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왜 조용한 게냐, 제레미야.”
“…….”
“형님에게 할 말이 많지 않아?”
안도하는 안토니아와 달리 황궁에 돌아온 제레미야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만 같았다.
“얼른, 이 형님에게 이야길 해야지. 우리 막내.”
미소 띤 황태자의 얼굴이 너무, 너무 무서웠으니까.
‘난, 난 죽었다.’
제레미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상황이 꿈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정말 한 달은 네 방에서만 지내고 싶은 것이야?”
“혀, 형님!”
제레미야는 그것만큼은 안 된다는 듯 간절하게 외쳤다.
황태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멍청한 얼굴을 보니 절로 마음이 약해졌으니까.
“그래서,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이, 이, 이런 일이라니요?”
자신의 막냇동생이지만 이럴 때만큼은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줄 아느냐. 지금 형님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냐.”
“네?!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면 크게 화내진 않으마.”
“작게는 화내신다는 거잖아요.”
제레미야가 꿍얼거렸다.
“한 주 외출 금지가 나으냐, 그도 아니면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한 달 동안 외출 금지를 당하고 싶으냐.”
“굶는 건 싫습니다!”
황태자는 그 반응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리 막내고 자신이 오냐오냐해 왔다지만, 어쩜 이렇게 단순할 수가.
“네가 세르히 백작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최근의 헛소문 사건을 만들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
제레미야는 부루퉁한 얼굴로 쟈힘을 바라보았다.
마치 ‘네가 일렀지!’ 하는 얼굴이었다.
“아니다.”
“네?”
“넌 이 형님이 바보로 보이느냐? 네가 하는 짓도 못 알아차릴까.”
“……제가 바보란 소리로 들립니다.”
“바보짓을 했지! 하마터면 그렇게 많은 귀족들 앞에서 네가 세르히 백작을 비방했단 사실이 알려질 뻔했는데!”
황태자가 버럭 화를 냈다.
“혀, 형님.”
“내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그 린스올 상단주는 네가 시킨 거라고 외칠 터였다.”
“……네?!”
어쩜 이렇게 눈치가 없을 수가 있을까.
황태자는 혀를 찼다.
‘제레미야가 이 모양인데 세르히 백작이 판을 꾸몄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과한 생각일까.’
안토니아는 그저 자신의 억울함을 풀려 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워.’
괜히 황태자가 안토니아를 그런 식으로 추궁한 게 아니었다.
‘하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딱 맞춰져서 일어났다고?’
찝찝해서 서둘러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정말로 세르히 백작은 무관한 걸까.’
무도회에서 본 것처럼 그저 예의 바르고 순진한 지방 귀족이라고만 판단하기엔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제레미야가 사과하러 갔을 때, 길길이 날뛰며 돌아온 것도 그렇고.’
물론 제레미야가 이 모양이니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진 걸 수도 있었지만.
‘유도했을 가능성은 있지 않은가.’
무도회 때의 대처나, 자신이 황실을 들먹이자마자 크게 겁내며 몸을 낮추던 모습.
‘계산이 빠른 거라고도, 정말 경험 없고 겁 많은 거라고도 볼 수 있으니.’
황태자는 혀를 찼다.
이걸 모두 계산해서 한 거라고 생각하면 염려되기까지 했다.
‘괜한 생각인 것 같긴 하지만.’
갓 수도에 올라온 어린 귀족일 뿐이었다.
겨우 무도회에서 말 몇 마디 잘한 것과 이번 일처럼 크게 판을 벌이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안토니아 세르히는 자신과 제레미야의 관계를 모르지 않는가.
‘정황상 숙부님에게 이용당했다고 봐야겠지.’
자신을 수도 밖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든 게 리카르도였으니까.
게다가 정말 대단한 자였다면 리카르도 트라체스가 제 눈에 들도록 하진 않았을 거란 합리적 추측이 맴돌았다.
오히려 함정이라면 모를까.
‘사교계 소문처럼 마음이 있는 상대라면 그 교활한 숙부님이 내가 이렇게 생각할 만한 짓을 하진 않았을 테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바마마가 마음에 들어 하셨다. 게다가 루퍼스 크롬프트도 손에 넣고 싶은 자고.’
그리고 한 가지 더, 수도로 복귀하는 길에 들은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세르히 백작의 조부모가 움직인다니…….’
하도 조용히 지내 자신조차 한 번에 떠올리지 못했을 정도였던 그들이었는데.
‘뭣보다 그들의 영지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제 막냇동생이 더 답답해졌다.
“넌 왜 그렇게 세르히 백작에게 더 못되게 구는 거냐.”
“형님!”
“사과하고 오랬더니, 이런 일을 벌이기나 해?”
“하, 하지만…….”
“말은 끝까지 똑바로 하거라, 제레미야.”
황태자의 말에도 제레미야는 그저 꿍얼거렸다.
“저한테 계속……. 대들잖아요.”
“대들어? 사과하러 간 날 세르히 백작이 한 말은 누가 들어도 할 만한 말이었는데.”
“그, 그렇지만 저는……!”
“제레미야,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어른으로 인정받는 법이다.”
황태자는 끝내 단순한 제 동생에게 가장 잘 통하는 처방을 꺼냈다.
“어른으로서의 인정이요……?”
“아바마마께서는 세르히 백작을 눈여겨보셨다. 루퍼스 크롬프트도 마찬가지야.”
“네에? 그 분홍 구름 머리를요?! 왜요!”
설명하면 알기나 할까.
황태자는 갑갑해하면서도 찬찬히 제레미야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긴 했다.
그러나 참 슬프게도 설명이 끝났을 때 제레미야는.
“아바마마가 중요하게 여긴다는 건 알겠어요.”
겨우 그 정도만 이해했다.
황태자는 적어도 해가 바뀔 때까지라도 교육 담당자들에게 엄하게 가르치라 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계속 네가 세르히 백작을 괴롭히면, 루퍼스 크롬프트도 세르히 백작도 숙부님만 의지하게 될 것이다.”
“그, 그건 싫어요!”
“이건 설명 안 해도 되니 다행이구나.”
“네?”
“이해한 네가 참 똑똑하단 소리다.”
그 말에 단순한 제레미야는 금세 어깨를 으쓱거렸다.
황태자는 어디서부터 다시 가르쳐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주일은 얌전히 공부하며 지내거라, 안 그랬다간 아바마마께 모두 말씀드릴 테니까.”
“혀, 형님!”
제레미야는 애처롭게 황태자를 불렀으나, 그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 * *
제레미야의 방에서 나온 황태자는 곧장 쟈힘을 호출했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쓸모없긴.”
황태자의 말에 쟈힘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널 믿고 자리를 비운 것인데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들다니.”
황태자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해라. 난 네가 영리해서 그 자리에 둔 것이다. 제레미야를 보필하는 이렇게 쉬운 일도 제대로 못 한다면…….”
조금 전 제레미야를 볼 때와는 달리, 온기라곤 하나 없는 얼굴로 쟈힘에게 선고하듯 말했다.
“폰스 남작가에도 미래가 없겠지.”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여러 번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쟈힘.”
황태자는 그 말을 남기고 몸을 홱 돌렸다.
쟈힘은 황태자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또 세르히 백작이야.’
주먹이 꽉 쥐어졌다.
최근 들어 황태자에게 벌써 세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오늘, 자신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제레미야를 막은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모두 제레미야가 세르히 백작과 엮여서 생긴 일이었다.
‘외동딸로 태어났단 이유로 작위 후계자가 된 주제에…….’
제레미야에게 한두 번 져 주는 게 뭐 어렵다고 그렇게 뻗대고 있단 말인가.
자신은 제레미야에게 몇 번이고 얻어맞으면서도 꿋꿋이 참는데.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중앙에 진출하지도 않은 백작가 주제에.
쓸모가 없단 소리에 크게 자존심이 상한 쟈힘은 잘못된 곳으로 애꿎은 화살을 쏘아 올렸다.
* * *
“죄송합니다, 세르히 백작님!”
“정정 기사는 아주 확실하게 싣겠습니다!”
“오늘 정말 멋졌다고 들었습니다. 크롬프트 씨, 저희가 큰 오해를 해서 정말로-.”
발표회가 열린 밤, 각 신문사의 대표들은 일제히 안토니아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차에서 내린 안토니아와 루퍼스를 향해 고개를 몇 번이고 조아렸다.
“말 몇 마디로 해결될 거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물론 안토니아는 쉽게 넘어갈 생각 없었다.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터무니없는 덤터기까지 쓸 뻔했다고.’
게다가 이번 일에 들어간 금액을 생각하면…….
‘배 이상은 받아 내야지.’
단호하게 그들을 바라보자, 흥정하러 왔던 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건…….”
“걱정 말게, 우리는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진 않을 거니까.”
그 말에 신문사 대표들은 쭈뼛쭈뼛 안토니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그래도 내심 겉보기에 정말 착해 보이는 이 아가씨가 자신들을 봐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그렇지, 크롬프트 씨?”
“물론입니다, 백작님. 우리는 그저…….”
각 신문사 대표들이 루퍼스에게 주목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똑같은 평판과 이 일로 입은 피해만큼의 보상만 돌려받길 바라니까요.”
