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네?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세르히 백작님……?”
신문사 편집장은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 달라는 듯한 눈초리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진심이네.”
“아니, 하고 많은 날 중 왜 하필 11월 20일입니까.”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네?”
편집장은 진심이냐는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왜냐하면 그날은 모두가 아는 오르테가 후작가의 자선 연주회 날이었으니까.
게다가 발렌타인이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른 해부터는 줄곧 그녀가 담당해 온 행사이기도 했었고.
당연히 대부분의 신문사들은 유력 귀족 가문 사람이자, 예비 황태자비인 발렌타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저어, 백작님. 다른 날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게, 안 되는 이유가 있느냐고 묻질 않았는가.”
똑같은 날 자선 행사를 치른다는 광고를 내 달라는 안토니아의 요청에 편집장은 매우 조심스럽게 설득을 시작했다.
“다른 날로 하신다고 하면, 예를 들어 27일은 어떻습니까! 이날도 매우 좋은 날인데요.”
“그러니까-.”
안토니아가 이유를 말하라고 다시 한번 재촉하려 하자 편집장은 화들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
“그날로 하신다면 저희가 두 면을 할애해서 광고를 하지요. 원하신다면 27일까지 조간의 꼭 한곳에 싣겠다고 약속드릴 수도 있습니다.”
누가 들어도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편집장은 제발 이 혼신의 설득이 안토니아에게 먹히길 바랐다.
그러나.
탕-!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배, 백작님.”
“이유를 설명하라고 했더니, 말을 돌리며 대답을 피하는 것인가?”
“대답을 피하는 게 아니라…….”
편집장은 지금만큼은 자신이 편집장이 아니고 싶다고 생각하며 붉은빛 찻물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계속 내 시간을 빼앗을 셈인가? 마기나에게서 청구서를 얼마나 더 받고 싶은 것인지…….”
‘청구서’. 그 말에 편집장은 화들짝 놀라 허리를 바로 세웠다.
지난 몇 주간 얼마나 끔찍했는가.
자신의 신문사만이 아니었다. 린스올 상단주 사건 때 오보를 냈던 신문사 모두가 매일같이 마기나의 청구서를 겁내며 받았다.
‘꼬투리 잡을 곳도 하나 없던 어찌나 완벽한 청구서던지.’
게다가 어쩜 그렇게 안토니아에 대한 헛소문을 말하는 사람 수를 빠짐없이 세어 보내는지 악마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덕분에 신문사들은 직원 월급도 간신히 줄 지경이었다.
‘어떻게 뒷골목의 얘기로 떠드는 것까지 우리가 막는단 말이야!’
그나마 수도 내로 한정해서 다행이지, 지방까지 카운트했으면 피해액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래서 편집장은 되도록 안토니아의 요청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놀판트 남작 사건 때는 기사를 똑바로 써 줬다며 마기나가 청구 금액을 좀 깎아 주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그 뒤에도 세르히 백작가나 크롬프트 상단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좋은 말만 쓰려고 노력했는데.’
그런데 또 청구서라니! 정말로 도망치고 싶은 말이었다.
편집장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그날은……. 그날은 오르테가 후작 영애의 자선 연주회가 있는 날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니, 그 백작님도 이왕 하는 자선 행사면 성공시키고 싶으실 것 아닙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편집장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대는 내가 실패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인가?”
“네? 아니, 그게…….”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상대는 그 오르테가 후작가의 발렌타인이었다.
‘누가 오르테가 후작가를 거스르면서 세르히 백작가의 자선 행사에 가려고 하겠어.’
몇몇 후작가와 사이 나쁜 집안을 빼놓고는 저울질의 결과가 너무 빤했다.
“이번 광고를 실어 주면 앞으로 청구서의 금액을 대폭 깎아 줄 생각이었는데.”
“……네?”
“크롬프트 씨와도 협의한 사항이고.”
그러나 지난 몇 주간 아주 지독하게 겪은 청구서의 집요함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사람이 적게 온다 해도 그대들이 책임질 문제는 아니잖아.”
하긴 그것도 그랬다.
‘우린 광고를 싣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튕겨졌다.
오르테가 후작가가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보완할 방법이 빠르게 떠올랐다.
‘오늘 세르히 백작이 어떻게 굴었는지 귀띔해 주면 분명 참작해 줄 거야!’
당연히 신문사 편집장은 안토니아나 루퍼스 크롬프트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진 않았으니까.
‘그 더러운 청구서만 아니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렌타인과 대등하게 굴려 한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돌고, 자선 행사까지 실패한다면 분명 크게 망신을 당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세르히 백작이라고 해도 수도에서 더 버틸 순 없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편집장은 자신들이 손해 볼 건 없단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말씀하신 건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래,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아, 그대들과는 다르게 말이야.”
그 말에 편집장은 속으로 감정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꼈으나 꾹 참고서 안토니아와 광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 * *
“참 빠르기도 하지.”
안토니아는 폴리가 가져다준 편지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광고가 나간 지 사흘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워낙 입들이 잽싸니까.”
안토니아는 며칠 전 백작가 타운하우스를 다녀간 면면들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들은 린스올 상단주 사건에서 얻은 교훈이 없는 모양이었다.
안토니아의 광고를 싣는 대신 오르테가 후작가로부터 신문사를 지키고자, 그들은 안토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후작가와 사교계에 흘렸다.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다니 순진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안토니아의 말에 폴리가 잽싸게 답했다.
“당연히 멍청한 거지요! 우리 주인님이 이렇게 멋지신데.”
의기양양한 폴리의 모습을 보며 안토니아는 속으로 웃었다.
“입을 싸게 놀리고 다닐 거란 걸 주인님이 계산했다는 걸 그치들은 상상도 못 할걸요?”
“뭐, 상상했어도 입을 놀리지 않을 수가 없었을걸?”
무조건 안토니아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최대한 안토니아에게 망신 줘서 회복 불가능하게 만드는 게 그들에겐 이로울 테니까.
다만 그들에겐 안된 소리지만, 이미 일은 절반쯤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안토니아는 편집장들과 만나며 일부러 더 거만하게 굴었다.
발렌타인과 자신이 뭐가 그리 다르냐는 듯 말이다.
게다가 도발적으로 발렌타인의 자선 연주회와 같은 날짜를 지정하며 ‘어떤 내용의’ 자선 행사인지는 알리지 않았다.
그저 대담하게 아름다운 디자인의 이미지와 함께 ‘겨울 속 봄날의 따스함을 부르는 밤’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을 뿐이었다.
광고는 각 신문사의 입 싼 험담과 함께 톡톡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안토니아가 일부러 신문사에도 어떤 내용의 행사인지 밝히지 않은 탓에 귀족들이 끝내 행동에 나섰다.
‘이렇게 다들 궁금해서 편지를 보낸 걸 보면 말이야.’
안토니아는 만족스러워하며 그 편지들에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당연히 답을 알려 주진 않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제 첫 자선 행사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되도록 그날의 기쁨으로 즐겨 주시길 바란답니다.
결코 여러분의 걸음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답답함은 좀 남겠지만 그만큼 갈등하게 될 것이다.
‘이미 내용을 아는 오르테가 후작가의 연주회와 내용물이 비밀인 내 자선 행사 둘 중 어딜 갈지 말이야.’
사람은 호기심에 약한 법이었다.
그것도 참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귀족들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토니아는 한 고개 넘었단 기분으로 두 번째 광고 문구를 작성하며 폴리에게 물었다.
“로레나는 어때?”
“어제도 잘 잔 것 같았어요. 아직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무리인 것 같지만요.”
“그래…….”
안토니아는 그래도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로레나는 놀판트 남작의 재판 날 저녁 의식을 회복했다.
눈을 뜬 뒤 첫마디가 참 그녀다웠다.
‘혹시 제가 늦잠을 자서 주인님이 직접 깨우러 오신 거예요?’
그녀는 주변이 어떤지 둘러볼 경황도 없이 안토니아의 얼굴만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 긴 늦잠을 잤어, 로레나.’
‘얼른, 얼른 일어나서 준비할게요.’
‘아니야, 로레나.’
안토니아는 막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일부터 찾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이야기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내 곁을 지켜 줘. 더는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진 않으니까.’
‘……주인님.’
다행인지 불행인지, 로레나는 그날의 사건에 대해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조금 늦잠을 잔 것이라 생각한 그녀는 자초지종을 알게 된 뒤엔 현실감이 없다는 듯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저 같은 것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 저는…….’
‘저 같은 것이 아니야, 로레나. 나는 로레나가 없으면 큰일인걸. 폴리에게 장부를 보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 말에 로레나는 옅게 웃으며 ‘그러네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폴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약하게 항의했지만.
‘전 아가씨를 기쁘게 해 드리는 존재잖아요!’
아주 폴리다운 말로 말이다.
자신이 머문 게 대공저라는 사실을 알고 한 번 더 로레나가 놀란 건 덤이었다.
아무튼 로레나가 제때 깨워 준 덕분에 안토니아는 이 자선 행사를 타운하우스로 돌아와 준비할 수 있었다.
‘전하께 빚을 계속 늘려 놓고 싶진 않으니까.’
안토니아는 씁쓸해하며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오르테가 후작 영애가 본격적으로 방해하기 전에 하나라도 더 해야지.’
안토니아는 결코 발렌타인을 만만하게 보고 있지 않았다.
* * *
“분명 나는 그 어느 곳도 세르히 백작가에게 홀을 빌려주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던 것 같은데.”
느긋하게 일어나 신문을 펼친 발렌타인은 새롭게 실린 광고를 보며 불쾌한 듯 읊조렸다.
나른한 듯 엄한 그 말에 발렌타인의 시중 하인은 어깨를 굳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째서 여기엔 가르제니야 홀이라고 장소가 적혀 있는 거지?”
발렌타인의 미간이 불쾌한 듯 찌푸려졌다.
“그, 그것이…….”
“고작 명맥만 잇는 귀족 주제에 감히 나와 세르히 백작을 두고 저울질을 했다?”
그녀는 가르제니야 홀의 주인을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발렌타인은 진하게 우린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찬찬히 내려놓았다.
느긋한 그 행동 하나하나에서 군더더기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시중 하인에게 물었다.
“대공가가 도와주었나?”
“아, 아닙니다. 아가씨.”
“그럼 세르히 백작의 힘이란 소리인가?”
발렌타인이 혀를 찼다.
그녀는 광고를 살펴보았다. 눈에 거슬렸다.
그것도 아주.
‘이런 재주를 가졌으면 얌전히 굴기만 해도 미래가 편안했을 텐데.’
감히 자신에게 덤비지 않고 몇 년만 영지에서 가만히 머물렀다면 말이다.
‘그랬다면 작게라도 권력을 주었을 텐데.’
굳이 이렇게 몸부림치며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발렌타인은 쓸모 있는 자들을 꽤 좋아했으며 친히 거두는 걸 하나의 기쁨으로 여겼으니까.
“……그래 봐야 약한 들풀이나 다름없는 존재지.”
그렇다면 피려고 하기 전에 싹을 밟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재밌지 않은가, 어떻게든 자신을 이겨 보려고 온갖 방법을 써 소문을 내려는 이 모습이.
“가르제니야 홀에 전해.”
