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11화 (11/29)

#11.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안토니아는 막막함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할아버지와의 재회로부터 한 달, 설마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말도 안 돼…….”

안토니아는 무너져 내리는 출입구를 보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 순간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있었다.

‘기름?’

알아차린 그 순간.

펑, 퍼버벙!

굉음과 함께 불길이 확 솟구쳤다.

“……미쳤어.”

안토니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대로 함정, 아니 수작에 걸려 버렸다.

그것도 하필……!

“어, 어떻게 하지, 세르히 백작?”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제 곁에 있는 게 이 인간이라니.

“그대가, 그대가 책임져! 다 이게 그대가……!”

제레미야는 이 순간까지도 남 탓을 하기 바빴다.

“그대가 날 안 봐줘서 그런 거잖아! 내가 아니라, 숙부님을 그대가 선택해서 내가……!”

안토니아는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두 번째 삶까지 이 인간이랑 끝을 봐야 해?’

그럴 거면 도대체 자신에게 왜 두 번째 삶을 준 것이란 말일까.

안토니아는 자신에게 어떻게든 매달려 찡얼대는 제레미야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절대 못 죽어! 그것도 이 인간하고는!’

무엇보다도 아직…….

아직 리카르도와 해야 할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안토니아는 수수께끼를 안겨 준 그를 떠올리며 옷자락을 잡은 제레미야의 손을 쳐 냈다.

찰싹, 소리에 제레미야의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흔들렸다.

“황자님은 정말 모든 걸 남 탓만 하시네요, 그런 분을 제가 왜 선택해야 해요?”

애초에 제레미야의 남 탓 때문에 이런 꼴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한심하다는 듯 매정한 목소리에도 제레미야는 못 박힌 듯 서서 서둘러 움직이는 안토니아만 쳐다보았다.

* * *

한 달 전.

자선 행사가 끝난 뒤 안토니아는 수도에 올라온 이래로, 아니 회귀한 뒤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 가지 씁쓸한 점이라면 그게 자선 행사가 아니라 급작스레 밝혀진 조부모님 덕이 더 컸다는 점일까.

“주인님, 오늘 아침 도착한 우편물들이에요. 신문은 여기 있고요.”

“고마워, 로레나. 중요한 건-.”

“여기요, 제가 일차적으로 분류했어요, 명단도 정리해 두었고요.”

“역시 로레나야.”

그 말에 로레나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꽤 오래 병상에 누워 있던 로레나도 이제는 완전히 회복해 집사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안토니아는 분류에 맞춰 가지런히 놓인 편지들을 보며 어마어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들 속내가 빤히 보인다고 해야 하나.”

“주인님이 그만큼 대단한 분이라는 거죠.”

그때, 폴리가 따뜻한 차를 곁에 놓아 주며 자신이 뿌듯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길거리에 나가도 이제 수군거리는 시선이 싹 사라져서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몰라요.”

“그래? 다행이네.”

안토니아의 말에 로레나는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폴리, 그런 것까지 주인님께 다 말한 거야?”

“에이, 말한 거 아니야. 주인님이 넘 대단해서 알아차리신걸.”

안토니아는 그 말에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 일인데 내가 몰라선 안 되잖아.”

“……안 그래도 신경 쓰실 일도 많은데.”

“걱정하지 마, 로레나. 폴리의 글씨도 꽤 예뻐졌잖아.”

“그럼요! 이제 저도 얼마든지 답장을 쓸 수 있어요, 글씨체도 여러 개로 바꿔가며 쓸 수 있는걸요.”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는 폴리의 말에 로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으며 안토니아에게 명단을 확인하라는 듯 앞에 펼쳐 두었다.

“그럼 얼른 확인해 주세요, 주인님. 폴리에게 잔뜩 맡겨 둘 테니까요.”

“응.”

확인은 오래지 않았다.

로레나의 분류는 두리뭉실하지 않았으니까.

안토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폴리는 자연스럽게 중요하지 않다고 분류된 편지들을 자신이 따로 챙겨 두었다.

“이쪽은 그럼 오늘 오후까지 답장을 보내 둘게요.”

“고마워, 폴리.”

“별말씀을 다 하셔요, 이제 얼른 채비하셔요! 유글란스 백작님의 의상실에 가셔야잖아요.”

그 말에 로레나도 서둘러 정말 중요한 편지를 제외하고 안토니아의 눈앞에서 정리해 주었다.

* * *

여기저기서 초대장이 쏟아진 탓에 드레스도 더 필요해졌다.

원래라면 추가 주문이 어려운 시기였으나, 루퍼스가 그녀에게 제공한 마법 기계 덕에 안토니아도 무리 없이 새 드레스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크롬프트 씨는 참 대단하더군요.”

“그래요?”

“속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발뺌하긴요.”

유글란스 백작은 작게 웃으며 안토니아의 앞에 준비된 디자인들을 보여 주었다.

“저 말고도 다른 직공들이 편히 쓸 수 있도록 조금씩 개선해 주었답니다.”

“유글란스 백작님의 수고가 좀 덜어지겠네요.”

“조금만인가요, 덕분에 이걸 보세요, 지난번보다 세르히 백작님의 마음에 들 거랍니다.”

유글란스 백작은 자신 있다는 듯 디자인화를 가리켰다.

안토니아는 차분하게 디자인화를 살피며 감탄했다.

유글란스 백작 특유의 화려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지난번하고 조금 다르네요?”

“그렇지요? 평소 세르히 백작님이 입는 드레스를 보니 어떤 취향인지 알 것 같아서요.”

유글란스 백작은 화려한 장식은 상대적으로 좀 줄이는 대신, 특징적인 포인트를 넣고 원단이나 부자재를 훨씬 신경 썼다고 이야기했다.

“세르히 백작님은 선이 곱고 단아하여서 오히려 우아함을 강조하고, 굵직한 포인트는 보석을 활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표정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디자인화를 세밀하게 살펴보는 안토니아를 보며 유글란스 백작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들어요?”

“그럼요, 이 이상 더 좋을 거란 생각이 들질 않는걸요.”

“하지만 가끔은 화려한 드레스도 필요한 법이지요, 지난번에 대공 전하께서 선물한 드레스만으로는 좀 모자랄 거예요.”

유글란스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따로 준비한 디자인화를 보여 주었다.

약 3점의 드레스는 레이스를 풍부하게 써서 화려했으나, 지난번과는 달리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덜 들었다.

“너무 신기하네요, 화려한 드레스는 늘 조심스러웠는데.”

“호호, 괜히 수도에서 자리 잡고 옷을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유글란스 백작은 뿌듯한 듯 어깨를 쭉 폈다.

그 자신감 가득한 얼굴이 안토니아는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유글란스 백작님은 정말로 이 일을 사랑하시는구나.’

안토니아뿐만이 아니라, 유글란스 백작의 옷을 입는 다른 귀족들도 모두 각자의 매력이 돋보였다.

오죽하면 제레미야조차도-물론 유일한 장점이 멀쩡한 껍데기였지만-유글란스 백작의 옷을 입으며 멀끔하고 의젓해 보였으니까.

“그럼 이 중에서-.”

안토니아가 얼마나 살지 고민하고 있자, 유글란스 백작이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세르히 백작님이 마음에 들어 하면 모두 제작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네?”

도대체 누가?

안토니아는 또 리카르도가 일을 저질렀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유글란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라테르 후작가에서 전언이 있었답니다.”

“……할아버지께서요?”

유글란스 백작은 따뜻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 오시고 이틀째였나, 어떻게 아셨는지 부탁하시더라고요.”

“제게는 별말씀 없으셨는데…….”

“깜짝 선물을 하고 싶으셨던 것 아니겠어요? 하나뿐인 손녀시잖아요.”

“…….”

안토니아는 잠시 망설였다.

물론 라테르 후작가의 재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미 자선 행사 때도 2만 골드나 쓰셨는데…….’

회귀 전 세르히 백작으로서, 그리고 회귀 후에도 일찌감치 집안 재산을 관리한 안토니아였다.

그게 얼마나 큰 액수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글란스 백작이 나긋나긋한 말투로 안토니아에게 권했다.

“오히려 거절하면 속상해하시지 않겠어요?”

“……역시 그럴까요?”

“이스베르가 님에게 전해 들었답니다. 후작님께서 세르히 백작님을 자주 후작저로 부르신다고요.”

“네.”

“오래 떨어져 지냈으니, 그만큼 이것저것 해 주고 싶으신 걸지도 몰라요.”

그러더니 유글란스 백작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갓 손녀와 재회해 기쁜 할아버지의 재력 자랑은 즐기는 게 좋아요, 이 시기가 줄어들고 익숙해지면 아무래도 줄어들 테니까요.”

“그런가요?”

“그럼요! 게다가 라테르 후작님께서 먼저 디자인화를 보시더니 입이 귀에 걸리시던걸요.”

“……할아버지께서 직접 오셨어요?”

“그럼요! 여기가 우리 손녀가 옷을 맞추는 의상실인가! 하고 말이에요.”

흉내 내는 말투가 정말로 라테르 후작과 닮아 안토니아는 속으로 웃었다.

어쩐지 쑥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랑 잘 지내고 싶어 하시는구나.’

하긴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저녁을 먹으러 오라거나, 오후에 티타임을 함께하자며 하인을 보내는 걸 테였다.

‘그럼 내가 괜찮다고 말하면, 오히려 속상해하시려나?’

왠지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만 해도…….

‘네 마음에 들게 세공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원석을 준비했단다.’

라테르 후작은 푸른빛이 도는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 원석을 건네며 뿌듯해했다.

물론 한방에 대략적인 가격을 파악한 안토니아는 고개를 저었지만.

‘이건 너무 과한 것 같아요, 할아버지.’

‘과하다니!’

라테르 후작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손녀에게 과한 건 없어!’

‘하지만…….’

‘……역시 20년 가까이 연락도 않고 나타나 할아버지라고 하는 게 부담스러운-’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감사히 받을게요!’

험상궂, 아니 박력 있는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서글픈 표정은 여러모로 마음을 흔들었다.

이렇듯 라테르 후작은 선물을 주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을 사용하셨다.

덕분에 안토니아는 후작저에 갈 때마다 손에 무언갈 들고 돌아와야만 했다.

안토니아는 부담스럽다는 마음을 누르며 유글란스 백작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좋은 생각이에요, 분명히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유글란스 백작의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자신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자 준비한 것일 테니 말이다.

거래서에 서명을 하고 나자, 어느새 다음 장소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서둘러 나가 봐야겠어요.”

“아니에요, 요즘 세르히 백작님이 바쁜 걸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유글란스 백작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거기까지는 정말로 푸근하고 좋은 분위기였다.

“오, 오랜만이야, 세르히 백작!”