안토니아는 ‘겨우 그걸로 되냐’는 듯한 얼굴의 신문사 대표들을 보며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여러모로 피곤해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신문사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라고 하지.”
“알겠습니다, 백작님!”
“감사합니다, 크롬프트 씨!”
그들은 예상보다 관대한 처분에 안토니아와 루퍼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안토니아도 루퍼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수 시간 뒤, 비명을 지르리란 걸 말이다.
* * *
[세르히 백작은 결백했다!]
[천재! 루퍼스 크롬프트가 보여 준 새로운 마법 기계!]
[특급 컬래버레이션, 유글란스 백작+루퍼스 크롬프트]
발표회 다음 날, 각 신문사 헤드라인은 참으로 화려하고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심지어 색을 넣어 인쇄한 곳이나, 특집 기사처럼 몇 면을 할애한 곳도 있었다.
참으로 필사적인 노력이 아닐 수 없었다.
‘정정 기사를 모두에게 읽게 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거든.’
안토니아는 즐거운 얼굴로 신문을 읽었다.
지난밤, 각 신문사에 청구된 금액은 1000골드가 넘는 액수였다.
다소 숫자에 허술한 루퍼스와 달리 이 피해 청구서를 적은 마기나는 매우 꼼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신문사가 반박하지 못하도록 조목조목 항목별 청구 사유까지 달아 신문사로 보냈다.
‘게다가 수도 내에 헛소문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수대로 더하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일 것이다.
“진짜 속이 다 시원해요!”
“맞아요, 주인님께서 근래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속상한걸요.”
폴리와 로레나의 말에 안토니아는 그것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고생이 많았지.”
수도 내 수군거림은 안토니아나 루퍼스뿐만이 아니라, 휘하 고용인들에게도 향했으니까.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멋모르고 떠들어 대는 건데.”
“그보다 주인님, 어제 크롬프트 씨가 이야기한 건 어떻게 생각하셔요?”
“글쎄…….”
안토니아는 신문을 내려놓으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나는 수도에서 떠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안토니아 아가씨.’
‘왜?’
‘왜는 무슨, 알고 있잖아, 아가씨. 수도에 온 뒤에 이상하다는 거.’
루퍼스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마치 자신이 오빠라도 되는 양 이야기했다.
‘아가씨는 그냥 평범한 지방 귀족일 뿐인데, 황실하고 너무 엮였어.’
‘일시적인 거겠지.’
‘아닌 거 아가씨도 깨달았으면서.’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으로 씁쓸해했다.
루퍼스의 말이 맞았으니까.
지난 몇 년간의 생활이 자신의 삶답지 않게 순탄해서일까.
‘정말 모른 것도 아니면서 황자인 제레미야를 상대로 그런 계획을 실행하려 했다니.’
너무 담이 커졌다.
아니, 어쩌면 회귀 전, 제레미야와 부부답지는 않았으나 황실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기에 무뎌졌는지도 몰랐다.
황실이 어떤 곳이고 황태자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아가씨, 또 이런 일에 엮이면 꼼짝없이 당해 줘야 할지도 몰라. 아가씨가 살기 위해서 말이야!’
‘루페의 말대로야.’
중요한 건 행복하게 살아남는 것이지, 권력이나 재산을 크게 불린다거나 하다못해 망나니 전 남의 편을 골탕 먹이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애초에 수도에 온 목적은 이미 달성한 거나 다름없었고.
‘카메라 판매도 순조롭고, 오늘 일로 루페의 이름도 알려졌으니까.’
분명 이후 판매 추이에 대해서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이상 무난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스베르가나 유글란스 백작과도 꽤 친분을 쌓았으니까.
‘역시 더 황실과 엮이기 전에 내빼는 게 낫겠지.’
안토니아는 조금 지친다는 듯 책상에 고개를 묻어 엎드린 채, 폴리와 로레나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
“저희야, 주인님이 안전한 게 제일이에요.”
“맞아요, 주방장님이 들었다가는 당장 주인님을 모시러 수도에 올라오실걸요?”
폴리의 말에 안토니아는 속으로나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마틴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아쉬우신 거지요?”
로레나의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서 그렇게 주목한 게 아니라면, 좋은 기회니까.”
하지만 안토니아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상으로 눈에 띄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걸.
‘이미 지긋지긋하게 주목은 받아 보기도 했고.’
바로 가호 소유자로 말이다.
잠시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민하던 안토니아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럼 수도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만 끝내면 영지로 돌아가자, 아마 새해가 될 무렵이면 마무리되지 않을까?”
“모두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될 거예요.”
로레나의 말에 안토니아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애써 미련을 접었다.
‘그래, 지금 내가 가진 걸 위험한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짓은 하지 말자.’
과거보다도 제 손에 지킬 게 훨씬 많아졌으니까.
* * *
복도 끝에서 구두 굽이 반질반질한 대리석과 마주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황태자궁 근처에 있던 쟈힘은 그 소리에 집중하며 최대한 정중하고 자연스럽게 우연을 가장할 타이밍을 맞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고 오시는 길입니까.”
“쟈힘.”
규칙적인 발소리가 뚝 멈춰 서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여성의 목소리에는 나른한 기색이 섞였으나, 높지 않고 적당하여 우아했다.
진한 초콜릿빛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은 찬찬히 턱을 올리며 그를 보았다.
“그간 잘 지냈는가.”
“물론입니다. 오랜만에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발렌타인 님.”
“그래서 기다린 이유는?”
조금 처진 코럴 핑크빛의 눈이 귀찮다는 듯 바라보았다.
쟈힘은 무심코 그녀의 오른쪽 눈 아래 점을 보았다 시선을 더욱 아래로 낮추며 말했다.
“기다리다니요.”
“무의미한 시간을 쓰게 하는군.”
발렌타인은 곧장 고개를 돌려 다시 발을 옮겼다.
쟈힘은 다급하게 그녀를 쫓으며 이야기했다.
“오랜만이라 뵙고 싶었을 뿐입니다, 발렌타인 님.”
“흐음.”
“황태자 전하와의 만남이 그리 좋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글쎄.”
도도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쟈힘은 내심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 사람 말고는 효과적으로 세르히 백작을 눌러 줄 사람이 없어.’
그녀는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였으니까.
중앙 귀족 중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는 손에 꼽았다.
그중에서 현재 황태자와 나이가 맞는 건 바로 이 발렌타인 오르테가 후작 영애와 드란제아 공작가의 공녀 정도였다.
그중 바쁜 황태자가 그나마 자주 알현을 허락하는 게 이 발렌타인이었다.
무엇보다 몇 대 전 폰스 남작가는 오르테가 후작가의 가신이었기에 더 교분이 있었고.
그녀를 이름으로 칭할 수 있는 것 또한 다 그 덕이었다.
“두 번이나 말씀하시더군.”
문득 발렌타인의 발이 멈췄다.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쟈힘을 바라보았다.
“세르히 백작에 대해서. 이건 내가 견제하길 바라시는 걸까, 그도 아니면 포섭하길 바라시는 걸까.”
역시.
쟈힘은 발렌타인의 말에 안도했다.
최근 황태자가 관심을 둔 어린 귀족이 세르히 백작이니, 분명 말이 나올 거라 이야기했다.
게다가 제작 발표회가 치러진 것도 얼마 전 일이니 더욱.
쟈힘은 우선은 몸을 낮추었다.
“발렌타인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글쎄, 나는 쟈힘이 답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느슨했던 발렌타인의 입매가 휘어졌다.
“더 시간 쓰게 할 생각인가, 쟈힘 폰스?”
“그럴 리가요. 다만 제가 결론을 내리는 건 주제넘는 일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차피 허락한다 해도 결론을 내릴 생각 없지 않은가. 네 이야기나 잠시 들어 보지.”
발렌타인의 말에 쟈힘은 속으로 웃었다.
황태자는 분명 어느 쪽의 의도도 없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포섭 쪽에 더 가깝겠지만…….
‘그랬다간 제레미야 황자님이 세르히 백작과 더 엮일 우려가 있어.’
그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지금도 저렇게 세르히 백작이 싫어 사과하라는 것만으로도 야단이지 않은가.
만약 황태자의 입에서 ‘가깝게 지내라’ 같은 말이 나오는 날에는 막내 황자궁이 뒤집어질 게 분명햇다.
“저는 그저 본 것만은 말씀드릴 뿐입니다.”
“그래서.”
“지난 황실 무도회에서 폐하께서는 세르히 백작을 크게 눈여겨보시고 칭찬하셨지요, 작위 승계까지 허락하셨고요.”
“그래.”
“게다가 루퍼스 크롬프트의 재능에 대해선 황태자 전하께서도 기꺼워하시고요.”
발렌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마치 포섭하라는 것처럼 들릴 만한 내용이었다.
“게다가 세르히 백작은 트라체스 대공가의 비호를 받고 있지요. 저 또한 그저 들은 것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말해, 판단은 내 몫이니.”
“황태자 전하께서 세르히 백작의 집안에 대해 조사하신 적이 있는 듯합니다.”
발렌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는 듯.
“그저 풍문으로 들은 것이다?”
“확실치 않은 것이니 그저 잊어 주시지요, 발렌타인 님.”