“…….”
“무엇이건 간에 세르히 백작이 제시한 것보다 3배 이상을 보상하겠다고.”
“알겠습니다, 아가씨.”
발렌타인은 그렇게 지시한 뒤 가볍게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안토니아는 힘이 없었다.
그러니 분명 자신이 가진 패 모두를 이용해 아등바등 애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복잡하게 수를 생각하는 것보다도 힘으로 눌러 버리는 게 훨씬 간단하고 깔끔했으니까.
‘정말로 못 봐 주겠군, 고작 하녀 따위를 가지고.’
발렌타인은 광고가 실린 페이지를 아예 빼 버렸다.
얄팍한 신문이 발코니 너머에서 들어온 바람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에게 안토니아는 딱 저렇게 품위 없고 볼품없는 그저 껍데기만 귀족인 자처럼 느껴졌다.
* * *
11월 20일, 오후 3시.
안토니아는 조금쯤 긴장되는 마음을 품고서 가르제니야 홀에 도착했다.
홀의 주인인 백작 부인은 지난번과 같이, 아니 훨씬 밝은 얼굴로 나와 안토니아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세르히 백작.”
“홀을 빌려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백작 부인.”
“호호, 별말씀을요. 좋은 일을 한다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아는 자로서 어떻게 모른 척하겠어요.”
얼핏 의례적인 말이었으나 안토니아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지난 몇 주간 오르테가 후작가에서 백작 부인을 얼마나 위협했는지.’
안토니아가 ‘그걸’ 백작 부인에게 찾아 주어 겨우 버텨 낸 거나 다름없었다.
바로…….
“세르히 백작이 제게 아주 귀한 보물을 찾아 주기까지 했는데, 당연한 거기도 하고요.”
“아니에요, 그저 우연이었는 걸요.”
“우연이라면 더욱 주신의 인도가 아니겠어요. 영영 못 찾을 줄 알았던 이 브로치를 찾은걸요.”
저 브로치는 백작 부인이 십여 년쯤 전, 집안이 어려워지자 적 팔았던 조모님의 유품이었다.
몇 해 전, 안토니아는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회귀 전 그가 저 브로치를 간절히 찾던 것을 떠올리고 사 두었었다.
‘백작 부인의 것이란 걸 기억해 내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빌릴 홀이 없어서 행사를 열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 말고 다른 곳은 절대 불가를 외쳤으니까.
“앞으로도 이 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하세요, 세르히 백작.”
“정말요?”
“그럼요, 백작에게라면 제가 다른 사정이 있더라도 꼭 빌려드릴 테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백작 부인.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안토니아는 그녀에게 답하며 생각했다.
‘조만간 사들였던 물건들을 점검해야겠어.’
안토니아가 회귀 전 기억을 더듬어 산 물건은 저것 하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혹시 아는가, 또 어려운 일을 넘길 만한 좋은 아이템이 나올지.
* * *
안토니아는 백작 부인과 함께 홀 내부를 둘러보았다.
홀의 장식을 크게 바꾼 것은 아니었으나 조명의 밝기를 조절하고 몇 가지 소품을 곁들여 지난번과는 분위기가 확 달랐다.
‘포근한 느낌이야.’
마치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응접실에서 기대앉아 벽난로를 바라보던 때가 떠오를 정도로.
“백작이 말한 대로 자리를 넓게 배치해 보았어요, 이 정도면 사람이 좀 덜 차더라도 비어 보이지 않을 거예요.”
“정말 감사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셨어요.”
백작 부인은 이 정도쯤 간단하다는 듯 웃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해서 휑하다는 소리는 안 나오겠네.’
사실, 이 자선 행사는 무사히 열 수 있던 게 기적인 수준이었다.
정말로 지난 몇 주간 많은 방해를 받았으니까.
‘첫 번째 광고가 나간 뒤로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발렌타인이 교묘하게 함정을 파는 게 아니라 힘으로 눌러 버리려고 하는 타입이라 그럭저럭 버텨 냈다고나 할까.
발렌타인이 지난 몇 주간 손을 쓴 곳은 이 가르제니야 홀만이 아니었다.
‘주인님, 세 번째 광고를 싣지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안토니아에게 약점이 잡히지 않은 신문사들은 대부분 두 번째나, 세 번째부터 광고 게재를 거부했다.
뭐, 약점이 잡힌 자들은 울상이 되어 싣긴 했지만.
그뿐인가.
‘우리에게는 식자재를 팔지 않겠대요!’
식자재며 다기, 파티에 필요한 것들을 대놓고 판매 거부하는 곳들도 있었다.
그나마 그런 난항을 겪을 거라고 안토니아가 미리 예상해 놓은 덕에 어떻게든 방법은 찾을 수 있었지만.
몇 가지는 아예 백작령 쪽으로 연락해서 공수하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것도 어째선지 정말 필요해졌을 때는 손에 들어왔다.
‘그 당당하던 발렌타인 황태자비께서 나처럼 하찮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예상한 것보다 발렌타인은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한 모양이다.
그 덕에 날짜가 다가올수록 걱정이 많아졌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정말로 오늘 자선 행사에 올 귀족들을 좀 소극적으로 예상했다.
최악의 경우엔 십수 명 남짓, 많아도 서른 명을 넘긴 힘들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오르테가 후작가에서 연주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줄 거란 식으로 은근히 압박을 줬으니까.
실제로 자선 행사 초대장 대부분에 확답을 받지 못하기도 했고, 요 2주간은 티 파티에도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아무도 초대장을 보내 주지 않은걸.’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미래 황후 폐하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밉보이고 싶은 사람은 적을 테니까.
‘그래서 테이블을 좀 큰 걸 쓰고 사이사이 소품을 배치해 안락한 분위기를 내어 달라고 말했지.’
그런 만큼 서른 명 정도만 오더라도 안토니안에게는 성공이라고 부를만한 상황이 되었다.
‘대신 오르테가 후작 영애는 아니지만.’
이스베르가와의 관계 때문에 이쪽으로 올 게 확실한 트라체스 대공가나 유글란스 백작.
그리고 원래 후작가와 좀 데면데면한 사이인 드란제아 공작가 정도를 제외하곤 대부분 후작 영애의 연주회에 참석할 거라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
‘하도 날 방해한 탓에 이쪽에 사람이 오면 올수록 후작 영애는 우스워질 거야.’
한마디로 어떻게 생각하면 발렌타인이 만들어 준 기회이기도 했다.
게다가 안토니아는 단순히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만으로 승부를 볼 생각도 아니었다.
‘진짜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공개할 물건인데 말이야.’
안토니아는 단순히 발렌타인의 얼굴에 먹칠만 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시적인 성과를 원했다.
한 번 더 황제가 그녀를 인정하고 중앙 귀족으로 임명할 만한 그런 성과 말이다.
‘그러니 이번만 잘 버텨 넘기면 돼.’
물론 자선 행사가 끝난 뒤, 발렌타인이 어떻게 나올지 상상만으로 피곤해지려 했으나 그건 우선 덮어 두기로 했다.
걱정은 가득했으나, 어쩐지 일이 잘 풀릴 거란 예감이 들었다.
* * *
홀 내부와 음식들을 점검하고 루퍼스나 오늘을 위해 준비한 사람들의 모습도 확인하자, 어느덧 행사 시작 40여 분 전이 되었다.
안토니아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 뒤, 손님을 맞기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
세 번이나 호기심을 당길 만한 광고를 내고 열심히 소문은 흘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그리고 왠지……. 꽤 사람이 오실 거라고 기대한다면 너무 낙관적인 걸까?’
물론 이러다 사람이 적게 온다면 내일 신문 기사가 아주 볼 만할 터였다.
처음으로 도착한 건 예상대로 이스베르가와 리카르도였다.
“오늘도 예쁘구나, 안토니아.”
“어서 오셔요, 이스베르가 님, 대공 전하.”
그 말에 리카르도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내가 정말 도와줄 건 없니?”
“준비는 거의 다 된 참이에요, 백작 부인께서 신경을 많이 써 주셔서요.”
“그래, 우리 안토니아는 어쩜 이렇게 똑 부러진 건지.”
이스베르가는 만족스럽다는 듯 안토니아의 어깨를 톡톡 두들겨 주었다.
마치 그녀의 어린 딸에게 칭찬할 때와 똑같은 행동이라 안토니아는 조금 쑥스러워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리카르도는 대화가 일단락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르히 백작, 개인적으로 초대한 분들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초대한 사람?’
누구길래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싶었다.
문득 이스베르가와 시선을 맞추자 그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대공 전하께서 부른 분들이라면 괜찮은 분들일 테니까요.”
리카르도는 그 말에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곁에 있던 붉은 머리 기사에게 무언가 지시했다.
이스베르가와 리카르도가 도착하고도 10여 분가량은 도착하는 걸음이 없었다.
30분쯤 남았을 때, 유글란스 백작 내외와 드란제아 공작 내외가 도착해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재미난 것을 보여 줄지 기대하고 있다네.”
“감사합니다, 공작님.”
“너무 긴장하지 말게, 잘될 테니까.”
노신사는 멋진 윙크까지 날리며 홀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섰다.
드란제아 공작 부인은 그 모습을 보며 ‘제 남편이 주책이에요.’ 하는 얼굴로 미안하다는 듯 손짓하고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에도 렘버트 자작 내외나, 몇몇 귀족들이 도착했으나 시작 15분쯤을 남길 때까지도 겨우 열 팀 정도를 채웠을 뿐이었다.
‘역시 예감은 그냥 내 희망 사항이었을까.’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 이유도 있긴 했는데.
그래도 초대장에 오겠다고 답장한 사람들은 다 와 주었다.
‘하긴 오르테가 후작가의 위세가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하기도 했지.’
그들의 눈치를 무시하며 방문하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그러나.
“주인님, 마차 소리가 잔뜩 들려요!”
“응?”
슬슬 어쩔 수 없다며 홀 안으로 들어갈까 하던 안토니아는 놀라 길을 보았다.
“저걸 보세요. 마차가 줄줄이 들어오는걸요!”
귀가 밝은 폴리의 말이 사실이었다.
홀 가까이로 마치 유글란스 백작의 제작 발표회 때처럼 여러 대의 마차가 모습을 보였다.
홀 안이 급작스레 분주해졌다.
세르히 백작가의 하인들과 가르제니야 홀의 하인들은 급하게 좌석 간의 사이를 조정해야만 했다.
‘역시 예감, 아니 추측이 맞았어!’
안토니아는 15분 사이에 확 몰린 귀족들을 보며 찬찬히 응대를 시작했다.
“많이 기대하고 있답니다. 그 광고를 보면서 답을 알고 싶어서 어찌나 오늘이 오길 기다렸는지요.”
“아직 어린 분이라 그러신가? 세르히 백작은 은근히 짓궂은 데가 있군요.”
“다들 모이기만 하면 세르히 백작이 뭘 준비했는지 궁금해하며 수다를 떤걸요.”
“몰랐지요? 그래서 일부러 저희도 세르히 백작에게 그사이 티 타임 초대장을 보내지 않기로 했었답니다!”
“세르히 백작도 반응을 좀 궁금해하라고 말이에요.”