유글란스 백작의 말과 달리 ‘자신이 바쁜 걸 모르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대도 의상을 맞추러 온 것인가? 나도 이곳의 의상이 좋다네. 우리는 참 취향이 잘 맞나 보아.”

우연인 척 의상실에 들어온 제레미야는 멍청하게도 유글란스 백작에게 인사도 않고 곧장 안토니아에게로 다가왔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온 거지.’

지금까지 제레미야가 눈앞에 나타날 때마다 좋은 적이 어디 있던가.

안토니아는 무시하고 나가 버린 것을 참으며 그에게 무릎을 살짝만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어디 드레스는 잘 맞추었는가? 그러고 보니 지금 외출복은 유글란스 백작이 만든 게 아닌 것 같군.”

“세르히 백작령 의상실에서 맞춘 거랍니다.”

“쯧, 뭐, 세르히 백작이 입으니 나쁘진 않다만, 그대의 격을 생각하면 되도록 그런 건 안 입는 게 좋겠군.”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귀 전엔 네가 사치스럽다고 욕하던 그 드레스거든.’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안토니아는 제레미야와 더 말 섞고 싶지 않았다.

“저는 이런 드레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활동할 때는 이만한 게 없거든요.”

“흠, 흠.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황자님, 제가 선약이 있는지라 물러나도 괜찮을까요?”

“뭐?!”

제레미야는 그 말에 눈을 부릅떴다.

지금 감히 자신의 말을 끊은 것이냐는 듯.

안토니아는 그가 화를 내면 화를 내는 대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뒤집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흠, 흠. 그래, 일정이 있을 수도 있지.”

그답지 않게도 그는 너그러운 체하며 말했다.

“그래도 아쉽군, 모처럼이라 라방드에서 티타임이라도 가지자고 권할 생각이었는데.”

그는 마치 은근하게 이래도 거절할 거냐는 듯 말했다.

카페 라방드는 어지간한 귀족들도 한 달 전부터 예약해야 갈 수 있는 곳이긴 했으니까.

‘우리 가계에도 소소한 타격을 입혔고.’

제레미야는 특히 저 가게의 디저트를 좋아해서 수도에 올 때마다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심지어 라방드의 주인도 뺀질거리는 데다 재수 없는 남자였고 말이다.

‘백작님께서 황자님을 모셔 갔으면서 겨우 이 정도에 비싸다고 하시는 건가요?’

사람을 깔보는 듯한 그 태도란!

덕분에 안토니아는 마음이 더욱 차갑게 식었다.

“마음 써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황자님께서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네요.”

안토니아는 깔끔하게 인사하며 제레미야의 앞을 유유히 지나쳤다.

“어, 어? 그, 그러게.”

제레미야의 목소리에서 떨떠름함이 느껴졌다.

설마하니 거절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은 모양이겠지.

안토니아는 그가 비장하게 내민 라방드 초대도 거절했으니 어지간하면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제레미야는 쉽게 질려 하는 데다 황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해 한번 거절한 상대에게 계속해서 손 내미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아는 그게 자신의 오산임을 깨달았다.

* * *

[막내 황자님은 세르히 백작에게 열중 중?

-제레미야 황자님의 좋은 영향을 줄 상대가 될 것인가!]

안토니아는 중간쯤의 지면에 적당한 글씨 크기로 써 내려간 그 기사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루페에게 이 기자의 약점이라도 찾으라고 할까.”

신문 내용 중 헛소리의 비중이 높을 때야 종종 있다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왜 좋은 영향을 주고 끌어 줘야 하는 건데!”

안토니아가 그녀답지 않게 버럭 화를 내자, 로레나와 폴리도 깜짝 놀라 그녀를 위로했다.

“정말 싫으신가 봐요, 주인님.”

“하긴 요즘 자주 마주쳤었지요, 막내 황자님과요.”

로레나의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상실에서 마주친 이후, 제레미야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뻔질나게 안토니아가 가는 장소마다 나타났다.

오죽하면 어제 티타임에서는…….

‘호호, 역시 젊다는 건 좋은 거예요.’

‘세르히 백작이 워낙 사랑스럽기는 하지요, 황자님도 요즘 좀 의젓해지신 것 같단 이야기도 있고요.’

‘세르히 백작, 한 번쯤 어울려 줘도 괜찮지 않은가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막내 황자님이 요즘 얌전하다며 좋아하시던데.’

딱 봐도 제레미야에게서 뒷돈이라도 찔러 받은 것 같은 귀족들이 자신을 은근히 떠보기도 했다.

물론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도 꽤 있었다.

‘전 잘 모르겠어요. 세르히 백작님이 왜 그러셔야 하죠? 세르히 백작님은 차분한 분이니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

‘호, 호, 호. 렘버트 자작 부인이 뭘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사람은 좀 다른 사람하고 만나야 좋은 법이랍니다.’

‘글쎄요, 저는 자작님과 공통점이 많아서 더 좋은걸요.’

렘버트 자작 부인의 말에 입 연 귀족들은 ‘공통점은 무슨.’ 하고 그녀를 비웃었으나, 안토니아는 정말 고마웠다.

물론 렘버트 자작만이 아니었다.

‘그, 안토니아, 혹시 너는 어린 남자가 좋은 것이냐?’

‘……네?’

어디서 소문을 들은 것인지 라테르 후작도 은근히 자신에게 질문했다.

‘황실……은 네게는 나쁜 선택은 아니다만.’

라테르 후작은 혹시라도 손녀가 조금이라도 마음 준 상대일까 말을 고르고 또 골라 이야기했다.

리카르도를 애송이라며 불러 댄 것과는 아주 다른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게 기사나 사교계 소문이 날이 갈수록 어이없어졌으니까.

물론 안토니아는 딱 잘라 이야기했다.

‘이 세상에 남자가 막내 황자님 한 분만 남는다고 해도 절대 그분을 선택하진 않을 거예요.’

‘저, 정말이냐?’

‘그럼요, 막내 황자님이야말로 얼굴만 멀쩡한 분이잖아요?’

그 말에 라테르 후작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암, 암, 그렇고 말고! 우리 손녀에겐 너무 모자란 상대지!’

비록 새어 나갔다가는 황실 모독죄라고 불릴 만한 소리였지만.

안토니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관두게 하지?”

고민하듯 중얼거린 말에 폴리가 생각나는 게 있다는 듯 말했다.

“정말로 연애를 하는 건 어떠셔요?”

“응?”

“저번에 읽었던 소설에 그런 내용이 있었거든요, 곤란한 상대를 떨어트리려고 가짜 연인을 두는 거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씁쓸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러려고 해도 상대가 있어야 하잖아, 게다가 상대방에게도 실례고.”

안토니아는 신문을 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레미야는 황자라…….’

지금 그런 편리한 계약 연애를 해줄 사람은 아마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세르히 백작님도 머리 아프시겠어요.”

드비는 리카르도가 보다가 내려놓은 신문을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본인은 딱히 별생각 없으신 것 같은데.”

“너도 아는 걸, 왜 다른 사람은 모르지.”

리카르도의 말에 드비는 껄껄 웃었다.

“저보다 멍청한가 보죠.”

“……제국의 미래가 어둡군.”

그 말에도 드비는 기분 나빠 하긴커녕 그저 웃기만 했다.

“그래서 그냥 지켜보시기만 할 겁니까? 또 슬쩍 도움만 주신다거나?”

“아니.”

리카르도는 딱 잘라서 말했다.

“이번엔 제대로 어필을 해 볼 생각이야.”

자신은 5년 전, 안토니아에게 맹세를 하고 떠난 그날부터 줄곧 이 순간을 그려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안토니아 본인도 아니고 배경 때문에 눈 팔린 것들에게 홀랑 내줄 생각이라곤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저열하게 구는 것들이라면.

“이렇게 갤러리들을 쓸 게 아니라, 제대로 본인과 의논해서.”

“세르히 백작님과 의논해서요?”

드비는 가능하겠냐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얼마 전에 말도 제대로 못 하셨으면서?”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굴어야지.”

“네?”

“거래를 하자고 할 거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5년간 멋대로 마음을 키워 버려서일까, 아니면 제게는 안토니아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라서일까.

‘바보같이 굴다가 돕기만 하기도 어려운 상황을 만든 것도 나.’

안토니아에게 자신은 황족 중 하나인 트라체스 대공이었다.

소꿉친구인 리샤르가 아니었다.

참 길게도 빙빙 돈 탓에 멀어진 거리를 좁힐 생각이었다.

“뭘 거래하시려고요?”

“연인의 자리.”

“……네?”

드비의 얼굴이 마치 ‘제정신이세요?’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백작님이 그런 걸 수락할 분 같진 않은데. 게다가 아무리 봐도…….”

“아무리 봐도, 뭐.”

“백작님은 전하의 마음 눈치채셨을걸요?”

드비의 말에 리카르도는 그게 뭐 어떻냐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애초에 자신이 티 나게 굴지 않았는가.

똑똑한 안토니아니까, 진작 눈치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 전하. 그분은 오히려 아니까 못할 거라고요.”

“아니.”

리카르도는 그 말에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토니아는 이유가 있으면 거래에 응할 거야.”

“네?”

그리고 이건 본인에게도 기회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래는 반쯤 구실일 뿐이라고나 할까.

‘우선은 안토니아와 제대로 만날 기회부터 만들어야 하니까.’

경계심 높은 제 아가씨는 거래가 아니라면 분명 요리조리 제게서 빠져나갈 궁리만 할 테니까.

“거래만으로 끝낼 생각도 아니고.”

“헉, 대공 전하 설마 깨달으신 겁니까아……!”

드비의 얼굴은 마치 ‘옆에서 즐기던 전하의 바보짓 구경이 곧 끝날 예정이라니!’ 하는 것 같았다.

“아악!”

“넌 얼굴이 늘 너무 시끄러워.”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리카르도는 드비의 항의를 무시하며 장갑을 끼고 모자를 들었다.

결심했으면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 * *

며칠 뒤, 안토니아는 한창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전 11시경에 크롬프트 씨가 다녀가시기로 했어요, 12시 30분에는 마석상과의 약속이 있고요. 3시경에는 드란제아 공작 부인의 티타임, 6시가 지날 무렵에는 후작가에서 저녁이 예정되어 있어요.”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는 로레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입을 드레스는?”

“아침과 낮 일정을 소화하실 때는 좀 편한 게 좋을 것 같아서 간단한 걸 선택했어요. 티타임과 저녁용으론 이건데 어떠셔요?”

폴리가 곧장 기다렸다는 듯 세 벌의 드레스를 보여 주었다.

“응, 딱 좋아. 아 참, 티타임용 드레스에는 숄과 보석은 다른 걸로 해 줘. 지난번 파티에서 본 사람 중에서 겹치는 분들이 있거든.”