“확실치 않은 것이라면.”
발렌타인은 핸드워머 안으로 찬찬히 손을 넣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경고 정도는 해 두는 게 좋겠지.”
발렌타인은 그렇게 말하며 쟈힘을 바라보았다.
“폰스 남작가는 이제 우리 오르테가 후작가의 가신이 아닐 텐데.”
“전 제레미야 황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황자님의 후견인은 다름 아닌, 황태자 전하시지요.”
발렌타인은 그 말에 확인할 것은 다 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
쟈힘은 그 우아한 뒷모습을 보며 비죽이 웃었다.
거짓은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집안에 대해 조사하는 건.
‘약혼을 염두에 두었을 때 하는 일이니까.’
물론 황태자는 본인의 결혼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발렌타인 오르테가가 황태자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강렬히 욕망했다. 누구보다도 높은 지위에 오르는 걸 말이다.
그녀는 그를 위해 굳이 변수를 둘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황태자 전하가 약혼조차 하지 않는데도 잠자코 있던 건 후보가 될 만한 사람이 없어서였으니까.’
발렌타인이 경고하겠다고 한 이상, 세르히 백작이 겁먹을 만한 일인 게 분명했다.
그럼 수도에서 더 발붙일 생각 못 하지 않겠는가.
‘영지에나 잠자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쟈힘은 모두 해결될 거란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 * *
발표회 이후, 안토니아는 무척 바빴다.
수도에서 떠날 준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난 발표회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으니까.
그날도 안토니아는 마기나와 머리를 맞대고 장부를 확인하며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주인님, 어제 말씀하신 것 외에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필요한 것을 구매하고 계약하고자 재킷을 갖춰 입은 로레나의 물음에 안토니아는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예상한 대로 잘 어울리는 걸, 로레나.”
“주인님께서 골라 주신 거니까요, 제가 감히 유글란스 백작님의 옷을 입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제대로 된 집사용 재킷이 없어서 늘 고민이었잖아. 마기나가 수도에 올라온 뒤로는 만들 짬도 나지 않았고 말이야.”
은은한 녹색이 감도는 짙은 색 재킷이 로레나와 매우 잘 어울렸다.
“그러니 안심하고 잘 다녀와, 원래는 내가 해야 할 일들도 있는데.”
안토니아가 미안한 듯 말하자, 로레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주인님의 일을 덜어 드리는 게 제 역할이고 기쁨인걸요.”
“그렇게 말해 주니 좀 안심이야.”
로레나는 곧 정리를 마친 뒤 하녀와 하인 하나씩을 데리고 문을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말하던 그 미소가 평소보다도 유달리 환하게 느껴졌다.
안토니아는 그게 자신이 간밤에 제대로 자지 않은 탓에 열린 문 너머로 들이치는 햇빛이 너무 밝은 탓일까, 하고 실없는 생각을 했었다.
* * *
그러니 이런 일은 안토니아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주, 주인님……!”
“무슨 일이야?”
느지막한 오후쯤에야 영지로 돌아가기 전 해결 봐야 할 일들을 체크하던 안토니아는 다급한 목소리에 서류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집사님이, 집사님이……!”
외치는 하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안토니아는 심각한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로레나가 왜?”
“사, 사고를, 마석 상인과 계약하고 나오던 길에 계단에서 떨어지셨어요……!”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로레나가 계단에서 떨어지다니.
“상태는?”
“의식이 없으셔요……. 피가, 막……. 철철 나서, 재킷이 붉게……. 어, 어, 어떻게 해요?”
안토니아는 문득 외출 전 보았던 로레나의 미소를 떠올렸다.
그토록 환하고 맑았었는데.
‘……로레나.’
그녀에게 깃든 빛이 위기를 알리던 것이었을 줄이야.
안토니아는 외출 채비도 하지 않은 채 발을 옮기며 하녀에게 물었다.
가호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토록 꺼리던 중앙 신전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갈 생각으로.
“지금 어디 있어? 중앙 신전?”
“아, 아니요.”
“뭐?”
그 말에 오히려 놀라 발이 우뚝 섰다.
“그, 지나가던 분이 도와주셔서, 그분이 자신의 집이 가까우니 거기로 데리고 가겠다고…….”
“누군데?”
“대, 대공 전하요!”
“……트라체스 대공 전하?”
하녀는 그 말에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황실과 더 엮이기 싫어 철수 작업을 하던 와중에 리카르도 트라체스의 도움을 받다니.
‘아냐,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하지 말자.’
우선은 로레나였다.
게다가 트라체스 대공가 정도면 우수한 주치의를 데리고 있을 테니 차라리 나을 터였다.
안토니아는 폴리가 잽싸게 가져다준 외투만 걸치고서 트라체스 대공가로 향했다.
* * *
저녁 무렵으로 접어드는 시간이었다.
안토니아가 대공저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말해 둔 것인지 리카르도의 서재로 안내해 주었다.
“미리 연락드리지 않고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아닙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제대로 사람을 보냈어야 했는데 급한 일이라 백작가의 하인에게 알리라고 전했습니다.”
안토니아는 실례했다는 듯한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여러 가지로 예의를 갖춰 할 말은 많았으나 입 밖으로 뱉어 낼 수 있는 말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로레나는 괜찮은가요?”
“그게……. 오늘 밤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
리카르도의 그 말에 안토니아는 전신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오늘 밤을, 지켜봐야 한다니…….”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세르히 백작!”
“죄, 죄송해요.”
휘청거리는 몸을 붙잡아 준 리카르도에게 사과하자, 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너무 배려 없이 말했습니다.”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손을 잡고서 의자에 앉혀 주었다.
그는 안토니아에게 찬찬히 숨을 쉬어 보라는 듯 손짓하며 따뜻하고 단맛이 나는 차를 건넸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긴급한 치료는 한 상태입니다. 주치의가 절대 안정해야 하니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해 안내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로레나가 제일 중요한걸요, 이해해요.”
로레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로레나의 얼굴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애원할지도 몰랐으니까.
‘……로레나는 이미 내겐 가족 같은걸.’
회귀 전에도 제 편을 들어 줬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고, 회귀 전에는 자신과 함께 자라며 언니처럼 의지한 사람이었다.
로레나는 안토니아의 집사 역할을 하기 위해 지난 5년간 안토니아만큼 노력했다.
작위도 받았으니 이제 영지로 돌아가 지난 5년처럼 즐겁게 지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루퍼스의 물건들 홍보도 잘되었고, 나도 귀족들과 안면을 터 자금도 더 풍부해져 좋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토니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리카르도는 그런 안토니아를 향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신관도 불러 두었습니다. 오늘 밤만 잘 넘기면 나을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정말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기사를 보냈으니 분명 제때 올 겁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죄송해요, 대공 전하. 그리고 감사해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는…….”
리카르도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진정 되셨습니까?”
“네…….”
안토니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충격만 받고 있을 때가 아니야,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전하, 혹시 로레나의 사건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안토니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리카르도에게 물었다.
자신의 큰언니는 분명, 자신을 놓지 않고 돌아와 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일이 정말 사고였는지부터 확인해야 해.’
정말 사고일 수도 있지만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로레나는 아무리 급하더라도 부주의하게 뛰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 * *
리카르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충격을 받아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는데도 안토니아는 이성이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할 일을 시작했다.
‘……나한테 기대도 된다고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리샤르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5년 전, 그는 자신이 대공으로서 안토니아 앞에 서기를 고대했다.
용서를 구해야 할 일도 있었지만 그편이 좀 더 그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과거의 자신은 확신했었다.
가호를 가진 그녀를 돕기에도 그게 더 나을 거라고.
그러나…….
‘그렇군요, 전하께서는 로레나가 떨어진 뒤 보신 거군요.’
안토니아의 눈은 자신에게 그 어떤 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다.
‘설마 과거의 나를 질투하고, 간절히 바라게 될 줄이야.’
리카르도는 괜히 목이 타 거칠게 마른세수만 했다.
예전보다 도와줄 수 있는 수단도 방법도 더 많은데.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내밀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죄송하지만, 크롬프트 씨에게 연락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의 당연한 조력자를 입에 담았다.
그 사실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정말로 자신은 바보나 다름없었다.
고작 이런 미래를 그리느라 그녀와 좀 더 닿을 수 있던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루퍼스 크롬프트라는 지나치게 유능한 자가 자리했다.
그럼에도 리카르도는 안토니아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그녀가 쉴 방도 준비하라 일렀다.
게다가 그녀를 안심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말까지 했다.
‘원한다면 이곳으로 크롬프트 씨를 불러 드리지요.’
물론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연락만으로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안토니아는 또 자신의 앞에서 명확한 선을 그었다.
리샤르일 때는 그토록 넘기 쉽던 선이 지금은 단단한 벽처럼 느껴졌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아.’
오히려 말랑한 단꿈에 젖어 추억을 그린 탓에 현실 감각을 잊은 건 자신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예쁘장했던 얼굴은 그 어느 곳에도 남지 않은 탓에.
‘안토니아에게 리샤르라고 밝힐 순간조차 찾지 못하고 있으니까.’
처음에 주춤한 그 순간부터 톱니바퀴는 어긋나 버렸다.