안토니아는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로 그런 의도로 행동한 게 아니란 걸 아주 잘 알았으니까.
‘하도 눈치를 줬으니까.’
오늘이 오기까지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고 그들도 조용히 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다들 기분은 무척 나빴겠지.’
기본적으로 귀족 중에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다.
황실에는 충성을 맹세하고 받드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같은 귀족이라면 달랐다.
‘아무리 위세가 대단한 후작가라곤 해도 오르테가 후작 영애는 백작 이하 귀족 가문을 마치 정말 아랫사람 대하듯 했으니까.’
당연히 반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드란제아 공작이나 트라체스 대공조차도 다른 귀족들을 그런 식으로 대하진 않는데.
무엇보다 발렌타인은 생각을 잘못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연주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압박을 넣었다.
하지만 귀족들에게는 선택지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귀족 본인이 안 가도, 후계자나 형제 등을 얼마든지 대리 참석시킬 수 있는걸.’
실제로 어떤 귀족이 은근히 안토니아에게 배려하듯 말했다.
“다들 연주회에는 아이들을 보내거나 했답니다. 그러니 백작은 너무 부담 가지지 말아요. 다들 요 몇 주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게 아니니까요.”
그 말대로 귀족이 아니라 작위 후계자가 온 집안도 반 이상쯤 되었다.
‘괜히 반감을 사서 스스로 함정에 빠져 주다니, 정말 고맙지 뭐야.’
단순히 귀족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만으로는 이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반쯤 도박이었지만 발렌타인이 자극받도록 일부러 눈에 띄게 행동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역시 발렌타인 님은 생각한 대로 이런 방법을 써 줬고 말이야.’
콧대 높은 발렌타인은 고작 동쪽 구석에서 지내던 백작 따위가 이런 계산을 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하겠지만.
그간 준비하며 무척 애는 먹었지만, 발렌타인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다고 생각하니 조금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안토니아는 속으로 미소 지으며 다른 사람들을 마침 준비가 끝난 홀 내부로 안내했다.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이제 다들 안으로 들어가 주세요, 자리로 안내해 드릴 거예요.”
* * *
“실내가 좀 춥지 않은가요?”
“그러게요, 바깥보다 어째 더 추운 느낌이에요.”
안내받아 홀 안으로 들어온 귀족들은 쌀쌀함에 입고 온 외투는 벗었으나 다들 숄 정도는 걸쳤다.
입은 옷 중에서는 소매가 짧다거나 디자인을 살리고자 얇은 원단을 쓴 것들도 있었으니까.
“기껏 시간을 내서 왔는데, 설마 세르히 백작. 이렇게 춥게 저녁을 보내도록 할 건 아니겠지요?”
어떤 귀족 하나는 아예 안토니아에게 대놓고 묻기까지 했다.
“오늘은 춤을 추는 무도회도 아닌데 설마요. 그랬다가는 내일 모두 의사나 신관을 불러야 할 거예요.”
“봄날의 따스함을 부르는 밤이라고 분명히 첫 번째 광고에 실었는데 그럴 리가요.”
귀족들은 은근한 기대를 담아 말하며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안토니아는 웃으며 찬찬히 폴리가 트레이에 받쳐 가지고 온 잔을 들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세 번에 걸쳐 드렸던 모든 말을 지킬 생각입니다. 물론 따로 답장 드렸듯 ‘걸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말도 진심이고요.”
“그렇게 말하니 이 추위를 조금 참아 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세르히 백작.”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아 줬으면 해요, 저는 무척 추위를 타거든요.”
그렇게 말한 귀족은 심지어 어깨를 훌쩍 다 드러낸 차림새이기도 했다.
“물론이랍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 주시고 첫 잔을 들어 주세요.”
안토니아의 말에 귀족들은 작게 웃으며 잔을 하나둘 들었다.
“술로 몸을 데우라는 건가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로군요.”
기대감 덕분일까, 다행히도 크게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술로 몸을 데우는 것도 물론 좋은 생각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정말 봄날의 따스함을 불러 볼 참이에요.”
“첫 잔을 건배하는 것으로 봄날의 따스함을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두 번째 문구가 그랬었지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으로 미소 지었다.
생각한 것보다 더 귀족들은 광고의 문구들을 곱씹고 곱씹은 모양이었다.
‘첫 축배가 안겨 주는 기적.’
안토니아는 두 번째 문구를 그렇게 적었다.
쌀쌀함에 짜증 낼 귀족들의 인내심을 다독이기 위해 말이다.
“오늘 와 주신 모든 분들께 봄날의 따스함을 전합니다!”
안토니아의 말과 함께 공중에서 경쾌하게 잔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초록빛 망토를 두른 아이들이 트레이에 무언가를 받쳐 들고 홀 안으로 들어와 귀족 사이를 돌며 지나갔다.
“어머나, 이 아이들은 누구일까요?”
“봄의 요정이 아닐까요?”
“아하, 세 번째 광고 문구는 이걸 설명하는 거였군요!”
‘봄의 요정이 지켜 주는 겨울 속 따스함을.’
세 번째 광고 문구는 이런 내용이었다.
사실 알고 보면 거의 직설적인 내용들이었다.
‘난 렘버트 자작 부인처럼 그런 쪽 재주는 없으니까.’
그래서 안토니아는 그저 연말에 어울릴 정도로 순수한 감성을 담아 열심히 썼을 뿐이었다.
물론 사실 숨은 뜻도 하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어쩐지 정말 춥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게요……? 술 때문일까요?”
귀족들은 훈기가 돌자 의아해하며 하나둘 외투를 벗어 하인들에게 건넸다.
그러곤 얼른 설명해 보라는 듯 안토니아를 재촉했다.
“세르히 백작, 여기까지 와서 우리와 수수께끼 놀이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얼른 이 마법의 정체를 알려 주면 좋겠어요, 벽난로도 저렇게 꺼져 있는데 무슨 재주를 부린 거지요?”
귀족들의 물음에 안토니아는 옆으로 선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초록 망토를 입은 아이들은 트레이 위에 덮여 있던 천을 일제히 걷어 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던 걸 본 귀족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야기했다.
“가죽 물주머니잖아요?”
“손을 녹일 때 쓰거나 이불 속에 넣어 두는 그거죠?”
“설마 세르히 백작, 저것 때문에 지금 실내가 따뜻해졌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지요?”
여섯 명 정도의 아이가 하나씩 들고 있긴 했어도, 이 홀 전체를 따뜻하게 할 수 있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설마요, 물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부어 침대에 넣어 두어도 거기 근처만 조금 따뜻해지고 마는 정도잖아요.”
조금 전 추위를 탄다고 이야기한 귀족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토니아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 마법이고, 기적이라고 감히 칭한 것이랍니다.”
그 말에 귀족들이 놀란 듯 감탄했다.
“정말로 저 물주머니가 이 큰 홀을 따뜻하게 한 거라고요?”
“대단하네요, 벽난로를 떼도 이렇게 따뜻하긴 어려운데.”
“또 크롬프트 씨의 작품인가요?!”
어쩐지 마지막에 외친 사람은 다른 기대를 한 듯한 느낌이었지만.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어째서인지 루퍼스를 얼른 불러 줘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어머나, 크롬프트 씨예요.”
“어쩜 저렇게 의젓한데 귀여울 수가 있을까요.”
홀로 들어서는 루퍼스를 보며 몇몇이 작은 감탄을 터뜨렸다.
안토니아는 그 반응을 조금 이해했다.
‘사실 마법사는 로레나나 폴리가 아닐까.’
그 두 사람의 합작으로 오늘 그의 모습이 한층 더 사랑스러웠으니까.
포슬포슬한 분홍 머리카락은 열을 가해 부드럽게 정리해 빗어 내렸고, 그 위에는 도톰한 원단으로 만든 베레모를 썼다.
그는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디자인의 짙은 초록색의 긴 망토를 걸쳤는데, 목 앞부분에서 흰색 리본을 묶어 귀여우면서도 의젓한 느낌을 냈다.
안토니아는 루퍼스가 사람들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는 걸 본 다음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예상하신 대로 이번 물주머니도 여기 있는 크롬프트 씨의 작품이랍니다.”
안토니아의 말을 이어받아 루퍼스는 찬찬히 물주머니에 대해 설명했다.
마석을 동력원으로 하며, 물을 담아 잠그는 것만으로 작동되는 아주 간단한 사용법을 가진 마법 물품이었다.
모든 설명을 들은 귀족들은 감탄하며 말했다.
“대단하네요, 뜨거운 물을 담는 것만으로도 방 안이 따뜻할 수 있다니!”
“게다가 한 번 끓여서 담는 걸로 무려 하루나 온기가 유지되다니, 너무 놀랍네요.”
“정말 좋은 마법 물품이에요, 자선 행사의 취지에도 어울리고요!”
제국의 겨울은 제법 매서웠다.
귀족들이야 벽난로를 뗄 땔감이 잔뜩 있다지만 가난한 계층은 뜨거운 물을 끓이는 것조차 부담이 될 지경이었다.
실제로 제국 북부에서는 매년 동사자가 꽤 발생할 정도로 고질적인 문제였다.
‘실제로 회귀 전, 내가 스무 살 때쯤 심한 한파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고.’
사실은 그 일이 마음에 걸려 루퍼스를 재촉해 준비했던 물품이었다.
설마 그걸 발렌타인을 상대하기 위해 꺼내 들 줄은 몰랐지만.
안토니아는 귀족들이 물주머니를 관찰할 수 있도록 트레이를 든 아이들에게 지시했다.
“이렇게 홀을 따뜻하게 만들어 줬는데, 물주머니 자체는 전혀 뜨겁지 않네요.”
“좋은 것 같긴 하네요. 하지만 전 좀 무서워요.”
“뭐가 말인가요?”
“이게 고장 나거나 물품에 담긴 마법이 폭주해서 사람이 다치면 어떻게 해요? 십수 년 전에도 냉풍 마법이 걸린 부채가 고장 나 동상을 심하게 입은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영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듯 어깃장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걸 쓰다 화상을 입으면 보상은 어떻게 하려고요?”
다름 아닌 회귀 전, 발렌타인 오르테가를 열렬히 추종하던 소자작이었다.
소자작의 지적에 신기한 듯 물주머니를 만지던 사람들 중 어물쩍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다만 한편으로는 소자작을 그리 좋지 않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워낙 오르테가 후작 영애를 따라다니기로 유명하니까.’
오히려 이 자리에서 저렇게 굴었다는 걸 알면 발렌타인은 분명 눈살을 찌푸릴 텐데 말이다.
‘그녀는 차라리 압력을 주는 걸 선택하지, 저렇게 앞에서 꼬투리 잡는 건 질색하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앞에서 쫑알쫑알 저런 식으로 본전도 못 건질 말로 흠집 내기 하는 걸 그리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반대로 저 소자작은 이 행사에 조금이라도 생채기를 내면 발렌타인에게서 호의를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소자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마석 가격이 어디 한두 푼도 아닌데……. 어려운 분들에게 보급해도 금방 쓸모없는 물건이 되지 싶은데요? 제가 마법 공부를 좀 해 본 적이 있어서 말이죠.”
그러자 그 말에 누군가가 동조하며 물었다.