“알겠어요, 주인님.”

폴리는 빠르게 다른 숄과 보석을 골라 정리해 두었다.

사교계 시즌이기도 했지만, 상단 일이나 요즘 여러모로 화제가 된 덕에 몸이 세 개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치장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기사를 읽고 편지에 답장을 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벌써 루페가 왔어?”

하녀에게 묻자 그녀는 곤란한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주인님. 막내 황자궁에서 쟈힘 폰스 님이 찾아오셨어요.”

불청객의 방문이었다.

안토니아는 정말로 이번에는 담판을 짓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 이용하십시오.’

며칠 전, 트라체스 대공의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보람이 없으니까.

* * *

응접실로 내려가자 쟈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본인이 무턱대고 불쑥 찾아오지 않은 점을 칭찬해야 하나.’

아주 징글징글했다.

미리 연락해도 안토니아가 핑계를 댈 거란 걸 눈치라도 챈 것인지, 제레미야는 늘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다.

‘절대 제레미야는 그런 생각을 못 할 텐데 말이지.’

특히나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몸을 낮추며 접근하는 건 말이다.

‘틀림없이 쟈힘의 작품이겠지.’

쟈힘 폰스, 안토니아는 저도 모르게 이를 꽉 물 뻔했다.

그에게는 그리 좋은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안토니아는 천천히 소파에 다가가며 쟈힘을 향해 말했다.

“방문 약속을 잡으려는 거면 하인에게 말하면 되었을 텐데?”

그 말에 쟈힘의 미간이 잘게 떨렸다.

설마 안토니아가 저를 보자마자 아랫사람 취급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방문 약속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세르히 백작님.”

“그럼 무슨 일인가, 황자님이 아니라 그대가 내게 볼 일이 있다는 건가?”

그 말에 쟈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당연하겠지, 머릿속으로는 날 무시하고 있을 테니까.’

회귀 전, 자신이 모실 황자비이며 백작가의 주인이었음에도 늘 불손하게 굴었으니까.

‘마님, 저나 마님이나 신분상에 큰 차이는 없지 않습니까? 그나마 저는 황자님에게 신임이라도 받고 있다지만…….’

‘지금 뭐라고……?’

‘마님은 그런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서로 좋게 좋게 배려하며 지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집사!’

‘마님이 워낙 능력이 없으시니 제가 백작가의 집사 따위를 해 드린다지만, 하, 제가 마님의 아랫사람입니까? 황자님의 아랫사람이지.’

그가 떠들던 말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는 처음부터 안토니아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제레미야가 작위를 받아 전하라고 불리길 바랐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레미야의 출세보다도 그의 시종으로 지내다 황태자에게 발탁되길 바랐다.

하지만 제레미야는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안토니아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 또한 막내 황자의 시종에서 멈추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봐야, 그건 본인 생각일 뿐이지. 정말로 능력 있으면 막내 황자의 시종이건 뭐건, 그 황태자가 정말 그냥 둘 거라고 생각한 건지.’

그래서 안토니아는 그를 처음부터 배려하며 대우할 생각 없었다.

황실의 시종이고 남작가의 영식인 게 뭐 어떤가, 그래 봐야 자신은 이미 작위를 받은 백작이라 그에게 하대를 하더라도 아무 문제 없었다.

“잠시 실례했습니다. 듣던 것과는 다른 분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듣던 것과 다르다고?”

안토니아는 속으로 그 말을 비웃었다.

은근히 말을 꺼내는 태도가 위축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분명 내가 착실하고 예의 바른 이미지를 유지하려 한다고 저 같잖은 머리를 굴리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가정부터가 잘못되었다.

안토니아는 예의를 지킬 생각이지, 모두가 쉽게 보고 달려들 상대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설사 자신이 쟈힘에게 하대했다고 알려져 봐야, 그 이미지에 금이 갈 리도 없었다.

“다들 세르히 백작님에 대해 예의 바르고 차분한 분이라 칭찬을 하시기에, 저희 황자님과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설이 너무 길어.”

“네……?”

“내가 한가롭게 그대와 사사로운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가? 나는 무슨 일로 왔냐고 분명 물었어.”

안토니아가 귀찮은 듯 이야기하자, 쟈힘은 입술을 잠시 꾹 다물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마치 지금만 자신이 참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황자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미안하지만, 난 선약이 있어.”

“세르히 백작님, 너무 무례하신 것 아닙니까?”

“뭐?”

안토니아는 기가 차다는 듯 쟈힘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몇 번이나 황자님의 권유를 거절하시는 겁니까? 오늘도 황자님께서는 직접 청하러 가신다는 걸 제가 우겨서 온 것입니다!”

쟈힘은 그러더니 마치 충성스러운 시종인 양 말했다.

“황자님께서 아무리 백작님에게 호의를 가졌다지만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세간에서는 백작님이 라테르 후작가를 믿고 황실도 무시하려 든다고 할 겁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정말 저것도 재주였다.

‘본인도 제레미야를 존경이라곤 하지 않으면서, 어디서 날 비난해.’

참 회귀 전과 비교해도 성격의 변화라곤 보이지 않는 자였다.

게다가 표정을 숨기는 데도 능하지 않았다.

‘본인은 나 때문에 제레미야가 타박한다고 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 제레미야가 봐도 비아냥거리거나 그저 자신의 출세를 위한 발판 정도로 여기는 게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뭐, 회귀 전엔 안토니아를 화살 받이로 만들어 편하게 지낸 자였지만.

안토니아는 하나도 급하지 않다는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나도 일정이 있어, 황자님께 분명히 말씀드렸네. 미리 연락을 해 달라고 말이야.”

“그랬으면 세르히 백작님은 시간을 내주실 생각이었고요?”

그 말에 안토니아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네?”

“한 번도 그런 적 없지 않는가.”

“그, 그건…….”

“내가 피할 거라고 지레짐작한 건 황자님……. 아니, 지금 보니 그대가 그렇게 말씀드린 건가?”

“아니, 그럴 리가요!”

정곡이 찔린 그는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백작님께서는 왜 사람을 이상하게 몰고 가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황자님께 전해 주게, 나는 오늘 일정이 꽉 차서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따로 약속을 잡자고 말이야.”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지금이라도 받아 줄 것처럼 로레나에게 손짓했다.

“일주일 뒤 점심시간은 비어있습니다. 열흘 후는 다소 더 여유가 있고요.”

안토니아가 그것 보라는 듯 쟈힘에게 시선을 던지자, 그는 입술만 깨물었다.

‘절대 여기서 그러겠다고 못할 걸?’

본인이 제레미야를 부추겨서 안토니아의 스케줄을 따라다닌 걸 테니 말이다.

여기서 반대로 안토니아가 미리 말해 줬다면 시간을 냈을 거란 소리를 제레미야에게 전했다간 틀림없이 폭언을 듣게 될 것이다.

아니, 폭언으로 끝나면 다행이겠지.

‘남작가의 차남으로 태어난 이상, 어떻게든 황실에 붙어야 자신이 바라는 자리를 얻을 가능성이 클 테니.’

안토니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진부한 1인극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쟈힘은 어떻게든 말을 둘러대며 이야기했다.

“황자님께서 긴 시간을 필요로 하시는 건 아닙니다! 한 번쯤 이야기를 나누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에 정말 답답하다는 듯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황자님이나 시종인 그대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안토니아가 중얼거리듯 한 말에 쟈힘은 큰 모욕을 당했단 것처럼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제레미야와 동급이라는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은 모양이었다.

“둘 다 참 내 일정은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네.”

그러자 오히려 쟈힘의 얼굴에서 힘이 풀렸다.

안토니아는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속을 뒤집는 건 이만하면 되었고, 애초에 제레미야에게 한 마디 할 요량이었으니까.

“로레나, 크롬프트 씨에게 오늘 밤에 잠시 시간을 내겠다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로레나와의 대화를 듣고서 쟈힘은 잘 생각했다는 듯 안토니아를 향해 말했다.

“겨우 상인과의 약속을 황자님의 부름보다 우선시 했다면 모두 이상하다 생각할 겁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대도 황자님도 나와 크롬프트 씨에게 큰 빚을 진 것으로 알게.”

“그래봐야 고작 상인인데 너무 과장하시는 군요.”

쟈힘은 일부러 안토니아를 도발하듯 말했다.

‘정말 속셈이 빤히 보이네.’

어떻게든 안토니아를 화내게 만들 속셈인 것이다.

‘이럴 때는 내가 한 번 미래를 겪어 봤다는 게 도움이 된다니까.’

그는 저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회귀 전에도 안토니아를 골탕 먹인 적이 있었으니까.

‘정말로 당신이 한 말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이렇게 쟈힘이 똑똑히 말해줬는데!’

‘그건-!’

‘듣기 싫어! 한 건 한 거잖아!’

단 두어 마디, ‘그런 건 별로지.’라고 한 목소리만으로 쟈힘은 안토니아가 제레미야를 욕하고 다니는 것처럼 꾸몄으니까.

이번에도 똑같은 수를 쓰려고 안토니아에게 별별 말로 도발한 게 빤히보였다.

루퍼스가 억지로 끼웠던 마법 역류 도구가 그가 들어온 순간부터 동작한 게 확실한 증거였다.

‘내 말 중 뭐라도 기록해서 날조한 뒤, 뒤통수 치거나 신문사에 제보라도 할 생각이었겠지.’

그러나 어쩌나, 유능한 루퍼스 덕에 다 틀어진 것을.

안토니아는 속편하게 쟈힘을 따라나섰다.

* * *

“어서 오게, 세르히 백작!”

제레미야는 카페 라방드의 발코니 석에서 안토니아를 맞이했다.

외부로 돌출된 자리이긴 했으나, 멋진 건축 설계로 행인들은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진짜 비싼 자리를 예약했네.’

라방드의 좌석의 가격표를 세세하게 꿰고 있는 안토니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제레미야가, 아니 황태자가 자신을 끌어들이는 데 진심이라는 건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예는 되었으니 얼른 앉게, 참 느긋하게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아.”

물론 안토니아는 자리에 앉을 생각이라곤 없었다.

안토니아는 해맑게 웃는 제레미야를 향해 한숨을 내쉬며 곧장 용건을 말했다.

“죄송하지만 황자님.”

“응?”

“저는 오늘 일정이 있습니다. 지금도 하도 황자님의 시종이 가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 따라온 것이고요.”

“알아, 그대가 바쁘다는 것쯤은……. 나도 신문 정도는 읽으니까!”

제레미야는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이야기를 하며 꿍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한 번쯤은 한두 시간 정도 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도 오죽하면…….”

안토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쟈힘을 한번 본 뒤 다시 제레미야에게 말했다.

“제가 지난번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미리 연락을 주시라고요.”

“하, 하지만…….”