그 뒤에는 교황과 가호 때문에,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안토니아에게 일어나서.
무언가 치솟는 답답함에 리카르도는 창문을 가만히 노려보다 찬찬히 몸을 돌렸다.
‘이런 별것 아닌 일로 고민할 때가 아니야.’
혼자 한 생각이라고 해도 너무 이기적이었다.
아는데, 아는데도.
리카르도는 안달이 나는 마음을 어떻게든 누르는 게 최선이었다.
5년, 그 시간은 짧지 않아서 훌쩍 커 버린 키만큼이나 멋대로 제 마음도 자라 버렸다.
그것도 예전처럼 마냥 반짝거리고 맑던 샘물 같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리샤르라고 불릴 때도 자신은 훌쩍 미래를 그리며 멋대로 그녀에게 곁을 내어 달라고 주장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나는 정말로 안토니아에게 가장 먼저 의지할 상대가 되길 원해.’
그러니까 지금은 이기심을 눌러야 했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으니까.
5년 전 그렇게 인연을 미래로 미뤄 둔 것도, 그래 놓고 스스로에게 안토니아가 알아볼 실마리를 남겨 두지 않은 것도.
그러니 바보짓을 더 하기보다 대공으로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다.
리카르도는 주먹을 꽉 쥐며 하인을 시켜 공작가 정보원을 불러와 일렀다.
“오늘 세르히 백작가 집사 사건을 상세히 알아봐, 누가 한 일이고, 누가 뒤에 있는지도.”
안토니아도 당연히 움직이겠지만, 자신도 정보를 쥐어야 했다.
‘안토니아가 움직일 수 없는 상대일 수도 있어.’
안토니아는 자신의 집사, 로레나를 매우 아꼈지만 세르히 백작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녀는 모든 걸 내던지는 선택은 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로레나가 소중하다 해도, 아니 로레나가 소중하기에.
리카르도는 주먹을 쥐며, 한 가지 편지를 썼다.
왠지 ‘그분들’에게도 상황을 알려야만 할 것 같았다.
* * *
“죽지는 않았다고?”
“네, 그, 그렇습니다. 아가씨.”
“흐음.”
해가 따사롭게 비추는 테라스에서 발렌타인 오르테가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남자의 보고를 들었다.
무릎 꿇은 남자는 굉장히 겁먹은 얼굴로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 저어, 빚은…….”
“경고는 됐겠지.”
“……네?”
“말한 대로 그대의 빚은 없던 걸로 해 주지, 단…….”
발렌타인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침의 위로 숄을 넓게 걸치며 파티션 밖으로 찬찬히 걸어 나왔다.
남자는 조아린 고개 아래로 보이는 발렌타인의 구두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대가 지저분하게 꼬리를 남겼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 아, 아무도 못 보았…….”
“글쎄,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지.”
발렌타인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황실에서 시선을 준 자이니, 재주가 있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아무 작위도 없었으면 능력을 보아 예뻐해 줄 수 있었을 것을.’
뭐, 그 또한 세르히 백작의 운명일 것이다.
발렌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른한 말투로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니 꼬리를 잡히거든, 그대가 혼자 한 일이라고 하게.”
“네……?”
남자가 찬찬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햇살을 등진 발렌타인의 모습에서 위압감이 느껴져 그는 반사적으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계속 보기엔 너무나도 격식 없는 차림이기도 했고 말이다.
몰락 직전이라곤 하나, 기사 출신인 그는 모멸감을 느꼈다.
자신을 그만큼 무시한다는 소리였으니까.
“하, 하지만 아가씨…….”
“그대가 잘 둘러대지 못할 듯하니 이유도 설명해 주겠네.”
발렌타인은 남자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대가 빚을 못 갚게 된 것은 모두 린스올 상단주가 파산해서이지 않나. 그러니 그 때문에 부아가 치밀었다고 하게.”
“…….”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사란 작위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처리하려 했던 자는 고작해야 하녀.”
발렌타인이 낮게 웃었다.
그 낮은 울림이 이상하게 소름 끼쳤다.
“겨우 몇 년만 노역을 살면 끝날 일이야, 내 말 이해했는가?”
“……네, 네. 아가씨.”
남작은 더 그녀에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뭐라고 말해도 듣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빚은 말끔히 사라지지 않았는가.
린스올 상단의 파산으로 자신과 가족들이 일평생 일해도 복구하지 못할 만큼 가산이 모두 날아간 차였다.
이 정도면 차라리 잘된 셈이었다.
남자는 모두 납득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렌타인은 남자가 떠나는 모습을 발코니에 기대어 잠시 살펴보다가, 따분하다는 듯 펜을 들었다.
또 잔뜩 쌓인 초대장이며 편지에 답장을 해야만 했으니까.
귀찮은 듯 첫머리만 적었던 발렌타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 고작해야 하녀이니 거기까지 세르히 백작이 캐낼 일도 없겠군.”
그걸 말해 줬다면 그 남자의 어깨가 좀 덜 쳐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그 생각도 이내 지워졌다.
발렌타인 본인이 해 줘야 할 의무가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잠깐 사이 발렌타인의 펜에서 잉크가 똑똑 떨어져 편지지를 더럽혔다.
그걸 본 발렌타인은 귀찮다는 듯 그대로 고급임이 틀림없는 그 종이를 날려 버렸다.
대수롭지 않은 것 하나는 처리했으니 다른 일에 신경 쓸 시간이었다.
* * *
폭풍 같은 밤이 지나갔다.
로레나는 몇 번이나 위험한 순간을 넘겼고, 그때마다 2층 복도도 안토니아의 심장도 분주해졌다.
정말 고맙게도 리카르도는 신관들의 파견이 늦어지자 직접 말을 몰고 가 데려와 주기까지 했다.
당연히 백작가의 집사란 소리에 굼뜨게 굴던 신관들도 화들짝 놀라 달려오기까지 했고 말이다.
‘감사해요, 대공 전하.’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저도 늘 제 곁을 지키는 시중 하인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안절부절못했을 겁니다.’
그 답에 늘 대공의 곁을 지키는 붉은 머리의 남성은 어쩐지 입꼬리를 부들거렸지만 말이다.
아무튼 덕분에 로레나는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
안토니아는 로레나의 얼굴을 봐도 좋다는 주치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어젯밤의 그 다급한 상황들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로레나는 평온하게 숨을 내뱉으며 자고 있었다.
비록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으나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안토니아는 간밤에 고생한 대공저 주치의와 상급 신관 두 사람에게 허리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백작님.”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하지 않을 극진한 태도에 세 사람 모두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여러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지도 몰라요. 꼭 사례할게요.”
그러나 세 사람 모두 그런 감사의 말 하나하나가 가시방석같았다.
왜냐하면 안토니아의 뒤편에서 바라보는 리카르도의 눈빛이 지나치게 부담스러웠으니까.
특히 상급 신관 두 사람은 찔리는 게 있어 더 적극적으로 거절했다.
‘어제 늦게 왔다고 저러시는 게 틀림없어!’
마치 그런 주제에 안토니아에게 보답을 받아먹을 거냐는 것 같은 매서운 눈빛이었다.
물론 안토니아는 알 리 없었지만 말이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세르히 백작님.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담을 드리려던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부디 거둬 주십시오. 백작님씩이나 되는 분이 공대라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 사람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리카르도는 비로소 옳다는 듯 조금이나마 표정을 풀었다.
‘역시 대공 전하는 레이디 트라체스와 관련되었다 하면 뭐라도 칼 같으시다니까.’
덕분에 세 사람은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안토니아도 그들의 부탁을 곧장 들어주었고 말이다.
“이제 로레나는 괜찮은 것인가?”
“그건…….”
찬찬히 앞으로 조금 주의할 점이 있다고 말하려던 주치의는 뒤쪽에서 꿈틀거리는 리카르도의 눈썹을 보고 곧장 말을 고쳤다.
저건 안 되도 되게 하라는 소리였다.
“이제 큰 걱정을 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신관님들도 꾸준히 지켜볼 테니 말입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마음을 놓았다는 듯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르도만큼이나, 아니 리카르도보다 더 표정 변화가 없는 앳된 백작이었으나 어쩐지 그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 분위기가 어쩐지 묘해 주치의와 신관 두 사람은 그녀를 무심코 쳐다보았다가, 이내 꽂히는 따가운 시선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간을 정해 상태를 살피러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작님.”
안토니아만이라면 몰라도 리카르도가 저렇게 따갑게 보고 있는 이 자리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어졌다.
* * *
주치의와 신관이 방에서 나서자, 리카르도 또한 안토니아에게 예를 갖추어 간단히 말을 건넸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세르히 백작.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누구라도 부르십시오.”
“정말로 감사해요, 대공 전하.”
“아닙니다.”
그는 안토니아에게 꾸벅 묵례하며 방에서 나섰다.
정말로 고마운 배려였다.
안토니아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하지 않는 것도, 혹시라도 도움을 저어할까 한 번 더 누구라도 부르라고 말해 주는 것도.
감사하단 말에 구구절절 길지 않은 말로 답해 준 것도 모두 밤새 꼬박 신경 쓴 안토니아를 위한 것이란 게 느껴졌다.
게다가 어젯밤 그가 직접 신관을 불러와 준 것도 모두.