“그건 그렇네요. 세르히 백작,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마음 놓고 나눠 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옳은 말씀이에요.”
물론 안토니아는 이런 말이 나올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뭐, 소자작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지적할 거라고 예상은 했으니까.’
그녀는 다른 귀족들을 향해 당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마석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뜨거운 물을 이용하기에 소모가 매우 느리니까요.”
안토니아의 말을 받아 루퍼스는 약 3년 정도는 별도의 마석 보충 없이도 쓸 수 있다고 설명을 덧붙이며 말했다.
“마법을 공부하셨다고 하니 원하시면 왜 그렇게 되는지 따로 자세히 설명도 드리겠습니다, 소자작님.”
“흠, 흠. 거기까지는 되었어요. 뭐, 대강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것 같고.”
그는 어쩐지 꽁무니를 빼며, 다른 걸 지적했다.
“그렇다고 해도 안전성과 관련해선 영 불안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는 다른 귀족들에게서 동조를 구하듯 말했다.
안토니아는 그것도 문제없다는 듯 잔잔히 말했다.
“세 번째 광고 문구를 기억하시나요?”
“봄의 요정이 지켜 주는 겨울 속 따스함이었나요?”
정작 답은 불만을 토한 소자작이 아니라 다른 귀족이 말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크롬프트 씨와 오래 지냈고, 그가 만든 마법 물품도 어릴 적부터 사용했기에 안정성을 믿어요. 하지만 저 한 사람만의 보증으로는 불안하실 거예요.”
안토니아는 트레이를 든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아이들이 망토에 달린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자 귀족들이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이 아이들이 저희의 불안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건가요, 세르히 백작?”
“아이들에게 나르게 하니 안전하다고 할 생각인가요? 영 허술하군요.”
소자작이 밉살맞게 말을 덧붙였다. 안토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 아이들은 모두 마법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이랍니다.”
안토니아는 아이 중 한 명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이번 겨울부터 크롬프트 씨는 이 아이들을 상단에 고용해, 마법을 가르칠 겁니다.”
이게 이번 자선 행사의 두 번째 카드였다.
이미 카메라로 물품의 빼어남은 증명했다.
그러니 한 번 더 놀라게 하려면 또 다른 특별함이 필요했다.
안토니아는 자신감 있는 눈으로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난 자신 있어. 몇 년이고 멀쩡할 거라고 보증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안토니아 아가씨도 날 믿고 말해 줘.’
바로 며칠 전, 이 문제로 상의할 때의 루퍼스처럼.
“그리고 이 아이들을 통해 크롬프트 씨가 앞으로 만드는 물품들의 사후 관리를 할 예정입니다.”
“사후 관리라는 건, 역시 고장이 날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렇게 허술한 걸 팔려고 하다니……!”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오히려 완벽하니 아무것도 대비하지 않겠다는 게 더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요.”
안토니아는 어떻게든 꼬투리 잡으려는 소자작을 향해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있으니 할 수 있는 말이랍니다. 구매한 후 3년간은 무상으로, 그 뒤에도 아주 적은 돈만을 받고 책임을 질 예정이랍니다. 당연히 이 물품으로 인한 사고는 보상할 예정이고요.”
깔끔하고 사무적인 대답이었다.
차라리 지금 모욕하려는 거냐며 안토니아가 언성을 높였다면 반박할 수 있었을 텐데.
소자작은 뭐라고 더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만 어물거렸다.
게다가 보통 마법과 관련된 것들이 고장이 나기라도 하면 얼마나 비용이 들어가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정말 여러모로 고민을 많이 한 게 느껴지네, 세르히 백작.”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풀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드란제아 공작이었다.
“실로 자선 행사에 걸맞아. 겨울을 대비할 수 있는 물품에 심지어 그 뒤 사후 관리까지. 게다가 재능 있는 어린아이들까지 후원하겠다는 것 아닌가.”
“역시 폐하께서 한번 눈여겨보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아직 어린데도 참 대단해요. 정말로 걸음을 헛되지 않게 해 줬군요.”
공작의 말에 이어 공작 부인도 칭찬의 말을 더했다.
홀 내에서 영향력 큰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해 주자, 분위기는 금세 반전되었다.
“공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긴,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세르히 백작은 매사에 신중한 행보를 보였었지요.”
“맞아요. 무도회 때부터 항상 침착하고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지요.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이거.”
안토니아는 분위기를 바꿔 준 드란제아 공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소자작만 여전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못마땅한 듯 입술만 짓씹었다.
안토니아는 이윽고 다른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이 자리에 우리는 봄날의 따스함을 가지고 왔습니다. 앞으로 이곳만이 아니라 제국 곳곳에 이 따스함을 전하길 바란답니다.”
한마디로 귀족들의 많은 기부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안토니아가 판을 깔아 주자, 귀족들이 눈을 반짝였다.
‘이건 이름을 안 올릴 이유가 없군.’
‘여길 와 보길 잘했어. 물품도 독특하고…….’
그들은 어중간한 사업에 돈을 투자하는 것보다 더 낫겠다고 계산했다.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분도 있는 데다 효과적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저걸 잔뜩 구매해 자신들의 영지에 나눠 주면 평판까지 챙길 수 있었다.
그 누그러진 분위기에 쐐기를 박듯 루퍼스가 말했다.
“저는 이 물주머니의 수익 대부분을 기부하거나 재능 있는 아이들을 위해 쓸 생각입니다.”
루퍼스는 말투는 어른스럽고 정중했으나, 표정이 조금 풀어져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가 뜻밖의 효과를 만들었다.
기부금을 받겠다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외쳤다.
“제가 200골드를 내지요!”
“저는 300골드!”
자선 행사의 대성공을 예고하는 시작의 목소리였다.
보통 이런 자선 행사에서 외치는 기부금은 점차 커지는 경향이 있었다.
“400골드!”
“저는 450골드를 내겠습니다.”
다들 자존심이 강하니 말이다.
처음부터 큰 액수가 나온 덕에 뒤이어 나온 액수들도 하나같이 컸다.
게다가 추운 지역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은 따로 물주머니를 정가를 내고 주문하겠다고 나섰다.
‘대성공이야.’
안토니아는 아이들이 든 트레이 위에 착착 쌓이는 수표들을 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얼마나 모였는지 꼭 신문사에 흘려야지!’
액수만으로도 큰 화제가 될 것이다.
게다가 이 자선 행사에 참가하지 않은 귀족들도 자신이나 루퍼스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지민들에게서 원성을 사지 않으려면 말이야.’
예상보다 더 착착 잘 풀리는 상황에 안토니아는 꽤 즐거웠다.
물론 마음 편하기만 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이 행사가 끝난 뒤 발렌타인이 어떻게 나올까가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도대체 저분들은 누구실까…….’
첫 건배를 할 때쯤 홀 뒤편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긴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다른 귀족과 달리 홀 안이 따뜻해진 뒤에도 벗지 않고 있었다.
은근히 몇 번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안토니아는 기분이 이상했다.
‘나쁘다기보다는…….’
조금 더 생소하고 따뜻한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안토니아가 홀 안을 둘러보는 척 그들을 한 번 더 보자, 또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어쩐지 안토니아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저분들이 대공 전하가 초대했다는 분들일까.’
그러면 신원은 확실한 사람들일 텐데.
조금 호기심이 들긴 했으나, 더 빤히 쳐다보는 것도 실례고 하여 안토니아는 시선을 돌렸다.
* * *
착착 기부금이 쌓였다.
경매 같던 기부금 외치기도 거의 막바지라 아직까지 않은 사람은 딱 네 무리 정도였다.
이스베르가, 리카르도, 드란제아 공작 그리고 로브를 쓴 두 사람.
그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이스베르가였다.
그녀는 미리 준비했다는 듯 수표에 서명하며 우아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1000골드를 낼게, 안토니아.”
“감사해요, 이스베르가 님.”
“감사하긴. 트라체스 대공령도 동북부에 있어서 꽤 추운 곳이니 당연하지. 그렇지, 리카르도?”
그 말에 리카르도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베르가가 내길 기다렸던 것인지 드란제아 공작은 작게 헛기침하며 이야기했다.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썼구먼, 세르히 백작.”
“오늘 밤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물론이네, 우리 공작령은 남부이긴 하지만.”
드란제아 공작은 입꼬리를 당겨 씩 웃으며 2000골드라는 숫자가 적힌 수표를 트레이 위에 싹 올렸다.
“제국 공작으로서 이 정도는 내야지.”
“2000골드씩이나. 정말 감사해요, 공작님.”
안토니아가 액수를 소리 높여 말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귀족들에게도 2천쯤 되면 어마어마한 액수였으니까.
사실 그래서 자선 행사를 해도 보편적으로는 첫 시작이 10골드 전후인 경우가 많았다.
‘루퍼스가 여러모로 큰일을 했지.’
저 뛰어난 물주머니도, 로레나가 폴리가 만들어 준 특정 계층을 자극하는 그의 외모도 말이다.
드란제아 공작은 여러 사람이 대단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때, 잠자코 있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동북부 트라체스 대공령의 주인으로서 책임을 느낍니다. 그러니.”
그는 수표 위에 서명한 다음 안토니아에게 건넸다.
“이 정도는 내어야 부끄럽지 않겠지요.”
“……1만이요?”
안토니아는 혹시 0 하나쯤 잘못 쓴 게 아니냐는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역시 대공 전하시라고 해야 하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1만은 너무 크지 않나요? 사업 투자금이라고 해도 과할 정도인걸요.”
드란제아 공작 때는 통 큰 배포에 감탄했던 사람들이 경악하며 수군거렸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
루퍼스는 그 액수에 복잡한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미친놈이잖아.’
지난번에 했던 추측을 한 번 더 확신하며 말이다.
물론 안토니아도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다.
‘자선 행사라 크게 쓰신 거고,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은 하고 싶은데 말이야…….’
그러기엔 리카르도의 표정에서 자신을 향한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건 단순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귀족의 표정이 아니었다.
감히 대공에게 무례한 표현이라곤 생각하지만…….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다고 해야 하나.’
물론 리카르도는 스스로 말한 대로 동북부 대공령의 주인이며 그곳은 서북부 다음으로 추운 곳이긴 했다.
근데 그 말이 안토니아의 부담을 줄이려 굳이 붙인 소리 같다고 하면 역시 이상한 착각인 걸까.
‘이스베르가 님이 웃는 걸 보니…….’
역시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지난번 유글란스 백작의 의상 발표회 때도 생각했지만, 왠지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호의를 받는지 아는 사람 같았다.
‘……마치 날 아는 사람처럼.’
그래서 마음이 좀 술렁거렸다.
지난번부터 알 듯 말 듯한 기시감의 정체가 잡히지 않아서도 있었다.
안토니아는 자신을 향해 호의 가득히 눈빛을 보내는 보랏빛 눈동자에 우선은 감사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표를 받았다.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말이나 거절의 말이 나오면 왠지 그가 상심할 것 같았다.
그 ‘트라체스 대공’인데 말이다.
“전하의 호의에 정말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짧은 대답에서 그의 기쁨이 전해졌다.
안토니아는 문득 원래 그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전하려 하던 사람이었던가, 하고 과거를 떠올리려다 마음만 더 싱숭생숭해질 것 같아 관두었다.