제레미야는 당연히 억울한 듯 쟈힘을 바라보았다.

쟈힘은 설마하니 그 말을 들고 나올 거라곤 생각지 않은 건지 펄쩍 뛰었고.

“아니,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내가 듣기론 숙부님, 그러니까 트라체스 대공 전하와는 종종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고 들었는데!”

“그거야…….”

“고모님이 그대를 돌봐 주기 때문이라고 하지 말게, 정작 고모님과는 늘 시간을 잡아 만난다고 들었으니까.”

참 자세하게도 안토니아의 스케줄을 조사한 모양이었다.

‘요즘 일이 많아서 급하게 사람을 고용했더니, 로레나에게 한번 정리해 두라고 해야겠어.’

정보가 이렇게 술술 새다니 말이다.

안토니아는 제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쏟아낸 제레미야를 향해, 그리고 제 입맛대로 가공하여 이야기를 들려줬을 쟈힘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당연하지요, 대공 전하는 제 연인이니까요.”

“……뭐?”

단숨에 제레미야의 눈이 크게 변했다.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럴, 그럴 리가 없어! 숙부님은…….”

“대공 전하께서 왜요?”

“분명……. 높은 작위를 가진 집안의 영애를 물색하는 걸 거라고…….”

단순한 제레미야는 참 고맙게도 황태자에게서 들은 말을 줄줄 입에 올렸다.

그 말은 어제 리카르도가 자신에게 한 것과 같았다.

‘자신이 누구와도 염문이 없다는 이유로 권력에 욕심이 있는 게 아닌지 경계를 산다고 말이야.’

정말로 그렇건 아니건 리카르도가 그런 상대가 필요하다는 건 이해했다.

다만 안토니아는 처음엔 저어하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정말로 호의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세르히 백작. 이번에는 나도 그대 덕에 얻을 이득이 있어 제안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계약 연인이 되자는 소리신가요. 하지만 그런 거라면 저 말고도…….’

‘세르히 백작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네?’

계약을 이야기하는 리카르도의 눈은 그날 자신을 향해 당황하듯 편지 때문이라고 쏟아 내던 때와 달랐다.

오히려 안토니아에게 익숙한 회귀 전 대공으로서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원래 계약은 서로 비슷한 조건으로 원하는 게 있어야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안토니아는 저도 모르게 리카르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회귀 후에 하도 대공 전하가 내 앞에선 너무 무른 모습만 보여줘서 잊어버렸지만…….’

원래 리카르도 트라체스는 그렇게 무르고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신이 절 거래 상대로 삼지 못할 이유가 아직도 있습니까?’

안토니아의 망설임을 꿰뚫는 질문이었다.

‘……이미 황실 남자들과 엮이기 싫다는 건 너무 궁색한 이유가 되어 버렸고.’

제레미야 때문에, 아니 애초에 라테르 후작이 등장한 시점에서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그의 거래 조건이 마치 제게 짜 맞춘 것처럼 딱 좋아서.

‘딱 세 번이면 됩니다.’

‘네?’

‘그걸로 서로 필요한 소문은 충분히 얻게 될 테니까요.’

떠도는 소문에는 소문으로, 몇 번 만나는 것만으로도 화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

리카르도 트라체스기에 가질 수 있는 자신이었다.

‘그래, 가볍게 생각하자, 겨우 세 번만 만나면 끝인걸.’

오히려 횟수가 정해져 있어 마음이 편했다.

덕분에 안토니아는 오히려 산뜻하게 머릿속을 정리하고 계약 조건을 고려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론이 이것이었다.

서로의 이득을 위해 조건부로 연인 행세를 하기로 했다.

당연히 이걸 아는 사람은 현재로서 자신과 리카르도를 포함해 몇 안 되었다.

백작가 하인 중에서도 로레나와 폴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몰랐고.

‘그러니 쟈힘이 알았을 리가 없지.’

한참을 당황하며 횡설수설하던 제레미야는 겨우 누굴 원망해야 하는지 깨달은 눈으로 쟈힘을 쏘아보았다.

“화, 황자님, 저는.”

“입 다물어!”

그러더니 제레미야는 그 자리에서 탁자를 쾅 치며 일어섰다.

“나는, 나는……!”

그는 몹시 분한 얼굴로 안토니아를 빤히 보았다.

“어째서, 왜……!”

그러나 끝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토해 내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나갔다.

달려가는 열여섯 소년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저것도 황태자가 내린 지시인가?’

안토니아는 제레미야의 눈물 바람에도 한없이 차갑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 제레미야는 자신과 결혼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죽는 그날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 아니 좋아한 적조차 없었으니까.

* * *

쨍그랑-!

퍽-, 쾅!

막내 황자궁이 잔뜩 소란스러워졌다.

제레미야는 손에 잡히는 걸 마구 잡아 던지며 분풀이를 해 댔다.

쟈힘은 초조한 얼굴로 입술만 짓씹었다.

말리지 않을 수도 없었고, 여기서 섣불리 말렸다 자신이 화를 옴팡 뒤집어쓰는 것도 싫었다.

‘……지금만, 지금만 견디면 돼.’

안토니아는 멍청하게도 자신의 앞에서 거만한 말을 얼마든지 내뱉지 않았던가.

그 굴욕,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봐야 제대로 된 결혼 상대를 못 찾으면 날아갈 작위를 가진 주제에!’

자신보다 높은 지위라고 하대하며 자신을 아랫사람 취급하는 게 못 견디게 자존심 상했었다.

쟈힘은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일시 녹음 기구만을 몇 번이고 매만졌다.

겨우 5초가량의 녹음이 최선이긴 했으나 오히려 그래서 앞뒤로 그럴듯한 거짓을 사실처럼 꾸미기가 더 좋았다.

‘발렌타인 님에게 들려드리면, 더는 세르히 백작이 소문과는 다른 야욕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하란 소리를 하지 않겠지.’

게다가 건방지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녹음했으니, 사교계에서 공개된 순간 모두 안토니아를 비난할 것이다.

쟈힘은 그런 생각으로 지금의 괴로운 상황을 날려 버리려 했다.

그러나.

쨍그랑-!

쟈힘의 바로 옆으로 찻잔이 날아왔다.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난 찻잔이 쟈힘의 손등을 긁으며 지나갔다.

“큭…….”

“아파? 아파……?”

분풀이에 열중하던 제레미야는 숨을 몰아쉬며 쟈힘에게로 다가왔다.

“네가 지금 아프다고 소리를 낸 거야?!”

“화, 황자님…….”

“입! 다물라고!!”

제레미야는 쟈힘의 어깨를 콱 쥐었다.

어리고 철없는 황자에게서 이상한 광기가 느껴졌다.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정말로, 정말로 저는 황자님을 위해 알아보고.”

“날 위해? 날 위해서라고? 하……. 넌 정말 날 바보로 아는구나.”

제레미야는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내가 바보인 거 알아! 그런데 넌? 넌 뭐가 잘났는데?”

“황자님…….”

“너도 내가 필요해서 여기 있는 거 아니야? 형님한테 직접 잘 보일 능력, 넌 없잖아.”

제레미야의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넌 신분도 없잖아!”

“…….”

쟈힘은 눈을 크게 뜬 채 제레미야를 바라보았다.

역린을 건드렸기에 쟈힘은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제레미야는 그 눈빛에 코웃음 치며 이야기했다.

“똑똑하다고 생각해? 네가 똑똑했으면 형님이 진작 데려갔을걸? 너도 겨우 내 시종이나 할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야!”

“저, 저는…….”

쟈힘은 화와 억울함, 그리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잘 풀어야 한다는 한 줄기 이성으로 입을 어물어물 열었다.

그러나 제레미야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우습게 보는 걸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나보다 네가 더 잘난 것 같아? 그래서 날 가지고 놀았어?! 이렇게 하면 세르히 백작이! 날!!”

제레미야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처음이었다. 그가 이토록 원하는 걸 못 가진 경험은.

그게 너무나도 분해서 제레미야는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한다고 하면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해도 누군가가 들어줬는데, 그랬는데!

“너는, 너는 내 시종으로 있을 자격이 없어.”

“화, 황자님!”

쟈힘은 이럴 순 없다는 듯 제레미야의 옷깃을 콱 잡았다.

“하, 하. 네가 진작, 진작 세르히 백작에게 가서 시간을 내어 달라고! 처음 백작이 말한 대로 하기만 했어도!!”

제레미야는 쟈힘의 어깨를 강하게 밀치며 말했다.

“내가 두 손 놓고 있다가, 숙부님과 연인이 되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지는 않아도 되었을 거야.”

“……황자님.”

제레미야는 처음 보는 얼굴로 울었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때늦게 성장하려는 아이의 모습도 거기 있었다.

분함, 슬픔, 수치심, 그리고 하나 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제레미야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가! 넌 해고야!”

“황자님, 황자님……!”

“당장 저걸 쫓아내, 날 깔보고, 속인 시종 따위 필요 없으니까!”

제레미야의 큰 목소리에 기사들은 잠시 주저하다 이내 움직였다.

쟈힘은 몇 번이고 제레미야를 불렀으나,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이불을 돌돌 만 채 침대 위에 누워 버렸다.

“싫어……. 싫어, 나는……. 싫어…….”

제레미야는 그대로 누워서 엉엉 울었다.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아니, 현실이라고 해도 제 손에 쥐고 싶었다.

그건 연심이라기보다 정복욕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 * *

‘젠장, 젠장, 젠장!’

빌어먹을 안토니아 세르히!

막내 황자궁에서 쫓겨난 쟈힘은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다 그 주제도 모르는 여자 때문이었다.

‘왜, 왜! 황자님한테 한 번을 안 져 주는 거야! 게다가 왜 그렇게 입은 가벼운 거야, 이래서 여자들은……!’

막내 황자궁에서 쫓겨났으니, 이대로는 꼼짝없이 본가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싫어!’

쟈힘은 귀족이라고 하기엔 낡고 가난한 남작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능력 없다니, 그럴 리가 없어!’

자신은 그저 신분이나 배경이 따라 주지 못한 것뿐이었다.

‘내가 황자님처럼 힘이 있었다면……. 그렇겐 안 살았을 거야.’

겨우 여자 하나에 매달려 저렇게 이성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레미야의 말에 크게 상처 받았으나, 쟈힘은 애써 부정했다.

자신이 제레미야와 비슷한 레벨일 리가 없지 않은가.

‘전하께, 황태자 전하께 사정을 해 보자.’

제레미야의 성정을 가장 잘 아는 건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게다가 지금껏 제레미야의 시중을 이토록 오래 든 것도 자신 외에는 없었다.

황태자는 제레미야를 아끼긴 했으나, 지나치게 소란이 이는 것도 싫어했기에 들어줄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아직 이것도 있어.’