리카르도를 향했던 경계심만 가득하던 모난 마음이 조금이나마 둥그렇게 변하기에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원래 대공 전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리고 비교하려는 건 관두자.’
굳이 삐딱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어쩐지 리카르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기묘한 기시감이 들기도 했고.
‘일단 상황이 정리되면 어떤 식으로라도 전하께 이 빚을 갚아야겠어.’
그러니까 안토니아는 그 빚을 꺼려 하며 지금의 도움을 쳐 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녀 하나 곁에 없이 물려 준 덕에 조용한 방 안에서 안토니아는 비로소 차분하게 로레나의 곁에 앉을 수 있었다.
안토니아는 로레나의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이 사소한 행동마저 혹시라도 그녀에게 해가 될까 염려가 되었다.
‘……사실은 로레나, 크게 울고 소리치고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는지 상점가에 가서 말해 달라고 외치고 싶어.’
어젯밤부터 줄곧 안토니아는 겨우겨우 자신의 마음속에서 끓어 넘치는 온갖 감정들을 갈무리하느라 애써야만 했다.
저 혼자서 만들어 낸 지금의 평화가 아니었다.
작위를 받기까지 백작가의 모두가 도움을 주었기에 하나하나 다 소중했다.
로레나는 특히나 더 그랬다.
이 큰언니는 자신이 아픈 건 숨기고 안토니아가 조금이라도 기침이라도 하면 크게 걱정했다.
지금은 체력이 붙었다지만 지난 5년간 그리 튼튼하지 못했던 안토니아의 몸은 몇 번이고 앓았다.
그때마다 로레나는 뜬눈으로 지새우며 마치 자신의 친동생이 아픈 것처럼 간절하게 돌보았다.
띄엄띄엄 글자를 읽고 간단한 셈이나 겨우 할 수 있던 그녀가 백작가의 집사가 되어 안토니아를 돕기까지 해 온 부단한 노력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명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널, 그리고 백작가의 모두를 지키기 위해 힘냈다고 생각했는데…….’
어젯밤, 안토니아는 그 급한 와중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다.
신전과는 데면데면하여 도움을 청해도 더디게 굴었고 자신이 가진 ‘가호’ 또한 이럴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로레나를 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 힘이 들켜도 상관없었어.’
쓰지 못한 건 그 힘이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호는 지키는 힘이지 치유하는 힘이 아니었다.
현 상태를 유지하기에 오히려 치료 과정에서는 방해만 될 가능성이 컸다.
안토니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계속 돌아보고만 싶어졌다.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그때였다.
톡, 톡!
창가에서 무언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다가가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루페?”
그것도 그의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에 나뭇잎이며 풀잎들이 걸린 채로 말이다.
* * *
“어떻게, 아니……. 왜 이쪽으로 와?”
발코니에서 엉망이 된 몸을 대강 턴 루퍼스는 그대로 거기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급해서……. 평소면 통신구로 이야길 전하면 되는데.”
“미안, 너무 경황이 없어서……. 폴리에게 오늘 보내 달라고 이야기는 했었는데.”
아마도 공작저에 미리 사람을 보내 허가받을 생각을 하니 급해서 몰래 들어온 모양이었다.
지난 5년간 암살자 길드장인 테넌에게서 배워 나름대로 숨어드는 데는 재주가 있었으니까.
그런 것치고 루퍼스의 표정이 좀 엉망이긴 했지만.
안토니아는 대수롭지 않은 호기심을 푸는 건 접어 두고 곧장 본론을 물었다.
“그래서 범인은 알아냈어?”
“응, 실행범은 놀판트 남작이야.”
“놀판트 남작?”
회귀 전과 지금을 통틀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린스올 상단주가 체포되면서 졌던 빚을 갚을 길이 없어 파산할 지경인 모양이야. 작위를 팔아도 다 갚기 어렵고.”
“그런 거면 나한테 복수를 했어야지!”
안토니아는 화가 나 소리쳤다.
루퍼스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며 이야기했다.
“안토니아 아가씨, 진정해. 평소라면 좀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을 거야.”
“내가 지금…….”
“뭐가 중요한지 나에게 늘 입버릇처럼 말했던 건 아가씨였잖아.”
그 말에 안토니아는 잠시 루퍼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맞는 말이었다.
지난 5년간, 자신은 결코 논 게 아니었다.
제국 내 정보 다루기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강력한 패가 안토니아의 손에 있었으니까.
“……실행범이라는 건 지시한 사람이 있다는 거지?”
“맞아.”
루퍼스는 잘 생각했다는 듯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표정이 지나치게 잰 채 하는 것 같아 왠지 기분이 묘해졌지만.
“누구야?”
“나는 아가씨가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루페.”
“알아, 하지만……. 놀판트 남작을 손봐 주는 것만으로도 갚아 주는 건 되니까.”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해, 루페?”
“아니.”
루퍼스는 양손을 들며 고개를 저었다.
서로 왜 말리는지, 그리고 왜 들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아는 사이였으니까.
안토니아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설사 황실이라 할지라도 방법을 찾을 각오가 말이다.
“놀판트 남작은 오르테가 후작가에 큰 빚을 지고 있었어.”
“……오르테가 후작가?”
안토니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이 일을 지시한 게.”
생각을 해야겠다는 의식도 없이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황실 무도회부터 시작된 황실과의 원치 않던 엮임.
쓸데없이 자신을 찾아오던 제레미야, 그리고 유글란스 백작의 발표회와 예상과는 달리 그곳을 직접 찾았던 사람.
제국의 황태자.
“발렌타인 오르테가 후작 영애야?”
“맞아.”
유력한 예비 황태자비이자, 회귀 전 정말로 황태자비가 되었던 사람.
안토니아는 그녀를 아주, 정말로 잘 알았다.
‘나라면 그런 삶을 선택하진 않았을 거야, 막내 황자비. 아니, 세르히 백작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을까.’
느슨한 얼굴로 나직하게 속삭인 그 말엔 부드러운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발렌타인은 회귀 전 결코 안토니아와 적대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 나름대로 안토니아에게 자상하게 굴었다는 게 더 옳은 말일 터였다.
‘어째서 그녀가…….’
황실의 일원이 된 뒤에도 안토니아는 오랜 학대로 위축되는 버릇을 온전히 버리진 못했다.
그때마다 발렌타인은 툭, 툭 지나가듯 말하곤 했다.
‘어깨가 처졌어. 고개를 숙이지 말고 턱을 당겨 드는 버릇을 들이는 게 좋겠군.’
‘배려할 필요 없어, 세르히 백작. 모두 그대를 모셔야 할 자들이니까.’
바올로와 다른 사람 탓에 안토니아는 제레미야와 결혼 후에도 아랫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러워 했다.
밀즈 부인도 도라도 그게 당연한 것처럼 굴었으니까.
다만 호의는 늘 호의로 돌아오지 않았다.
특히 황실과 같이 권위로 똘똘 뭉친 곳이라면 더더욱.
원래도 안토니아와의 결혼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던 제레미야는 그런 모습에 더 무시했으며, 하인들도 은근히 비웃곤 했다.
발렌타인은 그런 안토니아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유 또한 참 그녀다웠다.
‘나 또한 황실의 일원, 그대 또한 황실의 일원. 나는 내 구두가 닿는 어느 곳이라도 흠집 나 있는 게 싫구나.’
그런데 로레나를 죽을 뻔하게 만든 게 그 발렌타인 오르테가라니.
안토니아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회귀 전에 나에게는 몇 안 되는 좋은 사람이어서……. 완전히 방심했어.’
그리고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아무리 자신이 이름을 떨쳐도, 주목을 받더라도.
‘그녀가 날 견제 상대로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저도 모르게 허망한 한숨이 튀어나왔다.
돌아오며 자신의 삶을 바로잡겠다고 했는데, 자신이 바뀌었으니 그만큼 미래가 바뀌는 건 감수하겠다고 여겼는데.
‘로레나가 내 곁에 있고, 내 편을 들어 준 건 내가 그럴 이유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야.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루퍼스도 그리고 곁에 있는 많은 사람 모두,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건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뀐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상대라면 설사 회귀 전에 괜찮은 관계였더라도 나빠질 수 있단 걸 깨달았어야 했다.
‘내 실수야, 그렇다면.’
만회도 스스로 해야 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안토니아는 이번 삶, 자신의 선택으로 발렌타인과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리고 그걸 고쳐 끼우는 건 아주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안 될지도 모르지.’
발렌타인이 뒤에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녀가 뭘 원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조용히 물러나는 걸.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하나의 포기로 모든 게 잘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걸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어떤 직감을 느꼈다.
지금 발을 빼는 순간, 또다시 스스로 족쇄를 차는 꼴이 될 것이라는 걸.
‘난 크게 착각하고 있었어.’
물러서고 포기하는 걸로 잘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일시적인 후퇴?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황태자나 황실이 제게 관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는 이상 발렌타인은 거슬려 할 것이다.
이번이 경고라면, 다음에는 아마도.
‘본격적인 실력 행사에 나서겠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난 그냥 평온하게 세르히 백작으로서 내 사람들만 지키고 살고 싶을 뿐인데.’
