨, 어떻게 할 거야?]
루퍼스는 곤란하다는 듯 쪽지를 보냈으나, 안토니아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황태자도 제레미야도 고작 망신당하고 약혼 발표를 한 정도로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래 주면 내가 서운하지.’
제레미야와 황태자 세르미아에게는 돌려받아야 할 빚이 아주 많았으니까.
게다가 신전에까지 손을 대 준다면 차라리 나았다.
안토니아에게는 판을 완전히 엎을 만한 힘이 있으니까.
‘차근차근 수렁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자신이 기껏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려 했던 예전 삶의 원한을 그들이 갚아 달라고 이렇게 아우성치는데, 당연히 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