쟈힘은 주머니에서 마법 녹음 기계를 꺼내 꼭 쥐었다.

모아 둔 월급을 모두 털어 마련한 이게 자신을 분명 구해 줄 것이다.

쟈힘은 굳게 마음먹으며 황태자 궁 쪽으로 향했다.

분명 오늘 오후에는 황태자궁에서 집무를 본다고 들었으니까.

공교롭게도 쟈힘은 황태자궁으로 향하는 길에서 찾아갈 한 사람과 마주칠 수 있었다.

“발렌타인 님!”

쟈힘은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발렌타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발렌타인은 탐탁잖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꼴이 그게 무엇인가?”

“네? 아…….”

제레미야에게 당한 것 때문에 옷은 흐트러져 있고, 손등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쟈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등을 손수건으로 대강 닦으며 말했다.

“잠시 트러블이 좀 있었습니다. 그보다 발렌타인 님, 지난번 지시하신 것을 보고드리려고 했습니다.”

“보고?”

그러나 발렌타인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그녀는 잠시 쟈힘을 바라보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그래, 일단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이걸 들으시면 발렌타인 님도 분명 확신하실 겁니다.”

쟈힘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손 위에 마법 녹음 기계를 얹은 채 말했다.

“발렌타인 님이 두 번 두드려 주시면 저와 발렌타인 님에게만 내용이 들릴 겁니다.”

“……흐음.”

발렌타인은 별로 기대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손을 뻗었다.

쟈힘은 자신 있었다.

겉만 번드르르하고 실속 없이 행동한 발렌타인보다는 훨씬 더!

그러나 발렌타인이 녹음 기계를 두 번 두드린 순간.

‘잘난 것도 없는 여자 주제에!’

귓가에 들린 건 안토니아가 아니라 쟈힘 본인의 목소리였다.

발렌타인의 코럴 핑크 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쟈힘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분명 여기엔 안토니아가 오만방자하게 구는 말이 녹음되어 있어야 했다.

“알 만하군.”

발렌타인은 툭 내뱉은 그 말에 쟈힘은 고개부터 내저었다.

“아, 아니, 이건. 절대 발렌타인 님이 아니라……!”

“세르히 백작을 향한 거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역시 발렌타인 님! 잘 아시는군요.”

쟈힘은 잘 넘겼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랬다면 당황하지 않았겠지.”

“네?! 아, 아니.”

“더는 보지 않길 바라, 쟈힘 폰스 군.”

“네? 아, 아니, 어째서입니까. 발렌타인 님!”

쟈힘은 안달 내며 발렌타인을 뒤쫓았다.

이대로 자신이 붙들고 있던 끈을 또 놓칠 수는 없었다.

“난 여러 번 말하는 걸 싫어하는데.”

“그러니까 세르히 백작에 대해 말한 거라-”

촤악-!

쟈힘은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손도 아니고, 마치 닿는 것조차 싫다는 듯 발렌타인은 부채로 쟈힘의 뺨을 가격했다.

“아무래도 내가 많이 우스워 보였나 보아.”

“바, 발렌타인 님…….”

“그 숨을 끊어 놓아야 입을 다물겠는가?”

발렌타인의 말에 쟈힘은 숨을 확 들이마셨다.

평소와 다름없이 나른한 듯한 목소리였으나, 소름 끼치는 살기가 느껴졌다.

쟈힘은 본능적으로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서늘한 눈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휙 몸을 돌렸다.

마치 이 세상에서 정말 쓸모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했다는 듯.

구둣발 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지자, 쟈힘은 겨우 숨을 몰아 내쉬며 입술을 짓씹었다.

‘나도, 나도 후작가에서 태어났으면 저럴 수 있었어!’

쟈힘은 주먹을 꽉 쥐며 황태자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래, 그래 봐야 여자인 발렌타인 오르테가가 뭘 알겠어!’

녹음 기구는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그래도 제레미야 황자님 곁에 붙어 있을 방법이라도 찾아야 해.’

숨죽이고 기다리다 보면 분명 기회는 올 테니까.

* * *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법이었다.

“내가 그대에게 이런 짓을 벌이라고 했던가?”

“저, 전하…….”

“난 그저 제레미야나 잘 보필하라고 그리 일렀을 텐데.”

“저는 황자님을 위해……!”

“뭐가 제레미야를 위해서인가?”

황태자는 책상을 ‘쾅’하고 크게 내리쳤다.

“그대가 멋대로 일을 벌이는 사이, 세르히 백작은 숙부님과 더 친해진 듯한데.”

황태자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력 귀족을 하나라도 더 끌어들여도 모자랄 판에, 어깃장을 놔? 내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아는가?”

“하오나 전하, 제레미야 황자님을 저 말고 누가……!”

“하, 우리 제레미야가 왜 그대 말고 다른 사람의 시중은 못 받는단 말인가?”

황태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당장 수도에서 떠나게!”

“예?!”

쟈힘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고작 이런 일로 추방 명령이라니!

‘내가,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세르히 백작은 분란을 일으킬 상이었다.

이유라곤 없지만 쟈힘 안에선 이미 그렇게 확정된 상태였다.

‘옛날에 동네 마을에서 툭하면 날 괴롭히던 여자도 그런 인상이지 않았는가!’

쟈힘은 머릿속으로 억울해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납작 엎드렸다.

“전하,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제가 이제는…….”

“듣기 싫네, 여봐라, 당장 이 자를 끌어내!”

“전하, 전하……!”

그러나 황태자는 쟈힘의 말을 들어 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기사를 불러 그를 쫓아냈다.

쟈힘은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기사에게 붙들려 나가며 이를 박박 갈았다.

‘내가, 왜, 왜 나만……!!’

그간 하나하나 세워 두었던 계획들이 머릿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그 찬란한 미래에 쟈힘은 분노로 턱을 달달 떨었다.

‘나만, 나만 죽지는 않을 거야, 이게 다, 이게 다……!’

세르히 백작, 그 여자 때문이었다.

쟈힘의 눈 위로 핏발이 붉게 섰다.

* * *

바람이 제법 찬 겨울의 초입이었으나, 해가 따뜻하단 생각이 들었다.

‘온실 안이라 그런가?’

새삼 둘러보아도 예쁘고 따뜻하단 생각이 들었다.

안토니아가 오늘 방문한 곳은 다름 아닌 수도 내 식물원이었다.

“이렇게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란제아 공작 부인.”

“호호, 무슨 말인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트라체스 대공 전하와 세르히 백작의 방문이라는데 당연히 반겨줘야 하지요.”

드란제아 공작 부인이 취미 삼아 운영하는 식물원은 일주일 중 하루는 일반인에게 개방했으나, 나머지 날은 그녀의 허가가 있어야만 했다.

‘한 번쯤 와 보고 싶었던 곳인데.’

드란제아 공작 부인은 사람을 워낙 가려 사귀는 편이라 기회가 없었다.

당연히 남의 편이던 제레미야가 자신을 위해 힘써 줄 리도 없었고 말이다. 애초에 기대도 않았지만.

“세르히 백작이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를 때도 대공 전하께서 파트너를 해 주셨지요, 그때는 그저 이스베르가 님의 부탁일까 했는데.”

공작 부인은 우아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렇게 보니 역시 그때 잘 어울린다 생각한 게 잘못 본 것만은 아닌가 봐요.”

그 말에 안토니아는 그저 부끄러운 듯 고개만 숙였다.

리카르도와 세 번의 만남을 계약한 뒤, 두 번째 만남이었다.

지난번에도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참 절묘한 장소 선정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는 되지 않도록 하면서 소문은 딱 나기 좋을 정도의 장소를 고르는 점이.’

회귀 전에야 종종 염문설을 흘렸다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다던데 타고난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게다가 안토니아의 스케줄을 미리 알려 달라고 해서 중간중간 우연히 만나 수 분 정도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연출적으로 대단했고, 고맙기도 했다.

안토니아가 입매를 어떻게든 부드럽게 하려 애쓰며 생각하던 사이, 드란제아 공작 부인과 리카르도의 대화가 잦아들었다.

“어머, 그러고 보니 두 분이 너무 어울리다 보니 제가 너무 오래 붙들었군요.”

드란제아 공작 부인은 느긋하게 돌아보라는 듯 손짓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게 있으면 하녀들에게 부탁하세요, 오늘 방문객은 두 사람뿐이니 개의치 말고요.”

뒷말은 은근히 다른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그럴 예정이 전혀 없답니다. 드란제아 공작 부인.’

물론 안토니아는 그것도 속으로만 생각하고 그녀에게 감사의 말만 한 번 더 전했다.

공작 부인이 떠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잠깐 적막이 흘렀다.

그러나 불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리카르도는 찬찬히 안토니아를 에스코트하며 걸음을 옮겼다.

“식물을 보는 건 좋아하십니까?”

“네, 취미가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렇게 멋진 장소니까요.”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카르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안토니아가 힘들지 않도록 능숙하게 에스코트하며 식물원을 둘러보았다.

나누는 이야기도 소소하여 부담가질 만한 게 없었다.

‘역시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한 건 내가 너무 경계심을 가졌던 걸까.’

지난번 첫 번째 데이트 때도 그렇고 이번도 그런 걸 보면 말이다.

식물원을 반쯤 둘러보았을 때, 리카르도는 고맙게도 티타임을 청했다.

“허브티를 준비해 달라고 해 두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마침 발이 아팠다. 지난번 무도회 때도 생각했지만 이스베르가 덕인지 그는 참 이런 에스코트에 능숙했다.

그는 익숙하게 식물원 내에 위치한 티 테이블로 안토니아를 데려갔다.

“몇 번 와 보셨나 봐요.”

“어릴 때부터 누님이 좋아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어쩐지 이 티 테이블까지의 코스가 익숙해 보이더라니.

금세 하녀가 허브티와 간단한 티 푸드를 준비해 주었다.

“드란제아 공작 부인이 직접 만든 이 허브티는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들은 적이 있어요, 일반 공개를 하는 날에는 입장객에게 조금씩 나눠 주신다고요.”

“그렇습니다. 부디 백작의 입에도 맞으면 좋겠군요.”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참으로 멋진 미소를 보였다.

차를 마셔 몸이 따뜻해지자, 안토니아도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이라면 리카르도가 고백을 하더라도 아주 예쁜 말로 돌려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아니, 꼭 거절할 필요가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레미야가 쫓아다녀서 이미 엮일 대로 엮였다.

게다가 풍문까지 돌았으니 안토니아가 평범한 백작 이상의 결혼 상대를 찾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내 가호를 생각하면…….’

그래도 좀 저어하고 그간 계속 거부했던 건 한편으로는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거래만 할 수 있는 관계라면 오히려 깔끔하겠지만.

그때, 리카르도가 문득 입을 열었다.