작위 승계를 받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한 것뿐이었는데.
‘아마도 영지로 일시적으로 후퇴한다 한들, 그녀는 내가 확실한 그녀 편이 되지 않는다면 싹을 밟아 버리려 들 거야.’
안토니아 또한 줄곧 백작령이나 루퍼스를 현상 유지하는 데에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발렌타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회귀 전 그녀가 자신을 봐주던 것 또한 그녀에 비해 절대적인 약자였기 때문이었다.
다독임이나 설득 같은 말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높고 위협적인 구두로 짓밟아 버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발렌타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꼭 하고 싶은 게 있듯, 자신의 힘이 필요하거나 대적해야 할 자들은 그와 비슷한 욕망으로 저를 쥐려 들 것이다.
자신의 가호가 밝혀진다면 더욱.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로레나를 위해서? 아니, 그런 예쁜 마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럴 때 로레나의 이름을 대고 싶지 않았다.
‘모두 내 삶을 위해서야.’
안토니아는 루퍼스를 바라보았다.
일이 급한 것을 알고서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까지 달려와 줬다.
그렇기에 그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배려할 수 없으니까.
“루페, 놀판트 남작의 범행 증거는 확보해 뒀어?”
“응.”
“네가 날 말리려고 한 건, 오르테가 후작 영애의 개입 증거가 없기 때문일 테고.”
루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겠지, 발렌타인은 복잡하게 계략을 짠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만큼 지저분한 걸 남겨 두지도 않았다.
‘놀판트 남작을 추궁해 봐야 절대 그녀의 이름이 나오진 않을 거야.’
그러니 발렌타인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놀판트 남작을 고발하겠어.”
“아가씨,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거지?”
“응.”
“오르테가 후작가야, 중앙 귀족 중 위세 높기로 손에 꼽히는.”
“알아.”
“아가씨가 늘 원하지 않던 귀찮은 상황에 엮일 텐데도?”
루퍼스의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소꿉친구였다.
영리한 그이니, 분명 안토니아뿐만이 아니라 그도 귀찮아지리란 걸 알 텐데.
루퍼스는 그런 투덜거림 대신 그저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가씨가 정했다면 어쩔 수 없지.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확 영지로 끌고 가 버릴 걸 그랬어.”
“루페가, 날?”
“못 할 것 같아?”
“응.”
루퍼스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부정하진 않았다.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안토니아에게 이겨 본 역사가 없었으니까.
루퍼스는 발코니에 다리를 걸쳐 넘어갈 준비를 하며 말했다.
“저녁까지 정리해서 보내 줄게. 그리고 오르테가 후작가도 뒤를 좀 파 볼게.”
“고마워, 루페.”
루퍼스는 그 말에 조금 묘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풀쩍 뛰어내렸다.
참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안토니아는 작게 흔들리다 멎는 나뭇가지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신이 내게 경고를 보냈으니, 나도 제대로 답해 주는 게 예의겠지요.’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또 자신에게 한 가지 도움을 주었다.
회귀 전의 사실이, 그리고 받았던 호의가 제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웠으니까.
* * *
“이야기는 잘했나?”
“헉.”
나무를 타고 풀쩍 내려온 루퍼스는 내려오자마자 마주친 인물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대공저는 아주 넓었다.
출입하는 하인들 틈에 섞여 들어온 것도 무난했고, 기사들의 눈을 속이는 것도 간단했다.
그런데 하필 안토니아가 있을 방에 들어갈 때만 어쩐지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별 소란이 없어서 기분 탓이겠거니 했는데.
루퍼스는 일단 납작 엎드리기로 했다.
대공이 자신을 베어 버린다고 해도 사실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부디 무례를-.”
“나 말곤 눈치챈 놈들도 없으니 상관없어.”
그러나 리카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대범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어쩐지 기분은 나쁜 모양이었지만.
‘……왠지 대공저 기사들에게 미안하게 됐네.’
대공이 눈으로 ‘쓸모없는 놈들’ 하고 욕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보다, 백작은 괜찮은가?”
“그렇습니다.”
“흠.”
리카르도의 자안이 자신을 깊게 꿰뚫어 보는 듯했다.
“백작이 뭘 하려 하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리카르도의 그 말에 루퍼스는 문득 생각했다.
‘안토니아 아가씨가 일을 벌이면 이 사람에게도 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클 텐데.’
그렇다면 이쪽에도 최소한의 정보를 알려 주는 게 나은 걸까.
하지만 좀 못마땅했다.
‘이 사람 때문에 안토니아가 더 주목받았잖아.’
무도회 때도 그렇고 그 뒤의 유글란스 백작 건도 그가 엮인 바람에 황태자가 더 유심히 본 거나 다름없었다.
‘뭐, 나름대로 아가씨를 위한 연막은 쳐 준 것도 이 사람이긴 하지만.’
루퍼스는 자신의 무례를 머릿속에서 싹 지우고 정보상으로서의 뻔뻔한 얼굴을 하고서 리카르도를 향해 말했다.
“저는 상인입니다, 대공 전하.”
“그러니 값을 치르라?”
“네.”
“그대는 세르히 백작과 신뢰로 맺어진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리카르도의 눈이 확 못마땅해졌다.
루퍼스는 퍼뜩 깨달았다. 그가 조금 전까지 꽤나 유하게 자신을 대했단 사실을 말이다.
“그깟 돈 몇 푼에 팔아치울 정도란 소린가?”
그 반응에 오히려 루퍼스는 황당해졌다.
‘물어도 되냐고 물어본 사람이 누군데.’
이왕 뻔뻔하게 나간 것 더 뻔뻔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은 나름대로 못마땅한 것도 참고 안토니아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래도 말이라도 한 거였다.
“돈 몇 푼이라니요, 제가 얼마를 요구할 거라 생각하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원래는 그냥 적당히 정보를 넘겨줄 생각이었다.
그럼 분명 이 대공이 안토니아를 위해 움직여 주긴 하겠다 싶어서.
‘주목받게 한 대신 지금까지 도움 준 것도 사실이니까.’
리카르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동부, 세르히 백작령 근처에 최근에 사들인 남작령이 하나 있지.”
“네?”
“그걸로 모자란가?”
루퍼스는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야, 이 사람.’
자신은 지금 주거침입까지 감행했는데, 그걸 빌미로 삼지 않고 오히려 거래를 하겠다고?
그것도 겨우 제 누나의 피후견인을 위해서?!
심지어 진지하게 그걸로 모자랄 수도 있겠다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안토니아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루퍼스는 리카르도 트라체스에 대해 미친놈이라고 꼭 메모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 *
루퍼스가 돌아간 뒤, 낮쯤 이스베르가가 찾아와 안토니아를 억지로 눕혔다.
“조금이라도 자렴, 안토니아.”
“잠이 오질 않아요, 이스베르가 님.”
“네 마음을 이해한단다. 나도 어머니가 누워 계실 때 줄곧 그랬거든.”
“이스베르가 님…….”
안토니아는 너무도 고마워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로레나는 특별한 사람이지만, 얼핏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사용인 중 하나로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안토니아, 쉬는 것도 네가 할 일이야.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왜 그런지 알잖니?”
“……알아요.”
“그래, 착하지.”
이스베르가는 마치 자신의 어린 딸을 어르듯 안토니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조금이라도 자야 제때, 네 영리함을 쓸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네가 지금 깨닫지 못한 것을 알아낼지도 모르고.”
“깨닫지 못한 것이요?”
“문제가 홑겹일지 아니면 여러 겹일지는 들춰 봐야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니.”
안토니아는 이스베르가가 무언가 아는 것일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어린 딸이 있는 어머니라 그런 걸까, 그도 아니면 그간의 피로 누적과 어젯밤의 놀람으로 고단해서일까.
안토니아는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이스베르가는 안토니아가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걸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야, 네가 쉬는 사이 다른 사람들도 널 도울 준비를 해 주지.”
이스베르가는 안쓰럽게 안토니아를 한번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조심히 문을 닫고 방을 나서자, 바깥에서는 리카르도가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잠들었습니까?”
“그래, 너도 너무 안토니아에게만 매달려 있지 말렴.”
“알고 있습니다.”
“안토니아의 마음은 못 얻었다지만.”
정곡을 찌르는 이스베르가의 말에 리카르도의 입매가 딱딱해졌다.
이스베르가는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도 못할 그 미세한 움직임에 작게 웃으며 말했다.
“무얼 필요로 할지는 짐작할 테니까, 그렇지?”
리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퍼스에게서 정보도 얻었는데 추측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정말로 드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드비를 보내 재촉한 참입니다.”
“그래, 하긴 공작가에선 너만큼이나 드비가 빠르니까.”
급한 일에는 드비만 한 기사가 없었다.
“안토니아의 방은 내가 살필 테니, 너도 얼른 네 일을 하렴. 급한 일들이 쌓여 있잖니? 더 미루다간 폐하께서도 고개 내미실지 몰라.”
“알고 있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누님.”
“물론이란다. 오히려 안토니아의 일에 계속 네가 부탁하는 게 좀 싫은걸.”
이스베르가는 저리 가 버리라는 듯 리카르도에게 손짓했다.