리카르도까지 기부금을 냈으니, 안토니아는 슬슬 낼 사람은 다 냈구나 하고 생각하고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그럼, 우리는 2만 골드를 내도록 하지.”
잠자코 뒤에서 지켜보던 긴 로브를 입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네……?”
2만 골드라니.
안토니아는 깜짝 놀라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안토니아뿐만이 아니었다.
홀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지금 들으셨어요? 제가 잘못 들었나요?”
“아니요. 저도 2만 골드라고 들은 듯 한데, 혹시 다르게 들으셨나요?”
다들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트라체스 대공의 1만도 놀라웠는데, 저 신원 미상(?)의 인물들이 2만씩이나 외치다니.
“도대체 누구실까요?”
“그러게요, 목소리도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저 정도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으로 귀족들은 서로 속닥였으나, 아무도 답을 찾지 못했다.
딱 두 사람.
리카르도와 드란제아 공작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입을 연 건 드란제아 공작이었다.
“젊은 사람을 그만 놀리시게.”
“놀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가, 드란제아 공작.”
조금 전 2만 골드란 액수를 말했던 사람이 성큼성큼 안토니아에게로 다가왔다.
안토니아는 그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제대로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분은…….’
회귀 전과 지금 모두를 통틀어 만나는 건 처음이었지만.
“나는 서북부에 영지가 있으니 책임이 있고, 무엇보다.”
거칠고 낮은 목소리의 주인은 답답했다는 듯 로브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며 이야기했다.
“내 손녀인 세르히 백작의 자선 행사인데 저 애송이보다 못한 돈을 내야 되겠는가?”
안토니아 본인조차도 어머니의 이야기나, 초상화로만 보았던 그 사람.
다름 아닌 그녀의 할아버지였다.
정말 예상 밖의 등장이었다.
젊은 귀족 하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말했다.
“세르히 백작이 손녀라니, 저분이 누구시지요?”
그러자 나이 지긋한 귀족이 답했다.
“라테르 후작이에요.”
“라테르 후작님이요? 그 라테르 후작님이요?! 서북부 국경을 지키시는?”
다들 정말 예상하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술렁였다.
그도 그럴 게 라테르 후작은 지난 10년간, 아니 그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수도에 걸음 하지 않았으니까.
서북부의 맹주로 유명하긴 했으나 실물을 보는 건 대부분 처음이었다.
물론 가장 당황한 건 다름 아닌 안토니아 본인이었다.
‘할아버지가 왜……?’
머리로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걸 퍼뜩 깨달았으나 마음은 아니었다.
회귀 전을 포함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니까.
물론 안토니아도 조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는 건 알았다.
두 분이 서북부에서 세력이 큰 귀족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회귀 전, 안토니아가 막내 황자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은 분들이었다.
‘그나마 축하 선물로 영문 모를 투박한 단검을 보내시긴 했지만…….’
편지도 가족의 정을 찾아보긴 어려운 의례적인 축하 인사가 끝이었다.
아니, 안토니아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부모님은 절 용서하지 않으신 걸까요?’
‘아닐 거예요, 부인. 요즘 서북부가 위험하다잖아요.’
‘거기가 위험한 건 저도 알아요! 그저 얼굴을 뵈러 가려는 것뿐인데…….’
안토니아의 어머니도 살아생전 조부모님의 얼굴을 보지 못해 슬퍼했다.
백작령으로 초대도 하고 자신들이 찾아가겠다고 연락까지 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머니가 결혼할 때 크게 반대했다고 하셨지.’
가진 거라곤 얼굴과 안온한 영지뿐인 남자를 골랐다고 말이다.
물론 조부모님이 다스리는 서북부 지역이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국경 지대인 데다 산세가 험해 전투가 끊이질 않았다. 타국의 침입이나 마물의 출몰을 모두 막아 내는 제국의 방패나 다름없는 지역이었다.
그들이 수도에도 십수 년가량 오지 못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그래서 안토니아는 회귀 전에도 지금도 조부모님과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도움을 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뻔뻔스럽게 연락하는 것도 좀 그랬고.
‘그런데 어째서…….’
안토니아가 어안이 벙벙한 채 그를 바라보자, 강인한 입매가 조금 어색하게 움직이며 미소를 보였다.
“왜 그러느냐, 세르히 백작.”
안토니아는 그 호칭에 순간적으로 맥이 풀렸다.
‘그렇구나, 어색한 건 나만이 아니야.’
기세 좋게 자신의 손녀라고 말한 것과 달리, 라테르 후작 또한 안토니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당황에서 벗어나 빠르게 생각이 굴러갔다.
이 상황을 가장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째서 여기에 왔는지, 그런 이유는 나중에 찾아도 전혀 늦지 않을 테니까.
안토니아는 조심스럽게 라테르 후작의 로브 자락을 쥐었다.
시종 차분했던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할아……버지?”
“……그래.”
“아…….”
안토니아는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쯤 어색하고 데면데면하지만, 이 상황이 매우 감격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어쩜, 세르히 백작도 라테르 후작님을 처음 뵙는 건가 봐요.”
“그건 그렇죠. 후작님이 어디 서북부를 떠나실 수 있는 몸이신가요.”
“하긴 그래요. 십수 년이나 수도에 못 오신 것도 그것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겨우 안정된 거였지요? 서북부 지역 말이에요.”
“맞아요. 대공 전하가 지난 5년간 서북부에서 고생하신 덕에 겨우 괜찮아졌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안토니아는 할아버지의 옷깃을 쥔 채, 귀족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달았다.
‘대공 전하가……?’
어째서?
상황을 파악했음에도 의문이 함께 맺혔다.
수도에 올라와 리카르도와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으면 이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까?
회귀 후 이상하리만큼 리카르도의 행동만이 달라졌다.
자신이 한 건 고작 6년 전에 편지 한 통을 보낸 것뿐이었는데.
‘게다가 바뀐 대공 전하의 행동이 어째서인지 모두 내게 유리한 방향이라니…….’
안토니아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물음표를 우선 덮었다.
설사 의문투성이라 해도 할아버지가 등장한 것 자체는 자신의 수도 생활에 절대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자신을 손녀로 대하고자 온 거라면 꽤 편해질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안토니아는 고개를 들고 할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이렇게 절 만나러 와 주셔서……. 너무, 너무 기뻐요.”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다.
뜻밖에 보게 된 조손의 재회 장면에 모두가 생각했다.
자선 행사의 결말에 참으로 어울리는 마무리라고 말이다.
* * *
“훌륭한 연주회였습니다. 오르테가 양.”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란제아 소공작님. 공작님을 뵙지 못해 아쉽군요.”
“아버지께서도 분명 아쉬워할 겁니다. 그럼.”
드란제아 소공작은 발렌타인을 향해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500골드라고 적힌 수표를 두고 유유히 연주 홀을 나섰다.
연주회의 마지막 방문객의 배웅이었다.
그가 뒤돌아 가는 걸 본 발렌타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지워졌다.
“드란제아 공작님은 세르히 백작의 연주회에 간 건가?”
“……그렇습니다, 아가씨.”
그 말을 듣고도 발렌타인은 그저 싸늘한 표정이기만 했다.
“그래서 얼마나 갔지?”
“그, 그게…….”
하인이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발렌타인은 천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라며 이야기했다.
“오늘 연주회에 오지 않은 귀족가의 가주님들은 모두 그곳에 참석하셨고, 온 분들도 자제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촥-!
발렌타인은 하인의 뺨을 부채로 후려쳤다.
“못난 것.”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렇게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실망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하인은 다음 내용을 보고하는 게 퍽 두려워졌다.
그러나 말해야만 했다.
나중에 알게 되면 더 큰 화를 부를 테니까.
“그, 그리고…….”
“또 뭐지?”
“라테르 후작님이 그 자리에 나타나셨답니다.”
“……그 서북부의 철옹성이 무슨 일로?”
“그게……. 세르히 백작님의 조부님이라고 합니다!”
발렌타인은 그 소리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으냐.”
다른 머리 나쁜 귀족들은 잊었을지 몰라도 발렌타인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안토니아를 밟아 둬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는데.
“내가 궁금한 건, 서북부에서 꼼짝하지 않던 분이 무슨 바람이 불어 왔냐는 것이다.”
“…….”
하인은 발렌타인의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머리로 생각하기엔 그저 손녀가 보고 싶어 걸음 한 게 아닌가 싶었으니까.
발렌타인이 다시 한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되었다.”
그녀는 피곤하다는 듯 시중 하녀를 불러 에스코트하도록 한 뒤 마차에 올랐다.
아름다운 발렌타인의 얼굴에 그늘이 서렸다.
‘정말로 귀찮게 될 모양이군.’
까드득, 하고 그녀의 잇새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발렌타인은 쥐고 있던 부채를 시중 하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태워 버려라.”
이번 연주회를 위해 준비한, 특별한 세공 부채는 그 한마디에 쓰레기가 되었다.
* * *
[감동적인 조손의 재회! 세르히 백작의 눈물]
[서북부의 철옹성은 손녀를 그리워했다!]
[라테르 후작, 십수 년 만의 수도행! 모두 손녀인 세르히 백작을 위한 걸음.]
자선 행사가 열린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 헤드라인을 확인한 안토니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셔요, 주인님?”
“……왠지 살짝 허무해서.”
안토니아의 말에 폴리와 로레나는 서로를 보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아가씨가 행사를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셨는데…….”
“맞아. 뭐, 이건 이거대로 잘된 마무리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맥이 풀리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화제성을 끌어와 발렌타인에게 먹칠을 하겠다는 첫 번째 목적은 아주 확실하게 달성했다.
무거운 걸음을 한 라테르 후작이 무려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까지 더해져 모두들 1면에 크게 기사를 실었으니까.
‘그래도 여기만 관심이 쏠리는 게 좀 그렇다고 할까. 열심히 준비한 아이템이었는걸.’
분명 라테르 후작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의 관심은 물주머니와 커다란 기부금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할아버지가 너무 강한 카드였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분명히 앞으로를 생각하면 이게 더 유리한 건 맞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떨떠름했다.
자신이 차곡차곡 동전을 모으고 있는데, 거기에 누가 지폐 더미를 와르르 뿌린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나쁘진 않았지만, 오솔길을 걸으며 차근차근 나아가던 자신을 누가 강제로 말을 태워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대공 전하도…….’
도대체 왜일까?
어젯밤 리카르도는 마치 안토니아를 생각해 자신이 열심히 했으니 알아봐 달라고 꼬리치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호의를 가진 건 안다.
하지만 6년 전에는 편지에 답장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무심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런 상대를 위해서 여기까지 한다고?
‘심지어 회귀 전엔 하지 않았던 행동 덕에 할 수 있던 거잖아.’
리카르도의 서북부행은 예전보다 훨씬 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 전의 트라체스 대공만을 생각하면 이른 서북부행이 자신과 관련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삶에서 수도에서의 첫 만남 이후 쌓은 호의만으로 이렇게까지 했다고 보기엔 그쪽이 더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지난번에 묻어 뒀던 물음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걸까?’
회귀 후 6년 동안, 심지어 자신은 세르히 백작령에서만 머물렀는데.
자신이 흔든 어떤 변화가 이런 결과를 낳은 걸까.