“라테르 후작님으로부터 총을 배우셨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맞아요. 할아버지께서는 전하께 배운 게 아니냐고 물으셨어요.”

그 말에 어쩐지 리카르도가 좀 수줍어한단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한번 목을 가다듬듯 헛기침을 하더니 테이블 위에 상자를 하나 올렸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저……. 저도 총을 다루는 사람으로 반가워서 드리고 싶어진 것뿐이니까요.”

안토니아에게 그간 자주 거절당해서일까, 리카르도는 재빠르게 이유부터 이야기했다.

‘그래, 그간 내가 너무 경계하던 것도 사실이니까.’

그가 황실 남자라서, 지난번 삶이 바올로에 이어 황태자와 제레미야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서.

지나치게 웅크리고 긴장한 걸지도 몰랐다.

그때와 지금의 자신은 손에 쥔 것이 너무도 다른데.

안토니아는 그런 생각으로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검은색을 베이스로 한 총이 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 리샤르에게서 받은 것과 반대되는 색깔로 그때와 달리 자란 자신의 손에 딱 맞춘 듯한 크기였다.

“왠지 백작에게는 보석보다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무기를 드리는 게 더 기뻐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문득 오래전의 생일 선물이 떠올랐다.

‘그것도 뭐 장신구긴 하지만.’

보통은 탄환 모양으로 세공할 생각을 하진 않을 테니까.

“예쁘네요……. 총을 예쁘다고 하면 이상할까요?”

“그럴 리가요.”

안토니아의 말에 리카르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그가 지나치게 잘 웃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이런 상황을 예전에도 겪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추억 속에만 남아 있는 예쁜 소년의 모습이 왠지 겹쳐졌다.

지난번 그에게서 편지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기에,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신분부터 이름, 외견까지 어느 것 하나 겹치는 게 없다는 건 알지만.

누군가에게 말하면 무슨 헛소리냐고 할 정도로.

트라체스 대공처럼 고귀한 사람이 굳이 그런 백작령에서 자신과 어울리기 위해 신분을 위장했다고?

스스로도 조소가 나올 정도의 상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늘 루퍼스에게 꿈도 없다며 지나치게 현실적인 안토니아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떠올라. 행동이나, 표정이…….’

게다가 하필 총을 선물한 것까지.

안토니아가 추억을 더듬던 찰나, 리카르도가 조용히 일어서서 이야기했다.

“슬슬 움직이지 않으면 해가 지겠습니다. 세르히 백작.”

“아.”

“지치셨으면 여기서 그만 보아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끝까지 다 볼래요.”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직 드란제아 공작 부인과는 친분을 막 쌓기 시작한 차였으니까.

* * *

리카르도와의 식물원 데이트는 깔끔하고 좋았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안토니아의 걸음에 맞춰 식물원 곳곳을 안내했다.

“이 꽃은 서북부에서도 보입니다. 풀멘 변경백님께서 좋아하던 기억이 납니다.”

고맙게도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식물도 이야기해 주었다.

안토니아는 문득 서북부에 왜 갔냐고 물으려 했으나 관두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 깊이 캐내려 하지 않는 만큼, 자신도 그러지 않아야 한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식물원을 모두 둘러보고 드란제아 공작 부인께 감사 인사를 전하는 순간까지도 안토니아는 그저 순간의 평온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요 몇 주간 줄곧 바쁘게 사람들 사이를 오가느라 정신이 없어 이 조용함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안토니아를 마차까지 배웅하며 예를 갖췄다.

“이제 마지막 한 번 남았군요.”

“그렇네요.”

“사흘 뒤에 장소를 적어 보내겠습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한 번 남았다는 게 문득 아쉬울 정도로 그가 고른 장소들이 모두 자신의 취향이었으니까.

“아 참, 총이 평소 사용하던 것과 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괜찮다면 제가 가르쳐 드리고 싶습니다.”

“대공 전하께서요?”

그 말을 한 뒤, 안토니아는 다시금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이 말과 비슷한 말을 분명히 한 적이 있었는데.

“믿음직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앗, 아니요, 대공 전하께서는 바쁘시기도 하고 저는 그냥 취미로 다룬 정도라-.”

순간 말문이 멎었다.

그는 안토니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당신이라면 제 시간을 얼마든지 쓰셔도.”

“…….”

안토니아는 물빛 눈으로 지그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 얼굴이 보이진 않는데.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의 아가씨.”

그가 환하게 웃었다.

마차 문을 닫으며 물러서는 그 잘생긴 얼굴 속에서 역시 어릴 적 얼굴을 찾을 순 없었으나.

‘……설마, 말도 안 돼.’

멋진 그 얼굴 위로 떠오른, 그 리카르도 트라체스라고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해사한 미소가 그녀의 어린 기억 속의 한때와 겹쳐졌다.

* *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마차 안에서 안토니아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 가방 안에서 평소 가지고 다니던 총을 꺼냈다.

지금 자신의 손에는 살짝 작은 크기인 흰색 총에서 지난 5년의 세월이 느껴졌다.

5년 전, 겨울 리샤르와 헤어진 이후에도 안토니아는 줄곧 총을 다뤘으니까.

6년 전, 해가 바뀌기 전 아마도 이맘때쯤 정원에서 아름답던 소년 리샤르가 자신을 향해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괜찮으면 내가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리샤르, 네가?’

‘왜? 못 가르칠 것 같아?’

지금의 리카르도와 동일 인물이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선이 고왔던 어린 인연이었다.

안토니아는 리카르도가 준 상자를 열어 총을 꺼냈다.

‘닮았잖아……. 어쩐지 처음 열어 봤을 때부터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반대의 색상, 살짝 커진 총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흡사했다.

쥐는 부분을 지금 자신의 손 크기에 맞춘 것이 좀 다를까.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어렵지만…….’

우연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머리로는 생각했다. 그러나…….

‘하지만 공통점이라곤 총을 쓴다는 것밖에 없잖아!’

이름도 다르고 신분도 달랐다.

아니 저 두 가지야 꾸며 낼 수도 있었다.

그때도 그가 신분을 숨기고 있단 걸 눈치채긴 했으니까. 게다가 대공이었다면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웠다.

‘아니, 근데 동일인이라는 걸 알고 봐도 얼굴이 다른데?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어렵단 말야.’

리샤르는 예뻤단 말이다!

물론 리카르도가 못생긴 건 아니었다. 아주 화려하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선도 굵고 누가 보아도 시선을 끄는 외모인 데다, 예술가들조차 좋아하지 않는가.

다만 카테고리가 너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지금의 리카르도에게 예쁘다는 말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눈 색이랑 머리 색도 다르잖아…….’

그 순간 문득 이스베르가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울피나는 이스베르가 님과 달리 머리가 옅네요? 저하고 오히려 비슷한 느낌이에요.’

‘우리 집이 원래 그래.’

이스베르가의 딸, 울피나는 붉은빛이 조금 도는 스트로베리 블론드를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이스베르가는 붉은 기가 좀 있긴 해도 거의 새카만 머리 색이었고.

‘어릴 때는 색소가 옅다가 점점 진하게 물들더라고, 아마 분명 울피나도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를 쯤엔 검은 머리가 될걸.’

‘신기하네요, 지금은 이렇게나 밝은데.’

‘머리카락만 그런 게 아니야, 눈 색도 그래. 어릴 때는 옅은 푸른 빛이었다가 클수록 보랏빛이나 붉은색이 돌거든.’

그 말을 들을 때는 그냥 신기하다고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아니, 그런 집안 내력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심지어 리샤르를 만났을 때 안토니아는 리카르도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지금 알아차릴 거였으면 그때도 알아봤지!’

게다가…….

‘도대체 나이는 왜 속인 거야.’

안토니아가 물어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리샤르에게 자신과 비슷한 또래일 거라 생각하며 말한 적도 있었다.

그때 얼버무린 건 리샤르 본인이지 않았는가.

그뿐만인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하는 기시감에 후작저에서 물었을 때도 그는 편지 탓이나 하고 있었다.

‘리샤르가 원래 그렇게 망설이는 성격이었나?’

안토니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말하지 않은 건…….’

아마도 자신이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배려일 터였다.

부정하기에는 마지막에 말한 ‘나의 아가씨’라는 말이 너무 확실한 증거였다.

어린 시절 그가 제게 맹세하던 걸 어떻게 잊겠는가.

맹세컨대 그의 얼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알아봤을 것이다.

안토니아는 두 개의 총을 잠시 매만지다, 가방 안에 넣었다.

‘다음에 만나면…….’

무얼 먼저 말해야 할까,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첫 마디만은 결정했다.

* * *

리카르도는 조금 초조하기도 했고, 또 기분이 좋기도 했다.

“아주 콧노래라도 부르시겠습니다.”

드비의 말에 리카르도는 무심히 시선을 던졌으나,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시끄러워.”

“그러게 저는 6년 전부터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공 전하라는 걸 밝히라고요.”

그 말에는 리카르도도 할 말이 없었다.

설마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은 몰랐으니까.

게다가 아직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기쁜 마음이 앞섰다.

“참나, 제가 데이트 장소 고를 때는 비웃으셨으면서.”

“넌 매일 이상한 데만 고르잖아.”

“네? 뭐가 이상한 데란 말입니까! 심사숙고해서 고른 장소입니다!”

“무구점 데이트가?”

“아, 거참. 그건 수도에 올라와서 첫 데이트 아녔습니까. 우리 동네 누님들은 다 그런 걸 좋아한다니까…….”

드비는 불만스럽게 꿍얼거렸다.

“저희는 어릴 때부터 도끼건 검이건 자루 하나는 쥐는 게 당연하단 말입니다.”

“그래.”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리카르도를 보며 드비는 어쩐지 씁쓸해졌다.

리카르도가 한참 안토니아를 향해 바보짓을 할 때는 찌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으니 말이다.

뭘 해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니, 재미가 없었다.

‘아, 세르히 백작님이 전하를 곤란하게 만들어주시면 좋겠다.’

기왕이면 뻥 차 주면 좋겠다.

그럼 일주일쯤 웃어 주고 5분 정도는 슬퍼해 드릴 텐데.

드비는 진심으로 자신만큼 충직한 시종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 상황을 슬퍼했다.

“아악! 왜요! 입 다물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시끄럽댔지.”

“제 얼굴이 뭐 어떻다고 그럽니까! 요즘도 한 달에 두어 번은 고백받는 얼굴이란 말입니다.”

“입 다물고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얼굴은 안 시끄럽다는 것 아닙니까!”

“내 앞에서 하는 생각 고대로 여성분들 앞에서도 해 봐.”

“제가 왜 그럽니까! 전하 생각을 왜 전하 없을 때도 해야 된단 말입니까!”