그는 그 손짓에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안토니아가 잠든 방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결국 이스베르가가 어깨를 떠민 뒤에야 겨우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남작령이라니, 됐습니다. 오히려 그게 진짜로 안토니아 아가씨와 제 사이를 별것 아닌 거라고 치부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네요.’
루퍼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는 자신의 제안에 질렸다는 듯 거절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제작 발표회나 다른 귀족들 앞에서 보이던 깍듯한 모습도 날려 버렸다.
‘마치 안토니아의 형제처럼 굴었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세르히 백작님이 아니라 ‘안토니아 아가씨’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것도.
‘……나도 5년 전에는 그렇게 친근하게 그녀와 지냈는데.’
자신은 잃어버린 것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넘긴 자료가 모두 양질인 데다, 아직 공작가 정보부가 알아내지 못한 것까지 쓰여 있어 더 불쾌했다.
‘안토니아에게 유능한 인재가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자신은 안토니아와 특별한 유대가 있다는 듯 구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서재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서서 시종에게 일렀다.
“폐하께서 지시하신 것 모두 가지고 와.”
그리고 또 한 가지, 안토니아가 정말 위급할 때 늘 찾는 게 그 남자라는 것도.
리카르도는 펜을 부러트릴 듯 꽉 쥐면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자 애썼다.
안토니아의 곁을 되찾고 싶다면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걸 증명해 신뢰부터 쌓아야 했다.
‘대비도 필요해, 함부로 안토니아를 건들지 못하도록.’
수도엔 마물보다도 더 흉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으니까.
리카르도는 정말로, 안토니아에게 리샤르로서 나서는 순간이 볼썽사납길 바라지 않았다.
‘진심으로 반길 수 있기를.’
네 마음 속 추억을 망가트리지 않았으면 해.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참을 수 있었다.
* * *
저녁이 될 때까지도 로레나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도 오지 않았기에 안토니아는 그걸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4시간쯤 자고 눈을 뜨자, 공작가 하녀가 간단한 식사와 함께 루퍼스의 서류를 전해 주었다.
‘루페가 고생했겠네.’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였다.
충분히 잔 덕에 안토니아는 자기 전, 체크하지 못했던 한 가지를 떠올렸다.
‘역시.’
안토니아는 말하지 않아도 체크해 준 루퍼스를 마음으로나마 칭찬하며 문서를 들었다.
발렌타인의 강렬한 존재감 덕에 미처 체크하지 못한 것.
바로, 어째서 그녀가 자신에게 주목했느냐였다.
‘내가 눈에 띄게 굴었다고는 해도 예비 황태자비를 위협할 만한 짓은 하지 않았거든.’
자신은 황태자와 딱히 엮이지 않았는데. 굳이 얽혔다고 치자면 제레미야 쪽이 더 가까웠다.
아주 기분 나쁜 사실이었지만.
그것도 안토니아가 원해서도 아니고 제레미야가 멋대로 찾아온 거고 말이다.
‘쟈힘 폰스. 이 이름을 또 보게 되다니.’
어이가 없었다.
회귀 전 자신과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였던 사람과 대적하게 되었다면, 적어도 원래 나빴던 사람과는 무관계 정도로는 만들어 줘야 되는 것 아닐까?
‘그만큼 좋은 사람을 많이 얻긴 했지만.’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놀판트 남작은 오르테가 후작에 사정을 하러 갔었다.
그 날이 바로 로레나가 사고를 당하기 이틀 전.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전, 발렌타인 님은 황태자 궁에 방문했다가 쟈힘을 만났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번에도 또 이간질을 시작하셨겠다?’
참 교묘한 자였다.
그는 회귀 전에도 자신과 제레미야 사이를 갈라놓는 데 아주 톡톡한 활약을 했으니까.
처음에는 그가 꾸민 짓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쟈힘은 황태자가 제레미야에게 붙였을 정도로 교묘한 데가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구슬리거나 약점을 쥐어 일을 꾸미게 했다.
당연히 사고를 조사해도 약점이나 재물을 받은 자들이 쉽게 쟈힘이 시킨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었을 리가.
개중에는 자신이 나쁜 짓을 벌인다는 자각도 없이 이용만 당한 자들도 있었다.
덕분에 애꿎은 사람들도 많이 잘려나갔다.
‘뭐 대부분 작은아버지의 사람들이라 아주 아쉬웠던 건 아니었지만.’
쟈힘은 이번엔 참 대담하게도 발렌타인의 손을 빌렸다.
‘만났다는 것 외에는 제대로 된 증거도 없고 말이야.’
안토니아는 혀를 찼다.
애초에 놀판트 남작과 발렌타인 사이의 연결고리도 약했다.
놀판트 남작도 안토니아에게 원한이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깔끔하게 정리되어 나열된 여러 자료를 안토니아는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큰 한숨과 함께 결정했다.
‘우선은 놀판트 남작부터야.’
이번에 못 잘라 낸다면, 다음에 잘라 내면 된다.
다음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끌어들이면 된다.
급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미안하지만 쟈힘, 난 예전처럼 인심이 넉넉하지 못해서.’
갚을 빚을 보고도 못 본 척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 *
[세르히 백작가 집사 피습 사건의 범인은 놀판트 남작?!
- 린스올 상단의 파산으로 앙심을 품은 것일까!]
안토니아가 놀판트 남작을 고소한 뒤, 예상한 대로 기사가 났다.
그것도 중간쯤의 페이지에 그리 크지 않은 지면을 할애해서 말이다.
‘예상대로야.’
안토니아 본인이 피습당했다면 몰라도 피해자가 로레나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신경 써 주는 대공가분들이 특이한 거지.’
안토니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법정 안에 들어섰다.
이번 안토니아 고소에 대해, 대부분의 귀족은 과하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냥 배상금을 청구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맞아요, 죽은 것도 아니라는데. 역시 세르히 백작이 어리고 지방에서 와서 그런지 감정적이네요.’
‘놀판트 남작이 몹쓸 짓을 하긴 했지만,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될걸…….’
‘말은 아끼겠지만, 세르히 백작이 좀 다시 보이네요.’
안토니아는 이런 반응도 예상했다.
귀족들은 사용인들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신문이 생각보다 더 온건하게 반응하는 것에 가까웠다.
린스올 상단주 사건으로 인해, 신문사들이 아직도 안토니아의 평판을 모두 회복하지 못한 탓이었다.
당연히 마기나는 철저하게 배상금을 찾아 받고 있고 말이다.
당연히 화제성도 크지 않아 법정 내에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안토니아의 눈치를 보아 자리한 기자 몇몇과 놀판트 남작가의 사람들, 그리고 이스베르가와 세르히 백작가의 사용인 정도가 다라고 해야 할까.
좀 의외였던 건, 렘버트 자작 부인이 와 있었단 거였다.
그녀는 객석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어쩐지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자리를 떠나진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본래 이 정도의 사건은 대리인만 보내 참관하게 해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안토니아가 직접 자리한 건,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곧 들어온 재판관은 그저 의례적인 태도로 안토니아와 놀판트 남작에게서 사실을 확인했다.
놀판트 남작은 안토니아가 들어왔을 때부터 그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녀에게서 입막음을 제대로 당한 모양이지.’
하긴 여기서 발렌타인의 이름을 꺼내 봐야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할 테니까.
그러니까 안토니아는 그의 저울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놀판트 남작은 세르히 백작가의 집사를 계단에서 밀어 죽일 수도 있었단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이 이유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날 그곳에서 세르히 백작가 집사가 거래하리란 정보를 입수하고 가서 범행을 저질렀다.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지요?”
“네. 저, 정말입니다.”
놀판트 남작은 시종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장은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안토니아에게 다시 물었다.
“세르히 백작, 모든 혐의에 대해 놀판트 남작이 인정했는데 더 말할 게 있습니까?”
“네.”
“무엇입니까.”
안토니아는 준비된 서류를 재판장에게 건네며 또렷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날, 원래 마석 상인과 계약하기로 한 건 제 집사 로레나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대수로워하지 않던 재판장의 표정에 당황이 깃들었다.
놀판트 남작도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마, 말도 안 돼! 모함하지 마십시오! 세르히 백작!”
귀족이 사용인을 습격한 것과, 귀족이 그보다 높은 작위의 귀족을 습격하려는 건 완전히 다른 무게의 죄였다.
“모함이라니.”
안토니아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놀판트 남작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습니까, 놀판트 남작.”
“무, 무, 물론입니다!”
반면 놀판트 남작은 단순한 질문에도 불에 덴 듯 화들짝 반응했고 말이다.
당연히 이 대조적인 차이는 재판관에게도 확연히 보였다.
대수롭지 않다 생각해 이번 사건을 가벼이 여기던 재판관조차도 슬그머니 눈을 치켜뜨며 놀판트 남작에게 말했다.
“놀판트 남작, 그대는 이 자리에서 거짓된 말을 해선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정말로……!”
“정말로?”
놀판트 남작은 순간적으로 말을 멈칫했고 노련한 재판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재판관은 책상을 크게 ‘탕’ 하고 내려치며 그에게 말했다.
“정말로 무엇입니까! 거짓으로 이야기한 게 있다면 얼른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아, 아닙니다. 정말로 거짓말 같은 걸 하지 않았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놀판트 남작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안토니아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예상대로였어.’