안토니아는 이마를 짚은 채 과거를 하나하나 떠올렸다.
자신의 기시감이라도 뚜렷한 정답을 내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대공 전하와의 접점이라곤 그 편지뿐인데.’
안토니아는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그냥 만나서 물어보자.’
생각만 하기보단 차라리 그쪽이 깔끔했다. 답도 더 명확하게 나올 테고.
괜히 복잡한 감정이 드는 건 과거에 실패만 반복한 삶의 경험 탓일 터였다.
게다가 지금 상황 자체만 놓고 보면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절대 손에 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강력한 패가 제 발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황실에서도 분명 관심을 가질 거야. 그럼 오르테가 후작 영애나 쟈힘, 두 사람은 분명 날 더 눈엣가시처럼 여길걸.’
그들의 기분이 망쳐질 거라고 생각하니, 좀 기분이 나아지긴 했다.
특히 쟈힘은 아주 억울해 죽으려고 할 것이다.
회귀 전에도 안토니아에게 자격지심을 팍팍 드러냈었으니까.
안토니아는 신문을 치우고 거울을 바라보며 폴리와 로레나를 향해 말했다.
“얼른 준비하자. 오늘 후작저를 방문하겠다고 말씀드렸으니까.”
손녀를 이름으로도 못 부르던 할아버지와의 관계 개선이 아주 시급했다.
* * *
수도에 거의 걸음 하지 않는 편임에도 라테르 후작가의 타운 하우스는 꽤 규모가 있었다.
트라체스 대공저보다야 작았지만, 어지간한 중앙 귀족의 타운 하우스보다는 확실히 컸다.
마차가 저택 앞에 도착하자 나이 지긋한 노집사와 가정부가 나와 안토니아를 맞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토니아 아가씨.”
“후작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랜만에 듣는 아가씨 소리였다. 물론 안토니아는 그 호칭이 나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날 라테르 후작가의 손녀로 대우하겠단 소리니까.’
적어도 손녀에게 이름도 아니라 세르히 백작이라고 부른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안토니아는 두 사람에게 목례하며 말했다.
“반겨 줘서 고마워, 할아버지께서는 안에 계신가?”
“그렇습니다. 30분 전부터 언제 오냐며 아주 성화셨지요.”
“저희가 말리지 않았다면 백작가 타운 하우스까지 데리러 가실 기세였답니다.”
“고얀 것들!”
웃으며 집사와 가정부가 한 소리에 문 너머에서 성큼성큼 보폭 큰 걸음걸이로 풍채 좋은 노인이 나타났다.
“내 손녀가 오면 얼른 들여보내란 소리는 잊고, 험담이나 하고 있다니.”
“이것 보십시오, 저희 말이 맞지요. 안토니아 아가씨?”
“기다리고 계시면 모셔 갈 것이라 말했는데도 참지 못하고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퍽 격 없어 보이는 주종간의 대화에 안토니아나 따라온 로레나와 폴리도 조금 놀라 그들을 바라보았다.
안토니아의 할아버지, 라테르 후작은 멋쩍은 듯 헛기침하며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다리를 단련할 것도 아니고 얼른 들어오거라.”
“네, 할아버지.”
안토니아는 영 쑥스러운 듯 홱 몸을 돌려 등을 보이는 후작에게 따라붙었다.
그녀도 좀 쑥스러운 듯, 아니 사실은 쑥스럽기도 해 조심스레 팔꿈치 쪽 옷을 잡았다.
“……똑바로 잡아도 된다. 응접실까지 짧은 거리긴 하다만.”
“감사해요, 할아버지.”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곧장 라테르 후작의 팔 위에 손을 올렸다.
그녀 또한 어색하긴 했지만 이런 것부터 시작일 테니까.
엔트런스 홀을 지나 곧 응접실로 안내받은 안토니아는 두 가지 이유로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걸까.’
한 가지는 살풍경하거나 절도 있는 분위기일 거라 생각한 응접실이 아주 아기자기했기 때문이었다.
장식품들도 웅장한 것보다는 귀여운 것이나 꽃들이 많았다.
굳이 말하자면 마치…….
‘열 살 내외의 어린아이가 있는 집의 응접실 같다고 해야 하나.’
아이들이 응접실에서 놀 때 편하게 그림책을 보거나, 인형을 가지고 놀 수 있도록 비치해 둔 그런 응접실 같았다.
안토니아가 신기한 듯 둘러보자 라테르 후작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이야기했다.
“마음에 드느냐?”
“네?”
“손녀는 처음이라, 흠, 흠.”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자신의 얼굴근육이 정상이었다면 분명 웃음을 터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으니까.
“절 위해서 이렇게 꾸며 주신 거예요?”
“그래, 하인들을 보내서 미리 지시하긴 했는데 센스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원.”
라테르 후작은 중얼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 집에는 아이들이라곤 다들 큼직하고 투박한 사내녀석들뿐이라, 걔네들도 너보다 나이가 많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더니 라테르 후작은 문득 궁금하다는 듯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 네 나이가 몇 살이냐?”
이쯤 되니 안토니아는 정말로 크게 웃고 싶어졌다.
손녀를 위해서 2만 골드나 되는 거금을 쓰고, 응접실까지 꾸밀 정도면서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고 나이도 모르다니.
딱 마음만 앞선 모양이었다.
“막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른 열여덟이랍니다.”
“열여덟, 열여덟이라고?!”
그 말에 라테르 후작은 믿기지 않는 듯 안토니아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너무 작은 것 같은데.”
‘이래 봬도 회귀 전보다 조금 더 컸는데…….’
회귀 전에는 좀 작은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마틴이 워낙 잘 먹이고 꾸준히 운동해서인지 잘 큰 편이었다.
아주 큰 키는 아니지만 평균보다는 확실히 컸다.
“그런가요?”
“그래, 레베르타도 너보다 반 뼘은 더 컸던 것 같은데……. 사내놈들만 보다 보니, 더 애매하구나.”
레베르타는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라테르 후작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라 안토니아는 뭐라고 대꾸하기가 어려워졌다.
심지어 라테르 후작은 안토니아의 손을 잡으며 영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게냐? 이렇게 몸이 가늘어서야…….”
‘지극히 평범한 편인데, 좀 마른 편이긴 해도…….’
세르히 백작령에 있는 마틴이 억울해할 이야기였다.
그녀는 안토니아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니 말이다.
“나는 네가 열네다섯쯤 된다고 생각했다. 이래선…….”
라테르 후작은 응접실을 보며 낙심했다.
안토니아는 서둘러 후작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전 좋아요.”
“정말이냐?”
“그럼요, 저 그림책은 어릴 적 어머니가 자주 읽어 주시던 거고, 저 장식품과 비슷한 것이 백작령에도 있거든요.”
안토니아가 가리킨 귀여운 곰 모양의 수정조각품을 보며 라테르 후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냐?”
“네, 어머니가 늘 직접 소중한 듯 관리하신걸요. 제가 가지고 싶다고 해도 주질 않으시고요.”
“……그……래, 레베르타가.”
후작은 어쩐지 복잡한 얼굴로 안토니아를 소파로 끌어 앉혀 준 뒤, 자신도 1인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안토니아는 후작의 얼굴을 보다 직접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째서 어머니를 보시지 않았어요?”
일부러 돌려 묻지 않았다.
왠지 그래선 오해만 낳을 것 같았으니까.
라테르 후작은 한참 손녀의 얼굴을 쳐다보니 반대로 질문했다.
“레베르타는 날 원망했느냐?”
“원망은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
“슬퍼하시긴 했지만요. 물론 전 그땐 정말로 어려서 어머니의 마음을 모두 아는 건 아니에요.”
라테르 후작은 조금 초조한 듯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역시 곤란한 질문을 할 것 같아 안토니아는 응접실에 들어와 느꼈던 두 번째 의문을 물었다.
“어제 분명 할머니도 같이 계셨던 것 같은데, 왜 없으셔요?”
“아, 그게.”
그런데 라테르 후작의 모습이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물으면 안 되는 거였나……?’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어제 끝까지 로브를 벗지 않으셨다.
드란제아 공작이 다가가 인사하자, 가볍게 고개만 숙여 화제에 오르고 싶지 않다는 듯 굴기까지 했으니까.
‘그래도 후작저에 오면 만나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억 속 어머니와 할아버지인 라테르 후작은 거의 닮지 않았다.
외형적으로 닮은 건 오히려 할머니 쪽이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어도 초상화를 본 적은 있었으니까.
잠시간 응접실에 침묵이 자리했다.
라테르 후작은 한참을 고민하다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이야기의 순서가 잘못된 것 같구나.”
“……네?”
“실은 너도 많이 어색하지 않으냐, 아니……. 후작저까지 찾아와 주고 어젯밤 그렇게 자연스레 받아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그렇지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할 때 레베르타의 어깨 한쪽이 슬쩍 기울어지곤 했단다.”
라테르 후작은 안토니아의 한쪽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너도 똑같은 것 같구나.”
자신도 모르는 습관이었다.
“표정만큼은 잘 숨기는 것도 레베르타와 똑 닮은 것 같고.”
‘이건 얼굴 근육이 고장 난 건데…….’
분명 안토니아가 기억하기로 어릴 적에 자신은 꽤 잘 웃었던 걸로 기억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늘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 딸의 미소는 너무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맞아요, 이것만큼은 당신을 닮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어머니가 안도하던 기억까지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내가 무표정인데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으신 거였구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라테르 후작은 몇 번 헛기침하더니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안토니아라고 불러도 되겠니?”
“그럼요, 오히려 왜 그렇게 부르시지 않나 했어요.”
“세르히 백작위를 받았다고 그 애송이가, 그러니까 리카르도 대공이 말했었거든.”
그런데 자신을 열네다섯으로 착각하다니.
참 귀족답지 않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북쪽은 데뷔탕트 개념이 좀 옅다고 했지, 특히 서북부는 폐하의 윤허 서신으로 생략될 때도 많다고 했고.’
워낙 전투가 잦아 귀족들이 자리를 비우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말했던 기억이 났다.
‘나도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고 싶었거든, 그래서 무작정 수도에 오긴 했는데. 난 이미 데뷔탕트는 지나갔다지 뭐니.’
라테르 후작은 안토니아를 잠시 바라보더니 웃었다.
“그 몹쓸 놈을 많이 닮았구나.”
“몹쓸…… 놈이요?”
“네 아비 말이다.”
“아.”
보통 손녀 앞에서 할 법한 어휘 선택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것 같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흠, 흠.”
라테르 후작은 기껏 말해 놓고는 쑥스러운 듯 헛기침했다.
“그래도 눈빛이나 자세는 레베르타랑 똑같아. 네 아비는 흐리멍텅한 데다 믿음직하지도 못했으니까.”
“하하하…….”
“어디 다 큰 성인이 자기 몸 지킬 만한 무술 하나 없이…….”
거기까지 말한 라테르 후작은 문득 궁금하다는 듯 안토니아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쓸 줄 아는 무기가 있느냐?”
“……네?”
분명히 조금 전 이야기의 순서가 틀렸다며 심각해했던 것 같은데 또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할아버지의 버릇이신가?’
안토니아는 좀 당황하여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답했다.