드비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리카르도는 그걸 보고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안토니아에게로 보내기로 한 데이트 장소 후보를 세 군데로 추려놓고 고민 중이었다.

지금껏 정한 두 군데 모두 안토니아가 좋아해 주어 고민한 보람이 있었으니까.

행복한 고민이 깨진 건, 리카르도가 두 군데까지 추려두고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 크롬프트 씨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뭐?”

그 말에 마음이 덜컥 떨어지는 것 같았다.

루퍼스 크롬프트로부터 급한 연락이 올 정도라면.

리카르도는 곧장 하인이 가지고 온 서신을 뜯었다.

그곳에는 휘갈겨진 글씨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안토니아, 실종.

-제레미야 황자 또한 실종. 황궁에서는 안토니아를 만나러 나갔다고 함.]

리카르도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드비에게 말했다.

“드비, 당장 기사단을 움직여.”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수도에서 기사단을 움직인다니, 평범한 호위 목적으로 한둘 정도면 몰라도 보통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황실에서 반역죄를 물을 수도 있는 사안이었으니까.

“책임은 내가 진다. 무마할 방법도 있고.”

리카르도의 얼굴이 더없이 냉정해졌다.

그는 정말로 위급한 상황에는 오히려 가라앉는 편이었으니까.

덕분에 드비는 단박에 깨달았다.

안토니아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드비도 표정을 굳히며 곧장 몸을 웁직이며 생각했다.

‘세르히 백작님, 부디 무사히 돌아오셔서 대공 전하를 뻥 차 주시길 바랍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 바람이었다.

* * *

‘머리 아파…….’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한기에 안토니아는 눈을 떴다.

한기가 들었다. 그와 함께 습한 곰팡이 냄새도 느껴졌다.

안토니아가 움직이자, 옆에서 부스럭거리며 누군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깨, 깨어난 건가, 세르히 백작…….”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제레미야 안세르 솔리스의 목소리였으니까.

덕분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도 모두.

‘……어제 돌아오는 길에.’

리카르도와 헤어진 뒤, 저택으로 향하던 안토니아는 급작스레 황자궁에서 나온 시종을 만났다.

안토니아가 모르는 얼굴이었는데, 제레미야와 똑같은 필체에 인장이 찍힌 서신을 전했다.

[세르히 백작, 한 번만, 딱 한 번만 만나 주게. 그럼 더는 그대를 귀찮게 하지 않겠네.

하지만 만나 주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네.]

너무도 제레미야다운 협박이었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발렌타인으로 인해 로레나가 다친 게 얼마 전이었다.

또 자신 때문에 주변 사람이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 이야기한 장소로 나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기다렸던 건.

‘역시, 역시 지난번에 말한 건 거짓말이었던 거로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백작이 날 먼저 보자고 하자니 말이야!’

짜증 날 정도로 크게 웃던 제레미야의 얼굴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함정…….’

약이라도 쓴 것인지 지끈지끈한 머리를 짚으며 안토니아는 제레미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배, 백작이라면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겠지?”

“……네?”

“그렇지 않은가, 백작은 똑똑한 사람이고…….”

제레미야는 안토니아가 해결해 줘야 한다는 것 같은 얼굴로 헤실거렸다.

이런 상황에도 마치 제 몸의 안전을 그녀에게 맡겨 둔 사람처럼.

안토니아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겨우 억눌렀다.

일단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는 내야 하니까.

“황자님은 왜 어제 거기 나오신 거예요? 그것도 시종 하나 안 데리고…….”

“그, 그거야 세르히 백작이 날 만나자고 했으니까지!”

안토니아는 그 말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그걸 믿고 있다니.

“저는 그러자고 한 적이 없어요.”

“……뭐? 하지만 분명히 쟈힘이…….”

“쟈힘 폰스 말인가요?”

분명, 쟈힘 폰스는 쫓겨났다고 루퍼스가 전해 줬었다.

안토니아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제레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에게 말 못 해 미안하다며 백작에게 용서를 구하러 갔다고, 분명히 편지로 전했는데…….”

그 말에 머리가 또 아파 왔다.

아무리 막내라지만 제국의 황자라는 자가 겨우 그런 말에, 심지어 추방까지 된 자의 서신에 홀랑 넘어간단 말인가.

‘……그래도 덕분에 여기가 어디인지는 대충 알겠어.’

폰스 남작가의 영지는 수도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애초에 빚더미에 앉았던 폰스 남작가가 그나마 귀족 작위를 유지할 수 있던 것도 우연한 행운 덕이었다.

쟈힘의 부친은 자신들이 가진 광산에서 마석이 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곧장 마석을 캐어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3년을 가지 못해 끊겨 버렸다.

‘그래도 빚은 다 갚은 모양이지만 가계는 귀족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고…….’

그래서 차남이던 쟈힘은 자원에서 황실의 골칫덩이라 불린 제레미야의 시종이 된 것이다.

‘이 곰팡이 냄새 사이로, 보통 마석이 끊긴 폐광에서 나오는 특유의 냄새가 섞여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회귀 전, 바올로가 마구잡이로 채굴해 버린 까닭에 닫아야만 했던 세르히 백작가의 광산에서 맡았던 냄새였으니까.

안토니아는 품속에 늘 지니고 다니는 통신구를 꾹 눌러 긴급 신호만 보낸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당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드레스 아래로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제 리카르도가 제게 준 총이었다.

‘난 무사히 나가서 널 만날 거야, 리샤르.’

“배, 백작 어디 가는가!”

안토니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제레미야도 주춤거리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가야지요.”

“하, 하지만 여긴 너무 깜깜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는 칭얼거리며 자신을 안심시키라는 듯 이야기했다.

물론 안토니아는 그럴 의무가 없었다.

‘교활하긴 하네.’

안토니아는 이곳에 자신과 제레미야를 함께 납치해다 둔 의도를 눈치챘다.

하나는 이곳에서 죽거나 다치거나, 뭐 안 좋은 일을 당하길 바라서일 터였다.

어쩌면 뭔가 함정을 설치해 두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혼자 탈출하거나 했을 때, 황자 시해범 내지 납치범으로 몰 생각인 거겠지.’

뭐 그렇게까지 복잡한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해도 여러모로 안토니아에게 불리한 상황인 건 확실했다.

이 일이 나쁜 쪽으로 흐를 때 황실이 제 편을 들어 주겠는가.

‘그럴 리가 없지.’

지난 삶 막내며느리로 산 게 한두 해가 아니었다.

황실이 어떤 곳인지 안토니아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더더욱 황실과는 필요 이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거였고.

‘뭐, 이제 다 틀린 모양이지만.’

자신이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건 아니건, 최소 한 주간의 뉴스는 모두 제 몫일 게 분명했다.

정말 본의는 아니었으나 안토니아는 나중을 위해 제레미야를 달랬다.

“찬찬히 움직이면 괜찮아요, 빛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요.”

“그, 그런가? 나, 나는 이런 게 처음이라…….”

‘누구는 여러 번 겪어 본 줄 아나.’

안토니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만 살아 나가면 그게 제일 큰 문제일 터였다.

단박에 황족 납치범쯤으로 몰릴 테니까.

쟈힘이 머리가 있다면 그 틈을 타 자신이 공을 세우려 들지도 몰랐다.

‘뭐, 황태자가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겠지만.’

납치한 곳이 폰스 남작가의 폐광산이었다.

다만 황실은 가끔 그런 논리를 모두 무시하고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곳이었다.

‘……회귀 전 정말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날 외면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요즘 들어 문득문득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이건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찬찬히 걷던 안토니아의 앞에 걸쇠가 걸린 문이 있었다.

안토니아는 총을 꺼내 들어, 걸쇠를 겨냥했다.

‘우선은 이곳에 생매장되기 전에 탈출부터 해야 해.’

쟈힘이 무슨 생각인지, 아직은 짐작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철컥, 픽-!

걸쇠가 깔끔하게 부서졌다.

평소 쓰던 총에 루퍼스에게 부탁해 소음기를 달아 두길 잘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쓸모를 다한 소음기를 뗐다.

그러나 문을 연 그곳엔.

“……하, 쓸데없는 재주가 있으시군요.”

옅은 빛과 함께 쟈힘 폰스가 있었다.

* * *

“어, 어떻게 하나? 세르히 백작. 이제……?”

이런 순간까지도 바보 같은 제레미야는 안토니아의 뒤에 숨을 생각만 했다.

‘그래, 원래 이런 인간인걸, 실망스럽지도 않다.’

이미 밑바닥은 옛적에 다 보지 않았던가.

안토니아는 드레스 자락에 총을 숨긴 채 쟈힘을 바라보았다.

“우리를 왜 여기까지 납치한 거지?”

“그걸 이유라고 묻습니까?”

테이블 위에 이것저것 늘어놓았던 쟈힘은 그중 단검을 집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눈빛이 이상했다. 게다가 흰자가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이 냄새……. 그리고 저 눈.’

지난 5년간, 동부 암살자 길드장 테넌과 알게 되며 쓸데없이 늘어난 지식이 있었다.

바로 불법 약물에 대한 지식.

‘아가씨는 이런저런 재난에 많이 얽히는 것 같으니, 알아나 두라고.’

테넌은 그렇게 말하며 이런저런 약들을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고통을 줄이고 환각을 보게 하는 싸구려 마약이라고 했어.’

비릿한 냄새와 함께 저 푸른 빛이 도는 흰자위가 틀림없었다.

“세르히 백작! 다, 다 너 때문이잖아!”

쟈힘은 그렇게 말하며 단검을 빙그르 돌리며 안토니아를 향해 겨눴다.

“그러니까 널, 널 죽여 버릴 거야……! 그리고 그다음엔…….”

분명 눈빛은 흐리멍텅했으나 제레미야에게로 돌린 순간, 그는 평소처럼 멀끔한 얼굴이 되었다.

“아아, 황자님. 제가 황자님을 지켜 드리러 온 겁니다. 그렇지요?”

“무, 무슨 소리인가, 쟈힘……!”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세르히 백작이 황자님을 보고 싶어 한다고요, 역시 저만큼 황자님이 원하는 걸 들어드리는 시종이 없잖습니까.”

쟈힘은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씩 안토니아와 제레미야를 향해 다가왔다.

“자아, 황자님, 제가 보호해 드릴게요. 저 방자한 세르히 백작으로부터. 저 세르히 백작만 아녔어도 황자님은 절 줄곧 곁에 두었을 거라 믿고 있으니까요.”

“미, 미친 건가, 쟈힘!”

안토니아는 제레미야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딱 봐도 미친놈에게 굳이 미쳤냐고 물어볼 이유가 뭐 있단 말인가.

“아, 세르히 백작이 그사이 황자님을 속인 거로군요, 절 무서워하시다니…….”

“저리, 저리가!”