아무리 루퍼스가 대단하다고 해도 실제로 발렌타인이 무얼 지시했는지까진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안토니아는 발렌타인의 성정을 알았기에, 확실치도 않은 사실로 그녀가 자신을 노렸을 가능성은 적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놀판트 남작이 며칠을 두고 사건을 일으킨 것도 그 때문이었을 터였다.
발렌타인이 알아내 준 안토니아의 동선을 그가 쫓아다닌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작 범행을 저지른 건 안토니아가 다른 일로 바빠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그러니까 오르테가 후작 영애가 내가 아닌 내 하녀 중 하나를 손보라고 한 거란 추측이 가능하지.’
그런 예상외의 사건만으로도 수도에 익숙지 않은 지방 귀족, 특히 어린 귀족들은 겁을 먹고 영지에 틀어박히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다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번 사건의 범인은 놀판트 남작이었다.
앙심을 품은 대상이 안토니아인데 고작 로레나에게 복수를 한다고?
남작 본인이 린스올 상단주가 구속당한 탓에 파산할 지경이라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증언하지 않았는가.
‘물론 실제로는 자발적인 게 아니라 시킨 사람이 있지만.’
재판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발렌타인에 대한 두려움에 더해 억울함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짜 원흉이 있다고 말은 할 수 없는 처지고 말이야.’
그게 이번 재판에서 놀판트 남작의 발목을 콱 잡아 버릴 것이다.
재판관은 안토니아가 내민 증거를 훑어보더니 노기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
“놀판트 남작, 위증 또한 죄입니다!”
“네?! 저, 저는……!”
“그대가 며칠이나 세르히 백작을 미행했다는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당일 마석상과의 약속은 인적이 상대적으로 드문 상점가 구석에서 이루어졌지요, 이건!”
탕-! 하고 재판관은 한 번 더 책상을 내려치며 말했다.
“그대가 세르히 백작을 노리고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게다가 남작은 이 자리에서 분명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판관은 한 번 숨을 들이마시더니, 극적인 타이밍을 재듯 입을 열었다.
“세르히 백작가 집사가 보여 ‘충동적’으로 밀었다고 말입니다!”
“그, 그건…….”
남작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분명 발렌타인이 조언한 거겠지.’
충동적으로 행동한 거라고 하면 고의성이 없음을 상대적으로 참작해 주어 형이 가벼워지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발렌타인의 위압감과 자신의 억울함으로 흔들린 탓에 참으로 간단히도 스스로 구덩이에 빠져 버렸다.
“이래도 계속 발뺌할 생각입니까, 놀판트 남작!”
“하, 하지만……. 저는 정말로 세르히 백작을 노린 건 아닙니다. 집사가, 집사가 혼자 있길 노려서 그날…….”
그는 어물어물하며 어떻게든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가 재판관의 화를 돋우었다.
“집사가 혼자 있길 노렸다고요?! 제가 듣기에는 아귀가 맞지 않는 소리 같습니다, 놀판트 남작!”
“네? 하, 하지만 정말로……!”
“그대는 린스올 상단주가 세르히 백작 때문에 파산하였다고 생각해 원한을 품었다고 했습니다.”
재판장은 갑갑한 듯 책상을 통통통 두들겼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백작가 집사가 혼자 있기를 노렸다고 하는 겁니까? 어떻게 들어도 그대가 죗값을 적게 받으려 둘러대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 그건…….”
안토니아는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 이제 놀판트 남작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오르테가 후작가의 보복이냐, 그도 아니면 자신의 무거운 형벌이냐를 말이다.
물론 안토니아는 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보통은 정해지지 않은 게 무서운 법이니까.’
법망의 안에서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해진 형벌만을 받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는 귀족이고 실제로 다친 건 로레나이니, 가혹한 형벌까지 받게 되진 않을 테고.
그러나 오르테가 후작가의 보복은 달랐다.
‘그러니까 아마.’
안토니아는 씁쓸하게 혀를 차며 놀판트 남작의 말을 기다렸다.
망설이던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겨우겨우 입을 뗐다.
“모두…… 모두……. 재판장님의 말이 맞습니다…….”
스스로 모두 뒤집어쓰는 방향으로 말이다.
‘조금 불쌍하긴 해, 하지만 동정하진 않을 거야.’
모두 그가 선택한 결과였으니까.
발렌타인의 비수가 되어 로레나를 공격한 것도, 죄를 뒤집어쓰기로 한 것도 모두.
재판장은 대로하며 그에게 선고했다.
“세르히 백작 살해 미수와 위증한 죄로 놀판트 남작에게 5년의 노역, 10년이 징역형과 벌금 50골드를 선고한다!”
“네?!”
“지금 감히 선고에 불복하려는 것이오?”
재판관의 말에 놀판트 남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봐야 추후 항소 시 형만 늘어날 가능성이 컸으니까.
* * *
남작은 초조한 듯 입술만 짓씹으며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판관은 곧 폐정을 선언했고 놀판트 남작은 기사들에 의해 끌려갔다.
아마도 그는 항소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했단 걸 들키지 않으려고 한 증거인멸 때문에 항소하더라도 내게 반박할 증거가 없다는 걸 곧 깨닫게 될 테니까.’
안토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르테가 후작 영애, 당신도 그냥 넘기진 않을 거예요.’
물론 그 뒤에서 수작질을 걸었던 쟈힘 또한.
‘그들에게 갚아 주는 걸 선택하면 분명 더는 조용히 세르히 백작으로서만 살긴 어려워지겠지.’
그래도 굽히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숙이면 그 뒤에는 더한 강압이 그녀를 기다릴 테니까.
그렇기에 안토니아는 한 번 더 다짐했다.
이번 삶에서는 물러서지 않고 싸워서 자신의 길을 쟁취하겠다고.
‘로레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분명 깨어나서 자신 때문이라고 탓할지도 모르는 그녀를 위해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모두 자신의 선택이고 결정이었다.
안토니아는 주먹을 꽉 쥐며 재판장을 나왔다.
* * *
[놀판트 남작, 사실은 세르히 백작을 노렸다!]
[빗나간 원망! 세르히 백작 살해를 계획했다.]
로레나를 습격했을 때보다는 앞면에 조금 더 큰 지면을 할애해 써 내려간 기사들이 실렸다.
아직까지도 안토니아와 크롬프트 상단에 빚이 있는 신문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안토니아를 철저한 피해자로 그렸다.
‘마치 신문만 보면 놀판트 남작은 천하의 무능한 인간에 나쁜 놈으로만 보이네.’
신문사들은 안토니아가 아직 어린 데다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위협을 당한 거라며 크게 떠들어 댔다.
그들은 고작 남작이 백작을 우습게 보았다며 그를 나쁜 놈으로 보았다.
‘뭐, 덕분에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던 사람들의 말도 싹 가라앉았지만.’
물론 거기엔 셀린 렘버트의 뛰어난 작문 실력도 한몫했다.
그녀는 재판장에서의 내용을 한편의 극처럼 풀어 썼다.
[……전략…… 그녀는 시종 침착했다. 늘 그녀의 곁을 지켜 주던 자들이 아무도 없었음에도 세르히 백작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중략…….
모든 판결이 났을 때, 세르히 백작은 승자의 기쁨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의연히 결과를 바라보았을 뿐.
그날 재판장에서 나는 어린 맹수를 보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특유의 비유 가득한 문장으로 안토니아의 모습을 표현했고, 그건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안토니아가 놀판트 남작을 고소했을 때, 사소한 것에 신경 쓴다고 하던 귀족들조차 모두 입을 다물었으니까.
아니, 아예 그런 말을 한 적 없다는 것처럼 위로 편지까지 보냈다.
안토니아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수도에 올라온 뒤, 내 평판이 도대체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한 건지.’
갓 상경했을 때는 동정의 대상으로 보았고 무도회 이후에는 접근해 볼 만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린스올 상단주의 모함이 있었을 때는 천하의 사기꾼으로 매도되었고 유글란스 백작의 발표회에서 억울함을 풀자 그들은 ‘역시’라며 안토니아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그리고 이번 로레나 사건에서 안토니아는 아랫사람을 감쌌다는 이유와 습격당했다는 사실로 위태로운 사람으로 취급당했다.
‘모두 수도 내에서 입지가 없기 때문이야.’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건 자신이었다.
지방 귀족에서 벗어날 생각 없는 부모 잃은 어린 백작.
그래서 루퍼스의 조언에 따라 돌아갈까 고려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원한 발렌타인이 제게 빚을 만들어 주지 않았는가.
안토니아는 책상 위에 펼쳐진 신문의 한 영역에 시선을 두었다.
[오르테가 후작 영애, 올해도 겨울을 맞아 자선 연주회를 연다.
……황태자 전하는 출석하지 않는 대신 격려 서신을 보냈다.]
자신이 눈에 띄는 한 누군가가 어깃장을 놓을 거라면.
‘내가 차라리 먼저 찻물을 끼얹겠어.’
안토니아는 곧장 펜을 움직였다.
수도 내 많은 사람에게 보낼 자선 행사 초대장이었다.
날짜는 다름 아닌 발렌타인의 자선 연주회가 열리는 날이었다.