“총을 조금 쓸 줄 알아요.”
“총?!”
그 말에 라테르 후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구한테 배운 게냐, 설마 그 애송이냐?!”
어쩐지 라테르 후작에게서 못마땅하다는 듯한 경계심이 확 느껴졌다.
“애송이라면, 트라체스 대공 전하를 말씀하시나요?”
안토니아는 지난 행사에서 들었던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애초에 트라체스 대공이 총을 잘 다루기로 유명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
라테르 후작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얼굴로 안토니아를 향해 물었다.
“5년 전부터 와서 어찌나 얼쩡거리던지, 그 녀석도 얼굴만 멀끔하게 생긴 놈 아니냐.”
‘왠지 할아버지는 지나치게 미형인 남자들에 대해 평가가 박하신 것 같은데.’
안토니아는 왠지 리카르도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어떻게 생각해도 자신의 아버지 탓인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럴 리가요, 전 어릴 적에 대공 전하와 만난 적도 없는걸요.”
자신이 어린 시절 만난 건 예쁘장한 견습 기사였다.
분명 지금쯤 보드라운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기사가 되어 있지 않을까?
“……정말이냐?”
“그럼요, 아, 물론 편지를 보낸 적은 있지만요.”
“편지? 편지는 왜?”
“작은아버지의 일로 대공 전하께 도움을 청했었거든요.”
“…….”
그 말에 라테르 후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잠시 안토니아에게서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시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하시려나.’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라테르 후작은 바올로의 언급에 크게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우리에게는, 아니, 아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니 네가 도움을 청하는 게 오히려 무리겠구나.”
사실 귀족들은 가족이라고 무조건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게 당연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리카르도나 이스베르가 같은 관계가 드물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도 제레미야는 이상하리만큼 챙겼지.’
그런 걸 보면 황실의 특성인가 싶기도 한데, 또 생각해보면 지금 황제께서는 즉위하며 자신의 동복형제를 모두 죽였었다.
‘정작 이복형제인 대공 전하나 이스베르가 님은 살려 주셨는데 말이야.’
황제의 일이라 사교계 내에서 쉬쉬할 뿐, 의문을 품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회귀 전에 리카르도와 황태자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는 사건을 낳기도 했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회한에 잠긴 라테르 후작을 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저는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아요.”
“그, 정말이냐? 한 번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네.”
그렇다고 해서 애틋한 것도 아니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고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타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게 맞겠지.’
게다가 가족이라고 무조건 좋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건 바올로를 통해 뼈저리게 알기도 했고.
차라리 모른 척하고 자길 괴롭히지만 않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라테르 후작의 시선이 안토니아의 한쪽 어깨에 닿았다.
그의 눈가가 축 처졌다.
“미안하구나.”
“네?”
“나는……. 솔직히 말해 레베르타에게 너무 미안하단다.”
“만나지 않아서요?”
라테르 후작은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을 잡았다.
“나는 너희 아비가 싫었다.”
“어머니께 들었어요, 크게 반대하셨다고요.”
“맞아, 하지만 레베르타를 만나지 않을 생각은 없었어. 그 아이를 오지 못하게 한 건…….”
라테르 후작은 비어 있는 다른 1인 소파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색의 시트가 씌워진 다른 소파와 달리 그 1인 소파만 무채색이었다.
“내가 아니라 네 할머니였다.”
“……네?”
“네 할머니도 작위를 가지고 있는 걸 아느냐?”
“네. 알고 있어요.”
라테르 후작이 서북부의 철옹성, 또는 제국의 철옹성이라고 불린다면 안토니아의 할머니는 서북부의 맹수라고 불렸다.
라테르 후작가보다 더 오래 서북부를 지켜 온 풀멘 변경백의 작위 소유자가 바로 그녀였다.
“네 할머니는 레베르타를 아주 소중하게 여겼단다. 그러니 그만큼 화가 난 거지.”
“평생 보고 싶지 않을 만큼요?”
안토니아의 물음에 라테르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생각은 아니었을 거야.”
라테르 후작의 입꼬리는 슬픈 듯 누그러져 있었다.
‘아버지, 그러니까 안토니아 네 할아버지는 사실 어렵지 않은 분이란다. 얼굴이야 한없이 어려운 분이지만.’
‘얼굴이 어려워요?’
‘그래, 좀 무섭다고 해야 하나, 험상궂다고 해야 하나.’
안토니아는 문득 어머니와 어릴 적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참 라테르 후작의 딸이라는 게 느껴지는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음, 어머니……. 그러니까 할머니는 좀 어려워.’
‘어머니랑 비슷한 분인데요?’
‘너도 내가 화나면 아버지가 화나는 것보다 더 무서워하잖니.’
‘그거야 어머니는 화가 나면 절 안 보시려고 하잖아요.’
‘그래, 할머니도 그렇단다. 화가 나면 큰 소리 내거나 화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피하시곤 했거든.’
어머니 레베르타는 안토니아를 꼭 끌어안으며 어렵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왜 아버지랑 결혼했어요? 할머니가 그렇게 화를 내시는데?’
‘그거야, 네 아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레베르타는 자신에게 또 한 번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했다.
다만…….
안토니아는 라테르 후작을 향해 말했다.
“어머니도 할머니께 죄송하다고 했어요.”
“그러냐?”
“할머니께 정말 큰 실망을 안겨 드렸다고요.”
라테르 후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너에게는 사실 삼촌도 있는데 알고 있느냐?”
“네.”
“우리보다 네가 더 낫구나.”
그는 무심해서 미안했다는 듯 목을 긁적였다.
“제국법상 네 삼촌에게 작위 모두를 물려줘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네 할머니는 풀멘 변경백의 자리를 레베르타에게 주고 싶어 했어.”
“어머니께요……?”
안토니아는 문득 작위를 포기해야만 했다며 씁쓸해하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는 단순히 후작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검은 네 삼촌보다 네 어머니가 훨씬 잘 다뤘거든.”
안토니아는 뜻밖의 사실에 눈을 깜박였다.
어머니는 백작령에서 검을 휘두른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내가 못 본 걸지도 몰라.’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자신의 주양육자는 어머니 레베르타라기보다 아버지 쪽이었으니까.
안토니아는 그게 허술한 아버지를 대신해 백작령을 관리하느라 어머니가 바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오해하고 있다면 정정하고 싶은 게 있단다.”
“무엇인가요?”
“끝까지 네 부모님을 안 보려고 했던 건 아니야.”
“……네?”
안토니아는 놀라서 라테르 후작을 보았다.
적어도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단 한 번도 조부모님을 만날 수 있단 소릴 한 적이 없었으니까.
“8년 전, 우리는 너희를 서북부에 초대할 준비를 했어. 네 부모도 알고 있었을 게다.”
라테르 후작은 소파의 팔걸이를 꽉 쥐었다.
“그 아이들이 올 거라고 생각해 연초부터 마물 사냥이며 틈만 나면 깔짝거리는 놈들을 철저하게 손봐 줬다. 적어도 두어 달은 얼씬도 못 하도록!”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소파 팔걸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사건이 일어났다. 딱 한 달 뒤면 너와 네 부모가 서북부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마차 사건 말이군요.”
“그래.”
라테르 후작은 크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작은아버지가 이런 데까지.’
알았다면 더 고통스럽게 처리할 방법을 찾았을 텐데.
이미 죽은 자라 더 고통을 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네 할머니는 더 단단히 화가 났단다.”
“……어머니가 먼저 가 버리셔서요?”
“그래, 손녀에게 말하기는 너무 부끄러운 이야기구나.”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분이지만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분명 자신의 어머니 레베르타도 자신이 먼저 죽었다면 평생 슬퍼하며 화를 낼 것만 같았으니까.
라테르 후작은 자신이 반쯤 부서트려 버린 소파 팔걸이에서 손을 털며 겸연쩍은 듯 말했다.
“그러니 미안한 부탁을 들어주겠느냐?”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요.”
“네 할머니를 너는 미워하지 말아 주면 좋겠구나. 그래도 네가 수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에 깔짝거리는 도적이며 마물들을 다 반파시키고 달려왔으니까.”
“…….”
순간적으로 오싹해졌다.
매우 감격스럽긴 했지만 ‘도적놈들을 다 반파시켰다’는 게 지나치게 박력 있어서 말이다.
“물론 그럴 수 있던 게 그 애송이 덕이 있다는 걸 부인할 생각은 아니다…….”
그렇다는 건 역시 리카르도가 서북부에 가지 않았다면 오지 못했을 거란 소리였다.
‘애초에 회귀 전에도 그랬고……. 대공 전하가 토벌에 나서기 전엔 가라앉지 않았었지.’
안토니아가 생각하는 사이 라테르 후작은 헛기침하며 말했다.
“한동안은 수도에서 머무를 생각이란다. 애초에 우리도 나이가 많아, 네 삼촌이 못나서 지키고 있던 것뿐이지.”
라테르 후작에게서 쑥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 후작저도 부디 네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와 주렴. ……그래, 기왕이면.”
후작이 잠깐 망설이다 무언가 결심한 듯 말하려는 순간, 타이밍 좋게도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라테르 후작은 눈썹을 찡그리며 답했다.
“무슨 일이냐.”
“주인님, 트라체스 대공 전하가 방문하셨습니다.”
라테르 후작은 그 말에 괜한 짓을 했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분위기가 잘 풀릴 줄 알았으면 부르지 않는 거였는데.”
“……네?”
“네가 우리를 어려워할까, 혹시 몰라 그놈을 부른 거였거든.”
‘그렇다고 왜 대공 전하를 부르지?’
의문이 깃들었다. 마치 후작은 그가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후작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혹시 나와 둘이서 이야기하는 게 불편하느냐? 그게 아니라면 돌아가라고 말할 생각이다만.”
안토니아는 그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리카르도는 단 하나뿐인 대공이었다.
그런 사람을 애송이라고 부르는 데다, 심지어 불러 놓고 문전박대를 한다니.
‘왠지 그런 걸 신경 안 쓰실 것 같긴 하지만.’
안토니아는 잠시 라테르 후작을 보다 답했다.
“할아버지와 둘이서 얼마든지 대화하고 싶어요, 궁금한 것도 많고요.”
“그러냐, 그럼-.”
“하지만 잠깐 대공 전하와 대화하고 싶어요.”
차라리 잘 되었다. 자신이 따로 그를 찾아가 물을 생각도 있었으니까.
“……뭐?”
라테르 후작이 또 날을 세웠다.
“혹시, 그……. 그 녀석이랑 뭔가 미래의 약속 같은 거라도-”
도대체 왜 저런 방향으로 생각이 뻗는 걸까.
“아니요, 그런 사실은 전혀 없어요.”
리카르도를 못마땅해하면서 희한하게 말도 안 되는 미래를 그리는 할아버지를 향해 딱 잘라 말했다.
“어제 자선 행사 때 대공 전하께 큰 도움을 받아서 감사 인사를 드릴 생각일 뿐이에요.”
라테르 후작은 손녀의 거의 변화 없는 딱딱한 표정을 보며 어쩐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딸이 어릴 적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었을 때와 너무도 비슷했다.
* * *
어쩐지 리카르도는 초조했다.