“걱정 마세요, 황자님, 제가 세르히 백작님을 황자님께 꼭 드릴 거랍니다.”

“뭐, 뭐?”

이 와중에 제레미야는 솔깃해하고 있었다.

‘멍청한 인간!’

딱 봐도 자신을 죽여서 안겨 주겠단 소리 아닌가.

그녀는 드레스 자락에 숨긴 총을 꽉 쥐었다.

‘아무래도 정말로 내 목숨부터 지켜야 할 모양이야.’

덤으로 제레미야도 말이다.

안토니아는 총을 들고서 그대로 쟈힘을 향해 겨누었다.

자신은 무력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럴 땐, 빨리 선타를 날리는 게 제일이었다.

‘싸우겠다고 생각하지 마, 무조건 쏘고 도망쳐야 해.’

어린 시절 리샤르가 그렇게 제게 가르쳐 줬으니까.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소리가 울리자마자 안토니아는 제레미야의 팔을 덥썩 잡은 채 폐광의 입구 쪽을 향해 냅다 달렸다.

미리 바람이 부는 쪽을 알아 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세르히 백작-!!”

살상 능력이 적은 탄환이라서일까, 아니면 그가 마약에 취한 상태라서일까.

어깨에 총을 맞은 쟈힘이 괴성을 지르며 쫓아오기 시작했다.

“죽여, 죽여 버릴 거야! 너 같은 것……! 내 계획을 다 망쳐 놓고 본인만, 본인만 살아남겠다고?!”

쟈힘의 괴성에 제레미야는 안토니아의 팔을 마치 구명줄인 것처럼 덥석 붙들었다.

“어, 어, 어떻게 하나, 세르히 백작. 나, 나, 숨, 숨이…….”

“말하지 마세요!”

짜증 나고 숨만 차니까.

안토니아는 그대로 손을 돌려 한 발을 더 겨눠 쏘았다.

탕-!

“으아악!”

허벅지에 명중했다. 쟈힘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이제, 이제 된 건가?!”

“좀, 닥치고 뛰시라고요!”

정말 예전에 자신은 이딴 걸 데리고 어떻게 10년 가까이 산 걸까.

안토니아는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쟈힘을 보며 제레미야의 목덜미를 쥐고서 달리기 시작했다.

* * *

얼마나 뛰었을까.

원래도 아주 크지 않은 광산인 게 다행이었다.

“다리가 후들후들거려, 세르히 백작. 나 너무 힘들어.”

심지어 그 와중에도 제레미야는 칭얼댔다.

쫓아오던 쟈힘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수 분가량 지난 느낌이었다.

바람이 부는 걸 보면 입구인 것 같은데 하필 이 근처엔 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원래 이 폐광산은 폰스 남작가의 것, 쟈힘이 구조를 모를 리가 없는데.’

초조해하며 벽을 더듬던 안토니아는 출입구에 보통 달아 두는 문고리를 찾았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곧장 열지 않고 고민했다.

‘함정일 수도 있어.’

쟈힘이 조용한 것도 이상한 데다, 광산인 만큼 길이 하나일 리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바람을 따라 달려왔다지만…….

“뭐 하는가, 세르히 백작?”

안토니아가 움직임이 없자, 제레미야가 주춤주춤 찾아와 벽을 만졌다.

“아니, 이건 입구이지 않은가! 안 열고 뭐 하는가! 히히, 그렇게 나와 함께 있는 게 좋던가?”

‘이 인간이 무슨 헛소리야.’

안토니아는 어이없어하며 제레미야의 손을 탁 쳐 냈다.

“아니요, 황자님. 잠시 확인할 게-.”

“싫어! 나는 이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얼른 나가고 싶단 말이네!”

제레미야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를 옆으로 확 밀었다.

“문고리를 열 줄 모르는 거라면 내가 해 주지, 흠, 흠.”

갑작스레 떠밀려 뒤로 넘어진 안토니아는 급하게 외쳤다.

“안 돼요, 황자님!”

“그래, 그래, 그대의 마음은 알아. 데이트는 나가서 느긋하게 하자고, 내가 라방드를 또 예약하지, 아, 세르히 백작이 가고 싶은 곳이어도 좋고.”

“아니, 그런 소리가-!”

그러나 안토니아가 다시 일어나 말리는 것보다도 제레미야의 손이 빨랐다.

문이 열린 순간.

“아, 역시 황자님, 절 반겨 주실 줄 알았습니다.”

입이 찢어져라 웃는 쟈힘 폰스가 서 있었다.

“아, 아악! 왜, 왜 거기서 나오는 건가, 쟈힘!”

“얌전히 계시면 됩니다. 황자님, 제가 황자님을 해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쟈힘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들어 안토니아를 향해 달렸다.

그 순간, 안토니아는 본능적으로 평소 쓰던 총이 아니라 리카르도가 건넨 조금 큰 총을 쥐었다.

탕-!

스스로도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대로 쟈힘의 손에 죽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뭐? 어째서……?”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쟈힘의 눈이 커졌다.

이번엔 제대로 명중이었다.

쟈힘의 단검은 안토니아에게 제대로 닿지 못한 채 멈췄다.

그는 자신의 옆구리와 안토니아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쨍그랑-!

곧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쟈힘이 쥔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세, 세르히 백작……. 이, 이럴 수는, 이럴 수는……!”

그대로 쟈힘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그는 끝까지 발악하며 검을 쥐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그의 몸이 멈췄다.

“……대, 대단하군! 세르히 백작!”

먼저 촐싹대며 반응한 건 다름 아닌 제레미야였다.

안토니아도 겨우 안도하려던 차.

쾅, 콰과광!!

커다란 소리와 함께 쟈힘의 너머로 보이던 출입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안토니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미쳤어.”

그리고 더 절망스러운 건.

“어, 어떻게 하지, 세르히 백작?”

이런 순간에 함께 있는 게 제레미야란 사실이었다.

* * *

“그대가, 그대가 책임져! 다 이게 그대가……!”

이럴 때도 제레미야는 안토니아를 탓하기 바빴다.

“그대가 날 안 봐줘서 그런 거잖아! 내가 아니라, 숙부님을 그대가 선택해서 내가……!”

그래도 본인이 쟈힘을 쫓아내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단 머리는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안토니아가 알 바는 아니었다.

“황자님은 정말 모든 걸 남 탓만 하시네요, 그런 분을 제가 왜 선택해야 해요?”

제레미야의 헛소리에 안토니아는 딱 잘라 외친 뒤, 어떻게든 안전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불길이 확 치솟긴 해도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아직 살아날 길은 있었으니까.

‘루퍼스에게 신호를 보냈으니까, 어떻게든 해 줄 거야.’

안토니아는 애써 냉정하게 생각하며 광산을 둘러보았다.

모래주머니도 있었고, 이런 사태를 대비한 가벽도 보였다.

안토니아는 못 박힌 듯 서 있는 제레미야를 짐짝처럼 끌어다 안으로 당겼다.

공중에 매달린 방화용 가벽을 총으로 사슬을 쏴 떨어트렸다.

바깥에서 계속에서 폭발 소리가 들렸으나, 다행히 안쪽까지 영향을 주기에는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만약을 대비해 광산 곳곳의 모래주머니도 가까운 곳으로 날라 두었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렇게 안토니아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이에도 제레미야는 그저 멀뚱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가 겨우 한숨을 돌리자, 제레미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왜 날 구해 줬어?”

“황자님이시잖아요.”

딱 그 이유뿐이었다.

멍청하고 짐 덩어리 같은 자여도 하필 황족이었다.

게다가 쟈힘이 자신이 걸려들도록 함정까지 파 뒀으니, 자신이 살려면 무조건 이 걸리적거리는 인간도 살려 나가야만 했다.

“그, 그러니까 나라서란 소리 아닌가.”

그리고 제레미야는 그 말을 알아들을 머리가 없었다.

안토니아는 입술만 짓씹으며 눈을 감았다.

‘……루페, 빨리 와.’

이대로 이 헛소리를 듣다 보면, 자신이 제레미야를 쏴 버릴 것 같았으니까.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벽 너머에서 굉음이 멎은 지도 좀 시간이 지난 차였다.

안토니아는 내부가 탁한 공기로 가득 차지 않은 걸 천운으로 생각하며 막아둔 방화벽에 손을 대었다.

‘……불길은 멎었구나.’

자신들이 갇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다른 출입구도 그사이 찾아보았으나,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세르히 백작……. 나 너무, 배고파. 목도 마르고…….”

그 와중에 제레미야는 옆에서 찡얼거리기 시작했다.

안토니아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회귀한 게 꿈이고, 이게 현실인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회귀 전 제레미야보다 좀 어린 것 빼고는 제게 하는 짓이 너무도 똑같아서 말이다.

‘루페, 제발…….’

안토니아는 이쯤 되니 루페에게 기도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루페, 이렇게 무능한 애 아니잖아.’

수도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수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안토니아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어떻게 제레미야의 저 찡얼거림을 멈출까 고민했다.

“그, 백작의 총으로 벽을 쏴서 뚫어 버리면 안 되나?”

헛소리가 참 끝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게 가능했으면 애초에 처음부터 그렇게 했지.’

두꺼운 돌벽을 총으로 어떻게 뚫는단 말인가.

안토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하려던 차.

“드, 들리나, 세르히 백작?!”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틀림없이 형님일 거야! 날 구하러 온 게 분명해!”

제레미야는 모두 자신 덕인 줄 알라는 듯 뿌듯함까지 섞인 말투로 외쳤다.

그리고…….

타앙-!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는 호쾌한 총소리와 함께 가벽이 무너져 내렸다.

방금 전에 총으로 어떻게 벽을 부수냐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말이다.

“악, 전하! 기다리시라니까! 누가 방화벽을 무식하게 총으로 쏴서 부숩니까!”

시끄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커다란 남자가 다가왔다.

“어……?”

예상과는 다른 사람의 등장에 제레미야의 눈이 커졌다.

“어, 어째서, 숙부님이……. 어어어?”

“자, 자, 황자님, 어디 다치신 곳 없으십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아주 걱정하고 계시답니다.”

그러나 제레미야는 금방 시끄러운 시종의 손에 이끌려 나가고, 어슴푸레한 빛이 도는 폐광산에는 오로지 안토니아 자신과.

“……다행이야, 정말로……. 안토니아.”

세상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얼굴을 한 리카르도가 서 있었다.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약간의 망설임이 곧장 날아갔다.

겉으로 닮은 곳은 없었지만, 저 표정과 저 말투.

그리고 늘 자신을 구해 주던 깨끗한 총소리.

가리키는 답은 오로지 하나였다.

안토니아는 그에게로 다가가며 속삭이듯 외쳤다.

“……리샤르.”

참 멀리 도는 길을 선택한 제 어릴 적 추억이 그곳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