물론 오늘 라테르 후작저에 오게 된 것 자체는 기쁜 일이었다.
‘좀처럼 안토니아와 만날 수가 없었으니까.’
안토니아의 성격을 모르는 리카르도가 아니었다.
수도에서 재회-비록 혼자만의 일이 되었다지만-한 후, 그녀가 경계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반감을 사지 않으며 신뢰를 얻고자 노력했다.
다만 그러다 보니 좀 염려스러운 것이었다.
‘안토니아를 생각해서 후작님을 부른 거긴 하지만…….’
줄줄이 난 신문 기사들을 보면서 아뿔싸 싶었다.
안토니아가 준비한 자선 행사의 메인 아이템이 가려졌단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딱딱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셨어요? 마치 이스베르가 님에게 혼나기 전처럼.”
“뭐?”
“아니, 아침에 준비하실 때만 해도 엄청 즐거워하셨잖아요.”
드비는 조금 질린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처럼 백작님을 만난다면서 어젯밤부터 들뜨셨으면 좀 더 신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늘 타이 고르실 때만 해도 그으렇게 까탈스럽게 구셔 놓곤.”
드비는 오늘도 40분이 넘도록 타이만 골랐다며 혀를 찼다.
“근데 왜 지금은 그렇게 불안한 얼굴이신 건지 이해가 안 가서 말이에요.”
“……혹시라도 안토니아가 화났을까 봐.”
“화요? 어째서요?”
드비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차분한 발소리가 어느새 가까워졌으니까.
* * *
“라테르 후작님과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안토니아는 라테르 후작에게 양해를 구하고 후작저 정원에서 리카르도와 따로 만났다.
우중충하게 앉아 있던 리카르도는 그녀를 보자마자 곧장 환한 미소를 보였다.
좀 걱정되는 게 있다고 해도 막상 얼굴을 보니 너무 좋았으니까.
리카르도는 오랜만에 안토니아를 에스코트할 수 있다는 기쁨을 너무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자신은 오늘 제 발 저릴 짓을 한 사람이었으니까.
“갑작스레 만나게 되어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네, 조금요. 정말 생각지도 못하긴 했으니까요.”
안토니아의 말에 리카르도는 가슴이 좀 철렁했다.
그녀의 눈빛이, 아니 말에서도 좋은 감정만 있는 것 같지 않았으니까.
리카르도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백작.”
“……네?”
생각지도 못한 사과의 말에 안토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도대체 왜 그가 사과한단 말인가, 어느 포인트에서?
“왜 사과를 하세요, 대공 전하?”
“제가 한 행동이 왠지 당신의 계획을 망친 것 같아서요.”
“…….”
안토니아는 조용히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역시 트라체스 대공은 트라체스 대공이었다.
티 내지도 않았는데 귀신같이 자신이 불쾌했을 법한 포인트를 알아낸 걸 보면.
하지만…….
‘역시 뭔가 예리함의 방향이 다른 것 같아.’
안토니아는 작게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전하가 사과하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
“물론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른 방향이 되긴 했지만……. 어떻게 할아버지가 오신 게 화낼 일이겠어요.”
좀 맥이 풀리는 일일 뿐.
안토니아는 그냥 궁금할 뿐이었다.
그가 저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확신이 어디서 오는 건지 말이다.
“오히려 감사할 일이죠. 부끄럽지만 저는……. 연락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거든요.”
회귀 전 기억 때문에.
이번에 연락해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라테르 후작뿐만이 아니라 서북부 지역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은 대다수가 수도에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아차 하면 마물이 불어나는 곳이었으니까.
“그보다 제가 궁금한 건…….”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리카르도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말에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는지, 그는 얼마든지 물어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공 전하가 어째서 할아버지를 모셔 올 생각을 하셨는지에요.”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다가는 이내 이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게 아니었다.
어째서나, 어떻게 데려왔는지는 사실 지금 시점에선 답이 명확했다.
‘서북부에서 5년간 지내면서 친분을 쌓은 거겠지.’
시기가 좀 당겨졌을 뿐, 회귀 전에도 서북부에서 머물렀으니까.
물론 그때 자신의 할아버지와 친분을 쌓았는지까지는 모르지만.
“아니, 죄송해요. 이게 아니에요. 질문을 바꿀게요.”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꼭 붙들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걸 보면 마치 대공 전하가 예전부터 저와 교류를 한 것처럼 느껴져서요.”
어째서일까, 자신이 아는 것과 달리 리카르도의 눈이 마치 미숙한 소년처럼 흔들렸다.
이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는 수도에 올라온 뒤에야 본 것일 텐데.
어째서 계속 다른 빛을 한 소년이 떠오르려 하는 걸까.
그 말도 안 되는 답이 아니라면 역시 리카르도의 행동은 너무 과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단순히 내게 호의를, 아니 반했다고 해도 너무 많은 걸 준비했어.’
그래서 안토니아는 완전히 색채도 외형도 다른 그를 향해 의문 가득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예전부터 저를 아셨나요, 대공 전하?”
만약 아니라고 답한다면 무척 부끄러워질 질문이었다.
* * *
“한마디만 해도 됩니까, 전하.”
“안 돼.”
“오늘만큼은 전하께서 저보다 더 바보신 것 같습니다, 아악!”
안된다는 말에도 기어코 외친 드비는 정강이를 또 후려 맞았음에도 즐거운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리카르도의 바보짓을 지척에서 볼 수 있었으니까.
‘6, 6년 전에 당신의 편지를 받지 않았습니까.’
‘편지요……?’
‘그때 답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뭔가 도움 드릴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하다 떠오른 것뿐입니다.’
멍청이, 바보.
불과 몇 분 전, 이곳에서 자신이 떠들어 댄 이야기에 리카르도는 제 입을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누가 봐도 밝힐 타이밍이지 않았습니까. 뭐, 전하가 5년 동안 그려 온 풍경은 아니라지만.”
드비는 웃겨서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후작저의 정원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습니까. 충분히 ‘아름다운 재회’를 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제 주인의 로맨티시스트적인 부분까지 콕 집어서 말이다.
“도대체 전장에서는 망설임이라곤 없는 분이 왜 백작님 앞에만 서면 그러신답니까?”
드비는 이스베르가에게 꼭 말해 줘야겠다며 웃었다.
리카르도는 드비의 그 나불거림을 그저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했으니까.
너무 초조해하고 너무 걱정한 탓일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이 멋대로 떠들었다.
‘확신이 서질 않았어.’
지금 밝혀도 자신이 거짓말을 했단 걸 너그럽게 넘어가 줄 정도로 충분히 신뢰를 쌓았을까?
게다가 세르미아의 경계를 뿌리칠 정도로 저도, 안토니아도 이미 준비가 되었나?
괜히 밝혔다가 안 그래도 황실에 대한 경계심이 큰 안토니아가 리샤르조차 원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닐까.
복잡한 생각이 물고 물려 되먹지 못한 결론에 이르렀다.
예상하지 못해서.
아니, 안일하게 생각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게다가 더 최악인 건…….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아무튼 감사해요.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단단히 붙들던 제 팔을 놓으며 그녀는 다시 물러나듯 이야기했다.
‘이젠 정말로 편지에 답하지 못한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애초에 저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네? 아니, 백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 과분한 도움을 받은 것 같아 불편해요. 그러니 이제 더 마음 쓰지 말아 주세요.’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깨달았다. 조금이나마 좁혀졌던 거리가 자신의 망설임에 다시 멀어졌다는 걸.
자신의 멍청한 답변이 안토니아에게 무안함과 민망함, 그리고 실망스러움이 섞인 감정을 일으켰다.
‘내 탓이야, 안토니아를 도우면서도 그녀가 눈치채려면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어.’
제 아가씨가 얼마나 영리한지 모르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리샤르임을 밝히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영영 놓칠까 겁이 나 이 상태라도 유지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흘러가 버렸다.
리카르도는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뒤에서 돕기만 하고자 하는 것도 그저 자기만족밖에 남지 않는다.
그녀는 이유 없는 호의처럼 느껴지면 부담스러워할 사람이니까.
드비의 말대로 완벽한 상황만을 노리는 것도 정말 바보짓이었다.
‘계속 네게 말하지 않고 주저하는 게 더 널 기만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안토니아. 내게 기회를 남겨 줘.’
* * *
“이, 이게 뭐야?”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일어난 제레미야는 신문을 보고 말도 안 된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
“세르히 백작이, 그, 그, 철옹성 어쩌고 하는 영감의 손녀라고?!”
“그렇습니다.”
막내 황자의 시종, 쟈힘은 본인도 착잡한 얼굴로 신문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바라지 않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그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제레미야가 크게 패악질을 부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흠, 흠. 그래서였군.”
“네?”
“그래서 좀 기품 같은 게 있었나 보다 하는 거야, 그냥 단순한 촌것이 아니었군.”
제레미야의 얼굴에서는 자신이 먼저 안토니아의 가치를 알아차렸다는 듯한 의기양양함까지 보였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풀쩍 뛰어내려 옷장을 뒤지기까지 했다.
“좋아, 라테르 후작의 손녀라면 내가 사과 한 번쯤 해 줘도 나쁘지 않겠지.”
심지어 콧노래까지 불렀다. 쟈힘은 저 말도 안 되는 감정 폭에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발렌타인 님에게 고개 숙이고, 고생한 게…….’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게다가 발렌타인은 쟈힘에게 오늘 아침 사람을 보내 물어보기까지 했다.
[정말로 황태자 전하가 마음에 두고 계신가?]
라테르 후작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던 상대였던 안토니아의 무게감이 달라졌단 소리였다.
그리고 더 본격적으로 움직이겠다는 뜻이기도 했고.
쟈힘은 자신의 미래를 저울질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이 선에서 발렌타인을 들쑤시는 걸 멈추면 자신의 기분이 나쁜 것 말고 큰일이 생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들쑤셨다가 모두 들통나는 순간에는.
‘나도 제거되겠지.’
황태자는 아랫사람에게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쟈힘이 갈팡질팡하는 순간에도 제레미야는 그저 신나게 옷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황태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로 밖에 나가려고 하는 것이냐, 제레미야.”
“형님!”
제레미야는 황태자를 향해 순진하다 못해 멍청해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형님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세르히 백작에게 제대로 사과하라고 말입니다.”
“흠, 그럴 마음이 들었단 소리냐?”
“네! 라테르 후작의 손녀라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뭐……. 먼저 너그럽게 사과하는 게 더 명예롭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황태자는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는 어제 제레미야가 어지럽혀 둔 체스판을 습관처럼 정리하며 이야기했다.
“제레미야, 넌 세르히 백작이 마음에 드느냐?”
“얼굴은 좀 예쁜 편이지요.”
“마음에 든다는 소리구나.”
황태자는 자신의 동생을 잘 알았다.
제레미야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거니까.
게다가 좀 예쁘다고 한 상대는 지금껏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주 예쁘단 소리였다.
황태자는 폰을 만지작거리며 제레미야에게 넌지시 말했다.
“라테르 후작을 데려온 게 숙부님인 것 같더구나.”
그 말에 신나게 옷장을 둘러보던 제레미야의 손이 멈췄다.
그 모습에 황태자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리고 쟈힘은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했다.
‘역시 눈에 안 보이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